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에게는 기억이 전부다. 정체성 부여하며 지식 습득을 위한 토대가 된다. 기업에게도 기억은 같은 역할을 한다. 기업의 핵심가치나 문화를 규정해 주고 역량 구축을 위한 기반이 된다. 기업에게도 기억이 이처럼 중요하지만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많지 않다. 탐욕이 기업을 근시안적으로 만들어 기억을 없애고, 변화에 대한 강박증이 과거를 부정하게 하며, 보신주의가 실패 경험을 숨기게 하고, 시스템보다 사람에 의한 경영이 지식과 노하우의 전수를 막기 때문이다. 건망증이 심한 기업의 공통점은 경영의 시각이 근시안적인 반면,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경영을 보는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가능하면 장기적인 시각으로 경영을 바라본다. 그래서 그들은 과거의 소중한 경험을 잊지 않고 현실에 되살리고 있으며, 과거 경험을 기업의 프로세스나 제도에 반영하고 있다. 또 과거의 경험을 오늘의 현실에 맞게 재해석하여 활용하고, 필요한 경우에는 밖에서 보완이 되는 기억을 가져오기도 한다. 이처럼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고 과거의 소중한 경험을 오늘의 경영에 반영한다. 하지만 그들이 과거를 반추하는 것은 과거에 얽매이거나 안주하기 위함이 아니다. 과거를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더 낫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그들에게 경영은 과거와 미래의 대화다.
< 목 차 >
Ⅰ. 기억은 왜 중요한가 Ⅱ. 건망증 심한 기업이 나타나는 이유 Ⅲ. 기억력 좋은 기업의 특징 Ⅳ. 온고지신 (溫故知新)
Ⅰ. 기억은 왜 중요한가
처음 뇌출혈로 쓰러진 이후 기억이 심하게 손상되었다. 심지어 칫솔을 쓰는 법을 몰라서 솔 쪽을 잡고 이를 닦기도 했다. 그의 병세는 점점 심해졌는데, 상황이 좋을 때는 어린이용 이야기책을 읽고 산술 문제를 공책에다 연습하곤 했다. 하지만 때로는 폭력적으로 변해 물건을 집어 던지면서 의사들이 곁에 오지 못하게 했다. 가끔씩 정신이 돌아왔을 때는 한밤중에 소리를 내어 울기도 했다. 두 차례의 뇌출혈을 겪은 후, 그의 기억은 거의 사라졌다. 사망하기 전에 그가 완전히 할 수 있는 말은 ‘어머니’ 등 몇 개의 단어밖에 남지 않았다고 한다.
뇌출혈에 의한 반신마비보다 이러한 언어장애와 기억의 소멸이 그에겐 더욱 비참했을 것이다. 말년을 이토록 비참하게 보낸 ‘그’는 다름 아닌 레닌이다. 러시아 혁명으로 공산주의 국가를 만들어 20세기 내내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주었던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이렇게 심각한 언어장애의 상태에서 반 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고 한다. 그런데 이 당시의 이 사람을 레닌이라고 할 수 있을까. 그는 죽기 직전, 태어나서 맨 처음 배우는 단어인 ‘어머니’밖에 말할 수 없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과거 자기가 가졌던 생각과 사상, 사람들과의 추억, 여러 가지 중요한 사건, 그리고 지식까지 모두 잊어버리게 된 그 사람을 우리가 알고 있는 레닌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처럼 기억은 중요하다. 사람에게 ‘누구’라고 하는 개별성을 부여하는 것이 바로 기억이다. 평생의 삶을 통해서도 남는 것은 그 사람이 경험한 기억이다. 우리가 노학자나 원로에게 듣는 것도 그가 겪은 직간접적인 경험의 기억이다. 옛 성현이 수백 년 전에 쓴 책에서 읽는 것도 그의 경험과 위대한 생각에 대한 기억이다. 인간에게 기억이 이처럼 중요하기 때문에 영화에서도 기억에 관한 소재가 가장 많은 것 중 하나다. 기억상실증에 걸린 사람이 우리 주변에는 별로 없지만 영화나 드라마에 그렇게 많이 나오는 것도 기억이란 것이 사람에게 가지는 특별한 의미 때문이다. 아름다운 추억을 다룬 이야기도 사실은 기억에 관한 내용이다. 또 우리 인류의 지식이란 것이 모두 기억을 축적한 것이다. 뿐인가. 인터넷을 통해서 널리 유포되고 컴퓨터의 하드 드라이브에 저장된 정보 역시 우리의 기억을 모아둔 것이다.
사람에게 기억이 갖는 의미
기억이 이처럼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크게 두 가지 의미를 지니기 때문이다. 우선 기억은 사람들에게 정체성을 부여한다. 부모에게서 물려받는 유전자만으로는 한 인간의 정체성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성장하면서 겪게 되는 여러 사건과 아름다운 추억과 소중한 경험, 이들로부터 만들어진 생각들이 하나하나 쌓여 정체성을 형성한다. 헤어져서 자란 쌍둥이를 대상으로 한 많은 연구들에서도 이들이 유전적인 공통점을 가지지만 동시에 각자 경험한 환경에 따라 서로 다른 정체성을 지니게 된다는 사실이 보고되었다.
기억이 가지는 정체성으로서의 의미는 개인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집단에게도 그 집단이 가진 경험과 정신을 계승하는 이유는 정체성을 지속적으로 유지하여 오랜 기간 생존하기 위함이다. 한 집단이나 사회가 가진 경험과 역사가 바로 기억이다. 사람들이 조상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것도 기억을 유지하여 가족의 정체성을 유지해 가고자 하는 이유다.
기억이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사람들이 발전할 수 있는 학습의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학습이란 것이 지식을 기억하는 행위이다. 학습이란 남들의 지식을 기억하고 잊어버리지 않도록 반복함으로써 인격체로 완성되어가는 과정이다. 또 학습 능력이란 지금까지 인류가 만들어낸 지식이나 노하우를 얼마나 많이 유용하게 기억하느냐를 말한다. 구구단을 외운 후 복잡한 산술 문제를 푸는 것처럼 이전의 기억은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데 기초가 된다. 그래서 꾸준히 기억을 쌓아 나가는 것이 학습의 정석이다.
