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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산집 제47권 / 행장(行狀)
안곡 이공 행장(安谷李公行狀)
공의 성은 이씨(李氏), 휘는 중명(重明), 자는 자문(子文)이며, 그 선조는 경주(慶州) 사람이다. 휘 주좌(周佐)는 고려의 상서로서 공훈을 드러내어 아산(牙山)에 봉해졌는데, 자손이 그대로 이를 관향으로 삼았다. 문하시중 휘 옹(邕)에 이르러서는 호가 조은(釣隱)인데 본조에 들어와 아산에 은거하며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목은(牧隱 이색(李穡) 등의 제현과 함께 이름을 나란히 하였다.
이분의 손자 휘 원생(原生)은 사헌부 장령으로서 대사헌에 추증되었다. 이분이 휘 종성(宗誠)을 낳았으니, 현감이다. 3대를 전하여 휘 척(陟)에 이르러 문과에 급제하고 부사가 되었으니, 이분이 바로 공의 5대조이다. 선공감 첨정 휘 수붕(壽鵬), 헌릉 참봉(獻陵參奉) 휘 인좌(仁佐), 휘 준(俊), 군자감 정 휘 사금(嗣金)이 바로 공의 고조, 증조, 조고, 선고이다. 군자감 정 공은 배위가 두 분이니, 파평 윤씨(坡平尹氏) 생원 모(𠋦)의 딸과 상주 김씨(尙州金氏) 홍(鴻)의 딸이다. 김씨는 3남을 낳았는데, 공은 그중에 막내이다.
공은 남다른 자질을 타고나서 총명함이 빼어났다. 분곡(盆谷) 이공 승벽(李公承璧)에게 수업을 받았는데, 이공의 기대가 몹시 중하였으며 함께 배우는 아이들이 억지로 책을 덮게 하면 홀로 구석진 곳으로 가서 외우고 풀이하는 데에 침잠하였다. 어린 나이에 문장의 재주가 빠르게 향상되어 변려문을 가지고 동당시(東堂試)에서 장원을 하였는데, 시험을 주관하는 자가 어린아이라고 하여 2등으로 낮추어버리니 이후로 화려한 명성이 크게 알려졌다. 신묘년(1651, 효종2)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공은 평소에 명절(名節)을 흠모하여 지기(志氣)가 꼿꼿하였다. 명(明)나라가 멸망하여 천지가 무너진 것을 보고는 비분강개하여 살아갈 의지가 없는 듯하였고 명(明)나라를 언급하게 되면 매번 오열하며 눈물을 흘렸다. 현종 정미년(1667, 현종8)에 명(明)나라 사람 진득(陳得), 임인관(林寅觀) 등이 바다를 표류하여 탐라(耽羅)에 이르러서는, 영력황제(永曆皇帝)가 지금 한 모퉁이의 땅을 보유하고 있어서 숭정(崇禎)의 정통을 이을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들을 연경(燕京)으로 압송할 것을 논의하니 공이 통탄함을 이기지 못하였다.
뒤에 가뭄을 만나서 구언(求言)하였는데 공이 반궁(泮宮)에 있으면서 성지(聖旨)에 응해 상소하여 황묘(皇廟)를 건립할 것을 청하며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임진년(1592, 선조25)에 섬나라 오랑캐가 쳐들어와서 우리 열군(列郡)을 유린하고 우리 적자(赤子)들을 도륙하며 우리 종묘를 잿더미로 만들고 우리 능침을 능욕하였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신종황제(神宗皇帝)께서 천하의 군대를 움직이고 천하의 재화를 다 쏟아주신 덕분에 8년간 힘써 토벌하여 삼한(三韓)의 강토를 회복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망한 나라를 부흥시켜서 우리 종묘가 혈식할 수 있게 만든 것은 추호도 모두가 황제의 힘입니다.
