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남아시아 역사에 대한 분석적 이해
조흥국/ 서강대 공공정책대학원 / IMPAC 자문위원
I. 서론
1. 동남아시아의 개념
오늘날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 베트남,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10개국을 포괄하는 "동남아시아"는 인위적인 지리적 개념이다. 즉 유라시아 대륙의 동남부에 위치해 있다는 지리적 사실이 그 명칭의 직접적 유래가 된다. 이러한 지리적 개념으로서의 "동남아시아"(Southeast Asia)는 동남아시아토착인의 전통적인 용어가 아니라, 서양인들에 의해 발전된 개념이다. "동남아시아"란 용어는 1839년경 미국인 목사 호워드 맬컴(Howard Malcom)이 쓴 여행기에서 "South-Eastern Asia"란 표현으로 처음 등장했다고 보여진다. 그후 19세기동안 영어권의 서양인들에 의해 "Further India" 즉 인도의 동남부지역, 특히 남중국해를 끼고 있는 지역을 지칭하는 데 가끔씩 사용된 이 용어는 오늘날 "Southeast Asia"의 전신(前身)으로 간주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동남아시아"는 20세기에 들어서서 독일어권에서 본격적인 학문적 개념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1902년 독일인 프란츠 헤거(Franz Heger)가 이 지역의 청동기문화를 설명하면서 소개한 "Südost-Asien"란 용어는 기존의 독일어 개념인 "Hinterindien"을 대신한 것이며 "South-Eastern Asia"를 독일식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지역학의 대상으로서 "동남아시아"의 개념은 오스트리아의 인도학자 및 인류학자인 로베르트 하이네겔더른(Robert Heine-Geldern)이 1923년에 발표한 "Südostasien"이란 제목의 글에서 분명히 정립되었다고 볼 수 있다. 여기서 그는 동남아시아지역의 민족들의 이동과 문화적 상호영향을 논하면서 이 지역의 민족적, 언어적, 문화적 공통성들에 관해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동남아시아"는 그 후 1920년대-1940년대 초에 걸쳐 "Südostasien, South-eastern Asia, Southeast Asia, Zuid-Oost Azie, l'Asie du Sud-Est, l'Asia di Sud-Est" 등의 표현으로 세계의 여러 곳에서 학술적 지리개념으로 점차 널리 사용되었다. 이러한 "동남아시아" 용어는 1943년 태평양전쟁시 스리랑카에 영국-미국 연합군의 "동남아시아 사령부"(South-East Asian Command)가 설치됨으로써 국제적으로 인정된 정치적 개념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상 살펴본 바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발전되어 온 "동남아시아"는 이 지역에 식민지를 보유하고 있던 서양인들이 이 지역을 전체적으로 파악하고 규정하기 위한 필요에서 생긴 개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문화와 다양한 역사적 경험을 지녀온 동남아시아 토착인들에게는 사실 어떤 집단적 지역개념이 존재하지 않았다. 이로 볼 때 "동남아시아"는 식민주의의 한 소산임에 틀림없다. 동남아시아의 지명에서 식민지지배의 유산은 여러 국가명칭에서 더욱 뚜렷해진다. "필리핀"(Philippines)은 스페인인들이 16세기에 그들의 왕인 필립2세의 이름을 따라 정복지에 붙인 이름이었다. "버마"(Burma)는 버마인들이 그들의 나라를 부르는 실제적 이름인 "미얀마"에 대해 영국인들이 식민지 통치시기에 붙인 이름이었다. "인도네시아"(Indonesia)는 1850년 영국인 로간(J.R. Logan)이 "인도의 섬세계"(Indian Archipelago)를 지칭하기 위해 "인도"(Indo-)와 "군도(群島)"(-esia)의 합성어로 처음 사용하였다. 이 용어는 그후 1884년 독일의 인류학자 아돌프 바스티얀(Adolf Bastian)이 마다가스카르섬과 타이완 사이에 놓여 있는 섬세계를 가리키기 위해 쓰기 시작한 이래, 학술서적들에서 광범위하게 사용되었다. 네덜란드인들도 "Netherlands Indies" 대신 점차 이 용어를 썼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날 시점에는 현 인도네시아 지역에서 널리 사용되다가, 1948년에 자카르타의 네덜란드 식민지행정부가 이 용어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이다.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포괄하는 "인도차이나"(Indochina)란 개념은 '인도와 중국 사이에 있는 지역'을 가리키기 위한 프랑스인들의 조어(造語)로서 역시 식민지 통치의 산물이었다.
2. 동남아역사 연구의 문제점
동남아역사 연구에서 종종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가 있다. 첫째는 앞에서 논한 바처럼 '동남아시아'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지리적 개념에 불과하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는 것으로, 다양한 민족, 언어, 종교, 그리고 역사적 경험을 포괄하는 동남아를 하나의 역사적 단위로 간주할 수 있느냐는 점이다. 특히 불교문화권이자 오랜 중앙집권적 왕조사의 전통을 갖는 대륙동남아시아와 이슬람문화권이자 수많은 부족국가 혹은 술탄국으로 균열된 정치적 전통을 갖는 도서동남아를 어떻게 한 역사적 흐름 속에 연결시킬 수 있느냐는 의문이다. 문화의 근본적 해석을 둘러싼 이 문제제기에 대해 지리 및 기후적 환경, 토착문화적 요인들, 농업문화와 해상무역, 인도문화와 이슬람의 영향, 중국문화와 화교의 영향, 서양인들에 의한 식민지지배, 이를 통한 민족주의의 발흥, 1940년대 전반기 일본의 점령 등, 이 지역의 어떤 문화적 공통성이나 역사적 경험의 상관성 등이 가정되고 확인되었다. 그러나 위의 요인들의 대부분이 반드시 '동남아' 지역에만 국한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은 이러한 가정의 한계성을 말해준다.
둘째, 앞에서 말한 바 동남아를 하나의 통일된 역사적 단위로 간주하는 것에 대한 의문과 관련하여, 동남아를 전체적으로 포괄하는 역사적 시대구분이 가능한가라는 문제가 제기된다. 이 문제는 구체적으로는 각국마다 상이한 역사적 경험을 갖고 있으며 민족마다 그 역사에 대해 상이한 역사인식을 지니고 있는 동남아시아세계의 역사적 흐름에 서양에서 발전된 고대-중세-근대-현대 식의 시대구분을 적용할 수 있느냐는 물음으로 나타난다.
셋째는 사료의 제한성으로서, 중국의 역사기술 전통을 이어받아 풍부한 한문사료를 보존하고 있는 베트남을 제외하고는,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필리핀의 19세기 이전의 역사적 전개를 전해주는 토착어로 된 당대 일차사료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동남아역사 연구의 한 기술적(技術的) 문제로 연결되는 이 점은 흔히 동남아시아인들의 "몰역사적"(沒歷史的) 성향 및 전통이란 상정된 개념으로 설명되기도 하지만, 그 자체 근거 없는 심히 애매모호한 이러한 개념은 '오리엔탈리즘적' 발상에 지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에는 문서의 장기적 보관을 불가능하게 하는 동남아시아의 고온다습한 기후가 먼저 고려되어야 할 것이며, 이와 함께, 기록에 의한 전승에 큰 가치를 두지 않는 동남아시아인들의 어떤 독특한 역사인식이 중시되어야 할 것이다. 한편 사료의 제한성은 동남아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구전역사(口傳歷史)의 범주에 포함되는 많은 지방지들과 신화, 문학, 회화 등 다양한 '비정통적인' 사료들을 모색케 하여, 동남아역사 연구의 색채를 더욱 화려하게 한다. 그리고 사료의 빈곤성 문제를 안고 있는 동남아역사 연구에는 한 지역에 관한 역사연구에서 사료에만 의지하지 않고, 지리학, 인류학, 언어학, 심리학, 사회학, 경제학, 정치학 등 다른 인문 및 사회과학 분야의 연구결과를 참고하는 프랑스의 아날역사학파의 학제간 연구방법이 효율적으로 작용할 것이다.
