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양 서탑교회(西塔敎會)의 오애은(吳愛恩) 목사님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영원한 안식에 드셨습니다.
2월 24일 오후 3시 40분, 향년 91세.
오 목사님의 부음을 받고, 2007년 여름에 나눴던 대화가 먼저 떠올랐습니다. 다렌(大連)의 사하구구(沙河口區) 흥공가(興工街)조선족교회 입당예배에서 만나 뵈었을 때, 건강은 괜찮으시냐고 여쭸더니 “당(糖)이 많이 나와요.” 하셨습니다.
짧은 한마디였지만, 자기의 어려운 일은 좀처럼 입밖에 내지 않으시는 분인데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을 들으니 많이 염려가 되었습니다.
그 뒤 2010년에 선양의 교역자들과 함께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잘 다녀오셨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반가워했는데, 작년 6월에 서탑교회에 들렸을 때 오 목사님을 뵈려했더니 수위가 “오랫동안 못 나오고 계세요. 늘 누워있어요.”하기에 염려하는 마음으로 돌아 나온 일이 있었습니다.
회오리바람 속에서 흔들림없이
오 목사님은 중국 조선족 성도들의 어머니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중국 개방 이후 동북지역의 교회들, 나아가서는 중국교회를 이끈 지도자들 가운데 한분이었습니다.
오 목사님은 중국기독교협회 제3기와 4기 부회장을 지내셨습니다.
그리고 선양시 기독교삼자애국운동위원회 제8기 주석과 선양 기독교협회 3기 회장의 책임도 맡으셨습니다.
중국의 기독교와 관계된 각종 문건에는 오 목사님의 존함이 빠지는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 목사님은 중국 정치인민협상회의(정협)의 7기와 8기 위원도 역임하셨습니다.
지금은 많이 덜 해졌습니다만, 예전에는 공인교회의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참다운 지도자이냐?’는 시비가 붙는 일이 많았는데, 오 목사님에 대해서는 그런 일이 별로 없었습니다.
오 목사님이 일본의 통치와 해방 후의 혼란, 그리고 저 무서운 문화대혁명의 회오리바람 가운데에서 흔들림없이 믿음의 길을 걸어온 것이 잘 알려졌기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오 목사의 집안은 기독교가 매우 왕성해서 ‘기독교왕국’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평안북도 선천(宣川)의 신부면(新府面) 용건동(龍建洞)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그의 집안은 독립운동가의 가문이었습니다.
아버지 오정준(吳貞俊)은 미북장로회가 선천에 세운 미동(美東)병원의 의사이었는데, 독립운동을 하다가 일경의 체포를 피해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오빠 두 분도 독립운동을 하다가 희생되었고, 큰 언니 역시 잘 알려진 독립운동가였습니다.
오 목사님은 1926년 9월 26일 중국에서 태어나 라이오닝성 청원(淸原)에서 소학교를 나왔고, 선양에서 중등교육을 받았습니다.
오 목사님이 ‘나는 14살부터 선양에서 지내면서 서탑교회에 출석했고, 평생 서탑교회를 떠나지 않았다.’고 말씀하신 일이 기억납니다.
오 목사님은 한 때는 소학교 교원생활을 하였습니다.
서탑교회는 일제강점기,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던 동포교회들을 대표하는 교회로서, 해방 당시 재적교인이 8백 명을 넘었고, 장로가 열두 분이었는데 1948년, 팔로군의 선양 진주가 임박하자 대부분의 교인들은 선양을 떠나 한국으로 갔습니다.
오애은 목사님은 해방 직후, 이화여대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으나 길이 막혀 버렸습니다.
오 목사님은 1953년에 연경신학원에 입학하여 1957년에 졸업하고 선양으로 돌아와 교인들을 돌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얼마 남지 않은 교인들은 교회당에서 추방당하여, 이리 저리 옮겨 다니며 예배를 드리고 있었습니다.
문화대혁명이 시작된 1966년부터 중국이 개방정책을 취한 1979년까지 무려 13년 동안, 오 목사님은 ‘투쟁을 맞아’ ‘노동개조’를 받았습니다.
