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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의 뮤지컬 제작: 법인 뮤지컬(Corporate Musical)과 카메론 매킨토쉬(Cameron Mackintosh)
♣ 들어가는말
최근 5년 사이에 우리 나라에서는 뮤지컬 붐이 일고 있다. 올해 서울과 전국에서 세 번쨰로 다시 공연된 [명성황후]를 비롯하여 최근 제작된 여러 뮤지컬의 공연을 보아도 그 열기를 알 수 있다. 뮤지컬이야말로 현대의 대중사회에 가장 부합되는 대중적 문화장르이다. 때문에 한 국가의 경제발전에 발맞추어 문화적 역량이 함께 발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다. 그런 의미에서 [명성황후]를 제작한 에이콤 사(社) 같이 고품격의 상업적 뮤지컬을 표방하며 창작뮤지컬로 한국의 문화적 저력을 세계로 뻗어가고자 하는 포부를 가진 회사가 있다는 것은 매우 고무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에 불고 있는 뮤지컬 붐은 세계 뮤지컬 계(界)의 현황과 맞물려 있다. 흥미로운 점은 지금 뮤지컬의 본고장에서는 현대적 기업방식으로 뮤지컬을 제작하는 <법인 뮤지컬> 이라는 장르가 그 주류를 이루고 있다.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는 세계의 쇼비지니스계에서 대중성과 예술성을 겸비한 뮤지컬을 연속적으로 제작하여 성공의 가도를 달리고 있는 카메론 매킨토시라는 제작자를 주목하게 되었다. 결국 이 글은 <법인 뮤지컬> 과 매킨토시라는 인물의 탐구를 통해서 세계 뮤지컬 계의 현황을 파악함으로서 세계에서 한국의 창작뮤지컬이 운신할 수 있는 타당성과 그 가능성을 타진해 볼 수 있는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서 시작되었다.
더할 나위 없이 화려하고 번쩍이는 외향적 모습과는 달리, 브로드웨이의 연극평론가, 윌리암 코벳(William Corbett)이 뉴욕의 [Literary Lights]에 쓴 글을 보면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전망은 비관적인 편이다.
뮤지컬은 60년대 초부터 번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새로운 작곡가는 거의 없다. 뮤지컬은 오직 한 사람의 새로운 뮤지컬 작가 스티븐 손트하임(Stephen Sondheim) 만을 위한 공간처럼 보였다. 80년대 초에 이르러 브로드웨이는 관광객의 관심을 끌기 위해 더 적은 수의 뮤지컬을 올리고 있다. 몇 년 동안 10개 정도밖에 제작되지 되지 않았다. 이 10개도 파격적인 무대 효과에 의존하는 스타를 내세우는 것이거나 코믹물이었다.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이다. 브로드웨이가 다시 뉴욕의 문화생활에서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라는 것을 예상하기는 어려운 일이다.
대부분의 20세기 동안 뮤지컬로 이윤을 남기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웠다. 1943년 [오클라호마]로 시작되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황금기인 1940~ 1969년대 중반까지 동안 대부분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은 $50,000~$250,000의 수익을 올렸다. 이러한 수익은 그 당시 최고 입장료가 평균 $8 이었음을 감안할 때 평균 200회 정도의 공연이면 벌어들일 수 있는 금액이었다. 이것은 제작자가 좋은 작품으로 자신이 투자한 금액을 다시 찾을 수 있는 확률이 절반 정도나 되는 꽤 괜찮은 장사였다.
그러나 최근 30년 동안 브로드웨이 제작가격은 엄청나게 부풀려졌다. 인플레이션의 영향, 터무니없는 노조의 요구조건 및 너무 많은 사람들이 연관되어 뮤지컬 수입에서 각자 큰 몫의 이윤을 바라는 이들의 탐욕 때문에 뮤지컬의 제작비는 부풀려질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렌트](Rent 1996)를 제작한 탄탄한 제작사는 3백만 달러의 예산만으로 제작할 수 있었던 반면, [선셋 블루바드] (Webber 1994) 나 [빅터/빅토리아] (Macini & Bricusse 1995)는 무려 천만 달러가 넘는 무절제한 제작비가 들었다. 최고 입장료가 $80 임을 고려 할 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캣츠](1982)나 [오페라의 유령](1985) 같은 힛트 작은 10년 넘게 장기 상영되고 있으면서 10억불($100,000,000)의 수익을 올리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쇼는 몇 년씩 무대에 올려지다가도 적자상태로 문을 닫게 된다. 예컨대 거슈인의 [당신을 열렬히 사랑해] (Crazy for you 1993) 는 비평가들과 관객의 호평을 받았으나 브로드웨이에서 1000회 이상 공연을 하고도 투자한 원금을 찾을 수 없었다. 그만한 액수를 벌려면 외국 제작사를 필요로 했고, 순회공연을 해야 했다.
♣ 법인 뮤지컬의 정의와 특징
법인 뮤지컬이란 디즈니나 리벤트(Livent) 같은 다기능을 가진 연예회사에 의해 제작되고 경영되는 뮤지컬을 말한다. 1990년대 후반까지 브로드웨이에서 공연된 대부분의 쇼는 법인체의 산물로서 무대에 올려졌다. 8백만 달러 정도 소요되는 뮤지컬 제작의 평균 예산을 가지고 그 쇼의 제작비를 조달하기 위해서는 수많은 사람들을 필요로 하며 그 사람들은 모두 제작에서 일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결국 아마추어나 새로운 시도로 반란을 꿈꾸는 사람들이 입을 뻥끗 할 수 있는 공간은 하나도 없게 된다. 결국 [렌트] (1996) 같이 반체제적인 분위기라고 과대 선전되었던 작품까지도 회사가 일년 동안이나 수백만 좌석예약(출연계약)과 전국순회공연을 계획했다. [렌트]의 제작팀이 비젼을 가지고 이 쇼를 통해 진정한 모험을 감행했다는 것을 부인할 수는 없으나 이것은 수년에 걸친 사업 경험과 판단을 기초로 한 <잘 준비된 모험>(well-calculated risk)이었다. 그들은 그 판단을 바탕으로 뉴욕 극장 워크숍에서 그 쇼를 개봉하기 몇 달 전에 조나탄 라슨(Jonathan Larson)에게 대대적인 개정을 지시했으며, 그로 인해 라슨은 브로드웨이의 장기공연 뮤지컬의 작가로 부상할 수 있었다.
보통 쇼의 구상 단계에서는 작곡가나 작가의 아이디어를 가지고 시작하지만 작품이 진전되는 과정은 사업 방식으로 전개된다. 제작자들은 법인체의 재정적 후원을 가지고 과거 쇼를 감독하던 방식으로 작품을 만들어간다. 보통 일반 뮤지컬에는 개별 작가의 톡톡 튀는 개성이 분명히 드러난다. 반면 법인 뮤지컬은 백화점 식의 잘 계산된 효율성을 가지고 모두 매끈하게 진행되기 때문에 인상적으로 보이며 다양한 팝 발라드를 풍성하게 들려준다. 또한 법인 뮤지컬은 때때로 우리를 미소짓게 만들기도 하며(과거 대부분의 영국산 대규모 뮤지컬보다 훨씬 더), 외국 공연이나 순회공연을 위해 무대 세트나 배역진을 구비하고 있기 때문에 즉각적인 재공연이 가능하며 비싼 개런티를 받는 스타를 기용할 필요도 없다. 하지만 법인 뮤지컬에는 <유쾌한 생동감> (joyous vitality) 이 결여되어있는데 그것은 창조적 개성을 가진 개인만이 줄 수 있고 법인체의 의식으로는 도저히 제공할 수 없는 가치를 말한다.
유쾌한 생동감은 없으나 세련되고 매끈한 법인 뮤지컬의 또 하나의 중요한 특징은 복제가능성(duplication) 이다. 예컨대, [렌트]를 재공연할 때 사용되는 복사기 같은 복제기술이 사용되었다. 이 작품은 간단한 싸구려 지하실 의상과 초보적인 무대장치를 쓰는데 이는 옮겨다니기 쉽고 또 쉽게 포장될 수 있다. [렌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조명과 음향 시스템을 위한 충분한 전기를 확보하는 것이 전부이다. [렌트]는 브로드웨이 뮤지컬 중에서 무대 장치 보다 스피커로 훨씬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하는 그 최초의 작품이다. 그래서 뉴욕에서 도쿄까지 그 위치가 어디이건 간에 똑같은 금발머리 남자배역이 주도해서 똑같은 곱슬머리의 미미 주위에 똑같은 대머리 쌍두를 뒤집어씌우고 그들과 똑같은 머리의 마이크는 똑같이 무대화된 키스를 받도록 되어있다. 이처럼 간단한 제작 가치와 스타가 필요 없는 배역진 덕분에 [렌트]는 [라이언 킹]의 제작비의 1/4분만으로 제작될 수 있다.