넷째는 동남아시아 지역을 역사연구의 대상으로 할 경우, 말레이어와 인도네시아어 사이의 유사성을 제외하고는 동남아시아국가마다 각기 다른 언어로 된 사료들에 접근하기 위해 다양한 언어의 습득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대륙동남아시아의 역사연구만을 위해서도 최소한 한문, 베트남어, 크메르어, 라오스어, 타이어, 버마어의 이해능력이 요구되며, 특히 고대사 연구를 위해서는 산스크리트, 팔리(Pali), 몬(Mon)어, 참(Cham)어의 해독능력도 필요할 것이다. 여기에 영어 외에 포르투갈어와 프랑스어가 기본으로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인도네시아사에서는 인도네시아어와 네덜란드어 외에, 고대사 연구를 위해 자바(Java)어와 발리(Bali)어 등 여러 지역언어들이 요구될 것이며, 필리핀 역사연구에는 스페인어와 여러 필리핀 방언들에 대한 이해가 필수적일 것이다. 이러한 언어적 다양성의 문제 때문에 동남아시아역사학자들은 대부분 한 국가의 역사를 다루며, 이를 바탕으로 하여 다른 동남아시아지역의 역사에 접근한다.
다섯째는 동남아시아 역사학자들의 동남아역사에 대한 태도에 관계되는 문제다. 주지하는 바처럼, 동남아시아 역사는 식민지 주인인 유럽인들에 의해 조사되고 쓰여지기 시작했다. 유럽중심적(Eurocentric) 관점에 바탕을 둔 동남아시아 역사관은 오늘날까지도 답습되어, 동남아를 열대의 이국적(exotic) 지역으로 보는 다수의 서양인 동남아시아 역사학자들의 저술에서 종종 나타난다. 식민지사관적 경향은 심지어 서양에서 교육받은 동남아시아토착인 역사학자들의 연구들에서도 때때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남아역사의 '탈식민지화'(decolonization)가 중시되기 시작했으며, 토착적인 동남아역사 서술이 강조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는 한편 동남아역사는 오로지 동남아시아인들에 의해 동남아언어로 쓰여져야 한다는 민족주의적 역사관으로 발전되기도 했으며, 여러 동남아시아 토착역사학자들의 역사서술들에서 자국의 과거를 미화하고 역사적 영웅들을 만들어 내며 대외관계를 자국중심적으로 왜곡해석하는 현상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II. 동남아시아의 민족과 지리
1. 민족의 형성
동남아시아 민족들의 형성에 관해서는 크게 두 가지 학설이 있다. 첫째가 이주의 파장(waves of migration) 이론으로서, 여러 번에 걸친 이주의 물결에 의해 문화적으로 더욱 진보된 민족이 덜 진보된 민족을 몰아내거나 흡수하여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다양한 민족구성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가 진화적 적응(evolutionary adaptation) 이론으로서, 동남아에는 오래 전부터 살고 있던 주민이 있었고 이들이 다양한 환경조건에 대한 적응과정에서 자체적으로 다양한 민족들로 분화했다는 것이다. 특히 고고학적인 증거를 바탕에 둔 후자의 모델은 전자의 모델에 대한 반박에서 발전된 것이다. 최근 동남아시아의 민족형성을 두 모델을 결합하여 설명하려는 시도가 있다. 여기서는 동남아사에 관한 대부분의 문헌들에서 확인되는 전자의 이론에 입각하여 동남아시아의 민족형성 과정을 서술한다.
위에서 언급한 바처럼 동남아역사의 연구에 있어서 그 동안 여러 문화적 공통성들이 논의되어 왔다. 그 중 아마 가장 중요한 요소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은 동남아시아주민의 대부분이 남부아시아 유형의 몽골계 민족에 속한다는 점이다. 아시아-태평양계 몽골인종이라고도 불리는 이 남부몽골계 민족은 몽골계 인종과 적도지역 인종간의 다양한 혼합 및 과도형태들을 포괄한다. 그것은 그들이 아시아 대륙의 북부지역으로부터 남하할 때 여러 단계를 거쳐 이주했으며, 동남아에서 적도계 혹은 네그리드-오스트로계 인종에 속하는 원주민들을 내붸거나 혹은 동화하는 등, 동남아시아자체 내에서도 민족분화과정이 일어났다는 것에 기인한다. 몽골적 요소가 동남아시아의 민족적 구조에 미친 영향은 추측컨대 신석기시대에 시작되어 청동기시대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오늘날까지 끊임없는 새로운 이주를 통해 지속되고 있다. 이에 따라 동남아시아민족에서 고(古)몽골계 민족과 예컨대 베트남인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강한 중국적 요소를 지닌 근(近)몽골계 민족을 구별할 수 있으며, 그 사이에 여러 혼합유형들이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몽골인종에 비해 체구가 왜소하고 피부색이 검은 동남아시아원주민 네그리토(Negrito)들은 몽골인종의 남하이주와 함께 대륙동남아에서는 거의 쫓겨났으며, 오늘날 그들의 분포는 주로 적도 일대 도서지역의 산악 및 밀림지대에서 확인된다.
동남아시아 민족들은 어족(語族)에 따라 대개 오스트로네시아(Austronesian), 오스트로아시아(Austroasiatic), 중국-티베트(Sino-Tibetan), 타이-까다이(Tai-Kadai)의 네 그룹으로 분류된다. 동선(Dongson)문화로 대표되는 청동기문화가 남중국해 일대의 동남아시아도처에 넓게 퍼진 것은 무엇보다도 적극적이고 팽창적인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들의 활동 덕분이었다고 본다. 말레이-폴리네시아(Malayo-Polynesian) 어족이라고도 불리는 이들은 기원전 약 2천년부터 도서동남아시아지역으로 들어오기 시작하여 점차 지배적인 사회계층을 형성했다. 탁월한 항해술과 항해경험을 갖고 있었으며 이를 위해 상당한 수준의 경제적, 사회적 발전상태에 도달해 있었던 오스트로네시아 어족의 민족들은 대륙동남아시아의 동부 및 동남부 연안지역과 말레이반도 및 도서동남아시아의 광활한 지역으로 퍼졌다. 대륙동남아에서는 오늘날 중부 및 남부 베트남 연안을 따라 활발한 해상활동을 전개했던 참(Cham)족과 기원 1세기에서 6세기 사이 현 캄보디아 및 베트남 남부지역에서 번성했으며 역시 해양민족으로 알려져 있는 푸난(扶南)족이 오스트로네시아계 민족 그룹에 속한다. 도서동남아로 퍼진 오스트로네시아 민족은 말레이반도와 동부 수마트라 지역을 중심으로 말레이족을 형성했으며 점차 동부 인도네시아와 필리핀 군도로 확산되었다. 말레이족은 팽창과정에서 말레이반도의 토착원주민인 오랑아슬리(Orang Asli)와 수마트라 및 보르네오의 바탁(Batak), 다약(Dayak), 꾸부(Kubu) 등의 원주민 종족집단들을 흡수, 동화시켰다. 말레이족의 후기 팽창과정은 이슬람의 확대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대륙동남아에서 가장 넓은 분포를 갖고 있는 오스트로아시아계 민족들은 몬-크메르(Mon-Khmer)족과 홍하(紅河) 델타의 비엣(Viet)족에 의해 대표되는데, 이 민족들은 버마족, 타이족들이 민족적인 팽창을 전개하기 전에 대륙동남아를 지배했다. 몬족은 이미 10세기 이전에 오늘날의 미얀마와 태국 영토에 고도로 발달한 정치적, 문화적 중심지들을 세웠으며, 크메르족은 9세기부터 15세기초 사이에 앙코르(Angkor)의 크메르 제국을 수립했다.
중국-티베트 어족은 동남아시아 북서 지역의 민족형성과정에 영향을 미쳐, 버마족을 포괄하는 티베트-버마 민족이 형성되었다. 이야워디(Irrawaddy)강 유역을 그 문화적 요람으로 두는 버마족은 이미 기원전부터 오늘날 미얀마 전역으로 확산하기 시작하여, 그 과정에서 중국인들에게는 표(驃)라고 알려진 퓨(Pyu)족을 흡수, 혹은 도태시켰으며, 특히 11세기에 버강(Pagan) 왕조를 설립한 후 그 세력이 크게 팽창되었다.
미얀마의 북부 및 동부에서는 타이-까다이 어족에 속하는 타이 민족이 팽창하여, 동남아에서는 태국과 라오스 그리고 샨(Shan)주를 세웠고, 남부 중국에서는 장(壯)족을 형성했다. 일찍부터 관개농업문화를 발달시킨 타이 민족은 문화적 접촉에서 매우 융통성이 있고 적응력이 강한 민족으로 간주되며, 이러한 민족적 특성과 함께 오스트로네시아 민족, 티베트-버마 민족, 비엣족 등의 다른 민족들의 형성에 기여를 했다고 보여진다.
