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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파랑길 58코스
서촌삼거리-마상마을-감도마을-중촌이촌마을-소옥마을-이천마을-오천마을-가사리방조제
20220309
1.운두도의 가슴 아픈 전설과 여자만 풍경
여수 오동도호텔에서 하룻밤을 묵고서고 어제 남파랑길 57코스를 마친 서촌삼거리 앞 서촌버스정류소에 다시 왔다. 아침 8시 서촌들판에 부서지는 아침햇빛을 받으며 서촌들판길을 걸어 나갔다. 서촌들판에 나가서 서촌마을을 뒤돌아보니 아침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마을 풍경이 누추함이나 부족함 따위는 없이 오직 충만감으로 출렁이는 느낌을 준다. 발걸음이 가볍다. 아침의 신선한 기분은 출발의 희망처럼 언제나 삶을 새롭게 한다.
남파랑길 58코스는 거리와 시간을 줄일 수 있는 지점이 몇 곳이 있다. 그렇지만 그 단축은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하는 즐거움과 기쁨을 놓치게 된다. 어제 풍경의 절정 감상을 위해 남파랑길 57코스를 몇 차례 벗어나 걸었지만 오늘은 58코스를 남파랑길 정상 코스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서촌들판, 옥적들판, 마상들판, 감도해안, 중촌마을, 중촌-소옥 고개, 소옥마을, 이천마을, 이천-오천 고개, 오천마을을 한 곳도 우회하지 않고 길게 걸었다. 청매화 향기가 흐르는 여자만 해안, 봄까치꽃과 광대나물꽃이 무더기로 피어있는 들녘길에 노랑나비가 나풀거리는 소옥마을길, 이천마을에서 오천마을로 넘어가는 어지러운 고갯길을 차근차근 걸었다. 시간에 쫓겼지만 무거운 마음을 떨치고 현실과 상상의 즐거움을 누리며 혼자서 길을 걸었다. 오천에서 백초로 이어지는 해안뎈길에서 여자만 바다의 섬들과 여자도를 가늠하고 가사리방조제를 건너서 화양면 이천리에서 소라면 현천리로 넘어와 남파랑길 59코스 시작지점에서 아침부터 줄기차게 걸어온 58코스를 마치고 나니 긴 피로가 몰려온다. 그렇지만 이어서 남파랑길 59코스를 달려야 한다. 59코스 시작지점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오전에 걸어온 58코스를 뒤돌아보았다.
남파랑길 58코스의 빛나는 곳은 어디일까?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여자만 해안과 바다의 풍경은 아름답다. 바다를 향해 활짝 열려 있는 여자만이 곶(串)과 곶(串) 사이로 깊숙하게 들어와 드넓은 갯벌을 형성해 놓은 풍경은 여자만의 색다른 아름다움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내륙으로 파고드는 바다를 방조제로 막아 개척한 드넓은 매립지도 갯벌과 짝을 이루어 인간 삶의 풍경을 이야기한다. 서촌들판, 석교들판, 옥적들판, 마상들판에 인간의 노고가 이룬 광대한 풍경은 인간이 이룩한 장엄한 삶의 흔적이 아름답게 빛나는 풍경이라고 말하고 싶다.
그 각각의 아름다움을 인정하면서, 58코스 최고의 풍경은 어디일까? 운두도를 내다보는 이천리 해안이라고 감히 판단한다. 그 풍경을 감상하는 지점은 감도, 중촌마을 언덕, 이천마을 언덕, 오천해안뎈길에서일 것이다. 그 각자의 위치에 따라 감상의 포인트는 조금씩은 다르다. 여자만 앞 바다의 운두도 풍경이 서럽게 아름답다. 그 서러움은 인간 삶의 비극을 투영한 탓이다. 이곳 사람들에게 전해오는 운두도전설이 운두도에 비극의 아름다움을 색칠하였다.
인간을 생매장하는 순장 풍속과 고려장 풍속이 역사적으로 존재했으며 그것을 극복하는 인간의 분투도 빛난다. 가야국의 순장 풍속은 대가야의 멸망과 함께 사라졌다. 노인을 산 속에 내다버리는 고려장 풍속은 사라졌지만 어찌보면 오늘날에도 고려장과는 다르지만 유사한 문화적 행태로 이어져 내려오는 듯하다. 풍속은 시대의 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 풍속을 변화시키는 힘은 민중의 노력에 의해서 이루어졌음을 역사가 증명한다. 당대의 고통스런 풍속에 저항하는 방법은, 힘없는 서민들에게는 도피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운두도(雲斗島)에 그러한 저항의 비극이 서린 전설이 있다.