창오(蒼梧)로 수레가 멀리 떠남에 적현(赤縣)이 붕괴되었고 해가 염해(炎海)에서 저묾에 물결이 용주(龍舟)를 침몰시켰는데 원릉(園陵)은 불타고 향화(香火)는 처량해졌으니 아, 마치 옆에 계시는 듯한 우리 신종황제의 영령이 오히려 어디에 의귀하시겠습니까. 오르고 내리시는 영령이 우리나라에 마음을 두고 계실 것이 분명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우리나라를 다시 살아나게 한 큰 은혜를 생각하고 선왕께서 복사(服事)하셨던 지극한 정성을 헤아리시어 정결한 곳을 택하여 사당을 건립해서 그 제사가 길이 보존되도록 하소서. 이렇게 하신다면 온 나라의 사람이 모두 기쁜 마음으로 복종할 뿐만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선조대왕(宣祖大王)의 영령이 틀림없이 문손(文孫)이 뜻을 계승함을 기뻐하실 것이고 땅에 묻힌 선왕조 백성의 혼백들도 자신의 군주가 훌륭한 후손을 둔 것을 기뻐할 것입니다.” 성상이 이 일을 처리하도록 내려보냈는데, 논의하는 자들이 존귀한 천자를 편방(偏邦)에서 제사할 수 없다는 이유를 내세우고 또 제사의 의례를 가지고 논란하여 마침내 가로막혀 시행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성상이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특별히 현릉 참봉(顯陵參奉)에 제수하였다. 경술년(1670, 현종11)에 상소하여 서리(胥吏)의 폐해를 아뢰니, 가상하다는 비답이 내렸다. 또 열읍의 시폐(時弊) 여덟 조목을 올렸다. 신해년(1671)에 광흥창 봉사로 승진하였다.
임자년(1672) 5월 21일에 정침(正寢)에서 고종(考終)하였으니, 태어난 을사년(1605, 선조38) 8월 9일로부터 향년 58세가 된다. 묘는 목천(木川) 마망산(馬望山) 임좌(壬坐)에 있다. 배위 김제 조씨(金堤趙氏)는 첨지중추부사 함(涵)의 딸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장신(長新)이고 딸은 박유근(朴楡根)에게 출가하였다.
계배(繼配) 춘천 박씨(春川朴氏)는 준(晙)의 딸로, 역시 1남 1녀를 낳았는데, 아들은 장식(長植)이고 딸은 윤지연(尹之衍)에게 출가하였다. 장신의 2남은 윤실(潤實), 윤오(潤五)이고, 2녀는 유순원(兪舜元), 김성숙(金聲肅)에게 출가하였다. 장식의 2남은 윤룡(潤龍), 윤원(潤元)이고, 딸은 이수린(李壽麟)에게 출가하였다. 제상(齊相), 제기(齊機)는 윤오의 소생인데, 제기는 출계(出系)하여 윤룡의 후사가 되었다. 나머지는 다 기록하지 않는다.
공은 타고난 성품이 정직(貞直)하고 기국이 넓어서 곤궁하게 누추한 오두막에서 지내도 항상 세교(世敎)와 민생(民生)에 마음을 두었다. 매번 가뭄과 홍수로 재해가 생기는 것을 볼 때마다 동이 트도록 벽 주위를 서성였고 때로는 벌떡 일어나서 재해를 그치게 할 방도를 도모하여 누차 상소하여 일을 논해서 지위에서 벗어남을 혐의하지 않았다.
공이 지은 정문(程文)은 각 문체가 모두 절묘한 경지에 이르러서 강제(講製)에서 항상 상위의 성적을 차지하여 자주 성상의 칭찬을 받았는데, 끝내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여 선우후락(先憂後樂)의 뜻을 드러내어 밝히지 못하였으니, 안타깝다.
공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시서(詩書)와 백가(百家)를 연찬(硏鑽)하지 않은 바가 없었고 특히 상수(象數)에 정밀하고 오례(五禮)에 두루 통달하였으니, 사우(士友)들이 나아와 질정하는 일이 많았다. 사장(詞章)을 지은 것은 대부분 명(明)나라를 그리워하는 시여서 풍천(風泉)의 마지막 장으로 갖추어 둘 수 있었다.
후손들이 흩어진 조각들을 수습하여 세상에 간행하였으니, 이는 백분의 일 정도만 남은 것이다. 그러나 정미년에 올린 한 상소로 천하와 만세에 떳떳하게 할 말이 있을 수 있으니, 또한 많을 필요가 있겠는가. 우재(尤齋) 송 문정(宋文正: 송시열(宋時烈) 선생이 공의 상소를 높이 평가하여 말하기를, “이러한 세상에 이러한 말이 이 사람에게서 나왔으니, 가상히 여기는 은전이 없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조정의 논의가 일치되지 못하였으므로 끝내 시행되지는 못하였으나, 성상께서 옳다고 여기셨으므로 이 사람에게 관직을 내리신 것이다. 나는 일찍이 조만간에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라고 하였다.
