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서점을 들렀다. 신간 매대에는 같은 이름의 소설이 여러 권이 널려 있었다. 아마도 요즈음 잘 찾는 책인 모양이었다. 황보름의 『어서 오세요, 휴남동 서점입니다』라는 책이었다. 다른 책에 비해 소설에는 선뜻 손을 뻗지 않았으므로 그저 곁눈으로 흘려보며 지나쳤다.
다시 늘 찾는 인문학 서적 코너를 한참 돌아보다가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게 되었고 결국은 황보름의 책을 들어올렸다. 한동안 묵직한 책을 읽느라 눈이 피곤했으므로 조금은 눈의 피로를 쉬어가자는 의미에서 결국은 책을 집어들었다.
읽기 시작하자 얼마 안 가 조금은 후회가 되었다. 내 나이가 주택가 골목길에 매달린 소소한 서점 이야기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주는 이혼을 하고 바로 휴남동 주택가에 서점을 열었다. 서점에서는 커피를 함께 팔았다. 혼자 북 치고 장구 치는 운영이 시작되었다.
<이하의 사진자료는 빵콤마이다>
그녀가 서점을 차린 것은 어릴 적부터 소설을 좋아했던 탓이다. 그저 소일 삼아 조용히 책을 읽고 싶은 욕망에서 어릴 적부터 서점을 운영하겠다는 소망도 있었다. 서점은 동네 주민들이 오가며 기웃거리기도 하고 민철 엄마 같은 이는 자주 찾기도 했다.
영주는 서점과 관련된 다양한 정보를 인스타그램에 올린 덕분에 차츰 서점이 소문나고 마침내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았다. 그 바람에 바리스타가 한명 필요해서 공고를 내고 민준을 뽑았다. 하루 여덟 시간, 주5일 근무, 민준은 그 파격적인 조건에 어리둥절해하며 일을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점은 조금씩 동네 사랑방 같은 분위기를 띠어갔다. 말하자면 민철 엄마는 가정 문제든 뭐든 속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민철이가 사는 게 재미없다고 하더란 말에 너무 마음이 아파 아무 것도 하고 싶지 않다고. 열여덟 나이에 무기력증이라.
영주는 이럴 때 민철 엄마의 마음을 다독일 수 있는 만한 책을 생각해 본다. 서점은 영주의 오로지 취향으로 만들어진 것이므로 그게 가능할 리가 없다. 그러니 난감하다. 한 사람이 마음을 뻥 뚫어줄 책이 있기는 할까? 그래도 책을 권했고 며칠 후 민철 엄마는 고맙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린 시절 자기와 자기 엄마가 생각나더란다. 그러면서 펑펑 울었단다. 덕분에 자기 엄마를 생각하고 민철과의 관계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그러면서 영주는 좋은 책이란 어떤 책인지를 생각해 본다. 서점 운영은 그런 식이었다.
그러면서 휴남동 서점은 조금씩 자리를 잡아가고 마침내 동네 문화공간을 겸하고 있었다. 매달 둘째 주 수요일엔 북 토크를, 넷째 주 수요일엔 독서 모음을 진행한다. 사람들은 책이 좋아 모이고 그들로 인해 영주에게는 서점을 운영할 기운을 얻게 된다.
서점은 민철 엄마, 민철, 정서, 지미 등이 자주 들락거린다. 민철 엄마는 늘 민철 때문에 걱정이고, 민철은 공부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이 무기력했다. 그런 민철을 그의 엄마는 일주일에 한번 서점을 가도록 했다. 물론 영주와 사전에 모의를 한 후다.
정서는 서점의 분위기가 좋아 시간을 보내려 오는 여자다. 그저 앉아있기가 미안해서 3시간마다 어김없이 커피 한 잔을 주문한다. 수세미를 만들고 뜨개질을 하며 호젓하게 시간을 죽이고 있다. 지미는 서점에 커피 재료를 공급하는 고티빈이라는 업체의 사장이다.
