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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조(英祖, 1694년 10월 31일 (음력 9월 13일) ~ 1776년 4월 22일 (음력 3월 5일) )는 조선의 제21대 임금(재위, 1724년 10월 16일 ~ 1776년 4월 22일)이다.성은 이(李), 휘는 금(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광숙(光叔), 호는 양성헌(養性軒)이다.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숙종 생존 시부터 잠재적인 계승권자였으며, 경종 때 왕세제로 책봉된다. 그러나 신임사화 등으로 위기를 넘기다가 경종의 급서로 즉위한다. 이후 노론과 소론의 당론 조제와 탕평책, 악형 폐지, 서적 간행 등을 추진하였으나, 탕평론은 실패했고 둘째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키게 된다. 원래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며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다. 이후 고종 때 묘호를 높여 영조로 바꾸고 존호를 더하여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가 되었다. 숙종(肅宗)의 차남이며, 경종의 배다른 아우이다. 숙빈 최씨(淑嬪 崔氏)의 소생으로, 정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 계비는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722년부터 1724년까지 왕세제 신분으로 배다른 형 경종 임금을 대신해 대리청정을 하였다. 1724년부터 1776년까지 재위하는 동안 1724년부터 1749년까지 친정을 하였고 1749년부터 1762년까지 아들 장헌세자(사도세자)가 왕세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고 1762년부터 1775년까지 다시 친정 체제를 펼쳤으며 1775년부터 1776년 붕어할 때까지 손자 정조가 왕세손 신분으로 대리청정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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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편집]즉위 전[편집]출생과 생애 초반[편집]영조는 숙종의 서장자(차남)로 태어나 1699년(숙종 25년) 연잉군(延?君)에 책봉되었다. 그의 어머니인 숙빈 최씨는 임금의 우물에서 물을 긷는 무수리 출신이었다. 당시 무수리는 재주가 있어 궁중에 드나들었으나 궁인이 갖출 기품과 덕목이 없어 천대받아 흔히 “궁녀의 하인”으로 불렸다. 숙종은 무수리 최씨가 기품이 없더라도 재주가 값어치 있다라 여겨 그 아들을 배게 하였다고 여겨진다. 어머니의 천한 신분 때문에 영조는 같은 왕자이면서도 이복 형이었던 왕세자와는 전혀 다르게 주위의 은근한 멸시를 받았다. 은근한 멸시를 받았지만 왕의 아들인지라 대우가 그리 박복하지는 않아 모자람 없이 자랐다. 무수리의 서자라는 사실과 왕의 아들로서 핏줄 이 두 가지는 그의 남은 삶을 규정짓게 된다. 그는 즉위 후 어머니 숙빈 최씨가 무수리 출신으로 최선을 다했다라 여겨 왕비로 추존하려 하였으나 노론계 예학자들의 강경한 반대로 실패하고 만다. 이후 부왕 숙종의 다른 후궁인 명빈 박씨에게서도 이복동생 연령군이 태어난다. 이복동생 연령군은 왕실의 기대를 한껏 받았으며 그만한 기대를 받을만하다고 본 연잉군은 연령군을 질투하지 아니하고 그 또한 각별히 아껴 둘 사이는 퍽 좋았다. 장희빈을 후궁으로 삼아 정국을 이끌기에는 틀렸다고 여긴 숙종은 특출함은 없어도 무난한 연잉군을 다음 세대로 점찍고, 이이명 등에게 연잉군과 연령군을 잘 부탁한다는 발언을 하였다. 잠재적 왕위계승권자[편집]왕세자는 1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희빈 장씨가 당쟁의 대격분(大激憤)으로 사약(死藥)을 마신 것을 목도(目睹)한 후 심질(心疾)을 얻어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숙종은 경종의 후사(後嗣)를 연잉군이 잇도록 하라고 좌의정 이이명에게 명하였다.(정유독대) 당시 숙종이 이이명을 불러 독대함에 연잉군이 무수리의 자식이라며 은연히 멸시하던 소론이 이를 알고 왕세자의 대를 연잉군에게 결코 넘길 수 없다며 반발하여 상소를 올려 이이명은 물론 숙종까지 격렬히 비난하였다. 이이명을 비롯한 노론은 연잉군에 동조적이라 연잉군을 어떻게든 비호하려 해 살얼음 같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이 독대로 격화되어 전장을 방불케했다. 