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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도피처
True Refuge
[14]
알아차림 속에 있는 도피처
친밀함이란 침묵을, 거기서 모든 일이 일어나는 공간을, 느끼는 것이다. -아드야산티
지혜는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다. 사랑은 내가 모든 것이라고 말한다. 이 둘 사이에서 내 인생이 흘러간다. -스리 니사르가닷타
“말! 길은 언어 너머에 있다.”라고 한 선사(禪師)도 있거니와, 깨어서 알아차림(awareness)에 대하여 말하고 쓴다는 것은 송구스러운 작업이다. 어떤 단어를 쓰든지, 어떤 생각이 나든지, 그건 그게 아니다. 자기 눈동자를 볼 수 없듯이 우리는 깨어서 알아차림을 알 수 없다.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다. ‘알아차림’은 우리가 머리로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나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다만 알아차릴 수 있을 뿐이다.
기독교 목사인 내 친구가, 자신이 참여하는 종교인들 모임에 대하여 말해주었다. 이런 질문으로 그 모임은 문을 열었다. 신성한 무엇을 가리켜 말하는 우리의 합의된 언어가 있는가? 있다면 무엇인가? 우리는 그것을 ‘하느님’(God)이라고 부를 것인가? 한 페미니스트가 말했다. “아니다. 여성하느님(Goddess)은 어쩌고?” 불교신자가 말했다. “거룩한 영(Spirit)?” 무신론자가 말했다. “아니지!” 한동안 토론이 이어졌다. 마지막으로 한 아메리카 토착민이 말했다. “거대한 신비.” 모두 동의했다. 누가 어떻게 알고 뭐라고 말하든 간에, 성스러운 무엇은 그 본질을 알 수 없는 신비다.
누가 죽을 때도 우리는 말로 표현되지 않는 같은 신비와 부닥친다.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조나단이 나를 보며 물었다. “어디로 가셨지?” 나도 임종하는 아버지 곁에 있던 때를 기억한다. 그분은 거기 있었다. 그런데 없었다. 그의 영(spirit), 살아있는 의식이 더 이상 그 몸에 있지 않았다. 우리가 겪는 여러 경험들 가운데 이보다 황당한 것이 없다.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우리 머리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끝없이 사랑을 말한다. 하지만 막상 사랑하는 사람을 떠올리며, “사랑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신비 속으로 떨어지고 만다. 이 특별하고 이상하고 아름답고 아프고 괴롭기까지 한 것의 정체가 무엇인가? 알 수 없다. “누가 나인가?”를 묻고 답을 모색하지만 어디에서도 정답은 발견되지 않는다. 티베트 스승 쇼걀 린포체는 묻는다.
“만일 모든 것이 변한다면, 그렇다면 참으로 존재하는 것은 무엇인가? 겉으로 보이는 것들 뒤에, 거기에서 온갖 변화와 무상(無常)이 춤을 추는 경계 없는 공간이 과연 있는가? 우리가 의존할 수 있는,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것을 넘어서는, 무엇이 실제로 있는가?”
이런 탐색이 우리를 순수한 알아차림(pure awareness)이라는 영원한 도피처 쪽으로 돌아서게 한다. 우리가 스스로 “여기 알아차림이 있는가?”를 물을 때 대부분은, 아마도 잠시 멈추었다가 그렇다고, 알아차림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할 것이다. 하지만 일상생활을 하는 동안 우리는 그 열린 알아차림을 끊임없이 떠나 사업과 계획에 몰두한다. 알아차림의 도피처로 가려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평화와 행복을 찾는 데 이런저런 조건들이 훼방을 놓는다. 우리가 참 자아라는 신비를 어떻게 도배하는지에 대하여 아는 것이 자유를 찾는 데 기본적인 요소로 작용한다.
축소 밸브를 통하여
올더스 헉슬리는 ‘지각(知覺)의 문’에서 ‘알아차림’을 “아주 큰마음”(Mind at Large)이라고 부른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 ‘아주 큰마음’이다. 하지만 우리 또한 동물인지라 무슨 수를 써서라도 살아남는 것이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뇌와 신경계가 축소 밸브(reducing valve)를 관통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저쪽 끝으로 방울져 나오는 것은 이 특별한 행성에서 살아남도록 우리를 도와줄 간추려진 의식(意識)이다.”
우리 뇌가 하는 기본적인 기능은 너무 많은 정보들 가운데 당장 필요한 정보만 남기고 나머지를 걸러내는 것이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수록 세상을 향한 우리의 시야는 그만큼 좁아진다. 배가 고프면 먹을 것만 생각난다. 위협을 느끼면 자기를 방어하거나 선제공격할 자세를 취한다. 이렇게 여과된 의식이 우리 에고를 살아남게 도와주는 긴요한 도구로 쓰인다.
