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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시;2004.8.27(밤)~2004.8.30(새벽)-1무1박2일
산행장소;지리산 남서릉 구간[경남 산청군 시천면 증산리에서 입산-전남 구례군 산동면 성삼재로 하산]
팀원;4명-권승하, 정인철, 서순덕, 장상덕.
교통편;8/27-수원 22시21분 진주행 우등열차 이용 8/28-04시04분 진주역 도착, 승용차(친지 도움)로 증산리행 아침 식사 후 05시45분 산행 시작.
8/28-벽소령 대피소 일박.(1인당 7천원)
8/29-15시00분 성삼재로 하산, 택시(2만5천원) 이용 구례 도착, 휴식과 저녁 식사 후 23시 20분 발 우등열차 이용 8/29-03시00분 수원역 도착, 해산.
산행 경비;1인당 8만원(택시비, 회식 및 사우나비 포함)
준비물;개인-기본장비(배낭 등), 쌀5인분, 밑반찬, 비상식(사탕, 과일, 쵸코릿 등.), 판쵸, 후레쉬, 칼 등.
공용-버너, 코펠, 된장, 고추장, 김치, 과일(산제용), 고추, 양파, 인스턴트 사골 국물 등.
산행 코스;
첯째 날-증산리-1.9km(25분)-증산리 매표소-3.4km(2시간30분)-법계사(로타리 대피소)-2km(2시간)-천왕봉-1.7km(1시간)-장터목 대피소-3.4km(1시간30분)-세석 대피소-7.3km(3시간30분)-벽소령.
산행거리-19.7km, 기본 산행시간-10시간55분, 실제 산행 소요 시간-12시간5분(법계사 예불, 천왕봉 산제 및 장터목에서 점심 식사 포함), 05시45분 산행 시작-17시50분 산행 종료.
둘째 날-벽소령-1.5km(50분)-형제봉-2.1km(1시간10분)-연하천-3.0km(1시간40분)-토끼봉-1.2km(30분)-화개재-0.8km(40분)-삼도봉(날라리봉)-2km(50분)-임걸령 샘터-0.3km(20분)-피아골 삼거리-1km(20분)-돼지평전-2.2km(40분)-노고단-2.7km(1시간)-성삼재
산행 거리-16.8km, 기본 산행 시간-8시간, 실제 산행 소요 시간-7시간, 노고단 탐방 및 휴식-3시간30분, 05시30분 산행 시작-16시 정각 하산 완료(성삼재).
제1구간 총 산행거리-19.7km+16.8km=36.5km
제1구간 총 산행시간-기본시간;18시간55분, 실제 산행시간;17시간50분, 기타;3시간 30분(탐방 및 휴식).
제1구간(증산리~천왕봉~노고단~성삼재) 산행기.
1.
8월 27일 산행을 떠나는 날.
백두대간을 실행하기로 마음을 먹고 팀원을 구성하며 각종 자료들을 뒤지는 등, 준비를 하나 하나 해나가는 사이 드디어 산행의 날이 다가왔다.
짐을 꾸려 수원역으로 나가니 벌써 다른 팀원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인철씨 내외분과 서순덕 여사, 그리고 나 이렇게 네 명이 백두대간의 첯 산행을 시작하기로 했었다. 수원포교당 거사회를 통해 진작부터 잘알고 지내는 도반 사이로, 국내의 종주 산행을 비롯하여 외국 성지 순례 배낭 여행 팀으로도 함께 했었기에, 서로간에 스스럼없이 지내는 사이다. 정인철씨와 부인인 장상덕 여사가 역 계단 입구에서 반갑게 맞으며, 아직 서순덕 여사가 안보인다고 했다. 시간을 철저히 지키시는 분이라 그럴리 없을 거란 생각을 하며 주위을 두리번거리는데, 계단 윗쪽에서 부르는 소리가 났다. 서여사였다.
"핸드폰이 고장나서 연락을 못했어요."
"그러셨어요? 못가시는게 아닌가 공연히 걱정했는데---."
연락을 취할 수없어 미리부터 나와 기다리고 있었다고 했다. 수원발 진주행 22시 21분 우등 열차을 타려면 아직 시간이 좀 남았기에 각자의 배낭을 점검했다. 불필요한 물품과 중복되는 것들을 역구내 물품 보관함에 맡기고 산행에 대한 사항을 일러주었다.
"백두대간 첯 산행이 잘 되야 할텐데---."
"잘 이룰 것입니다."
모두들 설레임과 희망찬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원력이 크시고 신심이 두터워, 지금까지 같이한 산행이 모두 성공적이었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란 기대를 갖는다. 큰 원력에 지극한 신심이 있는데 무엇이 두려울까. 언제나 처럼 받아온 가피를 기대하며 마음을 추스렸다.
21분에 도착해야할 기차는 4분이 늦은 25분에 도착했다. 수원역에 배정된 표를 구하지 못해 천안역에 배정된 표를 예매했던 관계로 지정된 좌석은 아니었으나, 다행이 비어있는 자리를 앉을 수 있었다. 자리를 잡고 나는 준비한 큰통에 들은 맥주를 꺼냈다. 차안에서 마실려고 준비한 것이다. 팀원들과의 단합과 좋은 분위기를 만들기 위한 세레머니에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있을까.
"백두대간 성공을 위하여! 아자!"
천안역까지 오는 사이 맥주가 모자라 꼬불친 술까지 마셔대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열차는 지리산 등반 전용열차라고 해도 될 만큼 등산객으로 붐볐다. 거진 과반수는 등산객이다. 02시 30분 기차가 지리산 서부 지구 들머리 역인 구례구역에 대부분의 사람을 쏟아놓으니, 차안은 갑자기 텅빈 듯했다. 나머지는 지리산 동남부로 가기 위해 진주에서 내리는 사람들 뿐이었다. 순천과 여수를 지나 진주에 이르는 먼길을 달려 04시 4분에 진주에 도착했다. 아직 캄캄한 새벽, 동이 틀려면 한참이나 있어야 한다. 역구내를 나오서 잠시 있으려니 서여사의 맏오라버니께서 승용차를 끌고 나오셨다. 이 신새벽에 차를 끌고 나오신 것이 너무도 고맙구 황송하다.