동남아시아주민의 대다수는 해안, 델타지대, 하천유역 혹은 화산지대 등 비옥한 농업조건이나 수송 및 해양진출을 위한 유리한 조건이 주어져 있는 지역에 밀집되어 있다. 그리하여 자바섬과 마두라섬에 인도네시아 인구의 약 ⅔가 살며, 이야워디, 짜오프라야(Chao Phraya), 메콩(Mekong), 홍하 등의 델타지대에 대륙동남아시아인구의 반 이상이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인구밀집 지역에 동남아시아의 가장 오래된 정치적 및 문화적 중심지들이 생겨났으며,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지배민족들이 높은 민족구성비율을 보여 주면서 살고 있다. 예를 들어 비엣족, 크메르족, 타이족 및 타이족과 친족관계에 있는 라오(Lao)족은 베트남, 캄보디아, 태국에서 각각 전체인구중 80% 이상을 차지한다.
민족형성 과정의 또 한가지 중요한 특징은 '남쪽으로의 압박'(push to the south)이라는 개념 하에 설명되는, 오늘날까지도 지속되고 있는 이주 패턴이다. 그 현저한 예로서 뒤에서 다시 언급될 대륙동남아시아의 비엣족, 타이족이 있다. 남하 이주의 전반적인 현상은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중요한 소수민족을 이루고 있는 화교들에게도 해당되며, 대륙동남아시아의 산악지대에 살고 있는 메오(Meo)족 즉 흐몽(Hmong)족과 야오(Yao)족 등도 같은 이주 패턴으로 이해될 수 있다. 중국이 고향인 메오족과 야오족은 적어도 이미 2-3백년 전에 산발적으로 인도차이나 지역에 내려 왔으나, 대규모의 이동은 19세기부터였다.
동남아시아의 민족형성 과정에서 끝으로 언급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 여러 민족간의 구분과 차이가, 동남아시아사회가 식민지지배를 겪으면서 서양인들을 통해 민족주의적 사회구조에 대한 인식을 갖게되기 이전의 전근대 시기에 있어서는, 그다지 중요한 것으로 작용치 않았다는 점이다. 민족지학상의(ethnographical) 구분에 대한 인식이 도입되기 이전의 시기에 있어서, 사회경제적으로 비슷한 발달수준에 있거나 상호 비교될 수 있는 문화 및 생활조건하에서는 한 지역 내에서의 민족적 경계는 민족간의 동화에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예를 들면, 버마족, 카렌(Karen)족, 몬족은 영국 식민지지배 이전의 시기만 하더라도 불교라는 이념적 응집매체가 작용하는 곳에서는 상호 쉽게 동화되었다. 사실 버마인으로 자처하는 사람들 중 그 출신을 캐고 들어가면 몬족인 경우가 허다했다. 동남아시아의 지배민족들과 소수민족들간의 동화에는 경제적인 요인도 종종 작용했다. 예컨대 보르네오의 다약족, 수마트라의 바탁족, 미얀마 북부의 카친(Kachin)족, 라오스 남부의 크무(Khmu)족이 그들의 민족적 정체성을 포기하고 말레이족, 버마족, 샨(Shan)족 혹은 타이족의 생활방식을 취하면서 이슬람 혹은 불교로 개종하는 데에는 더욱 나은 상업적, 농업적 경제조건에 대한 이해관계가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동화적 민족형성 과정은 동남아가 서양인들에 의한 식민지 지배를 받게 되면서 새로운 양상을 띠게 되었다. 즉 식민지 지배하에서 서양의 민족학적 연구를 토대로 종족 분류가 행해지고, 이를 바탕으로 식민지 당국 혹은 선교단체들은 종족간의 차이점을 확인하고 부각시켰다. 종족명칭 등과 같은 종족의 소속을 가리키는 특정범주들이 만들어지기도 했다. 이 식민지 시대의 유산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남아시아신생독립국가의 형성과정에서 나타난 민족적 문제들 대부분의 씨앗이 되어, 오늘날까지 곳곳에서 민족적 의식이 중요한 정치적 이슈로 등장하고 있다.
2. 대륙동남아시아와 도서동남아
동남아시아의 이해를 위한 한 중요한 단서로서 동남아시아가 종종 '대륙동남아'와 '도서동남아'로 구분되는 것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대륙동남아는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 태국, 미얀마, 그리고 도서동남아는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브루나이, 인도네시아, 필리핀을 포함한다. 여기서 지리적으로 볼 때 대륙동남아에 포함되어야 할 말레이반도 남부의 말레이시아 영토가 도서동남아에 속해 있는 것은 근본적으로 문화적인 기준에 의한 구분에 연유한다. 즉 테라바다(Theravāda)불교의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와 대승불교의 베트남 등 대륙동남아가 불교문화권임에 비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등 도서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은 이슬람문화권으로 분류될 수 있다. 물론 그 인구의 ¾이상이 중국인인 싱가포르는 오늘날 종교적으로 유교와 불교에 의해 대표되며, 필리핀은 남부의 무슬림인 모로(Moro)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기독교화된 나라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19세기초 영국인들에 의해 건설되기 이전의 싱가포르가 역시 말레이 무슬림 지역이었고, 16세기 중엽 스페인인들에 의한 식민지화가 시작되기 이전의 필리핀이 대부분 이슬람의 영향하에 있었다는 것을 감안할 때, 위의 분류는 역사적인 근거가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한 중요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특히 이러한 분류가 강한 설득력을 갖는 것은 대륙동남아가 각국별로 버마족, 타이족, 라오족, 크메르족, 비엣족 등 다양한 민족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에 반해, 도서동남아는 필리핀에서 인도네시아 그리고 말레이시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민족적, 언어적으로 말레이 세계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문화적인 측면과 함께, 대륙동남아는 몬순 기후를 지녀 우기와 건기의 구별이 분명한데 비해, 도서동남아는 습윤열대(濕潤熱帶) 기후로서 일년동안 골고루 비가 내린다는 차이가 또한 있다.
3. 동남아시아의 역사지리(歷史地理)
동남아시아의 이러한 분류를 바탕으로 동남아시아 문화의 발달과 역사의 전개에 있어서 어떤 특징들과 지역간의 공통성을 부여하는 동남아시아의 지리적 환경에 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선 대륙동남아를 보면 그 산맥들은 서쪽에서 동쪽으로 내려오는 북베트남 지역을 제외하고는 모두 히말라야 산맥 및 티베트 고원으로부터 출발하여 북에서 남으로 병행하듯 뻗어 내려온다. 특히 이러한 산맥들은 대부분 국가들간의 경계를 이루며, 산맥 사이사이에 역시 북에서 남으로 흘러내리는 하천들이 있고, 그 강유역에 주민들의 정착지들이 역사적으로 발달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북-남 방향의 산맥들의 흐름으로 인해 강유역의 정착지들간의 동-서 교통이 용이치 않았고, 그 결과 대륙동남아에서 역사적으로 중요한 민족이동이나 상업적 접촉은 주로 남북간 이루어졌다. 여기서 한 특별한 예외는 말레이 반도의 좁은 지역으로서, 인도양과 남중국해간의 무역에서 상인들은 특히 끄라지협 일대의 육로를 해적의 습격이 빈번했던 말라카해협이나 순다해협의 항해루트보다 오랫동안 선호하여 사용했다.
북-남 방향의 산맥의 발달로 인한 대륙동남아시아의 이러한 문화적 특성을 잘 보여주는 것은 미얀마다. 서쪽의 인도, 방글라데시와 경계를 이루는 빳카이(Patkai), 아라칸(Arakan)의 두 산맥은 역사적으로 미얀마와 인도간의 상호교통에 큰 장애를 형성하여, 전쟁 등 군사적인 접촉이나 19세기 이후 치타공 등지에서 아라칸 지방으로의 인도인들의 이주를 제외하고는 두 지역간에 문화 및 상업적 교류 혹은 정치적인 접촉이 거의 없었다. 이 점은 미얀마가 인도문화의 직접적인 영향하에 있어왔던 방글라데시나 아쌈(Assam)과는 달리 테라바다불교 국가로 머물러 그 동쪽의 이웃국가들인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와 함께 동남아적 문화의 색채를 띠고 있는 한 중요한 배경이다. 미얀마의 동부에도 광활한 산악지대가 태국과의 경계를 형성하여, 역사적으로 양국간의 교통이 원활치 않았다. 이러한 사정은 특히 양국간에 육로를 통한 무역관계가 역사적으로 그다지 활발히 전개되지 않았다는 사실에서 분명해진다.