학습으로서의 의미 역시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적용된다. 과거에 노인들이 존경 받았던 것은 그분들이 한 사회에서 가장 많은 기억을 축적하고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근대 이전에는 수백 년간 똑같은 모습으로 살아갔다. 기근이나 해일처럼 수십 년에 한번씩 일어나는 현상은 노인들만 경험할 수 있었고, 오직 노인들만이 이러한 일이 발생하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 수 있었다. 노인들은 항상 마을의 원로가 되었고 젊은이들은 그들을 존경했다. 구전과 사람들의 경험에 의한 지식은 현대사회에서는 활자화되어 대중교육으로 사람들에게 전수되었다. 특히 요즈음은 출판과 인쇄술, 미디어나 인터넷을 통해 사회적 지식이 충분히 축적되어 학습할 수 있는 여건이 더 잘 갖춰졌다. 즉 사회적으로도 지식을 축적하는 기억력은 한 사회가 발달하기 위한 기반이 된다.
기업 관점에서 본 기억의 의미
사람에게 기억의 역할은 기업에도 그대로 이어진다. 기업의 기억 역시 그 조직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데 영향을 주고 학습을 위한 토대가 된다. 우선 정체성을 위한 기능을 살펴보자. 정체성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 본질적인 성질을 뜻하는 것으로 기업의 지속되는 문화나 핵심가치를 말한다. 학자들의 의견을 요약해 보면, 기업문화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고 세부적으로는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우선 기업문화는 암묵적인 가치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행동 양식으로 나눌 수 있다(<그림 1> 참조). 암묵적인 가치는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구성원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공유된 가치관이나 신념, 태도, 감정 등을 말하고, 가시적인 행동 양식은 관찰이 가능한 상징, 의식, 과거 일화나 전설, 슬로건, 행동 등이 구체화된 문화를 일컫는다. 암묵적인 영역의 문화는 공통가설과 공유가치, 가시적인 영역은 행동규범과 행동으로 세분화할 수 있다.
이중에서 공통가설이 기업문화를 이루는 요소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으로 사람들의 행동의 기저에 깔린 무의식적인 믿음이나 신뢰를 말한다. 가령 어떤 회사가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사고를 지니고 있다고 말할 때, 이것이 바로 공통가설이다. 공통가설이 좀더 구체화되어 구성원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거나 규범을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이 되면, 이를 공유가치라고 부른다. 가령 개인보다 전체를 중시하는 사고는 집단이나 전통을 중시하는 관행으로 좀더 구체화된 믿음으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행동규범은 구성원들의 행동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는 기준이 되는 것이다. 위의 예로 계속 설명하면 이 회사가 색깔 있는 와이셔츠는 입지 않는다는 복장 규정이 있을 수 있는데 바로 이것이 행동규범이다. 마지막으로 행동은 의사결정과 같은 눈으로 보여지는 구성원들의 구체적인 행동 패턴(Behavior)이나 로고나 배지 같은 물질적인 요소(Artifact)까지를 포함한다. 가령 위계와 전통을 중시하는 회사에서는 상사의 명령에 복종하는 의사결정이 이루어질 수 있는데 이를 두고 행동이라고 한다. 물론 회사 현관 앞에 세워진 동상이나 의미 있는 조형물도 이에 해당된다.
그런데 일단 형성된 문화가 지속되려면 과거의 공통가설이나 공유가치가 조직 구성원이 바뀌더라도 지속적으로 전수되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구성원들도 비슷한 활동을 하게 된다. 기업들이 신입사원 교육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암묵적인 가치를 짧은 시간 내에 전달하려는 것이다. 신입사원들은 행동규범을 외우거나 기업에서 일어나는 행동의 구체적인 사례를 학습함으로써 기업문화를 몸에 익힌다. 결국 조직의 기억을 끊임없이 반복하고 되살림으로써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조직 기억의 두 번째 역할은 개인과 마찬가지로 학습의 토대가 된다는 것이다. 조직의 기억력이란 과거에 경험한 사건, 일화 등 직접적인 기억뿐만 아니라 그러한 일화를 계기로 만들어진 규범이나 새로운 프로세스도 이에 해당된다. 이와 같은 과거의 경험이나 경험으로 인해서 변화되고 발전된 제도는 하나하나 축적되어 기업의 역량이 된다. 또 조직의 기억은 연구개발, 생산, 마케팅 등 각 기능에서도 지적 자산으로 축적되어 핵심역량을 만들어낸다.
이러한 지식의 축적과 확산 과정은 유명한 경영학자인 노나카 교수가 정리했다. 지식의 유형을 크게 형식지(形式知)와 암묵지(暗默知)로 구분하고, 구체적인 언어로 설명하기 힘들지만 개인적인 경험에 내재해 있는 암묵적 지식을 핵심역량의 원천으로 간주했다. 그는 이러한 암묵지가 늘어나는 과정은 공동화(Socialization), 표출화(Externalization), 연결화(Combination), 내면화(Internalization) 등 4개의 과정을 통해서 이루어진다고 설명했다(<그림 2> 참조). 즉 개인이 가지고 있는 초보적인 경험과 인식을 공유하여 모델이나 기술 등 한 차원 높은 암묵지를 창조하는 공동화 작업이 먼저 일어난다. 이렇게 만들어진 암묵지가 구체적인 개념으로 전환되고 언어로 표현되어 형식지로 바뀌는 표출화 과정이 뒤따른다. 그러면 연결화 단계가 이어진다. 표출화 과정을 통해 암묵지로부터 만들어진 다양한 형식지들을 체계화하고 통합하여 새로운 형식지를 창조하는 것이다. 즉 지식을 체계화하여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해서 새롭게 창조된 지식은 직원 개개인이 업무에서 운용할 수 있는 개별적인 지식으로 바뀌는 내면화 과정이 진행된다. 그러면 형식지는 다시 개인의 암묵지로 체화되어 조직 전체의 무형자산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지식이 만들어지고 핵심역량이 되는 과정은 종업원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이나 노하우를 조직의 기억으로 만드는 활동이다. 결국 종업원들의 기억을 조직의 기억으로 승화시키고 이것을 다시 종업원들에게 체화시키는 과정이다. 이처럼 기억은 기업에게 있어서도 학습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Ⅱ. 건망증 심한 기업이 나타나는 이유
정체성을 유지하여 기업의 DNA를 구축하고, 학습을 촉진하여 핵심역량을 강화할 수 있도록 만드는 기억력은 우량기업이 되기 위한 필수 요소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매우 드물다. 실행, 전략, 문화, 시스템 등 경영의 다양한 영역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하나하나 살펴보자.