한 남자가 술집에서 바텐더에게 이렇게 말하는 만화를 본 적이 있다. “나, 아무것도 아니오. 하지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것이오.” 당신이 어떻게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루 종일 살고 있는지 눈여겨본다면 당신의 축소 밸브가 어떻게 당신의 경험을 조작하는지 알게 될 것이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생각들이 당신을 중심으로 생겨나는지를 보면 동일한 밸브가 어떻게 자기-중심적인 우주를 만드는지도 알 것이다. 이는 우리 모두에게 진실이다!
끊임없는 생각의 소용돌이가 우리의 우주복-자아를 끝없이 되살려낸다. 그러면서 안전과 즐거움을 위해서는 환경을 개선하고 과오와 실수를 피해야 한다고 일러준다. 별다른 문제가 없어도, 지금 하는 일 말고 다른 무슨 일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우리를 떠나지 않는다. “당신은 왜 행복하지 않은가?” 작가 웨이 우 웨이는 이렇게 묻고 스스로 답한다. “당신이 하고 있는 일의 99.9%가 당신 자신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을 개념적으로 안다 해도 우리의 자기-중심주의는 대단히 견고하다. 단세포 생물조차도 “여기 안에 내가 있고, 저기 밖에 세계가 있다.”는 감(感)으로 산다. 헉슬리의 말대로 기능적인 자아를 발전시키는 것이 이 특별한 떠돌이별에서 이루어지는 진화의 기본 바탕이다. 하지만 그 말이 우리의 우주복-자아가 진화 여정의 종점이라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무한히 큰 무엇에 자기를 귀속시킬 능력이 있다.
자기에 대하여 스스로 만든 이야기를 넘어 우리의 참-자아에 깨어나지 않으면 모든 체계가 얼어붙고 그리하여 연속되는 스트레스, 외로움, 두려움, 불만으로 인생이 채워질 것이다. 하지만 이런 정서적 고통이 있다고 해서 그러니까 우리의 기능적 자아를 무시할 필요가 있다는 얘긴 아니다. 그것은 다만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존재의 차원이 우리한테서 열리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신호다. 탁월한 코치 겸 저술가인 스티븐 조셉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무한 광대한 현존의 실재를 즐기면서 아울러 독립된 개체로 기능할 수 있다. 경찰이 우리 차를 불러 세울 때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면서 운전면허증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평소 자신의 에고에만 붙잡혀 있으면 사랑하는 이의 죽음 같은 분명한 현실에 대처할 방법을 모를 뿐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의 삶과 사랑에 자기를 온전히 열어놓지도 못할 것이다. 스리 니사르가닷타는 말한다.
“자기 자신을 여러 사물들 가운데 한 사물로, 꼴을 갖춘 단단한 사물로 이해하는 한, 당신은 수명이 짧고 상처입기 쉬운 나약한 존재일 수밖에 없고 따라서 살아남는 문제를 걱정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당신 자신이 시간과 공간 너머의 존재임을 알면 더 이상 겁낼 무엇이 없을 것이다.”
짧은 묵상 하나 해보자. 당신의 생애가 기록된 사진 앨범을 들여다본다. 유치원 다닐 때, 고등학교 상급반, 첫 직장에 출근하던 날, 아내와 결혼하던 때의 당신 사진들이 거기 있다. 그것들 모두 당신이 무엇을 성취해서 그것을 축하하는 사진들이다. 하지만 크게 불안하거나 소중한 무엇을 잃었을 때의 사진들도 있을 것이다. 이제 거울을 들여다본다. 누가 당신인가? 당신의 몸, 세계관, 인생관, 좋아하는 것들, 취미와 오락들이 어떻게 달라졌는지 돌이켜보아라. 자, 다시 물어보자. 그 모든 때 모든 순간의 숱한 변화들을 거치면서 나의 무엇이 변하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는가? 무엇이 언제나 여기에 있어왔는가?
눈앞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알아차리는 의식(consciousness)의 현존이 항상 거기에 있었음을 당신은 감지(感知)할 수 있는가? 우리 자신의 실존 안에 있는 이 신비를 깨치게 되면 끊임없이 변하는 세상과 우리의 관계가 달라진다. 자아에 대한 관점이 훨씬 가벼워진다. 자기 맘대로 되지 않는 현실에 너무 힘주어 반응하지 않게 된다.
다시, 스리 니사르가닷타의 말을 들어본다.
