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16년 5월 초, 전도가 유망한
교구 사제 라우렌시오 마우리치오 벨비소티 신부가
카푸친 작은 형제들의 집 대문을 두드리며
수련자로 입회시켜 달라고 했을 때,
그 소식을 들은 모든 사람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
이미 성인은
피정 설교가로서 너무나 잘 알려진 사람이고,
교구에서도 아주 촉망 받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성인의 가족들은 그동안 성인에게 지원되었던
양질의 모든 교육들이
쓸모없게 되어버렸다며 몹시 화를 내었고,
교구 내 신자들도 이토록 좋은 목자를
다른 곳에 보내야 한다는 것에 적잖이 언짢아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엇이 벨비소티 신부를
무엇이 그토록 사로잡았기에,성인을 움직이게 만들었을까?
카푸친 관구봉사자 역시
이 질문을 벨비소티 신부에게 했고,
벨비소티 신부는
수도회에 입회할 마음을 털어놓음으로서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했다.
“저는 이제까지 제 뜻을 이루어 왔습니다.
하지만 이제 제 안의 목소리는,
제가 주님의 뜻을 이루고자 한다면
순종의 길을 따라야 한다고 알려줍니다.”
그리하여 1716년 5월 25일,
명문 출신 벨비소티 신부는
거친 카푸친 수련자의 시련복을 입게 되었고,
그 이후로는 ‘산티아의 이냐시오 형제’라는
새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산티아의 성 이냐시오의 세례명은
라우렌시오 마우리치오였다.
성인은 1686년 6월 5일,
북 이탈리아, 베르첼리 지방의 산티아에서 태어났다.
상류층인 ‘베드로 바오로 벨비소티’와
그 부인 ‘마이라 엘리사벳 발로코 사이에서 태어난
6명의 자녀 중 넷째였다.
성인이 만 7살 되던 해에 아버지를 잃자
성인의 어머니는 학식 있고 독실한 사제이자 친척인,
‘바르톨로메오 괄료’에게 아들의 교육을 맡겼다.
교회 성직자의 삶에 매력을 느꼈던
라우렌시오 마우리치오는
초등교육의 과정을 밟은 후,
철학과 신학을 배우기 위해 베르첼리로 떠났다.
사제서품을 받은 1710년, 성인은
베르첼리에 머물면서 아보가드로 가문의 집안 사제로,
그리고 가정교사로 활동했다.
또 사제직의 초기 시절, 성인은 예수회의 사도직,
특히 예수회 대중 선교에 참여하여
그들을 도와주었다.
그러다가 성인의 영성지도자가 될
예수회의 카챠말라 신부를 알게 되었다.
벨비소티 신부의 고향 산티아는
어느새 유명해진 성인을 차지하기 위해
그곳의 유명한 대성당의 주임의전사제로 임명했다.
하지만 아보가드로 가문 또한
카사노바 엘보 본당의 관리 권한을 가진 이유로
그 본당의 주임 신부로 성인을 지명했다.
이제 서른에 들어서는 벨비소티 신부,
하지만 성인은 뭔가 다른 것을 찾고 있었다.
1716년 5월 25일,
성인은 양측의 제안을 모두 사양한 뒤,
후일 외방선교를 하려는 마음으로
토리노 키에리 수련원에서
카푸친 작은 형제회에 입회하였다.
성인은 그곳에서 ‘이냐시오’라는 수도명을 받았다.
완덕을 향한 굳센 의지와 카푸친 생활양식에 대한
성인의 온전한, 기쁘고 자발적인 실행은
수련원의 가장 나이든 형제들의 감탄마저 이끌어 내었다.
성인은 살루쪼와 키에리, 그리고 토리노 내의 ‘
몬테 데이 카푸치니 카푸친들의 산’에서
몇 년간 카푸친 양성기를 보낸 후,
1731년 8월 31일,
관구의회(관구총회) 결정에 따라
모도비로 보내져
수련자들의 스승(수련장)으로 임명되었다.
수련자들의 스승, 성 이냐시오 형제는
회칙과 회헌 준수에 대한 열정을
젊은 제자들에게 불어넣는 방법을 알았다.
특히 양성장으로서
생활양식의 수많은 실질적인 면을 한가지의 원칙,
즉 사랑의 원칙으로 축소하는 성인의 능력에서
그 천재성이 빛났다.
그러나 그 사랑에는 엄격함이 내포되어 있었다.
불볕더위에 한 수련자가 그에게
“수련장 형제님, 분수에 가서
물 한 모금 마셔도 될까요?” 하고 부탁했는데,
이냐시오 형제는 “오늘 누구의 축일입니까?” 하고 물었다.
이에 수련자는 “성 라우렌시오
(석쇠에서 구워져 순교했던)
순교자 축일입니다.”라고 대답하자
성인은 “아아! 그분이 석쇠에 누었을 때에
분명 목이 말랐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 말의 뜻을 알아챈 수련자는
자신의 목마름을 참기로 했다.
그 시절, 새 수련자들은 입회할 때에 삭발을 해야 했다.