1. 탐욕에 의한 근시안
우선 실행 측면에서, 사람의 욕심이 개입되기 때문에 기억력이 약해지는 경우가 많다. 사람은 이기적이라서 한정된 자원으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우선 나를 돌보아야 한다. 따라서 남을 이기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런 본성이다. 그래서 항상 남과 비교하고 경쟁한다. 기업이 항상 남과 경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차별화된 전략을 세우고 싶지만 똑같은 것을 가지고 경쟁하는 것이 더 쉽다. 그래서 현대 조직이론의 하나인 제도이론을 체계화한 디마지오와 파월(Paul DiMaggio & Walter Powell)에 의하면 많은 기업들은 합리적인 판단으로 경쟁사의 전략을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남들이 하니까 그냥 모방한다는 것이다. 남들과 경쟁하느라 너무 바쁘다 보니 자기 과거의 기억을 잊는 것이다. 특히 남들 돈 버는 것을 보면 참지 못한다. 우리가 유지해 왔던 원칙이 틀린 것이 아닌가 곳곳에서 비판 받는다.
이러한 현상이 가장 잘 나타나는 분야가 금융 분야다. 사실 서브프라임 모기지 부실로 시작된 현재 글로벌 금융위기는 파생상품과 결합되어 부실규모를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파급효과를 내고 있지만 과거에도 비슷한 금융위기는 지속되어 왔다. 희귀 종이었던 튤립 가격이 계속 높아질 것으로 믿고 투자했다가 폭락한 1636년의 네덜란드 튤립 거품이나, 식민지에 대한 독점 무역으로 국가채무를 상환하겠다고 호언장담하여 ‘천재’ 뉴턴까지 투자를 하고 손해를 봤던 1720년 영국의 남해회사 거품, 같은 해에 일어났던 프랑스의 금광 개발 회사인 미시시피 회사 거품, 1920년대 말 대공황 직전의 주식 광풍, 1980년대 일본의 부동산 투기와 주식 투자 열풍, 1998년 아시아 및 개도국 금융위기 때 러시아 국채에 투자한 펀드의 폭락에 이은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사의 파산, 1990년대 말 미국의 나스닥 시장과 한국의 코스닥 시장에서 나타난 거품 등 금융위기는 수백 년 동안 반복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많은 금융기관들이 이러한 투자에서 같은 실수를 반복했다.
대부분의 금융위기는 같은 패턴을 그렸고 사람들은 같은 실수를 했다. 실제 거둘 수 있는 이득 이상으로 투자 대상의 가치가 부풀려져서 무분별한 투자를 위해 신용이 대폭 확대된다. 그러다가 실제 이익이 그만큼 막대하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면 위기감이 고조되고 거품이 붕괴되는 과정을 거친다.
복잡하게 연결되어 있었지만 금융기관들은 과거 경험에서 거품이 붕괴되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은 눈앞에 보이는 수익이었다. 그래서 ‘월가의 금융기관이나 투자자들은 남들이 손해 보는 곳에서 더 큰 손실을 보는 것은 참아도, 남들이 돈 버는데 나만 돈 못 버는 것은 못 참는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결국 근시안과 탐욕이 건망증을 일으킨 것이다. ‘투자자들은 경험에서 배우지 못하는 족속들’이라는 금융위기 연구가인 킨들버거(Charles Kindleberger, 1910-2003)의 말이 떠오른다.
2. 변화 강박증
전략 측면에서, 의도적으로 과거를 부정하기도 한다. 기업이 어려움에 빠져 탈출구가 필요할 때 경영혁신이나 변화 작업을 하게 되면 일부러 과거를 부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경우에 새로운 경영자가 임명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새로운 CEO는 그 동안의 구태를 개혁하고 새롭게 회사를 탈바꿈시키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과거와는 정반대의 정책을 입안하고 실행한다. 이 과정에서 과거의 좋은 경험이나 노하우 역시 사라지게 되는 경우가 많다.
잭 웰치(Jack Welch)보다 먼저 미국의 기업계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이름을 알린 이가 있다. 그는 1996년 여름 어려움에 봉착해 있던 가전업체, 선빔(Sunbeam)의 CEO로 영입된 알 던랩(Al Dunlap)이다. 이 회사에 영입되기 전 1994년부터 2년간 스캇 페이퍼(Scott Paper)에서 최고경영자로 있으면서 1만 2천여 명의 직원을 해고하여 회사를 회생시켰다. 취임 이틀 만에 11명의 경영진 중에서 9명을 잘라내어 ‘전기톱(Chainsaw)’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본사 직원의 70% 이상을 정리했고, 월가는 환영했다. 그의 재임기간 동안 주가는 225%나 올랐다. 그가 선빔에 부임하자마자 주가가 올라갔다. 심지어 어떤 애널리스트는 실적이 나아지지도 않은 이 회사의 투자 전망을 ‘매수’ 등급으로 올리면서, “선빔은 던랩이라는 무형자산을 가지고 있다”는 평가를 할 정도였다. 이 회사에서도 6천 명의 직원 중 절반을 해고했다. 그는 자기가 미국 최고의 CEO라고 생각했으며, ‘양복을 입은 람보(Rambo in Pinstripe)’라고 스스로를 불렀다. 심지어 이 회사의 CEO로 있으면서 지난 20년 동안 7개 기업을 회생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냉혹한 비즈니스의 세계(Mean Business)>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여기서 그는 ‘한 푼이라도 비용을 아껴라, 비싼 사장 영입이 가장 싼 거래다, 회사는 살찌우고 문화는 굶겨라’ 등 냉혹한 구조조정의 원칙을 설파했다.