디즈니사에서 공연한 [미녀와 야수]를 보아도 마찬가지이다. [미녀와 야수]는 전세계적으로 다양한 언어로 공연되고 있는데 완벽하게 정형화된 배우들이 브로드웨이 원래 배역들을 그대로 본 따는 연기로 혀를 내두를 만큼 정확하게 복제(duplicate)하여 전세계적으로 공연되고 있다. [미녀와 야수](1994: 200 + 아직도 공연중) 는 극장가의 풍경을 뒤흔들어놓는 변화를 가져온 쇼로서 1994년의 진정한 승리자였다.
이 작품은 월트 디즈니 프로덕션이 브로드웨이에서 처음한 시도로서 섬세한 면이 결여된 점도 있지만 어쨌든 매표소에서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과거 극장을 거의 안 가던 사람들도 이 쇼를 보기 위해서 비싼 표 값을 기꺼이 지불했다. 엄청난 마케팅 능력과 계열의 흡인력을 구비한 한 연예회사(법인)는 기존 프로그램을 새로운 방식으로 사업하는 예를 보여 주었다. 완벽한 복제 원리를 이용하여 전세계적으로 공연되는 이 쇼에는 만화영화를 좋아하는 아이들 뿐만 아니라 그 부모까지도 함께 와서 온 가족 쇼로 즐겼다. 부모들 편에서 보면 이 쇼는 보통 영화 등의 대중오락에 만연된 폭력과 성(性)이 배제되어 있어서 안심하고 깔끔하고 세련된 쇼의 화려함을 즐길 수 있어서 대만족 이었다. 이와 함께 매표소와 관련상품판매를 통해 수 조원의 수입이 속속 들어왔다.
만약 영국사람들이 뮤지컬 관련 마케팅에 관한 책을 썼다면 디즈니는 아마 도서관을 지었을 것이다. 디즈니의 이러한 승리는 [라이언 킹](1997: 아직도 공연 중)이 브로드웨이에 입성할 무렵에 완결되었다. [라이언 킹]은 뉴 암스테르담 극장에서 초연되었는데 이 극장은 원래 [유쾌한 과부](Merry Widow)와 지그펠트의 [폴리스](Follies)가 자랑스럽게 공연되던 극장으로 디즈니 법인체가 매입해서 새로 복구한 것이다. 그 바로 옆에는 디즈니사의 거대한 상점이 개점되었고, 거기서 한 블럭 떨어진 곳에서는 초현대식의 디즈니 호텔이 신축 중에 있다. 만일 [라이언 킹]의 음악이 쉽게 잊혀질 만하고 전체 제작에 1,200만 달러나 든 단순한 인형극에 지나지 않는다면 어떡할까? 하는 의혹도 있었고, 표 값이 좌석 당 80달러로 올랐지만 그 열기는 식지 않아서 벌써 일년 후 공연의 예매가 모두 끝났을 정도로 인기를 누리고 있다. 토니상은 이러한 새로운 체제에 비굴하게 아부해야 의무를 느끼듯 [라이언 킹]에 최우수 작품상을 수여했다. 하지만 최우수 작곡상과 대본상은 [래그타임]에게 돌아 갔다. 극장에 한번도 관심이 없던 사람들도 [라이언 킹]을 보기 위해 줄을 섰으며, 그 사실에 대해 브로드웨이는 더 이상 왈가왈부할 마음이 없다. 미국의 법인 뮤지컬은 영국의 대규모 뮤지컬(mega-musicals)들을 무색하게 만들었다.
다저스(Dodgers) 역시 법인뮤지컬을 올리는 회사이다. 1990년대 후반의 최고의 쇼들 역시 예술적 품위뿐만 아니라 기업의 이윤을 목표를 하는 법인 뮤지컬에서 왔다. 다저스는 아무도 성공가능성을 믿지 않았던 [타이타닉](1997: 아직도 공연됨)을 제작하여 아직도 성공을 거두고 있다. 그들은 경험 있는 제작팀을 보유하고 과거 10년간 미국 뮤지컬을 성공적으로 제작하고 있다. 10년 전 예상치 못한 성공을 거둔 [Big River] 이래로 다저스는 창작뮤지컬과 스타중심의 리바이벌 쇼에서 괄목할만한 기록을 세웠다. 그들은 [Nine], [Grand Hotel]을 작곡한 머리 예스톤 (Maury Yeston) 이나 대본가 피터 스톤([1776]) 처럼 성공할 것 같지 않은 작품을 힛트 뮤지컬로 만드는 사람들을 알아보는 노련한 직관을 가지고 있었다. 그 결과 미국은 과거 10년 동안 최고의 뮤지컬 신작을 냈다. 사실상 [타이타닉]은 법인 뮤지컬의 특징을 갖고 있지만 예술적 영혼을 간직한 작가의 개성적 면모가 마케팅의 관심보다 앞서 있는 작품이다. 12명 이상의 주요 등장인물들은 분명한 배역의 특징을 가지고 노래를 통하여 그 특징을 잘 나타내면서 어떤 시대나 인종적 특징을 연상시키는데 성공했다. 예컨대, 'In America'는 희망에 찬 이민자들이 그들의 꿈을 이야기하는 노래이며, 'Still'은 늙은 부부가 죽음을 직면한 순간에도 아직 서로 사랑한다는 사실을 재확인하는 노래로서 감동의 순간을 연출하는 노래이다. 강력한 능력을 구비한 감독이나 단일 제작자는 연극의 극적 흐름을 날카롭게 포착하기 위해서 보통 적은 수의 배역에 초점을 맞추지만, 기업적 사고(思考)는 내용을 정직하게 말하기보다는 대개는 부풀리도록 만든다. [타이타닉]은 토니상을 여러 개 받을 만한 가치가 풍성한 작품으로 [집시]나 [마이 페어 레이디]같이 전율적인 감동을 주지는 않지만 [스타라이트 익스프레스]나 [미스 사이공]보다는 대단히 앞서 있는 작품이다.
리벤트(Livent)는 캐나다 토론토에 본부를 두고 제작자와 공연자들이 수직적으로 합병해서 만든 대표적인 극장공연제작회사이다. 이 회사의 브로드웨이 제작품들은 총 18개의 토니상을 수상했는데 여기에는 [거미 여인의 키스]로 최우수뮤지컬상, [쇼보우트]로 최우수 리바이벌 뮤지컬상, [베리모어]의 트리스토퍼 풀러머의 남우주연상, [캔디드]의 최우수 의상디자인상, [래그타임]의 최우수창작음악상 및 대본상이 들어있다.
리벤트가 제작한 [래그타임](1997: 아직도 공연됨)은 미국작곡가, 린 아렌스(Lynn Ahrens) 와 스티븐 플래허티(Stephen Flaherty)의 화려한 음악 덕분에 또 하나의 법인 뮤지컬의 훌륭한 예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타이타닉]에서와 같이 [래그타임]에도 수많은 배역들이 20세기 세기초의 음악양식을 연상시키는 음악 속에 등장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래그타임은 끓어오르는 코랄이나 발라드와 함께 신랄한 풍자('세기의 범죄')나 야비한 유모어 ('이 무슨 장난' What a Game) 등을 서슴지 않고 보여주는 작품이다.
디즈니에 못지 않게 리벤트 사(社)는 여러 극장과 연주장소를 소유하고 또 운영하고 있는 법인체이다. 여기에는 뉴욕의 포드공연예술센터와 토론토의 팬티지스 극장이 포함된다. 또한 리벤트 사는 시카고에서 역사적인 오리엔탈 극장을 재건축하여 공연예술 오리엔탈 극장을 위한 포드 센터를 복구하였다. 뉴욕 타임스의 허버트 머쉬햄프 (Herbert Muschamp)는 포드 센터를 가리켜 "브로드웨이의 오래된 멋진 건물의 장식적 선율들이 부드럽게 한데 모여 이루어진 반짝이는 메들리"라고 말했다.
포드공연예술센터는 뉴욕의 타임스 스퀘어 서쪽의 42번 가(街)에 자리잡고 있으며 브로드웨이에서 가장 최신 극장이다. 전설적인 리릭 아폴로 극장 자리에 건축된 1,813석의 극장은 원래 건물의 역사적 구조를 통합하는 극장환경을 아우르는 동시에 오늘날의 배우들이 고도로 예술적 가치를 구비한 절대 타협하지 않는 제작 속에서 새로운 세대의 관객들을 즐겁게 해 주는 것이 가능하도록 한다. 포드 센터에는 전에 아폴로 극장의 모티프에 새로 만든 주된 로비(원래의 리릭 아폴로 디테일을 보유한)에 어울리는 세부적 회칠을 구비하였다. 브로드웨이에서 두 번째로 큰 극장으로 다시 긁어 만든 마루를 가진 Great White Way에서 가장 친근한 좌석으로 어느 자리에서도 동선이 탁월하다. 대공연장의 좌석은 극장에 오는 관객들이 최대한 편안하게 다리를 뻗고 볼 수 있도록 공간이 넓은 것이 특징이다. 이 극장은 장애자 관람객들이나 연주자들 및 무대 뒤의 스탭진들이 손쉽게 다닐 수 있도록 배려되었다. 포드 공연센터는 1997년 12월 12일 개관하여 토니상 수상작 [래그타임]의 초연을 개관기념작품으로 공연하였다.
