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대구시인협회 원문보기 글쓴이: 권영호
| |
‘절권도는 우리에게 뒤돌아볼 것을 가르치지 않는다. 길이 정해졌으면 앞으로 나아갈 뿐이다’(이소룡)
그의 절권도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단순한 무도가 아니라 오직 싸움에 이기기 위해 창조된 것이라는 이유에서였다. 싸움은 이겨야 하는 것이다. 더구나 내가 먼저 건 싸움도 아니다. 그렇다면 더더구나 그렇다.
세상이 싸움을 걸어왔다.
말죽거리. 한강을 건너기 전 마지막으로 쉬며 말에게 죽을 끓여 먹이는 곳. 개발붐이 불면서 묘한 흥분감에 휩싸여 있다.
‘인생의 일할을 나는 학교에서 배웠지/ 아마 그랬을 거야/ 매 맞고 침묵하는 법과/ 시기와 질투를 키우는 법/ 그리고 타인과 나를 끊임없이 비교하는 법과/ 경멸하는 자를/ 짐짓 존경하는 법/ 그 중에서도 내가 살아가는 데/ 가장 도움을 준 것은/ 그 많은 법들 앞에 내 상상력을/ 최대한 굴복시키는 법’(유하 ‘학교에서 배운 것’)
학교는 세상의 축소판이다.
일괄 유니폼을 입혀, 돈과 권력 앞에 굴복하는 법을 가르치고 있다. 승복하지 않으면 모두 잉여인간이 된다. 꿈도 순수성도 부정된다. 사회가 필요한 고깃덩이를 키우는 육숫간, 군사정권의 폭압이 학교라는 이름으로 더욱 간교하게 작용한다.
이소룡은 이곳을 벗어날 수 있는 최고의 판타지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몸, 신기에 가까운 쌍절곤의 파워, 거기에 분노와 함께 절망의 슬픔과 연민이 한껏 밴 이소룡의 눈빛은 서러울 정도로 처연하다. 세상의 소리라고 믿기 어려운 ‘아뵤~’라는 기합은 폭압을 깨부수는 또 하나의 주문이었다.
사도의 무술. 기존의 형식이 완전히 해체되는 자유를 이소룡에게서 느끼게 된다. 그는 자유이자, 정의이며 또한 카타르시스였다. 상상만으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탈출구였다.
현수는 이소룡으로 마스터베이션을 하던 그 당시 우리들의 모습이다. 학교를 떠나면서 “대한민국 학교 X까라 그래!”라는 절규는 이소룡의 괴음과 닮아 있어 더욱 슬프게 다가온다.
시인이자 소설가인 우광훈은 ‘경신고 앞 삼성쉐르빌’이란 시로 개발붐 한중간에 있던 말죽거리를 대구로 옮겨냈다.
침대에 맞춰 육신을 잘라내던 프로크루스테스의 폭압, 그리고 부동산의 개발논리를 녹여 넣었다. 그는 “그 시대의 우리들은 그냥 ‘여분의 존재’(사르트르의 표현을 빌리자면)로서 그냥, 잘, 견뎌냈던 것 뿐”이라고 자조한다. 6월 항쟁의 매캐한 최루가스를 맡았지만, 군사독재를 타도하기는커녕 스스로조차 구원할 수 없었다고 절망한다. 생명의 본질은 자유이고, 자유의 본질은 반항인데도 말이다.
화가 김종준은 바둑판처럼 편을 가르는 복도의 유리창 속에 영화의 이미지들을 그려 넣었다. 아련한, 그러나 떠올리기 싫은 기억의 조각을 창 속에 모자이크했다. 은주(한가인) 앞에 그려진 붉은 장미는 그래도 장밋빛 미래를 꿈꾸는 인간의 본성이다. 진추하와 아바의 달콤한 노래가 떠올려진다.
참으로 홀연히 떠난 이소룡과 그 뒤를 이은 성룡. 영화는 ‘취권’의 극장 간판 앞에서 이제는 성룡의 시대임을 예고하면서 끝이 난다. 이소룡과 성룡의 이미지는 대한민국의 시대와 절묘하게 맞아떨어진다. 너무 강하면 부러지는 법. 성룡은 부드러움과 유머 속에 파워를 감추고 있는 새 시대의 아이콘이다.
시지프스의 형벌과 같은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조금은 섭섭하지만 절망하고 포기하는 것, 성룡세대의 특징이다. 더 이상의 잔혹사는 없다. 다만 참을 뿐이다. 섭씨 100도의 뜨거운 물에서 참고 견디는 개구리, 그것이 더 잔혹한지도 모르겠다.
김중기기자 filmtong@msnet.co.kr
▨ 말죽거리 잔혹사(2004)
감독:유하
출연:권상우, 이정진, 한가인
러닝타임:116분
줄거리:1978년 말죽거리의 봄. 현수(권상우)는 강남의 정문고로 전학 온다. 정문고는 선생 폭력 외에도 학생들 간 세력다툼으로 악명 높은 문제 학교. 모범생 현수와 학교 ‘짱’인 우식(이정진)은 극과 극이면서 친구가 된다. 둘은 하굣길 버스 안에서 올리비아 핫세를 꼭 닮은 은주(한가인)를 보고 동시에 반하기도 한다. 학교 짱 자리를 놓고 선도부장 종훈과 한 판 붙은 우식은 싸움에서 패하자 학교를 떠나고, 우식 없는 틈을 탄 종훈의 괴롭힘, 열반으로의 강등, 더해가는 선생들의 폭력, 게다가 은주마저 결국 우식을 택하자 현수의 분노는 폭발한다. 현수는 밤새 연습한 쌍절곤을 들고 학교 옥상으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