재미있는 것은 1998년 선빔의 이사회는 던랩이 매출을 증대하고자 유통업체에 거액의 디스카운트를 해주고, 팔지도 않은 제품의 매출을 기록하여 실적을 조작한 혐의를 발견하고 해고했다. 나중에 엔론이나 월드콤의 경영자들이 모방하여 회사를 무너뜨린 이러한 조작으로 선빔은 1998년에 9억 달러에 달하는 손실을 보았다. 그래서 그가 경영한 회사는 그의 재임기간에는 높은 실적과 주가 상승을 보이지만 그가 떠나고 나면 실적이 무너져 내리는 현상을 보였다. 구조조정으로 성공했던 스캇 페이퍼 역시 1995년 그가 떠나자 마자 자생력을 잃고 경쟁사인 킴벌리-클락(Kimberly-Clark)에 매각되었다. 100년을 이어오던 선빔 역시 어려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2001년 파산신청으로 기업계에서 사라졌다.
문화를 굶기라는 말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던랩은 변화를 위해서 과거를 송두리째 부정했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나 차근차근 쌓아 올린 역량도 함께 내던진 것이다. 그래서 단기적으로는 구조조정에 의해 실적 상승이 나타났지만 성장을 위한 근본적인 체질은 구축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처럼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서 과거의 경영을 부정하는 모습은 여러 회사에서 볼 수 있다. 2005년 외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소니의 CEO로 임명된 스트링거(Howard Stringer) 회장 역시 소니의 낡은 문화를 개혁하는 것이 그의 주된 목적이었다. 그는 누차 “소니 고유의 역사와 전통이 스스로를 억압하고 있다”거나, “소니가 너무 낡았다는 것을 우리 스스로도 잘 알고 있으며, 나는 이런 문제들이 계속되고 있는 데 대해 개탄하고 있다”는 이야기로 새로운 회사로의 변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개혁에 반발하여 플레이스테이션을 개발한 소니의 스타인 쿠타라기 켄 등 많은 인재들이 사임하기도 했다. 소니의 개혁은 진행 중이지만 일본에서도 소니가 가졌던 장점마저 잃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한다.
3. 보신주의로 인한 두려움
기업문화 측면에서, 보신주의적 풍토가 실패의 경험을 감추게 만든다. 대부분의 종업원들은 실패에 대한 경험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한다. 하지만 3M의 포스트-잇(Post-it) 개발 사례처럼 실패로부터 배우는 것이 더 큰 경우가 많다. 더구나 실패의 기억을 숨기고 지우려다가 회사가 망하는 경우까지 생긴다.
나폴레옹 전쟁을 지원하고 두 차례 세계대전의 어려움 속에서도 230년 넘도록 살아남았던 베어링 은행(Barings Bank)이 파산한 것은 싱가포르 지점의 한 파생상품 딜러가 저지른 잘못 때문이다. 이러한 실패가 2년 이상 드러나지 않고 감춰져 오다가 돌이킬 수 없는 상황까지 가게 된 것이다.
고졸 출신으로 1989년 베어링스 은행에 입사한 닉 리슨(Nick Leeson)은 싱가포르 지점에서 일본과 싱가포르 주식시장의 선물과 옵션 거래 딜러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1993년에는 싱가포르 지점 수익의 20%를 혼자서 벌어들여 회사 내에서 최대의 스타로 떠올랐고 최고경영진의 신임을 받아, 돈을 쓰는 딜러가 결재까지 담당하게 된다. 결국 88888이라는 에러 계좌를 만들어 파생상품을 거래했다. 손실금액은 점점 더 커져갔고 그때마다 손해를 보전하기 위해서 더 큰 액수의 거래를 했다. 일본의 니케이 지수에 많은 돈을 투자했다가 1995년 1월 고베 대지진으로 일본 시장이 폭락하여 큰 손해를 보았다. 14억 달러 손실이었다. 결국 베어링 은행은 네덜란드의 ING에 1달러에 매각된다.
실패에 대한 기억을 외면하는 경우 회사가 망하지는 않더라도 보신주의로 인해서 회사의 문제가 감춰지는 경우는 빈번하게 발생한다. 기업에서는 양산 이전에 제품 개발이 중단되는 경우가 많다. 또 제품을 출시했지만 팔리지 않아 사장되는 경우도 많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에 대해 원인 분석을 철저히 하고 대책을 마련하는 곳은 별로 없다. 결국 제품 개발 과정이 비효율적으로 운영되어도 어디가 잘못되었는지 고칠 수 없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그런가 하면 실패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중단되어야 할 프로젝트가 계속되기도 한다. 모기업의 경우 연구개발을 평가하면 대부분의 과제가 그대로 통과되는 결정이 났다고 한다. 사정을 알아보니 연구하는 사람들이 실패를 인정하는 것을 꺼려해서 그냥 통과시키는 암묵적 담합이 발생한 것이다. 사실 엔지니어에게 실패는 전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다. 그로부터 배우는 소중한 경험인데 이를 인정하는 풍토가 부족하여 실패의 기억이 사장되고 있다.
4. 시스템보다 사람
마지막으로 시스템 측면에서, 경영시스템이나 프로세스보다 사람 개개인의 역량과 방법에 의해서 경영활동이 진행되는 경우에도 건망증이 나타나게 된다. 즉 사람이 가진 경험이나 노하우가 조직 수준으로 이전되지 않고 그 직원이 퇴사하면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몇 사람의 역량에 의해서 운영되는 작은 규모의 벤처기업에서 이러한 현상이 주로 나타나지만 대기업도 예외는 아니다.