한수재(寒水齋) 권 선생(權先生 권상하(權尙夏))이 말하기를, “화양(華陽)의 일은 내가 의기(義起)한 것이 아니다. 돌아가신 스승님께서 〈삼학사전(三學士傳)〉의 끝에서 말씀하시기를, ‘진사 이중명이 상소하여 신종의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라고 하시고 당시의 논의가 이를 시행하지 못하게 한 것을 마음으로 항상 개탄하셨다.
그러다가 섬에 유배되어 계실 때에 하직 인사를 함에 이르러 만력(萬曆)과 숭정(崇禎) 두 황제의 사당을 세우는 일을 부탁하셨다.”라고 하였다. 아, 갑신년(1704, 숙종 30)에 대보단(大報壇)과 만동묘(萬東廟)가 이루어진 것은 바로 공의 한마디 말이 단초가 된 것으로, 공이 황조(皇朝 명나라)를 위하는 가슴 가득한 혈성이 이때에 이루어진 것이니, 어찌 굳이 자신의 시대에 직접 봐야할 필요가 있겠는가.
고례(古禮)에 큰 재해를 막아 내고 큰 환란을 막아 냈으면 그를 위해 제사 지내니, 옛날에 성왕(聖王)이 일반 사람들에게 시행한 것도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우리나라가 황조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혹자는 번국(藩國)이 사사로운 은혜 때문에 사당을 세우는 것을 두고 참람하다고 여기기도 한다.
그러나 황조의 제사가 끊기지 않았다면 진실로 비례(非禮)가 되겠지만 지금은 구묘(九廟 천자의 종묘(宗廟))가 혈식하지 못한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도리어 의기(義起)에 있어 무슨 문제될 것이 있겠는가. 또 《대명집례(大明集禮)》에 따르면 친왕(親王)이 또한 인조(仁祖)를 제사하였는데 악가(樂歌)를 한결같이 태묘(太廟)를 따르고 예(禮)의 등급을 낮춘 바가 없으니, 신하가 군주를 제사하는 것과 자손이 선조를 제사하는 것은 그 의리가 똑같다.
대보단은 바로 하늘에 제사하는 예(禮)를 따르는 것인데, 화(禍)가 우려됨은 제단〔壇〕과 사당〔廟〕이 똑같으니, 만약 다름이 없음을 안다면 곧장 사당을 세우는 것이 옳다. 이 의리는 농암(農巖) 김 문간공(金文簡公 김창협(金昌協))이 참되고 바르게 말하였으니, 공이 사당을 세울 것을 청한 논의와 절로 부합한다.
만동묘로 말하면, 또 배신(陪臣 제후의 신하)은 천자를 제사하는 예(禮)가 없다고 말하는 이가 있다. 그러나 황조가 이미 우리나라를 내복(內服)으로 보았고, 또 신주(神州)가 침몰되어 오랑캐가 다스림에 명(明)나라의 일월(日月)을 떠받드는 곳으로는 오히려 우리나라가 있으니, 우리나라의 뭇 백성들은 모두 명(明)나라의 유민일 뿐이다.
유민으로서 옛 군주를 제사한 경우로, 예컨대 활주(滑州)가 요(堯)를 제사한 것과 정강(靜江)이 순(舜)을 제사한 것과 회계(會稽)가 우(禹)를 제사한 것과 초인(楚人)이 소왕(昭王)을 제사한 것과 같은 것은 모두 덕을 그리워하여 보답하는 제사를 올린 것이니, 신리(神理)와 인정(人情)으로 헤아려볼 때 어찌 그만둘 수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찌 근거할 바가 없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제단과 사당이 모두 공의 한마디 말에서 시작되었으니 명(明)나라의 충신이 되기에 부끄러운 바가 없다. 아, 훌륭하다.
정종(正宗 정조) 정사년(1797, 정조21)에 명하여 《존주록(尊周錄)》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특별히 공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순묘(純廟 순조) 병인년(1806, 순조6)에 공을 천안(天安) 안곡(安谷)의 향사(鄕社)에 제향하니, 안곡은 바로 공이 살던 곳으로, 인하여 호로 삼은 곳이다.
화천(華泉) 이공 채(李公采)가 ‘용계서사(龍溪書社)’라고 편액을 썼으니, 이는 지촌(芝村) 이 문간공(李文簡公 이희조(李喜朝))의 유의(遺意)이다. 연천(淵泉) 홍상국(洪相國) 석주(奭周)가 공의 찬(贊)을 지었으니, 다음과 같다.