“참 세계(real world)는 우리의 생각과 관념들 너머에 있다. 우리는 그것을 즐거움과 아픔, 옳음과 그름, 안과 밖으로 나누어진 욕망들의 그물을 통해서 바라본다. 우주를 있는 그대로 보려면 이 그물 너머로 한 걸음 벗어나야 한다. 그다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그물에는 구멍들이 많이 있으니까.”
참 자아를 신뢰함
스물두 살 나이로 보스턴 수련원의 문을 처음 두드렸을 때 나는 이 그물을 벗어나 자유를 실현하는 데 나의 팔십 평생을 바치리라고 결심했다. 붓다 같은 영적 구도자의 이야기들이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다. 그들은 갑작스럽고 결정적인 깨어남의 순간―변함없고 눈부시게 밝은 해탈의 순간―을 경험하였다. 이 깨어남에 퇴행이 없는지라 그들은 더 이상 거짓 자아상에 묶이지 않았다. 그들의 가슴은 드넓게 열렸고 그들의 머리는 맑고 자유로웠다.
내가 ‘해방된 영원한 나중’(liberated forever after)에 몰입되어 있는 동안 그것은 내가 가야 할 길이 아니었다. 깨어남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자아의 혼수(昏睡)가 여전히 달라붙어 있어서 나를 고통스럽게 했다. 내가 나의 약점을 공개적으로 인정하자 학생들은 지난 수십 년 사이에 나의 무엇이 달라졌는지 궁금했던 모양이다. 지난날의 나와 지금의 나 사이에 다른 점이 있다면 이것이다. 나는 깨어나서 알아차림―살아있으면서 사랑어린 현존에 대한 느낌―을, 나의 참 자아에 대한 진실하고 친숙한 감각으로, 신뢰한다. 내가 극도로 비참한 지경에 처했을 때도 이 신뢰, 도피처로서의 사랑어린 현존에 대한 신뢰는 여전히 살아있어 나를 집으로 데려간다.
수년 전부터 나는 내가 ‘특별한 인물’이라고 이름붙인 것에 스스로 붙잡혀 있음을 차츰 알게 되었다. 나 자신이 특별하고 중요한 존재라는 오랜 느낌이 언제부턴지 모르게 나와 더불어 있었다. 네 살배기 꼬맹이가 모든 사람의 주목을 받아 마땅한 보스로 행세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의 책, ‘급진적 수용’에서 언급했지만 나는 ‘특별한 인물’의 뒷면―결점이 있고 부적절한 존재―을 보았다. 하지만 영성수련 교사의 역할을 감당하면서 일종의 자아-뻥튀기에 사로잡혀 있는 나를 보아야 했고 그것은 결국 고통만 안겨주었다. 어쨌든지 내가 남들보다 낫다는, 좀 더 지혜롭고 스마트하고 영적으로 진전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생각은 내 곁에 있는 것들뿐 아니라 나 자신으로부터도 나를 분리시켜놓았다.
나는 ‘특별한 인물’한테서 벗어나고 싶었다. 바삐 일하는 사람의 자세를 취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나처럼 하라고 다그치는 나를 볼 적마다 속으로 “특별한 인물”을 중얼거리며 일단 멈추기를 시도한다. 학생들이 나를 칭송하거나 아첨하는 이메일을 보내면 우쭐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마음을 모으고 말한다. “이건 ‘나’와 상관없는 말이다.” 그러고는 스스로에게 상기시킨다. “이 말을 내 것으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어.” 급하게 할 일이 많아서 조나단을 우체국에 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 때는 입을 다문다. 하지만 저도 모르게 특별한 인물로 행세하고 나서 나중에 알아차리는 경우도 물론 가끔 있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면 오늘도 내가 얼마나 자주 세상에서 유별난 존재로 행세했는지를 반성해본다.
어느 일요일 저녁, 앉아서 명상하다가 다음 주에 할 일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때 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내 둘레를 에워싼 환한 빛이 손짓하여 나를 부르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때 나는 내가 특별한 인물이라는 생각의 거품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는 그 거품에서 벗어나 나를 에워싼 빛에 잠겨들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우주복 자아가 너무나도 완강하게 나를 죄었다. 내 마음 속에서 한 음성이 절망하는 투로 말했다. “네가 무얼 할 수 있겠니? 넌 거기에서 벗어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네가 무얼 더 할 수 있을지 모르겠구나.”
그때 한 줄기 깨달음의 파도가 나를 관통했다. 물론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여태 나를 특별한 존재로 만들고자 얼마나 애썼던가? 하지만 결론은 늘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내가 우월한 존재로 느껴지든 열등한 존재로 느껴지든 그건 문제가 아니다. 뭘 어떻게 해보려고 갈등하고 다투는 거기에 아픔이 있었을 따름이다. 부드러운 음성이 내 속에서 말했다. “멈춰. 그냥 멈추는 거야.”