많은 기업에서 복잡한 수요 예측이나 경영관리를 몇몇 직원에게 맡기다 보니 그 직원이 없어지면 회사의 역량이나 기능 자체가 사라진다고 이야기한다. 사실 이러한 지식 자산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데는 상당한 자원을 투입하여야 한다. 직원들간 역량이나 지식 이전이 잘 되는 한 대기업 직원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우리 회사는 직무가 명확하게 규정되어 담당자에게 일임된다. 그래서 자료를 찾으려면 20년 전 자료까지 찾을 수 있다. 특정 업무를 담당한 사람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경우도 있고, 사람이 바뀌더라도 후임자가 이전의 자료를 모두 물려받아 가지고 있다. 즉 사수-부사수 제도가 잘 정착되어 있어서 직무 승계가 잘 진행된다. 한 사람이 승진이 되거나 다른 쪽으로 가려면 그 전에 항상 부사수를 키워놓아야 한다. 우리 회사에서는 대타 없이 담당자가 이직을 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임원은 문책 받는다. 개인적으로 이런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다른 부서로 가기 위해 부사수를 받았는데 이 사람이 개인 사정으로 6개월 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그래서 다른 부서로 가지 못하고 또 다시 후임을 받아 1년 동안 교육시킨 후에 업무를 물려주고 난 다음에야 부서를 옮길 수 있었다.”
개인 차원의 지식이나 경험을 조직의 기억으로 전환하는 데는 많은 노력이 필요함을 알 수 있다.
Ⅲ. 기억력 좋은 기업의 특징
기억력이 나쁜 기업의 공통점은 근시안적으로 경영을 바라본다는 것이다. 단기성과에 집착하여 욕심을 부리거나 당장 편한 길을 찾다 보니 나타난 현상이다.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이러한 것을 경계한다. 현실에 충실하면서도 가능하면 장기적인 시각을 가지려고 노력한다. 성장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경영의 일관성을 유지하는 데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특징을 살펴보자.
1. 과거를 기억한다
우선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과거를 있는 그대로 기억한다. 즉 기억에서 직접적으로 배운다. 과거에 축적된 기업문화나 경영 관행을 그대로 실행하고 있으며, 심지어 과거에 경험한 사례를 그대로 기억하여 교훈을 찾는데 활용한다. 존슨&존슨이 대표적인 사례다.
존슨&존슨은 1886년 로버트 우드 존슨(Robert Wood Johnson, 1845-1910)과 다른 두 형제들이 수술용 약품을 만들면서 회사가 시작되었다. 존슨&존슨이 현재와 같은 철학을 정립하고 사업활동을 해 나가기 시작한 것은 창업자의 아들이자 3대 CEO였던 로버트 우드 존슨 2세(Robert Wood Johnson II, 1893-1968)가 회사를 경영하기 시작했을 때였다. 그는 1943년 ‘우리의 신조(Our Credo)’를 제정하여 고객과 직원, 지역사회와 의료업 종사자들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이 회사의 목적이라고 선포했다. 이후 이 경영 신조는 전 세계 어느 사업장에서건 의사결정의 기준으로 활용되고 있다.
이 신조가 적용된 가장 유명한 사례가 경영학 교과서에도 나와 있는 타이레놀 사건이다. 1982년 미국 시카고에서 존슨&존슨의 타이레놀 제품을 복용한 사람이 사망한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 조사결과 사망자가 먹은 타이레놀에 독극물이 들어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소비자에 대한 책임을 최우선으로 하는 존슨&존슨의 ‘우리의 신조’에 따라 소비자경보를 발령하고 원인이 규명될 때까지 타이레놀 제품을 절대 먹지 말도록 대대적인 홍보를 전개했다. 당시 미국식품의약국(FDA)은 시카고 지역에 배포된 제품을 거둬들일 것을 권고했는데, 존슨&존슨은 전국에 있는 모든 제품 3000만병을 거둬들였다. 당시 시가로 1억 달러에 해당하는 액수였다. 결국 소비자들은 존슨&존슨을 신뢰하게 되었고 타이레놀의 매출은 다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타이레놀은 현재까지 미국시장에서 가장 잘 팔리는 해열진통제로 살아남았고 세계적으로 연간 15억 달러의 매출을 올리는 효자상품이 됐다. 존슨&존슨의 이러한 일화는 전세계의 임직원들 사이에서 오늘도 회자되고 있으며 경영의 준거로 활용되고 있다.
이처럼 기억력 좋은 기업은 오래 전에 경험한 중요한 사건을 잊지 않고 후세에 전달한다. 도요타도 이러한 회사 중 하나다. 도요타는 위기경영으로 유명한데, 이 위기경영은 195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 초의 도요타는 도산의 위기에까지 가게 된다. 당시 일본 정부는 긴축정책을 쓰면서 정책대출을 폐지하고 보조금을 없앴다. 도요타는 트럭을 주로 만들고 있었는데, 만들면 팔렸던 트럭이 팔리지 않아 재고가 쌓이게 되었다. 그래서 어려움에 빠진 도요타에 대해 미쓰이 은행이 구제조건으로 재생 프로그램을 내걸었다. 종업원을 20% 해고하고 월간 자동차 생산량도 20% 줄이라는 조건이었다. 또 과잉고용을 해소하기 위해서 판매와 생산부분을 분리시키라고 했다. 구조조정으로 인한 노사분규를 겪으면서 창업자인 도요다 기이치로 사장이 물러나고 이시다 다이조가 그 자리를 물려받는다. 사장에 취임하면서 “지금부터는 낭비를 무조건 잡아야 한다. 앞으로는 현금을 최대한 늘려라. 현금이 생명이다”라는 말을 하였고, 이러한 원칙이 아직까지 이어 내려오고 있다. 최근 자동차 시장의 침체로 매출이 급감하면서 현금 보유가 줄어들었지만 아직도 2조엔 가까운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2. 과거를 체화한다
스탠포드 대학의 명예교수이자 저명한 조직이론가인 마취(James March)는 조직이 반드시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지 않더라도 약한 형태로 기억이 유지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시간에 따라 기억은 엷어지고 과거의 사건은 잊혀지지만 그 사건의 영향으로 바뀐 제도, 규칙, 프로세스, 프랙티스 및 행동 패턴이나 관행은 그대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즉 현재의 경영관행에는 과거의 기억이 약하게나마 담겨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과거를 체화한다. 즉 간접적으로 배운다. 말하자면 과거의 경험을 전부 기억하지는 못하더라도 그것을 제도에 녹여서 오늘의 경영에 활용하는 것이다.