경종 즉위년(1720년)에 왕세자가 즉위하자 훗날 영조가 목숨이 위태로웠다고 이때를 말할만치 소론과 노론의 당쟁이 홍수 터지듯 밀려왔으며 경종은 큰 방향만을 보일 뿐 당쟁은 지켜만 보았다. 왕세제의 제 자만 튀어나와도 소론이 죽일 듯이 달려드는 정국에서 노론인 김창집(金昌集) 등이 결사적으로 왕세제 책봉을 상소했으나 소론인 유봉휘(柳鳳輝) 등이 격렬히 논박하였다. 왕세제 시절[편집]소론의 논박에도 불구하고 경종에게 자식이 없고 경종에게 가장 가까운 혈족이라고는 연잉군 뿐이라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소론은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을 미루고 그 책봉의 문제점을 부각시킬 수 있을 뿐 연잉군의 왕세제 책봉은 이미 정해진 일이었다. 그러나 연잉군은 왕세제 직위를 몇 번이고 사양했다. 그러다가 결국 1721년(경종 1년) 음력 8월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1] 이후 노론측에서 세제 대리청정을 건의하자 소론측에서는 노론의 불순한 의도를 지적했고, 경종은 입장표명을 하지 않다가 목호룡의 고변이 터지면서 사태가 달라진다. 이어 노론의 대리청정 건의로 일시 정무를 담당했으나 소론의 반대로 청정을 취소당했고 신임사화로 노론이 실각하자 자신을 지지하던 김창집, 이이명, 이건명, 조태채 등 4대신과 50여명의 고관들이 사형당하고 그 일족이 유배, 투옥되는 등 지지 세력을 잃었으며, 1722년 김일경(金一鏡) 등의 사주를 받은 박상검(朴尙儉)·문유도(文有道)의 음모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살아남은 노론세력은 세를 키워나갔고, 그는 다시 세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1724년 음력 8월에 병약하던 경종이 승하하자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즉위 후[편집]탕평책[편집]치열한 당쟁 속에서 생명의 위협까지 느꼈던 영조는 등극하자마자 소론을 몰아내고 한때 노론 정권을 수립했으나 1724년 김일경과 목호룡이 경종독살설을 주장한 것과 국왕인 그에게 왕이라 칭하지 않고 너, 그대라고 칭하는 것을 보고 충격받게 된다.[2] 만인의 임금이 되고 싶었던 그는 붕당의 폐습을 통감하여 차츰 소론을 등용하고 1727년 노론의 강경파를 추방하고(→정미환국), 이후 양파를 고르게 등용함으로써 탕평책을 기본 정책으로 삼아 당쟁의 격화를 막았다. 그러나 임금으로 즉위한 지 4년 만인 1728년에 경종의 죽음으로 정치적인 기반을 위협받게 된 이인좌, 이유익 등이 소현세자의 증손자인 밀풍군(密豊君) 탄(坦)을 임금으로 추대하여 무력으로 영조와 노론을 몰아 내려 하였다. 이인좌의 난 전후[편집] 이인좌의 난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1728년 소론 강경파인 이인좌 형제 등은 충청북도 청주성을 거점으로 하여 거병하여 이인좌의 난을 일으킨다. 이는 무신년에 일어났다 하여 무신란으로도 부른다. 이들은 경종의 위패를 모시고 조석으로 곡을 하였으며, 영조의 경종 독살설을 시중에 확산시켰다. 청주성에서 일어난 반란군은 즉시 경상도와 전라도로 확대되었고, 관찰사와 병마절도사가 전사하기도 했다. 그러나 관군을 투입해 난을 진압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경상도 안동과 대구의 유생들이 자발적으로 창의군을 조직하여 이인좌의 난 진압에 참여하였으나 난군 세력이 영남에서 가장 발호했다는 이유로 반란 진압 후 남인들의 협조설까지 확산되면서 경상도를 반역향으로 규정하여 과거를 정거하고 금고령을 내린 뒤, 대구감영에는 평영남비를 세우게 된다. 이후 과거와 출사를 금지당한 영남의 남인계 유생들은 정조 때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영남 의병의 행적과 선비들의 연명부를 적은 영남만인소를 두 차례에 걸쳐 올리게 된다. 난이 진압된 뒤에도 그는 탕평책을 유지하게 되지만 노론 편향으로 흘러가게 되었고, 사도세자 사건으로 이어지게 된다. 인권과 경제정책[편집]영조는 조선사회를 개혁한 계몽군주로서 가혹한 형벌을 폐지 또는 개정하여 민중들이 인권을 존중받도록 하였으며, 신문고 제도를 부활하여 민중들이 억울한 일을 직접 알리게 했다. 그는 금주령(禁酒令)을 내려 사치·낭비의 폐습을 교정하고 농업을 장려하여 민생의 안정에 힘썼다. 기민(飢民)의즉, 배고픈 민중들의 실태를 조사하여 그들을 구제하고, 민중들이 국방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을 제정하여 세제(稅制)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으며, 신분에 따라 국가에 대한 의무를 달리 부담하게 하였다. 