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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로자 바나바(2)(행 9:26-30)
“존 슬로안”이라는 분이 쓴 “탁월한 헬퍼, 바나바”라는 글을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1930년대 필라델피아에는 부모가 아닌 할머니의 보호를 받으며 자라는 한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 소년은 대부분의 소년들이 관심을 가지는 일에 흥미를 느끼며 자랐지만, 교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한 사람이 그 소년에게 관심을 갖기 전까지는 말입니다. 발이 유난히 크고, 행동이 약간 어색했던 그 사람은, 소년에게 관심을 보이며, 신뢰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소년은 그 사람이 가르치는 교회학교로 가는 버스를 타기 시작했습니다.
그 사람이 보여준 친절에 마음이 이끌린 소년은, 그가 가르치는 내용에 점점 더 관심을 보이게 되었고, 처음에는 드문드문 참석하던 성경공부에, 점차 정기적으로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성경공부를 통해 믿음을 갖게 된 소년은, 자라서 신학교에 입학했고, 나중에는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 소년은 하워드 헨드릭스, 달라스 신학대학교에서 기독교 교육을 지도하는 탁월한 교수이자, 기독교 지도 센터의 의장이 된 인물입니다. 수많은 목사들과 기독교 단체의 사역자들은 자신이 평생 주님의 사역을 하며 살게 된 것이 그의 덕이라고 말합니다.
소년에 대한 한 사람의 관심과 사랑에 의하여,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가 탄생하였습니다.
여러분의 작은 관심과 사랑에 의하여, 누군가가 큰 인물이 될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왜 이 자리에 모였습니까? 무엇 때문에 모였습니까? 누구 때문에 모였습니까? 예수님 때문에 모였습니다.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예수님이 없다면, 우리는 여기 모일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예수를 알기 위하여 모였습니다. 예수를 믿기 때문에 모였습니다. 또한 예수를 믿어 보려고 모인 것입니다.
이 자리에 함께 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삶을 본받아 살기를 원하고, 예수님을 더욱 더 깊이 알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이 자리에 모인 줄 압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는 예수를 알기 원하면서도, 잘 알지 못하고, 따라서 주님을 사랑하기를 원하면서도, 제대로 사랑할 줄 모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모습에 낮아지려 하기보다는 높아지려 하는 모습이 더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사랑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을 받으려고 합니다. 누군가 나를 사랑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섬기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누군가 나를 섬겨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주님은 위로하려 오셨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위로받는 삶을 살고자 합니다. 누군가 내 곁에서 나를 위로해 주지 않으면 안됩니다. 격려자, 위로자의 삶을 살기 보다는 언제나 내가 삶의 중심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섬기는 삶을 살아야 하는데,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섬김 받는 삶을 살려고 합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다 내어주는 사랑을 할 때, 진정한 사랑을 알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모든 것을 다 내려놓고 낮아지는 삶을 살 때, 진정한 섬김이 무엇인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이란 사람은, “예수를 진정으로 알려면 내리막길을 체험해 보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주님이 말씀하시고 몸소 행하셨던 복음의 교훈은 내리막길에서 체험되고 깨달아지기 때문입니다. 꼭대기를 향하여 오르막길로만 전진하다 보면, 예수님이 보이지를 않습니다. 예수님이 좋아 하시는 자리는 높은 자리가 아닙니다. 낮은 자리를 좋아하십니다. 예수님이 좋아하신 일이 낮은 자리에서 섬기는 일이었기 때문에 높은 자리에서는 주님이 보이지를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마더 테레사 수녀’는 “허리를 굽히고 섬기는 사람에게는 위를 쳐다볼 시간이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주님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일수록, 스스로를 위한 시간이 없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그런 따뜻한 마음을 가진 ‘바나바’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람은 구브로 출신인데, 본명은 ‘요셉’이고, ‘바나바’는 별명입니다.
사도행전 4:36절 말씀입니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아멘.
“구브로”는 소아시아 근처에 있는 사이프러스라는 섬입니다. 당시, 이 도시는 아주 부유한 곳이었습니다. 광산이 있고, 무화과와 밀농사가 잘 되는 곳이고, 기름이 났고, 벌꿀의 산지였습니다. 그래서 “구브로 출신”이라고 하면, “부자”를 연상을 할 정도로 구브로는 풍성한 자원을 가지고 있던 도시였습니다.
‘바나바’는 출생지 구브로의 이런 배경으로 비추어 볼 때, 상당한 재산을 가진 사람으로 짐작이 갑니다. 그리고 오순절 성령강림 때에 성령의 영향으로 비교적 일찍 그리스도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래서 초대교회에 참석을 하고, 교회생활을 시작했을 것인데, 그러다가 별명을 하나 얻은 것이, 바로 본명보다 더 잘 알려진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라는 뜻은 “위로의 아들”이란 말입니다. “위로의 아들 바나바”
여러분! 별명이란 그 사람의 특징을 따라 지어주는 것입니다. 그러니 바나바가 어떤 사람이었다는 이야기입니까? 바나바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았다는 것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바나바는 낙심하고 지친 사람에게 새 힘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주님께서 바나바를 통해서 그렇게 역사하신 것입니다.
