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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目 次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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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緖論
Ⅱ時代的 背景과 民衆의 抵抗 1. 封建制와 帝國主義에 놓인 民衆 2. 封建制와 外勢에 대한 抵抗
Ⅲ義兵抗爭의 參與와 그 意味 1. 民衆의 義兵抗爭 參與 2. 義兵抗爭의 理念적 志向 3. 民衆參與의 歷史的 意義
Ⅳ 結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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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緖論
한말의 의병전쟁은 일제의 침략으로 인한 식민지화의 위기 속에서 제기된 반침략적 민족전쟁이었다. 이 전쟁에는 제국주의 침략에 무력으로 항쟁하고자 한 모든 집단들이 참여하였고, 그 목표도 국권회복으로 제시되었다.
사실 국권회복은 1905년을 전후한 시기로부터 1910년대 식민지배의 초기에 이르는 기간에서의 당면과제였다. 청일․노일전쟁을 거치면서 제국주의 열강들은 우리 나라를 둘러싼 동아시아지역에 대한 영토분할을 마무리하였으며, 이 시기에 확립된 일본자본주의는 안정적인 시장을 확보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 나라는 일본 면제품의 소비시장으로, 일본 노동자의 식량공급지로 편성되어 일본을 매개로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종속되었으며, 일본 자본주의의 모순을 배출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런 종속화는 물론 국내에서 전개된 여러 형태의 반제반봉건 민족운동에 대한 일본의 무력적인 억압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한 것이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의 반봉건 근대화, 반제국주의 자주화의 변혁운동은 민족문제를 그 주요모순으로 하여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이 반외세․반침략운동은 ‘애국계몽운동’, ‘의병항쟁’이라는 국권회복운동으로 제기되었고, 이 운동에서는 봉건체제의 해체와 더불어 제기된 반봉건 개혁운동에서의 다양한 이념을 내포하고 있었다.
이런 구조에서 이때의 국권회복운동은 종래의 변혁운동에 비해 일정한 변화가 보였다. 지주층을 중심으로 위로부터의 변혁을 추구하던 문명개화론에서는 종래의 운동이 철저하게 봉건군주를 둘러싸고 서울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반성에서, 그들의 주도권이 보장되는 범위 안에서 근대화에 긍정적인 유생층이나 계급적 이해관계를 달리하던 민중층을 조직하려 하였다. 또한 보수적 유생층도 나름대로 유교적인 문화의 수호를 위해 종래의 상소운동에서 벗어나 직접적인 무력항쟁의 길을 택하였고, 거기에는 또한 민중층을 반외세의 이념하에 일정하게 동원하였다. 아직 계급적으로 자립하지 못한 민중층의 경우는 지역에 따라 각각의 운동에 연합하였다. 한말의 의병항쟁에 대한 연구는 김주동의 “구한말 의병운동에 관한 연구”와 박민영 “구한말서북 변경지역의 의병 연구” 등 연구가 되었다.
이런 점을 고려하면서 이에 본고는 의병전쟁의 전개과정에서 제기되었던 민중층의 참여와 그 의미를 명확히 하고자 한다. 또한 한말 의병항쟁의 참여와 민중층의 반제 반봉건에 대한 저항의식을 갖게 된 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고 제국주의와 봉건제에 대한 민중들의 저항을 구체적으로 알아보기로 하겠다. 다음으로 초기에 유생층을 중심으로 저항했던 의병항쟁에 민중들의 참여가 어떻게 이루어 졌으며 의병전쟁에 그들이 지향했던 이념적 지향점은 무엇이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끝으로 갑오농민전쟁과 흐름을 같이 하면서 밖으로는 제국주의와 안으로는 봉건제의 사회질서와 싸워야 했던 민중들의 의병항쟁참여는 어떤 역사적 의미가 있는지 차례로 논의해 보도록 하겠다.
Ⅱ時代的 背景과 民衆의 抵抗
1. 封建制와 帝國主義에 놓인 民衆
산업혁명을 수행하고 국민국가를 형성한 서구열강은 19세기 중․후반 이후 제국주의 침탈의 촉수를 동아시아에까지 미치기 시작하여 이 지역을 세계 자본주의체제에 편입시키고자 했다. 조선은 전통적으로 鎖國主義에 입각한 대외정책을 고수해왔고, 17․18세기이래 사회경제적 발전과 민중의식의 성장 속에서 반봉건 민중운동 등을 통해 자생적으로 근대사회로의 전환을 모색하고 있었다. 이런 조선사회가 서구열강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쉽게 편입되기는 어려웠다. 丙寅洋擾, 辛未洋擾 등 서구제국주의에 강하게 맞서던 조선은 결국 한 발 앞서 개항하고 메이지유신에 성공한 일본과 1876년 ‘강화도 조약’을 체결하여 강제로 세계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었다. 이처럼 봉건사회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해 간 조선사회에서는 한편으로는 일제와 이에 편승, 기생하는 세력들이 성장하였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들의 수탈대상이었던 농민을 비롯한 민중들이 급격히 몰락해 갔다.
그것은 조선을 자국의 자본주의 발전을 위한 식량, 원료 공급지 및 상품시장으로 만들려는 제국주의 열강 특히 일본의 정치 경제적 隸屬化에 의한 것인 한편, 농민적 토지소유의 실현을 바라는 민중들의 변혁열망을 외면한 외세의존적 봉건정권의 정책에서도 기인하였다. 이와 같이 조선은 일본의 예속화와 봉건정권의 外勢依存的 정책에 기반해 반식민지 절차를 차례로 밟고 있었다.
먼저 광산, 철도, 해운업은 물론 주요한 공장들이 제국주의 자본,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일본자본으로 편입되었다. 한편 봉건지주층들은 地主制에 대한 농민의 항쟁에도 불구하고 甲午改革 이후 봉건정부의 일관된 개혁노선인 ‘지주제 유지 및 강화’에 따라 자신의 이해를 법적․제도적으로 보장받는 한편, 강화된 지주제를 바탕으로 개항 이후 확립된 일제와의 통상무역 구조 아래 막대한 부를 축적해 나갔다. 이들은 최대 수출품목인 쌀․콩 등을 小作農民으로부터 현물로 받아 수출하고 여기서 얻는 수익을 다시 토지에 투자하여 토지를 확대하고 나아가서는 소작료의 인상, 고리대 수탈을 통해 농민들에 대한 착취를 더욱 강화하였다.
한편 전 인구의 약 80%를 차지하는 농민들의 몰락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 시기에는 상업적 농업을 통해 일부 富農層이 성장하고 있었지만 그 존재는 미미하였고 농민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중농, 貧農層은 끊임없이 몰락을 강요당하였다.
