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니 미첼'(Joni Mitchell)
자유분방한 영혼을 노래하는 음유시인, 아름다운 내면을 지닌 여성 싱어 송라이터 Joni Mitchell. 그녀는 결코 미인이라고 할 수 없는 외모를 지니고 있다. 툭 불거진 광대뼈에 상대적으로 홀쭉 들어가 그늘진 두 볼과 말괄량이 소녀의 트레이드마크처럼 여겨지는 주근깨, 억세고 강해 보이는 각 진 하관과 튀어나온 입술 등,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섹시함이라든지 청초함이라든지 하는 '여성적'인 매력은 그녀와 거리가 먼 요소다. 하지만 조니 미첼이라는 이 아티스트는 여느 여성 가수들이 감히 넘겨다볼 수 없는 탁월한 음악적 감성과 문학적 소양, 그리고 지적인 면모를 지닌 인물이다. 여성 아티스트로는 이례적으로 여러 뮤지션들로부터 존경받는 대중음악가(musician's musician)로서
아름다운 빛을 발하는 가수이자 작곡가, 연주가인 동시에 시인이자 화가이기도 한 다양한 예술적 재능의 소유자인 것이다. 사실 그녀의 음악은 초기의 담담한 어쿠스틱 포크 사운드에서 중반기의 퓨전 성향의 독특한 색채로
가득한 실험적인 재즈, 그리고 후기의 보다 대중적인 감성을 담은 음악에 이르기까지 그냥 쉽게 흘려 들을 수 있는 성질의 음악과는 거리가 먼 사운드를 표출해왔다. 잡티 하나 없이 맑고 거침없는 그녀의 목소리는 언뜻 듣기에 그다지 특색을 지니지 않은 평범한 여성
포크 싱어들의 그것으로 뭉뚱그려져 분류될 것도 같지만, 조금만 귀 기울여 듣는다면 그녀에게 '평범' 이라는 말이 얼마나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인지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음악에는 쉽게 범접할 수 없는 카리스마와 아름다운 영혼의 울림이 담겨 있다. 국내에서 조니 미첼이라는 가수의 위상은 그리 크게 자리매김 되어 있지 않다. 음악의 편식이 특히
심했던 국내의 매체나 방송 등을 통해서도 그녀의 음악은 소개되지 않았고 앨범 발매 또한 이루어 지지 않았었다. 초, 중기의 멋진 작품들 중에서 그나마 오래 전에 저가 CD로 발매된 앨범 [Blue](1971)만이 레코드 숍의 한 구석에서 먼지를 뒤집어쓴 채 자리하고 있는 것을 간혹 볼 수가 있었을 뿐이다. 팝 음악을 조금 깊이 듣는 이들 사이에서도 그녀에 관한 이야기는 거의 언급되지 않았다. 이는 그녀의
수많은 훌륭한 작품들을 생각할 때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긴 하지만, 깊이 생각할 것도 없이 곧 뻔한 답이 나온다. 조니 미첼의 음악은 우리나라 사람들 특유의 '예쁜 멜로디 지상주의' 취향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녀의 작품들이 메시지의 전달에 치중한 나머지 멜로디가 강조되지 않은 텁텁함으로 일관 한다든지 또는 사운드의 실험 자체만을 강조하고 있는가 하면 그 또한 천만의 말씀이다. 한때 어느 옷 광고에 쓰여 수없이 방송을 타며 큰 인기를 얻었던 (물론 그녀의 오리지널 버전은 아니 었지만) 'Both Sides, Now'를 비롯한 초기 작품들의 아름다운 멜로디는 어느 아티스트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수준과 완성도를 갖추고 있다. 그럼 무엇이 문제였을까? 비록 그녀의 음악이 높은 수준의 구성력과 완성도를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단숨에 귀에 들어오는 쉬운 멜로디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40년에 걸쳐 발표된 많은 작품들 중 쉽게 듣고 따라 흥얼거릴 수 있을 정도의 곡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 다는 점과 그녀가 독특하고 긴장감 넘치는 정적(靜的)인 분위기를 내뿜고 있다는 점은 조니 미첼의 음악이 이 땅에서 울려 퍼지는 데 가장 큰 방해 요소로 작용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겐 오히려 '가수'로서의 그녀의 이름보다는 주디 콜린스(Judy Collins)와 톰 러시(Tom