리릭 극장은 42번 가 서쪽 213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1903년 작곡가 겸 흥행가인 레지날드 드코븐 (Reginald deKoven) 이 지었으며 건축가인 휴고 쾰러 (V. Hugo Koehler) 가 설계하였다. 43번 가 티 자 모양의 땅에 위치한 공연장으로 이어지는 42번 가의 입구를 가지고 있다. 43번 가의 전면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저택과 흡사하며 벽돌과 테라코타에 구리로 된 지붕과 철제 발코니로 이루어졌다. 이 건물 전면은 가면(masks), 수금(手琴 lyres), 뮤즈의 신들 같은 고전적 주제를 나타내는 장식들로 치장되었다. 철제와 유리로 만든 천개(天蓋)가 현관 위를 덮고 있는데, 이 현관에서 무대로 이어지고 4층의 연습실로 이어지는 계단과 연결된다. 여기에서 샘 리 (Sam Lee) 와 슈버트 (J. J. Shubert) 는 드코븐에게서 리릭 극장을 임대해서 여러 편의 초기 쇼들을 무대에 올렸다. 이 공연장은 연한 녹색과 장미색으로 페인트 칠 되었으며, 천장은 아이보리색과 황금색의 석고 부조로 장식되어 있다. 1903년 10월 12일부터 리차드 맨스필드가 [Old Heidelberg]로 이 극장을 개장한 이래 더글러스 페어 뱅크스가 [Fantana]에 주연을 맡은 1905년까지 슈버트 형제들은 리릭 극장의 로비 위에 있는 사무실에서 함께 일했다. 1905년 샘 슈버트가 열차 사고로 비극적 죽음을 당하고 나서 리와 제이제이는 브로드웨이 극장에 대단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제국을 건설하였다. 리릭 극장에서 그들은 버나드 쇼의 [무기와 인간] (Arms and the Man) 을, 1911년에 입센의 [여인과 바다]를 공연하였다. 1912년 루돌프 프리믈 (Rudolf Friml) 과 아더 햄머슈타인 (Arthur Hammerstein)은 [개똥벌레] (The Firefly) 로 브로드웨이에 데뷔했으며 1913년 프리믈은 [신나게 떠들어대는 난장판] (High Jinks) 을 연이어 올렸다.
1914년 프레드 & 아델레 애스테어(Fred & Adele Astaire)는 [제발] (For Goodness Sake)에 출연했으며, 1925년 샘 해리스는 어빙 벌린과 죠지 해리스의 [코코낫]에서 막스 브라더즈를 출연시켰다. 1926년 바비 클락과 펄 맥컬로는 코메디 [건달] (The Ramblers)로 장기공연을 했다. 2년 후 플로렌스 지그펠트는 리릭 극장에서 프리믈의 [3인의 소총사] (The Three Masketeers)와 콜 포터의 [5천만의 프랑스인들]을 공연했다. 1934년 리릭 극장은 그 시대의 경향을 따라 영화관으로 바뀌어 1992년까지 대중들로부터 닫혀 있었다.
아폴로 극장은 42번가 217-223 번지에 위치하며 1920년 42번 가에서 최초의 영화 및 보드빌 극장이었던 브라이언트 극장 자리에 셀윈 형제들에 의해 지어졌다. 아폴로 극장은 타임스 스퀘어 극장 이후에 이 블록에 세워진 마지막 극장으로 타임스 스퀘어 극장과 전면을 공유하고 있다. 드 로자와 페랑라 같은 건축가들의 아담 양식으로 디자인되었으며 실내는 황갈색, 장미색과 푸른색 페인트를 칠했다. 아폴로 극장의 42번 가 입구에 들어서면 화사한 회랑(복도)과 로비로 이어지며 43번 가에 위치한 아폴로 극장의 공연장으로 연결된다.
이 극장은 1920년 11월 11일에 오스카 햄머슈타인이 각본과 음악을 약간 쓴 [지미](Jimmie)를 개관작품으로 공연한 이래 리오넬 베리모어 주연의 [맥베스]를 다음 작품으로 공연했다. 아폴로 극장의 최초의 성공작은 1923년 필즈(W. C. Fields) 주연의 [Poppy] 였으며, 죠지 화이트의 [스캔들] (죠지 거슈인의 음악) 의 1924년 개작으로 그 성공을 이었다. [스캔들]의 다섯 가지 다른 버전이 아폴로 극장에서 상연되었는데 에텔 머만, 지미 뒤란테, 레이 볼저와 루디 발레 등을 포함하는 스타들이 출연했다. 1927년 에드 윈 [맨하탄 메리]에 출연했으며 1930년 버트 라르(Bert Lahr)와 케이트 스미스가 [높이 나르자] (Flying High)에 출연했다. 1933년 에텔 머만은 [모험 해보기] (Take a Chance)에 다시 출연했다. 1934년에서 38년까지 4년 동안 이 극장은 벌레스크 (Burleske) 공연장으로 쓰이다가 영화관으로 전향했다. 1978년 이 극장은 다시 개조되어 43번 가에 입구를 마련하고 다시 개장했다. 1년 후에 연극 [황금연못]으로 개장된 것은 아폴로 무대가 합법적인 극장으로 되돌아감을 알리는 전령이 되어 현재의 [Bent], [7월4일]과 1983년의 [트럭에 탄 녀석들]. 그 후 몇 년 동안 이 극장은 다시 영화관으로 사용되다가 1987년에 아카데미로 이름이 바뀌어 재즈 컨서트, 캬바레, 대중음악 콘서트 공연장으로 사용되었다.
팬티지스 극장 (Pantages Theatre) 은 원래 보드빌의 전성기요, 무성영화 시대인 1920년에 세워진 극장이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극장 건축가, 토마스 램 (그는 토론토의 뢰베스 업타운 극장과 엘진-윈터가든 극장 등을 설계하였다)의 디자인에 따라 영화 왕, 나탄슨(N. J. Nathanson) 이 지은 팬티지스 극장은 1920년 8월 20일에 '종합관 (Combination House)으로 개관하였다. 여기서는 무성영화도 상영하고 실제 배우들이 등장하는 보드빌 공연도 하였다. 1972년에 Famous Players가 3천600석의 공연장을 6개의 분리된 영화관으로 바꾸면서 건물의 이름도 Imperial Six로 바꾸었다.
1986년 시네플렉스 오데온 사 (Cineplex Odeon Corporation)의 실공연과 (實公演課)는 이 건물의 북쪽 절반을 임대했다. 1987년에 900석 짜리 극장으로 다시 개장하면서 원래의 팬티지스 라는 이름이 다시 붙여졌다. 1988년 시네플렉스 오데온이 이 건물의 남쪽 반을 매입하여 10개월간 실내를 복구하여 원래의 풍요로운 웅장함을 다시 찾았다. 1989년에 이천만불이 드는 복구 작업이 끝난 다음 팬티지스 극장은 토론토 지역의 건축보존협회로부터 받은 공로상을 포함하여 건축 분야와 역사 단체로부터 세계적인 상을 수상했다. 팬티지스 극장의 2,256석의 대공연장은 놀랄 정도로 친근하다. 앞 무대로부터 오케스트라의 맨 마지막 줄까지의 거리가 86피트밖에 되지 않으며 중2층(1층과 이층 사이)의 첫째 줄에서 무대 앞까지의 거리는 58피트밖에 되지 않는다. 플러시 천으로 된 호화로운 넓은 좌석과 다리를 충분히 뻗을 수 있는 공간과 탁월한 시야는 관객에게 최상의 편안함을 제공한다. 오늘날 어떤 뮤지컬 작품도 공연할 수 있도록 디자인된 팬티지스 무대는 어떤 법인체의 공연도 가능하도록 여러 가지 편의를 제공하고 있다. 앞무대(proscenium) 아치의 넓이와 높이는 브로드웨이나 런던의 웨스트 앤드에 있는 대부분의 극장들보다 훨씬 더 넓다. 양 날개의 넓이는 대부분의 다른 극장들의 그 부분 보다 훨씬 더 넓다. 그래서 거의 어떤 요구사항도 만족시킬 수 있는 융통성을 증가시킨다. 가장 최신의 시청각 설비는 법인체의 공연이나 다른 공연에 모두 이용될 수 있다.