지주 및 상인들에 의한 일본으로의 미곡수출과 이를 통한 부의 축적 및 토지확대 현상은 많은 농민들을 토지로부터 내몰았다. 뿐만 아니라 일본으로의 쌀 수출은 국내에 쌀 품귀현상을 일으켜 穀價騰貴를 초래, 자신이 농사를 지으면서도 쌀을 사먹어야 할 정도로 농민들의 생활을 크게 압박하였다. 그리하여 충청도의 내포지방의 경우 “금년농사는 작년보다 풍년이긴 하나 군산 등지에서 일본인의 쌀을 사감으로 인하여 곡가가 뛰어 가난한 사람은 살길이 없다”라고 할 정도로 농민들의 한숨소리가 줄을 이었다. 1)
여기에 일본인들의 고리대를 통한 약탈적인 농민토지 침식, 지방관리의 구태의연한 봉건적 수탈은 농민들의 몰락을 더욱 부채질하였다. 이로 인해 삼남지방의 농민들은 ‘군수가 結田을 독촉함으로 인하여 농민의 유일한 자산인 쌀을 오늘 시장에 팔고 그 시장에서 비싼 값으로 다시 사서 먹어야 할’ 형편이었다.
대다수 농민들은 생산량의 절반이 넘는 소작료, 온갖 명목의 세금부담으로 궁박판매는 물론, 그것조차 없는 사람은 고리대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대대로 자기 땅을 부쳐온 자작농은 땅을 빼앗기고 소작농이 되거나, 그것조차 얻지 못한 몰락농민들은 농촌사회에서 품을 팔아 겨우 살아가는 농업 노동자가 되거나 실업자가 되어야 했다. 근대적 산업이 발달하지 못한 관계로 이들 몰락농민들은 다른 고용기회를 갖지 못한 채 대다수가 농촌에 머물며 잠재적 실업인구로 적체되어 갔다. 그 가운데 일부는 일거리를 찾아 도시나 광산, 부두 등지로 흘러 들어가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
당시 절대인구를 차지하던 농민들은 농촌사회의 기본 대립관계인 地主-小作 관계 속에서 봉건적 수탈과 일제의 침탈이라는 이중적 굴레에 짓눌린 民族的, 階級的 모순의 담지자였다. 그런 만큼 이들의 저항의식은 일상적인 항쟁은 물론, 1905년 이후 본격화되는 의병전쟁의 커다란 인적․물적 자원이 되었다.
농촌사회에서 자기 땅은 고사하고 한 뼘의 소작지조차 부쳐먹을 수 없었던 몰락농민들은 자연히 생계유지를 위해 이동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들 중의 대다수가 우리 사회에 당시 아직 맹아적 상태였던 노동자층을 형성하였다. 제국주의 침탈로 국내 산업이 발달되지 못한 상태에서 그나마 이들이 쉽게 고용될 수 있는 곳은 주로 광산, 부두, 철도 등 당시 제국주의 자본침탈이 집중된 곳이었다. 여기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근대적 勞動者階級이라기 보다는 ‘품팔이’ 노동에 종사하는 자유노동자의성격이 강하였다. 그 가운데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일찍 성장한 부두노동자들처럼 직업적이며 초보적인 노동자 조직을 갖춘 곳도 있었다. 또한 부분적이지만 국내자본가 또는 일본자본가들이 경영하는 생사농장에 고용된 노동자들도 있긴 하였지만 극히 미미한 존재였다.
비록 본격적이지는 않지만 자본-임노동 즉 자본가와 노동자의 관계가 형성되는 곳은 대개 일본을 포함한 帝國主義列强 자본이었기 때문에 노동자들은 식민지하의 奴隸的 착취노동을 강요받았다. 또한 농민층의 沒落으로 끊임없이 양산되는 潛在的 失業人口의 존재는 그나마 마련한 노동자들의 일자리마저 불안한 처지에 놓이게 하였고 이를 이용하여 자본가들은 노동자들을 저임금과 열악한 노동조건 속에서 마음껏 부려먹을 수 있었다.
당시 노동자들은 ‘아침에 나가 저녁에 돌아올 때까지’ 12시간 이상의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이들은 자연조명 아래서 일할 수 있는 최대의 시간 동안 일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이러한 장시간 노동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임금은 대개 하루 벌어 하루 살기도 곤란한 경우가 태반이었다. ‘부두노동을 하는 아버지가 자식 1명도 부양하기 힘든’ 상태였기 때문에 “점심끼니를 엿이나 물로 때우는 경우도 있었고 심한 경우에는 배고픔을 이기지 못해 쌀을 모래 훔쳐먹다가 日本人 주인에게 들켜 맞아죽는 일도 있었다.” 더욱이 조선인 노동자들의 한 달 수입은 일본인 노동자 수입의반도안되어 民族的差別 또한 극심하였다.
이러한 노동자들 외에도 농한기 때에는 부두, 광산, 도시 주변의 농민들이 대거 일자리를 찾아 몰려들어 노동자들의 사회경제적 처지를 더욱 열악하게 만들었다.
노동자들은 직업의 불안정에 따른 강한 自由勞動者的 性格, 近代的 산업의 미발달로 비록 노동자로서의 階級意識은 거의 형성되지 못한 맹아적 단계에 있었지만, 식민지화라는 민족적 위기상황과 저임금 및 장시간 노동, 그에 따른 생존권의 위협으로 자연히 반자본적, 반침략적 저항의식을 갖게 되었고 때로는 저항의 표현으로 파업투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半植民地下의 帝國主義侵奪과 封建的 收奪의 강화는 농민층의 몰락뿐만 아니라 지방과 도시의 소상인이나 수공업자들 역시 몰락시켜 나갔다. 先進資本主義 국가들의 값싼 공장제 상품의 대량수입은 가격 및 자본규모 면에서 열등한 국내의 소상품 생산자인 수공업자와 이에 기초한 행상을 중심으로 한 농촌 소상인들을 몰락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특히 외국상인의 내지행상이 합법화되고 나아가 일제가 보호국하에서 실시한 ‘장시세, 포구세’ 등의 지방세 부과는 이들을 거의 해체의 위기로 몰아 넣었다.
이 시기 자주적 近代化와 民族運動의 과정에서 응당 주도계급이 되어야 했을 민족자본가들은 帝國主義侵奪과 封建的 收奪로 민족자본가로서의 정상적인 발전을 저지당한 채 아무런 경제적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였다.
조선후기 이래 봉건적 제약 속에서 일정하게 성장해 온 자본주의적 관계와 민간자본은 이후 민족자본으로 성장할 가능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봉건적 관계가 여전히 지배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이 시기에 不平等條約에 따른 값싼 외국상품의 수입과 이권양도로 인한 국내 원자재의 무제한적인 유출, 이를 조장하는 봉건정부의 外勢依存的인 정책은 이들 민간자본의 정상적인 성장을 저지하였다.