옛날 한 효자가 뭍에서 생활했는데, 그때 고려장이라는 풍습이 있어서 일정한 연령이 되면 부모를 생매장시켜야 했고 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큰 벌을 받게 되었다. 이 효자는 부친이 생매장할 나이가 되어 저녁에 지게에 부친을 지고 산 위로 올라가 생매장을 하려니 자식된 도리로서 도저히 생매장할 수 없어 그 길로 부친과 함께 운두도로 피신을 갔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마을 사람들은 운두도로 간 부자를 찾기 위해 배를 타고 갔지만 심한 풍랑과 구름이 덮여서 섬에 도달하지 못하고 중간에서 죽고 말았다. 그 뒤 뭍에서 이 섬을 볼 때 항상 구름에 덮여 있어 이 섬을 구름 雲 자, 말 斗 자를 써서 운두도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효자가 잘못된 풍속에 도전하여 운두도로 도피하고, 그 범법자를 찾으려고 운두도로 떠난 마을 사람들은 풍랑을 만나 죽게 된다. 전설은 대체로 주인공의 비극으로 끝나는데 반하여 반대자의 패배, 주인공의 승리 같은 느낌이 든다. 그렇다면 이 전설은 권력의 풍속 고려장에 동조하는 주민들의 입장에서 전해지는 것 같다. 마을 주민들이 패배하는 비극이 중심 이야기라고 보아야 할 것 같다. 즉 효자는 역적이요 패배해야 하지만 범법자 효자는 잡히지 않고 선의와 정의의 승리로 끝맺는다는 느낌이 든다.
효자의 아버지가 정말 승리한 것일까? 마을 사람들이 죽게 되었다면 효자와 아버지는 어떻게 되었을까? 그들의 뒷 얘기가 없다. 그들도 운두도에 들어가다가 성공하지 못하고 죽었을까? 아니면 권력이 동원되어 그들은 잡혀서 응징되었을까? 아니면 운두도에서 행복하게 살았을까? 뒷얘기를 해피엔딩으로 끝맺어 본다. 그들은 살아남아서 운두도에서 생활한다. 효자는 어버이를 잘 모시고 살다가 운좋게도 마음씨 고운 처녀를 만나 결혼한다. 효자는 여러 자식들을 두는데, 자식들이 성장하여 고려장을 폐지하는 역할을 한다. 그렇게 어버이, 아들, 그 자식들의 삶이 운두도와 연관되어 있다.
이천리 언덕에서 여자만 앞 운두도 섬들이 비극인 듯 환희인 듯 누워 있다. 소운두도와 자래섬은 효자와 그 어버이의 무덤처럼 비애의 삶을 산 흔적인 듯 서글픈 역사의 승리자인 듯 누워 있다. 길게 누운 대운두도가 효자의 아내와 그 후손들이 삶을 이끌어간 섬 같은 느낌이 든다. 그들의 행불행을 누가 감히 판단하랴. 구름이 낀 어둠의 섬, 안개가 피어나는 신비의 섬, 영롱한 햇빛에 반짝이는 투명한 섬, 우리들의 삶은 운두도의 구름과 안개와 햇빛처럼 짜여져 있다. 슬픔과 기쁨이, 행운과 비극이, 격랑의 파도와 물살 위를 스쳐오는 바람이, 운두도를 에워싸고 있다. 그 풍경에 아득해진다.
2.걸은 과정
건너편에 서촌마을 경로당이 있다.
그 옆에 남파랑길 58코스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맞은편에 서촌수퍼와 쉼터정자, 오른쪽 서이산 산줄기 아래 서촌교회가 보인다. 지방도 863번 화서로를 따라서 북쪽 석교마을 방향으로 진행하면 거리가 단축되지만 남파랑길은 서촌들판을 돌아서 석교마을 방향으로 진행한다.
안양산 방향으로 서촌들판을 빙 돌아서 다시 화서로와 만난다.
단축하고자 하면 마을 앞 화서로를 따라 오른쪽으로 진행하면 되지만 남파랑길을 따라 서촌들판 농로로 들어왔다.
안양산 기슭에서 왼쪽으로 꺾어 화양천을 따라 진행
화양천을 건너서 따라가다가 서촌들판을 빙 돌아서 화양천이 여자만 갯벌로 흘러드는 서촌2교에서 화서로와 만난다.
