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서울산본교회가 지난해 산울교회로 이름을 바꿨다. 교회 이름을 바꾸는 일은 평범한 사건이지만, 목회자의 성찰과 다짐이 특별한 사건으로 만들고 있다. 이문식 목사는 개척한 지 10년이 지나는 동안 '남서울'이라는 교계에서 공인받은 이름을 달고 개척하고 목회하는 프리미엄을 누리는 것이 괴로웠다고 고백했다. 그는 주변 개척 교회 목회자들에게 절망감과 박탈감을 심어주는 일은 그만하자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지난해 초 다른 교회에서 수평 이동을 하는 새신자는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자신이 직접 새신자를 상담하면서 이사하지 않고 교회만 옮기는 교인이면 주변에 건강한 교회를 추천했다.
대형 교회들이 수평 이동을 통해 성장하는 한국교회의 풍토에서 1000명의 재적 교인을 둔 산울교회는 배수진을 친 셈이다. 이 목사도 전도를 하지 않으면 교인이 해마다 100명꼴로 줄어 10년이 지나면 문을 닫을 것이라고 말했다. 게다가 교인들과 협의해 300~500명 규모의 두세 교회로 분립하려는 꿈까지 꾸고 있다.
이 목사는 수평 이동 교인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하면서 교회의 체질도 개선했다. 기존의 구역 조직을 정리하고 가정 교회로 전환한 것이다. 관계를 중심으로 10~20명 단위로 교회 안에 가정 교회를 형성한다. 평신도가 이끄는 가정 교회는 평일에 한 번씩 예배를 드리며 서로의 고민과 영적 과제를 나눈다. 가정 교회의 목자는 철저하게 섬기는 사람들이다.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을 목자로 세웠다고 이 목사는 말했다. 가정 교회는 교인들만의 모임이 아니라 불신자들도 자연스럽게 참여하는 열린 공동체이며, 가정 교회 단위로 선교사를 지원하는 선교 공동체다.
산울교회는 이전부터 새롭고 개혁적인 시도를 하는 교회로 알려졌다. 목사와 장로 모두가 6년을 시무한 뒤 신임 투표를 하는 임기제를 도입했다. 담임목사가 교인의 헌금을 챙기지 않는다. 누가 얼마를 내는지는 당사자와 재정 담당자만 알도록 되어 있다. 이 목사는 "그렇게 했더니 나도 교인들 만나기 편하고, 오히려 헌금이 더 늘었다"고 말한다. 개척한 지 10년도 안 된 교회가 분립을 추진했다. 그렇지만 그 이전보다 교인이 더 늘었다고 한다. 교회의 식당을 이웃에게 개방해 저렴한 가격에 점심을 제공하고 어려운 이웃도 돕는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평안한 교회, 넉넉한 교회로 소문났다. 산울학교는 새터민 대학생들의 후원하고, 대안학교도 운영한다. 이 목사는 이런 일들로 늘 바쁜 나날을 보내지만, 그만큼 교인들이 그와 뜻을 같이하는 동역자로 성숙했다.
산울교회는 다른 교회에서 보기엔 상당히 개혁적인 목회를 하지만, 이 목사는 절대 서두르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이면 교인들에게 말은 하지만 공감할 때까지 1년이고 2년이고 기다린다고 한다. 과거 민중 교회를 이끌면서 노선 다툼 때문에 교회가 깨진 값비싼 경험을 치른 뒤 얻은 목회 철학이다. 이 목사의 기다림 덕분일까. 산울교회는 급진적인 변화 속에서도 늘 안정을 누렸다. 지난 1월 25일 산본 산울교회에서 이 목사를 만나 목회 이야기를 들었다.
다음은 이문식 목사와 나눈 인터뷰 요약문이다.
남서울산본교회에서 산울교회로 이름을 바꾼 이유는.