나는 그러고 싶었다. 놔버리는 지혜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 몸은 여전히 다른 존재가 되려고 절망적으로 애쓰고 있었다. 그러지 않으면 뭔가 잘못될 거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서. 나는 다시 내면의 음성을 들었다. “사랑하는 아이야, 제발 멈추렴. 여기에서 그만두는 거야.” 그러자, 전에도 여러 번 경험한 것처럼, 사랑어린 현존이 나에게 진실로 통하는 문을 열어주었다. 나는 머리 숙여 기도하는 자세로 합장한 나를 보았다. 그리하여 자기를 통제하려는 긴장된 자세를 풀고서 사랑어린 알아차림 속으로 들어갔다. 나는 무엇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을 그만두었다. 그저 이 모든 것이 나보다 큰 무엇에 속해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뿐이었다. 갈등과 다툼이 그쳤다. 내 머리를 채우던 말들, 잘못된 것에 대한 생각들이 모두 떨어져나갔다. 그로써 특별한 자아의 거품이 꺼져버렸다. 나의 세계가 고요한 공간 속으로 들어갔고 거기를 따뜻하고 부드러운 흐름이 관통하고 있었다.
내 속에서 온갖 생각과 감정들이 소용돌이칠 때마다 나는 특별한 존재가 되려는 욕망이 꿈틀거리는 걸 본다. 그러면 빙그레 웃으며 말한다. “음, 너 또 왔구나? 하지만 여기서 멈출래. 그냥 멈추는 거야.” 그러고는 두 손을 모으고 놔버린다. 놔버리는 것도 놔버린다. 그렇게 갈등과 다툼이 그치면 나의 영원한 집, 고요의 현존이 문을 열어준다. 아울러 나의 참 자아에 대한 신뢰가 살아난다.
대부분의 우리는 너무 열심히 일한다. 마치 조용하고 평화롭고 아늑한 곳을 찾아서 물보라 날리며 시끄럽게 돌아다니는 모터보트 같다. 우리는 문제를 해결하고 요구에 응하고 다음 일을 준비하며 자기 자신을 발전시킨다. 하지만 그러면서 가는 곳마다 더 많은 물결과 소란을 일으킨다. 오히려 모터보트 엔진을 끄고 고요 속으로 들어갈 때 거기에 참된 자유가 있다. 우리가 찾는 것은 ‘바깥 저기’에 있지 않다. 갈수록 많은 노력과 통제를 필요로 하는 발전된 자아가 아니다. 그것은 언제나 바로 ‘여기’에 있는, 우리가 경험하는 것들 배후에서 발견되는, 고요한 알아차림(silent awareness)이다.
우리를 해방시키는 최선의 수련법은 통제를 그치고 사물들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는 것이다. 내가 이것을 가르칠 때 많은 학생들이 능동적인 집중을 그만두면 정신적 혼수에 빠진다고 호소한다. 나는 그들에게 호흡을 따라가며 마음(생각) 가라앉히기, 일어나는 것들을 눈여겨보기, 고개 숙이고 기도하기 등 세상과 자기를 통제하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지혜로운 여러 수련법들을 일러준다. 하지만 어떤 수련법에 목숨 걸고 매달리면 자기를 돋보이려는 에고의 술수만 강화되는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가벼운 터치로 집중하면서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이 요령이다. 어떤 의도로든지 무엇을 조작하려는 마음상태를 신뢰해서는 안 된다. 다만 자기 인생을 흘러가는 그대로 따라갈 때 우리는 스스로 깨어있는 마음상태를 자연스럽게 알아보고 신뢰하게 된다. 우리는 멈출 필요가 있다.
붓다의 사랑하는 제자 아난다는 여러 해 동안 붓다를 수행하며 섬겼다. 그는 자발적으로 일하면서 깨달음을 향해 나아갔다. 명상을 수련하고 관용을 베풀고 슬기롭게 말하고 가슴을 온갖 선량으로 채웠다. 하지만 붓다가 죽고 나서 깨달음을 얻은 제자들로 대법회가 열렸을 때 아난다는 그 모임에 초대받지 못했다. 지혜와 친절로는 크게 존중받을 만했지만 아직 내면의 자유를 얻지 못했던 것이다.