라오스 북부에서 출발하여 북-남으로 베트남의 해안과 병행하여 흐르는 대산맥 역시 라오스와 베트남간의 주민이동과 교역에 큰 장애를 형성해 왔다. 그리하여 라오스는 역사적으로 베트남보다는 메콩강 건너편의 태국과 훨씬 빈번하고 깊은 문화, 정치, 경제적 관계를 맺어 왔다. 20세기 중엽 이후 베트남과 라오스간의 긴밀한 정치적 관계의 발전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 프랑스의 식민지통치를 함께 받았다는 역사적 경험, 1950년부터 라오스의 빠텟라오(Pathet Lao)와 베트남의 베트민(Vietminh)간의 공산주의적인 결속, 그리고 특히 1970년대 말 라오스 및 캄보디아에 대한 베트남의 팽창주의적 정책의 결과일 뿐이다. 따라서, 베트남 군대의 철수와 함께 라오스에서 베트남의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든 이후, 라오스가 다시 태국으로 눈을 돌리고 민족적으로 친족관계에 있는 타이인들과의 긴밀한 관계발전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은 필연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미얀마-태국의 남부국경지대 위에 솟아 있는 빌라우따웅(Bilauktaung) 산맥은 말레이반도를 따라 남쪽으로 뻗어 특히 말레이반도 남부에서 양 해안지대간의 육로교통을 어렵게 한다. 말라카해협이 멀지 않은 말레이반도 남부지역에서는 그 대신 이전부터 활발한 해상교통이 발달되어 왔다. 게다가 말레이반도의 지협 이남부터 산맥의 서쪽 사면(斜面)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주석산지가 발달하여 말라카해협을 넘어 방까섬, 벌리뚱섬으로 연결되는데, 오래 전부터 이 지역의 주석산지들은 유럽인들의 관심을 끌어, 특히 17세기에 말레이반도의 주석무역을 둘러싸고 말레이인들과 네덜란드인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있었다.
한편 미얀마의 아라칸 산맥은 남쪽의 인도양으로 계속 뻗어 안다만 열도와 니코바르 열도로 연결되고 수마트라섬의 서남부 해안을 따라 발달해 있는 산맥으로 이어지며 다시 자바섬의 남부해안 산악지대를 형성했다가 자바섬의 동쪽에서 북쪽으로 올라가 보르네오섬을 거쳐 필리핀 열도로, 그리고 타이완으로 계속 연결된다. 이 소위 인도-말레이 산맥체계에서 인도네시아의 주요지역을 형성하는 수마트라 서북단에서 보르네오까지의 산맥들은 화산지대의 연결이다. 그 중 수마트라의 서남부를 따라 섬의 전체 길이로 뻗어 있는 산맥은 상당히 험하여 산맥을 넘는 육로교통이 거의 불가능하며, 그 때문에 수마트라섬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는 동북해안지대를 따라 발달되어 왔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지역을 지나가는 이 거대한 활모양의 산맥체제의 연결선상에 미얀마의 서부지역과 야다나(Yadana)만, 수마트라섬, 자바섬, 보르네오의 동부 및 북부해안, 필리핀의 빨라완섬 등 동남아시아의 천연가스 및 유전지대가 발달해 있어, 특히 미얀마와 인도네시아의 군부정권들에게 귀중한 수입원을 제공해 왔다.
III. 전근대 동남아시아
1. 동남아시아의 토착문화
동남아시아의 문화를 논할 때 흔히 인도 및 중국으로부터의 문화적 영향을 강조하는데, 이것은 동남아시아 문화가 마치 외래문화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준다. 그러나 일본의 한 동남아시아 역사학자가 "문화적 중층성"(重層性)이란 개념으로써 동남아시아 문화의 복합성을 설명하는 것처럼 동남아시아 문화의 바탕에는 이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전통이 깔려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고고학적인 유물들을 통해 밝혀진 바, 신석기 시대부터 청동기시대에 걸쳐 이미 높은 생산력을 갖고 있었던 농경문화가 동남아시아 도처에 발달해 있었다. 이러한 동남아시아 자체적인 농경문화의 바탕 위에서 예를 들면 베트남의 전통적인 마을공동체의 촌락제도가 발전했다고 보여지는데, 바로 이러한 전통적 문화가 중국의 침략에 의해 위협당했을 때 베트남 민족은 중국에 대해 저항했던 것이다. 마을공동체의 전통은 무엇보다도 마을신(神)의 사당, 마을사람들의 회당(會堂), 그리고 부락의 센터의 세 가지 기능을 담당하는 딘(dinh)에서 뚜렷이 표출되어 있다. 중국의 영향을 받기 이전부터 존재하는 딘은 대개 마을의 중심에 세워졌다.
한편 하천유역에서 발달한 농경문화는 동남아시아의 독특한 식품문화와 주거문화로 연결된다. 태국의 '남쁠라'(nam pla)와 캄보디아의 '뜩뜨레이'(teuk trey)로 대표되는 대륙동남아시아의 민물고기 생선간장(魚醬)은 아시아의 간장문화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 즉 고온다습한 기후에서 부패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몸에 염분과 단백질을 보충해 주는 적절한 음식이 일찍부터 발달했던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흔히 만나게 되는 주상(柱上)가옥 역시 비가 많이 오고 무더운 동남아시아의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즉 하천의 유역이나 밀림이 우거진 곳에 정착하여 살기 위해, 홍수의 피해에 안전하고 환기에도 좋으며 땅에서 올라오는 습기를 막고 야생동물로부터 보호할 수 있는 가옥구조를 취한 것이다. 이러한 주상가옥은 중국의 영향을 받은 베트남인들의 집과 구별된다. 그리하여 17세기에 라오스의 수린야봉사(Surinyavongsa)왕은 베트남과 국경을 정할 때, 기둥 위에 집짓고 사는 사람은 라오스에 속하고, 땅에 붙어 집짓고 사는 자는 베트남에 속한 것으로 했다.
동남아시아의 다른 토착적 문화로 문신(文身)을 들 수 있다. 비록 필리핀의 가톨릭교회,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의 이슬람, 베트남의 유교적 정부의 문화적 가치판단에 의해, 그리고 지난 1세기간 산업화와 도시화에 의해 동남아시아 사회의 도처에서 문신이 거의 사라졌지만, 주술적 성격을 갖는 이 관습은 동남아시아 토착인들 사이에서 과거에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빈랑열매(areca nut)를 구장잎(betel leaf)과 석회와 함께 씹는 것이라든지, 이와 더불어 이빨을 검게 물들이는 습속도 동남아시아의 토착적 문화에 속하는 것으로서, 역시 근대화의 물결에, 특히 빈랑열매의 경우 유럽인들이 들여온 담배에 의해 소멸되어 가고 있다.
또 다른 동남아시아 토착적 전통으로 여자들의 사회에서의 적극적인 역할이 있다. 중국의 {진서}(晋書)에 의하면 이미 3-5세기 사이에 참파왕국의 사회에서는 "貴女賤男" 즉 남자보다 여자를 중시했다. {명사}(明史)는 17세기 이전 태국의 사회를 설명할 때 "自王至庶民, 有事皆決於其婦, 其婦人志量, 實出男子上"이라고 하여, 부인네들이 남자보다 속이 깊고 계산이 밝아 집안에서의 대소사를 대개 결정한다고 말한다. 이 점은 여자들이 실상 관혼상제를 비롯한 집안의 중요한 행사들을 주관하며 농사일을 돕고 정원에서 소출되는 잉여농산물을 시장에 내다 팔아 부수입을 올리는 등 시골의 대부분 가정에서 오늘날에도 볼 수 있다. 1830년대 초에 태국을 여행한 영국인 얼(G.W. Earl)은 아낙네들은 "떠다니는 집"(floating house)에서 새벽부터 물건을 파는 데 비해, 남편들은 뒷전에 앉아 뻐끔뻐끔 담배만 피우던가 혹은 작은 보트를 타고 돌아다닌다고 보고한다. 태국사회의 이러한 모습은 "남편은 코끼리 앞다리, 아내는 코끼리 뒷다리"라는 타이 속담에 잘 반영되어 있다.