▲ 이문식 목사는 남서울이라는 브랜드를 달고 고속 성장을 한 것이 다른 목회자들에게 박탈감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 ||
교회를 개척하기 전에 남서울교회에서 홍정길 목사님을 모시고 사역했다. 독립해서 개척했지만, 홍 목사님에 대한 예우를 지키고 싶었다. 또 나를 따라온 남서울 출신 사람들을 배제한다는 인상을 심어주기 싫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당회가 생기면 이름을 바꾸겠다고 공언했다. 그 약속을 10년 만에 지킨 셈이다. 교회는 그 지역 사람이 주도해야지, 소수의 개혁 세력이 장기간 주도하면 곤란하다. 10년 전 남서울교회에서 13가정, 20여 명이 나와 함께 산본에 왔다. 그렇지만 우리 교회를 개척한 주체는 산본 지역에서 나올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창립식을 하기 전에 함께 대안적인 교회를 창립할 사람을 찾아다녔다. 하나님은 100일 만에 100명의 사람을 붙여주셨다. 11월에 창립식을 했는데, 연말이 되면서 교회 재정과 부엌살림을 산본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
'산울'은 무슨 뜻인가.
예수님의 잔치 비유에 나오는 말이다. 사람들을 잔치에 초청해도 오지 않자, 주인이 종들에게 산울타리로 가서 사람들을 강권하여 데려오라고 말한다. 산울은 선교적인 접촉점이고 경계다. 이스라엘 공동체에 들어올 수 없었던 사람들, 이방인들을 만날 수 있는 곳이 산울이다. 교회는 산울 같은 곳, 주변부를 지향해야 한다.
"남서울이란 브랜드를 쓰는 게 괴로웠다"
교회 이름을 바꾼 것은 '남서울'이라는 브랜드를 이용해 성장한 것에 대한 반성하는 차원이라고 말한 것을 들었다.
우리 교회가 남서울교회로부터 재정 지원을 받은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남서울교회에 대한 신뢰도에 힘입어 성장한 것이 사실이다. 나와 교인들이 열심히 노력했기 때문이지만, 우리 교회의 성장은 우리의 노력과 남서울이라는 가치가 상승효과를 일으켰다. 특히 개척 초기에는 남서울이라는 브랜드 효과가 컸다. 그렇지만 그렇게 목회하는 게 괴로웠다. 우리 지역의 작은 교회들에게 내가 얼마나 많은 박탈감을 주었을까, 개척 교회가 우리 교회를 보고 얼마나 절망할까를 생각하면 괴로웠다. 나도 구로희년교회에서 아무리 노력해도 50~60명을 넘지 못하던 시절을 겪었기에 작은 교회가 느끼는 박탈감이 무엇인지 잘 안다.
이름을 바꾸는데 10년이 걸렸다.
대안이 필요했다. 솔직히 두려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이름만 바꾼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우리 교회의 내적인 개혁도 담보해야 했다. 그 가운데 하나로 분립 개척하는 것을 생각했다. 우리는 큰 나무가 되는 것보다 숲이 되기를 지향했다. 5년 만에 출석 교인이 500명을 넘었다. 그래서 분립을 추진했다. 어떤 교회들은 분립하면서 먼 곳으로 내보내지만 나는 가까운 곳에 개척하라고 권한다. 교인들이 이곳에 사는데 먼 곳으로 가라면 교인들보고 가지 말라는 말이다. 그래서 가까운 인덕원에 교회를 분립했다. 10년 후면 은퇴하는데, 그때까지 10개 교회를 분립 개척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지난해 초 수평 이동하는 교인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도 같은 맥락이었나.
▲ 이문식 목사는 교회 이름을 바꾸기에 앞서 수평 이동하는 교인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전도에 힘쓰는 교회로 체질을 개선하고, 주변 교회들과 경쟁하는 구도에서 상생하는 관계로 거듭나기 위해서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이사 오지 않고 교회만 옮기는 사람은 받지 않기로 했다. 대형 교회들은 교인들의 수평 이동으로 성장한다. 대형 교회는 진공청소기 같이 모든 교인들 빨아들인다. 상생의 목회를 해야지, 젊은 목사들에게 절망감만 심어주면 안 된다. 물론 개척 초기에는 뜻있는 이들이 모일 필요도 있다. 그렇지만 300~500명이 모이는 교회 정도면 그들을 받지 않아도 충분히 자립할 수 있다. 더 욕심 부리면 곤란하다. 우리 교회는 1000명 이상이 등록했고 주일에 770명가량이 모인다. 나도 500명이 넘어가니까 모르는 사람이 생기더라. 공동체성이 약해지는 시점이다. 큰 교회가 수평 이동을 반대한다고 하면 냉소적인 시선을 보낼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상징적인 효과가 있다. 이 운동이 많은 중형 교회로 확대되면 실직적인 효과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전도 안 하면 10년 안에 망한다"
수평 이동을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가장 걸린 점은 무엇이었나.