예순을 넘겼을까, 초로에 정장을 하시고 경상도 특유의 억양을 낮은 톤의 가라앉은 목소리로 조근조근 말씀하시는 모습이 무척 점잖게 보인다.
새벽 공기를 가르며 차는 지리산 남쪽 들머리인 증산리로 향하고 있었다. 아직 여름이 끝나지 않은 팔월의 하순이라 밤공기가 더웠으나, 점점 고도를 높혀 가며 오르는 사이, 제법 선선한 기운이 돈다. 반바지에 짧은 팔 셔츠가 한기를 느낄 때 쯤, 차는 증산리 마을 입구에 도착하였다. 05시 20분, 한 시간 정도 걸린 거리다.
'이렇게 수고를 끼쳐 드려서 죄송합니다"
"별 말씀을요. 산행 잘 하이소."
서여사님 오라버니를 보내고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아 주차장 마당에서 아침 요기를 때우기로 하였다. 진주 날머리 가겟방에서 사온 김밥과 어묵 국물, 서여사님 오라버니께서 싸온 빵과 복숭아를 펼쳐놓으니 성찬이 됐다.
2.
첯째 날.
"아자! 백두대간 종주의 성공을 위하여!"
05시 45분, 아침을 든든히 먹고 증산리 매표소로 향했다. 약 2 킬로미터 쯤 산쪽으로 올라가니 넓은 주차 시설과 상점들이 있었고, 그 끝머리에 매표소가 있다. 성인 일인당 1천 6백원 씩이다.
06시 10분, 이제부터 본격적인 산행을 할 시점이다. 어느듯 날이 밝아 길이 훤하게 보인다. 매표소에서 포장된 도로를 따라 한참을 올라가니 화장실이 길 좌측에 있어 볼일을 보고 법계교 다리에서 바로 옆 왼쪽 샛길로 드니 이정표가 있다. 법계사 3.4km.
이곳에는 지리산 산신령으로 통하던 허만수님의 추모비가 있다. 서른 셋 나이에 지리산에 들어와 세석 고원에 초막을 짖고 살며, 조난자를 구난하고 등로를 정비하며 샘을 개발하는 등 숱한 일을 하다가 1976년 봄 육십객으로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고 한다. 아마 지리산 어느 골짜기에 육신마저 초목에 공양한 채 묻혔을 것이라 한다.
법계교를 지나면 두류동이다. 포장길을 따라 바로 쭉 가면 두류동으로 해서 완만하게 천황봉으로 오르는 길이다. 우리는 칼바위 계곡으로 방향을 잡았다. 너덜로 이뤄진 가파른 경사의 길이다. 계곡을 왼쪽에 두고 물 흐르는 소리를 들으며 일 킬로미터 쯤에 칼 끝이 하늘로 향한 모습의 칼바위가 있다. 이 칼바위는 조선을 창업한 이 성계의 건국 신화의 전설이 있다. 칼바위를 지나가다 보면 이정표가 나온다. 매표소 1.3km, 법계사 2.1km, 장터목 대피소4km 표시가 있다.
등로 주변 수목으로는 느릅나무, 산뽕나무, 만주고로쇠나무, 쪽동백나무, 물푸레나무, 사스레나무, 개암나무, 비목나무, 털진달래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등이 울창한 밀림을 이룬다.
좌측으로 올라가면 유암 폭포로 해서 장터목으로 오른다. 우측길로 접어들어 가파른 길을 올라갔다. 출렁다리를 건너 얼마나 갔을까, 망바위가 있었다. 망바위 위에서 조망하면 멀리 남해의 바다가 보인다. 망바위에서 잠시 쉬었다가 계속 오르기를 한참, 완만해진 길에 다다르니 저 건너편에 법계사가 자태를 드러낸다. 법계사 바로 밑에 로타리 대피소가 있는데 사람들로 붐비는 것이 보였다.
로타리 대피소를 지나 바로 윗 듬에 있는 법계사에 들러 예불도 드리며 잠시 쉬어 가기로 했다. 예불을 드리고 기와불사에 동참하여 기왓장에 가족의 이름을 써 넣었다. 올해 대입 시험이 있는 아들놈 수험생의 애비가 되니 이렇게라도 해야 할 것만 같다. 두 애들을 키우면서 공부를 강요하진 않았지만 내심 걱정이 안되는 것은 아니다. 저희들의 자율적인 판단에 맡기어 진로에 대해서도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는데, 다행히 큰 애 딸아이는 제 길을 잘 찾아 간 듯 보인다. 이제 작은 놈 아들아이가 고삼 수험생인데 교직에 관심을 보인다. 요즘은 사대 보다 교대에 가기가 더 어려운데 굳이 교대를 고집한다. 인문 계열도 아닌 자연계열이라서 불리한 점이 많다고 하는 데, 잘 되길 바랄 뿐이다.
법계사는 신라시대 진흥왕 5년(서기544년) 연기조사가 창건했다고 알려져 있다. 법당에 주불을 모시지 않은 보궁 사찰이다.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인도에서 가져와 모셨기에 법당 현판에 적멸보궁(寂滅寶宮)이라고 써 있다. 절집 뒷쪽에 커다란 바위가 있고, 바위 꼭대기엔 사리를 봉안한 3층 석탑이 있다. 신라시대의 탑으로 보물 제437호 이다. 법당 내부에서 탑을 볼 수 있도록 뒷 벽을 유리창으로 해 놓았다.
09시 10분, 30분을 법계사에서 보내고 천왕봉으로 향했다. 천왕봉까지는 2km의 거리다. 매표소에서 법계사까지 3.4km 거리를를 2시간 30분 걸려 와서 30분을 보냈다.
애초에 계획대로 라면 진주에서 첯 출발하는 06시 10분 버스를 타고 한 시간 반 걸려 증산리에 도착하여 08시에 산행을 시작하려 했다. 예정시간 보다 2시간이나 이른 출발을 하였기에 여유가 있었다. 첯날 첯 산행을 무리하게 재촉하고 싶지 않아, 오며 오며 쉬어서 천천히 산행을 하였다.