한때 광무정권의 이른바 ‘殖産興業政策’에 힘입어 官僚資本과 商業資本이 중심이 되어 각종 회사를 설립하고 근대적 생산공장을 짓는 등 국내산업 발달을 위해 노력하였지만 일제의 보호국화로 여러 제약조건을 극복하기는 불가능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 민간자본들이 주로 도시에 한정되어 있고 농민경제에 뿌리박지 못하여 당시 民族運動을 주도할 어떠한 역량이나 정치적 영향력을 갖지 못하였다.
民族資本家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었던 이 시기 민간자본은 자신들의 경제적, 정치적 脆弱性으로 말미암아 일제의 침탈에 반발하면서도 당시 고양되고 있던 民衆抗爭 앞에서 동요되고 있었다. 이후 이들은 일본자본의 침투가 강화됨에 따라 점차 파산되는 한편, 이들 가운데 일부는 일제와 결탁하여 예속 자본가로서의 길을 걷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사회의 계급관계는 封建的 관계와 자본주의적 관계가 혼재되어 있었지만 지주-소작제라는 봉건적 관계가 여전히 중심을 이루어 그 대립관계는 이해관계를 같이 하는 일제를 비롯한 제국주의 자본, 外勢依存的인 봉건정부, 봉건지주 대 농민, 노동자를 비롯한 민중이었다.
1905년 이후 일제가 조선을 植民地化해 나가는 과정에서 조선사회 내의 계급구성은 약간의 변화를 보였다. 일제는 조선에 봉건적 생산관계를 그대로 유지시키면서 자본주의의 껍질만을 씌우는 방식으로 식민지 초과이윤을 極大化하려 하였다. 일제의 이러한 정책은 예속적 발전의 길을 찾으려는 봉건 지주층과 예속자본가들과 이해가 합치될 수 있었다. 때문에 일제가 조선을 강점하고 새로운 收奪者로 등장하자마자 무너져 가던 봉건세력은 이들과 결탁하는 길로 들어섰고 그들의 비호를 받으며 舊來의 정치적 경제적 지위를 보장받게 되었다.
반면에 농민층을 비롯한 勞動者, 中小商人, 手工業者 등은 일제의 지주제의 강화와 토지약탈, 民衆抗爭에 대한 강력한 탄압으로 급격히 沒落하였다. 즉 일제와 그와 결탁한 봉건지주 및 예속자본가들의 착취강화는 이들로 하여금 반봉건, 반침략의 저항의식을 지니게 하여 이는 곧 항일구국 義兵抗爭의 밑거름이 되었다. 따라서 이 시기 민중들은 봉건정부를 대신한 일제와 이들과 결탁한 봉건지주 및 예속자본가들을 상대로 광범위하고도 치열한 항쟁을 통해 점차 民族解放運動의 주체로 성장해 나갔다.
2. 封建制와 外勢에 대한 民衆의 抵抗
조선민중의 반일투쟁은 일본 침략자들의 개항장 설치, 해안측량, 약탈무역 등을 반대하는 시위, 투석, 습격, 폭동 등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는데 여기서 도시하층민은 가장 열심히 투쟁하였다.
부산에서는 일본인 거류지 내의 집들에 불을 놓거나 지나가는 일본인에게 투석, 야유하는 등 각종 형태의 반일투쟁이 벌어졌다. 때문에 일본상인들은 거류지 내에서가 아니면 골목길에서만 영업을 할 수 있었고, 일본군함이 항상 부산에 대기하고 있어야만 하는 상태였다.
1878년, 전라도와 충청도 연해의 주민들은 그 지역에 불법 상륙하여 측량과 정탐행위를 일삼던 일본 침략자를 상대로 투쟁하였다. 충청도 한산에서는 수백 명의 군중이 침략자들을 습격하여 내쫓았다.
특히 이 시기에는 일본공사관 설치와 원산, 인천 개항을 반대하는 투쟁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때문에 일본 침략자들은 인천 개항을 비롯한 각종 침략책동을 당분간 연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 개항으로 조선의 주식인 쌀이 대량 유출되어 개항 이후 1882년 사이에만 하여도 곡물가격이 3배 이상 급등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곡물 가격은 모든 물가의 기준이 되고 있었기 때문에 이러한 곡물가격의 상승은 도시의 經濟構造를 뒤흔들어 놓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물자를 시장에서 구입하여 생활하는 도시민, 특히 도시하층민들로 하여금 심각한 생계위협을 느끼게 하였다.
당시 토지로부터 축출된 流民과 기존 도시 내의 계층분화 과정에서 몰락한 자들로 형성된 도시하층민의 주요 구성은 크게 소상인, 영세수공업자, 임금노동자, 관청의 말단 고용인, 하급군인, 부랑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들은 각 직업이 지닌 성격에 따라, 그리고 그들의 기능적 위치와 노동조건에 따라 다양하고 복합적인 구성을 이루어, 봉건적인 성격과 자본주의적 성격이 서로 얽히면서 과도적인 특징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의 기본적인 생활양식, 사회경제적 조건은 대체로 비슷하였다. 이들은 서울의 경우에는 도성 내의 빈촌이나, 교외, 한강 연안지역의 변두리 마을, 또는 강촌에서 신흥촌락을 형성하며 집단 거주하고 있었으며 그렇지 못한 자들은 남의 집에 세들거나 진흙집, 움집을 지어 기거하기도 하였다. 또한 이들은 농민들과는 달리 쌀을 비롯한 각종 농산물, 수공업 생활필수품을 시장에서 구입하여 생활하는 소비자였으며 그나마 그날그날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영세민들이었다. 때문에 물가가 급격하게 오르거나, 特權商人들의 獨占行爲가 자행될 때에는 이들은 심각한 생계위협을 느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해당 지역의 주민들 중에서도 각종 세금과 徭役의 주된 담당자로서의 봉건국가가 요구하는 재정과 노동력을 제공하고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이들은 조세수취를 담당하는 말단관리로부터 온갖 종류의 雜稅를 강요당하였고, 토착양반들의 수탈을 받고 있었다.
개항 이전에도 이미 서울을 비롯한 전국의 도시에서는 외세와 봉건지배층의 수탈과 탐학에 반대한 도시하층민의 鬪爭이 계속되어 왔었다.
1833년 3월 서울 시내에서는 미곡독점과 쌀값조작으로 말미암은 쌀값상승에 저항하는 도시하층민의 대규모 투쟁이 일어났으며, 1851년 2월에는 포도청 군관, 포교, 포졸들의 貪虐에 반대한 서울 뚝섬의 하층민들의 저항이 있었으며, 1860년 5월에는 목수들의 포도청 습격사건이 있었다. 이것은 평소 포도청 관리들로부터 심한 억압과 수탈을 당하고 있던 목수들이 그들의 동업조합인 목방조직을 중심으로 투쟁한 사건이었다.