화양천 건너편에 세워져 있어서 자세히 살필 수는 없었지만 마을에 어떤 은혜를 베풀어 세운 비석 같다.
서이산 줄기를 등지고 동쪽을 향해 앉은 서촌마을이 아침햇빛에 반짝인다.
화동천이 여자만 갯벌로 흘러드는 하구, 여자만이 깊숙하게 들어와 갯벌을 형성하였다.
서촌들판을 빙 돌지 않고 58코스 시작지점에서 화서로를 따라오면 이곳에서 남파랑길에 합류한다.
조선시대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규모로 호국군마를 길렀던 목장이 곡화목장, 화양고등학교 앞에 목관비가 세워져 있다.
서촌마을에서 주로 재배하는 농작물이 완두콩인 듯. 일찍부터 아낙이 완두콩밭의 잡초를 뽑고 있다.
리아스식 해안의 특징이 그대로 나타나는 여자만이 서촌리 깊숙하게 들어와 드넓은 갯벌을 펼쳐 놓았다.
화서로가 여기서부터는 석교로로 명명된다. 이곳에서 석교로를 따라가지 않고 왼쪽 옥적수문로를 따라 진행
위쪽에 보이는 석교마을로 향하지 않고, 남파랑길은 왼쪽 다리를 건너 옥적수문 방향으로 진행한다.
남파랑길은 화양면 섬숲길과 동행한다.
이곳에서 400m 지점에 있는 카페와 음식점 광고판을 보며 그곳이 '옥적 물맞이골'이라는 것을 알았다.
여자만이 화양면 서촌리 깊숙하게 들어와 넓은 갯벌을 형성해 놓았다.
오른쪽 앞에 화양면 서촌리 대왕생돈까스집이 보인다. 이곳이 물맞이골인가 보다. 남파랑길은 옥적들판을 가로질러 중앙에서 오른쪽 태양광 집전판이 세워진 언덕을 넘어 마상마을로 내려간다.
대왕돈까스 옆에는 민박집과 닭 요릿집인 '옛날집' 상호가 붙어 있다.
오른쪽 옥적배수문 시설물이 보인다. 왼쪽 1/3 지점 태양광 집전판이 설치되어 있는 언덕을 넘어 마상마을로 내려간다.
맨 끝에 대옥마을이 보인다. 저곳에 폐교된 옥천초등학교를 활용한 예술인촌이 조성되어 있다. 남파랑길을 단축하고자 한다면 바로 대옥마을을 거쳐 소옥제로 올라서 남파랑길과 합류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감도마을의 아름다운 해안을 놓치게 된다. 그렇지 않고 옥적리의 예술인촌을 들르고 싶다면 대옥마을 위 소옥제를 지나면서 내려와서 본 뒤 되돌아가면 된다.
중앙의 언덕을 넘어 옥적리 마상마을로 넘어간다.
해안지역에서 염수에 의한 지하수 오염을 감시하는 관측 시설물이라 안내판에 적혀 있다.
남파랑길은 농토 개간 공사 중인 왼쪽 사잇길로 나가 마상승마장으로 이어진다.
역광이 되어 분명하지 않다. 왼쪽 뒤에 안양산, 오른쪽 뒤에 서이산, 그 사이로 여자만이 서촌리로 깊숙하게 파고들어 갯벌을 형성해 놓았다. 옥적들판을 가로질러 언덕으로 올라와 마상승마장 입구를 거쳐 이곳에 왔다.
마상(馬上)마을은 본래 ‘몰산개’라는 우리말 이름을 한자로 고쳐 부르게 된 이름으로, ‘몰’은 말(馬)의 고어(古語)이다. 곡화목장 시절 방목한 말을 몰이하여 잡았던 곳이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가까운 돌산읍 마상포마을의 본래 이름도 ‘몰산개’였다고 전해 온다. 마상마을 남쪽 해안에는 ‘기밀개’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기밀개’는 해안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구미포(九尾浦)’라고 표기하였다. 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농가 앞 나무가 특이하여 나무 앞으로 가까이 가서 살펴보았다.
수종이 무엇일까? 단단한 근골의 나무가 이상한 마력을 뿜어낸다. 알아보니 흔히 플라타너스 나무라고 하는 양버즘나무라고 한다. 껍질이 벗겨져 하얀 줄기를 드러내는 나무가 흔히 보는 플라타너스 나무인데, 이와 다른 것 같다.
