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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9.18.(수)
추석연휴3박4일간 아내와 함께 추억쌓기 여행을 떠난다.
경주일원과 양동마을-안동하회마을과 도산서원-울진금강송!
사진촬영 여행이다.
생전 처음 귀성객들에 섞여서 교통지옥 속으로 들어가본다.
9시 출발! 중부고속도로로 가다가 마장휴게소에서 처음 쉰다.
롯데마트가 시내보다 더 엄청나게 크다.
아내가 특히 좋아하는 햇사레복숭아 세 개가 9900원!
잠시 망설이는 아내를 위해 선뜻 사니 너무도 맛있게 먹었다. 오랜만에 제대로 된 감곡털복숭아였다.
이번 여행 매우 즐거울 것같은 예감이다.
다시 출발, 영동고속도로로 올라타서 가다가 중부내륙고속도로로 갔어야 경주로 가는 최단거리였을 것같은데....
덜 떨어진 내비 덕에 결국 경부고속도로로 빙? 돌아 들어서게 된다. 다행히 죽암휴게소에서 먹은 점심메뉴 덕에 행복했다. 왕갈비탕과 산채비빔밥!
다시 들어선 도로, 밀린다! 아예 마음 비우고 느긋이 달렸다.
오후 4시반쯤에 호텔에 닿았으니 휴게소시간 빼면 6시간 반 걸렸나싶다?
예상보다 2시간 초과면 그런대로 양호한 편일 것.
경주톨게이트 벗어나는데 통행료 15000원!
경주시내 첫? 인상이 단정하고 품격이 느껴지는 이유?
술집같은 유흥업소가 별로 안보이는 것같은데...그것 때문?
스위스로젠호텔로 우선 찾아 들어간다.
인터넷에서 호텔예약사이트를 뒤지다가
아고다닷컴을 발견하고 거기서 예약한 이 호텔 방, 크기가 조금 작지만 말할 수없이 깨끗하고 삼빡하다.
1층 후론트도 깔끔하고 데스크 직원도 친절하고 예의바르다.
낼아침 식사는 8시부터9시반까지. 정보도 미리 확인.
아고다닷컴에서 예약해 본 경험이 없어서 내심 불안했지만
외국인들 겨냥한 싸이트라니 그냥 믿기로 했는데,
그래선지 제법 마음에 들어 흡족!
짐을 풀고나서 시내 야경에 나서기로 한다.
안압지 야경이 그렇게 뛰어나다 하니 안 볼 수가 있나. 돌아오는 길에 먹을 저녁식사 장소도 눈여겨 봐두어야 할 것이고...그런데,
추석연휴 중이라서 음식점이 모두 쉴 걸 예상 못해 결국 상당히 애를 먹고나서야 겨우 저녁식사를 해결할 수 있었다.
보문호수를 돌아나가면서 찍은 사진.
여행 첫날저녁의 해가 서서히 지고 있다.
그러고보니 까마득한 옛날에 여기 왔던 적이 있다.
동양방송이 광고공사에 흡수합병될 때쯤 진해벚꽃 구경 단체로 갔다가 해인사까지만 함께 하고, 내친 김에 팀에서 이탈해 개인일정으로 이곳 경주코오롱호텔에 묵었던 거 말이다.
1983년일 텐데 영주,영은이 둘? 다 데리고 왔던 것 같지는 않은데...따로 떼어맡기지도 않았을 것이고.
그럼 둘 다 데리고? 얼마나 부산스럽고 정신 없었을까?
여행 좋아하는 아내와 난 늘 그렇게 여행을 다녔었는데, 나이 예순다섯, 이제사 참으로 홀가분한 여행을 즐기게되는구나.
안압지는 [임해전지]라는 이름으로 불린다.
신라 문무왕 14년(674)에 큰 연못을 파고
못 가운데 3개의 섬과 북쪽과 동쪽으로는 12개봉우리를 만들었는데, 이것은 동양의 신선사상을 배경으로 삼신산과 무산십이봉을 상징한 신라원지의 대표적인 것.