모임 전야(前夜)에 아난다는 밤새도록 정진하되 목적을 이루기까지 멈추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하지만 영웅적인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진전을 보지 못했다. 먼동이 트자 아난다는 지치고 낙담하여 모든 노력을 포기하고 그만 쉬기로 마음먹었다. 성취에 매달리지 않으면서 깨어있는 상태로 그가 베개에 머리를 얹었다. 그리고 해탈하였다!
물론 그냥 자리에 누워서 쉬는 것이 해탈을 위한 처방은 아니다. 아난다가 남들을 섬기고 깨어있는 마음으로 살아가기 위하여 오랜 세월 최선을 다해서 수행했음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는 진실을 깨치는 데 일생을 바쳤다. 하지만 대부분의 우리와 마찬가지로 자기가 설정한 ‘목표’에 몸과 마음이 낚였다. 그는 낚시 바늘에서 풀려나 모든 ‘의도적 행위’(doing)를 멈추고 참 본성의 자유를 회복해야만 하였다.
낚시 바늘에서 풀려나기
티베트 스승 최걈 트룽파가 한번은 교실에서 포스터 용지에 V 자(字)를 크게 그리고 학생들에게 자기가 그린 것이 무엇으로 보이느냐고 물었다. 많은 학생들이 ‘새’라고 답했다. 그가 말했다. “아니다. 새 한 마리가 날고 있는 허공이다!”
어떻게 무엇에 집중하느냐가 우리의 경험내용을 결정한다. 행위와 통제의 자세를 취할 때 우리는 시야가 좁아지고 사물(나무, 생각, 느낌 등)을 전면(前面)에서 인식한다. 그럴 때 우리는 하늘(경험의 배경, 알아차림의 바다)을 인식하지 않는다. 하지만 좋은 소식이 있다. 우리가 자기와 남을 통제하지 않는 쪽으로, 열린 집중 쪽으로, 마음을 의도적으로 기울일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처음 ‘열린 알아차림’(open awareness)을 알게 된 것은 티베트 불교 수련법인 ‘족첸’을 통해서였다. 그 뒤로 나는 마음 모아 집중하기를 계속 수련하고 있다. 내가 스승인 트소크니 린포체로부터 배운 바에 따르면, 족첸 수련에서 우리는 눈길이 가서 닿는 대상을 놔버리고 거기 있는 ‘알아차림’으로 돌아가기를 반복한다. 텅 비어있고 언제나 깨어있는 하늘같은 마음을 인식하고 그리고 그것으로 있는(be) 거다.
트소크니 린포체와 함께 한 첫 수련회에서 나의 붙잡아 맴(mooring)이 놀랍도록 느슨해졌다. 거기 현존하는 알아차림에 친숙해질수록 내 아상(我相)을 이루는 느낌들과 이야기들의 발판이 약해졌다. 몸과 마음의 긴장이 스스로 풀어지면서 누가 또는 무엇이 마음에 떠오르든 그에 대한 나의 반응이 부드러워졌다. 그만큼 내가 넉넉해지고 자유로워진 것을 스스로 알 수 있었다.
최근에 나는 심리학자 레스 페미의, 열린 알아차림 안에서 편히 쉬는 것이 몸의 치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에 관한 임상보고서를 읽었다. 1960년대부터 학자들은 평화롭고 행복한 마음상태와 뇌의 알파파동 사이의 상호관계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 방면의 선구자인 페미는 뇌의 알파파동을 촉진하는 방법들을 모색하였다. 자원해서 연구에 참여한 학생들에게 평화로운 풍경, 고전음악, 여러 색깔의 빛들을 보고 듣게 했다. 하지만 뇌에서 실제로 알파파동이 일어난 것은 그들에게 “당신 눈들 사이 공간을 마음으로 그려볼 수 있는가?”라고 물어본 뒤였다.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물어보았다. “당신 눈들 사이 공간을 마음으로 그려볼 수 있는가?” 그러자 그들의 뇌에서도 알파파동이 일어났다. 몇 차례 실험을 통하여 페미가 ‘열린 집중’(open focused attention)이라고 이름붙인 것의 효과가 입증되었다. 열쇠는 공간(또는 고요, 침묵 등)에 마음을 모으고 대상 없는 집중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
좁혀진 눈길은 우리의 몸-마음 전체에 영향을 미친다. 중요한 계획을 세우거나 다음 식사 메뉴를 정하거나 무엇을 판단하거나 다가오는 마감기일에 대비하거나 그럴 때 우리의 좁혀진 눈길은 뇌에서 빠른 파동(베타파동)을 일으킨다. 그러면 근육이 긴장하고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과 아드레날린의 분비가 증가된다. 닥친 일을 감당하기 위하여 몸과 마음을 이런 상태로 오래 유지하면 결국 몸의 건강을 해치고 정신도 맑게 열어놓을 수 없다.