번쩍이는 주된 로비와 2층 로비는 600명의 하객들의 리셉션을 수용할 수 있을 정도로 넓으며, 아담 양식의 고전적 그리스 로마의 정교한 디자인 테마를 다루고 있다. 1층과 2층은 이중 그랜드 나선식 계단으로 연결되는데 수공작업으로 만든 대리석 장식기법으로 끝마무리해서 복구하였으며 이러한 대리석기법은 이 극장 전체를 통해 드러난다. 대규모 나선형 계단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이층에 도달하는 지점의 신고전적인 벽화로서 이것은 1920년대 처음 개관 때 찍은 그림과 사진을 보고 재창조 한 것이다. 그 회화 밑에는 원래의 색유리창(stained glasses)이 원래 이 극장이 1920년에 개장되었을 당시에 있었던 것과 똑같은 위치에 있다. 천으로 된 벽은 원래의 팬티지스 패턴을 따오되 현대의 방화시공(防火施工) 기준에 맞게 처리되었다. 금박과 은박은 실내 장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며 주된 로비의 달걀모양의 천장은 7만5천개의 6인치짜리 4각형의 황금색으로 도금 판으로 이루어졌다. 수정으로 만든 샹들리에는 화려한 빛으로 빛나며 각 층의 바에서는 음식과 음료 서비스가 가능하고 코트를 거는 시설도 각 층에 마련되어 있다. 공연장의 양편에는 편안하고 개별적인 칸막이 좌석이 마련되어 있으며 장식기둥과 석고 장식품으로 뛰어나며 팬티지스 무대와 공연장의 전경을 볼 수 있다.
용에(yonge) 가(街)의 입구는 눈부시게 빛나는 용에 가의 갤러리로 가게 되는데 거기에는 대리석 계단과 금속의 난간이 우리를 극장 안으로 인도한다. 수정 샹들리에가 홀을 비추며 모든 거울과 금박 장식과 오리지널 벽화는 세밀하게 복구되어 원래의 영화를 되새기고 있다. 이 갤러리 지역은 리셉션이나 칵테일 파티를 위해 쓰여질 수도 있다.
극장 건물의 전면은 오리지널 극장의 화려함을 그대로 간직한 한편 이 극장을 현시대에 부합되도록 만들었다. 리벤트는 극장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원래 극장에 있던 110 피트 높이와 8 피트 넓이의 수직적 조명 표지판을 새로 만들었으며, 건물 입구에 길이 51 피트, 넓이 16 피트 짜리 차양을 새로 만들어서 극장 입구를 보호하도록 하였다. 외부 전면에는 테라 코타 패널로 깨끗하게 다시 치장했다. 서쪽 차양에는 62 피트 길이와 4피트 넓이의 새 유리와 철제 천개(天蓋)를 새로 해서 보도(步道)와 귀빈실 스위트를 보호하고 있어 귀빈 영접실로 이르는 현관을 새롭고 내밀하게 만들었다.
위에 보았듯이 지루할 정도로 자세하게 법인 뮤지컬 회사에 속한 극장들의 설비와 서비스를 소개한 것은 오늘날 법인 뮤지컬이 왜 전세계의 수많은 관객들에게 어필할 수밖에 없는 가를 설명해 준다. 법인 뮤지컬은 확실히 흥행에 성공한 것, 흥행이 보장되는 것만을 제작하려고 하기 때문에 엄청난 제작비를 들여서 어떤 분야의 최고 전문가만을 모셔서 엄격한 공정과 품질관리를 거쳐서 제작된다. 고객 서비스 또한 뛰어나서 관객들은 엄청나게 멋진 샹들리에와 호화찬란한 설비를 자랑하는 극장에서 제왕같은 대우를 받으면서 뮤지컬을 감상할 수 있기 때문에 입장료가 아무리 비싸더라도 관객들은 별로 개의치 않고 경쟁하듯 표를 산다. 80달러면 우리 돈으로 10만원 정도 되는 값인데도 2-3시간 동안의 여흥을 생각하면 본전생각이 전혀 나지 않도록 화려하고 거창한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제공하는 것이 법인 뮤지컬의 원칙이다. 다시 한번 법인 뮤지컬의 특징과 세계적인 어필의 요인들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폭력이나 선정성으로 물들지 않고 어린이와 어른들이 함께 관람할 수 있는 화려한 가족용 쇼라는 점, 그래서 한번도 극장에 가 본 적이 없는 사람들까지도 모두 극장으로 유인할 수 있다는 점
2) 쉬운 복제가능성으로 세계 어디에서나 순회공연이 가능하다는 점(이것은 맥도날드 햄버거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같이 동일한 재료와 서비스 등을 보장하는 음식점 체인의 경영방식과도 상통한다)
3) 크게 개성적이지 않으면서도 세련된 쇼로서 사람들에게 볼거리와 들을 거리를 고루 제공한다는 점
4) 멋진 극장에서 귀빈 대접을 받으며 쇼를 즐길 수 있다는 점 (돈으로 서비스를 살 수 있는 대중성)
이러한 법인 뮤지컬계의 주도적인 제작자로서 그 명성을 날리고 있는 카메론 매킨토시라는 인물과 그의 제작방식을 자세히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의 뮤지컬의 생리를 파악할 수 있는 길이다.
♣ 카메론 매킨토시 (1946 ∼ )
영국의 뮤지컬 역사에서 카메론 매킨토시만큼 혼자서 국제적, 상업적, 예술적 업적을 모두 성취한 사람은 없다. 이제 나이 50대 초인 매킨토시는 처음에는 런던의 웨스트 앤드를, 그 다음에는 전세계를 누비며 연예계 사상 유일하게 힛트 작을 연속적으로 내는 행진을 하고 있다. [캐츠]에서 [오페라의 유령] (두 작품 모두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와 협력하여) 을 거쳐 [레미제라블], [미스 사이공] 까지, 그리고 보다 더 상업적으로 취약한 [마틴 게레]까지 매킨토시는 뮤지컬이라는 형식을 효과적으로 재발명 하고 있다.
매킨토시는 어려서부터 제작자가 되고 싶어했으며, 한결같은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서 엔드류 로이드 웨버(Andrew Lloyd Webber), 트레보 넌(Trevor Nunn), 하롤드 프린스(Harold Prince) 외 수 많은 재능있는 사람들과 합작했다. 그가 8살 때 친척 진(Jean)은 줄리언 슬레이드(Julian Slade)의 [살라드 데이즈(Salad Days)] 공연에 데리고 갔다. 그때까지 그는 어른들이 무대 위에서 노래하고 춤추는 것을 매우 유치하고 우습꽝스럽다고 생각했다. 그 쇼에서 슬레이드는 보드빌 피트에서 피아노를 직접 연주했다. 공연이 끝나고 매킨토시는 복도를 뛰어가서 작곡가에게 자신을 소개하고 피아노에 앉아서 춤 반주를 한 그 매직피아노의 비밀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 '나는 너무 궁금해서 즉시 슬레이드에게 실제 매직피아노가 무대에서 작용을 하는지 물어봤다. 그는 피아노 안에 찻잔을 들은 모조인형들을 보여주었다. 그가 피트에서 진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안 인형들이 피아노 연주하는 시늉을 하는 거라고 알려 주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날으는 접시가 실제로 어떻게 나는지 보여 주었다. 나는 그 무대 위를 여기저기 기웃거리면서 나도 크면 이런 재미있는 것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가 8세이던 1954년에 웨스트 앤드는 대서양 건너편에서 날아온 음악소리들로 가득 차 있었고, 영국의 뮤지컬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이보르 노벨로(Ivor Novello)는 이미 죽은지 3년이나 되었고, 노엘 카워드(Noel Coward)는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때이다. 그 때 두 명의 새로운 이름이 떠올랐는데, 그 둘의 이름은 줄리언 슬레이드와 샌디 윌슨(Sandy Willson)이었다. 그들은 공립학교 학생이었고, 옥스브리지의 졸업생으로 전형적인 영국인이었다. 그들은 작은 게 아름답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순수하고 값싸면서 사랑스러운 '작은 영국'의 뮤지컬을 만들 준비가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웨스트 엔드에서 호화찬란한 브로드웨이 뮤지컬과 대적해서 싸울 수 없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슬레이드는 새로운 전후(戰後) 레뷔 전통을 시작하였으며, 윌슨 역시 플레이어즈 클럽에서 작고 친근한 쇼를 공연하고 있었다. 1950년대 중반 슬레이드의 [살라드 데이즈]와 윌슨의 [더 보이 프렌즈(The Boy Friend)]는 몇 개월을 사이에 두고 차례로 개봉하였다. 그 작품들은 규모가 작으면서 너무 비싸지도 않고 너무 크지도 않은 작품들을 가지고 다 죽어 가는 영국 뮤지컬을 회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제 슬레이드는 매킨토시의 명예 대부가 되었다. 얼마 뒤에 매킨토시는 자신과 두 남동생을 위해서 뮤지컬을 쓰기 시작하였다. 14살 때 그는 벌써 프라이어 파크 대학의 연극 프로그램(레뷔)을 효과적으로 운용하고 있었다. 그가 17세 되던 1964년에 대학학위를 따기 위해 그 학교를 떠났다. 그 당시 충실한 연극학과를 가진 대학은 만체스터와 브리스톨 두 개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는 별로 학구적이지 않아 두 대학에서 요구하는 학점을 충족시킬 수 가 없어 최선의 선택으로 센트랄 스쿨 오브 스피치 앤 드라마에서 무대경영 코스를 택하였다. 그러나 그것도 성공적이지 않았다. 곧 그는 학교의 코스가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는 실제 무대경험을 하기를 원했지만, 그 대학은 그리스의 극작가 유리피데스 같은 과거의 인물들만을 배우라고 강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중도 포기하고 극장의 무대 뒤에서 잔심부름을 할 수 있는 직업을 얻으려고 노력했지만 상당히 어려웠다. 웨스트 앤드의 큰 극장들을 돌며 직장을 구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심해서 드러리(Drury) 극장에서 나오다가 우연히 무대 소품 매니저를 우연히 만났다. 그는 네가 오늘 밤 당장 일을 시작한다면 2주동안 일을 줄 수 있다고 제안했다. 그 때 그 극장에서 공연하던 작품이 바로 [카멜롯]이었다. 극장 사람들은 그를 좋아해서 5개월 동안 소도구를 맡게 했는데 1주일 8회 공연에 7파운드를 받았다. 또 아침에 드레스룸의 금속기둥이나 카펫 청소를 하는 대가로 7파운드를 더 받았다. 이처럼 그는 극장무대 뒤에서 청소와 잔심부름 등을 하면서 극장의 생리를 익혀 나갔다.
