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조부 처사 부군 묘지(曾祖考處士府君墓誌) - 이유장(李惟樟)∙
부군의 이름은 순인純仁,1521~1586)이고 자는 요부堯夫이며, 성은 이씨이고 본관은 전의(全義)로 고려조에 공신으로 전의백全義伯에 봉해진 도棹의 후손이다. 10세를 지나 보문각 제학 익(翊)이 관향을 예안(禮安)으로 옮겼다. 증조부 신(愼)은 군자감 주부를 지내고 손자 좌의정 명(蓂)이 존귀하게 되어 좌찬성에 추증되었으며, 할아버지 필간(弼幹)은 충무위 부사직을 지냈다.
아버지 훈(薰)은 성균관 생원이며, 어머니 경주이씨(慶州李氏)는 찰방 덕장(德璋)의 따님이다. 부군은 가정 신사년(1521) 9월 22일에 태어나 만력 병술년(1586) 7월 10일에 돌아가셨으며,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참봉 굉(硡)의 따님으로 참판 주(柱)의 손녀이다.
부군은 아들이 없어서 예조 생원에 추증된 아우 희인(希仁)의 둘째 아들 진(珍)을 후사로 삼았는데, 이분이 바로 나의 할아버지 통훈대부이고, 할머니 진성이씨(眞城李氏)는 수의부위 이충(李沖)의 따님이다.
공은 1남 2녀를 두었는데 아들 정발(廷發)이 바로 우리 아버지 통덕랑이고, 장녀는 의성(義城) 김시릉(金是棱)에게 출가했고, 둘째는 상락(上洛) 김종문(金宗文)에게 시집갔다. 우리 어머니 순천김씨(順天金氏)는 부사 김윤안(金允安)의 따님이다.
정발은 4남 1녀를 두었는데 장남 유량(惟樑)과 둘째 유강(惟橿)은 모두 생원이다. 셋째가 바로 불초한 유장(惟樟)이고 진사로서 외람되이 연신(筵臣)∙ 2의 천거를 받아 세자익위사 익찬을 지냈으며, 막내 유방(惟枋)은 업유(業儒)∙3이다. 딸은 의성(義城) 김여중(金呂重)에게 시집갔다.
우리 할아버지께서 부군의 후사가 되어 순수한 효성으로 극진하게 봉양하였다. 부군이 돌아가시자 묘소 아래에 재사를 짓고 또 비석을 세우려고 하였는데, 미처 일이 끝나기 전에 임진왜란으로 중단되어 지금까지 비석이 없다. 많은 세월이 흐르고 그 행적이 흐릿해져 숨은 미덕을 드러낼 수 없으니 아아, 슬프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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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曾祖考處士府君墓誌 - 李惟樟
府君諱純仁 字堯夫 姓李氏 麗祖功臣全義伯棹之後 十世至寶文閣提學翊 移籍禮安 曾祖諱愼 軍資監主簿 以孫左議政蓂貴 贈左贊成 祖諱弼幹 忠武衛副司直 考諱薰 成均生員 妣慶州李氏 察訪德璋之女 府君生于嘉靖辛巳九月二十二日 歿于萬曆丙戌七月十日 配安東權氏 參奉硡之女 參判柱之孫 府君無子 以弟贈禮曹生員諱希仁次子珍爲之後 卽我先祖考也 階通訓 先祖考配修義副尉眞寶李沖之女 生一男 卽我先考諱廷發 階通德 二女長適義城金是棱 次適上洛金宗文 我先考配府使順天金允安女 生四男 長惟樑 次惟橿 俱中生員試 次卽不肖惟樟 以進士 猥爲筵臣所薦 曾任世子翊衛司翊贊 季惟枋業儒 一女適義城金呂重 我先祖爲府君後 誠孝純備 奉養無不至 及府君之歿 大營齋舍于墓下 又立石墓道 未及卒業 値壬辰兵亂而止 至今尙無顯刻 時世闊遠 影響昧昧 無以發揮潛德 嗚呼痛哉 . <끝>
출전:孤山先生文集 卷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