법계사에서 천왕봉에 이르는 등로는 험하고 매우 가파르다. 군데 군데 철계단이 설치되어 있고, 나머지 길도 온통 돌부렁이 천지로 오르기가 매우 고역스럽다. 옛 절터 자리인 천불암터를 지나니 한숨을 돌릴만한 자리가 나온다. 가뿐 숨을 내 뱉고 위를 쳐다보니 흡사 고인돌 같은 모습의 개선문이 버티고 있다. 개선 장군처럼 폼을 잡고 통과하여 철책을 잡고 급한 비얄을 올라선 곳에, 작은 공터로 이어지며 바위 암벽 밑에 천왕샘이 있었다. 70년 대 말에 지리산을 아끼는 산악회에서 석공을 동원하여 물이 고일 수 있게 샘자리를 팠다고 전해진다. 태풍이 지나가며 비를 뿌리고 간지가 얼마되질 않아 물량은 그런대로 먹을 수 있을 만치 됐다. 내려오는 사람에게 양보를 받아 한 국자를 단숨에 마시고 물통에도 채워 넣었다.
이제 이 암릉만 올라서면 천왕봉 정상이다. 산 정상 쪽엔 꽤 많은 사람들이 서성거리고 있는 것이 눈에 들어 온다. 돌계단을 따라 오르는 오른쪽 경사진 비탈엔 침엽수림이 울창하다. 구상나무의 위용은 가히 나무들의 으뜸이다. 길섶엔 산오이풀이 한창 꽃을 피우며 향기를 풍기고 있다. 들국화도 소담스러히 자리잡고 꽃을 피웠다. 아고산대의 풀꽃이 짧은 여름을 맞이하여 종을 번식하려 다투는 듯하다.
10시 50분, 드디어 고대하던 천왕봉(1915m)에 올라섰다. 법계사에서 한시간 사십분 걸렸다. 증산리 초입에서는 다섯 시간 오분 걸렸다.
3.
천왕봉에 올라.
구름 한점 없는 맑고 쾌청한 날씨다. 삼대가 적선을 하여야만 천왕봉 일출을 볼 수 있다고 하는 데, 일출 시간에 맟추어 올라왔다면 해뜨는 광경을 볼 수 있었을 것이란 아쉬움이 있지만 욕심을 접는다. 저 멀리 노고단이 뚜렷이 눈에 들어 온다. 굽이진 산자락이 파도치듯 넘실거리고 있다.
지리산은 기본적으로 육산의 특질을 갖추고 있지만, 육산이라고 단정하기엔 다른 이면도 갖추고 있다. 천왕봉, 연하봉, 칠선봉, 촟대봉, 써래봉, 날라리봉(삼도봉) 등은 암릉과 암봉으로 이루어진, 악산(岳山)의 구조이다. 총 둘레 320km, 산 경계 면적 485평방 킬로 미터, 1700m 이상의 봉우리가 여섯개(천왕, 반야, 촟대, 제석, 중, 하봉)나 되고, 1500m 이상 봉우리도 15개나 되는 거대한 산군을 형성하고 있다. 경상남도와 전라남도 전라북도에 아우른 다섯개 군(하동, 산청, 함양, 구례, 남원), 15개면에 걸쳐 있다. 우리나라 5대 명산(백두, 묘향, 금강, 구월, 지리) 중 유일한 남한 쪽 산이며 신선이 놀았다는 삼신산(방장[지리], 봉래[금강], 영주[한라])의 하나이다. 그 이름도 세가지로 불리는데 지리{智理)는 '슬기롭고 지혜롭다.'라는 뜻이며, 방장(方丈)은 삼신산의 의미로서 붙여 졌으며, 두류(頭流)는 백두산의 맥이 여러갈래로 한반도 남쪽으로 흘러 여기서 그 정기가 모여 우뚝 솟았다는 의미이다. 아름답기로 지리산 10경을 꼽는데, 제1경 천왕봉 일출, 2경 노고운해, 3경 반야낙조, 4경 직전단풍, 5경 벽소 명월 6경 세석 철쭉, 7경 불일 폭포, 8경 연하 선경, 9경 칠선 계곡, 10경 섬진 청류 이렇게 열 가지를 으뜸으로 친다. 지질학적 특성은 주라기의 대지각 변동기와 제3기 단층 작용에 의한 만장년기(滿壯年期)의 산괴로 된 지형적 특성을 보여준다. 기후는 국지형으로 때때로 폭우나 폭설이 쏟아지기도 한다. 온도는 평지에 비해 10~15도 정도 차이가 있어, 난대와 온대, 한대의 특성이 다 나타난다. 식생은 산 허리 부근에 졸참나무와 참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반야봉엔 구상나무 군락이, 칠선계곡엔 전나무 군락이 발달하였다. 그 밖에도 산수유나무, 좀고채나무, 털진달래 등 245종의 수목이 있고 초본류는 579개종이나 된다. 또 노고단의 원추리가 유명하다. 1967년 12월 27일 우리나라 국립공원 제1호로 지정이 됐다.
4.
벽소령 가는 길.
우리가 기획한 백두대간 종주를 성사시키기 위한 간소한 의식을 행하였다. 준비한 약간의 과일을 제수물로 차려 놓고 술을 부어 지신과 천신 그리고 지리산의 산신인 노고(老姑)께 치성을 드렸다. 지리산은 어머니의 산이다. 넓은 산자락은 어미의 품처럼 자애로움으로 감싼다.
"백두대간의 시작을 알리오니 넓은 품으로 안으시어 굽어 살피소서!"
"산신님! 벡두대간 종주를 꼭 성공하도록 도와 주십시요"
"이렇게 좋은 산에 오게 되어 너무 너무 고맙습니다. 굽어 살펴 주십시요"
소담하지만 정성을 다하여 치성을 드렸다. 모두들 환희에 찬 모습이다. 이렇게 좋은 산에 올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기쁨이지 않겠는가! 지금에 이 모습들이 부처요 보살의 얼굴일진대, 어디서 보살을 찿고 부처를 찿을 것인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음복을 하고 산을 내려 왔다. 한낮으로 치달은 해는 온산을 강렬한 빛으로 비추며 산자락을 낱낱히 드러낸다. 이렇게 맑은 날씨라니! 년중 해를 볼 수 있는 날이 칠십일 정도 인데, 그 중에서도 이렇게 벗겨진 날이 며칠이나 될까? 오호! 가피일러라! 오호라! 가피일러라!