금융회사는 이직도 많고 제조업보다는 직원 개개인에 의해 수행되는 일이 많기 때문에 과거의 기억을 그대로 되살리기가 어렵다. 그럼에도 골드만 삭스는 과거의 경험을 기업문화, 제도, 의사결정 관행에 반영하여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왔다. 골드만 삭스는 1869년 독일계 유태인 이민자인 마르쿠스 골드만(Marcus Goldman, 1821~1904)과 그의 사위인 사무엘 삭스(Samuel Sachs, 1851~1935)에 의해 설립된 투자은행이었다. 이후 1920년대까지 가족기업으로 경영되어 오다가 1930년 시드니 와인버그(Sidney Weinberg, 1891~1969)가 대표가 되면서 현대적인 기업으로 탈바꿈한다.
와인버그는 1907년에 청소부의 조수로 취직했다가 창업자의 아들인 폴 삭스의 눈에 띄어 62년 동안 근무했고 그 중에서 39년을 대표로 보냈다. 20세기 전반기 골드만 삭스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았기 때문에 철도회사와 같은 대기업이 아니라 새로이 생겨나는 제조업체나 유통회사 등 신흥기업을 위한 투자은행 업무를 수행했다. 그래서 그들의 신뢰를 얻는 일이 매우 중요해서 고객들과 밀접하고도 장기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최우선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와인버그는 고객들의 이사회에 참여해서 주도적으로 일했으며, 진심으로 고객의 회사가 잘되기를 바랐다. 한번은 필립 뮤지카란 사람이 맥키슨&로빈스라는 유령 제약회사를 차려놓고 와인버그를 이사로 초빙해서 골드만 삭스와 거래를 한 적이 있었다. 회사 자산을 거짓으로 꾸민 것이 들통나서 나중에 자살했는데, 와인버그를 비롯한 이사들이 개인 돈으로 손실을 메우기까지 했다. 이 사건 이후 와인버그는 큰 충격을 받아 자신이 참여하는 이사회의 수를 줄이고 더 많은 노력을 들이기 시작했다. 심지어 자신이 대변하는 회사들의 제품만을 사용하는데 거의 광적이었다.
이러한 와인버그의 경험은 골드만 삭스의 기업문화와 직원들의 행동 패턴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1987년 10월 미국 주식시장이 폭락했을 때 골드만 삭스와 다른 투자은행들이 영국 국영기업인 BP의 주식과 채권 인수주선(Underwriting)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당시 영국 정부 주식 32%를 팔아주기로 약속한 상태에서 주식시장이 붕괴되어 당시 순이익의 20%에 달하는 금액인 1억 달러의 손실을 보게 되었다. 다른 은행들은 기존의 계약을 변경하자고 주장했지만 골드만 삭스만이 손실을 감수하고 계약을 이행했다. 이후 모건 스탠리 같은 다른 회사들은 한동안 유럽 기업들의 사유화 작업에 참여하지 못하였고 골드만 삭스의 시장점유율이 높아지게 되었다. 또 1980년대 적대적 인수가 유행할 때, 기업 경영보다는 오로지 금전적인 목적의 기업 사냥을 위해서는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다. 오히려 이것이 계기가 되어 인수 합병 시장에서 골드만 삭스의 명성이 올라가 이 분야에서 최고 기업이 되었다. 이처럼 고객을 중시하고 장기적인 파트너십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골드만 삭스는 금융회사에서는 보기 힘든 집단주의적 기업문화를 가지게 되었다. 골드만 삭스는 신입사원을 키우기로 유명하다. 또 직원들은 ‘내가 그 계약을 처리했다’는 표현 대신 ‘우리가 그 일을 처리했다’는 식의 표현을 사용한다고 한다.)
이러한 집단주의적 문화로 인해서 골드만 삭스는 창의성이 떨어진다는 비판을 받곤 했다. 그래서 파생상품에 진출한 것도 가장 늦었다. 하지만 골드만 삭스의 이러한 신중함과 직원간 협업 관행은 서브프라임 모기지 사태로 인한 피해가 적게 나타나게 만들기도 했다. 즉 서브프라임 모기지 투자에 대한 위험성이 제기되자 관련 자산을 재빨리 정리하였던 것이다. 금융위기가 본격화되지 않았던 2007년에 모기지 담보 증권을 미리 팔아버려 미국의 투자은행 중에서는 기업 규모 대비 서브프라임 모기지 관련 손실이 가장 적은 편이었다. 실제로 골드만 삭스는 2008년 자산상각 및 신용손실 규모는 71억 달러였지만, 이는 672억 달러의 씨티그룹과 559억 달러의 메릴린치보다 훨씬 적은 액수이다.
3. 과거를 재해석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상실의 시대>에 기억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인공이 과거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풍경이 지금은 선명하게 떠오른다는 내용이다. 사람들은 반드시 실제로 일어났던 사실만을 기억하지 않는다. 시간이 흐르면 꿈을 꾼 것도 실제로 경험한 것처럼 기억되기도 한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기가 원하는 것만을 기억한다. 심지어 사람들은 실제와 다르게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사물을 본다는 것이 여러 심리학자들의 실험으로 증명되었다. 하물며 기억이야 오죽하겠는가. 그래서 인간은 과거를 재해석하여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경험이 재창조되기도 하는 것이다.