법정리 명칭인 옥적리(玉笛里)가 아닌 행정마을인 마상리(馬上里)를 사용하고 있다. 마상리에 대한 애착일까?
마상마을 남쪽 해안에는 ‘기밀개’라는 작은 마을이 있는데 ‘기밀개’는 '해안가 마을'이라는 뜻으로 한자로는 ‘구미포(九尾浦)’라고 표기하였다. 석양과 어우러진 조용하고 한적한 어촌의 모습이 아름다운 곳이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왼쪽 언덕의 쏠레비치 펜션은 옥적리에 속하고 고개를 넘으면 화양면 이천리로 들어간다.
왼쪽 밭에서는 농부가 가문 옥수수밭에 물을 주고 있으며 마상들판 너머는 여자만, 쏠레비치펜션에서는 오른쪽 뒤에 펼쳐져 있는 감도항과 여자만을 조망할 수 있다.
이천리(利川里)의 이름은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으로 이대와 오천을 병합하여 이천이라 부르게 된 데서 유래하였다. 이천을 지나서 만나는 감도(坎道)마을은 몇 해 전부터 맛있는 가을 전어회로 전국적으로 유명해진 해변 마을이다. 전해 오는 옛 이름은 ‘감디’라 하였는데 ‘감’은 ‘물이나 길이 감아 도는 곳’을 뜻하며 ‘디’는 ‘~하는 곳’의 뜻으로 쓰이는 이 지역 지방의 사투리로 마을 앞 해안으로 바닷물이 감아 도는 곳이라 해서 지어진 땅이름이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감도'는 마을 앞 해안으로 바닷물이 감아 도는 곳이라는 뜻이라 한다. 아래에는 와우 펜션촌이 있다.
왼쪽으로 꺾어 감도해변으로 내려가 마을을 돌아 왼쪽 위 언덕을 넘어 맞은편 감도마을로 진행한다. 거리를 단축하고자 하면 옥천로를 따라가 감도마을을 돌아나오는 남파랑길과 합류하면 된다. 정상 코스를 따라 왼쪽으로 진행.
왼쪽에 방파제와 감도파출소가 있다. 여자만이 감도곶(串)을 빙 돌아 오른쪽 언덕 너머의 해안으로 이어진다. 남파랑길은 오른쪽 위 언덕을 넘어 마을을 지나 옥천로로 다시 올라온다.
멀리 맞은편은 순천만이 펼쳐져 있을 것이지만 흐릿하여 눈에 보이지 않는다.
오른쪽에 설치한 큰 바구니는 용도가 무엇일까? 속에 들어가 앉아 여자만의 해넘이를 감상하는 용도일까?
민박집에 아기자기한 것부터 기발한 것까지 여러 조형물들을 설치하였고 벽화도 있지만 자동차 때문에 감상할 수 없다.
인금이길을 따라왔다. 인금이는 무슨 뜻일까? 언덕 위에 쏠레비치펜션, 해안에 와우펜션촌이 보인다.
언덕을 넘어 건너편 감도마을로 진행. 이쪽을 남쪽 감도, 언덕 너머를 북쪽 감도라 생각하면 될 듯.
완두콩 밭에 아낙이 농약을 치고 있다.
맞은편 언덕의 마을은 중촌마을. 아래 해안마을은 북쪽 감도마을이라 이르면 될 듯.
오른쪽 맞은편은 화양면 이천마을, 중앙 맞은편은 오천마을, 왼쪽 건너편은 소라면 복산리 대곡해안이라 가늠한다.
건너편 옥천로의 감도교회 방향으로 진행
왼쪽 섬은 소운두도, 그 뒤 섬은 대운두도, 바다 가운데 작은 섬은 해섬(간도)이라 한다고 마을 아저씨가 알려 주신다.
언덕 너머의 남쪽 감도마을에서 북쪽 감도마을로 넘어왔다. 오른쪽 언덕에서 감상하는 해넘이풍경이 환상적일 듯.
남쪽 감도마을과 북쪽 감도마을을 거치지 않고 옥천로를 따라오면 이곳에서 남파랑길과 합류한다.
맞은편 중촌마을 언덕길로 진행. 거리를 단축하고자 하면 옥천로를 따라 이천마을로 향하면 된다. 정상 코스로 진행.
왼쪽 섬이 소운두도, 오른쪽 섬이 대운두도, 오른쪽 작은 섬은 해섬(간도), 맞은편 끝에 달천섬이 가늠된다.