종교와 신앙에서도 동남아시아사회에 뿌리를 둔 토착적인 전통이 역사를 통해서 그리고 오늘날에도 도처에서 발견된다.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에서 테라바다불교의 전통적인 신앙의 저층에는 정령숭배, 산신(山神)신앙, 조상신숭배, 샤머니즘 등 민족고유의 신앙이 뿌리깊게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어 13세기말 태국의 람캄행(Ramkamhaeng)왕에 의해 세워진 한 비문에 의하면 테라바다불교가 당시 수코타이 사회에 깊이 스며들어 있었으나, 프라 카풍(Phra Khaphung)으로 대표되는 귀신에 대한 신앙이 민간뿐만 아니라 왕실에까지 만연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오늘날까지 타이 사회에 널리 퍼져 있는 이 피(phi)신앙은 여러 외래종교의 요소들이 섞여 있는 타이 신앙세계의 기층에 깔려 있는 태국의 토착적인 전통들 가운데 하나라고 볼 수 있다. 태국의 피신앙에 비교될 수 있는 것으로서 미얀마에는 낫(nat)신앙이 있다. "정령, 귀신" 등의 뜻을 가진 '낫'을 섬기는 이 신앙은 원래는 애니미즘적인 정령숭배에 바탕을 두어 나무의 정령이나 땅의 정령 등 비인격적인 존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았으나, 점차 죽은 영혼, 특히 역사상의 실제인물로서 비운의 죽음을 맞아 귀신이 된 인격적인 존재를 신앙의 대상으로 삼으면서 샤머니즘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낫은 오늘날 미얀마의 여러 민족들 사이에서 불교와 함께 널리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이슬람 세계에서도 예컨대 자바섬의 무슬림들 가운데 정통주의적 신앙을 중시하는 소위 "산뜨리"(santri)에 비해 정령숭배적 요소를 강하게 지니고 있는 소위 "아방안(abangan)"들의 이슬람 신앙은 토착적인 오랜 관습(adat)과 민속적 축제의식 그리고 이슬람보다 먼저 들어왔던 불교 및 힌두교적인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다. 인도네시아의 이슬람 세계에서 아직까지 유지되고 있는 발리섬의 힌두교 역시 발리 지역의 원시적 신앙관념과 종교적 제의 등과 섞여 "아가마 힌두-발리"(agama hindu-bali) 혹은 간단히 "아가마 발리"(agama bali)라고 부르는 독특한 발리적 힌두문화를 형성했다.
2. 동남아시아의 고대 왕국들
이러한 토착적 문화가 역사의 흐름을 거치면서 피지배 농민층의 문화 및 생활습관을 포함하는 "소전통"(小傳統)으로 머물러 있었던 반면, 이 토착문화의 토양 위에 수용된 중국문화와 인도문화 등은 대부분의 경우 "대전통"(大傳統)으로 발전하여 그 지역의 지배엘리트들의 사고 및 생활방식에 근본적인 영향을 미쳤고 정치문화를 형성했다. 동남아시아에서 상부구조적인 새로운 문화전통으로 뿌리를 내린 이 중국 및 인도문화는 동남아에서 여러 고대왕국들이 일어나고 발전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1) 중국의 영향과 베트남
동남아시아의 고대문화에 대한 중국의 기여는 주로 대륙동남아, 그것도 베트남에 집중되었다. 베트남은 기원전 111년에 중국에 의해 정복당한 후 1050년간 중국의 통치하에 있었는데, 이 식민지지배 기간 중국문화의 전반적인 요소들이 베트남 사회에 깊이 스며들었다. 중국과의 접촉의 초기부터 상인, 군인, 관리, 학자, 불교승려, 피난민 등등 다양한 계층의 수많은 중국인들이 북베트남 지역으로 들어와 부분적으로는 토착주민들과의 결혼을 통해 베트남 민족적 요소에 중국적 자취를 남겼으며, 헤어스타일, 의복, 신발, 식사예법 등 일상생활로부터 쟁기, 관개시설 등 농업생산 분야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관습과 기술을 베트남 사회에 전달, 이식했다. 기원 2-3세기에 인도 혹은 중앙아시아로부터 들어온 불교는 그후 중국 대승불교의 승려들과의 접촉을 통해 더욱 발전했으며, 중국 근원의 도교 및 유교와 함께 베트남의 영적인 세계를 지배했다.
정치철학으로서 유교는 중국의 식민지통치 기간중 행정체제, 법 등의 형태로 베트남 사회에 이식되었다. 중국의 영향은 베트남이 939년에 독립을 획득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특히 리(Ly)왕조 시대(1009-1225)인 1070년대에 유교문화가 이전보다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되어, 공자사당인 문묘(文廟)가 세워졌고, 베트남 역사상 처음으로 과거제도가 실시되었으며, 유학자의 양성을 위한 국자감(國子監)이 설치되었다. 베트남의 통치자들은 중국과의 조공관계를 유지하면서 중국의 정치문화를 모방, 수용키 위해 노력했는데, 그 이유는 일차적으로 그들이 중국의 정치제도의 효율성을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사회적 질서와 우주와의 조화된 생활을 강조하며 국가의 윤리적 구심점으로서의 왕권을 지지하는 유교의 정치철학은 베트남 관료사회의 지배적 이념으로 정착했다. 이러한 이념적, 제도적인 영향과 함께 베트남에 들어온 한자와 한문은 한국에서의 경우와 같이 고(古)베트남 정부의 공식어가 되었을 뿐 아니라 베트남인들의 언어정서와 문학에 심원한 영향을 미쳤다.
2) 인도화된 왕국들
오늘날 동남아시아의 세계적인 불교 및 힌두교 사원들이 시사하거니와, 고대 동남아에 들어온 외래문화들 중 더욱 깊고 광범위한 영향을 준 것은 인도문화로서, 이와 관련하여 심지어 동남아시아의 "인도화"(Indianization)란 개념이 흔히 사용된다. 인도문화는 오늘날 동남아 사회의 일상생활에 깊이 배여 있다. 테라바다불교 국가들인 미얀마, 태국, 라오스, 캄보디아의 문자체계는 모두 인도의 데바나가리(devanagari)로부터 영향을 받았다. 베트남어를 제외한 동남아시아의 언어들에서 학문, 정치, 종교, 전쟁 등 분야의 중요한 개념들은 대부분 산스크리트에서 온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필리핀의 따갈로그(Tagalog)어나 일로까노(Illokano)어에서도 확인될 수 있다. 그리고 동남아시아고전문학의 대부분은 유명한 힌두서사문학들인 라마야나(Rāmāyana), 마하바라타(Mahābhārata), 하리방사(Harivaɣśa), 뿌라나(Purāna) 그리고 불교의 전생설화(前生說話)인 자따까(Jātaka)로부터 영감을 받았다. 특히 라마야나는 동남아시아의 전통적인 연극과 그림자연극, 특히 인도네시아 와양(wayang)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남아시아와 인도간의 접촉은 기원 이전부터 시작된 것이 분명하지만, 기원 첫 세기들이 역사적으로 볼 때 "인도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기간이었다. 대개 평화로운 접촉을 통한 "인도화" 과정의 바탕에는 인도문화를 수용할 능력이 있었던 동남아시아의 토착적인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토양이 있었다.
동남아시아최초의 정치적 자주독립체는 현 캄보디아 및 베트남 남부에 있었던 푸난(扶南)이었다고 본다. {남제서}(南齊書)에 의하면, 1세기에 쟈오(激)국으로부터 "사귀신자 훈티엔"(事鬼神者 混塡)이 배를 타고 푸난 지역에 도달하여 그곳의 여왕 류예(柳葉)를 아내로 삼아 푸난국를 세웠다. 훈티엔은 인도 어느 지역의 브라흐만 카운딘야(Kaundinya)라고 해석되는데, 우리는 여기서 인도화의 구체적인 예를 보는 것이다. 푸난은 메콩강 델타에 위치한 항구 옥에오(Oc-èo)를 중심으로 인도와 중국간의 중계무역에서 활발한 역할을 했으며, 해상무역을 통한 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베트남 중부지역과 말레이반도까지 그 영향력을 미쳤다. 정치적, 문화적으로 역시 인도화된 왕국이었던 참파는 중국, 인도네시아와 활발한 무역을 했으며 15세기까지 인도차이나반도에서 베트남인들과 세력경쟁을 전개했다.
푸난의 뒤를 이은 캄보디아인들은 인도의 정치문화를 바탕으로 크메르제국을 건설하여, 9세기부터 13세기까지 대륙동남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다. 그들의 정치문화의 중심에는 힌두교 배경의 "데바라자"(devarāja) 즉 "신왕(神王)" 개념이 있었다. 왕권에게 신성(神性)을 부여하는 이 개념을 통해 지배엘리트의 세속적 권력이 정당화되고 강화되었다. 크메르제국의 이러한 정치문화는 힌두사원인 앙코르 바트(Angkor Vat)의 건축으로 표출되었다. 13세기 중엽부터 약화되기 시작한 크메르제국은 1431년 태국 아유타야 왕국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크메르인들과 친족관계에 있는 몬(Mon)족은 현 태국 지역에서 7세기경부터 13세기까지 드바라바티(Dvāravati) 왕국과 하리푼차이(Haripunjaya) 왕국을 세웠다. 또한 9세기 초에는 미얀마의 버구(Pegu)에 한타와디(Hanthawaddy) 왕조를 설립했는데, 이 왕조는 이후 18세기 중엽까지 버마족과 샨족의 왕국들과 더불어 미얀마의 역사전개에서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몬족의 역사적 역할은 무엇보다도 타이족과 버마족에게 테라바다불교를 전달한 것에 있다. 몬족으로부터 테라바다불교를 수용한 버마족은 1044년 버강 왕조를 세워 찬란한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러나 이 왕조는 13세기말에 원(元)의 공격을 받아 무너지고 말았다. 13세기부터 역사적 무대에 등장하는 타이족의 왕조사 전개에 있어서도 테라바다불교가 사회전체를 포괄하는 가치체계로서 핵심적 역할을 했다. 여기에 몬족으로부터 전달받은 인도의 법전과 크메르인들로부터 배운 힌두 정치문화가 중앙집권적 국가형성의 중요한 바탕을 제공했다.