못가에 임해전과 여러 부속 건물을 만들어 왕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사용하면서,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이 못을 바라보면서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라 한다.
931년 경순왕이 고려태조 왕건을 위해 잔치를 베풀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군신들의 연회나 귀빈 접대장소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낮도 좋겠지만 야경이 그야말로 황홀한 정경을 만들어낸다.
명불허전(名不虛傳)!
입장료 2인에 3000원.주차비는 웬일로 없었던 거 같다.
줬나? 긴 운전 탓인지 좀 피곤하다.
이곳을 시작으로 이곳저곳 다닐 때마다 모든 곳에서 입장료 외에 주차비를 따로 받았었는데, 이곳만 기억이 안 나네.
어떤 곳은 2,000원 어떤 곳은 1,000원.
서울과 달리 땅이 널찍널찍하다. 특히 황룡사지엘 가서는 그 넓이에 너무 놀랬다. 그것도 온통 코스모스 천지.....
추석전날 저녁이어선지 밥집 문 닫은 곳 천지다.
한참 헤매다가 [조가네떡갈비쌈밥] 겨우 찾았다.
2인분 26,000원!
비싸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불고기인지 떡갈비인지와 쌈밥.
된장찌게가 그런대로 좋았다.
죽암휴게소 왕갈비탕의 대박 감동이 아직도 가시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스위스로젠으로 들어가기 전에
24시편의점에서 생수,맥주를 비롯해서 이것저것 20,800원어치나 사들고 들어가 조촐한 파티를 연다.
올해 담근 매실즙 가져오길 잘 했다. 소주와 섞으니 좋~다!
아침 식사까지 호텔방에서 해결하고나서
9시 경에 시내관광 출발.
엊저녁에 찾다가 어두워 끝내 못찾은 최씨고택부터 다시 찾아나선다. 국립경주박물관 옆길로 들어서서 얼마 안 되는 곳.
최씨고택은
경주최씨의 종가로 1700년경에 건립되었다고 한다.
최씨 집안이 내남면 이조리에서 교동으로 이주하여 정착한 것은 조선 중기. 이곳에서 12대 동안 만석지기 재산을 지켰고, 학문에도 힘써 9대에 걸쳐 진사를 배출하였다.
경주최부자집엔 6然이라는 것이 있다.
'六然-육연'이란 修身의 가훈이다.
自處超然 자처초연: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對人靄然 대인애연:
남에게는 온화하게 대하며....아지랑이 '애'다.
無事澄然 무사징연:
일이 없을 때는 맑게 지내며...맑을 '징'이다.
有事敢然 유사감연 :
유사시에는 용감하게 대처하고
得意澹然 득의담연 :
뜻을 얻었을 때는 담담하게 행동하며...담박할 담
失意泰然 실의태연 :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하게 행동하라....는 뜻.
9대 진사와 12대 만석꾼을 배출한 재력가인 경주 최부잣집에선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말라.
재산은 만석 이상은 모으지 말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사방 백리 안에 굶어 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등등
200년 전통의 가훈이 있는데, 이것이
아마 6훈(6訓)일 것이다.
참 거룩한 집안이다. 존경스럽다. 그리고 부끄럽다.
모름지기 한 세상 태어나서 이렇게 거룩하게 살아보아야 하는 건데...자세한 건 나중에 사진과 대조해 보기로 하고,
최씨고택을 나와서
마을 안쪽으로 차를 천천히 몰면서 구석구석 살펴보았는데
향교와 계림숲을 지나쳤나보다.
아내의 다리 컨디션에 맞춰서 다니는 게 이젠 습관처럼 되었다.
서로 다르고 맞지 않는 걸 탓하지만 말고 모든 걸 받아들이고 이해하고 모자른 건 서로 채우면서 사는 게 진정 사랑이고, 그게 행복으로 가는 지름길일 것이다.
똑똑한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얘기한다. 아는 것과 실천하는 것이 다르긴 하지만! 늘 흉내만 내었지만 늙으막에 겨우 몸에 좀 익은 것 같다.