또 일본에 조선 통신사로 갔던 조엄이 고구마를 들여왔는데, 그가 들여온 고구마는 훗날 흉년 때 식량으로 대신할 수 있게 되었다. 영조 자신도 소식(小食), 물자절약등으로 검소하게 살아냄으로써 국가 지도자로서의 모범을 보였다.[3] 또한 북관의 군병에게 조총 훈련을 실시하고, 1729년 화차를 제작하여 이듬해 수어청에 총의 제작을 명하고 진(鎭)을 설치하여 각 보진(堡鎭)의 토성(土城)을 개수하는 등 국방 대책에 힘썼다. 오가작통법을 부활하여 조세 수입을 늘리고, 1756년에는 기로과(耆老科 : 60세 또는 70세 이상인 노인만 보는 과거)를 신설하였다. 학문진흥[편집]학문을 좋아했던 영조는 스스로 서적을 집필하였으며, 인쇄술도 개량해 많은 서적을 간행하고 반포하여 민중 모두가 마음껏 읽을 수 있게 만들었다. 《퇴도언행록(退陶言行錄)》·《어제여사서(御製女四書)》·《육전(六典)》·《소학훈의(小學訓義)》·《속오례의(續五禮儀)》·《속대전》·《무원록(無寃錄)》·《속병장도설(續兵將圖說)》·《누주통의(漏籌通義)》·《해동악장(海東樂章)》·《여지도서(輿地圖書)》·《동국문헌비고》·《숙묘보감(肅廟寶鑑)》 등 많은 서적들을 편찬했으며, 《어제경세문답(御製警世問答》·《위장필람(爲將必覽)》 및 《악학궤범(樂學軌範)》의 서문은 영조의 자서이다. 또한 유능한 학자를 발굴하여 실학의 학통을 수립하게 하고, 풍속·도의의 교정에도 힘써 사회·산업·문화·예술 등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이룩했다. 영조의 이러한 실용 정책의 영향으로 조선은 이익을 선봉으로 실학이 자라기 시작했으며, 영조의 뒤를 이은 정조의 시대는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불릴 만큼 크게 성장하게 된다. 생애 후반[편집]탕평의 실패[편집]그러나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는 끝내 1762년 자신의 아들인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 사도세자는 경종비 선의왕후가 만년을 보내던 저승전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이들을 통해 경종독살설을 접하고 노론에게 반감을 갖게 된다. 영조의 원비이자 사도세자를 양자로 입양한 정성왕후 서씨가 죽고 맞이한 김한구의 딸 정순왕후 김씨와 후궁 숙의 문씨 역시 사람을 심어 사도세자의 행적을 영조에게 고해바치며 양자 사이를 이간질했다. 김상로, 홍계희, 김한구 등은 세자가 그릇된 정치관을 갖고 있다고 영조에게 고하였고, 영조에게 경종 독살설의 진실을 묻게 된다. 또한 세자는 대리청정 기간 중 이인좌의 난 이후 꾸준히 요구된 소론계 인사들에 대한 연좌제, 처벌을 반대하고 소론계 인사들을 등용하여 노론에게 경계심을 불러 일으킨다. 1749년에 사도세자가 영조의 건강 때문에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사도세자와 영조를 이간질하는 노론과 정순왕후에 의해 사도세자는 뒤주에 갇혀 죽게 되었다. 일부 사학자들은 영조는 후에 사도세자를 죽인 것을 후회하고 사도세자의 아들(후일의 정조)을 왕세손으로 삼았다고 주장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영조는 이미 사도세자가 생존했을 당시 손자를 세손으로 책봉했다. 이는 보위를 이을 세자가 생존한 상태에서 세손까지 점지한 것으로 세종임금이 병약한 문종이 세자였을 때 단종을 세손으로 삼은 것과 더불어 무척 드문 예라 할 수 있다. 혹자는 주로 왕위세습구도가 불분명할 때 세손책봉을 하며 이미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이기로 오랫동안 마음을 굳혔을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시킨 이유로 노론을 견제하는 방법을 가르치려 했다는 주장도 있으나 이 역시 허무맹랑하다. 영조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허락한 것은 승하하기 고작 석달 전으로 정치적인 학습과 대리청정을 무관해 보인다. 영조는 늙어서 분별력을 잃을지언정 권력을 놓지 않았다. 훗날 정조가 되는 세손은 대리청정을 받아들이는 조건을 아버지 사도세자의 기행 및 살인행각을 담은 기록을 삭제할 것으로 요구했고 영조 승하 직전 승정원일기가 세초되었다. 세손 대리청정과 최후[편집]그의 사후 노론에서 사도세자사건을 언급하며 죄인의 아들이라고 할 것을 예상하여 세손을 일찍 죽은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양하고, 후사를 얻지 못하고 죽은 맏며느리 효순현빈은 승통세자빈으로 봉한다. 