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크로맨서는 마나에 깃든 존재들 중
가장 특별한 존재라고 할수 있다.
그들은 일체의 신앙을 갖지 않으며
엄격한 고행을 통해 정신과 신체를
극한에 다다르게 하여 신의 섭리의
반대편에 서고자 한다.
따라서 그들은 놀랄만큼 지혜로우며
신체의 감각이 극도로 발달했다.
그들이 신을 거부하는 이유는 그들이
추구하는 저주와 죽음 그리고 부활의
마법 자체가 신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나가 신이 인간에게 내린 가장
고귀한 선물임을 생각할 때 그들의
도전은 무모하게까지 보이는데...
[조디악 드레이크의 '마법강론 서문' 에서]
어둡고 좁은 지하동굴, 벌레 (Maggot)들의 레어에서 마주친 네 사람과 쓰러져 있는 한 사람 사이에 묘한 정적이 흘렀다.
이윽고 북부 바바리안 쿠오 듀크가 정적을 깨뜨리고 너털웃음과 함께 입을 열었다.
" 하하하, 이런 우연이 있나. 이래서 원수는 어디 나무 다리에서 만난다고 하던가, 하하하! "
" 외. "
" 응? 왜라니? "
백발의 네크로맨서 료겐 하데스는 어리둥절해 하는 쿠오 듀크를 잠시 노려보다가 베라미스의 옆에 쓰러져 있는 데브란트에게 시선을 옮겼다.
베라미스가 한손에 스태프를 들고 천천히 일어나서 말했다.
" 당신들은 누구입니까? "
그녀의 질문에 대한 대답은 그녀의 앞에 나타난 두 남자에게서가 아니라 파랗게 질려있는 아리스에게서 나왔다.
" 산적입니다. "
아리스는 재빨리 롱보우에 화살을 걸고 그들을 겨냥했다.
쿠오 듀크가 갑자기 목이 막힌 듯 기침소리를 냈다.
" 케엑, 산적이라니? 어라, 그러고보니 그때 저 친구와 함께 있던 로그잖아? "
료겐 하데스가 천천히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의 오른손에는 일전에 데브란트와 싸울 때 사용했던 끝부분에 둥그런 구슬 같은 게 달린 검은색의 작은 로드(Rod)가 들려 있었다.
지하동굴에 깔린 어두움과 유난히 잘 어울리는 음산함을 풍기며 그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 그 팔라딘, 살아 있는가? "
베라미스가 쓰러져 있는 데브란트를 보더니 대답했다.
" 그렇습니다만... "
료겐의 얼굴에 차가운 미소가 스쳐갔다.
" 잘됐군. 깨워. "
" 예? "
" 깨워라. 죽일거니까. "
베라미스의 낮빛이 굳어졌다.
" 쉬버 아모. (Shiver Armor) "
베라미스가 중얼거리며 오른손을 가볍게 움직이자 그녀의 머리 위에서 하얀 기류가 생겨나더니 그녀의 온몸을 보호하듯이 감싸며 은은한 빛을 내기 시작했다.
료겐은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그녀를 노려보다가 물었다.
" 소서리스인가? "
베라미스가 왼손의 스태프를 두손으로 고쳐잡고 데브란트를 보호하듯이 그의 앞으로 나섰다.
" 손에 들고있는 완드 (Wand), 고행의 흔적... 네크로맨서군요. 이분과 어떤 관계입니까? "
" 그를 자카룸에게 보내 줄 관계지. 비키지 않는다면... "
" 비키시오. "
베라미스의 등 뒤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브란트가 벽에 한손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 데브란트, 괜찮은가요? "
데브란트는 베라미스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천천히 그녀의 앞으로 걸어나가 료겐과 마주 섰다.
온몸에 산성의 포이즌을 뒤집어 쓴 초췌한 모습이었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날카로왔다.
료겐이 붉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다가 입을 열었다.
" 이번에는 내가 먼저다. 그리고 마지막일테고. "
뒤쪽에서 쿠오 듀크가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 아, 좋을대로. 나야 좁은 곳에서 싸우는 건 질색이니까. "
료겐이 조용히 뭔가를 중얼거리자 츠츠츠츠 하는 소리와 함께 작고 하얀 뼈조각들로 이루어진 본 아머 (Bone Armor)가 그의 몸 주위를 돌며 감싸기 시작했다.
데브란트는 그의 롱소드를 비스듬히 들어 올렸다.
잠시 고요함이 느껴진다고 생각했을 때 료겐이 손에 든 완드를 휘두르며 날카롭게 외쳤다.
" 본 스피어! (Bone Spear) "
료겐의 앞에서 하얀 기류가 맺히더니 하얗고 커다란 작살이 생겨나 데브란트를 향해 날아갔다.
동시에 데브란트의 발 밑에서 비거 오오라가 발현되며 날아오는 본 스피어를 피한 그의 몸이 바닥을 차고 화살처럼 앞으로 튀어 나갔다.
" 차지! "
데브란트가 쿠구궁 발소리와 함께 료겐의 머리를 향해 롱소드를 내리 찍었다.
