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25. 일요일, 인문학 공부를 하고 있는 그룹 팀들이 연천쪽으로 역사문화탐방 기행을 함께 가자고 연락이 왔다.
이 더위에 엄두가 안나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이런 좋은 기회를 놓치면 영영 다시 돌아오지 않을 시간인 거 같아서 나섰다.
대개 집을 나설때는 승용차를 가지고 나가야 편하기 때문에 편리한 이동에 젖어있는 내가 전철과 승합차를 몇번이나 갈아타면서 양주에 있는 회암사에 도착해보니 발굴현장을 보수중이었다.
회암사의 창건시기는 미정확하지만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명종4녀(1174)에 금나라 사신이 회암사를 들렀다는 기록이 있어 12세기 후반 이전부터 존재하였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현재 회암사지에는 회암사지 부도탑과 회암사지 맷돌이 있으며, 유적 유물로 회암사 무학대사 흉융탑과 나옹선사 부도 및 석등,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지공선사 부도 및 석등, 회암사지 당간지등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조선시대 초기 약 3천여명의 승려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넓은 터가 지금은 조감도를 만들어서 복원 진행중인데, 그 당시 화강암의 조각 선이 너무나 아름답고 자연스러워서 현재 석공들의 기술로도 흉내낼 수 없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된다
회암사를 돌아보고 연천으로 이동하여 허스름한 시골집에서 두부전골로 점심식사를 하면서 막걸리 한잔씩으로 목을 축였다. 우리 일행은 7명이었지만, 나는 서너명 한두번 본 사람들이고 모두들 낯설은 사람들이라서 서먹하기도 하였지만 금새 친해지게 되어서 뜨겁고 무더운 날씨에 알찬 기행을 할 수 있었다.
연천군 양원리 고인돌 기념물 제 209호 , 고인돌)지석묘)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으로 380x340x46cm의 크기다.
동서쪽에 가로놓인 굄돌은 검붉은 변성암으로 조성된 것으로 심하게 파혼된 채 원래 자리에서 이탈된 상태이다.
이 고인돌은 땅위에 네개의 받침돌로 석실(무덤방)을 만들고 그 위에 큰 상석(덮개돌)을 올려놓은 형식으로 북방식(탁자식)이며, 화강암질 편마암으로 조성되었다.
동쪽 굄돌은 남쪽편의 상당부분이 유실된 상태로서 크기가 265x70 cm이상이고, 기얼우진 상태의 서쪽 굄돌의 크기는 260x50x70cm이상이다. 막음돌은 현재 남쪽 것은 없는 상태이고 북쪽 것은 무덤방 안쪽으로 넘어져 있다.
상석 윗면에 지름 10cm, 깊이 3cm의 구멍이 정교하게 파여있다.
상석(덮개돌) 위에 올라가서 파인 구멍을 관찰하는 탐방 팀원들...
연천지역 여러군데에 흩어진 고인돌들을 모아 공원에 보존하고 있었다.
연천 삼곶리 돌무지 무덤 기념물 제 146 호
암진강의 충적대지 위에 자리하고 있는 돌무덤은 길이 28m의 장축으로 기원 후 약 2-3세기로 추정되며
출토 유물과 무덤의 구조로 보아 초기 백제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학곡리 적석총(돌무지 무덤)
지금은 잡초가 너무 무성한채 방치돼 있는 느낌이 든다.
상판위에 물이 고여서 풀이 자라고 있는 학곡리 고인돌
기념물 제 158호,백학면 학곡리 273-3번지
고인돌의 상판 두께나 무게로 보아 지금도 현대의 시각에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다.
어떻게 저리 무거운 돌들을 올렸을까?
그 시대에는 도구가 별로 없었을텐데 인간의 힘으로 올렸다는 게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미스테리라고 한다.
땡볕을 오가면서 약 10 여군데 유적지들을 찾아다니면서 탐사를 한 우리 팀들은 이용섭 선생님의 안내로
새로운 것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더 아름답고 명석한 우리 조상들의 발자취를 문화재 보존차원에서
그동안 너무나 함부로 개발하면서 훼손돼 버려 다시는 원상복구가 힘든 문화재들을 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다.
무더운 날씨에 방안에서 책만 읽다가 모처럼 땡볕 나들이를 하면서 많이 힘들어서 오늘은 모처럼
정신없이 낮잠인지 밤잠인지 모르고 푹 자고 일어났다.
앞으로 이러한 공부들에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새로운 것들을 배워보려고 한다.
마침 영등포 공부방에서 매월 첫, 셋째주 수요일 저녁에 모여서 공부들을 하고
이용섭 강사님의 무료봉사로 우리 팀원들이 배울 수 있는 좋은 기회여서 나 역시 7개월 이미
진행된 상태이지만 다음 달부터 동참하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