옥천 석호리 청풍정.== 夢山 여행기.
옥천, 대청호 주변 풍경은 언제 보아도 아름답다.
柔裕(유유)한 맑은 물은 굽이 굽이 휘돌아 흐르고
비단 강 금빛 모래밭은 내 어렸을 적에 뛰어놀던 섬진강변의 추억을 되새겨주는 풍경이다.
푸르름이 짙어가는 백토산 아래 진걸 선착장은 이따금 낚시를 즐기는 사람 외는
사람을 만나기 어려울 정도의 조용한 외딴 마을이다.
진걸 선착장에서 도로를 따라 볼거리 고개 방향으로 약 2km 걷다가 석호리라는 동리에 다다랐을 때
좌측 호수 쪽으로 고개를 돌리면 백토산에서 치달려 내려온 산과 잔잔한 호수가 만나는 언덕에
가야금 곡조에 시 한 수 읊으며 풍류를 즐기기 딱 좋은 곳에 예쁜 와정 한 채가 보인다.
바로 "청풍정"이라는 자그마한 정자다.
"청풍정" 기둥에 서서 물안개 피어오르는 대청호의 풍경은 언제 봐도 아름답다.
산수가 좋고 바람이 맑아 고려시대 때부터 조선 선비들까지 자주 찾던 곳이라고 전해진다.
이 아름다운 청풍정에 슬프도록 아름다운 러브 스토리가 전해 내려오고 있으니
때는 1884년(甲申)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역사적으로는 1874년 흥선대원군의 실각 후 1876년 일본과 강화도에서 병자 수호조약을 맺었다.
일본은 1875년 2월부터 군함을 이끌고 동해와 남해, 황해 등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게 된다.
이때 조선군의 선제 발포가 문제가 되어 1876년 2월 강화도에서
조일 수호 조규가 체결되면서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되고, 이때 부산과 북한에 있는 원산항도 개항되었다.
이후 위정척사파들의 시위는 격화됐고 1882년 임오군란으로 구식 군대 및 위정척사파의 추대를 받은
흥선대원군이 일시 집권했으나 명성황후 민비는 청나라 군사를 끌어들여 대원군을 실각시킨다.
이후 조선의 정치는 청나라로부터 속국으로 노골적인 간섭을 받기 시작한다.
불만은 고조되어 북학파의 신진 젊은 개화 당파들은 청나라의 오랜 속국 노릇과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야 된다고 주장한다.
(사실은 이 개화당파들 대부분이 일제 앞잡이들이며 그중 김옥균은 제일 파렴치인이다.
가장 친한파가 가장 친일자로 바뀌는 대표적인 인간이다.
따져 거슬러 올라가면 해방 이후 현재 우리 국사학계, 역사학계 거두 대부분 인간들이
모조리 친일파 매국노들이며 그 후손들도 마찬가지다)
1884년 초부터 김옥균, 서광범, 박영효, 서재필 등은 정변을 계획했고,
그해 7월부터 계획을 세워 12월 4일 정변을 일으켰다.
이른바 "갑신정변"이다.
김옥균 등은 우정국 개국 축하연 때 반대 세력을 모조리 제거하고 고종황제와 명성황후를 덕수궁으로 모신다.
명성황후 민씨는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 주둔군에 도움을 요청했고,
그 사이 명성황후는 넓은 창덕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김옥균 등은 소수의 병력으로 넓은 창덕궁을 지키기 어려움을 들어 반대하였으나
명성황후의 강력한 요구로 결국 창덕궁으로 환궁하게 된다.
12월 6일 젊은 개화 당파 일행이 국왕 내외를 대동하여 창덕궁으로 들어갔고,
그날 새벽 새로운 정권의 정강 정책을 결정하였으나,
오후 3시 원세개(袁世凱)가 이끄는 청나라의 군대 1,500명이
창덕궁을 기습함으로 신정권 3일 만에 진압이 되고 말았다.
홍영식, 박영교 등은 청나라군과 싸우다 전사했고, 김옥균, 서재필, 박영효 등은 인천을 거쳐 일본으로 망명했으며,
윤치호 등 몇몇 사람은 외국 유학 형식으로 망명하였다.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당시 이들의 나이가 21세에서 34세이니
젊은 혈기는 충천했지만 개혁을 위한 철저한 준비가 부족한 것이 원인이라는 학자들의 분석이다.
그래서 甲申政變을 3일 정변. 3일 천하라 칭하기도 한다.
