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육점 주인 장팔이 노련한 솜씨로 칼을 갈고 있다. 고기를 썰기 시작한다. 비계가 들어선다. 살집이 좋은 건장한 체격이다.))
[비계] 어떻게 장사는 잘 됩니까?
[장팔] 어 왔나? (고기를 계속 썰며) 뭐 그냥--- 되는 날 있고 안 되는 날 있고 들쑥 날쑥이지. 그래도 그만 그만 먹고는 살아. 애들 학교 다 보내고. (갑자기 팔을 걷고 알통을 만들어 보인다) 하지만 이 팔뚝 한번 볼텐가. 차돌처럼 딴딴하잖나. 돈주고 헬스크럽 엘 왜 다니나. 병원엘 왜 다니구. 칼질이 곧 운동이오 건강 아닌가.
[비계] 허허 주인장, 나도 은혜를 아는 놈이오. 아킬레스건이 어디라는 거 확실히 배워 가는 거 아닙니까. 아킬레스 건.
((비계 퇴장하며 무대 어두워진다))
[장] 2장
비계의 지하실
((어둠 속에서 숨찬 호흡소리가 들려온다. 오른쪽 한곳에 조명이 들어오면, 민숙이 훔쳐보고 있다. 어둠 속에서 호흡소리 계속된다. 무대 밝아지면 비계가 컨베이어 밸트 위에서 달리기를 하고있는 중이다. 바로 옆 마네킹에 돼지고기가 통째로 걸려있다. 비계, 달리기를 끝내고 내려선다. 몸에 문신이 지저분하다. 민숙, 아직도 숨어서 지켜보고 있다. 비계, 호흡을 가다듬은 뒤 칼을 집어든다. 드디어 돼지고기의 아랫배 즉 마네킹의 복부를 찔러댄다.))
[비계] (찌르며) 얍 얍!
[민숙] (못 볼 것을 본 듯 비계 쪽으로 조심스럽게 다가간다) 오빠---
[비계] (약간 당황) 아니--- 너---
[민숙] 대체 뭐하고 있는 거야 지금?
[비계] (손을 내저으며) 가. 여기 얼씬거리지 말라고 했잖아!
[민숙] 정말 정육점에 취직하려는 거야, 마음 잡고?
[비계] 취직? 미쳤냐?
[민숙] 아니면 웬 칼질이냐구, 새벽부터.
[비계] 그--- 그게---
((비계, 핑계거리를 찾는 듯 한동안 주춤거린다.))
[비계] (다시 푹 찌르며) 씨팔 열 받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냐 열! (계속 몇 번 찌른 뒤 민숙 쪽으로 돌아선다) 너 판문점이라고 알아?
[민숙] 오빠 나 대학생이야.
[비계] (열 올리며) 그래 판문점이 어떤 곳이냐, 38선 아니냐 휴전선! 무슨 회담인가 하는 곳. 노래도 있잖아. (노래까지 한다) 눈 녹은 삼팔선에 꽃이 핍니다. 철조망은 녹슬고 총칼은 빛나---
[민숙] 됐어 오빠. 노래가 중요한 거 아니잖아?
[비계] 좋아--- 그럼 총칼이 왜 빛 나냐. 총칼이 왜 빛나? 때려잡자 공산당 때문에 번쩍번쩍 빛 나는 거 아니냐, 국민의 재산과 안녕을 위해. 2천--- 2천3--- 2천3백만 국민을 위해!
[민숙] 오빠, 대한민국 국민 2천 3백만 아니야.
[비계] 3천 2백만!
[민숙] 3천 2백만도 아니고--- 남북한 합쳐 7천만이야.
[비계] 그래 맞아, 7천--- 7천만! (하다가) 그런데 너 지금 뭐라고 했냐? 합쳐서?
[민숙] 으, 남북한 합쳐서.
[비계] (어리벙벙하다) 합쳐? 합친다구? 그걸--- 왜--- 합치냐?
[민숙] 남북한 합쳐야하고 또 결국 그렇게 될 테니까.
[비계] 너 어디 아프냐? 약 먹은 거 아냐? 때려잡자 공산당인데 지랄 났다고 합쳐! (칼로 찌르며) 작살을 내야지 작살!
[민숙] (한숨을 푹 내쉰다) ---
[비계] 작살을 낼려면 누시깔 똑바로 뜨고 경계강화 확실히 해야될 거 아니냐. (다시 찌르며) 헌데 상놈의 새끼들이 술을 쳐 먹질 않나, 어떤 새끼는 북한에 올라가 북한 년하고 오입질을 하질 않나. 판문점에서. 한 맺힌 판문점에서! (또 찌른다) 씨팔 여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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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슨 당나라 군대냐, 아니면 빨갱이 양성소냐!