너덜지대 처럼 되버린 암릉을 타고 500m 쯤 떨어진 통천문(通天門)에 이르렀다. 말 그대로 하늘로 통하는 문이렸다.
" 이제 나는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격이니, 신선이 되었구나!"
신선이 되어 인간 세상으로 내려 왔으니, 세상을 속속들이 살펴 보리라는 생각을 하며 통과 한다. 옛날, 산제를 지냈다던 제석봉(1806m)을 지나 천왕봉에서 1.7km 떨어진 장터목 대피소로 향하였다.
거웃 열두 시를 넘겨 장터목 대피소에 다달랐다. 일곱 시간을 넘게 산행을 하였기에 모두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하다. 대피소는 안팍 할것 없이 초만원이었다. 겨우 대피소 바깥 한 귀퉁이에 짐을 부리고 취사를 준비하였다. 씻은 쌀이라 물만 부으면 되니 간편하다. 오후로 접어 들며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 왔다. 냉장고 바람이었다. 처음의 시원하고 상쾌했던 바람은 이 제 추위로 느껴질 정도다. 밥이 끓는 사이 다리를 쭉 뻗고 등을 배낭에 기대어 잠시 꿀맛같은 휴식을 취했다.
식사를 하고나니 나른하다. 다른 일행 중에 어떤 이들은 아예 바닥에 길게 누워 잠을 청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서 벽소령까지 아직 십 킬로나 남았는데, 더 쉬었다가는 제 시간에 도착하기 힘들 거란 생각에 출발을 재촉했다.
"자, 또 떠나 봅시다."
"아이구 힘들어요. 쉬었다 갔으면 좋겠네."
오늘 첯 산행 구간의 걸음걸이 치가 좋질않아 더 쉴 수가 없었다. 진주역에서 다행이 승용차를 타고와서 세 시간이나 여유가 생겼으니 망정이지, 그렇쟎았드면 야간 산행이 될지도 모를 일이다.
13시 30분, 장터목 대피소를 출발하였다. 장터목 지대는 꽤 넓은 마루턱 초원을 갖고 있다. 예전에는 북쪽의 함양군 마천 사람들과 남쪽의 산청군 시천 사람들이 물물교환을 하며 장이 크게 섰던 곳이라 한다. 서로 다른 특산물을 교환하며 소식도 전해주고 헤어졌던 사람도 만나고 하던 곳이다. 대피소 아래의 '산희샘'은 과거의 삶을 겪어온 유적의 현장이리라.
천왕봉에 산안개가 밀려오고 있었다. 정상부의 암릉을 감싸듯이 휘감는 모습이 또 다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연하봉(烟霞峰1667m)은 장터목에서 불과 이십 분 거리에 있다. 숲으로 우거진 길을 걷다보면 어느새 나타난다. 아마 봉우리 꼭대기의 암릉이 연기가 피어 오르듯 산안개에 싸인 모습을 보고 그렇게 이름 붙여진 모양이다. 지리산 10경 중에 제8경으로 연화봉 선경(仙景)을 꼽는다. 암릉과 어우러진 주변 산세는 과히 선경이라 이를만 하였다. 멀리 천왕봉이 선경의 자태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이렇게 맑은 날 웅장한 산세와의 조화로움을 보게되다니---.
14시 40분, 촟대봉(1703.7m)의 암릉이 보인다. 마치 횡으로 늘어선 초가 촟농을 흘려놓은 모습이다. 점심을 먹고 원기가 살아나서인지 빨리 걷고 있었다. 예상보다 이 삼십 분은 빨리 온 것 같았다. 숲으로 이어진 길이라 주위 경치에 눈돌릴 일이 없으니, 그저 걷기만 해서 인가 보다 생각 되었다. 또 고저의 편차가 심하지 않은 완만한 길이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봉우리마다 쉬는 시간을 짧게 갖고, 사진 한 캇만 찍곤 또 걸었다. 다시 이십여 분을 걸으니 세석이 눈앞에 펼쳐진다. 주릉선을 따라 동으로는 촟대봉을, 서로는 영신봉을 두고 사이에 완만한 경사의 고원지대이다. 언덕 아래 통나무집 대피소가 있었다. 수용 인원 240명의 꽤 큰 규모다.
잔돌이 널려 있다 해서 세석평전(細石平田)이라 이름지워진 이 곳은 철쭉(제6경)이 유명한 곳이다. 늦 여름이라 철쭉꽃하고 거리가 멀지만은 주변은 온통 철쭉밭이었다. 신라시대에는 이곳에서 화랑도가 심신을 수련하던 곳이다. 6.25 때에는 빨치산이 활동하던 근거지이기도 하다. 하동 쪽으로 조금 내려가면 음양수라는 샘이 있는데, 현대사의 가슴 아픈 사연이 있는 곳이다.
1953년 여름, 빨치산이 거의 쇄멸을 해 갈 때 쯤, 전설적인 여성 빨치산 김점분이 토벌대에 쫓겨 점점 포위망이 좁혀지며 이곳 음양수 샘에서 완전 포위를 당하게 된다. 더 이상 살아날 가망이 없음을 알게된 김점분은 여성대원 15명과 함께 권총으로 자살을 택했다. 분단의 비극은 여성마저도 사상의 굴레를 쒸워 산천에 피를 뿌리게 하였다. 세석의 철쭉은 민족의 핏물로 물들어 그렇게 붉게 피는가보다.
세석엔 슬픈 전설도 있다.
아득한 옛날, 맨 처음으로 지리산에 인간이 들어와 살았는데, 이름이 호야와 영신이었다. 세석평전에 초막을 짖고 나무 열매를 따 먹으며 금슬좋은 한쌍의 원앙처럼 서로 사랑하며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너무나 사랑하는 둘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아이 갖기를 소원하며 지내던 어느 날, 하루는 호야가 다래를 따러 가고 없는 사이 지리산에 사는 반달곰이 영신을 찿아 왔다.