교회가 점점 성장하면서 교인들이 영적 소비자로 전락하는 것을 보았다. 마음에 드는 교회를 찾아 헤매는 소비자들에게 교인으로서 품위는 찾을 길이 없다. 나도 설교하면서 조금만 못하면 저들이 떠나겠지 하는 불신이 들었다. 자연스럽게 목사와 교인의 관계가 피상적인 수밖에. 재적 교인이 1000명을 넘기면서는 고민이 더 커졌다. 설교의 영적 영향력도 갈수록 약해지는 것 느꼈다. 다른 교회에서 받은 상처도 어느 정도 치유하면 굳어진다. 관계가 깊어지지 않는다. 기능적이고 계약적인 관계 속에서 내가 지쳤다. 왜 이런 목회를 해야 하는 싶었고, 돌파구는 보이지 않았다. 앞이 캄캄했던 것은 전도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잘 가르친다는 소리는 들었지만 전도에는 자신이 없었다. 수평 이동한 교인을 안 받겠다는 선언은 나에게는 교회 문을 닫겠다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현실적인 대안이 필요했다.
수평 이동 교인을 안 받겠다고 선언했을 때는 전도에 확신이 들었나.
내가 안식년을 쓴 2004년에 죽은 목회를 했구나 하는 반성을 했다. 수평 이동은 교인들 입장에서는 교회 쇼핑이고, 예수님 입장에서는 양 도둑질이다. 나는 다른 교회에서 상처 받은 교인을 치유하는 AS 목회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내가 다른 교회에 상처를 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한계시록을 묵상하다가 사데교회가 살아있는 것 같지만 죽은 교회라는 말씀이 꼭 남서울산본교회를 두고 하신 말씀으로 들렸다. 급성장했다고 소문났지만 전도를 못해 기존 신자만 긁어모은 것이었다. '이건 아니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전도 목회할 수 있으면 하는 간절한 바람도 들었다. 휴스턴침례교회 최은기 목사를 방문해 전도에 대한 가능성을 배웠다. 내가 보기에 그 교회는 개인 구원에만 집중하는 보수적이었다. 복음에 대한 총체적인 이해는 약하지만, 전도에 대한 열정과 방법론은 제대로 배울 수 있었다.
찾아오는 이들은 거절하는 것도 쉽지 않겠다.
우리는 오만하게 생각할까봐 조심스럽다. 상처 받아 오는데, 오죽하면 교회를 떠나겠는가. 설명하는 게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새신자를 만나는 일을 내가 직접 챙긴다. 등록을 받을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한다. 우리 교회가 전도하는 교회로 체질을 바꿀 때까지는 기존 신자를 안 받기로 했다고 양해를 구하고, 주변에 좋은 교회를 소개한다. 은혜 받는 사람, 섭섭하게 느끼는 사람 가지가지다.
수평 이동 교인을 안 받으면 얼마나 타격을 입는가.
보통 해마다 150명 정도가 등록하고 50명 정도가 이사나 결혼 등을 이유로 교회를 떠난다. 30~40대가 주를 이루는 교회의 특징이다. 그런데 수평 이동 교인을 안 받고 전도도 안 하면 1년에 100명씩 줄어든다. 10년이면 교회 문 닫아야 한다. 전도 안 해서 망하는 교회가 있으면 좋은 사례가 될 것이다. 우리로서는 배수진을 친 결정이다. 전도하지 않으면 교인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지난해 1년간 수평 이동 교인 안 받은 결과는.
▲ 이문식 목사는 가정 교회를 세우면서 자신은 평신도를 목회자로 세우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뉴스앤조이 신철민 | ||
그래도 많이 늘었다. 작년 1년 동안 생전 처음 교회에 왔다는 사람 있더라. 내가 세례 준 숫자보다 작년 한 해 등록한 사람이 더 많았다. 분명 우리 교회가 전도를 잘할 시스템은 아닌데, 뜻만 품어도 불신자들이 찾아온다. 하나님이 격려한 것으로 생각한다.
주변의 반응은 어떤가.
우리 교회가 건강하고 개혁적인 교회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물론 수평 이동하는 경우도 많았다. 우리 교회가 점점 커지면서 군포 지역의 목회자들과 관계가 불편해졌다. 나 스스로도 후배들에게 희망이 아닌 절망을 주는 목회를 한다는 것이 힘들었다. 우리 교회가 작을 때는 주목하지 않다가 점점 커지니까 주변에서 전부 힘들어했다. 주변 목회자와 관계가 처음엔 형제 목회자요, 동역자였지만 어느 순간 경쟁자로 변했다. 수평 이동 교인을 받지 않겠다고 선언 뒤로는 관계가 많이 좋아졌다.