최씨고택이 있는 이곳 교촌마을은
경주 중심부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마을 동쪽은 남천과 남산, 북쪽은 대릉원과 마주하고 있는데,
계림과 고분군, 향교와 울창한 숲, 고가들이 즐비하여 역사의 향기가 그득한 곳이다.
고택을 나와서 차로 마을 전체와 월정교를 먼발치로 바라보면서 사진만 찍는다.
다음은 황남동 대릉원(大陵苑)이다.
경주시내 황남동 일대에 분포되어 있는 신라초기의 무덤들로 일부는 대릉원 구역안에 있다.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일련번호 90~114,151~155호인 원형으로 흙을 쌓아 올린 30기의 무덤이다.
이 고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조성한 신라 사적공원이다.
직경 10m 미만에서 120m까지, 높이 1m 미만에서 23m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이 사적공원 안의 고분들은 삼국시대 신라의 왕과 귀족들의 능묘로 추정되고 있으며, 외형상으로는 대부분 원형토분으로 되어 있으나, 표형분고분이라고 하는 부부 합장용의 쌍분도 있고, 내부구조는 몇몇 고분의 발굴 결과, 신라 특유의 적석목과분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경내에는 미추왕릉과 천마총, 쌍분인 황남대총 등이 있다. 특히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발굴조사 결과 신라 적석목곽분 가운데서도 특색있는 내부구조를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금관을 비롯하여 각종 금은제 장신구와 무기, 마구 등 호화찬란한 수많은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문화의 우수성을 국내외에 입증한 바 있다. 천마총은 공개시설을 갖추고 내부구조와 유물의 출토상황을 그대로 복원하여 발굴당시의 모습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으며, 황남대총은 외형을 원형 그대로 복원하였다.
한낮의 날씨 아직 뜨겁지만 높고 푸른 하늘은 완연한 가을이다.
청마 유치환의 입추 시 한 수 읊고 간다.
이제 가을은 먼 콩밭짬에 오다
콩밭 넘어 하늘이 한걸음 물러 푸르르고
푸른 콩잎에 어쩌지 못할 노오란 바람이 일다
쨍이 한 마리 바람에 흘러흘러 지붕 너머로 가고
땅에 그림자 모두 다소곤히 근심에 어리이다
밤이면 슬기론 제비의 하마 치울 꿈자리 내 맘에 스미고
내 마음 이미 모든 것을 잃을 예비 되었노니
가을은 이제 머언 콩밭짬에 오다
올가을 스탠포드 경영특강! 그동안 심혈을 기울여온 작업!
그동안 수고와 노력도 많이 했고, 온라인샵 네 곳에 상품정보가 모두 잘 올려졌고, 모든 교수들에게 광고 많이 많이 보내고 있으니까....무엇보다도 기도까지도 열심히 해오고 있으니....허황되게 복권 같은 거 당첨 시켜달라는 것도 아니고, 정말 유익하고 좋은 상품 광고 낸 거 모두들 빠짐없이 읽어보고 관심 가져달라는 거니까....왠만하면 !
지난 8년간 대박까진 못 되도 중박쯤 터뜨린 경험이 있는 바로 그 상품의 '신간'이니까...아주 허황된 거 아니잖아?
다음엔 양동마을이다.
경주시 강동면 양동리 94.
이곳은 조선시대 전통문화와 자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한국 최대 규모의 마을로, 월성 손씨와 여강 이씨에 의해 형성되었다.
국보, 보물, 민속 자료 등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어 마을 전체가 문화재로 지정되었다는데,
국보와 보물을 일일이 확인하지 못하고 돌아온 거 같아 조금 아쉬운 듯하지만 이번 여행의 주목적은 아내의 수채화 소재를 얻기 위한 사진촬영이 주목적이므로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흡족하다.
우와! 사방에 연꽃천지다!
세상에! 벼르고 벼르던 연꽃세상을 이렇게 쉽게 이곳에서 만나보다니 이런 호사가 있나.