[민숙] (혼잣소리처럼) 맞아. 그건 분노로부터 시작하는 거야 아주 단순한. 오빠도 이제 뭔가를 생각할 나이가 된 것 같애.
[비계] 그렇지 조국. 그리고 충성 아니냐 충성!
[민숙] 그런데 오빠 뭔지 위험한 거 알어?
[비계] 위험해? 내가?
[민숙] 그 칼은 뭐지? 누군가를 찌르겠다는 거 아냐?
[비계] 아--- 이건---
[민숙] 오빤 비로소 반쪽 짜리 조국에 눈을 뜨게 된 거야.
[비계] 바 반쪽--- 짜리--- 조국이라니?
[민숙] 오빠가 사는 이쪽과 똑같은 한쪽이 북한이야. 거울처럼. 그 거울로 나머지 한쪽도 비쳐보는 눈을 가져야 돼.
[비계] (무슨 말인지 몰라 멀뚱히 눈만 깜박거린다) ---
[민숙] 그렇치 못하면 사팔뜨기야.
[비계] (버럭 화를 낸다) 사--- 사팔뜨기?
[민숙] 균형을 잃으면 사팔뜨기지 뭐 다른 게 사팔뜨기겠어? 더구나 오빠 같은 무모한 정열의 사팔뜨기, 그건 정말 위험해. 오빠 손에 칼처럼.
[비계] 야 네가 나를 가르치겠다는 거냐 지금?
[민숙] 차라리 그렇게 될 바엔 처음부터 국가가 뭔지 민족이 뭔지 모르는 게 더 나을 거야.
[비계] 야 쌍년아 잘 들어. 여동생이 몸팔아 오빠 공부시키는 게 원칙이야 하지만 오빤 깡패 짓을 해가며 너 학교 보냈어. 그런데 뭐 한다는 소리가 국가가 뭔지 민족이 뭔지 모르는 게 낫다구? (거칠게 날뛰며) 그래 나 깡패다. 내 비록 깡패지만 생 건달은 아냐. 국가가 뭔지 민족이 뭔지 정도는 안다 이거야! 그런데 뭐--- 거울로 비춰봐?
[민숙] 흥분만 할게 아니라 오빠--- 그렇게 완벽하게 볼 수 있어야 위험하지 않아.
[비계] 좋아, 거울로 판문점에--- 이따만한 대형 거울을--- 떡 갖다 놓는다 이거지?
[민숙] (고개를 끄덕인다) ---
[비계] (거울을 들여다보는 듯, 그리고 고개를 갸웃한다) 가만있어 봐, 그럼 씨팔 이거 뭐야? 이거 어떻게 되는 거야? 빨갱이 인민군 새끼들도 술 처먹고 땡까댕--- 좆을 잡고 남한으로 내려와 이쪽 여자 올라타서 홀레를 붙었다? 너 지금 그걸 말하는 거냐? 로랙스 시계 선물도 좆나게 받아가고---
[민숙] (긍정도 부정도 없이 똑바로 바라본다) ---
[비계] 야 그런 거야? 철책 선을 가운데 두고 서로 내통 밑통, 뒷구멍으로 간통을 했다는 거야?
[민숙] (수수께끼 같은 표정) ---
[비계] 그게 말이 돼? 막강한 국군이 뭐 아쉬운 게 있어서 여자를 붙여 줘! 대한민국 정부가 무슨 뚜쟁이냐? 여자 팔아 경제부흥 시킬 일 있냐구?
[민숙] 내 말은--- 꼭 그렇다는 건 아냐. 하지만 주는 게 있으면 받는 게---
[비계] 시끄러 년아! 이런 돌대가리가 어떻게 대학엘 갔는지 모르겠네 (밀쳐내며) 야 들어가 공부나 해! 그리고 앞으로 여기 얼씬도 하지마!
[민숙] (떠밀리며) 그렇게 흥분만 할 거 아니라---
((밖에서 승용차 달려와 멈추는 소리))
[비계] (긴장, 윽박지르며 민숙을 떠밀어낸다) 야 빨리 빨리.
[민숙] --- ?
((민숙, 떠밀려 나간다. 민숙을 밀어낸 비계, 부동자세를 취하고 서 있는다. 문이 열리며 대촌이 들어선다. 당당한 체격에 선글라스를 썼다.))
[비계] (허리를 90도로 꺾으며) 오셨습니까, 형님
[대촌] 수고가 많다.
((민숙, 오른편 무대 한편에 숨어서 지켜본다.))