《춘추》 한 권의 의리가 / 陽秋一部
우리나라에 해와 별처럼 빛나네 / 日星吾東
누가 이를 드러내어 밝혔는가 / 孰其闡之
대로(大老 송시열)의 공이라네 / 大老之功
대로가 특별히 써서 말하기를 / 大老特書
이생이라는 자가 있다고 하여서 / 曰有李生
삼학사와 함께 / 曁三學士
그 명성을 나란히 세웠네 / 倂樹厥聲
저 북원을 바라보니 / 瞻彼北苑
신령스러운 제단이 우뚝하네 / 載屹靈壇
공이 이 영화에 참여하니 / 公與有榮
낭간이 아름답게 빛나리라 / 赫赫琅玕
아, 〈증민(烝民)〉 수장(首章)의 뜻이 오래되어도 사라지지 않음을 증험할 수 있다. 공이 별세한 지 이백여 년이 되었으나 아직도 행장이 없었는데, 공의 종현손(從玄孫) 심영(心永)이 처음으로 유사(遺事)를 기술하고 공의 현손 주석(周錫)이 그 손자 인모(仁模)를 보내어 공의 행실을 기술해 줄 것을 청해왔다.
나는 공의 풍절(風節)을 되뇌며 감복한 지가 오래되었는데, 공의 상소를 읽고 나서 더욱더 격세의 감회를 이기지 못하였다. 이에 감히 노쇠하였다는 이유로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병을 무릅쓰고 붓을 휘둘러 이상과 같이 기술해서 덕을 알아주는 군자를 기다리는 바이다. <끝>
[註解]
[주01] 현종 …… 논의하니 : 정미년(1667, 현종 8) 6월에 제주도에 당선(唐船) 1척이 표류해 왔는데 배는 난파되고 배에 실었던 물건은
모두 물에 잠겨 남은 것이 거의 없었으며, 배에는 임인관(林寅觀), 증승(曾勝), 진득(陳得) 등 95명의 사람이 타고 있었다.
이들은 명(明)나라 복건성(福建省)의 관상인(官商人)으로서, 청(淸)나라에 귀속하지 않고 일본과 교통(交通)하는 자들인데 일본
으로 가다가 바다에서 바람을 만나 난파당하여 이곳에 표류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일본으로 칙사를 보내어 배를 타고 돌아갈 수있게 해주거나, 배 한 척을 내주어 직접 본토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줄 것을 우리
조정에 간곡히 요청하였는데, 조정에서는 이를 따라주지 않고 이들을 모두 청나라 연경(燕京)으로 압송하였다.
《顯宗實錄 8年 6月 21日, 10月 3日》 영력황제(永曆皇帝)는 명나라가 청나라에 의해 함락된 뒤에 명 왕실의 일족이 화중(華中)ㆍ
화남(華南)에 세운 남명(南明)의 마지막 황제이며, 숭정(崇禎)은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로, 묘호는 의종(毅宗)이다.
[주02] 창오(蒼梧)로 …… 침몰시켰는데 : 이는 명(明)나라가 멸망한 뒤에 명 왕실의 일족이 중국의 남쪽 지역에서 남명(南明)을 세워 청
(淸)나라에 저항하다가 그 마지막 황제인 영력제(永曆帝)가 살해됨으로써 완전히 멸망하게 된 것을 비유하여 말한 것이다.
창오는 중국 호남성(湖南省)에 있는 산으로, 옛날에 순(舜) 임금이 남쪽 지방을 순행하다가 죽어 이곳 기슭에 묻혔다. 적현(赤縣)
은 적현신주(赤縣神州)의 준말로, 중원(中原)이나 중국의 이칭으로 사용되었다. 염해(炎海)는 몹시 더운 남쪽 지방을 가리키고, 용
주(龍舟)는 임금이 탄 배를 뜻한다.
[주03] 문손(文孫) : 본래 주(周)나라 문왕(文王)의 자손이란 뜻으로, 《서경》 〈입정(立政)〉에 “지금부터 이후로 문자(文子), 문손(文孫)
은 여러 옥사와 여러 신중히 할 형벌을 그르치지 마시고 오직 정을 다스리소서.[繼自今, 文子文孫, 其勿誤于庶獄庶愼, 惟正是乂
之.]”라고 한 데에서 보이는데, 전하여 임금의 후손에 대한 미칭으로 쓰인다.