엊저녁 안압지에서도 연꽃을 보긴 했지만 밤이기도 하고 서울과는 비교도 안될만큼 깨끗한 시내공기였지만 그래도 시내라고 매연 탓인지 연꽃상태가 좋질 않아 다소 아쉬웠는데, 이곳에서 지천으로 피어있는 연꽃세상을 운좋게 만난다.
연잎밥 재료도 되고, 그외에 연뿌리와 분말을 이용한 상품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재배하는 것이라니 당연한 일이겠다.
흙담길을 지나다 담장옆 감나무에 매달린 감이 제법 무르익어가는 것도 보인다.
여기서 양동마을의 역사공부 좀 하고간다.
경상북도 경주시 강동면에 있는 양동리(良洞里)는 예로부터 양좌동(良佐洞)이라 하엿는데, 조선시대의 가장 대표적인 동족(同族) 부탁이요, 전형적인 양반(兩班) 마을로서 안동에 있는 하회(河回)마을과 함께 마을 전체가 1984년에 국가 지정 문화재(중요 민속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어 전국적으로 널리 알려진 곳이다.
양동에 언제부터 마을이 형성되어 사람이 살아왔는지는 아직 자세히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마을의 안산(案山)인 성주봉(聖主峰) 정상부근의 구릉지에 100여 기(基)에 달하는 석관묘(石棺墓)가 있었다는 사실이 근년에 와서 알려진 바 있고, 또 이웃마을 인동리(仁洞里)와 지금은 안계 댐 공사로 수몰지구가 되어버린 안계리(安溪里)의 심방골[深洞] 입구에 커다란 고분군(古墳群)이 있었던 사실로 미루어 보면, 이미 4∼5세기경에는 상당한 세력을 가진 족장(族長)급에 속하는 유력자들이 양동을 중심으로 살고 있었음이 분명하다. 또 한편 장터골[蔣基谷]과 세박골[細博谷]에서 토기조각과 기와 파편이 흔히 발견되는 것을 보면, 신라시대에는 장터골과 세박골을 포함한 돌고개(돌곡, 石峴) 일대에 마을이 형성되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양동은 원래 신라시대의 비화현(比火縣)에 속해 있던 한 마을이었다. 그러나 비화현이 통일 신라의 경덕왕 16년(757)에 그 이름이 안강현(安康縣)으로 바뀌면서 의창군(義昌郡, 興海)의 영현(領縣)이 되었다가 고려 현종 9년(1018)에 경주부의 속현(屬縣)이 되었으며, 공양왕 2년(1390)에 이르러 한때 독립된 현이 되기도 하였으나, 조선 태조 3년(1394)에 다시 경주부의 속현이 되었다. 이리하여 경주부 안강현 양좌동이 되었고, 이어 조선 중기 면리제(面里制)의 정비에 따라 안강현이 강동면(江東面) 강서면(江西面)으로 갈라지면서 드디어 양동은 경주부 강동면 앙좌동이 되었다. 그 후 고종 32년(1895)에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경주부가 경주군으로 바뀌면서 경주군 강동면 양좌동이 되었고,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비로소 현재와 같은 강동면 양동리가 되었는데, 당시의 양동은 300호 대촌(大村)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매우 큰 마을이었다.
양동은 뒤로 설창산(雪蒼山)의 종주봉(宗主峰)을 등지고, 앞으로는 성주봉(聖主峰)을 바라보면서 물(勿)자 형의 지세에 따라 물봉(勿峰), 내곡(內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으로 마을이 이루어져 있으며, 남쪽으로는 형산강(兄山江)이 신라 천년의 고도 경주를 감돌아 동해의 영일만으로 향하여 도도히 흐르고, 서쪽에는 10여리의 넓은 안강 평야를 끼고 죽장(竹長)·기계(杞溪) 방면에서 흘러오는 안락천(安樂川)이 있어 자연의 경관이 매우 수려하다.