반면에 널리 열린 눈길은 뇌에 휴식을 준다. 이어지는 정보들―과거에 대한 기억, 미래에 대한 계획, 기타 복잡한 생각들―이 일단 멈춰지면 뇌의 파장이 느려지면서 알파파동으로 내려간다. 근육이 이완되고 스트레스 호르몬의 분비가 줄고 혈액순환이 재조정된다. 싸우기-아니면-도망하기의 반응을 더 이상 보이지 않고 몸과 마음이 깨어나 민감해지고 열리고 편안해진다.
당신은 별들 총총한 밤하늘, 해뜨기 직전 새벽의 고요, 밤새 쌓인 눈으로 하얗게 덮인 들판을 바라보며 열린 마음의 알아차림이 어떤 건지를 경험해봤을 것이다. 우리는 몸과 마음으로 그런 순간들에 공명(共鳴)한다. 그것들이 우리의 참-자아에 우리를 연결시켜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별들이 반짝이는 밤하늘에서 자기 존재의 깊이를, 그 고요와 적막에서 자기 존재의 신비를, 감지한다. 바로 이 대상 없는 알아차림(objectless awareness)의 순간들 안에서 말없는 귀향(homecoming), 순수존재(pure being)의 실현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내면의 공간 탐색
나는 아들 나라얀과 함께 아이맥스 필름 ‘우주 항해’(Cosmic Voyage)를 관람하던 날 ‘내면의 공간’(innate space)을 알아보았다. 우리는 로켓을 타고 우주 공간으로 발사되어 태양계를 뚫고 은하수를 넘어 관찰 가능한 우주의 가장자리까지 날아갔다. 우리의 잣대로 가장 가까운 은하계 안드로메다에서 여기까지 거리가 2백 4십만 광년(光年)이다. 우리가 그것을 볼 때는 거기서 나온 빛이 우리를 향해 초속 18만 6천 마일로 2백 4십만 년을 달려온 뒤다. 게다가 우리의 이웃 은하계들 너머에는 약 8백억 개의 은하계들이 상상을 초월한 거리를 사이에 두고 펼쳐져 있다.
그러다가 필름은 우리를 지구로 데려와서 물 한 방울을 통과하며 망원경을 현미경으로 바꾼다. 그리하여 무수한 소립자들의 경계를 넘고 넘어 한 알의 쿼크에 도달한다.
우리는 내면의 공간이 엄청나게 넓고 텅 비어있음을 알면서도 우리 몸에 익숙한 이 세계를 견고한 무엇으로 인식한다. 하지만 우리 몸을 이루고 있는 원자들의 99.99퍼센트가 텅 비어있는 공간이다. 원자들 사이의 간격과 원자들 내부의 공간이 우리를,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가 그렇듯이, 하나의 텅 빈 허공으로 만들어준다.
나는 우리 내면의 공간이 외부의 우주공간을 거꾸로 보는 것과 같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 뒤로 나는 자기 몸에 마음을 모으는 것이, 그리하여 자기 내면의 공간을 의도적으로 감지하는 것이, 습관적인 성향(orientation)을 무너뜨린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와 남, 여기와 저기, 이때와 그때… 이 모든 것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내부와 외부도 마찬가지다. 바깥 우주의 무한 크기와 내면의 무한 깊이를 감지할 때 우리는 끊임없이 깨어있는 공간(continuous awake space) 속으로, 광대무변의 옹근 알아차림(vast undivided awareness) 속으로 녹아드는 자기를 경험한다.
뒷걸음질
나는 ‘실존’―소리와 생각과 몸과 나무들의 거대한 춤판―을 앞면으로 보고 알아차림을 그 뒷면으로 보는 게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다. 선가(禪家)에서는 실존의 앞면에 대한 집중을 거두고 돌이켜 순수존재 안에서 쉬는 것을 ‘뒷걸음질’(backward step)이라고 부른다.
생각이나 감정적 반응에서 벗어나 여기 있는 현존을 기억할 때마다 우리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선다. 스스로 만든 이야기들에서 깨어나 본연의 고요한 알아차림에 다시 연결되면, 대상들―소리, 사물, 감각, 생각 등―에 집중되어 좁혀진 눈길이 돌이켜 모든 것을 거기 있게 하는 공간 쪽으로 열리면, 그러면 우리는 뒷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이다. 더 이상 발 디딜 곳이 없을 때 우리는 이 깨달음에 이른다. 다른 무엇이 아니다. 우리는 알아차림 자체의 고요와 광대무변으로 들어가 거기에서 휴식한다.