한편, 1863년에는 금위영 소속 下級軍人들이 급료로 지급되는 쌀의 질이 나쁘다는 이유로 시위를 벌인 사건이 있었으며, 1877년에는 훈련도감 군병들이 급료를 여러 달 받지 못하자 방문을 게시하고 대중들을 모아 시위를 전개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1882년 2월에는 포도청 포교의 탐학에 저항하여 하급군인과 주민들이 투쟁에 떨쳐 일어났다. 좌포도청 포교들이 동대문 부근 동리에서 주민들을 함부로 잡아 가다가 동민들에게 오히려 몰매를 맞고 도망하였는데, 도망갔던 포교들이 다시 포졸들을 데리고 와서 동대문 일대의 동리 주민들은 물론, 지나가던 훈국 군병들과 동대문의 수문 군병들까지 닥치는 대로 체포하여 포도대장 관사로 끌고 갔다. 이때 끌려간 동리 주민들과 군병들은 모두 31명이었는데, 이 중 4명은 맞아죽고, 나머지는 포도청에 구속되었다. 2)
이에 격분한 훈국 군병들은 탁기환의 지휘하에 수백 명이 일부 동민들과 함께 포동청을 습격, 구속되었던 군병들과 주민들을 구출하는 한편, 포도청 청사를 파괴하고 포졸들을 구타하였다. 이는 군인봉기가 일어나기 4개월 전에 발생한 사건으로 군인을 비롯한 도시하층민의 집단적인 저항이었다.3)
Ⅲ 義兵抗爭의 參與와 그 意味
1. 民衆의 義兵抗爭 參與
甲午農民戰爭이 좌절된 이후에도 민중의 반제반봉건 투쟁은 각지에서 무장농민항쟁, 영학당․활빈당 투쟁, 그리고 노동자들의 파업투쟁 등의 여러 가지 형태로 끊임없이 이어졌다. 이러한 반제반봉건 투쟁의 선봉에 섰던 각계 각층의 민중들은 일제가 美․英 帝國主義의 지원을 얻어 러일전쟁을 도발함과 동시에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자, 각지에서 ‘토왜’를 외치며 항일구국의병항쟁의 대열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1904년 7월 24일 서울 교외의 조선군인들이 일제 침략자들의 만행에 격분하여 놈들에게로 총부리를 돌리고 반일의병부대로 전환한 후, 서울․여주․지평 등 경기도에서 반일의병부대가 속속 출현하였다. 경기도 지방 반일의병부대의 출현에 고무된 봉건유생층들도 격문을 돌리면서 의병으로 일어설 것을 호소하였다. 그 결과 봉건유생층들이 중심이 된 의병부대는 강원도 홍천에서 조직된 것을 시발로, 평안도 지방에서 유인석이 중심이 된 宗儒契가, 전라남도 장성 일대에서는 기우만의 지휘로 의병부대가 조직되었다.
반일의병항쟁은 일제가 러일전쟁 당시 만주에 출병시켰던 무력을 우리 나라에 ‘수비대’라는 이름으로 배치시키고, 뒤이어 ‘乙巳保護條約’을 강압 체결하자 보다 광범한 대중적 기반 위에서 확대되기 시작하였다. 망국적인 을사보호조약의 강압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소수 買辦勢力을 제외한 농민, 노동자, 소상인, 도시빈민, 구관료, 양반유생 등 전 민중은 ‘매국조약을 폐기하라’고 외치며 의병의 대열로 모여들었다.4)
민족적 양심을 지닌 일부 봉건구관료들이나 양반유생층들은 대개 을사보호조약의 무효화와 을사5적의 처단을 요구하는 상소운동을 벌이거나 일제의 침략상을 널리 일깨우고 일반 대중의 항일의지를 한층 고양시켰다.
그러나 일부 봉건 지배층들의 상소와 자결만으로는 기울어져 가는 나라의 운명을 건질 수 없었다. 상소가 여의치 않자 자살까지 결심하면서도 그들은 재배계급으로서의 자신의 처지와 봉건적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계급적 한계 때문에 일제와 매판세력에 맞서 싸우는 민중과 함께 반일무장의병 투쟁에 참가하거나, 스스로 의병부대를 조직하여 무력으로 항쟁하는 길을 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들과는 달리 구관료인 민종식, 최익현 등 일부 양반유생들은 충청도, 전라도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일제와의 직접투쟁을 선포하였다.
충청남도 정산군에서 의병을 일으킨 전참판 민종식 부대는 한때 그 수가 1천여 명을 넘을 정도였고, 그 기세를 몰아 홍주성을 점령한 후 서울 진격을 위해 전투를 준비하였다. 그러나 일제와 10여 일간 계속된 공방전에서 민중들은 끈질기게 저항하였으나, 대부분의 유생 지도부는 재빨리 일제에 투항함으로써 홍주성 전투는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최익현은 전라도 태인에서 자신의 문하생을 중심으로 의병을 일으켰다. 전라도 각 군에서는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여 약 1천여 명의 의병이 모여들었다. 최익현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의병을 모으며 각 군에서 시위활동을 하였으나 막상 일제와 맞서는 순간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하지 못한 채 주저앉고 말았다. 일제와 정부군이 순창에서 최익현 부대를 포위하자, 그는 “진위대와 싸우는 것은 곧 우리가 우리를 치는 것이니 어찌 차마 할 수 있겠는가”5)하며 의병들을 회유하여 해산을 명령하고 자신을 추종하는 일련의 무리와 함께 스스로 체포되었다. 최익현 역시 爲政斥邪 계열의 봉건유생들이 가졌던 思想的․階級的 한계를 끝내 극복하지 못하여, 결국 그의 명성에 기대하며 적극적으로 호응하였던 전라도의 반일투쟁 세력을 실망시키고 말았다.
명망있는 민종식․최익현 의병부대의 시위실패 이후 전라남도에서는 기우만․백낙구 등 유생들이 의병을 일으켰으나 이들 역시 일제와 정부군의 공세로 일단 어려운 고비에 부딪히자 투쟁을 방기하고 민중으로부터 떠나버리고 말았다.
이와 같이 민종식․최익현의 기병으로 한때 활기를 띠는 듯 하였으나 조직적인 반일항쟁으로 이어지지는 못하였다. 이들은 겉으로는 반침략적 성향을 강하게 띠고 있는 듯 보였지만 그들의 계급적 한계 때문에 실제에 있어서는 농민을 기본으로 하는 의병대중의 반제국주의적, 반봉건적 요구를 수렴할 수 없었고 따라서 의병대중을 반일항쟁의 전면에 일으켜 세우지 못하였다.
봉건유생층이 소극적이고 기회주의적인 태도를 보이며 반일항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고 있을 때, 강원․경북․충북 접경지대에서는 여러 의병부대들이 태백산맥의 줄기를 타고 맹렬한 반일항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곳은 일제침략자들과 봉건매판세력에 의해서 매도된 ‘화적’, ‘비도’ 혹은 ‘지방의 불령배일도’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지역이었다. 이미 반제반봉건 투쟁에 몸담아 왔던 이들은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독점적 지배가 확립되어 가고, 이를 저지하려는 의병운동이 확대되어 가는 상황 속에서 새로운 활동방향을 모색하는 가운데 의병의 대열로 모여들었다.