양동 마을에는 신라 시대로부터 아산장씨(牙山蔣氏)가 살았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으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전설에 불과할 뿐 전혀 신빙성이 없다. 그러나 문헌에 의하면 양동 마을에는 고려 말기에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선생의 종5대조 이지언(李之彦)의 둘째 아들 광호(光浩)가 살았고, 흥해(興海)에 살고 있던 풍덕 류씨(豊德柳氏)인 만호(萬戶) 류복하(柳復河)가 광호의 아들 상도(尙道)의 사위가 되자, 그는 당시의 풍속에 따라 처가를 좇아 양동에 들어와서 상당한 부(富)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나 류복하의 처가는 그 이유는 알 수 없으나, 곧 흥해 쪽으로 옮겨가고 류씨 집만이 남아 마을을 지키고 살았다. 그런데 류복하에게는 아들은 없고 딸 하나만 있어 당시 청송부(靑松府) 안덕현(安德縣)에 살고 있던 월성 손씨(月城孫氏) 손사성(孫士晟, 1396∼1477)의 차남 손소(孫昭, 1433∼1484)에게 출가시켜 사위로 삼았다. 류복하는 그가 소유하고 있던 모든 재산을 사위에게 물려주었으므로 손소는 처가의 상속자로서 양동에 들어와 자리를 잡고 5남 3녀의 자녀를 두었다. 이 중에서 둘째 딸을 일찍이 영일(迎日) 옥동(玉洞, 현재 포항시 연일읍 우복리)에서 살다가 경주 이씨(慶州李氏) 이점(李點)의 사위가 되어 처가를 따라 경주 아리동(阿里洞, 현재 경주시 천군동)에 와서 살고 있던 여강 이씨(驪江李氏, 곧 驪州李氏) 훈련원 참군(訓練院參軍) 이수회(李壽會, 1431∼1518)의 장남 이번(李蕃, 1463~1500)에게 출가 시켰다. 손소의 사위가 된 이번도 역시 처가를 따라 양동에 옮겨와서 이곳에 터를 잡고 세거(世居)하기 시작하였는데, 이때는 15세기의 말기였다. 그러므로 양동은 여강 이씨→풍덕 류씨→월성 손씨→여강 이씨 순으로 입향(入鄕)했다고 할 수 있으며, 이로부터 손(孫)·이(李) 양성이 500년이 휠씬 넘는 오랜 세월을 서로 조화를 이루면서 대를 이어가며 연면(連綿)히 살아왔다.
양동 마을에는 손·이 양성이 살면서 큰 인물이 계속 배출 되었다. 우선 세조 13년(1467)에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워서 정충출기적개공신(精忠出氣敵愾攻臣)으로 계천군(雞川君)에 봉해진 양민공(襄敏公) 손소(孫昭)와 청백리(淸白吏)로서 벼슬이 이조판서(吏曹判書)에까지 오른 경절공(景節公) 우재(愚齋) 손중동(孫仲暾, 1463∼1529), 그리고 도학(道學)으로 유명한 문원공(文元公)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53) 선생을 들 수 있다. 이 중에서 특히 회재 선생은 당대에 가장 뛰어난 도학자인 동시에 벼슬이 의정부 좌찬성(左贊成)에 이른 훌륭한 정치가요, 경세사상가(經世思想家)이며, 또 풍부한 저술을 남겨 조선 성리학의 발달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므로 이학(理學)의 종장(宗匠)으로서 사림(士林)의 추앙을 받아 문묘종사(文廟從祀)의 최고 영예를 얻게 되고, 동방 5현(東方五賢)의 한 분으로 후세에 길이 숭앙(崇仰)을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후에도 손·이 양성에는 과거에 급제한 자가 속출하여 벼슬이 끊이지 않았다. 이제 우재와 회재 이후 과거 급제자의 수를 보면, 우선 손씨는 문과(文科) 5명, 생진과(生進科) 15명, 무과 5명을 내었는데, 이를 모두 합하면 문과 24명, 생진과 74명, 무과 10명이나 되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이씨의 문과 급제자 중 9명은 참의, 대사간, 도승지, 대사헌, 참판, 한성우윤 등 정3품 이상의 당상관(堂上官)이 되어 중앙 정계에서 이름 있는 고관으로 활약하였다.