순간 료겐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보이며 그의 왼손이 번쩍이더니 작은 뼈조각 같은 회색의 물체들이 왈칵 터져 나왔다.
콰과과곽!
미처 피할 새도 없이 바로 앞에서 수십개의 뼈조각들에 적중당한 데브란트의 몸이 요동치며 뒤로 날아가 동굴 벽에 부딪혔다.
료겐이 음산하게 비웃으며 말했다.
" 같은 방법에 두번이나 당할 것 같은가? "
데브란트가 힘겹게 비틀거리며 일어나려고 했다.
료겐이 한발 앞으로 나서며 다시 캐스팅 하려는데 갑자기 멈칫했다.
언제부터인가 그들이 서있는 어두운 동굴의 벽에 그들의 그림자기 흔들리며 비쳐지고 있었다.
그림자를 비추고 있는 건 베라미스의 한 손 위에서 활활 타오르고 있는 화염의 구체였다.
그녀가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 물러나요, 네크로맨서. "
료겐이 형형한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보았다.
" 멍청한 소서리스군. 지하에서 불장난이라니 숨 쉴 공기까지 다 태워버릴 생각인가? "
베라미스의 입에서 작게 '아' 소리가 흘러 나왔다.
" 그 불 치워. 질식하기 싫으면. 팔라딘을 치운 뒤 상대해.. "
료겐이 갑자기 굳어지기라도 한 듯이 말을 멈추었다.
아리스가 활을 들어 겨냥하고 있는데도 한가롭게 벽에 기대서 팔짱을 끼고 있던 쿠오 듀크가 의아해 하며 말했다.
" 이봐, 왜 그래? "
료겐은 잠시 아무 말도 없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그 불 놔두는 게 좋겠군. 살점이 뜯기는 것 보다는 질식이 나을테니. "
" 무슨 소리야? "
" 저 소리가 들리지 않나? "
그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들에게 동굴 어디에선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점점 그들이 있는 곳을 향해 빠르게 가까워지고 있었다.
" 온다. "
료겐이 내뱉은 말이 조용한 동굴 안에 울려퍼졌을 때 그들이 들은 소리의 주인공들이 양쪽 통로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것은 마치 검은색의 구름 같았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구름이 아니라 날개를 퍼덕거리고 있는 손가락만한 수백 수천 마리 벌레들의 무리들이었다.
쿠오 듀크가 후다닥 그 검은 구름을 피해 공간의 가운데로 달려오며 악을 썼다.
" 젠장, 저런 건 본 적이 없는데 도대체 뭐야? "
료겐이 완드를 들어 허공에서 궤적을 그려내며 내뱉듯이 말했다.
" 블랙 로커스트. (Black Locust) 살아있는 건 뭐든지 먹어 치운다. 본 스피어! "
료겐의 앞에서 하얀 기운이 맺히더니 하얀 마법의 작살이 연속으로 튀어 나갔다.
" 파이어 볼! "
베라미스가 띄우고 있던 화염의 구체가 그녀가 왔던 톨로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블랙 로커스트들을 향해 날아갔다.
본 스피어와 파이어 볼이 블랙 로커스트들의 구름을 향해 날아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충돌했다.
그러자 웅웅거리는 소리가 귀를 찢을 듯이 커지며 블랙 로커스트 무리들이 사방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 삶을 가로막는 죽음의 벽이 되어, 본 월! (Bone Wall) "
료겐이 날카롭게 외치며 두 손을 휘두르자 그와 쿠오 듀크가 들어온 톨로 앞에 마치 뼈들을 모아놓은 것 같은 울퉁불퉁한 회색의 벽이 생겨나 블랙 로커스트가 들어오는 걸 막았다.
그러나 뒤에서 통로를 따라 들어 오려던 블랙 로커스트들이 공격하는지 본 월은 곧 요동치듯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 쿠오 듀크, 남은 것들을 해치워! "
" 제기랄, 내 검이 파리채냐? "
쿠오 듀크는 신경질적으로 외치더니 앞으로 달려가며 등 뒤에 메고있던 자이언트 소드를 꺼내 들었다.
그의 거대한 자이언트 소드가 무서운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가르자 이미 공간 안에 들어와 있던 블랙 로커스트들이 자이언트 소드가 일으키는 바람에 휩쓸렸다.
그러나 그게 다일뿐 자이언트 소드로 어지럽게 날아다니는 벌레들을 잡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단지 계속 자이언트 소드로 바람을 일으켜 블랙 로커스트들이 몸에 접근하지 못하는도록 하는게 전부였다.
" 글래이셜 스파이크! "
베라미스의 양손에서 냉기의 구체가 뻗어 나가 안쪽으로 들어오는 블랙 로커스트 무리들의 일부를 얼려 버렸다.
그러나 검은 구름은 끝도없이 계속 공간 안쪽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 티쓰. (Teeth) "
베라미스가 다시 캐스팅에 들어가려는데 그녀의 옆에서 빛이 번쩍이더니 하얀 뼈조각들이 날아가 블랙 로커스들을 공격했다.
네크로맨서 료겐 하데스가 그녀와 조금 떨어진 곳에 한손을 들고 서있었다.