"영신 아씨! 무슨 고민이 있으셔요? 말씀해 보세요. 제가 혹시 도움이 될런지 누가 압니까."
반달곰의 물음에 영신은 하소연하듯 말한다.
"반달곰아, 나는 호야 서방님을 너무 사랑하는데, 우리 사이엔 어찌하여 아기가 없는거니? 어떻게 하면 아기를 가질 수 있는지 네가 좀 가르쳐 주지 않으련?"
영신의 물음에 반달곰은 머리를 긁적이며 난처한 표정을 짖는다.
"글쎄요.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만---."
뭔가 방법을 알고 있을 거란 생각에 영신은 더욱 다그쳤다.
"반달곰아, 제발 좀 가르쳐 주렴. 응? 은혜는 잊지 않을터이니---."
난처한 입장이 되버린 반달곰은 주저하며,
"영신 아씨를 위해서 방법을 알려 드리긴 합니다만---." 뜸을 드리는가 싶더니, "아씨, 꼭 비밀을 지키셔야 합니다."
반달곰은 방법을 일러 주었다.
"언덕 아래를 내려 가시면 숲속에 영험한 샘이 하나 있거든요---."
언덕 아래 음양의 조화을 맞추는 영험하고 신비로운 샘이 있다고 했다. 이 샘물은 지리산의 산신님만 마시는 특별한 샘이었다. 아무도 범접을 못하도록 되있는 곳을 영신은 몰래 들어가 샘물을 퍼 마신다. 그러나 곧 비밀은 들통이 나고 말았다. 평소 앙숙처럼 시기하던 호랑이가 이 사실을 알고 산신령에게 고해바치고 만것이다.
"고연놈! 천기를 함부로 누설하다니---."
화가난 산신령은 곰을 잡아 토굴에다 가두고, 호랑이에겐 고해바친 공으로 백수의 왕이 되게 했다.
그리고 샘물을 몰래 마신 영신에겐,
"너는 평생을 이 세석고원에 살면서 철쭉꽃이 빨갛게 물들도록 꽃을 가꾸어라. 그리고 절대 호야를 보아서는 아니된다."
영신은 그 뒤, 산신령의 지엄한 명령을 받들어 낮에는 고원의 너른 평원에 가득한 철쭉을 가꾸고, 밤에는 촟대봉에 올라 산신령에게 자신의 죄를 빌었다.
촟대봉의 앉은바위는 영신이 죄를 빌다가 몸이 굳어 바위가 된 모습이라고 한다.
한편 이런 사실을 모른 채, 호야는 사라진 영신을 찿아 온 산을 헤멘다.
"영신! 나를 버리고 어디로 가버렸소!"
호야는 흐느끼며 애타게 영신을 찿다가 결국은 지쳐서 죽음을 맞이한다. 그 뒤 호야가 죽은 자리에 묏봉우리 하나가 솟았는데 그봉우리가 영신봉이다.
세석대피소에서 식수를 보충하고 영신봉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넓은 평전은 철쭉이 주종을 이룬 관목밭이었다. 다듬어진 등로를 걸으며 1991년 6월 어느날 불의의 사고로 뱀사골 골짜기에서 죽은 촉망받던 여류 시인 '고 정희'의 싯귀를 떠올렸다.
아름다워라
세석고원 구릉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 강물 어지러워라.
이마에 흐르는 땀을 씻고
발아래 산맥을 굽어 보노라면
역사는 어디로 흘러 갔는가.
산머리에 어리는 기다림이 푸르러
천벌처럼 적막한 고사목 숲에서
무진벌 들바람이 목메어 울고 있다.
나는 다시 구불거리는 힘겨운 길을 따라
저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고요하게 엎드린 죽음의 산맥들을
온 몸으로 밟으며 넘어가야 한다.
이 세상으로부터 칼을 품고, 그러나
서천을 물들이는 그리움으로
저 절망의 능선을 넘어가야 한다.
막막한 생애를 넘어
용솟는 사랑을 넘어
아무도 들어가지 못하는 저 빙산에
쩍쩍 금가는 소리 들으며
자운영꽃 가득한 고향의 들판에 당도해야 한다.
눈물겨워라
세석고원에 파도치는 철쭉꽃
선혈이 반짝이듯 흘러가는
분홍 강물 어지러워라.
-지리산 4- 전문
시인이 말한 절망의 능선을 희망의 능선으로 치환하며 걸어 간다. 세석고원의 파도치는 철쭉꽃의 이미지를 가슴에 묻고, 선혈이 반짝이듯 넘실대는 능선의 파도를 헤치며, 희망의 백두대간을 넘어보자!
영신봉(1651.9m)은 바로 코앞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가까운 거리다. 15시30분 영신봉에 도착하였다. 영신봉은 지리산 남쪽으로 흐른 낙남정맥의 시점이다. 영신봉에서 삼신봉(1284m)을 지나 묵계치로 해서 고운동, 길마재로 뻗어 간다. 또 그 아래 계곡은 대성골로, 빨치산이 최후까지 버티며 항쟁을 했던 격전지이기도 하다. 북쪽으로 내려서면 폭포가 많은 한신계곡이다. 한신 계곡은 백무동 계곡으로 이어지며 함양군 마천면에 닿는다.
16시 10분, 1556고지를 넘어 칠선봉(1576m)까지 왔다. 산그늘이 점점 다가오는 것만 같아 마음이 조급하다. 어둡기 전에 오늘 산행의 종점인 벽소령에 닿아야 할텐데 걱정이 든다. 주변 경치나 산세를 살피는 것도 잊으면서 걸음을 옮긴다.