기억력이 좋은 기업도 필요에 따라 과거를 재해석한다. 즉 과거의 경험을 새롭게 만들어내기도 한다는 것이다. 할리데이비슨이 그런 경우다. 1903년 창업한 이후 반 세기 가량 미국의 오토바이 시장을 장악하던 할리데이비슨은 1960년대 일본의 오토바이 업체들이 미국시장에 진출하면서부터 타격을 받기 시작한다. 그래서 AMF에 인수되어 눈썰매 등을 만드는 수모를 겪은 후, 1981년 할리데이비슨의 경영진들은 각자 돈을 모아서 회사를 독립시켰다.
이때 할리데이비슨의 경영진은 초창기 창업정신으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그래서 최고의 제품을 만들기에 열과 성을 다하던 창업자들의 뜻을 이어받아 새로운 캐치 프레이즈를 만들어 낸다. 바로 ‘독수리는 홀로 난다(The eagle soars alone)’는 메시지로 할리데이비슨의 차별화된 가치를 내세웠다. 그리고 최고의 모터사이클을 만들기 위해 기존의 V-트윈 엔진을 개량한 새로운 엔진을 개발하여 제품력을 높여나갔다. 동시에 사람들에게 편리함과 즐거움을 주고자 하는 창업자들의 생각을 본받아, 모터사이클링이라는 특별한 경험을 통해서 고객들의 꿈을 실현시켜주는 회사라는 가치를 만들어냈다. 이 같은 맥락에서 할리오너스그룹(Harley Owners Group)을 만들어 고객들이 투어와 모터사이클링을 하는 데 회사에서 지원하기 시작했다. 할리오너스그룹은 이미 수년 전에 100만 명을 넘어섰으며, 각국에서 정기적으로 모터사이클링 행사를 개최하고 있다. 즉 고객에게 단순히 제품을 파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경험을 선물하고자 노력한 것이다. 이처럼 창업시대의 가치를 현재 시각에서 재해석하여 경영에 활용한 결과 높은 성과를 거두었다.
4. 과거를 가져온다
사람의 기억 중에 많은 부분은 사실은 그 사람의 두뇌 바깥에 저장되어 있다. 이상한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우리는 이 사실을 알고 있다. 이것을 교류적인 기억(Transactive Memory)라고 하는데, 사실 우리는 엄청나게 많은 사실을 모두 머릿속에 넣어 두지 않는다. 그 사실을 금방 찾아낼 수 있는 실마리만을 기억하고 있으면 된다. 최근 휴대폰이나 전자사전이 발달하여 친구들의 전화번호를 직접 기억하지 않고 전자 장치에 저장해 둔다. 또 가까운 사람들끼리는 기억을 서로 공유한다. 가령 컴퓨터에 저장된 파일을 찾기 위해서는 아들 녀석에게 부탁하면 된다. 또 조직의 상위 관리자나 경영자들이 비서를 두는 것 역시 기억할 것이 너무나 많기 때문이다. 많은 정보를 대신 기억해 주는 교류적인 기억 장치가 바로 비서인 것이다. 유능한 비서가 갑자기 그만두게 되었을 때 경영자의 능력이 얼마나 떨어질 것인지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기억을 외부에서 가져오기도 한다. 즉 기억을 외부에 저장해 놓고 활용하는데도 능하다는 것이다. 특히 새로운 역량을 개발하기 위해서 필요한 경험이나 지식 등의 기억은 조직 내에 없으면 주저하지 않고 외부에서 조달한다. 이러한 회사로 P&G를 이야기할 수 있겠다.
2000년에 P&G의 CEO가 된 래플리(Alan Lafley) 회장은 환경변화에 대응하기 위해서 경영에서 속도가 차지하는 비중이 높아짐을 감지했다. 그래서 자신만의 기술을 갖는 것도 중요하지만 남들보다 빨리 신기술을 세상에 내놓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해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회사 밖에서 기술 개발의 50%를 이뤄내야 한다는 목표를 세웠다. 그리하여 전세계 다양한 연구기관들이나 전문가들과 협업을 통해 기술을 개발하는 C&D(연결개발, Connect & Development) 전략을 R&D의 새로운 방법론으로 제시했다. P&G가 지닌 기술과 역량을 공개하여 남들의 기술을 채워 넣는 것이다.
C&D 전략으로 외부에 많이 알려진 것이 감자칩 프링글스(Pringles)에 글씨를 새기는 기술을 개발한 사례이다. 고온의 감자칩 반죽에 글씨를 새기기가 쉽지 않아서, 인터넷과 P&G가 가지고 있는 네트워크에 이 기술을 공모했다. 그 결과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 교수가 운영하고 있는 제과점에서 사용되던 식용 잉크 분무기에서 아이디어를 가지고 왔다. 이를 개량하여 감자칩에 글씨를 새기는 ‘프링글스 프린츠(Pringles Prints)’ 기술이 탄생되었다. C&D 전략을 지속적으로 추진한 결과 2000년에는 외부 아이디어로 개발된 제품이 전체에서 15%에 불과했지만 2006년에는 35%, 2007년에는 42%, 2008년에는 절반 이상으로 늘었다고 한다.
저명한 역사학자인 카(E.H. Carr)는 역사란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했다. 기억도 마찬가지다. 위에서 살펴본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모두 오늘을 위해서 과거의 기억을 끊임없이 되살리고 있다. 현재에 과거를 녹여내는 것이다.
