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의사에 봉안된 신돌석 장군의 영정 |
조선 말기에 기울어가는 나라를 구하려고 일어선 의병들은 많지만 신돌석(申乭石. 1878~1098) 장군처럼 약관의 나이에 평민으로서 의병대장이 되어 활약한 예는 달리 찾아보기 어렵다. 신돌석 장군은 을사보호조약 다음 해인 1906년 의병을 일으켜 영해·영덕·평해에서부터 삼척·강릉·양양·원주·안동·영양·춘양 등 경북 동북부와 강원도 일대까지 신출귀몰하며 왜군에 저항했던 의병장이다. 평민 출신으로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켰으며 일본군에 큰타격을 주었다.
1848년생인 신돌석은 7대가 동지중추부사라는 높은 벼슬을 지냈던 가문의 후예이지만, 그 이후에는 벼슬을 한 이가 없어 당시에는 평민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어려서부터 명민함을 보여 양반자제만을 가르쳤던 육이당 이중립에게서 글을 배울 수 있었다. | |
1895년 명성왕후 시해 사건으로 각처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19세의 어린 나이로 영해에서 100여명을 이끌고 일어섰다. 이때 신돌석은 남한산성을 포기하고 남하한 김하락 의병장으 도와 중군장으로서 맹위를 떨쳤지만 김하락이 강물에 몸을 던져 순국하고 고종이 의병해산령을 내리자 이곳 영해의병도 해산되고 말았다.
그 뒤 신돌석은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지를 돌며 국권회복을 위해 동지를 규합하고 다녔다. 그러던 중 1905년에 의사조약의 소식이 전해지자 이듬해에 재차 기병했다. 1907년 이르러 군사3천을 거느린 그는 영양의 분파소와 군청을 불태우고, 영해에서는 일본군과 2시간 동안 교전을 벌이기도 하였다. |
충의사 | |
이강년과 함께 영주의 순흥을 공격하여 일제의 시설들을 모두 불태웠으며, 울진 장흥포에서는 일본 군선9척을 침몰시키고 간성의 일본군까지 간담을 서늘하게 하면서 ‘태백산 호랑이’라는 별칭을 얻을 만큼 활약했다. |
기념비 - 경상북도독립유공자선열유족회 의병대장신돌석장군기념사업화에서 건립 |
유허비 - 장군의 동생 신태범이 각처에서 모금하여 1948년에 건립 | |
그러나 일제가 신돌석의 처와 아들을 붙잡아 회유하는가 하면 의병 협조자들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토별의 방법을 강화해나가자, 의병활동은 점차 위축되었다. 1908년에 이르러 다른 의병장들이 순국하고 전세가 점차 불리해지자 신돌석은 11월에 후일을 기약하고 영해의병을 해산하였다. 신돌석은 이듬해 봄을 기약하고 영덕군 지품면 눌곡리에 있던 옛 부하이자 외가로 동생뻘 되는 김상렬·상태·상호 형제를 찾아가 은거했는데, 현상금에 눈이 먼 김씨 형제들이 준 독주를 마시고 30살의 젊은 나이에 도끼로 살해되고 말았다. |
|
기록관 외·내부 전경 |
1962년 장군의 유해가 국립묘지 유공자 묘역으로 이장되었다. 그리고 1995년 도곡리에 생가가 복원되고 1999년 장군의 혼이 어린 이 자리에 장군의 항일 정신을 길이 후대에 남기고 빛내기 위해 성역화 공원이 조성되고 그 기념관이 세워졌다. |
|
신돌석 장군 생가는 장군의 부친인 신석주가 1850년경에 건립하였다 한다. 생각는 초가집이었으나, 1940년경에 일본관헌들이 독립의지를 꺽기 위하여 정략적 차원에서 불태워 버려 소실되었다. 이후 1942년에 기와집으로 복원하였으나, 1995년 8월 19일에 신돌석 생가 정비 공사를 통해 현재 초가집으로 복원되었다. |
신돌석장군유적지관리소(충의사) -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산60-5 (054-730-6397)
신돌석장군생가 - 영덕군 축산면 도곡리 528-1번지 |
첫댓글 좋은자료 보고 갑니다 감사감
자주 오세요 채워 둘수 있도록 노력 하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