15세기 이전 인도네시아 역사의 전개에서도 인도문화와의 깊은 관계를 확인할 수 있다. 역사적으로 입증된 인도네시아의 첫 왕국은 7세기 중엽 수마트라섬에서 일어난 스리위자야(Srivijaya)로서, 말라카해협을 끼고 있었던 이 왕국은 인도 및 중국과 교역하면서 강력한 해상무역 왕국으로 번성했다. 그리고 대승불교의 한 중심지로서 중국, 베트남 등지에서 온 승려들이 인도로 가는 길에 들려 수학하는 곳이기도 했다. 스리위자야는 11세기에 세 번에 걸쳐 인도 촐라(Chola) 왕국의 공격을 받아 국력이 쇠퇴하기 시작하여 13세기에 멸망했다. 자바섬 중부에서는 750-832년에 사일렌드라(Sailendra) 왕국이 번성했는데, 이 왕국의 대승불교 문화는 유명한 보로부두르(Borobudur) 사원으로 대표된다. 자바섬 남부에서는 732년 힌두왕국인 마따람(Mataram)이 세워졌다. 9세기 중엽에 사일렌드라 왕조와의 결탁을 통해 자바의 통제권을 장악하여 강성해진 이 왕국은 힌두사원인 쁘람바난(Prambanan)을 남겼다. 마따람은 929년 꺼디리(Kediri)로 천도하여 1222년까지 지속했다. 꺼디리 왕조를 멸망시킨 싱하사리(Singhasari) 왕국은 1292년까지 자바섬 동부를 중심으로 마두라(Madura)섬과 발리섬까지 영향력을 미쳤다. 그 뒤를 이어 일어난 마자빠힛(Majapahit) 왕국은 자바의 마지막 힌두왕국으로서 14세기 후반에 크게 번성하여 말레이반도, 보르네오, 말루꾸(Maluku)에 이르기까지 도서동남아시아의 대부분을 지배하는 해양제국으로 발전했으나, 15세기 이슬람의 확산과 함께 쇠퇴하기 시작하여 1527년에는 이슬람 왕국인 데막(Demak)에 의해 정복되고 말았다.
15세기까지 동남아시아곳곳에서 발견되는 인도 정치문화의 정착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한 자들은 특히 브라흐만들이었다. 우주적 질서의 운행에 관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었던 이들은 동남아시아궁정에서 구체적으로는 법률의 제정, 국가적 의식의 수행, 주요행사를 위한 길일(吉日)의 선택, 달력의 제정 등에서 왕을 보좌하는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리고 토착 왕권과 왕조를 위해 이념적, 의식적(儀式的) 바탕을 제공했는데, 이때 예를 들어 인도의 법전인 다르마샤스트라(Dharmaśāstra)와 정치 지침서인 아르타샤스트라(Arthaśāstra) 등이 소개되어 동남아시아정치문화의 중요한 바탕을 형성했다.
3) 도서동남아시아의 이슬람화
동남아에 이슬람이 언제부터 들어오기 시작했는지는 불분명하다. 늦어도 7세기부터 동남아에서 무역을 했다고 보여지는 아랍인들은 11세기에는 향료제도 즉 말루꾸 제도에까지 진출했으며, 12세기에는 빨렘방, 아쩨, 자바, 보르네오, 마닐라 등에 그들의 무역기지가 있었다. 페르시아 상인들도 이미 7세기에는 수마트라의 동부해안과 칸톤(廣東) 사이를 항해하면서 무역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11세기 초에는 동남아시아의 여러 해안도시들에 정착했다. 그러나 수마트라 북부의 뻐를락(Perlak)에 1292년경 이슬람이 뿌리를 깊게 내렸다는 마르코 폴로의 보고를 근거로, 이슬람 왕국들이 실제로 등장하는 것은 13세기 후반부터라고 간주되고 있다. 수마트라 북단의 빠사이(Pasai)도 이 무렵이면 이미 확고한 술탄국이 되어 있었는데, 빠사이는 그에 앞서 페르시아 상인들의 무역활동 근거지 중의 하나였다. 우리는 초기 이슬람의 전파에서 오래 전부터 동남아시아와 무역접촉을 해 오던 아랍 및 페르시아인들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슬람의 확대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인도의 무슬림, 특히 13세기 말에 확고한 이슬람 왕국이 된 구자라트(Gujarat)의 무슬림 상인들이었다고 본다.
이슬람의 동남아시아전파는 이처럼 남중국해에 진출한 인도양의 상인들의 무역활동과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이들의 무슬림 무역공동체들이 수마트라의 북부해안, 말레이반도의 해안, 자바의 북부해안, 보르네오, 술라웨시(Sulawesi) 등에 세워지면서 이슬람화가 조용히 시작된 것이다. 그리고 이슬람법(sharia)에 따라 거래를 하는 무슬림 상인들의 네트워크에 동남아시아토착상인들, 특히 말레이 상인들이 참가함으로써 이슬람화가 본격적으로 진척되었다. 이슬람화 과정은, 13세기 말 빠사이의 경우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무슬림 공동체가 형성된 지역에 술탄 제도가 확립되면서 절정에 달했다. 이로써 술탄의 통치영역 내에서 이슬람의 정치화가 이루어졌으며, 그 통치영역의 확대와 함께 이슬람의 확산이 더욱 촉진된 것이다. 이슬람 전파의 일반적인 성격에서 끝으로 언급할 것은 신(Allāh)과의 합일과 영적 체험을 중시하며 이를 위해 금욕적 수행과 영적인 감성의 표현으로서 노래와 춤 그리고 꾸란(qur'ān)의 암송을 강조하는 수피즘(Sufism)이 동남아시아토착인들의 관심에 호응하여 이슬람 전파에서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특히 수피들의 교단인 타리까(tarīqa)는 신뢰를 바탕으로 활동하는 무슬림 상인들을 결속시키는 조직체로서 무슬림 공동체의 확대에 있어서 한 중요한 요인이었다.
이슬람은 14-15세기에 도서동남아에서 대중적 종교운동으로서 확산되어, 14세기 후반에는 수마트라의 내륙지방인 미낭까바우(Minangkabau)에까지 침투해 들어갔으며, 1380년대에 말레이반도의 뜨렝가누(Trengganu)가 이슬람 왕국이 되어 있었고, 1400년경에는 브루나이의 통치자가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그 확산과정에서 이제는 토착인, 특히 말레이 상인들이 그 중심적인 추진세력이 되었는데, 이때 무엇보다도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은 15세기 초에 강력한 해상무역 왕국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말라카였다. 15세기에는 수마트라의 여러 지역과 말레이반도 남부 그리고 자바의 북부해안이 이슬람화되었다. 15세기 말에는 말루꾸 제도로 이슬람이 전파되었으며, 보르네오와 술라웨시를 거쳐 필리핀으로도 건너갔다. 그러나 도서동남아시아세계의 실제적인 이슬람화는 점진적인 것이었으며, 기독교신앙을 가진 유럽인들의 도래(到來) 이후 종교적 경쟁의 양상을 띠면서 가속화되었다.
IV. 근대 동남아시아
1. 유럽인들의 진출과 동남아시아의 식민지화
동남아는 19세기 말까지 대부분 유럽국가들의 식민지가 되었다. 불교화된 대륙부분이건 이슬람화된 도서지역이건 동남아시아의 토착정부들은 월등한 화력을 갖춘 서양인들의 무력적 위세에 굴복치 않을 수 없었다. 태국이 식민지 지배로부터 모면한 것은 한편으로는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타이 왕실이 주도한 현명한 국가근대화 정책에 기인되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영국의 식민지세력과 프랑스의 식민지세력 사이에 일종의 "완충국"으로서 놓여져 있는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이기도 하다.