정변으로 인해 결국 청국의 세력만 강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고.
조선과 일본은 사건 뒤처리를 위해 한성 조약을 체결하고, 청국과 일본 사이에는 텐진 조약이 체결되어
또다시 조선반도는 청나라와 일본의 세력다툼의 장이 되고 만다.
김옥균은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젊은 나이에 일본으로 망명했지만 일본 생활도 녹녹지 못했다.
푸대접을 받으면서 떠돌이 생활을 하던 그는 1894년 2월, 서양 유학파 홍종우의 유인으로 상하이로 건너간다.
1894. 3월 28일 상하이에 있는 호텔 동화 양행(東和洋行)에서
홍종우는 리볼버 권총으로 김옥균을 저격 암살.
결국 김옥균은 이국에서 파란만장했던 짧은 인생의 최후를 맞게 된다.
인면수심의 홍종우는 논할 가치도 없는 인물이지만
김옥균의 시체가 일본을 거쳐 경성으로 도착했을 때 한강변에서 시체의 목이 잘리고
사지를 분열하여 백성들에게 본보기가 되게 하라는 창덕궁의 하명이 내려졌다.
여기까지가 "갑신정변"의 요약이다.
일본 도쿄 아오야마에 있는 김옥균의 묘비에는 그 기막힌 삶의 글이 새겨져 있다.
비상한 재주를 갖고 抱非常之才
비상한 시대를 만나 遇非常之時
비상한 공적도 없이 無非常之功
비상한 죽음만 얻다 有非常之死
* '김옥균 비문' : 박영효의 글. 유길준이 썼다는 설도 있다
* 자료: 개화파 열전(신동준, 푸른 역사), 갑신정변 연구(박은숙, 역사비평사)
대청호의 맑은 수면에 어른거리는 청풍정에는 찾아오는 이 별로 없고
가끔 낚시꾼이나 우리 같은 도보족들이 스쳐가는 한적한 곳이다.
넓은 호수에는 물안개 피어나고 하늘에는 흰구름 두둥실 떠있어
고균(김옥균의 호)과 명월이의 애달픈 사랑노래만 구슬피 들리는 듯하다.
청풍정은 1790년경 참봉 김종경이 지은 정자로 1900년경 화재로 소실되어
옛터만 남아 있었던 것을 1995년 당시 옥천군에서 복원하였고
군수 유봉열 씨가 청풍정 현판 글씨를 썼서 달았다.
금강가의 절벽 위에 3칸 자리 작은 정자지만 방 1칸이 딸려있어
한겨울의 매서운 강바람에도 호반의 절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설계된 정자다.
작고 아담한 굴뚝 뒤로는 기암이 펼쳐져 있어
그곳에서 바라보는 廣湖는 물새 날고 연무가 피어오를 때면 금강의 절경도 천하에 일품이다.
대청호가 만들어져 담수가 되기 전에는 저 아래 맑은 금강물이 굽이쳤고
높은 바위 옆 청풍정 주변에는 물새 나는 천국이었다.
지금은 대청호로 인하여 물가에 인접해 있으니 예스러운 풍류도 멋도 모두 사라졌다.
갑신정변의 주역 김옥균이 정변이 3일 만에 실패로 돌아가자 바로 이 "청풍정"에 내려와 은둔생활을 한다.
경치도 아름답고, 물과 산과 바위가 조화를 이루어 가히 명승지라 할 수 있으며
피신처로는 가장 알맞은 곳이었다.
그는 한양에서 내려올 때 평소에 자신을 위하고 잘 따르던
기생 "명월"이와 함께 내려와 위안을 받으며 울분을 달래고 있었다.
젊고 총명한 고균(김옥균의 호)을 사모했던 명월은 지극정성으로 모신다.
혁명이 실패로 돌아갔으니 몸과 마음을 둘 곳이 없었으며
뜻을 같이 했던 동지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생사조차 확인할 길이 없었다.
고균의 얼굴에는 근심 빛이 떠나지 않았다.
마음은 불안하고 재기의 기회는 아득하고 하루가 다르게 나태해져 갔다.
어쨌든 명월이 입장에서는 꿈같은 세월이었다.
철저한 신분제도 아래 감히 넘볼 수 없는 분을 서방처럼 모시고 살다니..
그러나 눈치 빠른 명월이가 이러한 고균의 심정을 모를 리가 없었다.