16시 50분, 선비샘에서 수병에 물을 가득 채우고 세수를 했다. 물량이 많고 물맛이 참 좋다. 교행하던 어떤 등산객이 조금만 가면 물맛이 기가 막힌 곳이 나올 거라더니 사실이었다. 일행 모두 지친 몸을 쉬어서 가자고 하였다. 지도상으로 한 시간 거리가 채 못 남았으니, 늦어도 여섯시 근방엔 도착할 수 있으리라. 이제 덕평봉만 돌아치면 된다. 덕평봉(1521.9m)을 지나 내림길을 타다가 다시 봉우리 하나를 넘어 갔다. 1426고지다. 빨치산 전사들이 온통 꽃밭인 이곳을 꽃대봉이라 이름지었던 곳이다. 꽃대봉을 내려서니 이정표가 있다. 벽소령 1.1km 팻말이다. 이곳에서 부터는 잔자갈이 깔린 평지길의 연속이었다. 구불거림이 거의 없는 잘 닦인 길이다. 윗쪽은 능선이고 길 아래는 내려다 보기도 아찔한 매우 급한 벼랑이었다. 급한 사면에 구상나무가 드문드문 보이고 건너엔 군락지가 있었다. 길이 닦여진 모양새로 봐선 빨치산을 소탕하거나 아니면 임도로 쓰였던 옛 차도일거라는 생각이 든다. 터덜거리며 잔자갈 길을 걷기가 지루하다고 느낄 때 쯤, 저 만치 둔덕 아래 벽소령대피소가 모습을 드러냈다. 반가웠다. 안도의 숨이 절로 나온다. 17시 50분, 벽소령대피소에 드디어 도착하였다.
5.
벽소령의 달밤.
벽소령(1350m)은 지리산 종주 구간 능선에서 가장 해발이 낮은 곳이다. 지리산 10경중에 '벽소령의 달(제5경)'이 그 하나다. 너무 희다 못해 푸르빛이기에 벽소(碧素)라 이름 짖는가보다. 남쪽의 하동군 화개면과 북쪽의 함양군 마천면을 잇는 종주 능선 상의 고갯마루가 벽소령이다. 1996년에 새로 지은 대피소가 있다. 약 150평 규모에 수용 인원은 140명이다.
동족 상잔의 비극은 지리산 곳곳에 전설같은 얘기를 골마다 흩어 놓았다. 벽소령에서 하동으로 내려서다 중허리 쯤에 빗점골이 있다. 예전, 지리산의 나무을 이용하여 빗을 만들던 곳이어서 빗점이라 불리었다. 1953년 9월, 산자락에 가을 빛이 서서히 물들어갈 무렵, 전설적 인물인 지리산 빨치산 총사령관 이현상이 토벌대의 총탄에 굴곡진 인생을 마감한 곳이다. 일제 강점기엔 투옥과 투쟁을 일삼으며 빼앗긴 강토를 찿겠다고 온몸을 내던졌으나, 그 시대 이 땅의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사상의 여지는 별로 없었을 것이다. 사상을 떠나서 이 땅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부분에 대해서는 올바른 평가가 있어야 하겠다. 지리산은 해방 이후 여순 사건을 거치면서 이 산속으로 숨어 들어와 암약하며 한국전쟁의 소용돌이와 그 후의 토벌 과정을 거치는 사이, 피아 합하여 약 2만 여명이 목숨을 잃은 비극의 땅이 됐다. 이런 쓰라린 역사를 거울로 삼아 다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이다.
벽소령 대피소 관리실에 들러 예약 사항을 문의하니 예약이 되어 있었다. 은근히 근심했던 것이 기우가 됐다. 일주일 전, 처음 예약을 인터넷으로 신청하였으나 신청자가 밀려 마감이 됐었다. 계속 예약 사항을 주시하던 중, 태풍이 올라 온다고 기상예보가 있던 엊그제 아침, 마침 그날 새벽에 비가 왔었다. 혹시나 하고 예약 사항을 검색하니 대기예약자로 등록할 수 있었다. 한사람이 두명만 동행자로 등록할 수 있기에 아내의 신상을 입력하여 겨우 일행 네명을 대기자 명단에 넣을 수 있었다. 그 동안 태풍 예보로 취소자가 많이 생겼던 것 같다.
잠자리를 배정받고 서둘러 취사 준비를 하였다. 내일 아침과 점심까지 다 해놓아야 하기에 코펠 가득 밥을 하였다. 된장찌개를 끓이고 싸온 밑반찬을 풀어 놓았다. 맛있는 성찬이 됐다.
오늘이 음력으로 열사흘이라고 한다. 빗껴가기도 어려운 열사흘 달이라니---.
대피소 너머에서 달이 떠오르고 있었다. 벽소령의 달이 떠오른다. 휘영청 밝은 달이 동녁 저편에서 희다 못해 푸르름을 머금고 산능선을 딛고 올라선다.
"오-! 벽소령의 달님이여!"
무어라 표현할 말을 잊고 말았다. 그저 탄성만이 대신한다.
지리산 팔경 중 하나인 벽소령에서 떠오르는 달을 볼 수 있는 가피를 입다니---. 하늘은 구름 한점 없이, 떠오른 달 주변의 별이 초롱초롱하고, 맑고 상큼한 대지의 공기, 수목의 향기, 유쾌한 담소, 그리고 한 잔의 술- 가히 신선의 경지가 아니겠는가!
벽소령의 달이 떠오른다.
푸른달이 떠 오른다.
마고할미 품에서 벗어나고파
산자락 능성이를 딛고
푸른달이 떠 오른다.
꽃대봉에서
거림골에서
빗점에서
음양수에서
하다못해 뱀사골에서
인간의 피를 다 빨아 먹고
푸른달이 떠 오른다.
저녁 식사와 함께 반주로 마신 서너 잔의 술로는 이 밤의 흥취를 마음 껏 풀지 못할 걸 아시는지, 장 상덕 여사가 포켓병에 들은 양주를 배낭에서 꺼내셨다. 내 일찌기 주당이라 일컷기를 꺼렸으나, 술병을 본 내 얼굴은 하회탈이 되었다. 애시당초 컨디션이 저조하여 권함을 사리다가 떠오르는 달에 취해 술맛이 되돌아 온 것이다.
취기가 올라 일행의 손을 붙들고 달맞이를 하였다.
"저기 달 좀 보십시요"
대피소 뒤에서 떠오르는 열 사흘 둥근달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웠다.
"부처님의 가피인가 봅니다."