영국 뮤지컬사로 다시 돌아가면 노엘 카워드와 이보르 노벨로의 전성기에서부터 40년이라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규모 런던 뮤지컬은 거의 예외 없이 미국에서 수입한 브로드웨이 뮤지컬로서 영국에서는 영국의 본토 뮤지컬은 전무한 상태였다. 그 이유는 카워드가 적절히 지적했듯이 그 당시 영국사람들 대부분이 가벼운 음악을 한번도 진지하게 생각해보지 않았다는데 있었다. 또한 제롬 컨이 브로드웨이 안팎에서 즐겨 합작했던 영국인들에는 보드하우스 (P. G. Wodehouse)와 볼튼(Guy Bolton)이 있다. 그 두 사람은 1917년에 이미 자기나라(영국) 사람들이 뮤지컬 극장을 세익스피어, 입센, 스트린버그 등의 정통연극과 같은 부류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불만을 터트렸다. 그 후 카워드는 대부분의 뮤지컬을 런던보다는 뉴욕을 위해 썼다. 또한 윌슨에서부터 라이오넬 바트(Lionel Bart)를 거쳐 안토니 뉼리(Antony Newley)와 레슬리 브리커스(Leslie Bricusse) 같은 작곡가들도 그 후에 브로드웨이 뮤지컬로 힛트를 쳤지만 그것은 한 두 개의 예외로 기록될 뿐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1981년 사이에 영국 뮤지컬은 길고 긴 휴경(休耕)기간에 들어갔다. 그래서 묘사적인 뮤지컬은 거의 '브로드웨이'나 '아메리칸' 같은 수식어 없이도 당연히 브로드웨이와 미국 뮤지컬을 의미했다.
매킨토시는 작곡가 로이드 웨버의 도움과 부추김을 받아 미국의 뮤지컬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수입되는 교통의 방향을 뒤바꿔 버렸다. 그의 노력으로 영국 뮤지컬이 거꾸로 미국에 수출되기 시작한 것이다. 결국 1980-90년대 영국에서 뮤지컬은 자기나라의 가장 자랑스런 문화적 수출품이 되었다. 그는 현재 어림잡아 계산해도 3억5천만 파운드 정도의 자산을 지니고 있다. 15년 전 [캐츠]를 준비하던 시절만 해도 그의 회사는 너무 파산해서 제작진들에게 봉급 대신 주식을 주어야만 했다. 그러나 그들 중 몇몇은 지금 교외의 멋진 저택과 나이츠브리지 타운하우스를 소유할 정도로 부유하다.
수 백년에 걸친 영국 뮤지컬 역사를 살펴보면 수많은 재능있고 혁신적인 작곡가, 작사가, 감독, 디자이너, 안무가들이 있었다. 하지만 제작자로서는 3명이 영국 뮤지컬계를 지배해왔다. 첫 번째는 리차드 도일리 카르테(Richard d'Oyly Carte)로서 19세기 말에 길버트와 설리반의 오페렛타를 제작한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소유였던 사보이 극장에 전기 시설을 설치한 공로가 있다. 두 번째 제작자는 챨스 블레이크 코크란(Charles Blake Cochran)으로 1, 2차 세계대전 동안 강력하고 전문적인 무대 뒤의 경영을 통해 3명의 위대한 작곡가들--노엘 카워드(Noel Coward), 이보르 노벨로(Ivor Novello)와 비비안 엘리스(Vivian Ellis)--을 보호하고 후원했다. 세 번째는 물론 카메론 매킨토시이다.
오늘날 브로드웨이나 웨스트 앤드의 뮤지컬 극장의 프로그램을 보면 제목 위에 잔글씨로 쓰여진 이름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몇 명의 제작자들(현재 많은 사람들은 다국적 기업이다)이 포함되는지 알 수 있는데 그 숫자는 거의 배역진의 숫자와 맞먹을 정도로 많다. 분명히 이것은 오늘날 수백만 파운드의 기업이라고 알려진 뮤지컬의 제작에서 위험부담을 줄이기 위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제작자의 수가 많다 보니 결정은 수많은 중역회의를 걸쳐 이루어지며, 제작자 가족들까지 이미 북적대는 연못(뮤지컬 계)속으로 노를 집어넣고 저으려하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놀라운 점은 매킨토시와 로이드 웨버의 이름이 그들이 올리는 쇼의 제목 위에 항상 최종적으로 올라간 다는 점이다.
매킨토시가 자신의 생애동안 가장 소중하게 간직해온 좌우명은 흥미롭게도 코크란의 자서전 중의 하나, [A Showman Looks On]에서 발견되는 말이다. '젊고 야망있는 제작자들을 위한 충고'에서 코크란은 "절대로 관객을 위해 쇼를 올리지 말아라; 오히려 항상 너 자신을 위해 올리되 너의 최선을 다해서 제작해라. 그러면, 아마 관객이 보러 올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말은 제작자가 항상 자신의 취향에 가장 충실할 때 비로써 다른 사람의 감동과 호응도 얻어낼 수 있다는 말로 풀이된다. 즉 관객의 취향에 맞춘답시고 자신은 찜찜하게 생각하는, 또 자신이 책임을 질 수 없는 작품, 최선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작품을 제작하면 실패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강조한 말이다.
매킨토시가 이러한 좌우명을 직접 실천한 예는 예컨대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제작과정에서 확연히 드러난다.
♣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탄생과정에서 본 매킨토시의 작업방식
매킨토시의 제작자적 면모에 대해 로이드 웨버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그저 돈을 버는데 관심이 있는 단순한 비즈니스맨이 아니고 자신이 무대에 올리는 작품에 대해 남다른 애착과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이다." 때문에 그가 올린 쇼들은 진정으로 그의 자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그는 어떤 작품이 과연 흥행할 수 있는 요소가 무엇인지를 누구보다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그에 준하여 작품을 무대에 올리는데 탁월한 능력을 가졌다." 로이드 웨버의 이러한 지적은 [레미제라블]이 단순한 프랑스 뮤지컬에서 세계적인 뮤지컬로 새로 나게된 과정에서 보여준 매킨토시의 집념 어린 역할에서 쉽게 알 수 있다.
[레미제라블]의 작곡가 중의 하나인 알랭 부빌( Alain Boublil) 은 1941년 3월 5일 튜니스(Tunis)에서 태어나 노래 작곡과 음악출판업을 하려고 파리로 갔으나 그의 진정한 관심은 뮤지컬 극장에 있었다. 그는 60-70년대에 활약한 경험있는 작사가로서 이미 몇 곡의 프랑스 팝송을 썼다. 그러나 이런 3분 짜리 팝송을 쓰는 것에 싫증을 느낀 그는 진정한 뮤지컬분야로 옮겨가기로 원했다. 그러던 차에 그와 뜻을 같이 하는 클러드 미셀 쉔버그(Claude-Michel Sch nberg, 1944년 7월 5일생, 12음 기법을 창시한 아놀드 쉔베르그와는 먼 친척이 됨) 와 함께 1973년에 [프랑스혁명]이라 부르는 작품을 함께 제작했다. 이 작품이 첫 번째로 발표된 것은 파리에 있는 빨레 드 스포츠(Palais de Sports)에서였고 여기에서 부빌은 루이 16세로 직접 무대에 등장했다. 이 작품은 원래 예정대로 16주 동안 공연되었고, 그 후 두 사람은 다시 팝뮤직 분야로 되돌아갔다.