Rush), 크로스비 스틸스 내쉬 앤 영(Crosby Stills Nash & Young), 매튜스 서던 컴포트(Matthews Southern Comfort) 등이 불러 인기를 얻었던 'Both Sides, Now'와 'Woodstock', 'The Circle Game', 'Chelsea Morning' 등을 쓴 '작곡가'로서의 이미지로 더 친숙하다. 뛰어난 기타, 피아노 연주자 로서 장르를 초월한 수많은 뮤지션들과의 교류를 통해 자신 음악세계를 살찌워나간 조니 미첼의 음악 여정과 주요 작품들을 살펴보자. 조니 미첼은 1943년 캐나다 알버타주의 포트 맥레오드에서 로버타 존 앤더슨(Roberta Joan
Anderson)이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이미 일곱 살 때 부모를 졸라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던 조니는 음악 뿐아니라 그림에도 커다란 관심을 보였으며, 십대 시절에는 그녀가 살던 도시인 사스카툰의 커피하우스에서 우쿨렐레(ukulele; 기타와 비슷한 현악기)를 연주하며 가수로서의 꿈을 키웠다. 그녀는 고등학교 졸업 후 캘거리의 알버타 미술대학(Alberta College Of Art)에 입학했지만, 음악을 향한 애정은 학업을 넘어서고 있었다. 대학 생활은 1년으로 족했다. 캘거리의 '우울(Depression)'이라는 커피하우스에서 연주 활동을 시작 으로 본격적인 뮤지션으로서의 생활이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포크 싱어로서의 성공을 위해 당시 포크의 메카로 여겨지던 토론토로 이주한 조니는 클럽을 전전하며 연주 생활을 시작한다. 1965년, 그녀가 첫 번째 남편이 될 포크 싱어 척 미첼(Chuck Mitchell)을 만났을 때 그녀는 갓 태어난 어린 딸을 가진 미혼모였다. 하지만 척과의 결혼 후 그녀는 뮤지션으로서 성공하기를 원했고 정신적 으로나 물질적으로 아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았다. 아이를 입양시킨 이들은 함께 지역의 커피하우스와 포크 클럽 등에서 연주를 하다 그해 여름 디트로이트로 이주한다. 이들 부부는 순회 공연과 1966년의 뉴포트 포크 페스티벌(Newport Folk Festival)에 참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하지만 결혼 생활은 오래 가지 못했다. 1967년 초에 파경을 맞이한 조니에게 거칠 것은 없었다. 전(前) 남편의 성을 그대로 자신의 이름으로 간직한 채, 그녀는 뉴욕의 첼시 지역으로 진출하게 된다. 이전에 디트로이트에서 만났던 포크 가수 톰 러시와 주디 콜린스는 조니 미첼의 이름을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한 인물들이다. 특히 주디 콜린스의 1967년도 앨범 [Wildflowers]에 수록된 조니의 곡 'Michael From Mountains'와 'Both Sides, Now'는 작곡가로서의 조니 미첼의 입지를 확고히 해준 작품들이었다. 뉴욕에서 그녀는 점차로 작곡가와 매력적인 라이브 연주자로서 명성을 얻어간다. 그녀는 무대 위에서 어쿠스틱 기타와 덜시머(dulcimer; 세모꼴의 현(絃)이 달린 타악기의 일종)만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챈 영국 포크계의 대부라 할 수 있는 프로듀서 조 보이드 (Joe Boyd)는 그녀를 영국의 무대에 데뷔시키기도 한다. 영국에서 돌아온 조니는 플로리다주의 클럽에서 공연을 시작했는데, 그곳에서 그녀는 버즈(Byrds)의
리더였던 데이빗 크로스비(David Crosby)를 만난다. 둘은 곧 연인이 되었고, 데이빗의 소개로 '리프라 이즈(Reprise)' 레코드와 계약을 이룬 조니 미첼은 곧 데뷔 앨범 [Joni Mitchell (Song To A Seagull)] (1968)을 발표한다. 데이빗 크로스비의 프로듀스로 제작된 데뷔작은 전형적인 어쿠스틱 포크 사운드를 담고 있는 앨범이다. 대부분의 곡들은 조니의 맑은 목소리와 어쿠스틱 기타 사운드로 채색되어 있으며 사랑과 이별에 관한 노래들이 담담하게 펼쳐진다. 그녀의 그림 실력을 엿볼 수 있는 멋진 커버 아트와 마치 수채화를 연상케 하는 은은하고 섬세한 톤의 녹음이 돋보인다. 'Cactus Tree', 'I Had A King', 그리고 주디 콜린스가 먼저 취입했던 'Michael From Mountains'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앨범으로 매체와 평론가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은 그녀는 홀리스(Hollies)의 그레이엄 내쉬(Graham Nash)와 함께 마이애미 팝 페스티벌(Miami Pop Festival)에 참여하는 등 꾸준한 연주 활동을 하며 경험을 넓혀갔다. 