"우리 모두 복받은 사람이지요"
달을 배경으로 플레쉬를 터트렸다. 달빛이 밝아 주위를 분간키 쉬워 많은 사람들이 달구경을 하려고 밖에서 서성거렸다. 등로길 가에 쳐진 울타리에 사람들이 쭉 기대어 달구경을 한다. 희다 못해 푸르기에 벽소(碧素)라 칭한 의미를 알 수 있겠다. 맑은 공기의 산등에선 달빛이 주위의 어둠에 희석되어 푸르게 보이는 것이다.
6.
둘째 날.
아홉 시에 일제 취침을 하라는 대피소 관리원의 말에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여섯 시, 예약자 예비 점검 때 훈계조의 말이 거슬려 규칙을 따라 주어야 겠다고 맘을 먹었다. 어떤이가 과음하여 잠자리에 들었는데, 소변을 보러 이층 마루방에서 내려 오다가 실족하여 큰 부상을 입었었다고 하였다. 밤 아홉 시면 일제 소등이니 미리 준비하고 잠자리에 들라고 한다.
곤히 한잠을 자고 시계를 보니 거웃 두 시다. 엎치락뒤치락거리며 다시 잠을 청하였으나 정신만 말똥거렸다. 앉았다 일어났다를 반복하다가, 배낭을 주섬주섬 챙겨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 달은 서녁으로 기울고 있었다. 고즈넉한 사위는 간밤의 푸른달을 처량맞게 하였다. 깊은 산중-이제는 달보다 별이 눈에 찬다. 동녁의 샛별이 찬연하다. 북극성은 늘 같은 밝기로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간밤의 그 푸르던 달이
별빛에 스러져 처량맞은 것은
빗점골의 원혼이 저 별 속에 숨어서
달을 침노했기 때문입니다.
수병 몇 개를 들고 샘으로 내려 갔다. 대피소에서 한참이나 계단을 내려 가야만 했다. 근 오십 미터는 떨어진 듯하다. 물을 떠 갖고 다시 올라 오는 것도 고역이였다. 엊 저녁 먹고 남은 밥을 다른 그릇에 퍼 담고, 솟 밑에 누른 밥에 물을 붓고 죽을 끓였다. 된장찌게도 다시 데우고 하는 사이 정인철씨가 밖으로 나왔다. 산꾼들이 하나 둘 취사를 하려 밖으로 모여 들었다. 어떤 팀은 벌써 세 시 경에 간단한 간이식으로 식사를 마치고 떠났었다. 멀리서 와 오늘 산행을 마치고 되돌아 갈려면 그래야 하겠다. 천왕봉을 거쳐 백무동으로 내려 서서 서울행 버스를 타려면 어쩔 수 없을 것이다.
네시 반 무렵 여사님들을 깨웠다. 아직 덜 깬 잠에 졸리운 기색이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으라 일렀다. 오늘 걷는 거리도 만만치 않다. 어제 걸은 거리가 19.7km 였고, 오늘도 16.8km나 걸어야 하기 때문이다.
7.
노고단 가는 길.
05시30분, 사위가 밝기를 기다려 훤해지자 벽소령을 나섰다. 오늘도 날씨는 어제 만큼이나 쾌청하다. 가다가 일출도 볼 수 있겠다는 기대감을 갖고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떠났다.
고저 차이 백십 미터 정도의 형제봉(1433m)은 40분 거리에 있었다. 벽소령에서 1.5km 떨어진 지점이다. 고샅길을 돌아 흙이 패여 너덜지대 처럼 되버린 언덕을 오르니 이정표에 형제봉 팻말이 나왔다. 옛날 도를 닦던 두 형제가 있었다. 마주 앉아 아무리 열심히 용맹전진하여도 도를 깨닫지 못 하였다. 그래서 형제는 등을 맞대고 서로를 보지 않고 용맹정진 하였다. 마침내 깨우쳤으나, 그 순간 형제는 몸이 굳어 돌이 되고 말았다. 몸이 굳어 돌이 될 정도로 용맹정진 하여 도를 깨달았지만, 몸은 이미 죽은 돌덩어리가 되었으니, 무슨 소용이 있을까! 형제봉은 지금도 형제가 등을 돌린 모습을 하고 있다. 형제봉의 암릉을 옆으로 끼고 돌아 내리막을 지나 다시 오르막을 오라 서니 천왕봉 봉우리에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아마 삼각봉을 오르는 언저리로 기억되는, 등로 옆 작은 바위 위로 올라서서 장엄한 일출 광경을 보았다. 눈부신 해가 천왕봉 암릉을 지탱하며 활화산 처럼 피어 오른다. 마치 거대한 불꽃이 작열하듯, 온 천지를 불살라버릴 기세로 끊임없는 섬광을 내뿜으며 떠오르고 있다.
"오-! 눈부신 태양이여!"
탄성이 절로 난다.
"해야 솟아라! 둥근 해야 솟아-라!"
유행가 첯 소절을 부른 뒤 더 이상 가락을 잇지 못 하였다. 대 자연의 장엄한 광경에 말을 잊었다. 그저 감탄만이 있을 뿐이다. 백두대간 첯 산행의 가피를 너무 많이 받는 것이 송구스럽지 않은가! 고맙구 감사하다. 너무도 고맙구 감사합니다.
떠오르는 해를 향해 디지탈 카메라를 들이대고 연신 셔터를 눌렀다. 역광이라서 제대로 나올까 염려가 되었지만(디지털 카메라는 역광에 그다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런 기회가 언제 또 다시 올까 보냐. 천왕봉을 배경으로 일출를 감상하기엔 더 없이 좋은 자리였다. 지리산 십경에 천왕봉에서의 일출을 으뜸으로 친다지만, 그 일출은 실제론 천왕봉이 배경에서 빠진 것이 아닌가. 동서로 이어진 능선상에서 동녁의 일출 장면을 보려면 이 자리가 가장 알맞은 곳이라 생각된다.