낮에는 중노동을 하고 밤에는 삿대질하는 주민들에게 둘러싸여 비판을 받는 생활을 십여 년 한 것입니다.
서탑교회에는 문화관 간판이 걸려 있었고, 2층은 무도장(舞蹈場)으로 쓰였는데, 한번은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을 때 건물이 무너지는 소리가 난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건물이 실제로 흔들렸다고 말하는 분들도 있었습니다.
놀란 사람들이 출입구 계단으로 몰려들다가 여럿이 굴러 떨어지고 다쳤고, 그 뒤로는 이상한 소문까지 돌아서 다시 춤을 추러 찾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서탑교회는 이렇게해서 비어있는 상태로 있다가(고무공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하는 분도 있습니다.) 1980년 9월 12일에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서탑교회는 한국의 예장통합측의 도움으로 6층 건물을 지어 1993년 여름에 봉헌하였습니다.
새 예배당을 지을 때 부지와 건축비 확보를 위해 옛 건물은 매각하거나 철거하는 일이 많은데, 서탑교회는 그렇게 하지 않고 옛 건물을 그대로 보존하였습니다.
‘이것은 잘한 일 가운데 잘 한 일’이라고 칭찬하는 분들이 많은데 저 역시 그 가운데 하나입니다.
얼마 전까지는 부채를 갚기 위해 옛 예배당을 여러 사람에게 임대해 주어, 예배당 벽에 각종 간판들이 지저분하게 걸려 있었는데 작년에 가보니 간판들이 다 사라지고 말끔하게 정리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서탑교회 옛 예배당은 ‘심양시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되어 있는데, 선양시의 문화재이기에 앞서서 한국교회의 값진 문화재입니다.
오 목사님은 1981년 4월, 부활절에 서탑교회에서, 중국교회의 여자목사 제1기로 안수를 받았습니다.
오 목사님은 서탑교회를 인도하면서 한글성경과 찬송가를 발행하는 일과 동북신학원 안에 조선족반을 두어 조선족 교역자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이 조선족반을 졸업하고 목사 안수를 받은 분이 120명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런 저런 추억들
저는 일찍부터 오애은 목사님을 직접, 간접으로 대할 수 있었습니다.
아마 국내에서 제일 먼저 오 목사님과 연결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신학교에 다닐 때 설교학 교수가 서탑교회를 마지막으로 담임하셨던 백리언(白理彦) 목사님이셨는데 이 분이 서탑교회 이야기를 자주하셔서 그 이름이 마음에 새겨져 있었습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선교방송기관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1970년대말부터 중국 동포들의 편지가 그야말로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중국동포들의 생활모습, 특히 신앙생활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서 홍콩 청년 둘을 중국에 보낸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가데스 계획’이라고 불렀습니다.
가데스는 모세가 열두 정탐꾼을 파견한 곳입니다.
중국은 그 때까지도 죽의 장막에 가려져 있는 나라였습니다.
그때 중국동포들에 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이 가데스 계획은 국가에서도 많은 관심을 가졌습니다.
홍콩 청년들에게 여러 가지를 부탁하면서 ‘선양에 서탑교회라는 교회가 있었는데 만일 교회당이 남아 있다면 사진을 꼭 찍어 오라.’고 했습니다.
이들은 건물뿐만 아니라 교인들의 모습도 찍어 가지고 왔습니다.
이렇게 해서 ‘서탑교회가 살아있다.’라는 사실이 국내에 알려졌습니다.
교인들의 사진 가운데 ‘아, 이 분이 지도자로구나!’ 금방 알 수 있는 여자분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오 목사님이었습니다.
그때부터 조심스러운 연결이 이뤄졌습니다.
그때 아세아방송에서 중국에 있는 이산가족을 찾는 방송을 많이 하였는데, 한번은 서탑교회 출신인 장로님이 선양에 두고 온 누이동생을 찾는 방송을 하였습니다.
오 목사님이 이 방송을 듣고 당사자에게 알려주어 연결이 된 일이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을 처음 대면한 것은 1989년 겨울이었습니다.