토지를 빼앗겨 농사를 지을 수 없게 된 이들 ‘화적’ 출신의 의병들은 일반 농민층과는 달리 귀순 내지 투항하는 경우가 거의 없었으며 반제반봉건 투쟁을 직업적으로 수행하는 집단이 되었다. 때문에 이들이 주축이 되어 전개하였던 경북, 충북, 강원도 접경지대의 의병투쟁은 대중적인 성격이 강하여 봉건유생, 관료출신 의병의 그것보다 끈질긴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다. 이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부대는 경북 영양에서 일어난 김순현, 영해에서 일어난 신돌석, 영덕에서 일어난 정용기 등 농민항쟁 참가자들이 지휘하였다. 특히 화적 출신 신돌석이 이끄는 의병부대는 강원, 경북의 접경지대인 일월산을 중심으로 영해, 영덕 일대를 무대로 활동한 대표적인 부대였다. 1천여 명의 농민대중으로 이루어진 이 부대는 민첩하고도 과감한 전투를 벌임으로써 실제 적에게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일본 헌병대와 대구, 원주 진위대의 발악적인 ‘토벌’책동을 지역주민의 철저한 지원 아래 교묘히 무력화시키면서 헌병분견소, 군청 등 일제의 통치기관을 습격하고 일제의 조선민중 수탈의 창구였던 철도, 우편취급소, 세무소, 광산 등의 기관과 시설을 파괴하는 눈부신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신돌석은 ‘태백산의 나는 호랑이’라 불리어져 일제와 매판세력들조차 그의 부대와 직접 대적하기를 두려워 할 정도였다.
행상을 중심으로 한 상인층들도 의병항쟁에 참가하였다. 제국주의와의 통상무역 과정에서 봉건정부의 수탈, 특히 일제의 ‘제정정리’ 과정에서 신설된 지방세의 부과는 이들을 의병의 대열로 모여들게 했다. 의병장 지석홍은 농업에 종사하던 상인이었고, 의병장 강무경은 필묵장사였다. 이들 상인 출신의 의병들은 대개 낮에는 행상을 하면서 정찰을 하고 밤에는 의병활동을 하는 등 의병의 연락병이나 밀정으로 활동하였다.
뿐만 아니라 부두노동자를 비롯한 철도, 광산 등지의 노동자들도 의병의 대열로 모여들었다. 충주 금광노동자 수백 명이 의병에 집단적으로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광산이 많았던 강원도․황해도 지역 주위의 광산 노동자, 일제의 철도건설에 강제 동원된 노동자들은 지역주민과 합세하여 일제의 군사시설을 파괴하고 의병에 결집하였다. 이 회에도 애국적 지식인, 청년학생 등도 반일의병부대에 합류함으로써 의병투쟁의 대중적 기반이 더욱 확대되었다. 또한 이상설은 서울 종로에서 군중집회를 열고 일제침략자들과 을사 오적의 죄상을 폭로하고 반일의병항쟁에 나설 것을 호소하였으며, 강원도 강릉에서는 학교 교원의지도 아래 학생 2백여 명이 의병부대로 합류하였다.
적과의 전투에 직접 참가하지 못한 도시빈민과 농민들은 납세거부 운동을 벌여 나갔다. 이들은 ‘거두’에만 머물지 않고 세금을 모아 그 지방에서 활동하던 의병부대에 군자금으로 보냄으로써 의병부대의 재정을 지원하는 운동으로 발전된 경우도 있었다. 이제 반일 구국의병전쟁은 전 민중적 차원에서 전개되기 시작했다.
을사보호조약에 의해 촉발된 의병항쟁은 초기에는 척사계열의 명문유생들의 활동이 다소 두드러져 이것이 반제운동의 확산을 가져오는 한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으나, 이들 유생 의병장들은 실제 전투다운 전투 한번 하지 못하고 체포되거나 자진 항복함으로써 ‘乙未義兵’의 한계를 여전히 극복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었다. 반면에 화적 출신의 신돌석과 같은 평민 의병장이 주도한 의병부대들은 양반유생이 이끄는 부대와는 달리 민중의 굳건한 지원으로 전투적인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일제는 1907년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왕의 자리에서 강제로 내쫓고, 조선의 식민지적 예속화를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정미 7조약’을 강압 체결하고 조선민중의 직접 통치자로 전면에 등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폭압 아래 척사유생들이 의병대열에서 점차 퇴진하고, 뒤이어 비록 유생 출신이긴 하나 이미 사회 경제적으로 처지가 농민과 하등 다를 바 없는 농촌의 지식인 출신의 의병장과 평민 의병장이 광범한 민중의 지원 아래 새롭게 등장하는 한편, 군대해산을 계기로 해산군인들이 의병전쟁에 실질 전투력으로 참여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변화에 따라 항일의병전쟁은 민중적 기반이 전국적으로 더욱 확대되었고 전술과 전투력의 질적인 발전을 이룩하여 장기항전 체제로 들어갔다. 일제와의 실질적인 전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고종의 퇴위가 결정된 것을 전후하여 서울에서는 수만 명의 민중들이 기왓장과 돌을 무기삼아 일제 무장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는가 하면 이러한 민족적 울분에도 아랑곳없이 일제의 침략을 ‘근대화’라고 떠들던 일진회 기관지 ‘국민신문사’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왕위양위식이 거행되었던 20일에는 조선군대 하사관 이하의 병사들이 상관의 저지에도 불구하고 봉기민중에 호응하여 일제에 항거하였을 뿐 아니라, 서울봉기에 고무된 각지의 민중들은 일제침략자․일진회 습격투쟁, 시위와 철시투쟁을 벌였다.
서울 민중의 반일항쟁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제는 이미 유명무실화된 조선군대마저 강제 해산시키려 하였다. 그 동안 일제에 억눌려 온갖 수모와 민족적 차별을 받아 온 시위대 군인들은 대대장 박승환의 자결을 도화선으로 남대문과 서소문에서 일제침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성문 밖으로 진출한 무장군인들은 독자적으로 의병부대를 조직하거나 지방의 의병부대와 결합하여 투쟁을 계속하였다.
체계적인 군대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의병장이나 의병대중으로 참여함으로써 의병부대에는 새로운 전술과 투쟁력이 투여되었을 뿐 아니라, 이는 화승총․죽창․농기구 등 빈약한 무기로 싸우고 있던 의병부대에 새로운 무기를 제공해 주었다. 또한 해산군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의병에 참여하게 되자, 이는 일제침략자에 대한 민중들의 불타는 반일 적개심과 愛國心에 더욱 활기를 불어넣고 의병들의 사기를 드높여 이후의 강고한 항일구국의병전쟁의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군대해산 이후 의병부대에는 수많은 민중들이 새롭게 결집되었다. 노비, 기독교 관계자, 지방의 일진회원, 승려 등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항일 구국의병 전쟁에 참가하는가 하면, 강원도 홍천에서는 관노 출신의 의병장이 8백여 명으로 구성된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기도 하였다. 함경남도에서는 포수들이 대거 참가하였다.