[대촌] (휘 둘러본 뒤) 헌데 저 벽에 구멍은 뭐냐?
[비계] 구멍이오?
[대촌] 그래 저쪽, 바퀴벌레 한 마리가 얼씬거리고 있다. 눌러 죽여라.
((민숙, 신속하게 몸을 피해 퇴장한다.))
[비계] 바--- 바퀴벌레가 아니라--- 고--- 공부벌레입니다.
[대촌] 공부벌레라면 밟아 죽이고
[비계] 하--- 하지만 제 누이동생--- 하나밖에 없는--- 네 머리는 돌입니다 형님, 세상 물정 전혀 모르는--- 남한과 북한이 똑같다고 생각하는 바보입니다.
[대촌] (신중하게 생각하며) 남한과 북한이 똑같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 이거지?
[비계] 헤헤 형님, 한마디로 바보 아닙니까 바보. 공부는 잘 하지만---
[대촌] 좋은 방 얻어 하숙 내보내도록 해라. 빨리 조치하는 게 좋겠다.
[비계] 알았습니다 형님.
[대촌] 촌스럽다 형님 소리 대충 빼라.
[비계] 알겠습니다 형님.
[대촌] 형님 소리 빼라 잖아 임마! 좋아 그간 연습한 걸 한번 보자.
[비계] 네 형님.
[대촌] 이 자식 돌대가리 아냐? 형님 소리 빼라고 했잖아!
[비계] 알겠습니다 혀--- 어엉--- (하다가 찔끔한다)
((비계, 마네킹 앞으로 간다. 마네킹에 걸려있는 통돼지를 찌른다.))
[대촌] 더 아래야 임마 더 아래. 아니 그 위. 어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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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소고 어디가 허벅지 살인지 정확히 알고 쑤셔야 할거 아니냐. 자로 잰 듯 정확하게.
((비계, 다시 찌른다.))
[대촌] 자세가 왜 그 모양이냐. 바짝 붙어 서서. 하체에 힘이 없다. 에어로빅 체조 하냐! 손목에 힘을 주고--- 힘을 줘 임마. 그래 가지고 어떤 놈 배때기에 칼이 들어가겠냐.
((비계, 땀을 흘리며 계속 찌른다.))
[대촌] 칼끝이 보인다. 번개처럼 빠르게, 중요한 건 스텝이다. 스텝, 춤추듯 유연하게, 썩은 호박을 찌르냐, 힘을 줘라 힘을 줘. 호흡을 모으고!
((비계, 비지땀을 흘리며 찌른다.))
[대촌] 몇 센치 자리냐?
[비계] 정확히 5센치 깊이로 찌르고 있습니다.
[대촌] 5센 치면 전치 몇 주냐?
[비계] 전치 5주입니다.
[대촌] 좋아. 이번엔 7센치 깊이로 찌른다. 7센 치면 전치 몇 주냐?
[비계] --- 7--- 7주입니다.
[대촌] 7센 치가 어떻게 7주냐 이 새끼야! 7센 치는 7개월이야 7개월 짜리. 8센 치는 8개월 9센치는 사망. 계산이 딱딱 나와야 되는 거 아니냐. 때문에 7센 치는 좀더 정밀을 기해서 찔러야 한다. 컴퓨터 같은 정밀성 알겠냐?
[비계] 네. (계속 찌르는 훈련을 반복한다)
[대촌] 칼 이리 줘봐
[비계] 네.
[대촌] 찌르는 것도 중요하지만 빼는 것이 더 중요하다. (시범을 보이며) 푹 쑤셨다, 같은 7센치지만 그냥 얌전히 빼는 법. (시범을 보이며) 두 번째, 칼끝을 비틀어 빼는 법. 이건 악질에 대한 일종의 경고다.(시범을 보이며) 마지막으로 칼끝을 확 걷어올리는 법. 요건 뭐냐, 황천길에 엿 먹어라야 엿! 알겠나?
[비계] 엿 먹어라 네.
[대촌] 양복이냐 바바리 코트냐 가죽 잠바냐에 따라 허리와 손목의 힘이 달라지는 거 알지?
[비계] 네 형님. 가죽 잠바는 좀더 깊이 푹!
[대촌] 해보면 나름대로 재미있다. 짜릿하지. 칼끝에 전해오는 경련, 그 전율 모를 거다. 한번 맛들이면 빠져 나오지 못할 거야.
[비계] 제가 미치고 환장하는 긴자꼬 춘심이 처럼이요?
[대촌] 여자? 그 이상이다.
[비계] 헤헤 짜릿한 손맛, 기대가 갑니다. 형님.