부빌과 쉔버그는 프랑스의 레코드 제작자로 있었는데, 그 때까지 프랑스는 현대뮤지컬극장을 수용한 적이 없었다. 그러나 그들은 런던이나 뉴욕에 업무 차 갈 일이 있으면 꼭 시간을 내어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같은 뮤지컬을 보곤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항상 '왜 프랑스에서는 저런 뮤지컬이 성공할 수 없나' 하는 의문을 가졌다. 1978년 런던에 간 부빌은 그가 영화로 쏙 반했던 작품이 뮤지컬 무대에 오른 것을 보고 그 쇼를 보러갔다. 그 쇼란 다름 아닌 매킨토시가 제작한 [올리버]였다. 부빌은 다저 (Dodger)가 'Consider Yourself'란 노래를 부르는 것을 보고 프랑스의 문호, 빅토르 위고 (Victor Hugo) 의 소설, [레미제라블]에 등장하는 비슷한 남자애 배역인 가브로쉬를 떠 올렸다. 그 공연이 끝나자마자 부빌은 전화로 달려가 자기 파트너인 쉔버그에게 전화해서 다음 쇼로 뭐로 할지 생각났다고 말했다. 이리하여 앞으로 뮤지컬극장에서 최대 히트작이 될 작품의 윤곽이 서서히 들어 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의기 투합한 그들은 모든 사람들의 충고에도 불구하고, 고정수입이 있는 직장을 열 달 동안 임시 사직하고 [레미제라블]의 구상작업에 들어가 작곡, 리코딩, 컨셉 앨범 제작에 매달렸다. 훌륭한 프랑스 감독, 로베르 훗생 (Robert Hossein) 은 그들이 만든 앨범을 듣고 매우 흡족해서 빨레 드 스포츠 (Palais de Sports)를 위한 극적·음악적 작품으로 만들었다. 이 작품이 공연되는 동안 그들은 테이프를 만들었다.
2년 후 젊은 헝가리 감독, 피터 파라고 (Peter Farago) 가 이 리코딩을 듣고 영국 제작자의 한사람이었던 매킨토시에게 가져갔다. 그러나 매킨토시는 파라고의 감독능력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하면서 비용을 들여서라도 다른 감독을 스카웃 해야지 이 계약에 파라고가 포함된다면 그 계약을 할 수 없다고 처음부터 딱 잘라 말했다. 그래서 그들은 동의했고 매킨토시는 시간을 내어 리코딩을 들어보았고 네 번째 트랙을 들을 때 이미 이 작품을 제작해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 날 매킨토시는 [마이 페어 레이디]에서 같이 작업했던 알란 제이 러너(Alan Jay Lerner)에게 그 테입을 들고 갔다. 테입을 들은 러너는 자신이 와병 중에 있기 때문에 레미제라블을 영어가사로 개작하는 작업을 도저히 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러너는 작품이 기막히게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은 사람들의 꿈(dreams)에 관한 이야기를 쓰고 싶지 이 작품처럼 사람들의 고통에 관한 이야기는 쓰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래서 매킨토시는 하워드 애쉬만(Howard Ashman)에게 가져갔지만, 애쉬만 역시 작품은 좋으나 자신에게는 맞지 않는 작품이라고 거절했다. 다시 쉘던 하닉 (Sheldon Harnick)에게 가져갔는데, 그는 "성공할 가망이 없는 작품(non-starter)이라고 일언지하(一言之下)에 거절했다고 해서 유명하다.
매킨토시는 거기서 기죽지 않고 다시 열정적으로 1983년 초에 파리로 가 부빌과 쉔버그를 만났고 그때부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우정과 사업의 합작이 시작된 것이다. 전통적으로, 프랑스 작곡가들, 노래작곡가들이나 극작가들은 단순히 그 판권을 영국해협이나 대서양을 건너서 팔았다. 매킨토시는 이번에는 훨씬 더 집중적이면서 친밀한 합작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두 프랑스인들을 동등한 파트너로 삼아 함께 영국과 미국의 극장을 순회공연하기를 원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적절한 영어가사가 있어야 했다.
그러자 기회가 찾아왔다. 런던의 일요 신문(The Sunday Times) 의 연극비평가이며 시인인 제임스 펜톤(James Fenton)은 조나탄 밀러(Jonathan Miller)를 위해 오페라 [리골레토]를 마피아 스릴러로 개작해서 콜로세움에서 공연해 대성공을 거둔 적이 있는 작가이다. 그 공연에 매킨토시는 수천만의 비오페라 관객중의 하나로 참석해서 펜톤이야말로 잠겨진 문을 열 수 있는 열쇠라고 생각했다. 그는 펜톤에게 다가가서 레미제라블을 영어가사로 개사할 의향이 있는지 물었고 펜톤은 거기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책을 쓰는 대학 친구와 함께 여름을 보르네오섬에서 카누를 타면서 보내는 습성이 있었다. 그 때 그는 빅터 위고의 소설을 가지고 가서 1200쪽에 달하는 그 방대한 책을 읽어나가면서 금방 읽은 장(章)은 찢어서 물 속에 던져서 물고기 밥으로 먹였다. 그의 이런 미친 짓 때문에 책을 다 읽는데 상당한 시간이 걸렸다.
처음부터 매킨토시는 레미제라블을 무대에 올리는데 가장 가능한 선택은 [캐츠]의 감독이었던 트래보 넌 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넌은 존 케어드 (John Caird) 와 힘께 8시간 짜리 고전, [리콜라스 니켈비(Nicholas Nickleby)]같은 중요한 뮤지컬을 함께 했던 경력이 있는 감독이다. 매킨토시의 생각에는 그들이야말로 위대한 프랑스 소설이 가진 고전적 극장의 진지함과 대규모 뮤지컬의 서사적인 극장성을 결합할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후에 넌은 저널리스트 에드워드 베어(Edward Behr)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매킨토시의 아파트에서 아침을 먹고 있는데 그는 레코드를 틀어주었다. 우리는 그 소설에 대해 이야기했는데, 그때 나는 그 소설을 읽은 적이 없다고 매킨토시에게 고백했다. 그러자 그는 레미제라블의 이야기를 내게 말해주었다. 이 소설은 어떤 죄수에 대한 이야기로 그 죄수는 형을 선고를 받고 일생동안 집요한 경찰관에 의해서 평생을 쫓기어 다니는 죄수라는 것, 즉 현대판 도망자의 19세기적 이야기이다." 그 후 나는 매킨토시 역시 레미제라블을 읽은 적이 없으며, 그래서 그가 나에게 해준 이야기는 약간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레미제라블에는 매킨토시가 요약해 준 이야기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하지만 그와 함께 한 대화는 나에게 단순하면서도 극장적이며 극적인 추진력을 불어넣어 주어 원래 그 레코딩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내 기억에 남아있었다.
이때 넌은 두가지 요구를 했다. 첫 번째 요구는 왕립 세익스피어 컴파니(RSC)의 재정적 상태와 물론 그의 장래에 원대한 영향을 미치는 요구였다. 그는 이 쇼가 카메론을 공동 제작자로 하여 1984년 가을 RSC의 바비칸 시즌에 맞추어서 개봉을 해야된다는 요구를 했다. 바비칸 공연이 끝난 후에 매킨토시가 이것을 웨스트 앤드 (West End) 로 옮겨서 공연할 수도 있고, 만약 이 쇼가 상업적 성공을 거둔다면 모든 이익금의 일부를 영원히 RSC로 기부하라는 요구였다. 이것은 RSC의 운영자 입장에 있는 넌이 그의 외도같은 활동에 대해 언론이 보내는 따가운 눈총을 의식한 상황에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보상하려는 심리에서 나온 해결 방식이었다. 그들이 기꺼이 맺은 합의에 대해 다른 RSC의 행정관들은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합의는 향후 15년간 RSC의 재정에 큰 도움이 되었던 것은 그 누구도 부인 할 수 없다. 그의 두 번째 요구는 쉽게 충족될 수 있는 사항으로 [니켈비] 때 함께 작업했던 존 케어드(John Caird)를 여기서도 공동 감독으로 하자는 조건이었다.
매킨토시는 RSC와 맺은 합작계약으로 이 쇼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이례적으로 긴 10주간의 리허설 기간 동안 상당한 예술적 정보를 투입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더 나아가 이 쇼를 웨스트 엔드에서 공연하려면 상업적 작품으로서의 여러 면모를 골고루 고려해야 할 것을 주장했다. 즉 레미제라블은 가을 시즌의 레퍼토리로만 할당되어서는 안되고 주무대에서 8주간의 밤공연으로 따로 구분되는 작품으로 제작할 것을 주장했다. 또한 바비칸 극장의 크고 엄청난 공간을 위한 것보다는 궁극적으로 오게 될 웨스트 앤드의 팔레스 극장 공간에 맞도록 디자인되어야 했다. 사람들에게 널리 퍼진 소문--매킨토시가 RSC의 제작을 수용하기만 했다는 소문과는 달리-- 배역을 정하고 음악을 결정하는 책임은 모두 그의 몫이었다(물론 약간의 RSC와 협의가 있었지만).