1907년 이후 활약한 의병장 가운데 255명의 의병장의 계급 출신별 통계를 보면, 양반유생 출신이 63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192명은 농민, 노동자, 군인, 소수공업자, 소상인 등 각 계층의 민중이었다. 그 가운데 농민이 49명, 군인이 42명, 농민항쟁의 경험자 또는 화적 출신이 29명, 포수 13명이었고, 기타는 소수공업자․소상인․교원․승려․기독교도 등 다양한 계층이었다.
의병장뿐만 아니라 의병대오의 구성에도 변화가 일어났다. 군인들과 함께 수많은 산포수, 광산․철도 노동자들이 의병투쟁에 합류하여 구국투쟁의 선봉으로 나섰다. 반일의병전쟁은 해산군인들이 합류한 이후 불과 몇 개월 동안에 더욱 많은 민중들이 의병대열에 참가하여 사회적 기반이 전 민중적으로 확대되었을 뿐 아니라, 항쟁의 불길은 조선 전 지역을 휩쓸어 그야말로 전 민족적인 구국항쟁으로 확대되었다.
충북과 경북의 접경지대인 상주․청주․거창 등지에서는 노병대의 병부대가 해산군인과 합류하여 활동하였고, 충북과 경기도 접경지대인 쌍호․장양리 부근에서는 이언용․이완채 등의 의병부대가, 강원도 원주에서는 이인영․이은찬 등 주로 유생층들이 의병을 일으켜 경기도 양주방면으로 진격하였다. 경기북부에서 강원북부에 이르는 임진강 유역에서도 허위가 강화의병장 연기우와 합세하여 활동하였다. 평민출신 의병장 김수민은 봉기한 농민대중 2천여 명을 이끌고 경기도 장단으로부터 황해도 서흥 일대에 걸쳐 세력을 형성하여 스스로 탄약을 만들고 군량을 조달하여 일본군과 싸워 나갔다.
함경도에서는 포수 차도선, 홍범도 등이 ‘銃砲火藥類團束法’에 반발하는 포수를 의병부대로 묶어 의병장으로 전신하였다. 이후 함경도의 각 의병부대는 다수의 포수를 규합하고 여기에 광산노동자, 북청진위대의 해산군인들이 합세하여 순수한 평민의병단으로 묶어진 의병부대가 구성되었다. 특히 홍범도는 함경남도 풍산군에서 14년간 수렵을 한 포수 출신으로 엽사조직인 포연대의 책임자였다. 그는 북청에서 포계를 중심으로 일제침략자의 주구인 면장 주도익과 일진회원을 살해한 후 그해 11월 4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삼수에 진을 치고 일본수비대와 여러 차례에 걸쳐 과감한 투쟁을 벌여 나갔다. 6)
당시 의병의 활동지역은 서울을 둘러싼 경기, 황해, 충북, 강원, 경북 이외에도 전라남북도, 함남까지 확대되었고 그 영향은 점차 경남, 충남, 평남북, 함북까지 확산되었다. 그리하여 의병활동의 범위는 조선 전 지역을 포괄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못한 민중들은 때로는 의병부대의 ‘눈과 귀가’ 되어 정보를 제공하고 때로는 먹을 것과 숨을 곳을 제공하는 등 적극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의병운동이 이처럼 대중적 지원아래 적극적인 공세로 발전해 가자, 일본군은 두 차례에 걸쳐 문경 및 일월산을 근거로 하는 신돌석, 이강년 부대와 강원도 삼척의 변학기 부대를 대상으로 토벌전을 전개하였다. 이들의 토벌로 의병부대는 각기 다소간의 피해는 입었지만 그 주력부대는 대부분 일본군의 포위망을 피해 역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이것이 가능했던 것은 “우리들은 보초가 필요 없다. 우리 주위에 있는 조선사람은 누구나 우리를 위해 파수를 봐준다”7)라고 할 정도로 지역민중의 지원이 컸기 때문이다.
민중의 강력한 지원과 참여로 의병토벌의 성과를 제대로 올릴 수 없었던 일제는 ‘의병을 도피시키고 흉기를 은닉하는 자는 엄벌에 처하고 현행범은 촌락에 책임지게 하여 온 마을을 엄중하게 다스릴 것’이라 하면서 의병을 지원하는 민중을 위협하였다. 실제 일본군은 의병토벌을 구실로 ‘의병이 통과한 곳은 관계의 유무를 가리지 않고 그 촌락의 집을 모두 불태워’ 무고한 민중을 거리로 내몰았다.
이러한 일본군의 잔인한 초토화 전술은 민중을 위협하기보다 오히려 민중들로 하여금 이들의 만행에 더욱 치를 떨게 만들었고 일제에 대한 분노와 적개심을 불태워 애국심을 더욱 다지게 하였다.
2. 義兵抗爭의 理念的 志向
이처럼 의병항쟁은 반제국주의적, 반봉건적 성격을 띠고 전개되었다. 이러한 성격이 체계화된 이념적 지도 아래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의병들이 실제 항쟁과정에서 내걸었던 강령이나 투쟁사례를 통해 이들이 지향했던 이념을 엿볼 수 있다.
먼저 의병은 美國, 英國, 日本 등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종 침탈에 반대하였다. 특히 일제에 의한 국내의 미곡수출은 민중의 생존권을 박탈하는 말 그대로 폭력적 경제약탈이었다. 의병들은 곳곳에서 미곡수출을 반대하여 자체적으로 방곡령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한 예로 고부에서는 “쌀을 외국인에게 팔고 적에게 의지하는 자는 토왜이니 義로써 즉시 죽일 것”이라는 방문이 나돌았다. 그리하여 미곡수출을 하던 일본 상인은 물론 쌀을 쌓아두고 값이 오리기를 기다리던 지주․부민과 일본 미곡상인을 주선하는 상인까지도 모두 의병의 공격대상이 되었다.
또한 의병은 일본의 직접적인 토지수탈과 그 지주경영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그리하여 일본인 농장이나 일본인 지주의 소작료 징수원을 습격하여 이들의 국내침투를 일순 저지하였다. 이밖에도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열강들의 각종 이권침탈에 대해서도 항쟁하였다. 빈번히 일어났던 의병들의 광산습격은 주로 일본인에 집중되었지만 다른 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의병들은 “미국, 영국, 프랑스의 3적국도 우리말을 듣지 않고 떠나기를 지연한다면 왜놈과 함께 죽일 것이다”라는 격문에서처럼 철저한 반제적 입장을 취했다. 특히 여기서 나타나는 의병들의 제국주의에 대한 인식은 일본을 제외한 열강들에게 그들의 침략성을 규탄하기보다 오히려 지원을 요청한 유생의병장들의 그것과 극히 대조적이다. 또한 의병들이 일제의 침략과 관련된 각지의 철도, 우편소, 금용조합, 전선 등을 습격, 파괴, 절단한 행위 역시 이권침탈에 대한 항쟁의 일면이었다.