그녀는 서점 주인 영주와 점차 가까워져 지금은 거의 매일 퇴근 후에 만나 수다를 떤다. 그리고 그 수다에 정서도 끼어든다. 그들은 자주 맥주병을 앞에 놓고 그들의 과거 이야기를 하기도 하고 미래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그저 소소한 일상이다.
민준은 요즘 젊은이들의 초상인 듯하다. 그는 초등학교 때부터 대학을 마칠 때까지 그저 열심히 한 눈 팔지 않고 공부를 한 모범학생이었다. 그러나 졸업 후 다른 젊은이들처럼 취업을 하지 못했다. 좋은 대학만 가면 그 다음부터는 모든 것들이 술술 잘 풀릴 것이라는 주변의 기대나 시선과는 달리 그는 백수였다.
사람들은 모두 첫 단추가 중요하다고 했지만 아무도 그 다음 단추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민준은 열심히 그 다음 단추를 만들었지만 알고 보니 그 단추를 끼울 단추 구멍은 어디에도 없었다. 청년 취업률은 급격히 떨어지고 그나마 있던 단추 구멍조차 메워지고 있다.
서점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는 소시민들이 서로를 어루만지는 공간이 되었다. 정서는 계약직 일을 팽개치고 그곳에서 하루 종일 수세미를 만들거나 뜨개질을 한다. 그러다가 시간이 되면 요가로 마음을 다스리고 있었다.
지미는 결국 집을 겉도는 남편과 이혼을 결심한다. 영주가 서점을 열기 전에 이혼을 했던 것처럼 그녀도 그 길을 택한 것이다. 모두들 공동체적 삶보다는 내 삶이 우선이었다. 보람이라는 말도 매우 현실적이다. 지금이 좋으면 그것으로 보람 있는 것이다. 이른바 소확행이다.
그러니 꿈은 그저 허황되어 보였다. 꿈을 이루는 것이 바로 행복이라는 고대 철학자의 말은 그들 시각으로는 참으로 한심한 것이었다. 꿈을 이루는 것이 행복이라면 그건 순간적인 것이다. 그 다음은 어쩔 건데. 이런 식이다.
그러므로 커피는 내리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행복이고, 현재에 만족하는 것이 행복이다. 그럴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건 가치관의 차이일 것이다. 그 점은 저자도 말하고 있다. 만약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눈앞의 소소한 행복에 만족한다는 문명사적 발전은 없을 것이다.
물론 다른 한쪽으로는 끔찍한 전쟁도 없을 것이다. 세상이 모두 그렇기만 한다면 말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보라. 세상은 공평하지도 않고 나와 생각이 같지도 않다. 나의 소소한 행복은 어느 순간 누군가에 의해 흔적조차 없이 지워질 수도 있는 것이다.
꿈이 없는 삶은 불행하다. 꿈을 꾸지 않으며 현재에 만족하는 삶이 일그러졌을 때 감당하기 어렵다. 내 삶에 깊이 빠지다보면 세상 삶과 동떨어질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소확행이라는 것은 개나 고양이의 일상일 수도 있다. 마소의 일상일 수도 있고.
소설은 서점 주변의 모든 사람들은 서점으로 인해 하나로 결속되어 가고 서점은 짐짓 확장일로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 복닥거리는 사람들은 아마도 영주를 제외하고는 모두 그 자리에 정체되어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휴남동 서점으로 어서 오라는 것은 책장사로서는 충분히 할 수 있는 호객행위일 것이나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호구책 이상의 의미는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서점이 잘 되는 것이 서점 구성원 모두가 잘 되는 것이라는 말은 별로 믿고 싶지 않다.
서점 구성원 대부분은 직장생활에서 이미 실패를 맛보았거나 취업조차 못해본 사람들이다. 그런 그들이 최저임금을 겨우 넘기는 수준의 금액에 만족해야 한다면, 그것은 그들이 아주 게으르거나 그야말로 무기력한 사람들일 것이다. 내겐 이제 젊은 감각 따위는 없는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