무엇보다 나와 같은 뜻을 가진 목회자들이 많아 감사한다. 샘물교회 박은조 목사, 일산은혜교회 강경민 목사 등도 수평 이동 교인을 안 받겠다고 선언했다. 샘물교회의 경우, 분당에서는 큰 사건이다. 1만 명 규모로 클 수 있는 교회인데 어디 쉬운 결정이었겠나. 그렇지만 이런 결단이 확산되어야 한다. 굳이 운동을 할 필요도 없다. 목사 개인이 결단으로 가능한 일이다. 떠돌이 교인을 AS할 교회도 필요하겠지만 한국교회에 만연한 풍토를 바꿀 필요가 있다.
"나는 평신도를 목회자로 세우는 사람"
가정 교회로 전환했다고 알고 있다. 전도를 위한 시스템 구축인가.
우리가 추구하는 가정 교회는 셀과 비슷하지만 더 독립적이다. 가정 교회 하나가 각기 교회로서의 고유한 기능을 수행한다. 평신도를 목사로 세웠다. 안수 받은 목사는 아니지만 목사의 기능을 상당 부분 위임했다. 사실 내 양을 먹이라는 말씀을 목사에게만 적용하는 건 곤란하다. 그 말씀은 온 교인에게 적용해야 할 말씀이다. 목자의 역할을 온 교인이 공유해야 한다.제자 훈련이 평신도의 사도성을 일깨웠다면, 가정 교회운동은 평신도의 목회자 정신을 회복하는 운동이다. 내 역할은 평신도를 목회자로 세우는 일이다.
가정 교회는 구역처럼 지역 단위로 조직했는가.
아니다. 관계 중심적인 네트워킹이다. 내가 전도하는 사람은 내가 돌보도록 구성했다. 그럼 멀리서도 찾아온다. 지역·나이·연령이 아니라 철저하게 인격적인 관계 중심으로 가정 교회를 조직했다. 가정 교회는 평일에 모이지만 여기서 분당으로 가고, 성남과 수원·용인에서도 온다. 목자와의 깊은 관계 때문에 역동적인 움직임이 가능하다.
산울교회의 가정 교회 현황은.
56개의 가정 교회가 활동하고 있다. 주일에 770명일 출석하는데(청년 180명을 제외하고), 500명이 가정 교회에 출석한다. 70% 정도 수준이다. 85~90%로 끌어올리고 싶다. 잘되는 교회는 120%가 가정 교회에 출석한다. 불신자가 참여하기 때문이다. 가정 교회는 믿는 사람끼리의 폐쇄적인 모임이 아니라 열린 공동체여야 한다.
가정 교회가 하는 일은.
가정 교회가 지향하는 바는 서로의 짐을 함께 지는 공동체다. 그래서 가정 교회의 목자는 섬기는 일을 잘하는 사람으로 세웠다. 누군가 교통사고가 났다. 그때 가장 먼저 전화를 걸고 싶은 사람이 목자다. 새벽이라도 현장으로 달려갈 사람이 목자다. 그 사람이 간다고 고장 난 차를 고칠 수야 없겠지만 함께 기다려줄 수 있는 사람이 목자다. 섬김으로 복음의 문을 열자는 것이다.
기존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은 섬기는 훈련이 안 돼 있다. 자신을 인정해주지 않으면 쉽게 삐친다. 주변 사람을 너무 피곤하게 한다. 이런 사람들은 가정 교회의 목자가 될 수 없다.
가정 교회에 참여하는가.
나도 가정 교회의 목자다. 금요일마다 처음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들로 구성된 가정 교회를 인도하고 있다. 예비 목자를 세우는 일도 내 몫이다. 다음에는 40대 미혼 여성으로 구성된 가정 교회를 섬기고 싶다. 그들의 삶과 고민을 잘 듣고 나누고 목자를 세워, 미혼 여성들의 공동체를 세우고 싶다.
가정 교회는 재정도 독립되어 있는가.