지난 주에 이어 위로자 바나바 두 번째 시간을 갖고자 합니다.
여러분! 위로자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주변에 있는 사람들을 어떻게 섬겼을까요?
첫째, 바나바는 아낌없이 주는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4:3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아멘.
‘바나바’는 하나님의 비전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자기에게 있던 것들을 아무 조건없이 내놓았습니다. 그의 아낌없는 헌신과 섬김은 교회에 커다란 격려와 용기와 위로와 힘이 되었고, 많은 사람들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습니다.
바나바는 자기에게 있던 밭을 팔아서, 그 값을 전부 다 사도들의 발 앞에 드렸습니다.
당시 초대 교회는 놀랍게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베드로가 설교하면, 오천명, 삼천명이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 예배드리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많아졌습니다. 사람들이 많이 모이다 보니, 문제가 생겼습니다. 어떤 문제가 생겼습니까? 계속해서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성도들 중에는 고아와 과부와 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이들이 적지 않게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에는 그들을 감당하기 위한 막대한 재원이 필요했고, 사도들이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를 놓고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마침 바나바가 자신의 전부를 내놓은 것입니다. 그러니 바나바의 이 헌신이 초대교회에 얼마나 큰 힘이 되었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을 위해 자신의 전부를 드릴 수 있는 사람! 이런 사람들이 바로 “헌신자”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선교사 ‘저드슨’이 대학을 거쳐, 신학교를 졸업하자, 보스턴시에 있는 중류층의 교회에서 “부목사로 와 달라”고 초빙을 했습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들은 모두 부러워했고, 가족들도 매우 기뻐했습니다.
그러나 ‘저드슨’은 고개를 흔들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해외선교에 쓰시려고 부르셨습니다. 내가 이곳에 남아서 일을 해도 주님의 일을 하는 것이지만, 그것은 부분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됩니다. 나는 주님께 전체로 순종하렵니다”
그는 결국 철통같은 불교의 나라 미얀마로 향했습니다. 가서 목숨을 바칠 각오로 선교에 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런 자세로 임했는데도, 처음의 한 사람을 전도하여 세례를 베푸는데, 무려 6년이 걸렸습니다.
그후 오랜 기간을 감옥에서 지내기도 했고, 죽음과 질병의 고비도 몇 번이나 넘겼습니다.
그러나 후일 ‘저드슨’의 거룩한 헌신은, 5만 명이라는 그리스도인을 미얀마 땅에 탄생시켰습니다. 그리고 전세계 성도들의 마음에 꺼지지 않는 선교의 횃불을 켜놓았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자신의 모든 것을 우리를 위해 주셨습니다. 마지막 피 한 방울까지도 아끼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주신 주님을 위해 무엇을 드릴 수 있는 것입니까?
하나님을 온전히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 주변에 있는 이웃을 사랑하며 섬길 수 있기를 바랍니다.
보이는 곳에서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나 사랑하며 섬길 수 있는 가슴 따뜻한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둘째, 바나바는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화해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26-27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아멘.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그리고 나서 곧바로 예수님을 증거합니다. 예수를 핍박하던 사람이 한 순간에 예수를 믿고, 예수를 증거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이 너무나 기뻐서, 사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과 아름다운 믿음의 교제를 나누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반응이 어땠습니까? 모두 두려워하기만 했습니다. 그가 제자된 것을 도무지 믿어주지 않았습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사울의 회심을 초대교회가 어떻게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그가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사도행전 9:1-2절 말씀입니다.
“사울이 주의 제자들에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가져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따르는 사람을 만나면 남녀를 막론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아멘.
사울은 예수 믿는 사람들을 찾아내 체포하려는 잔혹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습니까? 아마 “이것은 분명히 작전이야. 분명히 교회 안에 들어와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다음, 일거에 잡아 넣으려는 속셈일거야. 속지 말아야 돼” 하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사울이 그리스도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변화된 삶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았을 때, 누가 그를 믿어 줍니까? 모든 사람들은 믿어주지 않는데, 누가 사울을 믿어줍니까? 바나바였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데리고 사도들에게 갑니다. 사울 대신, 사울이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본 것과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던 것을 말하여 줍니다.
바나바는 지금 초대교회의 사도들과 교인들에게 바울의 신원보증을 서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들이여. 진짭니다. 내가 보증합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 그리스도인된 것이 사실입니다. 그는 변했고, 다메섹에서는 이미 복음을 증거했습니다.”
그래서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까?
28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사울이 제자들과 함께 있어 예루살렘에 출입하며” 아멘.
바나바의 보증을 통해서, 사울은 제자들과 함께 있을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으로 떳떳하고 담대하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 뿐입니까? 본격적으로,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이 됩니다. 사울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고, 복음을 위한 헌신적인 사역을 시작할 수 있었던 배후에는 그를 믿어주었던 사람, 그 안에 잠재되어 있던 위대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고 세워 주었던 사람 바나바가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런 바나바 같은 사람이 오늘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믿어주는 사람, 화해시켜 주는 사람이 필요합니다.