또한 정조에게도 즉위 후 효장세자를 왕으로 추존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영조는 세손에게 보위를 양위하려 하였으나 신하들의 만류로 대리청정을 결심한다. 1774년(영조 50년) 그가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할 때 홍인한 등 노론의 지도부가 승정원의 승지와 사관(史官)들을 가로막고 붓을 빼앗으면서까지 방해하였으나 그는 세손에게 대리청정을 명하였고, 곧이어 병권을 움직일수 있는 감국권과 부절 승인권한 역시 세손에게 넘겨주었다. 한편 은언군과 은신군 등이 시장에서 송사에 휘말린 뒤 홍봉한이 이들의 뒤를 후원하였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손자 은언군과 은신군을 제주도로 유배보내게 된다. 은신군은 곧 풍토병을 얻어 사망하고 은언군은 세손이 즉위한 뒤에 석방된다. 만년에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갔으며, 1776년 영조는 83살의 나이로 죽어 조선 왕조의 역대 임금 중 최장 재위 기간(52년)을 가진 임금으로 기록되었다. 사후[편집]대리청정과 병권을 장악했고, 세손궁료들의 기민한 움직임으로 세손은 보위를 계승하여 22대 왕 정조가 된다. 그리고 그의 유언대로 효장세자를 진종으로 효순현빈을 효순왕후로 추존하였으나 정조는 즉위 첫날 자신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선언한다. 한편 조선 후기로 오면서 임금의 국상에도 3년상을 입는 사대부 수가 감소하게 되면서, 영조의 국상 당시 빈소를 마련하고 3년상을 마친 주도복, 이상호 등의 선비들을 특별히 상을 내려 포상하기도 했다. 재궁은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현 구리시)의 동구릉의 원릉에 안장되었다. 현재의 원릉 자리는 원래 그의 증조부인 효종이 안장되었다가 이장된 자리라서 여러 번 논란이 있었으나 그대로 현재의 원릉 자리에 안장된다. 원래의 묘호는 영종(英宗)으로 시호와 존호를 합쳐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익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宗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翼文宣武熙敬顯孝大王)였다. 그러나 고종 때 묘호가 영종에서 '영조'로 바뀌고 존호를 더하여 정식 시호는 '지행순덕영모의열장의홍륜광인돈희체천건극성공신화대성광운개태기영요명순철건건곤녕배명수통경력홍휴중화융도숙장창훈정문선무희경현효대왕'(英祖至行純德英謨毅烈章義弘倫光仁敦禧體天建極聖功神化大成廣運開泰基永堯明舜哲乾健坤寧配命垂統景曆洪休中和隆道肅莊彰勳正文宣武熙敬顯孝大王)이 되었다. 한편, 청나라에서 내린 시호는 장순왕(莊順王)이나, 청나라와의 외교 이외에는 사용치 않았다. 능묘[편집]영조의 능은 원릉(元陵)은 1776년 7월 27일 조성되었으며, 정순왕후 김씨와 함께 안장되어 있다. 능묘의 위치는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으며, 동구릉의 하나로 사적 제193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러나 영조는 1757년, 66살의 나이로 정비인 정성왕후가 승하하자 영조는 정성왕후의 능을 아버지인 숙종(肅宗)의 명릉(明陵) 근처에 만들고 훗날 자신이 정성왕후의 옆에 묻히기 위해 옆자리를 비워놓았으나 1776년, 영조가 승하한 뒤 손자인 정조(正祖)는 당시 왕대비(王大妃)였던 영조의 계비(繼妃)인 정순왕후(貞純王后)를 의식하여 현재의 동구릉 위치에 영조와 정순왕후의 무덤인 원릉을 조성하였다. 가족 관계[편집]왕가(王家 : 전주 이씨)
영조
평가[편집]노론과 소론의 중재와 공정한 등용, 탕평책을 통한 당쟁의 완화, 악형과 인습의 폐지와 문예 부흥을 높이 평가받는다. 그러나 아들 사도세자를 사형시킨 점은 부정적인 평가의 대상이 되고 있다. 기타[편집]영조는 세손(정조)의 아내였던 정비 효의왕후를 각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평소에 세손빈으로써 당시에 중전 정순왕후를 비롯하여 시어머니인 혜경궁 홍씨한테도 지고지순하게 잘하며 조용하고 검소했던터라 영조의 극찬이 끊이지 않았고 화완옹주처럼 끔찍하게 총애하고 아꼈다고 한다. 영조가 등장하는 작품[편집]소설[편집]
드라마[편집]
영화[편집]
방송[편집]
관련 문화재[편집]
주석[편집]
같이보기[편집]참고 자료[편집]
바깥고리[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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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백두산 호랑이 원문보기 글쓴이: 이창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