당신은 언제든지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이 살아있는 세계를 받아들일 수 있다. 당신 감각을 활짝 열고서 존재하는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거기 있게 하라. 끊임없이 바뀌는 소리와 감각들을 바라볼 때도 그것들 밑에서 고요히 흐르는 알아차림을 함께 바라보라. 당신 자신의 현존을 의식하라는 얘기다. 당신 앞에서 계속되는 삶의 온갖 경험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며 아울러 그것들 뒷면의 깨어있는 내적 고요를 느끼는 거다. 그리고 그 깨어있는 알아차림으로 존재하라(be)! 당신은 어떻게든지 내면의 알아차림과 끊임없이 접속하면서 이 세상 온갖 경험들이 당신을 관통하여 어떻게 지속되는지 느낄 수 있는가? 그러면 당신은 새가 뚫고서 날아가는 하늘이다. 이 경계 없는 현존이 티베트의 짧은 경구(警句)에 담겨있다.
오로지 깨어있음, 활짝 열려있는 감각들.
오로지 열려있음, 어디에도 달라붙지 않는 알아차림.
알아차림의 세 가지 질(質)
싯다르타 고타마가 보리수나무 아래 앉았을 때, 그의 서원(誓願)은 자기 참 본성을 깨닫는 것이었다. 그의 깊은 관심은 진실을 깨닫는 데 있었다. “나는 누구인가?” 그리고 “무엇이 실재인가?” 이런 질문들이 그로 하여금 자기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게 했고 그의 알아차림에 한 줄기 빛을 비추었다.
다양한 선문답에서 보듯이, 이런 종류의 탐색은 분석적이거나 이론적인 해명이 아니다. 한 수도승이 수도원장에게 묻는다. “우리가 죽으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존경받는 수도원장이 답한다. “모른다.” 실망한 수도승이 말한다. “우리는 스님이 고명한 선승(禪僧)인 줄 알고 있는데요.” 노승이 답한다. “그렇다, 그래도 난 죽은 자가 아니다!” 가장 강력한 질문들은 우리 눈길을 지금 여기 이 순간으로 향하게 한다.
자기-탐색을 수련하기 위하여 우리는 마음(머리)을 잠재우고 묻는다. “나는 누구인가?” “지금 누가 깨어서 알고 있는 건가?” 또는 “누가 이 말을 듣는 건가?” 그러고는 무엇이 진실인지를 알기 위해서 조용히 물러나 알아차림 속으로 들어간다. 마침내 우리는 이런 질문들에 마음(머리)이 아무 답도 주지 못한다는 걸 발견한다. 실제로 보고 느낄 수 있는 무엇이 없는 것이다. 요점은 그냥 보는 것, 그리하여 여기 있는 아무것도-아님(nothing-ness) 속으로 들어가는 데 있다. “나는 누구인가?” 이 질문은 질문하는 자의 존재를 해체시킨다.
하지만 그것은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것, 우리의 감정과 생각들의 온갖 형태들, 우리의 기억들 그리고 스스로 만든 이야기들을 본다. 존재하는 것들의 앞면에 눈길을 모은다. 그러면 어떤 느낌이 이어서 떠오를 것이다. 그래도 우리는 탐문을 계속한다. “이것을 느끼는 게 누구인가?” 또는 “누가 이것을 알고 있는 건가?” 이렇게 물을수록 그 위에서 대답할 기반이 사라지는 걸 우리는 발견한다. 마침내 이 질문들은 우리를 침묵으로 데려간다. 더 이상 뒤로 물러설 데가 없다. 드디어 묵묵부답, 입을 다물고 만다.
이 아무것도 아님(no-thing)에 대한 발견이 ‘위없는 봄’(the supreme seeing)이라고 티베트 불교는 가르친다. 그것은 알아차림의 첫 번째 질(質)인 비어있음(emptiness) 또는 열려있음(openness)을 드러내 보여준다. 알아차림 안에는 어떤 고형체(solidity)의 모양, 중심이나 변두리, 주인 또는 본디의 자아도 존재치 않는다.
하지만 우리의 조사연구는 ‘물성(物性)’(thing-ness)이 비어있어도 알아차림(awareness)―이어지는 앎의 광명(a luminosity of continual knowing)―은 깨어서 존재한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있다. 루미는 그것을 이렇게 표현한다. “너는 빛을 보고 있다, 그 자체의 영구(永久)한 눈으로.” 소리, 모양, 색깔, 감각들이 자동으로 인식된다. 온갖 경험들이 알아차림에 의하여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두 번째 질(質)인 깨어있음 또는 인식(cognizance)이다.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있게 하고 열린 깨어있음 안에서 휴식할 때 우리는 알아차림이 어떻게 온갖 꼴에 연결되는지를 본다. 사람, 상황, 감정 등 무엇이 마음에 떠오를 때 우리한테서 자동으로 따뜻하고 부드러운 반응이 나온다. 이것이 알아차림의 세 번째 질(質)인 조건 없는 사랑 또는 자비의 표출이다. 티베트 불교는 이것을 알아차림의 무한 능력이라고 부른다. 그 안에 기쁨과 감사 등 다른 많은 것들이 포함된다.