유럽인들의 동남아시아진출은 1511년 포르투갈인들의 말라카 점령과 함께 시작되었다. 당시 소위 "동인도"(East Indies)에서 향신료무역에 직접 참가하고 기독교를 전파하려는 포르투갈의 의도는 곧 스페인에 의해서도 답습되어,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이 1521년에 필리핀에 도착했고, 1565년 레가스삐(Miguel Lopez de Legaspi)가 쎄부(Cebu)를 점령함으로써 스페인에 의한 필리핀의 식민지화가 시작되었다. 17세기에는 네덜란드, 영국, 덴마크, 프랑스 역시 동남아에 진출하여 무역적 이익을 두고 서로 경쟁했다. 17세기 말에 이 무역경쟁에서 승리자로 남은 네덜란드는 말레이세계에 광활한 식민지제국을 구축하여 오늘날 인도네시아의 영토적 모형을 마련했다.
1786년에 삐낭(Penang)을 획득하고 1819년에는 싱가포르를 건설하여 동남아에 대한 무역적 진출을 재개한 영국은 1824년부터 벵골만과 말레이반도 사이에 있는 미얀마에 대한 침략을 시작하여 1885년에는 미얀마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1824년에 네덜란드와의 조약을 통해 말레이반도에서의 식민지주의적 팽창의 바탕을 마련한 영국은 20세기 초까지 오늘날 말레이시아 지역들을 식민지 지배하에 넣었다.
한편 인도차이나의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는 1858년 남부 베트남의 코친차이나(Cochinchina) 지역에 대한 프랑스의 공격으로부터 시작되어 1893년까지 모두 프랑스의 세력 하에 들어갔다. 필리핀은 1898년 스페인인들의 손으로부터 미국인들의 손으로 넘어가, 다른 동남아시아국가들에 비해 이중적인 서양인 지배의 유산을 갖게 되었다.
2. 식민주의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영향
서양인들의 식민주의는 동남아시아근대사의 형성에 있어서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으로도 깊고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 정치적인 면을 보면, 우선 동남아시아국가들의 영토적 경계선의 확정을 들 수 있다. 동남아시아진출 후 각각의 식민 지역에서 절대적인 정치적 세력을 구축한 유럽인들은 그 세력을 바탕으로 통치 지역들의 국제적 국경을 확정했으며, 이것은 오늘날 동남아시아국가들의 국경의 바탕이 되었다. 또한 식민체제의 행정을 통해 전통적 정치 제도의 비효율성을 보여주어 궁극적으로는 동남아시아정치구조의 변화를 초래했다. 예컨대 식민정부들에 의해 절대왕정제가 폐지되었고 그 대신 의회민주주의식 정치체제가 도입되었다. 태국의 경우 절대왕정제는 1932년 쿠데타를 통해 입헌군주제로 전환되었다.
식민주의는 주지하는 바와 같이 서구의 산업화의 결과 자원공급지 및 상품수요지로서의 새로운 시장 개척이라는 근본적인 경제적 이해관계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서양인들의 식민통치에 편승하여 동남아에 진출한 서구의 자본은 시장경제의 원리를 토착사회에 적용하여 최대의 이익을 추구했다. 전통적으로 농경사회인 동남아에서 서구의 자본은 무엇보다도 농업에 집중되었다. 그 현저한 결과로서 상업화된 쌀재배와 플랜테이션을 들 수 있다. 19세기 후반부터 쌀에 대한 국제적 수요의 증가에 부응하여 이야워디강, 짜오프라야강, 메콩강 등의 델타의 쌀경작지가 확대되었다. 커피, 사탕수수, 고무, 담배, 차 등 수출용 상업작물의 재배를 위한 플랜테이션은 19세기 이후 동남아시아각지에 확대되어 농업사회의 외형과 내부적 구조를 크게 변화시켰다. 서구의 자본은 그밖에 조선업과 광산업 등에도 투자되었으며, 효율적인 행정과 경제적 착취를 위해 도로와 철도가 건설되어 주요 도시들과 농업 및 공업 지역을 연결했다.
사회적으로 식민통치는 무엇보다도 도시화와 근대적 교육을 가져왔다.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서의 전통적 동남아시아도시들은 식민통치와 유럽의 경제적 영향으로 그 기능이 변화되어, 시장과 무역이 도시의 중심축을 형성하게 되었다. 또한 콸라룸푸르, 사이공, 메단(Medan) 등 새로운 행정, 교통 중심지들과 하이퐁(Haiphong), 삐낭, 싱가포르, 양곤 등 수출무역을 위한 새로운 항구도시들이 발전했다. 한편 많은 농촌 인구가 도시로 유입됨으로써 전통적 도시들은 지역적으로 슬럼화되었다. 경제적 발전 및 도시화와 관련된 사회적 변화 중 한 가지 중요한 것은 외국으로부터의 많은 노동력 유입이었다. 특히 영국 통치하의 식민지들에 19세기 중엽부터 중국인들과 인도인들이 대거 이주하여 인구 구조의 변화뿐만 아니라 인구수의 대폭적인 증가를 가져왔고, 차후 국민국가의 형성에 있어서 심각한 종족갈등의 뿌리가 되었다.
식민정부들이 도입한 근대식 학교교육은 비서구 지역의 "문명화 사명"(civilizing mission)의 동기와 직접적으로는 식민지배를 위한 토착인력의 양성이라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후자와 관련하여 제공된 유럽어를 통한 고등교육의 수혜자는 주로 토착사회의 상층부 자제들이었으며, 이러한 교육을 통해 양성된 식민정부의 토착인 공무원들은 사회의 새로운 엘리트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한편 근대적 교육을 통해 식민통치의 현실과 자국의 사회 및 경제적 문제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갖게된 토착 엘리트들은 동남아시아의 대부분 지역에서 민족주의운동을 이끌어 나갔다.
V. 민족주의와 현대 동남아시아
1. 민족주의 운동과 독립 동남아시아의 형성
동남아시아세계는 서양인들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물질적으로 근대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19세기 말부터 민족주의, 의회민주주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 유럽의 여러 정치경제적 이념과 사상들 그리고 학문을 접하고 수용했다. 이 중 특히 민족주의는 20세기 전반기를 통해 의회민주주의, 사회주의 등의 다른 정치적 이념들과 연결되어, 인도네시아의 수까르노(Sukarno: 1901-1970)와 모함마드 핫타(Mohammad Hatta: 1902-1980), 미얀마의 아웅산(Aung San: 1915-1947)과 우누(U Nu: 1907-1995), 베트남의 판보이쩌우(Phan Boi Chau: 1867-1940)와 호치민(Ho Chi Minh: 1890-1969) 등 동남아시아의 많은 지식인들과 사회운동가들을 매료했다. 이들은 모두 제2차 세계대전 후 자국 내에서 민족주의 바람을 성공적으로 일으켰으며 이 민족주의의 힘을 이용하여 신생 국민국가를 건설했다.
