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원(元)나라 말기의 선승인 몽산덕이(蒙山德異)가 지은 글. 그는 평강(平江)에 휴휴암(休休庵)을 짓고 이 글을 지어 활선의 참면목을 드러내며 선풍을 크게 떨쳤다고 한다. 그 후에 고려의 나옹혜근(懶翁慧勤)이 연경에 오래 머물다가 거기에 가서 한 여름 선을 나고 이 글을 얻어 귀국했다고 한다. 이 본은 조선조 세조 때의 간본과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8.15 전에 간행된 《석문의범》 부록에 이 본에 가까운 유포본이 있다. 이 글은 원불교의 보조경전인 《불조요경》에 수록되어 있다. 좌선에 대한 경지 설명이 원불교의 무시선법과 그 맥락을 같이 하고 있어 원불교에서는 새벽 좌선이 끝날 때 ‘일원상서원문’ㆍ《반야심경》과 함께 이를 같이 독송한다.
내용
‘부좌선자 수달호지선 당자성성 절단사상 불락혼침 위지좌 재욕무욕 거진출진 위지선(夫坐禪者 須達乎至善 當自惺惺 截斷思想 不落昏沈 謂之坐 在欲無欲 居塵出塵 謂之禪)’: 좌선이라는 것은 지선의 자리에 사무쳐서 성성하게 함이니 온갖 생각을 끊되 혼침에 떨어지지 않는 것을 좌의 경지라 하고, 욕심경계에 있으되 욕심을 초월하고 티끌세상에 살되 티끌세상을 초월하는 것을 선의 경지라 한다. 성품의 원래는 선이다 악이다 하는 일체 상대적 분별을 초월하여 지극히 청정한 것으로서 청정하다는 한 흔적마저 찾아 볼 수 없는 지극히 뚜렷하고 고요한 자리이다.
지극히 텅 빈 자리이면서 영지(靈知)의 광명이 소소영령하여 지극히 신령스러운 경지이기도 하다. 모든 분별사량을 놓되 혼침이라는 무기공(無記空)에 떨어지지 않으며 모든 욕심경계와 세진(世塵)에 처하되 청정한 자성에 바탕하여 경계에 끌리지 않을 수 있는 경지를 말한다.
‘외불방입 내불방출 위지좌 무착무의 상광현전 위지선(外不放入 內不放出 謂之坐 無着無依 常光現前 謂之禪)’: 밖의 경계가 안으로 들어오지도 아니하고 안의 마음이 밖의 경계로 나가지도 않는 것을 좌의 경지라 하고, 주착하는 데도 없고 의지하는 데도 없어서 떳떳한 광명이 나타나는 것을 선이라 한다. 경계와 마음이 하나가 된 경지로서 마음을 놓아 보되 경계에 붙잡히지도 아니하고 경계를 지어 보되 경계에 붙잡히지도 아니하며 어느 경계에 추호의 주착함이 없으며 일념이라는 한 생각에 의지함도 없이 역력고명(歷歷孤明)한 자성의 광명이 나타나 비추어짐을 말한다.
‘외감부동 중적불요 위지좌 회광반조 철법근원 위지선(外憾不動 中寂不搖 謂之坐 廻光返照 徹法根源 謂之禪)’: 외경이 흔들어도 움직이지 아니하고 중심이 적적하여 요동하지 아니하는 것을 좌의 경지라 하고, 밖으로 쏠리는 정신의 광명을 돌이켜 비쳐서 자성본원에 사무치는 것을 선의 경지라 한다. 천만 경계 중에서 부동함은 태산과 같이 하고 철주(鐵柱)와 같이 중심이 크게 안정되어 일호의 사심잡념도 찾아볼 수 없으며 본래 뚜렷하고 밝은 지혜의 광명을 되살려서 자성본원을 철견(徹見)하는 경지를 말한다.
‘불위역순뇌 무위성색전 위지좌 촉유즉명유일월 화물즉덕승건곤 위지선(不爲逆順惱 無爲聲色轉 謂之坐 燭幽則明逾日月化物則德勝乾坤 謂之禪)’: 역경과 순경에도 끌리는 바가 없고 소리와 색에도 굴리어 가는 바가 없는 것을 좌의 경지라 하고, 깊숙한데 비치매 광명이 일월에 넘치고 만물을 화육함에 그 덕이 건곤에 승하는 것을 선의 경지라 한다. 순역경계 등 모든 경계에 마음이 넘치고 괴롭혀지지도 아니하여 크게 편안하고 항상 온전한 마음으로 육경(六境)을 활용하며 어느 이치 어느 일 하나에도 막힘이 없이 지혜, 광명이 비추어 내며 만물을 화육하되 살려내는 덕화가 천지와 같은 위력을 나타내는 경지를 말한다.