" 이몰레이션! "
아리스가 쏜 화살이 날아가 통로의 바닥에 꽃히자 통로의 입구에 화염이 피어 올랐다.
양쪽 입구에 생긴 본 월과 불길로 잠시 시간이 생기자 료겐이 베라미스를 보며 재빨리 말했다.
" 워프 포탈을 열수 있나? "
" 아니요. 포탈의 출구를 설치하지 않아서... "
베라미스의 대답에 료겐의 얼굴이 벌레를 씹은 듯 일그러졌다.
" 그럼 꼼짝없이 벌레밥이 되겠군. "
그때 쿠오 듀크가 뒤쪽에서 다급하게 외쳤다.
" 야, 료겐! 저것 부서진다!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료겐이 만든 본 월이 요란하게 진동하더니 펑 소리와 함께 부서졌다.
그리고 부서진 구멍 사이로 검은 구름이 쏟아져 들어왔다.
블랙 로커스트들의 요란하게 웅웅거리는 소리를 내며 사방으로 산개하기 시작했다.
" 아이스 볼트! "
베라미스의 아이스 볼트가 블랙 로커스트들을 향해 날아갔지만 수천 마리는 넘을 듯한 그것들중 일부만이 얼음덩어리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을 뿐이다.
설상가상으로 아리스의 이몰레이션으로 생겨난 화염이 사라지며 다른 통로에서 블랙 로커스트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어느새 다섯사람은 하나같이 창백한 얼굴로 등을 맞대고 공간의 한 가운데에 모여 있었다.
블랙 로커스트들은 천장을 가득 메우며 서서히 그들의 주변으로 접근하기 시작했다.
쿠오 듀크가 떨리는 목소리로 머리 위를 보며 악을 썼다.
" 젠장! 여기까지 와서 벌레밥이 되다니! 료겐, 무슨 방법 없냐? "
" 별로. 운이 좋으면 한쪽 통로를 뚫을 수 있겠지. "
" 너 그렇게 남 얘기 하듯 할거냐? "
그 순간 블랙 로커스트들이 귀를 찢을 듯이 웅웅거리며 그들의 먹이를 향해 덥쳐왔다.
" 디크리피파이! (Decrepify) "
" 아이스 볼트! "
료겐이 상대를 멈추거나 느리게 하는 저주의 마법을 걸고 베라미스가 아이스 볼트를 날렸다.
그러나 수천 마리는 넘는 블랙 로커스트들의 일부만이 멈추거나 얼어버렸을 뿐, 나머지 블랙 로커스트들이 날개를 퍼덕거리며 달려들었다.
아리스는 눈앞을 까맣게 메우며 날아오는 블랙 로커스트들을 보며 떨리는 손으로 등을 맞대고 있는 데브란트의 손을 잡았다. 함께 죽을 수 있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그녀가 데브란트의 손이 얼음처럼 차갑다고 느꼈을 때 그의 입에서 낮지만 묵직한 한 마디가 흘러나왔다.
" 홀리 프리즈. (Holy Freeze) "
데브란트의 발 밑으로 수정처럼 맑고 푸른빛의 오오라가 발현되는 순간, 그들을 향해 덥쳐오던 검은 구름이 하얗게 변해버렸다.
사방에 깔린 수천 마리의 블랙 로커스트들이 하나같이 서리라도 맞은 듯 하얗게 얼어붙어 느릿느릿 퍼덕거리거나 아예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동굴의 천장과 벽, 바닥까지도 얇게 얼음이 달라 붙어 주변은 순식간에 눈이라도 내린 듯 하얗게 변했다.
" 오래가지 못 할거요. "
데브란트가 금방이라도 쓰러질듯이 두 손으로 롱소드를 땅에 박아 기대선 채 사그러져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등을 맞대고 서있는 네 사람 모두 순식간에 하얗게 변해버린 주변을 보며 멍해진듯 했다.
" 하하하, 멋진 친군데! "
쿠오 듀크가 웃음소리를 터뜨리고 앞으로 나서며 자이언트 소드를 휘둘렀다.
넓은 자이언트 소드의 검신에 맞은 블랙 로커스트들이 파팍 소리를 내며 가루가 되어 흩어져 나갔다.
쿠오 듀크가 선두에 서서 얼어붙은 블랙 로커스트 무리들을 헤쳐 나가고 다른 사람들이 그 뒤를 쫓아 달려갔다.
아리스와 베라미스는 제대로 걷지 못하는 데브란트를 부축했다.
통로 밖으로 나서자 베라미스가 뒤로 돌아 체인 라이트닝을 캐스팅했다.
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얼어붙은 지하동굴 안을 눈부신 번개의 줄기가 채우며 느릿느릿 쫓아오는 블랙 로커스트들을 태워 버렸다.
그들은 혹시 남아있지 모를 블랙 로커스트들을 피해 꼬불꼬불한 길을 따라 계속 달려갔다.
한참을 달려가다 앞서가던 쿠오 듀크가 걸음을 멈추더니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잠깐 쉬자고.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달릴수는 없으니까. "
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뒤에서 쫓아오던 네 사람이 제각기 신음소리를 흘리며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