동남아시아의 국민국가 형성에 있어서 간과할 수 없는 하나의 중요한 역사적 경험은 제2차 세계대전시 일본 군국주의에 의한 점령이었다. 1940년 9월 베트남을 공격하기 시작한 일본은 1942년 7월 미얀마를 점령함으로써 동남아시아세계에 대한 군사적 지배를 완성했다. 1945년 8월의 패전까지 지속된 일본의 동남아시아점령이 동남아시아역사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다양한 해석이 있다. 일반적인 견해는 일제의 점령이 수십년, 혹은 지역에 따라서 수백년 동안 지속된 백인통치의 신화에 종지부를 찍었고, 이로써 동남아를 식민통치로부터 해방시키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견해는 필리핀의 경우 '필리핀독립법'에 따라 미국이 이미 1930년대 중엽에 필리핀의 독립을 구체적으로 약속했다는 점, 미얀마의 경우 1930년대 중엽부터 버마인들이 국내정치적 자율권을 획득했다는 점, 그리고 일본군이 물러간 뒤 프랑스인들과 네덜란드인들이 각각 인도차이나 지역과 인도네시아 지역을 재식민지화하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이와 함께 중시해야 할 것은 일본 군국주의자들이 동남아시아점령 후 그 지역의 정치를 통제하고 경제적 자원을 수탈하는 등, 사실상 새로운 식민지 주인으로서 등장했다는 점이다. 또한 일본이 동남아시아의 정치엘리트들과 민족주의 지도자들을 종용하여 대부분의 동남아시아국가들에서 실제로 선포된 '독립'이 어디까지나 일본을 중심에 둔 대동아공영권(大東亞共榮圈) 내에서의 독립이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 동남아시아 현대사에 미친 영향의 제한성에도 불구하고, 일제 점령기의 경험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동남아시아국가들에서 전개된 민족주의적 독립운동에 분명히 활기를 불어넣었다. 전쟁 이후 동남아시아국가들이 독립을 획득한 방식은 다양했다. 베트남과 인도네시아는 이전의 식민지 주인에 대한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추구했지만, 이 두 나라에서의 투쟁도 그 성격과 과정에 있어서 각각 달랐다. 인도네시아는 수까르노를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자들의 인도네시아공화국이 1945년 말부터 1949년까지 네덜란드에 대항했고, 여기에 당시 반(反)네덜란드적인 국제적 여론이 강력히 작용하여, 1949년 12월 독립을 획득했다. 이에 비해 베트남에서의 혁명투쟁은 공산주의자들인 베트민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 기간에 있어서도 1954년 디엔비엔푸(Dien Bien Phu) 전투에서의 승리로 프랑스인들이 베트남으로부터 물러날 때까지 뿐만 아니라 1975년 미국과 사이공 정부에 대한 최종적인 승리를 쟁취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동남아시아 다른 지역들에서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인도네시아와 베트남의 경우와 같은 과격한 양상을 보이지 않았다. 그것은 미얀마, 말라야(Malaya), 필리핀의 예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일차적으로 영국과 미국이 네덜란드나 프랑스에 비해 식민지의 독립을 허용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주저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영국 정부와의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미얀마는 1948년 1월, 말라야는 1957년 8월 주권을 회복했다. 필리핀 역시 미국의 약속을 바탕으로 1946년 7월 독립을 획득했다. 그러나 미얀마와 말라야의 경우 그 독립과정에서 소수민족들과의 갈등이 심각한 국내정치적 문제로 발전했으며, 이 문제는 독립 후에도 오랫동안 양국 정부의 현안으로 남게 되었다. 한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속국이었던 캄보디아와 라오스에서는 베트남과는 달리 반프랑스 혁명투쟁이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양국의 친프랑스적인 왕족들을 중심으로 한 지배층은 1946-1947년 프랑스연방내의 입헌군주국의 지위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캄보디아가 그 후 1953년 11월 독립하게 된 것에는 시하누크(Sihanouk: 1922- )의 개인적 역할이 결정적이었다. 라오스는 1954년 제네바회담에서의 결정을 통해 독립되었다.
2. 현대 동남아시아 사회의 발전과 문제
탈식민지 시대에 들어서서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새로운 상황에 처해진 동남아시아국가들은 다양한 발전의 양상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다양한 발전들에서 어떤 특징들과 추세들이 확인될 수 있다. 우선 국제정치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후 이념적 양극화의 현상에 따라 동남아시아국가들은 1955년 결성된 동남아조약기구(SEATO)의 친서방계, 공산주의, 그리고 비동맹운동의 중립주의 등으로 나뉘어졌다. 그 후 회원국들간의 경제 협력과 안보 강화를 목표로 1967년 동남아국가연합 즉 아세안(ASEAN)이 결성되어, 이념보다는 지역내 협력체제를 중시하는 경향이 더욱 뚜렷이 나타났다. 1980년대 말부터는 냉전체제의 국제적인 해체와 시장경제화의 진전에 따라 동남아에서도 이념분쟁이 퇴색해 갔으며, 이윽고 1997년에는 캄보디아를 제외한 모든 동남아시아국가들이 아세안에 가입하게 되었다.
국내정치적으로 동남아시아의 신생 정부들은 어떠한 외교정책적인 방향에 상관없이 대부분 권위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었다. 권위주의 체제는 인도네시아, 태국, 필리핀 등의 국가에서는 강력한 군부의 지지를 그 바탕에 두고 있었다. 미얀마는 1962년 이후 군부독재 체제가 지속되고 있다. 베트남, 라오스 등의 사회주의권에서는 공산당의 일당독재적인 리더십이 국가의 정치와 경제를 독점적으로 운용해 왔다. 그러나 1980년대 말부터 그 동안의 경제적 발전, 국제정치적 환경의 변화, 교육의 보급 등의 결과로 민주화를 위한 사회적 의식과 정치경제적 공간이 점차 확대되고 있다. 그리하여 권위주의적 국가 및 군부정권에 대한 사회의 도전이 갈수록 강해져, 필리핀에서는 1986년 마르꼬스 정부가 무너졌으며, 태국에서는 1992년 재집권을 시도하던 군부가 퇴진했고, 미얀마에서는 1988년 비록 "미완의 민주화"로 끝나고 말았지만 군부 독재에 대한 과감한 민중항쟁이 일어났다.
탈식민지 시대 대부분의 동남아시아정부들은 빠른 산업화를 경제적 목표로 내세워 50-60년대에 섬유산업 등 경공업에 치중한 수입대체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특히 싱가포르를 비롯한 아세안 국가들을 중심으로 수출지향산업이 활발히 추진되기 시작했다. 이를 위해 서방 선진국들 특히 미국, 일본으로부터 많은 자본이 유입되었으며, 이로써 세계 경제의 구조에 대한 의존도가 점차 높아져 갔다. 한편 경제적 발전은 이농(離農)과 농촌 인구의 도시로의 유입, 이로 인한 도시의 비대화 및 도시 범죄의 증가를 초래했다. 특히 산업발전에만 지나치게 치중한 경제정책과 사회구조는 갈수록 심각해지는 환경오염을 불러 일으켰고, 미성년자 고용 및 저임금 문제를 비롯한 노동착취와 노동운동의 억압 등 노동문제를 야기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들과 함께 동남아시아국가들은 독립 이후 오늘날까지 소수민족 문제를 포함한 종족갈등을 안고 있다. 국민국가 형성을 위한 국가통합의 과제와 직결된 이 문제는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표출되었다. 필리핀 남부와 태국 남부에서는 무슬림들의 분리독립을 위한 무장투쟁으로 나타났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아쩨의 '이슬람공화국' 수립운동과 동티모르(East Timor) 분리독립운동을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데, 이들도 각각 이슬람과 가톨릭이라는 종교적 배경을 지니고 있었다. 미얀마에서는 오랫동안 카렌족, 몬족, 샨족, 까친(Kachin)족 등이 양곤 정부에 저항했다. 특히 카렌민족연합의 카렌족 분리독립운동은 1995년 그 거점이 미얀마 정부군에게 점령될 때까지 세계 여론의 관심대상이 되었다. 말레이시아의 종족문제는 말레이족이 어떻게 중국인들을 정치경제적으로 통제하되 국민국가에 수용하느냐 그리고 어떻게 말레이족의 이해관계를 확대하느냐에 집중된 것으로서, 그것은 부미뿌뜨라(bumiputra) 정책으로 표출되었다.
끝으로 살펴 볼 것은 현대 동남아시아의 형성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주의가 독립 후에도 여러 동남아시아국가들의 대외정책뿐만 아니라 국내 정치와 경제의 방향에 종종 결정적인 영향을 미쳐왔다는 점이다. 이 경우 민족주의는 다른 민족과 문화에 대해 비관용적이며 심지어 강한 배타적 에너지를 발하는 양상을 보여주었다. 예컨대 1975년 베트남을 통일한 후 하노이 정부는 1977년 라오스에 베트남 군대를 주둔시키고, 1978년 말에는 캄보디아에 침입하여 프놈펜을 점령하고 꼭두각시정부를 세웠다. 베트남의 이러한 침략적 민족주의는 이 두 이웃국가들에 대한 역사적인 팽창정책과 전통적인 문화적 우월의식을 그 근저에 두고 있었다. 1975년 캄보디아를 공산화한 크메르루즈(Khmer Rouge)는 공식적 국호를 '캄보디아'에서 '민주캄푸치아'(Democratic Kampuchea)로, 1989년 양곤 정부는 동년 6월 18일의 "표현법의 변경"(Adaptation of Expression Law)에 따라 '버마'를 '미얀마'로 바꾸었다. 토착적인 고유의 발음을 중시하여 국제적 관행을 무시한 이 조치들은 정치적 뿌리찾기 운동으로 해석될 수 있으나, 동시에 강한 민족주의적 자의식을 드러낸다. 한편 미얀마에서는 네윈(Ne Win: 1911- )의 군부정권이 우누의 중립주의와 고립주의를 답습하여 국가를 대외적으로 폐쇄했다. 배타적 민족주의는 인도네시아에서는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에 수까르노의 반(反)서방 강경노선의 배경이 되었고, 말레이시아의 현 총리 마하티르(Mahathir bin Mohamad: 1925- )의 '동방정책'("Look East")과 서양의 가치관에 대한 비판으로 표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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