그리고 이듬해인 1969년 5월, 그녀의 히트곡들 중 하나인 'Chelsea Morning'과 'Both Sides, Now'가 수록된 두 번째 앨범 [Clouds]가 발매된다. 이어 'Woodstock'과 'Big Yellow Taxi'가 담긴 [Ladies Of The Canyon](1970)과 명실공히 조니 미첼 최고의 걸작으로 꼽히는 [Blue](1971)가 발표되는 등 그녀는 음악적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앨범 [Blue]를 끝으로 '리프라이즈'를 떠난 그녀는 친구인 데이빗 게펜(David Geffen)의 레이블 '어사일럼(Asylum)'과 계약을 하고 1972년, 새로운 앨범 [For The Roses]를 발표한다. 이 앨범을 통해 조니는 음악적 진화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곳곳에 재즈적인 요소를 포함한 이 앨범을 통해 그녀는 더욱 쉽게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수 있었다. 전편에 걸쳐 흐르는 색소폰 사운드, 그리고 'Cold Blue Steel And Sweet Fire', 'Woman Of Heart And Mind', 'Blonde In The Bleachers' 등 탁월한 곡들은 이 앨범을 그녀 최고의 작품 중 하나로 자리하게 한다. 그레이엄 내쉬가 하모니카를 담당한 싱글 'You Turn Me on', 'I'm A Radio'는 미국 차트 30위를 기록
하며 커다란 상업적 성공을 거두었다. 이 즈음 조니는 자신의 음악적 성장을 도울 수 있는, 그녀의 독특한 리듬 라인과 기타 연주에 어울릴 수 있는 뮤지션을 찾고 있었다. 결국 그녀의 다음 앨범에서 함께 하게 될 연주자는 재즈 색소폰 주자인 톰 스코트(Tom Scott)와 그의 그룹 엘에이 익스프레스(LA Express)로 결정되었다. 그리고 1974년 1월, 그녀의 여섯 번째 앨범 [Court And Spark]가 발표된다. 톰 스코트와 엘에이 익스프레스는 물론 그레이엄 내쉬와 밴드(Band)의 리더인 로비 로버트슨(Robbie
Robertson)이 참여하여 연주를 들려준 이 앨범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조니 미첼은 대중들의 스타가 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앨범의 수록곡인 'Help Me'는 빌보드 차트 7위에 오르는 등 그녀 최대의 히트 싱글이 되었고 'People's Parties'는 그녀를 대표하는 곡으로 자리한다. 이 앨범은 조니 미첼의 음악적 분기점이 된 작품이기도 한데, 그녀 자신의 고유한 스타일과 결합한 음악은 다름 아닌 재즈였다. 그룹 엘에이 익스프레스와 함께 투어를 시작한 그녀는 그 해 말, 라이브 앨범 [Miles Of Aisles]를 발표
한다. 조니의 많은 히트곡들이 새로운 스타일로 연주되었는데 'Big Yellow Taxi'가 다시 한번 차트에 올라 오리지널 곡을 능가하는 인기를 얻었다. 그녀는 캘리포니아에 새 집을 사 엘에이 익스프레스의 드러머인 존 게린(John Guerin)과 동거 생활에
들어간다. 그 해의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고의 보컬과 편곡 상을 수상한 조니는 1975년, 전작의 멤버들 과 함께 새로운 앨범의 녹음에 들어갔다. 재즈와 리듬 앤 블루스, 그리고 월드뮤직의 요소를 담은 새 앨범 [The Hissing Of Summer Lawns]는 매체로부터 최악의 혹평을 받았다. 심지어 롤링스톤은 그 해 최악의 앨범으로 조니의 이 작품을 꼽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러한 평가와는 관계없이 이 앨범은 빌보드 앨범 차트 4위를 기록하는 등 대중적인 인기를 얻는다. 1976년 1월부터 시작된 엘에이 익스프레스와의 투어는 미국 전역과 캐나다를 포함하는 대규모의 공연 이었다. 투어가 끝날 즈음 그녀는 존 게린과의 관계를 끝내고 닐 영(Neil Young)과 가까이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조니 미첼의 여러 걸작 중 하나인 앨범 [Hejira]가 발매된다. 이 멋진 앨범이 발표되던 1976년 11월, 그녀는 밴드의 고별 콘서트에 참가한다. '라스트 왈츠(The Last Waltz)'로 이름 붙여진 이 공연은 록계의 거물급 아티스트들이 대거 참여했으며