세속에서 머리 모양에 신경 쓰던 신입회원들이라면
흔히들 이 삭발식에 충격을 받는다.
삭발하기 전, 이냐시오 형제가 한 수련자에게
“멋진 머리카락을 잃으면 괜찮겠어요?”라고 묻자
그 수련자는 문제없다고 대답했다.
이에 이냐시오 형제는
“나가서 이것에 대해 좀 더 기도하세요.” 라고 말했다.
그 후 이냐시오 성인은
그 수련자에게 똑같은 질문을 두 번 더 했고,
두 번 다 똑 같은 대답을 듣게 되자,
또다시 재차 그 수련자에게 다시
생각해보고 기도하라며 밖으로 내보냈다.
이렇게 함으로써
성인은 수련자들에게 중요한 결정을 할 때에
‘주님의 의견을 구함’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1744년, 이냐시오 성인은 콩고로 외방 선교를 떠난
자신의 수련자였던
‘베짜 다스티의 베르나르디노 이냐시오’ 형제가
심한 눈병에 걸려 더 이상 선교할 수 없을 정도의
위험에 빠져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기도해달라는 부탁을 듣고,
성인은 성체감실 앞에 엎드려 이렇게 기도했다.
“나의 주님, 병일랑은 당신의 좋은 일꾼에게서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저에게 옮아가기를,
그럴 뜻이 있으시면, 당신 뜻대로 하시옵소서.
당신의 더 큰 영광을 위하여
저는 이를 기꺼이 받아들이옵니다.
그러자 그 선교사의 눈병은 나았고,
즉시 사도직을 다시 시행할 수 있었다.
하지만, 비슷한 시간에 이냐시오 형제의 눈은 흐려졌고,
제대로 회복하지 못했기에
성인은 수련장의 임무를 그만두어야 했다.
침묵 속에서 묵상 하며,
오랜 시간 성체감실 앞에서
밤늦게까지 기도하기를 매우 좋아했던 그였지만,
한편으로는 형제회 내의 병자들이나
어려운 형제들을 섬기기 위해 소매를 걷어 붙였다.
성인은 여러 번 이런 말을 하곤 했다.
“천국은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곳이 아닙니다!
그러니 일이나 합시다.”
이 시절, 많은 기적들이 그에게 일어나서
사람들은 그를 ‘산의 작은 성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왕실은 물론이고,
세례자 요한 로에로 토리노의 대주교,
빅토리오 델렐란체 추기경과
산타 비토리아의 카롤로 카이소티 대법관 등과 같은
피에몬테의 저명인사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다.
산티아의 성 이냐시오는
가끔 손에 묵주를 든 채로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도 그는 성모님께 대한 깊은 신심을 품은 채
묵주 기도를 자주 바치곤 했다.
성인은 마리아 성모님에 대해 말할 때,
그분을 자기 엄마나 모후, 자신의 변호인,
영감을 주시는 분으로 묘사하곤 했다.
죽음을 한 달 남긴 1770년 8월의 어느 때,
요양원 경당 제단 위 십자고상 앞에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이냐시오 형제를
어떤 형제가 우연히 목격했다.
성인의 팔은 십자가에 매달린 것처럼 벌려져 있었고,
그의 몸은 꼼짝도 하지 않은
채 땅바닥에서 들어 올려져있었다.
하지만 이냐시오 성인을 잘 아는 이들에게
이것은 크게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그토록 자주 기도하며 관상에 빠진 그를
수련자들이나 다른 형제들이
흔들어 깨우며 정신을 차리게 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임종의 고통 중에서도 성인은 충만한 기쁨이 가득하였다
.“수호자 아버지, 죽음을 맞는 어떤 성인들도
두려움에 떤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토록 고요히 느끼다니,
저의 신뢰가 너무 지나친 것은 아닌지 두렵습니다.
제발 형제님의 사랑으로 저에게 조언을 해주십시오.”
1770년 9월 22일 밤, 이냐시오 형제에게
죽음이 임박했다는 소식을 들은 수호자는
형제들에게
“서두를 필요 없습니다.
평생 순종으로 살아온 사람이니 순종의 허락 없이
감히 떠나지는 않을 거예요.” 라고 말하고는
황소걸음으로 천천히 길을 나섰다.
12시 자정이 되자,
하느님의 이름으로
이냐시오 형제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 그리스도의 영혼이여, 이제 떠나세요..
아멘.” 기도가 끝난 후, 수호자 형제는
성인에게 “좋은 여행 되십시오.” 라며 마지막 인사를 했고,
산티아의 이냐시오 성인은
그제야 고요히 자신의 영혼을 주님께 맡겨드렸다.
성 이냐시오의 성덕의 명성과
성인의 중재로 일어난 수많은 기적들 덕분에
성인의 시성 운동은 신속히 진행되었다.
이 시성운동은 1782년에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혁명과 그 후에 벌어진 수도회들의 폐쇄 때문에
사실상 오래 시간이 소요됐다.
1966년 4월 17일, 180여년이 지나고서야
바오로 6세 교황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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