펜톤은 1막의 영어가사 초벌원고만을 가지고 여행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는 이상한 상황에서 글을 쓰는 습관 때문에 작품을 반정도 밖에 읽지 못했다. 때문에 1984년 바비칸에서 공연한다는 계획은 이미 물 건너갔고, 카메론은 계획을 1년을 연기했고, 펜톤은 1984년 내내 작업을 지속했다. 이 기간동안 그의 절친한 친구 존 케어드와 함께 작업하면서 가사를 극적 형태로 요약했다. 마찬가지로 펜톤은 부빌과 정기적으로 만났다.
12월에 에이본(Avon)의 스트라포드(Stratford)에서 이 쇼를 위한 오디션이 시작될 무렵 제작팀은 그때까지 경험한 것 중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을 내려야 했다. 펜톤은 [레미제라블]과 같이 현대적 뮤지컬의 화려하고 정교한 기술에 맞춰 가사를 쓰기에는 너무 고립되고 함께 작업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는 것이 확실시되었다. 그들은 뮤지컬의 주류에서 활약한 경험이 있는 노련한 작가를 다 물색하기 시작했다.
매킨토시는 데일리 익스프레스(Daily Express)의 연극 비평가였고, 데일리 메일(Daily Mail) 텔레비젼의 비평가인 허버트 크레츠머 (Herbert Kretzmer) 를 발견했는데 그는 찰스 아츠나부르 (Charles Aznavour)의 프랑스어 노래를 영어로 번역한 적이 있는 작사가였으며, 소규모의 웨스트 앤드 뮤지컬을 쓴 작가였다. 그때는 벌써 1985년 1월이었다. 크레츠머는 1985년 10월 바비칸 개봉에 맞추어 리허설을 시작할 수 있도록 6월까지 영어 가사를 완성해 오겠다고 약속했다.
매킨토시가 계약 제안을 하던 날, 크레츠머는 상당한 용기를 갖고 근무하던 데일리 메일에서 사직하고 바비칸에 있는 아파트에서 은둔해서 넌과 케어드와 함께 작품에 몰두하면서 쉔버그와 함께 식품가게에서 주문한 훈제 연어를 먹어가며 하루 종일 일에 매달렸다. "내 생애에서 그때처럼 열심히 일을 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도 엄청나게 많은 양의 글쓰기가 남아 있었다. 내가 지금 하고 있는 것은 단순히 번역이라고 부를 수 없다. 간접적 번역의 형태를 가진 제3의 작업이 이루어져야 했다. 제3의 작업이라는 것은 이미 작곡한 음악에 자유로운 개작 및 전적으로 새로운 노래가사를 쓰는 작업이었다."
사실상 맨 처음 파리무대에 올린 [레미제라블]은 1시간 조금 더 걸리는 작품이었다. 그러나 새 작품은 적어도 3시간 반정도 걸릴 것이다. 크레츠머의 고된 노력은 결국 좋은 작품으로 보상을 잘 받았다. 펜톤 역시 약간의 의견을 제공한 것에 대한 보상을 받았는데, 그 보상은 시간이 감에 따라 수백만 파운드에 달했다. 그러나 크레츠머는 그가 들인 피나는 노력에 비해 홍보에서 별로 주목을 못 받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자신의 제3의 몫을 주장하고 있다.
매킨토시의 견해로는 부빌과 쉔버그가 [레미제라블]의 유일한 창조자이자 작품의 원조(元朝)이다. 그는 로이드 웨버나 다른 작곡가들과 지속적으로 작업을 했지만 이때부터 자신만의 아이디어를 효과적으로 다룰 줄 아는 뮤지컬 작가들과 처음으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이다. 부빌과 쉔버그 역시 그때부터 매킨토시야말로 의심할 바 없이 믿고 함께 일할 수 있는 제작자라고 생각했다.
♣ 뮤지컬 [레미제라블]의 중요성
쉐리단 몰리(Sheridan Morley)는 International Herald Tribune에 쓴 기사에서 [레미제라블]에 대해 아래와 같이 격찬한다. "빅토르 위고 원작의 이 작품은 19세기 프랑스를 무대로 한 정치 사회적 혁명과 바리케이드에서의 삶과 죽음을 그린 뮤지컬이다. 이는 금세기에서 5년이나 10년에 한번 나올까 말까 하는 훌륭한 음악작품으로 오케스트라의 소리는 우리의 눈과 귀를 때리면서 머리 위로 날아오른다. 이는 뮤지컬 무대가 반드시 갖추어야 할 모든 것을 제공하고 있다. 또한 화려한 무대장치나 안무 등의 어떤 교묘한 볼거리에 의존하거나, 반복적인 악구나 단순한 설교나 훈계에 의존하지 않는다. 장발장 역을 훌륭하게 소화한 콤 윌킨슨 및 여러 탁월한 연기를 하는 배역이 있지만 이 작품은 근본적으로 스타 쇼가 아니다."
[레미제라블]의 중요성은 음악극장의 한계를 재설정하기 시작한 작품이라는 사실에 있다. 그러한 점에 있어 브리튼(Britten)의 [피터 그라임즈] (Peter Grimes)나 손트하임(Sondheim)의 [스위니 토드] (Sweeney Todd)와 유사한 데가 있다. 즉 두 작품과 마찬가지로 [레미제라블]은 전적으로 노래되며, 한 개인의 절망과 관련된 사회적, 가정적 생존이라는 보편적인 주제를 탐구하고 있다. 1980년 파리의 스포츠경기장에서 이 쇼가 처음으로 개봉되었을 때 그 음악은 에디뜨 삐아프(Edith Piaf) 같은 프랑스의 대표적 샹송 가수는 한번도 불러 본 적이 없는 위대한 행진곡풍의 노래들로 모두 구성되어 있었다. 그 노래들은 과거와 현재를 통 털어 영국 작곡가의 작품에서는 볼 수 없었던 힘찬 에너지와 오페라적 강렬함을 가지고 있다. 한 국가의 역사적 감각은 트럼펫, 드럼, 바이올린, 기타, 첼로 등의 악기를 통해 웅장하게 흘러나왔다. 거기다 유쾌하고 풍자적인 노래, '이 집의 주인 (The Master of the House)'에서부터 우리 귀에 쟁쟁한 '빈 테이블과 빈 의자' 같은 노래들은 창의성으로 번뜩이는 이중창 및 여러 합창곡들과 더불어 사랑과 전쟁, 죽음, 및 왕정복고를 노래한다.
하지만 그 어느 뮤지컬도 진공에서 존재할 수 없다. 이 작품은 다른 쇼나 다른 나라의 에피소드를 단편적으로 상기시킨다. 디킨스 원작의 [올리버], [니콜라스 니켈비] 등에서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는 느낌을 주며, 파리의 하수도를 통한 도주 장면은 시라노 드 베르제락(Cyrano de Bergerac)에 나오는 결말을 생각나게 한다. 또한 [애니(Annie)]를 어렴풋이 기억나게 하는 귀여운 고아들이 등장하기도 한다. 3시간동안 걸친 관현악적인 음악은 우리는 더 이상의 무엇을 요구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하다. 무대 감독 존 나피어(John Napier)의 풍부하고 귀한 무대 세트는 해묵은 보물(의자, 테이블, 회전마차, 물통 등)들로 이루어졌으며, 이 전체 제작은 넌과 그의 공동 감독 케어드가 [니켈비], [케츠], 몇몇 세익스피어 관련 뮤지컬들로부터 배워온 것들이다.
[레미제라블]은 뮤지컬이 추구하는 그 모든 것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안무의 교묘한 술수, 반복적인 악구, 단순화된 설교 또는 막판에 급조된 곡목 등에 전혀 의존하지 않는다. 바비칸과 팔레스 극장 등 초기의 런던무대에서는 패티 뒤퐁(Patti Lupone), 콤 윌킨슨(Colm Wilkinson), 로저 알람(Roger Allam)과 알른 암스트롱(Alun Armstrong) 뿐만 아니라 락 오페라세계와 클래식극장에서 뽑은 배우들 등 주요 배역들의 빼어난 연기를 포함하고 있지만 이는 근본적으로 스타 쇼는 아니다. 하지만 마이클 볼(Michael Ball), 프란세스 루펠레(Frances Ruffelle)와 같은 사람들은 이 작품을 시작으로 뮤지컬 계에 투신하였다.