[주04] 임자년 …… 된다 : 생년 을사년(1605, 선조38)과 몰년 임자년(1672, 현종13)을 가지고 계산하면 향년은 68세가 된다. 원문에 오
류가 있는 듯하다.
[주05] 선우후락(先憂後樂) : 송(宋)나라의 명재상 범중엄(范仲淹)이 지은 〈악양루기(岳陽樓記)〉의 “천하 사람들이 근심하기에 앞서 근
심하고, 천하 사람들이 즐거워한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라는 말을 요약한 것으로, 높은 벼슬에 있
으면서 언제나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여 노심초사한다는 의미이다.
[주06] 풍천(風泉)의 …… 있었다 : ‘풍천’은 《시경》 회풍(檜風)의 〈비풍(匪風)〉과 조풍(曹風)의 〈하천(下泉)〉을 합칭한 말로, 이 두 시
는 모두 제후국의 대부가 주(周)나라 왕실이 쇠미해진 것을 탄식해 읊은 시들이다. 전하여 멸망한 왕조를 그리워한다는 뜻으로 쓰이
는데, 이 사람의 시가 그 뒤를 이을 수 있다는 의미이다.
[주07] 화양(華陽)의 일 :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명(明)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는 일을 이른다. 송시
열(宋時烈)이 1689년(숙종15) 사사(賜死)될 적에 이 일을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遺命)으로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권
상하는 1704년 민정중(閔鼎重)ㆍ정호(鄭澔)ㆍ이선직(李先稷)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
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 지냈다.
[주08] 의기(義起) : 《예기(禮記)》 〈예운(禮運)〉에 “예라는 것은 의의 실질이니, 의에 맞추어서 맞으면 예는 비록 선왕 때에 없는 것일지
라도 의로써 새로 만들 수 있다.[禮也者, 義之實也. 恊諸義而恊, 則禮雖先王未之有, 可以義起.]”라고 한 데서 온 말로, 예문(禮
文)에 없더라도 이치를 참작하여 새로운 예를 만드는 것을 말한다.
[주09] 대보단(大報壇) : 임진왜란 때에 원군을 보낸 명(明)나라 신종(神宗)의 은혜를 기리기 위해 1704년(숙종30) 창덕궁(昌德宮) 안에
설치한 제단으로, 1749년(영조25)에는 명나라 태조(太祖)와 의종(毅宗)까지 합사(合祀)하였다.
[주10] 만동묘(萬東廟) : 화양동(華陽洞)에 만동묘(萬東廟)를 세워 명(明)나라 신종(神宗)과 의종(毅宗)을 제사하는 일을 이른다. 송
시열(宋時烈)이 1689년(숙종15) 사사(賜死)될 적에 이 일을 제자인 권상하(權尙夏)에게 유명(遺命)으로 부탁하였다.
이에 따라 권상하는 1704년 민정중(閔鼎重)ㆍ정호(鄭澔)ㆍ이선직(李先稷)과 함께 부근 유생들의 협력을 얻어 만동묘를 창건하고
신종과 의종의 신위를 봉안하여 제사 지냈다.
[주11] 고례(古禮)에 …… 지내니 : 《예기(禮記)》 〈제법(祭法)〉에 “성왕이 제사를 제정함에, 법이 백성에게 시행되었으면 제사 지내고,
목숨 바쳐 국사에 힘썼으면 제사 지내고, 국가를 안정시킨 공로가 있으면 제사 지내고, 큰 재해를 막아 냈으면 제사 지내고, 큰 환란
을 막아 냈으면 제사 지낸다.[夫聖王之制祭祀也, 法施於民則祀之, 以死勤事則祀之, 以勞定國則祀之, 能禦大菑則祀之, 能捍
大患則祀之.]”라고 하였다.
[주12] 대보단은 …… 옳다 : 이 내용은 김창협(金昌協)이 1704년(숙종40) 당시 우의정으로 있던 이유(李濡)에게 보낸 편지에 보인다.
당시에 대보단(大報壇)을 건립하는 과정에서 명(明)나라 황제를 제사하는 것을 청(淸)나라에서 알게 되면 이를 문제 삼아 화를 입
게 될까 염려하는 논의가 있었다.
사당이 아닌 제단을 건립하게 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에 대해 김창협은 청나라가 이러한 사실을 알았을 경우 문제가 되
는 것은 사당과 제단이 다를 것이 없으므로 곧장 사당을 세우는 것이 옳으니, 그렇지 않으면 제단도 세워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였다.