[대촌] 푹 쑤신 다음에는 어떻게 하느냐. 당황할 필요 없고, 이유도 없고, 당황해서도 안 되고, 상대의 고통스런 얼굴을 잠시 뚫어지게 바라보는 거야. 입가에 가소롭다는 미소를 씩 흘리며, 한번 해봐.
[대촌] 그렇치 네 칼끝에. 앞으로 너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 네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거지. 마음먹은 모든 것을. 왜냐, 너는 오늘부터 시정 양아치 삼류 건달이 아니다 이거야. 술집 기도나 봐주고 해결사 노릇하는 잔챙이 깡패가 아니다 이거지. 충성 아나?
[비계] (벌떡 일어서며) 압니다 형님 충성!
[대촌] 그래, 오늘부터 너는 국가와 민족을 사랑하는 애국청년이다. 민주주의의 수호자인 동시에 조국통일의 역군이다.
[비계] (무릎을 꿇는다) 고맙습니다 몸바쳐 충성하겠습니다
[대촌] 너의 일거수 일투족 그 모든 것이 애국이다. 또한 정치적이지. 술 한잔에 밥 한술 뜨는 것도 정치, 네가 휘두르는 주먹과 내가 행사하는 폭력까지, 적어도 대한민국 땅에선 정치적이 아닌 것이 없다. 살인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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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계] 사--- 살인까지요?
[대촌] 왜냐, 애국 애족 민주주의의 수호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일종의 전쟁이지. 사방이 적들로 둘러 쌓인 피비린내 나는 전쟁, 바야흐로 현 시국은 전시체제나 다름없다. 특히 우리 애국자들한테는.
[비계] 아 전쟁---
[대촌] 전쟁에서 사람을 죽이는 건 뭐냐? 살인이 아니라 애국이다. 많이 죽이면 죽일수록 영웅이 되는 거고.
[비계] 아 영웅, 좆 나게 많이 죽일수록! 그럼 날 미치게 만드는 장미--- 장미 싸롱의 김마담을---
[대촌] 네가 덮쳤다, 그땐 정치적인 사랑이 되는 거지. 새끼마담 미스조를 강제로 욕보였다, 그땐 애국적인 강간이 되는 거고.
[비계] (좋아 히리거리며) 형님, 그럼 동팔이--- 동팔이 형님은요?
[대촌] (실망 스럽다) 동팔이가 네 형님이냐?
[비계] ---
[대촌] 잘 알아둬라. 동팔이는 삼류 깡패에 불과하다. 너하곤 신분이 틀려. 그 새끼 몇 년 전 야당 창당대회 저지를 위해 돈 몇 푼 받고 각목을 휘둘렸는데, 각목이 어떻게 정치적이냐? 각목은 정치 도구가 될 수 없다. (사이) 하지만 우리가 휘둘렸다. 그땐 정치적이 되는 거지, 애국이 되는 거구.
[비계] 동팔이 형님이 휘두르면 아니고--- 제가 휘두르면--- 정치적이 된다구요?
[대촌] 그렇지, 네가 누구냐, 애국 애족의 반공청년아니냐, 각목도 사람 나름이다 이거야. 휘두르는 각도, 휘두르는 사람에 따라 정치적이 될 수도 있고 없고도 하는거지. 우리는 선택된 훼미리다. 역사에 빛나는 선배들을 모시고 있다 이거야. 너 가방 끈이 짧아 잘 모르겠지만, 하얼빈의 안중근 의사, 상해 의열단의 윤봉길 의사, 구월산의 육탄 십용사, 이들이 다 우리 선배님들이시다.
[비계] (번쩍) 아 몰랐는데 그분이 선배셨군요? (다리의 상처를 보이며) 이 상처 보십시오. 여기 두 군데. 여기 열 아홉 바늘. 이쪽 스물 세 바늘 도합 마흔 두 바늘 꼬매주신--- 사거리 3층 병원에 키 작고 샌님처럼 생긴--- 그 의사 선생님이---
[대촌] 그 의사는 임마 한중길 외과원장이고--- 한글도 못 읽어 한과 안을 헛갈리냐. 이 개대가리야! (한숨을 내쉰다) 아 이런 놈을 데리고 어떻게 애국을 하고 민주주의를 수호하지?
[비계] 죽여주십쇼 형님.
[대촌] 목숨을 내놓겠다는 각오면 됐다. 그리고 왜 또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이 정치적이냐. 내 위에 안중근 윤봉길 선배님이 계시듯, 내 뒤에는 막강한 권력의 의원님이 계신다.
첫댓글 퍼가요~ 잘 읽겠습니다. 감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