이제까지의 기록을 보면 영국에서 국가의 재정보조를 받는 극장들이 뮤지컬을 시도한 전력은 별로 좋지 않은데 이것은 [장 세버그(Jean Seberg)]의 실패에서부터 [카리(Carrie)]의 참패를 보면 알 수 있다. 그러나 [레미제라블]은 RSC의 예술적 저력과 매킨토시의 예술적, 기업적 재능의 시너지 효과를 충분히 보여주었다. 만일 20세기의 전반의 대표적 뮤지컬이 [포기와 베스(Porgy Bess)]라면 20세기 후반은 당연히 [레미제라블]을 꼽아야 할 것이다.
♣ [레미제라블]의 실패에서 성공에 이르기까지
이처럼 승승장구하는 [레미제라블]이지만 1985년 바비칸에서 초연되던 날 밤의 상황은 달랐다. 매킨토시는 오래 전부터 확립된 스타시스템을 거부하고 <팔 수 없는 쇼>라는 위험을 감행했고, 초연 다음날 아침, 제작팀--매킨토시, 넌, 무대세트의 존 나피어와 조명의 데빗 허시--은 우울한 마음으로 그들에게 치명타 (killing) 같은 내용의 공연평을 읽었다.
매킨토시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적대적인 비판의 소리를 들으며 그의 생애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기로에 서있었다. 불리한 공연평이 거리로 퍼지는 48시간 안에 그는 30만 파운드를 더 투자해서 이 쇼를 바비칸에서 팔레스 극장으로 옮겨 갈 것인가 아니 면 처음 투자했던 5만 파운드와 그가 이 작품을 위해 바쳤던 2년이라는 시간을 잃고 바비칸 공연을 끝내버리는 것이 손실을 최소화시키는 길인지를 결정해야 했다. 사람들은 모두 RSC에서 최소한의 손해를 보고 조용히 끝나는 것이 낫다고 충고하며 웨스트 앤드의 팔레스 극장에서의 재공연을 반대하였다.
하지만 자신들이 그 동안 그렇게 열중했던 작품이 바비칸에서 3개월 공연만에 끝난다는 사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던 매킨토시, 부빌, 쉔버그, 크레츠머는 생각이 달랐다. 이 때 결정적인 계기가 생겼다. 매킨토시의 두 명의 주요 후원자들은 만약 그가 이 작품을 다른 극장으로 옮겨 공연하는 일을 추진한다면 지속적으로 후원하겠다고 약속하였다. 또 하나의 결정적인 사건은 매킨토시가 바비칸의 매표소 매니저에게 전화를 했을 때 받은 이례적인 보고였다. "매킨토시씨! 오늘 아침 10시부터 바비칸 주위에 수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 있는데 그들은 모두 레미제라블의 표를 사려고 합니다." 그 말은 매킨토시가 가장 듣고 싶어 한 말이었다. 이제 그는 천만원군(千萬援軍)을 얻은 장수처럼 힘을 얻었다.
그러나 그는 또 다른 문제에 봉착했다. 바비칸에 이어 [레미제라블]을 공연하기로 예약한 팔레스 극장은 최근 뮤지컬 작곡가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매입했다. 그런데 극장주인 웨버는 [레미제라블]을 싫어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현재 작업하고 있는 [오페라의 유령]과 같은 규모의 대형 서사적 뮤지컬이 자기 극장무대에 오르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러나 팔레스 극장의 동료들인 브라이언 브롤리(Brian Brolly)와 비디 헤이워드(Biddy Hayward)는 로이드 웨버보다 [레미제라블]에 훨씬 우호적이었다. [오페라유령(The Phantom of the Opera)]이 무대에 오르려면 1년이 더 있어야 했기 때문에 12월초부터 [레미제라블]을 공연하는 계약을 할 수 있었다.
처음에 [레미제라블]은 적대적인 평을 받은 것이 사실이지만 사람들이 모두 그 쇼를 싫어하지는 않았다. 웨스트 앤드의 평론가들 중에는 이 작품에 홀딱 빠진 사람들도 한 두 명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매주 그 작품에 관한 평을 썼다. 후에 넌이 지적했듯이 "국제적인 신문에서 반복적으로 쓰여지는 이러한 극찬은 우리의 생명줄 이었다. 얼마 안 있어 일본 미국 등지에서 이 쇼의 해외 순회공연 가능성에 관한 문의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작품이 개봉되고 13년이 흐르는 동안 [레미제라블]은 런던에서만 2천만 파운드를 벌 어 들였다. 이는 렉캬빅(Rekajvik)과 리오(Rio)를 거쳐 토론토와 도쿄까지 전세계적으로 15개의 제작사에서 순회 공연되며 콘서트 형식으로도 연주된다. 이러한 공연 프로그램 중에서 로얄 앨버트 홀에서 공연된 10주년 기념 올스타 갈라 콘서트에서는 전세계로부터 온 주인공들이 함께 등장했는데, 여기서 매킨토시는 처음으로 이 쇼에 관한 그의 생각을 피력했다.
"1982년 레미제라블의 오리지널 앨범을 들을 때까지 나는 항상 프랑스 뮤지컬은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 왔다. 프랑스인 사람들은 현대 뮤지컬을 거의 하지 않았고, 파리는 과거 50년 동안 전세계 뮤지컬 성공의 무덤(불모지)이라는 것을 증명해 왔다. 그들은 오페레타를 리바이벌 시키거나, 근원지도 모르는 유럽의 짤막한 록 뮤지컬이나, 영어로 공연되는 미국 뮤지컬의 순회공연을 선호했다. 이런 외래문화의 홍수 속에서 두 명의 프랑스 작곡가--부빌과 쉔버그--들이 어떻게 살아 남아서 이처럼 위대한 뮤지컬을 썼는가는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와 같은 [레미제라블]의 엄청난 성공을 거슬러 올라가면 작가 빅토르 위고의 신념에서 또한 유래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자기 책을 출판해준 업자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다. "레미제라블이 인류의 보편적인 관객을 위해 쓰여졌다는 당신의 말은 정말 맞는 얘기입니다. 이 작품이 모든 사람들에게 읽혀질지는 잘 모르겠지만 모든 인간에게 호소하는 작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부빌과 쉔버그는 적절하게도 인류의 보편적 면모라는 위고의 마지막 말을 충실하게 실현하여 [레미제라블]이 뮤지컬로서 국제적 성공을 이루게 한 장본인이다: 여기 등장하는 배역들은 인간사회의 모든 공동체, 모든 주요기관, 모든 그룹을 망라하는데 거기에는 자베르(Javerts) 경위, 떼나르디에(Thenardiers), 판틴(Fantines)과 같은 성격의 구성원을 다 가지고 있다. 또한 우리 모두는 최후의 장발장에게서 발견되는 <성자와 같은 특성>을 갈망한다. 레미제라블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면모는 정치적 격변이나 혁명보다 휠씬 더 인간 본성의 영원한 진실과 신에 대한 우리의 믿음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본질적으로, 장발장의 이야기는 바오로 사도 같은 급작스런 개종(改宗)이나 불가능에 가까운 윤리적 기준을 자신에게 부과하고자 했던 그의 굳은 결의가 나타나는 이야기이다. 사실상 장발장이 갈망했던 성자다움(saintliness)은 모든 종교가 공통적으로 추구하는 가치로서 그 보편성을 가진다. 그 보편성이야말로 [레미제라블]의 국제적인 성공의 비결이다.
♣ 나가는 말
이제까지 현재 세계 뮤지컬 계의 비관적인 전망과 조심스런 가능성을 요약해 보았다. 미국의 브로드웨이 뮤지컬이 주로 판치던 영국에서 그 교통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어 놓은 것은 뚝심과 선견지명을 가진 한 두 명의 제작자와 예술가의 주도적인 노력으로 가능해진 사례를 우리는 보았다. 또한 프랑스 파리처럼 과거의 영화 속에 안주하며 전통을 리바이벌 하거나 영어권 뮤지컬이 지배하도록 방관하던 연예계에서 두 명의 프랑스 작곡가들의 집요한 노력으로 [레미제라블]같은 뮤지컬을 세계적 힛트 작으로 변모시킨 사례를 우리는 보았다. 여기에도 제작자와의 긴밀한 작업이 관건이었다.
사실상 가볍고 경박한 록 스타일의 음악이 지배하며, 소재빈곤에 시달리는 현재 브로드웨이 뮤지컬 계는 세계 어디에서든지 새로운 피를 수혈해 줄 수 있는 참신한 소재와 다양한 출처의 종합 예술적 역량을 필요로 한다. 브로드웨이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들까지도 앞으로 브로드웨이가 뮤지컬의 중심지로 남아있게 될 것인가 확신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그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뮤지컬의 본산지(원조)는 바뀔 소지가 얼마든지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한국창작뮤지컬의 세계화를 꿈꾸는 사람들은 확실한 소신이 있는 지도자를 중심으로 예술가적 역량을 모아 작품을 갈고 닦는 치열한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이다. 거기에다 기업가적인 역량과 예술적 안목을 갖춘 유능한 제작자가 만날 때 그 뮤지컬은 결국 성공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 준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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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영 해(한국과학기술원 인문사회과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