Ⅳ. 온고지신 (溫故知新)
경영환경은 더 빠르고 불안전하게 변하는 지금, 미래를 바라보는 데 힘을 써도 부족한데 과거 타령이나 하자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단순히 옛날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 알고자 하는 것이 목적은 아니다. 우리의 앞날에 적용하기 위함이다. 언젠가 TV에서 공룡에 대한 프로그램을 방영한 적이 있다. 우리가 할 일도 많은데 왜 수억 년 전에 사라진 공룡을 연구하느냐는 질문에 고생물학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영화를 찍고 아이들 장난감을 만들기 위해서 공룡을 연구하는 것은 아닙니다. 공룡은 지구에서 아주 오랜 기간 번성했던 동물인데, 어느 날 갑자기 멸종했습니다. 인류도 어느 날 어떻게 될지 모릅니다. 공룡이 너무 많아져서 먹거리가 부족해서 멸망했는지, 지구의 온도가 변해서 살아가기가 어려웠는지, 운석 충돌로 사라졌는지, 이런 연구는 결국 인류의 번영과 생존에 관한 연구와 같습니다.”
결국 과거를 알고 기억하고자 하는 것은 미래를 더 낫게 살아가기 위함이다. 과거는 그 자체로 의미 있는 것이 아니라, 미래를 위한 과거이기 때문에 가치가 있는 것이다.
변화를 위한 기억
이런 점에서 경영환경의 불안정성에 대응하기 위해서 시시각각 변화하고 혁신해야 하는 기업에게 기억력은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한다. 우선, 변화에는 방향이 필요하다. 앞이 더 보이지 않는 상황일수록 방향이 중요한 것이다. 그래서 기억력이 좋은 기업은 자신의 정체성을 지키고 있기 때문에 변화를 하면서도 중심을 잡을 줄 안다. 어떤 사업이 유망하다고 해서 모두 달려들고 있어도 그것이 할만한 것인지 아닌지 금방 알 수 있다. 기억은 이처럼 부화뇌동할 수 있는 현대의 경영환경에서 중심을 잡는 역할을 한다.
또 변화에는 축적이 필요하다. 사실 모든 변화와 혁신은 점진적인(Incremental) 것이다. 우리가 아는 급진적 혁신 역시 과거의 것에 토대를 둔다. 흔히 20세기 과학을 열었다고 하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도 사실은 과거의 토대 위에 서 있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이론은 뉴턴의 고전역학에서 출발한다. 뉴턴의 역학은 우리 일상 생활에서는 모두 맞아 떨어지지만 엄청 나게 빠른 속도와 아주 작은 질량에서는 적용되지 않는다. 원자 단위의 운동을 실험하다가 발견한 이러한 현상을 설명하려다가 나온 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이다. 그러니까 상대성이론도 과거의 이론을 뒤집은 것이 아니라 확장한 것이다. 학문의 발전이나 기업의 핵심역량 강화나 모두 과거의 경험과 지식의 토대 위에 건설되는 것이다. 과거를 기억하고 연속적인 경영을 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러한 기억의 의미는 수십 년간 대기업의 경영행태를 연구한 경영철학자의 말에서도 엿볼 수 있다.
“한국기업의 경영진들은 고민이 없는 것 같다. 컨설팅 회사에서 흔들면 동쪽으로 가다가 서쪽으로 간다. 제일 안타까운 점은 CEO가 바뀌면 모두 바뀌는 것이다. 전임 CEO가 강력히 추진하던 경영 프로그램을 쓰레기통에 버리는 것은 다반사다. 정치판에서 대통령 바뀌면 옛날 정책들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렇게 되면 축적이 안된다. 축적해야 발전할 수 있다. 성공하는 세계 일류기업은 일관성이 있다. 끝장 볼 때까지 일관성 있게 실행한다. 가다가 중단하면 아니 간만 못하다. 갈 지(之)자식 경영은 절대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은 축적의 과정을 통해서 결과를 얻고, 너무 빠른 효과는 기대하지 않는다.” 변화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
기억력을 좋게 하여 과거의 경험과 전통을 계승하라는 이야기를 할 때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 있다. 바로 과거의 성공 경험에 안주하여 새로운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가 되지 말아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를 기억하여 정체성을 유지하고 역량을 축적하라는 말은 자칫 자기가 가진 강점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다. 사실 대부분의 기업들이 어려움에 빠지는 것은 시대가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과거의 성공 방정식을 그대로 따르기 때문이다. 미국의 Big 3 자동차 회사들이 대형차 개발에만 안주하다가 일본 업체에게 시장을 빼앗기고, 최근에는 SUV 차량에만 집중하다가 어려움에 빠진 것도 과거의 성공 방식에 안주했기 때문이다. 새로운 비즈니스 모델로 2000년대에 들어서자마자 컴퓨터 업계를 재편한 델(Dell) 역시 그들에게 성공을 가져다 준 사업 방식으로 인해서 최근에는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과거 델의 직접판매 방식은 경쟁사보다 월등한 가격 경쟁력을 가져다 주었지만, 현재 가격 공세 전략으로 무장한 중국계 기업과 비교하면 다른 얘기가 된다. 더욱이 IBM이나 HP 등 다른 컴퓨터 업체들이 IT와 서비스를 결합한 사업모델로 변화하면서 산업의 성숙화와 기술의 범용화에 대응한 반면, 직접판매 방식만 고수한 델은 고객 서비스에는 취약할 수밖에 없어서 이러한 대응이 쉽지 않았다.
즉 현재 경영성과가 좋은 것은 과거에 무언가를 잘했기 때문이지 지금 경영을 잘하고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그래서 끊임없이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잘 나갈 때 변화하라는 것은 과거에 열심히 해서 지금 잘 나가고 있지만 현재 잘하고 있는지를 지속적으로 점검하라는 말이다. 그런데 이처럼 변화해야 할 때도 변화하지 말고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세상이 바뀐다고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취할지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여기서 기억력이 판단기준으로 작용한다. 변화해야 할 것과 기억해야 할 것을 결정하는 것도 결국은 그 조직의 기억력인 것이다.
두 개의 접시를 달고 있는 저울을 상상해 보자. 한쪽에서는 세상의 변화라는 접시가 있고, 다른 쪽은 기억력이 있다. 결국 경영은 두 저울의 균형을 맞추는 일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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