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때 지난 오디오 잡지를 보던 중 흥미로운 기사를 읽었다.
일년여 전 앱설루트 사운드 지에 로버트 할리('하이엔드 오디오 길잡이'라는 저서로 유명하다)라는 동잡지 신제품 담당 평론가가 쓴 「지금 재생음은 원음에 어느 정도 근접해 있는가」라는 내용의 사설이었다.
씨는 이 문제에 대해 세계 오디오 업계에 큰 영향력을 가진 두 유명인사의 견해를 인용했다. 첫 번째는, '현재의 재생음악은 이미 원음의 100 퍼센트 수준까지 도달해 있으며, 더 이상 발전할 여지도 필요도 없다'는 것인데, 바로 홈 시어터 관련 제품 메이커인 돌비 랩의 레이 돌비의 견해였다. 이에 대해, 린의 창업자인 아이버 티펜브룬 씨는 '이제 겨우 10퍼센트 수준 정도 밖에 안된다'는 견해를 피력했다고 한다. 세계 오디오 업계의 아이콘적 존재인 두 사람의 생각이 이처럼 극단적으로 벌어질 수 있느냐 면서, 그렇지만 자신은 후자 쪽에 가까운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이 것을 읽고 나는, 영향력 있는 이 세 사람의 견해가 동상이몽적이며, 정책성이 다분한 아전인수적인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돌비 씨의 경우, 자사의 재생 장치는 100퍼센트 완벽한 수준에 와 있다는 무언의 광고로 볼 수 있으며, 린이나 앱설루트 사운드의 경우는 오디오 산업의 전도는 발전의 소지가 무궁하니 자신들 회사의 전도도 양양하다는 것을 은연중 내비치고 싶었던 게 아닌가 싶다. 장기적인 관점을 고려한 후자 쪽이 더 현명하다고 생각하지만, 전자의 경우도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는 인상을 주면서도, 솔직 대담해서 좋다. 그러나, 재생음의 완성도에 대한 현 위치가 오디오 업계로서는 궁금했겠지만, 애당초 정답이 나올 수 없는 문제를 내 놓은 것 같다는 느낌이 먼저 든다.
만약 위의 세 사람이 중용이 좋다는 식으로, 원음의 6, 70 퍼센트(할리 씨의 예상처럼)까지 와 있다고 했다면 일견 그럴 듯 하게 들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6, 70 퍼센트가 아니라 99 퍼센트까지 육박했다 해도 의미가 없기는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다. 사람의감각의 정도를 숫자화 할 수 없으니, 그 1 퍼센트가 100 퍼센트로 느껴질 수도 있다. 옛날 라나 터너라는 배우는 한 번 보면 꿈자리가 요상해 질 정도로 예뻤지만, 왜 더 예쁜지 또 그 정도가 지금의 샤론 스토운보다 두배, 세배인지 열배인지 숫자로 증명할 수는 없다.
요즈음에 와서는 오디오업계 뿐만 아니라 오디오파일들 사이에서도 재생음이 원음에 거의 근접했다고 믿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최신 최고가 제품을 가진 사람들은 그렇게 믿는 사람이 많다.
이삼년전 에드 마이트너라는 한 오디오 디자이너가 이런 오디오 기기들을 가지고 간단한 실험을 한 적이 있다. 한 일렉트릭 기타리스트를 자신의 연구실로 불러, 10인치 스피커를 장착한 기타 전용앰프를 통해 연주케 해서 이를 녹음한 다음 같은 스피커를 써서 재생, 비교해 봤다. 기타란 성악이나 피아노나 관현악에 비하면 재생하기가 훨씬 쉬운 악기라는 점과 양자의 연주공간의 크기가 동일하다는 사실까지를 감안할 때 현재의 오디오 기술 수준이라면 차이가 거의 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실험 결과 양자는 아직도 완연히 구별되더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 '완연'의 정도가 1%인지 50%, 100%인지는 앞으로도 영원히 알 수 없을것이다.