《農巖集 卷17 與李右相》
[주13] 내복(內服) : 천자의 교화가 미치는 왕기(王畿) 이내의 지역을 이르는 말로, 천자의 교화가 미치지 않는 왕기 밖의 지역인 외복(外
服)과 상대되는 말이다.
[주14] 신주(神州) : 적현신주(赤縣神州)의 준말로, 중원(中原)이나 중국의 이칭으로 사용된다.
[주15] 존주록(尊周錄) : 정식 명칭은 《존주휘편(尊周彙編)》으로, 1595년(선조28) 신충일(申忠一)을 건주위(建州衛)에 사자(使者)로
보낸 이후부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거쳐 정조가 죽을 때까지 대후금(對後金)ㆍ대청(對淸)의 전란과 교섭사 및 이와 관련된 여
러 신하의 사적을 모은 책이다.
[주16] 춘추 …… 의리 : 《춘추(春秋)》의 의리란, 천자의 나라인 주(周)나라를 높이고 오랑캐를 배격하는 의리로, 여기에서는 천자의 나라
였던 명(明)나라를 종주국으로서 높이는 의리를 이른다.
[주17] 낭간(琅玕) : 옥(玉)과 비슷한 일종의 아름다운 돌로, 충직한 간언이나 좋은 문장을 비유하는 말로 쓰인다. 한유(韓愈)의 〈착착(齪
齪)〉에 “구름을 헤치고 천문에 호소하여, 배 속을 열어서 낭간을 바치련다.[排雲叫閶闔, 披腹呈琅玕.]”라고 한 데에서 온 말이다.
[주18] 증민(烝民) 수장(首章)의 뜻 : 〈증민〉은 《시경》 대아(大雅)의 편명으로, 그 수장에 “하늘이 여러 백성을 내시니, 사물이 있음에 법
(法)이 있도다. 백성이 떳떳한 성품을 갖고 있는지라 이 아름다운 덕을 좋아하도다.[天生烝民, 有物有則. 民之秉彛, 好是德.]”라
고 하였다. 이는 사람들이 모두 떳떳한 본성을 타고나서, 군신간의 의리, 부자간의 친함과 같은 올바른 도리를 따르기를 좋아함을
말한 것이다. <끝>
ⓒ 성신여자대학교 고전연구소ㆍ(사)해동경사연구소 | 이정은 (역) |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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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安谷李公行狀
公姓李氏。諱重明字子文。其先慶州人也。有諱周佐。高麗尙書。著勳勞封于牙山。子孫仍貫焉。至門下侍中諱邕號釣隱。入本朝遯于牙。與圃牧諸賢齊名。有孫諱原生。司憲府掌令贈大司憲。生諱宗誠縣監。三傳至諱陟。文科府使。寔爲公五世祖。繕工監僉正諱壽鵬。獻陵參奉諱仁佐。諱俊軍。資監正諱嗣金。卽公高曾祖禰也。監正公有二配。坡平尹氏生員𠋦女。尙州金氏鴻女。金氏擧三男。而公其季也。生稟異質。聰慧絶倫。受業於盆谷李公承璧。李公期許綦重。同學羣童。强令掩卷。則獨向深僻處。沉潛誦繹。髫齡文辭驟進。以騈儷魁東堂試。掌試者以童蒙降第二。自是華譽大播。辛卯中司馬。公雅慕名節。志氣骯髒。及見皇明屋社。乾坤已毁。激昂感慨。如不欲生。語到皇朝。輒嗚咽流涕。顯宗丁未。大明人陳得,林寅觀等。漂海到耽羅。言永曆皇帝方保有一隅。克紹崇禎之統。廟議押送燕中。公不勝痛惋。後値悶旱求言。公居泮齋。應旨抗章。請建皇廟曰壬辰島夷入冦。蹂躝我列郡。魚肉我赤子。