의병들은 봉건적 국가의 수탈에 대한 반대투쟁의 고삐도 늦추지 않았다. 특히 을사보호조약 이후 이러한 투쟁은 매판적 관료와 제국주의의 주구집단인 일진회, 순검, 헌병보조원 등을 처단하는 형태로 나타났다. 또한 일제의 보호 아래 전국 각지에서 고문관, 세무주사라는 자들이 백방으로 꾀를 짜서 농민의 재산을 약탈하고, 척식회․척량회라 하여 농민의 토지를 불법으로 몰수하는 등 당시 통감부에 의해 자행된 재정정리, 토지조사, 토지개량을 방해하였다. 뿐만 아니라 의병들은 매판정부의 조세수취는 결국 제국주의의 배를 불릴 뿐이라고 하여 군수물자의 확보를 위해 조세탈취를 정정당당히 수행하였다. 그리하여 의병들은 “일본침략자의 손아귀에 우리 재산을 넘겨줄 수 없다, 세금을 의병대장소에 납부하라”는 격문을 각지에 띄우는 한편 세무서를 습격하여 영수원이 거둔 세금을 탈취하기도 하였다.8)
이와 함께 의병들은, 각지에서 제국주의 특히 일제와의 통상무역에서 막대한 이익을 획득하고 이를 기반으로 지주경영이나 고리대적 수탈로 농민의 생존을 위협하는 지주와 부민에 대해서도 투쟁하였다. 어느 의병장은 “부호민이 재해가 있는 해에 토세를 남봉하여 4,5년 연체된 사채를 독봉하니 다만 부자될 생각만 하고 나라의 일은 돌보지 않는다. 모두 목 벨 것”9)이라는 격문을 띄우기도 하였다. 이러한 의병의 활동은 의병전쟁의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지주와 부민의 추수를 탈취하거나 그들의 집을 습격하는 투쟁으로 나타났다. 단적인 예로 적성의병부대의 중앙장 김인수는 “경성부자의 전지를 보관하는 인민은 그 곡물을 지주에게 납부치 말고 우리로 하여금 국권을 회복하도록 후원하라”고 고시하였다.
의병활동은 농민전쟁 이후 제국주의 침탈과 이에 편승한 매판정부 및 지주, 부민의 수탈에 항거한 반제반봉건의 성격을 띤 구국항쟁이었다.
3. 民衆參與의 歷史的 意義
1905년 ‘保護條約’의 강압체결 이후 본격화된 반봉건 반침략을 내용으로 하는 구국무장항쟁이었던 반일의병전쟁은 그 강고성, 대중성, 지속성에도 불구하고 일제의 강탈적 조선식민지화 책동을 막아내지 못하였다. 의병전쟁이 ‘반일구국’의 자기 목적을 실현하지 못한 데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의병투쟁이 분산적으로 전개된 데 있다. 의병투쟁에 농민, 노동자, 봉건유생 등 각계 각층의 민중들이 의병장으로, 의병대중으로 나섰지만 이들 가운데 어느 계층, 계급도 전국적 차원에서 이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이끌지 못하였다. 의병장 및 의병대중의 기본구성에서 실제 반봉건 반침략이라는 과제를 옳게 해결해 나갈 수 있는 계급이 충분히 성숙해 있지 못하였기 때문에 의병운동이 전국을 포괄하는 광범한 민중의 결집에 의해 이루어졌음에도 통일적인 투쟁을 전개하지 못하였다. 비록 부분적으로는 지역적 의병부대 사이에 연합과 협력이 이루어졌지만, 많은 경우 독자적 내지 고립분산적으로 투쟁하여 결국 일본무력의 압도적 우세 앞에 각개격파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의병항쟁의 지향이 반침략을 통한 반봉건적 사회변혁을 동시에 실현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의병대열의 대다수가 농민임에도 불구하고, 농민의 반봉건적 지향을 운동의 슬로건이나 강령으로서 체계화하지 못했다. 그리하여 의병전쟁의 승패를 가늠할 수 있는 조건의 하나인 기본역량을 전기간에 걸쳐 체계적으로 흡수하지 못하는 한계를 띠었다.
또한 국내외적으로 투쟁에 대한 지원을 받지 못한 불리한 여건에 있었다. 미국․영국 등 제국주의 열강이 일제의 조선침략을 국제적으로 승인, 지원한 상황에서 의병운동은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밖에 없는 조선민중의 외로운 구국투쟁이었다. 뿐만 아니라 의병운동을 마땅히 지원하고 함께 싸워야 했을 당시 개화파 관료, 그리고 서구식 내지 일본식 근대화를 지향했던 대다수 계몽지식인들이 지원은커녕, 오히려 봉건정부와 한 동아리가 되어 의병들을 ‘폭도’니 ‘화적’이니 비난하고 의병운동을 ‘망국의 근원’이라 매도하는 한편, 일제에 의한 이들의 진압을 지지․성원하여 의병의 반일반제 전열을 흩트려 놓았다.10)
마지막으로, 실패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우수한 일본의 화력에 비해 의병들의 열악한 조건에 있었다. 비록 주체적인 참여와 애국적 항쟁이 투쟁의 강고성․지속성을 발휘했지만, 일제의 훈련된 군대와 우수한 대포․기관총에 맞선 의병들의 빈약한 화력은 속수무책이었다.
반일의병전쟁은 이러한 원인들로 인하여 실패하였지만 개항 이후 근대민족운동의 발전에서 적지 않은 성과를 내었다. 의병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먼저 조선민중의 전통적인 반침략 투쟁의 강렬한 애국적 민족정신을 내외에 과시한 점이다. 박은식의 지적처럼 “전술을 알지 못하는 유생이나 병기를 가지지 않은 농민의 순국을 각오하고 적수공권으로 적과 싸워 모름지기 뼈를 들판에 파묻을지언정,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전통 가운데 배양해야 할 民族精神의 발로”였다. 즉 의병운동에 내재된 조국과 민족을 수호하기 위한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는 민중의 애국심을 여실히 보여 주었다.