싯다르타는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았을 때 자기 본성의 아름다움과 선함을 깨달았고 그래서 해탈하였다. 우리 존재의 근본적 세 가지 질(質)―열려있음/비어있음, 깨어있음 그리고 사랑―은 언제나 여기에 있다. 참 도피처로 가는 많은 길들이 이것들한테서 나오고 이것들에 익숙하다. 우리는 깨어있어 부드럽고 따뜻한 알아차림이 우리가 스스로 만든 자아상보다 우리의 참 자아에 더 진실하다는 것을 차츰 깨닫게 된다. 우리는 “영성의 길을 가는 한 인간이라기보다 인간의 몸으로 자기를 찾아가는 영(靈)”이다. 이 진실을 이해하고 믿을 때 우리 인생이 점증되는 은총으로 충만해진다.
놀람의 아이가 되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묵상들 가운데 하나를 소개한다. 아름다운 안심을 나에게 심어주는 티베트 불교의 한 가르침이다. 그것은 알아차림의 도피처(refuge of awareness)에 대하여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가깝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심오하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쉽고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놀랍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가깝다]
오늘이, 바로 지금이, 당신한테 있는 전부라면 어떻겠는가? 스스로 지금의 중심에 이르러 당신 안에 있는 내면의 고요를 경험하도록 당신 자신을 놔둘 수 있는가? 당신 눈을 통해서 보고, 귀를 통해서 듣고, 몸을 통해서 감각하는 의식(consciousness)을 감지(感知)할 수 있는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알아차림이 더 가깝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심오하다]
스스로에게 물어보라, “나 지금 꿈꾸고 있는 건가?” 그리고 존재의 신비를 가리는 현실 이야기들에 당신이 사로잡혀 있는지 지켜보아라.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당신 생각들 밖으로 나와서 그것들 사이와 둘레의 공간을 감각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미지(未知)의 공간 안에서 당신 스스로 쉬도록 놔둘 수 있는가? 내적 공간의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깨어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알아차림이 더 심오하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쉽다]
수피 시인 하피즈는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천 가지 심각한 일들이 있고 그래서 성자들과 다른 거라고. 무엇을 계획하거나 통제하기를 그만두고 그냥 편안한 휴식에 당신을 초대하여라.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모든 것―소리, 모양, 색깔, 감각, 느낌 등―이 있는 그대로 거기 있게 하여라. 현존으로 돌아가서 참으로 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제로 경험해보아라. 언제나 그리고 이미 여기에 있는 깨어있는 열림을 당신은 감지할 수 있는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알아차림으로 돌아가는 것이 더 쉽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놀랍다]
알아차림은 우리 몸, 가슴, 마음의 감각을 통하여 제 본성을 경험한다. 알아차림이 당신 몸을 통하여 자신의 역동성과 창조성을 실현하고 있다는 사실을 지금 감지할 수 있는가? 당신 가슴을 통해서 그것의 경계 없는 사랑의 가능성이 실현되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는가? 그것이 당신 마음을 통해서 그 광대함과 밝음에 깨어나는 것을 감지할 수 있는가? 당신이 상상할 수 있는 것보다 몸과 가슴과 마음의 깨어남이 더 놀랍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
이 신비스러운 알아차림이 우리 자신을 포함한 모든 것을 통해서 창조하고 있음을 이해할 때 우리는 ‘놀람의 아이’(a child of wonder)가 된다. 그리하여 온 몸과 마음으로 삶에 참여하고 일과 놀이, 창조와 열정, 가족과 친구들에게 자기 자신을 아낌없이 내어준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에서 우리 자신의 영원한 본성을 기억한다. 이것이 우리로 하여금 받아들임과 조건 없는 사랑으로 이 세상을 살게 해준다.
몇 년 전만 해도 ‘놀람의 아이’는 내가 동경하는 하나의 아름다운 이상(理想)이지만 아직 그렇게 살 수는 없었다. 그런데 병을 앓으면서 뭔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다음 장(章)에서 그 내용을, 내가 경험한 참 도피처에 관한 이야기를, 독자들과 나누기로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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