한중수고 이전인 그 때는 중국에 가려면 교육을 이수하고 특정국가 방문 허가를 받아야 했습니다. 홍콩에 가서 여행사를 통해 고액을 지불하고 별지 비자를 받고, 베이징에서 비행기를 갈아타는 복잡한 노정을 거쳐서 선양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가보니 저녁상을 차려놓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비행기에서 식사를 했지만 아무말 하지 않고 수저를 들었습니다.
오애은 목사님은 과묵한 분이었습니다.
말씨도 조용하였습니다.
대신 그 분의 말은 힘이 있었고 아주 무겁게 여겨졌습니다.
제가 일하고 있던 방송사에서 북한에 있었던 교회들을 소개하는 “북녘기행”이라는 프로그램을 오래 방송한 일이 있었는데, 그 무렵에 목사님을 뵈었더니 “그거 참 재미 있더군요. 동북에 있었던 교회들은 왜 소개 안하나요?” 한마디 하셨습니다.
지나가는 말로 여길 수도 있었지만 오 목사님의 말씀이었기에, 얼른 계획을 수정해서 중국 동북지역에 있었던 교회들까지 소개한 일이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은 또 한없이 겸손하였습니다.
권위의식 같은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오 목사님을 대하면서 ‘한국의, 이른바 대형교회 목사들이 좀 배웠으면 좋겠다.’하는 생각을 가진 일이 가끔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은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힘써 도왔습니다.
오 목사님의 소천소식을 듣고, 아주 어려울 때 오 목사님의 도움을 받은 것이 계기가 되어 예수를 믿고 목사가 된 K목사에게 문자메시지로 이 사실을 알렸더니, “선양에서 전화가 와서 알고 있습니다. 저 지금 선양으로 가는 길입니다.” 하는 답이 왔습니다.
5년 전 가을의 일이었습니다.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오는 길에 서탑교회의 예배에 참석했습니다. 조금 늦게 들어가서 자리를 찾다가 사회를 보시던 오 목사님과 눈이 마주쳤는데, 목례를 하니까 “저기, 우리가 잘 아는 분이 오셨네. 이따가 설교하기 전에 올라와서 인사하세요. 나는 간단히 할 테니까…. 뭐 괜찮겠지.”하셨습니다.
중국에서는 사전에 허가를 받지 않았을 때는 공식적인 설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에, 이렇게 ‘인사’라는 이름을 빌리는 일이 많습니다.
“뭐, 괜찮겠지.”라는 말은 ‘알아서 조심해라’라는 뜻입니다.
저는 그 때 목사님이 보여준 신뢰에 많이 감격하였습니다.
생각해보니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습니다.
오 목사님의 소천 소식을 듣고 그 분에 대해 여러 생각을 하는 가운데 중국교회가 지난 몇 십 년 겪은 일들, 특히 어려웠던 일이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중국의 성도들이나 중국교회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 그런 일들을 잊고 그저 오늘의 편안함에 푹 빠져 있는 것이 아닌가, 반성하는 마음도 있었습니다.
오 목사님은 틀림없이 하늘나라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상급을 받고 계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오 목사님이 겪은 어려움을 위로하고 많은 수고를 치하하고 계실 것입니다.
저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확실하게 믿습니다.
중국의 젊은 세대들 가운데 기독교가 퍼져나가고 있다는 소식이 들리고 있습니다.
또 새학기가 시작되는 때입니다.
이번 호는 “사계절 꽃 피우는 중국 캠퍼스 선교”라는 기획물을 마련했습니다.
이 기획물을마련하면서 중국의 캠퍼스에, 그리고 한국에 와 있는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 복음의 꽃이 만개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다시 한 번 부풀어 오르는 것을 느낍니다.
지금 선교회는 본부 제주 이전 준비로 분주합니다.
이삿짐을 나르는데 하루로는 불가능하고 이틀이 걸린다고 합니다.
어문선교회의 제주 이전이 어문선교가 도약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아니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중국을 주께로」도 더욱 알찬 내용을 갖추고, 더욱 힘을 얻어 중국을 주님께로 끌고 가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