어느 날 명월은 구균이 근처로 외유 중 중대한 결단을 내린다.
높은 뜻을 품은 분을 자기로 인한 자포자기를 참아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명월이는 짧은 글을 써서 청풍정 마루에 놓고 정자 옆 바위에서 20여 m 절벽 아래 푸른 금강수에 투신한다.
외유 중 돌아와 이 사실을 안 고군은 명월의 애절한 편지를 읽고 호수를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너마저 나를 버리다니...
한 때는 천하를 꿈꾸었던 고균의 두 눈에는 주루루 눈물이 흐른다,
명월의 유서에는
"한양에서 처음 대감님을 뵈올 때부터 사모하였습니다.
대감과 함께한 세월이 저의 일생에 없는 영화를 누려 광영이었습니다.
하여 대감께서 품은 원대한 뜻에 누가 되지 않고자 결단을 합니다.
나무라지 마시고 부디 마음을 다스려 품은 뜻을 이루시길 비옵니다."
자기로 말미암아 주색잡기에 빠져 선생이 품은 큰 뜻에 누를 끼칠까 봐 몹시 송구스럽게 생각한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었다.
고균은 명월의 시체를 거두어 양지바른 둔덕에 장를 치르고
청풍정 아래 바위 절벽에 ‘명월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
애슬펐던 두 사람은 가고 없지만 오직 바위에 새긴 세 글자만 선명하게 남아서 그 옛날을 전설로 전해 줄 뿐이다.
三日政變이 실패로 끝난 고균은 일본으로 피신했다고 배우기는 했는데
언제 이곳 청풍정에 와서 이런 스토리가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경치 좋은 곳 작은 정자에 이런 이야기가 구전되어 내려온다면
사실이든 아니든 여행객들은 재미있어 애교로 봐줄만하지 않는가.
기녀 명월과의 사랑이야기도 애틋하지만.
고균의 부인 유씨와 딸 얘기는 전설이 아닌 사실로 전해 오고 있다.
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위태로움을 느낀 유씨 부인은 일곱 살 난 딸을 데리고
친정 집안과 인연이 있던 이 고장으로 피신하게 됐다.
그런데 동네 사람의 밀고로 옥천 관아에 잡혀 들어가 노비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행히 그녀의 주인이 된 고을 아전 정씨는 유씨 부인 친정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
후한 대접을 받으며 4년여 동안 평의 하게 살게 됐다.
그러나 정씨가 공금횡령죄로 가산을 몰수당하는 바람에 주인이 바뀌어
이번에는 영락없는 노비 신세가 되고 말았다.
당연히 일이 손에 익지 않은 유씨 부인은 거리로 쫓겨나는 신세가 돼 모진 고생을 하며 살았다.
유씨 부인은 이 사실을 수기로 밝혀놓았다.
(淸風亭感懷.청풍정감회) - (夢山 짓고 쓰다)
孤舟遠水煙夏日(고주원수연하일) : 외로운 배 멀리 물안개 피어오르는 여름날
客心愴然自生愁(객심창연자생수) : 나그네 마음 쓸쓸하여 수심 절로 이네.
鷺捉纖鱗心血自(로착섬린심혈자) : 해오라기 물고기 잡으려 심혈을 기우리는데
倚楹三日變悵返(의영삼일변창반) : 기둥에 기대서서 지난 정변 돌이켜 보네.
臺坐廣湖見煙霧(대좌광호견연무) : 대청에 앉아 물안개 자욱한 넓은 호수 바라보니
靑山與白雲鴨睡(청산여백운압수) : 푸른 산 흰 구름과 더불어 물오리 졸고있네.
去日古筠明月離(거일고균명월리) : 지난날에 옥균과 명월이는 떠나고 없으니
是勝景無人樂悲(시승경무인락비) : 좋은 경치 함께 즐길이 없어 그를 슬퍼하노라.
청풍정은 맑은 바람과 밝은 달을 마음껏 즐길 수 있는 운치가 느껴지는 정자다.
실록의 햇살을 받은 주변 산들은 대청호 물빛에 한 폭의 수채화 맛을 준다.
청풍정 기둥에 기대서서 불어오는 강바람에 시 한 수 지어 보았다.
일행은 벌써 저만치 꼬리가 가물 하다.
청풍정에서 여유롭게 호사도 누렸으니 발길을 재촉해야겠다... 한시는 2016. 5.25. 꿈의동산 짓고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