灰我宗廟。辱我陵寢。而幸賴神宗皇帝動天下之兵。竭天下之財。勤八年之征討。復三韓之疆域。興我滅國。血我宗祧者。秋毫皆帝力也。蒼梧駕遠。赤縣土崩。日暮炎海。波沒龍舟。而園陵灰燼。香火凄凉。嗟我神宗如在之靈。尙何所依歸也。陟降之靈。其眷戀于東也審矣。伏願殿下思吾東再造之洪恩。推先王服事之至誠。擇淨界而建廟。俾禴祀而長存。則不惟擧國之人。皆有所悅服。宣祖大王在天之靈。必悅文孫之繼志。先朝臣民入地之魄。亦喜吾君之有後。上下其事。議者托言天子之尊不可祀於偏邦。又以祭儀爲難。遂格不行。上嘉其志。特拜顯陵參奉。庚戌疏陳胥吏之弊。批以嘉尙。又進列邑時弊八條。辛亥陞廣興倉奉事。壬子五月二十一日。考終于正寢。去其生乙巳八月九日。爲五十八歲。墓于木川馬望山壬坐。配金堤趙氏。僉樞涵女。擧一男一女。男長新。女適朴楡根。繼配春川朴氏晙之女。亦擧一男一女。男長植。女適尹之衍。長新二子潤實,潤五。二女兪舜元,金聲肅。長植二子潤龍,潤元。女李壽麟。齊相,齊機。潤五出。齊機出後潤龍。餘不盡載 。公稟性貞直。器度寬弘。窮居蓬蓽。而常存心於世敎民生。每見乾溢成灾。輒繞壁明發。或蹶然而作。圖所以消弭之方。屢封章論事。不嫌其出位。公程文各軆。俱臻其妙。講製恒居上游。屢蒙天褒。而竟厄於公車。罔闡先憂後樂之志。惜哉。公幼而好學。詩書百家。靡不鑽硏。尤精於象數。兼通五禮。士友多就正焉。發爲詞章。擧多思漢之什。可以備風泉之亂。後承收輯斷爛而印行于世。卽存十一於百千者也。然丁未一疏。可以有辭於天下萬世。亦焉用多爲哉。尤齋宋文正先生奬公疏曰此世此言。出於此人。不可無嘉尙之典。又云朝議不一。故卒不行。然上意以爲是。故官其人。愚嘗謂早晩有成。寒水齋權先生曰華陽之事。非吾義起。先師於三學士傳末曰。進士李重明。上疏乞立神宗廟。以時議之不可行。心常慨然。至於在島時告訣。以萬曆崇禎兩皇帝廟事。有所屬托云。嗚呼。及甲申大報壇萬東廟之成。卽公一言有以啓之。而公爲皇朝滿腔熱血。於是焉見就。何必於吾身親見哉。古禮能禦大灾捍大患則祀之。昔聖王之施於人者猶然。况我東之於皇朝乎。或有以藩國之爲私恩立廟爲僭。然皇祀未殄則固爲非禮也。今則九廟之不血已久。顧何害於義起乎。且大明集禮。親王亦祭仁祖。而樂歌壹遵太廟。靡所降殺。則臣子之祭君父。子孫之祭祖先。其義一也。大報之壇。卽遵祭天之禮。而爲其慮患則壇與廟等耳。苟知其無他。直廟焉可也。斯義也農巖金文簡公說得眞正。自契公建廟之論也。至若萬東之廟。又有言陪臣無祭天子之禮。夫皇朝旣視我以內服。且神州陸沉。腥臊幷御。而戴大明日月者。猶有吾邦。吾邦之羣黎百姓。皆大明遺民耳。以遺民祭舊君。如滑州之於堯。靜江之於舜。會稽之於禹。楚人之於昭王。皆懷德而報祀。揆以神理人情。豈非不可以已者乎。詎可謂無稽哉。若壇若廟。皆權輿於公之一言。則無愧爲皇明忠臣。於乎休哉。正宗丁巳。命編尊周錄。而特載公名。純廟丙寅。享公于天安安谷鄕社。安谷卽公攸芋。而因之爲號者也。華泉李公采題其顔曰龍溪書社。寔芝村李文簡公遺意也。淵泉洪相國奭周爲作公贊曰。陽秋一部。日星吾東。孰其闡之。大老之功。大老特書。曰有李生。曁三學士。倂樹厥聲。瞻彼北苑。載屹靈壇。公與有榮。赫赫琅玕。嗚呼。烝民首章之義。可驗其彌久不泐也。公歿餘二百年。尙闕狀德之文。公從玄孫心永。始述遺事。公玄孫周錫。送其孫仁模。請述公行治。不佞誦服公風節夙矣。及讀公疏。彌不勝曠感。不敢辭以癃朽。遂力疾奮筆。敍次如右。用俟知德之君子云爾。<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