가정 교회는 따로 헌금하지 않는다. 대신 자발적으로 선교사들과 연결하도록 제안한다. 여행 대신 단기선교를 다녀오라고 권고한다. 1년에 한 번씩 20년만 한 마을에 지속적으로 찾아가봐라. 적은 돈이면 원주민의 학생의 학비나 수술비를 지원할 수 있다. 그렇지만 그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국가 차원이나 대형 NGO가 아니라 이러한 방식으로 제3세계를 돕는 것도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관계를 통해 돕는 게 제일 좋으니까.
가정 교회 단위로 지역운동을 할 수도 있겠다. 기획하는 것이 있는가.
초대 교회 때는 상산 단위가 가정이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지금은 생산 단위의 변화를 기초공동체로는 변화시키기 힘들다. 그런 일을 할 곳은 노조다. 그렇지만 소비의 패턴을 바꾸고 지역 문화를 꽃피우고 생태 운동을 하는 것은 가능하다. 가정 교회가 지역사회에서 소비자운동이나 생태운동을 이끌 수 있기를 기대한다. 가정 교회들이 그렇게 성장할 수 있을지 기대를 가지고 지켜볼 생각이다.
▲이문식 목사는 "교회가 자립하는 데 온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이미 자립해서 재생산이 잘되는 구조를 찾는 게 현명하다. 큰 교회가 하나 있는 것보다 같은 지향을 가진 건강한 교회가 여럿 있는 것이 훨씬 좋다"고 말했다. | ||
"교인이 공감할 때까지 기다린다"
교회의 구조를 뜯어고치는 일에 만만한 일을 아니다. 내부의 반대는 없었나.
2004년에 안식년을 쓰고 2005년에 돌아와 가정 교회를 하자고 설득했다. 그렇지만 강요하지는 않았다. 내게 확신을 주셨다면 교회 리더들에게도 확신을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 그 때까지 기다린다. 연초에 와서 내 뜻을 정했다. 그리고 장로와 안수집사·권사 등 50여 명의 중진을 네 차례에 걸쳐 가정 교회를 잘하는 곳으로 파송해 체험하게 했다. 가정 교회를 하든 안 하든 보고 나서 판단하는 취지에서다. 이들이 다녀와서 전원에 가정 교회를 하자고 찬성했다. 찬성은 하지만 자신은 못하겠다는 사람이 절반이었다. 그렇지만 요즘 그들도 가정 교회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견학했을 때는 도저히 못할 것 같았지만 이제 여러 사람이 하는 것을 보니 할 만하다 싶은 것이다. 무엇보다 감사한 것은 논의 과정에서 이탈하는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다. 내가 서둘렀으면 실패했을 것이다. 공감하고 찬성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오히려 더 빠르다.
늘 서두르지 않고 교인들이 공감할 때까지 기다린다고 강조하는데, 특별한 사건이 있는가.
80년대 구로희년교회를 목회할 때 노선 싸움이 벌어졌다. 나는 시민운동이 대안이라고 생각했고, 나와 함께 하던 청년들은 민중운동 노선을 고수했다. 당시 나는 너무 조급했다. 그들이 시대의 변화를 읽지 못한다고 생각했다. 결국 우리는 쪼개졌고 나는 남북나눔운동과 <복음과상황> 창립에 참여했다. 나중에 나와 싸우던 친구들도 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에서 일하는 것을 보았다. 내가 조금만 참고 기다렸으면 그들을 잃지 않았을 텐데 하는 후회가 들었다. 그 뒤로는 아무리 급해도 나 혼자 달려가지 않는다. 그리고 기다렸다가 모두가 공감할 때 움직이는 게 훨씬 빠르다. 기다려주는 게 리더십의 특징 중 하나다. 내가 조금 빨리 인식했을 뿐이다. 조금 시간이 지나면 많이 사람들이 그 길로 가는 게 좋겠다고 말한다. 내 잎이 아니라 사람들의 입으로 그렇게 하자고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조급증만 버리면 된다.
지금 꿈꾸는 일이 있는가.
마음속으로는 한 번 더 분립하고 싶다. 300~500명씩 두세 교회로 나누는 것이다. 300명 이하이면 자립하기 위해 많은 힘과 시간을 쏟아야 한다. 교회가 자립하는 데 온 에너지를 쓰는 것보다 이미 자립해서 재생산이 잘되는 구조를 찾는 게 현명하다. 큰 교회가 하나 있는 것보다 같은 지향을 가진 건강한 교회가 여럿 있는 것이 훨씬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