중촌마을로 들어가 이천중촌길을 통하여 고개를 넘어 소옥제로 내려간다.
여자만의 감도곶(串) 감도마을(중앙 위쪽)과 오른쪽은 소운두도, 아래는 중촌마을이다.
왼쪽 감도곶(串)의 감도마을 방파제, 그 앞 섬은 소운두도, 그 오른쪽 섬은 대운두도, 아래는 중촌마을, 왼쪽 뒤는 여자도
왼쪽 소운두도와 오른쪽 대운두도, 대운두도 오른쪽 뒤 끝에 달천섬, 바다 오른쪽 앞의 작은 섬은 해섬(간도)이다. 여자도는 대운두도 뒤쪽에 있어서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달천섬에서 여자도 여객선이 운항되고 있다.
이 풍경을 조망하고 고개를 넘어 화양면 옥적리 소옥제로 내려갔다.
소옥제 둑방을 건너 왼쪽으로 올라간다.
폐교된 옥천초등학교를 활용한 여수 예술인촌이 바로 앞에 보인다. 맨 뒤에 서이산, 그 앞쪽에 여자만의 옥적방조제가 있다. 아침에 옥적수문에서 남파랑길을 따라 마상마을로 넘어갔지만, 거리를 단축하려면 바로 이곳으로 올라오면 된다.
화양면 옥적리 소옥마을을 거쳐 화양면 이천리 이천마을로 향한다.
맞은편 오른쪽 고개를 넘어 이천리 중촌마을에서 옥적리 이곳으로 내려왔다.
오른쪽에 태극기가 게양된 곳이 소옥마을회관이다. 양지 바른 소옥마을이 편안해 보인다.
옥적리(玉笛里)는 마상·신기·대옥·소옥·산전마을을 병합한 법정리 이름이자 신기와 소옥마을만을 칭하는 행정마을 이름이기도 하다. 곡화목장이 있던 조선시대에 여러 마을의 목동들이 모여들어 말거리산이라 불렀다. 산자락이 남서쪽으로 길게 뻗쳐 큰골과 작은골을 이루고, 이 산의 모양이 옥피리를 닮았다 하여 마을 이름을 옥적이라 하였다 전해 온다. 옥적마을의 유래와 함께 옥피리형 지세에 대한 풍수의 설명도 전해오는데, 옥피리형 지세는 자손들이 널리 이름을 떨치게 된다고 한다. 이런 신비한 힘을 가진 옥피리산의 동쪽 큰골짜기 마을은 대옥이라 하고 서쪽의 작은골 마을을 소옥이라고 한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맨 끝에 보이는 산은 서이산. 대옥마을과 소옥마을은 바다에서 들어온 내륙으로 주민의 주업은 농업이다.
맨 끝에 고개를 넘어 이천리 이천마을 방향으로 내려간다.
옥적리와 이천리의 경계를 이룬다. 오른쪽 58코스 종점방향이 아니라 붉은색 방향표시를 따라 왼쪽 이천마을로 내려간다.
왼쪽 뒤에 감도곶(串)과 감도마을, 오른쪽에 소운두도, 그 옆 작은 섬이 자래섬, 맨 오른쪽에 대운두도. "좁은 수로를 사이에 두고 대운두도와 소운두도 2개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주위에는 자래섬·간도 등이 산재해 있으며, 대운두도는 110m의 구릉으로 섬 중앙이 평탄하고 주변이 산지로 둘러싸여 있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소운두도와 그 옆 자래섬이 아버지와 효자의 무덤 같다. 이 모습은 고려장에 반대하는 운두도 전설의 내용을 증거하는 듯.
이곳에서 무턱대고 옥천로까지 내려가서 이화정(梨和亭), 이천마을 표석, 이천경로당을 보고서 남파랑길로 진행하였다.
왼쪽은 이화정(梨和亭), 오른쪽 건물은 이천경로당, 가운데 이천마을 표석이 세워져 있다. 남파랑길은 왼쪽 뒤 산을 넘어 오천마을로 내려간다.
이천(利川)마을은 이대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이대는 마을 앞에 있던 배나무가 꽃을 피우면 멀리서 바라볼 때 하얀 뭉게구름처럼 보여서 ‘구름 운(雲)’자와 ‘배나무 이(梨)’자를 써서 ‘운이대(雲梨大)’라고 부른 데서 유래되었다고 한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표석을 살피고 남파랑길과 합류하기 위해 지나쳤던 곳으로 되돌아가서 남파랑길을 정상코스로 진행한다.