‘어유차별경 입무차별정 위지좌 어무차별경 시유차별지 위지선(於有差別境 入無差別定 謂之坐 於無差別境 示有差別智 謂之禪)’: 차별 있는 경계에서 차별 없는 정에 드는 것을 좌의 경지라 하고, 차별 없는 경계에서 차별 있는 지혜를 나타냄을 선의 경지라 한다. 천만 차별 경계 중에서도 일체 차별이 돈공(頓空)한 자성본원에 바탕하여 평등일미(平等一味)를 맛보아 항상 대안정을 얻고 차별이 돈공한 본원에서 더욱 소소영령한 영지의 광명을 발하여 차별 세계를 보는 지혜의 경지를 말한다.
‘합이언지 치연작용 정체여여 위지좌 종횡득묘 사사무애 위지선(合而言之 熾然作用 正體如如 謂之坐 縱橫得妙 事事無礙 謂之禪)’: 종합하여 말하면 천만 경계에 치연히 작용하나 마음의 정체가 여여부동함을 좌의 경지라 하고, 종으로나 횡으로나 묘용을 얻어서 일일에 걸림이 없음을 선의 경지라 한다. 이 경지는 모든 번뇌를 끊고 마음의 자유를 얻어서 천만 경계를 대하되 자성의 정체가 여여하여 일체법을 행하나 걸리고 막히는 바가 없고 진세에 처하되 항상 백천삼매를 얻는 경지이다.
‘약언여시 상거 비지묵능궁 나가대정 무정무동 진여묘체 불생불멸 시지불견 청지불문 공이불공 유이비유 대포무외 세입무내 신통지혜 광명수량 대기대용 무진무궁(略言如是 詳擧 非紙墨能窮 那伽大定 無靜無動 眞如妙體 不生不滅 視之不見 聽之不聞 空而不空 有而非有 大包無外 細入無內 神通智慧 光明壽量 大機大用 無盡無窮)’: 간단히 말하면 이와 같으나 자세히 말하자면 지묵으로 능히 다할 바가 아니다. 나가(那伽, 龍)의 큰 정(定)은 정(靜)도 없고 동(動)도 없으며, 진여(眞如)의 묘한 체는 생도 아니고 멸도 아니라, 보아도 보이지 아니하고 들어도 들리지 아니하며 공이로되 공도 아니요, 유로되 유도 아니라, 크기로는 바깥 없는데까지 포함하고 작기로는 안 없는데까지 들어가며 신통과 지혜와 광명과 수량과 대기와 대용이 다함이 없다.
나가대정은 시간과 처소를 초월한 정(定)이기 때문에 정할 때와 동할 때를 초월하며 이 정의 경지는 성품과 하나가 된 경지여서 동정의 차별을 초월한 자리이며 진여의 현묘한 체성은 생명을 초월한 언어도단(言語道斷)의 입정처(入定處)이다. 이 자리는 감각이나 사량 분별로는 알 수 없는 경지이며 한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는 텅 빈 자리이나 그 가운데 소소영령한 영지의 광명이 비추어 내고 분명히 있으나 있는데 머물지 아니하는지라 있다는 흔적마저 찾아볼 수 없는 자리이다.
크기로는 유형무형의 세계를 다 포함하고 작기로는 비추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으며, 무애자재하고 낭연독요(郎然獨耀)한 지혜광명이 시방(十方)에 내조하여 원래 불생불멸한 무량수를 나타내며 유무공색(有無空色)을 초월한 큰 기틀과 대기 그대로 만물에 활용되는 성품의 공덕이 한량이 없는 경지를 말한다.
‘유지지사 의선참구 이대오위칙 화지일성 후 허다영묘개자구족 기동사마외도 이전수 위사좌 이유소득 위구경자재(有志之士 宜善參究 以大悟爲則
地一聲後 許多靈妙皆自具足 豈同邪魔外道 以傳授 爲師佐 以有所得 爲究竟者哉)’: 뜻있는 공부인은 마땅히 잘 참구하여 크게 깨치기까지 한정하고 공부하면 홀연히 깨치는 한 소리에 허다한 영묘가 다 스스로 구족할 것이다. 어찌 저 사마외도의 전수하는 것만으로써 스승이니 제자니 하며 또는 얻은 바 있는 것으로써 구경처를 삼는데 비할 바이랴.
성품의 현묘한 이치와 선의 진경이 이와 같이 무궁무진하므로 공부인은 깊이 참구해서 크게 깨치기로 고칙(古則)을 삼고 정진(精進)하면 홀연히 마음이 열려 성품을 깨쳐 무궁무진한 신령스러운 묘용을 다 갖추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정법을 모르는 사람들이 의리(義理)로 따지고 형식으로 주고받으며 얻은 바 있다는 한 생각을 구경으로 삼는 이러한 경지를 넘어서서 신통묘술에도 흔들리지 않고 의리를 넘어선 격외(格外)의 도리에 바탕 하여 오직 스스로 깨쳐서 얻을 것이며 더욱 깨쳤다는 한 생각마저 놓을 줄 알아 무소득(無所得)의 큰 경지에서 성품의 진미를 맛보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