한편 주로 생진과 급제자 중 손씨 6명과 이시 23명은 일천(逸瀳) 또는 음사(蔭仕)로 군수(郡守)·현감(縣監) 같은 수령(守令)이나 찰방(察訪)·판관(判官)·참봉(參奉) 등 낮은 벼슬에 임명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또 양동마을에는 오랜 세월 동안 문인 학자가 계속 배출되었다. 따라서 이들의 문집과 유고가 많이 남아 있는데, 문집은 이미 글을 모아서 책으로 간행한 것이고, 유고는 아직 원고만 남아 있는 것을 말한다. 이제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인원수를 보면 손씨는 문집을 남긴 이가 10명이고, 유고를 남긴 이가 29명이며, 이씨의 경우는 이미 문집이 출판된 이가 40명이나 되고, 아직 유고만을 남기고 있는 이가 57명에 이르고 있다.
여기 문집과 유고를 남긴 이 중에서 너무나 유명한 회재선생 같은 분은 물론이거니와 나머지 분들도 대개 문장과 경학(經學), 혹은 행검(行檢)으로 향중(鄕中)과 도내(道內) 유림의 학문 창달(暢達)고 교화(敎化)에 이바지 한 바가 많았다.
이제 양동은 영남의 대표적인 양반 마을인 동시에 손씨와 이씨가 어우러져서 이루어진 명문대촌(名門大村)으로 성장해 갔다. 양동이 이렇게 큰 마을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안락천을 끼고 마을이 서쪽 10여 리에 펼쳐진 안강평야가 마을을 지탱한 경제력의 바탕이 되어 주었기 때문이다. 수리시설이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아 벼농사를 지을 논이 매우 부족하던 당시에 물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 넓은 들판을 바로 옆에 두고 있는 양동 마을은 정말 복지촌(福祉村)이었다.
그러므로 양동 마을에는 차츰 중소 지주가 불어났으며, 그 중에서 몇몇 집은 천석군이라 불릴 만큼 적잖은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따라서 양동 사람들은 웬만하면 이 마을을 떠나지 않고 대를 이어가면서 살아가려 하였다. 주로 언덕과 골짜기로 이루어진 마을이 지세(地勢) 때문에 막대한 인력과 엄청난 경비를 들여가면서도 언덕을 깎아내고 터를 닦아서 집을 짓고 살아가는 동민의 호수(戶數)가 시대가 내려올수록 자꾸 불어나서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300호를 헤아리는 큰 마을이 된 것은 실로 우연한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다음엔 옥산서원으로 향하는데, 안강읍 옥산리다.
안강은 풍산금속이 소재하는 곳, 한화와 함께 다이너마이트 만드는 곳으로 나는 기억한다. 예전 이곳에서 근무했던 처남이 있어 진작 듣고 알지만 직접 와보긴 이번이 처음이다.
조선시대의 성리학자인 회재 이언적 선생을 제향하고 후진을 교육하기 위하여 조선 선조 5년에 설립되었으며, 그 이듬해에 임금이 서원이름을 내렸다고 한다.
독락당으로 간다.
옥산서원 뒤편에 있으며 회재 이언적이 조선 중종 27년에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지은 사랑채이다.
조선 중종 11년에 지은 안채에 부가하여 지었으며 일명 옥산정사라고도 한단다.
불국사로 간다.
751년 재상 김대성이 창건한 사찰로 1973년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하였다.
다보탑,석가탑,청운교,백운교,연화교 등 경내의 조형물들이 신라 불교 미술의 뛰어난 조형미를 보여주고 있다.
아내는 중학교때 수학여행을 경주로 왔다가 석굴암 미륵불상의 온화한 미소를 보고는 내내 다시 보고 싶어했었는데,
오늘 소원을 드디어 푼다.
첫댓글 아이고 !! 감사합니다. 참 행복한 여행이 넘 부럽습니다.
이힛~ 한참 망설이다 붙였는데....읽어주셔서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