셋째, 바나바는 위로하며 격려하는 “힘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도행전 11:25-26절 말씀입니다. 함께 읽겠습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아멘.
스데반의 죽음과 함께, 예루살렘 교회에 큰 핍박이 일어납니다. 성도들은 곳곳으로 흩어져야만 했습니다. 그리고 흩어진 그곳에서, 성도들은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도들은 가는데 마다, 복음을 전했습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이 핍박으로 인해, 처음으로 문화를 뛰어넘어, 헬라인에게도 복음을 전하는 노력들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더니 급기야 안디옥에서 주목할 만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사도행전 11:21절 말씀을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고 했습니다.
안디옥에서 심상치 않은 부흥의 징조가 일어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가 이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에 보냅니다. 성도들을 돌보고 전도를 지속하기 위해서 지도자를 파송한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요즘 말로 바나바가 안디옥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고, 바나바로 인해, 교회는 점점 더 부흥했습니다.
그때 바나바가 아주 특별한 모습을 보여 줍니다.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로 간 것입니다. 사울은 예루살렘에서 열심히 복음을 전하다가, 사람들이 자기를 잡아 죽이려고 하자, 초대교회 형제들의 도움으로, 다소로 피신하여, 그곳에 은둔해 있었습니다.
꿈과 열정을 억누른 채, 숨어 지내야 했던 사울의 심정이 그동안 어떠했겠습니까? 그때 바나바가 사울을 찾아간 것입니다. 잔뜩 의기소침해 있을 때에, 자기를 찾아 주었으니, 사울의 입장에 얼마나 반가웠겠습니까?
바나바는 따뜻한 손을 내밀어, 사울을 다시 일으켜 세워 줍니다. 그리고 1년 동안을 함께 동역을 합니다. 요즘말로 하면 “팀사역”을 한 것입니다. 바나바는 사울이 가지고 있었던 열정을 마음껏 불사를 수 있도록 도와 줍니다.
여러분! 이렇게 훗날 바울로 등장하는 사울의 목회를 있게 한 것이 바나바입니다. 바나바의 따뜻함이었습니다.
홀로 버려진 사람, 실의에 빠진 채 절망감에 빠져 버린 사람들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늘도 먼저 찾아가서 내미는 따뜻한 손길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따듯한 손길 하나 때문에 그들이 힘을 낼 수 있습니다. 포기한 인생에 대해 다시금 도전의 용기를 얻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바나바처럼 위로하며, 격려함으로 새 힘을 줄 수 있는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넷째, 바나바는 남의 잘됨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주님을 만난 사울이 사도들과 교제하기를 원했을 때, 사울을 의심하며 불안해하던 사도들에게, 사울을 보증하며 소개했고, 바나바의 도움으로 사울은 예루살렘 교회를 출입하며, 한 사람의 성도로서 떳떳하고 당당한 교회생활을 시작했습니다. 또 안디옥에서도 바나바는 사울에게 영적인 자리를 내 주었습니다.
그뒤로 사울의 이름은 바울로 바뀌어집니다. 바나바의 도움이 있었기에 사울에서 바울로 바뀔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바울의 사역은 날마다 확대되었고, 그만큼 바울의 영향력도 커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바나바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나중된 자가 먼저 될 때의 기분, 사촌이 땅을 사면, 내 배가 아프다는데, 바나바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보통 사람 같으면, 싫어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바나바는 오히려 기뻐합니다. 자기를 앞서 가는 바울을 오히려 도우면서 동역합니다.
여러분! 아마도 ‘바나바’가 아니었다면 우리는 기독교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바울을 잃어 버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라는 큰 그림 속에서, 자신을 기꺼이 내어줄 줄 알았던 바나바가 있었기에, 자기가 세워준 바울이 위대한 지도자로 부상하는 모습을 보면서, 무대 뒤로 겸손히 숨을 줄 알았던 바나바가 있었기에, 바울은 존재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바울이 전한 복음이, 역사를 이어져 내려와 우리에게 전해졌으므로, 오늘날의 우리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의 바나바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금 이 시대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필요한데, 우리 중에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누굽니까? 우리 중 누가 힘써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되어질 것입니까?
저나 여러분이나 누구라도 바나바와 같은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이 본을 보이셨고, 바나바가 뒤를 이었고, 또 그 뒤를 바울이 뒤를 이었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구름같은 허다한 믿음의 선배들이 그 뒤를 이어왔습니다.
여러분!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바나바는 아낌없이 주는 “베푸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관계를 회복시켜 주는 “화해시키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위로하며 격려하는 “힘을 주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나바는 남의 잘됨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용의 사람”이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나바가 되십시오. 아낌없이 나누며, 섬기며, 베푸는 사람이 되십시오. 화해의 사람이 되십시오. 위로하며 격려함으로 새 힘을 주십시오. 남의 잘됨을 기뻐하고 좋아하는 관용의 사람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사랑의 주님,
이제는 위로받기 보다는 위로하게 하소서.
이제는 사랑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