이곳에서 꺾어 이대길 22-60로 진행했어야 하는데 지나쳐 옥천로까지 내려가는 실수를 범했다.
왼딴집이 있는 사잇길인 이대길 22-60로 통과하여 정면에 보이는 언덕을 넘어 오천마을로 내려간다.
감도마을, 중촌마을, 이천마을이 한 눈에 들어온다. 소운두도와 대운두도 사이에 있는 섬이 자래섬이라 한다. 소운두도와 자래섬은 아버지와 효자의 무덤처럼 바다에 누워 있다. 고려장에 반대하여 효자가 아버지를 모시고 운두도로 피신하였다고 하는 전설이 서려 있는 운두도가 애상감을 불러 일으킨다.
오천마을은 오동나무로 만든 통나무 샘이 있어 지어진 이름인데, ‘오동나무 오(梧)’자와 ‘내 천(川)’자를 써서 ‘오천’이라 하였다. 토박이말 이름은 오동나무의 다른 이름인 머구나무에서 유래한 ‘머구내’이다. 오천마을은 1789년의 『호구총수(戶口總數)』에도 오동천(梧桐川)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마을 주민들의 이야기로는 일제강점기까지도 오동나무 통으로 만들어진 샘이 있었으며 주변 마을에까지 좋은 물로 소문이 나 이 물로 병을 고치는 사람도 많았다고 한다.(디지털여수문화대전)
풀성골길을 따라 오천마을을 내려가면 옥천로에 이른다. 오천마을 길이름 '풀성골길'의 유래는 무엇일까?
정면 선거벽보 오른쪽에 오천리마을회관, 그 오른쪽에 오동각(梧桐閣)이 보인다. 남파랑길은 옥천로 횡단보도를 건너 맞은편 펜션단지 방향으로 진행
가사리방조제를 향하여 방파제 오른쪽 해안길을 따라 진행. 왼쪽 섬은 오도.
언덕에 펜션단지가 있는 여자만 이천리 오천마을 해안을 돌아 가사리방조제 방향으로 진행
맞은편 왼쪽에 감도곶(串)과 감도마을이 보인다. 소운두도 앞 섬은 해섬(간도), 대운두도 뒷섬은 자래섬.
건너편 왼쪽 섬은 달천섬으로 달천교로 육지와 이어져 있다. 달천섬에서 여자도 왕래 여객선을 운항하고 있다.
해안데크 800m를 따라 가사리방조제로 향한다.
59코스에서 걷게 될 여자만 해안, 맨 왼쪽에 달천도(섬달천, 달천섬)는 육지(뭍달천)와 달천교로 이어져 있다.
건너편은 여수시 소라면 복산리 여자만의 대곡해안, 59코스에서 걷게 된다.
왼쪽에 대운두도, 오른쪽에 섬달천, 그 사이에 대여자도와 소여자도가 흐릿하게 들어온다.
관기방조제라고 부르는 것을 섬숲길 이정목에서는 가사리방조제라고 표기하고 있다. 가사리방조제를 경계로 오른쪽은 화양면, 왼쪽은 소라면이다. 중앙에 우뚝 솟은 산은 안심산, 그 너머에 가막만의 소호동 해안이 펼쳐져 있다.
오른쪽에 가사리방조제, 맨 왼쪽 산봉은 국사봉
사회복지시설인 금강원이 여자만을 향하여 언덕에 세워져 있다. 이 언덕 오른쪽에는 펜션단지가 조성되어 있다.
오른쪽 끝에 있는 섬이 섬달천, 그 왼쪽 뒤에 여자도가 흐릿하게 들어온다.
관기방조제를 개명한 듯, 오른쪽에 안심산이 우뚝하다. 안심산 너머에는 가막만의 소호동 해변이 펼쳐져 있다.
화양면 이천리와 창무리의 경계를 이루는 듯.
소라면 현천리의 매립지 들판이 드넓게 펼쳐져 있다. 왼쪽에는 가사리생태습지, 오른쪽에 안심산이 솟아 있다.
건너펀은 화양면 창무리 소백초마을, 주민들은 백초와 오천을 합쳐 백천마을이라 이르는 듯.
소라면 현천리 가사리방조제 입구, 남파랑길 58코스 끝지점이다.
소라면 현천리 가사리 방조제 입구. 갯노을길 이정목에 남파랑길 59 시작점 표지판이 붙어 있다.
남파랑길 58코스 끝지점이자 59코스 시작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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