의병전쟁의 일제의 조선식민지화 정책에 심대한 타격을 준 점이다. 1907년 이후 전국적으로 고양된 의병항쟁 특히 호남의병은 무역의 격감, 일본상품의 내륙침투 중단 등 일제에게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또 정치적으로도 말단 행정기구를 마비시켜 통감정치의 실제적인 진행을 저지하였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대토벌’이 보여주듯, 일제의 군사적 폭력성과 제국주의 침략의 본질을 만천하에 폭로하였다. 결국 의병전쟁은 ‘乙巳條約’이후 즉각적으로 ‘朝鮮倂合’을 실현하려던 일제의 희망에 심대한 타격을 주어 몇 년 동안 그들의 식민지화 야욕을 저지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끝으로 항일의병항쟁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의의는 무장항쟁이라는 최고의 투쟁형태로써 農民․勞動者․都市 小市民․해산군인․일부 계몽지식인․봉건 유생층 등 각계 각층 민중들의 대중적 참여에 바탕한 반일 민족해방운동으로서의 성격을 강화해 나간 데 있다. 결국 의병항쟁은 여러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식민지하 민족해방운동에 있어서 제국주의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민중의 자주적인 역량에 입각한 무장투쟁임을 입증하였던 것이다.
Ⅳ 結論
한말의 의병 참가 계층 중 먼저 유생․양반의 동향은 그들의 사회인식과 의병 활동을 통해 보면, 그들은 개화정책을 일제에 의존한 망국적 행위로 규정하였고, 이에 분개하여 적극적인 투쟁의 방법으로 의병을 일으켰던 것이다. 그리고 의병진 내의 일반 의병은 이 유생․양반에 호응하여 참여한 농민이 주축을 이루었고, 포군이 포함되어 있었으나 그들은 용병적 성격도 띠었다. 전기의병은 일제 및 개화정책에 분개․봉기하였으나, 정국에 대한 새로운 정책을 제시하는 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들은 아직 존왕양이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기 때문에 변혁적인 의식이 약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봉기는 일제는 물론 집권층에게도 큰 충격이었고 일반 민중에게는 동햑농민운동에 이은 새로운 민족의식의 표본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농민층은 1894년 이후 개화 정책의 일환으로 시행된 대농정책(對農政策)과 일제의 농촌경제의 침투에 대한 대응으로써 의병항전에 호응하게 되었다. 1894년 이후의 토지정책으로 양전․지계사업을 통한 사적 지주제 유지정책은 농민들의 요구인 토지(土地) 균분(均分)과는 상치되는 것이었고, 실무담당자들의 횡포도 증가하게 되어 농민들은 민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역둔토조사사업을 통한 국유지(國有地) 확대에 임하여도 당해 농민들은 토지를 빼앗기거나 지세가 증가하여 소유권 분쟁, 항조, 거납 등으로 대항하였는데 조사기간(1895~1907) 동안 계속되었다. 그리고 청․일전쟁 이후 일본인의 토지잠매를 통한 지주경영이 성행하게 되었고, 나아가 대규모 지주까지 등장하였으며 특히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일본인 지주의 횡포가 급증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농민층은 봉건적 지주에 대한 반감이 점차 친일집권관료, 대농민정책(對農民政策), 일본인에 대한 반감으로 변하였다.
...전기의병에서 의병을 진압하는 군인들이 후기의병에서 활약하게 된 배경을 군사제도의 외세의존적 근대화의 측면과 기구의 축소 과정을 통해 살펴보면, 먼저 한국군 근대화는 출발부터 외세의존적이었으며 나아가 왕권강화의 측면도 있었다. 특히 사관양성에 있어서는 직접 일본교관에 의해 교련을 받았으며, 수도 및 왕실 경비를 담당하는 군의 근대화에 주력하였다. 이후 일제는 침략정책의 일환으로 한국 군대 감축을 단행하고 남은 부대의 편제를 일본식으로 개편하였으며 이는 추후 한국군의 통솔을 감안한 것이었다. 군대 감축은 국가의 힘을 약화시키는 것이었고 군인들에게는 생계권을 위협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군대 해산 조치 이전에도 군인들의 봉기가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그들의 반일의식은 고조되어 갔다.
1907년 광무황제 퇴위와 한국 군대 해산은 전국민을 분격케 했으며 특히 유생․양반을 중심으로 한 기존 의병세력에 의와 같은 군인․농민 등이 의병항쟁에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므로 후기의병의 참가 계층은 민족의 각계각층에 걸친 것으로, 친일집권층을 제외한 전 민족의 호응과 참가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주도세력은 후기의병 초기에 유생․양반에서 점차 군인․농민 등 평민 중심으로 변화되는 경향을 띠었다. 한편 의병 투쟁의 전략도 대부대의 활동에서 소규모 부대에 의한 유격전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이들의 의병에 참가하는 형태는 기본적으로 의병진에 참가하는 경우와 의병을 소모하여 새로운 의병진을 조직․활동하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중 기존 의병진의 주축을 이룬 것은 유생․양반 주도하의 의병진이었다.
계층별 참가 배경을 원인(遠因)과 근인(近因)으로 나누어 보면, 전자는 한국 근대화 과정이 친외세, 친일적으로 유지․추진되어 온 것에 대한 반감이 누적되어 왔다는 점이다. 후자는, 유생 양반은 국권유린과 광무황제퇴위, 군인들은 군대해산, 농민들은 광무황제퇴위와 경제적 핍박, 포수는 총포화약류단속법, 광산노동자 등 임노동자는 일본인이나 일본인 회사의 착취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배경에서 참가한 의병은 투철한 배일의식으로 무장한 적극적인 투쟁을 하였던 것이다.
또한 후기의병은 전문화되는 경향이 주목된다. 즉 유생․양반이 의병을 재기한 경우도 그렇거니와 특히 활빈당․화적 등이 의병전쟁에 참가한 경우, 해산병들이 의병에 투신한 경우 등에서 더욱 의병의 직업화․전문화 현상이 부각되었다. 이런 직업화 추세는 저명한 의병장의 전시․체포․귀순 등으로 의병진이 해체될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소규모 부대로 계속 투쟁을 가능케한 것이다. 후기 의병전쟁의 장기화에 따라 후기의병 자체에서 전문적 의병이 생기게 되었다. 이는 의병전쟁에의 계층별 참가가 피동적이거나 용병적이었던 이전 의병과는 달리 누적된 항일의식을 바탕으로 의병에 투신한 것으로서, 의병 이외의 정직(定職)이 있다고 하여도 그를 조금도 고려치 않고 그들의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는 목숨을 바쳐 투쟁하는 전문적 의병으로 승화하였던 것이다.
결국 후기의병은 일제의 한국 식민지화와 이에 결탁한 친일집권층에 대한 항거일 뿐 아니라, 반제(反帝)․반관의식(反官意識)을 수용한 자주의식으로 일제에 결탁한 친일계층 이외의 민족 전계층의 호응과 참가로 이루어진 전국적인 항일구국전쟁(抗日救國戰爭)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점은 설사 전황의 결과로는 부진하였다고 할 수 있으나, 전국민에게 민족의식 및 항일의식을 심화시키고 일제 강점하의 항일투쟁(抗日鬪爭)을 가능케 한 정신적 연원을 이룩한 귀중한 전통의 수립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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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원광대학교 사학과(http://mahan.wonkwa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