'택시 드라이버(Taxi Driver)'의 감독 마틴 스콜세지(Martin Scorsese)에 의해 영화로 제작되었다. 조니 미첼은 기타를 메고 나와 닐 영과 함께 그의 곡 'Helpless'를 부른다(사운드 트랙에는 그녀의 'Coyote'가 포함되어 있다). 조니의 실험적인 시도는 계속된다. 1977년 12월에 발표된 더블 앨범 [Don Juan's Reckless Daughter]는 그녀의 극에 달한 실험성이 돋보이는 작품인데, 아프리카의 타악 리듬과 클래식의 요소를 차용하여 전례 없는 사운드를 완성시켰다. 앨범의 한 면을 차지하는 'Paprika Plains'는 대규모 오케스트레이션을 도입하여 화제가 되기도 했다. 전설적인 재즈 뮤지션 찰스 밍거스(Charles Mingus)는 이 곡에 매혹되어 그녀를 만났고 새로운 작품을
위한 공동 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1979년 1월, 찰스 밍거스가 세상을 떠남에 따라 조니는 홀로 작업을 완성해야 했다. 그녀는 자코 파스토리우스(Jaco Pastorius), 웨인 쇼터(Wayne Shorter), 그리고 허비 행콕(Herbie Hancock) 등 최고의 재즈 뮤지션들을 불러들여 앨범 1979년 6월, 완전한 재즈 앨범 [Mingus]를 완성한다.
찰스 밍거스에게 헌정된 이 앨범은 많은 평론가들로부터 격찬을 받기는 했지만 상업적인 성공을 거두 지는 못했다. 이 앨범 이후 조니는 팻 메스니(Pat Metheny), 자코 파스토리우스 등과 함께 새로운 투어를 행했고, 1980년 9월 발매된 라이브 앨범 [Shadows And Light]로 결실을 이룬다. 라이브로 연주되는 여러 재즈곡들은 보다 강력한 사운드를 담고 있으며 뮤지션들의 명성에 어울리는 뛰어난 연주력을 들려준다. 이 앨범 이후 조니는 새로이 '게펜(Geffen)' 레코드와 계약을 맺는다. 그리고 1982년 10월, '게펜'에서의 첫 앨범 [Wild Things Run Fast]가 발매된다. 팝과 재즈의 요소를 담은 이 앨범의 발표 후 그녀는 앨범에서 베이스를 연주하기도 했던 뮤지션 래리 클라인(Larry Klein)과 결혼을 했다. 토마스 돌비(Thomas Dolby)가 프로듀스 한 앨범 [Dog Eat Dog](1985)은 흔히 조니 미첼의 80년대 작품들 중 가장 뛰어난 앨범으로 꼽힌다. 하지만 사실 이 앨범은 많은 부분에서 1974년 작인 [Court And Spark]의 분위기를 답습했을 뿐, 새롭고 독창적인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했다. 한 인터뷰에서 그녀는 자신이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이래 음악적 재능이 빛을 잃게 되었다고 말하기도 했지만, 조니 미첼의 음악 활동은 계속된다. 1988년에 발표된 [Chalk Mark In A Rain Storm] 역시 호평을 받았으며, 1991년 작 [Night Ride
Home]을 통해 초기의 어쿠스틱 기타를 다시 연주하는 조니를 만날 수 있었다. 다음 앨범인 [Turbulent Indigo](1994)는 그녀의 후기 작품들 중 조니 미첼의 팬들을 가장 즐겁게 했던 앨범이다. 흔히 [Blue]나 [Court And Spark]에 비견될 정도로 완성도 높은 여러 곡들을 통해 그녀는 전성 시절로 돌아간 듯한 훌륭한 음악의 장을 펼쳐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Sex Kills'나 'Last Chance Lost' 등을 비롯한 여러 곡들이 고른 완성도를 보이는 이 앨범은 1995년
그래미 어워드에서 최고의 팝 앨범 상을 수상했다. 1996년에 '리프라이즈' 레코드는 조니 미첼의 대표곡들을 모은 두 장의 컴필레이션 [Hits]와 [Misses]를 발매한다. 그리고 2년 후, 그녀의 새로운 앨범 [Taming The Tiger]가 '리프라이즈'를 통해 발매되었다. 이후 재즈를 비롯한 다채로운 스타일을 담은 [Both Sides Now](2000)와 오케스트라와 함께 작업한 옛
히트곡을 담은 더블 앨범 [Travelogue](2002), 그리고 그녀의 변치 않은 음악적 역량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Shine](2007)을 발표했다.......... *(발췌... 이하 생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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