AR이 보급형 스피커로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던 1961년의 일이다. 당시 AR-2 스피커의 시청평을 쓴 사람은 유력지의 하나였던 'Audio'지의 에드워드 캔비라는 평론가였다. 현악사중주를 실연
케 하고 현장서 이를 녹음해서 이 스피커를 통해 나오는 소리를 비교 청취했다. 시청평은 " 나는 양자간의 차이를 찾는데 두손 들고 말았다"로 결론을 맺고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우스운 얘기다.
더 심한 예도 있다. 에디슨이 실린더형 축음기를 발명했던 1915년, 애너 케이스(Anna Case)라는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여가수가 실린더를 통해 나오는 자신의 목소리를 동료들과 함께 듣고는 "내 목소리와 꼭 같은 걸 듣고 모두들 깜짝 놀랐어요"라고 했다고 한다. 마치 호랑이 대마초 피우던 우화를 듣는 기분이다. 85년전에 이미 원음과 꼭 같았던 재생음은 4 년 전에도 같았고, 지금도 같고, 따라서 2050년에 가서도 같다고 탄복할 것이다. 결국, 영원히 같을 수 없다는 얘기가 아닌지 모르겠다.
명품 악기 중에 가짜가 가장 많은 것이 바이올린이라는데, 그 중에서도 단연 스트라디바리가 많다고 한다. 피아노에 비해, 크기도 작고 구조도 간단해서. 만들기 쉬우면서 값은 수십 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품보다 나은 가짜도 많아서 전문가라도 소리만으로는 식별을 못한다고 한다. 감별은 니스 칠이라든지 세공 따위 눈에 보이는 부분만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에 감정사 중에는 음악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많은 모양이다.
이처럼, 소리를 업으로 하는 사람들의 귀도 알고 보면, '황금의 귀'는 커녕, 사철탕 때문에 지금은 멸종이 되고 만 토종 누렁이, 게으름뱅이 잠꾸러기에다 '사람'좋고 청각은 세퍼드에 어림없는 황구, 잘해야 그 '황구(黃狗)'의 귀 정도 밖에 안되는 모양이다.
그런데 좀 더 생각해 보면, 사람의 귀가 이처럼 엉성하다는 것은 조물주에 의한 초절기교적인 감각 기능의 분량 조절에 의한 것으로서 도리어 축복할 만한 일이 아닐까 싶다. 만약 인간의 가청대역을 1Hz에서 100KHz로 만들었다면 인류는 벌써 멸종됐을 것이다. 그 정도까지는 안갔을지 몰라도, 적어도 이와 같은 귀를 만족시킬 수 있는 오디오는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2차 대전 때 연합군은 사람의 이 엉성한 감각기능을 십분 이용한 위장전술로 커다란 전과를 올렸다. 예컨대 상륙정에 음향장치를 달고 루퍼트(Rupert : 군사작전용 허수아비)를 태워서 상륙지점을 오도한다든지 대포소리를 재생시켜 허장성세 하는 현대판 삼국지 같은 머리 싸움이 치열했다. 이런 과정에서 원음재생술이 얼마나 발전했을지 쉽게 상상이 간다.
그런 의미에서, 2차 대전(1939 ~ 1945년) 후 바로 오디오 산업이 개화됐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고 필연이라 하겠다. 2차 대전 기간 중에 이룩된 통신 전기 전자기술에 대한, 나라 마다 사활을 건 치열한 개발 경쟁이 없었더라면, 아마 지금 쯤 사람들은 트랜지스터 라디오 정도로 만족하고 있어야 할 지 모른다. 그러나, 이와 같은 놀라운 위장전술도 만약에 사람이 박쥐처럼 귀 밝고, 독수리처럼 눈 밝았다면 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귀가 어두운 사람 중에는, 온갖 잡소리 까지 다 들려서 신경이 곤두서기 때문에 끝내 보청기를 달지 않고 버티는 사람들도 있다. 사람의 청각 조직에는 똑 같은 싸이클의 소리라도 듣기 싫은 소리는 필터링 하는 실로 신통한 자연적인 콘덴서나 저항소자가 들어 있는 모양이다. 이런 점을 놓고 본다면, 엉성해 보이는 '황구의 귀'야 말로 오디오파일에게는 동경의 촉매제이며, 오디오 산업에게는 도전의 터전이 되도록 설계된, 실로 오묘한 작품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