능선상의 삼각봉(1462m)은 형제봉과 연하천 중간 쯤에 있었다. 고저 차이가 별로 나질 않아 둔덕을 하나 내려 갔다가 올라 서면 된다. 남원시 산내면과 함양군 마천면 그리고 하동군 화개면이 서로 맞 닿은 삼각 지점에 있어 삼각봉이라 부른다. 삼각봉에서 사면을 따라 가다가 숲으로 들어서면, 길 바닥이 물로 흥건해지며 철망 울타리가 오른쪽으로 길따라 서 있는 곳이 있다. 이곳이 연하천(1480m)이다. 수량(水量)이 풍부하여 오래 전부터 야영지로 애용되던 곳인데, 지금은 능선상의 어디에서도 야영을 할 수 없다. 수목과 야생초를 보호하기 위해서다. 대신 곳곳에 대피소가 있어 별 문제 없다. 연하천 대피소는 예전 모양 그대로 였다. 돌과 시멘트로 쌓은 아담한 곳이다. 하지만 시설이 낡아 지금은 이용객이 다른 대피소에 비해 적은 편이다. 수용 인원도 50명 밖에 되질 않는다. 대피소 주변은 등산객들로 붐볐다. 물이 흔하니 세수도하고 수통에 물도 채우고 쉬었다 가기 알맞은 곳이다. 간이 식품도 구입할 수 있어서 더욱 좋다. 우리 일행도 세수를 하고 칫솔질도 하였다. 비누나 치약은 애시당초 갖고 다니질 않으니, 그냥 물로 헹구는 정도 이지만 별로 꺼림직하지 않다. 진정한 산꾼이라면 이 아름다운 산하를 잘 보존하고 가꿀줄 알아야 할 것이다. 산에서 나는 풀 한포기 나무 한그루라도 소홀히 여겨서는 안된다. 하다못해 돌멩이 하나 흙 한줌 이라도 있는 자리에서 옮겨서는 아니된다. 자연을 소중히 간직하여 후세에게 물려 주는 것은 선조로서의 당연한 의무이자 책임이다. 후손에게 재산을 물려준들 만대를 이어 갈 것인가. 하지만 이 아름다운 강토는 자손 만대에 걸쳐 물려줄 수 있는 가장 큰 재산일 것이다. 우리가 잘 가꾸어 물려 주어야 아랫대에서 물려 받아 잘 보존하여 그 다음 세대에 다시 물려 줄 수 있을 것이 아니 겠는가! 자연은 한번 잘못되어 망가뜨리면 복구하기가 쉽지 않다. 또 복구 하는데도 시간이 많이 걸릴 뿐더러, 원상 회복이란 원천적으로 불가능 하다.
연하천에서 명선봉(1586.3m)으로 오르는 길은 나무 계단으로 되 있었다. 07시 10분 출발이다. 나무 계단 오르기는 같은 각도의 비탈길 오르기 보다 더 힘들고 무릎에 무리가 온다. 연하천에서 약 백미터의 고저 차이가 나는 길을 계단으로 반쯤은 오르는가 싶다.
이어 3km 정도 떨어진 토끼봉으로 향했다. 지리산의 수많은 봉우리를 지나다 보면 지도상의 봉우리를 지나 칠 때가 있다. 표식이 없는 경우도 있고, 고저 차이가 분명치 않아 이곳이 봉우리 정상인지 분간이 안될 때도 있다. 능선 상에 이정표는 자주 있지만 산마루 정상을 표시하는 표지석은 드물었다. 능선상에서의 거리 감각은 있지만, 자주 오르락내리락 하다보면 고저 감각이 둔해 진다. 주변 시야가 탁 트였다면 몰라도 숲이 우거진 길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토끼봉(1533.7)이라 이름한 것은 반야봉에서 묘방(卯方), 즉 정 동쪽에 자리한 봉우리라 해서 토끼봉이란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토끼봉 오르는 길은 가파랐다. 명선봉에서 1463 고지까지 내려와서 다시 올라서야 하니 숨이 찬다. 나무 등걸로 계단을 만든 길을 따라 한참을 힘겹게 올라선 뒤, 다시 외돌아 내려 갔다가 또 올라 채야 산마루에 닿는다. 8시 18분에 도착했다. 연하천에서 한 시간 여를 걸어 온 것이다. 토끼봉에서 화개재는 내리막이라 속도를 내어 걸으니 20분만에 다달은다. 어제의 늦은 걸음을 오늘 보상이라도 하는 듯 모두들 잘 걷고 있다. 특히 장여사님은 쉬지 않고 앞장서서 걸어 가셨다. 부군이 뒤에서 부르는 데도 못 들은 척 내 다른다. 무슨 일인지 모르지만 부군과 심기가 뒤틀린 게 있나보다. 부군인 정인철씨는 뭔가 미안한 마음인지 자꾸 히죽거렸지만 장여사는 내색하지 않고 앞서 가시기만 하셨다. 나도 부지런히 따라 갔으나 끝내 놓치고 말았다.
화개재에서 북쪽 뱀사골 방향으로 200m 쯤 아래에 '뱀사골 산장 대피소가 있다. 수용인원 100명의 중급 대피소다. 화개재(1315m)는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과 전라북도 남원시 운봉읍을 잇는 잿마루이다. 옛적 남쪽의 소금을 비롯한 수산물과 북쪽 내륙 지방의 특산물이 소통하던 주요한 길목이었다. '화개재무더미'란 옛날 운봉 사는 소금장수가 화개에서 소금을 지고 화개재를 넘다가 지쳐 죽었는데, 그 아들이 찿아와서 아비의 장례을 치루고 무덤의 봉분을 크게 잘 꾸며 놓은 데서 비롯됐다.
8시 47분에 화개재에서 곧장 ㅇ.8km 떨어진 삼도봉, 일명 날라리봉(낫날봉-낫의 날 모양의 봉우리)으로 오른다. 나무계단을 끝도없이 올라가자니 너무 힘이 든다. 마치 티브이에서 본 히말라야를 오르는 등반인처럼 천천히 한계단 한계단 숨을 몰아쉬며 걸어 올라 갔다. 그렇게 한참을 올라 가다가 허리에 찬 카메라가 계단 위로 떨어 졌다. 그런데 건전지가 쏟아져 계단 밑으로 하나가 떨어지는게 아닌가. 계단 밑으로 가려면 난간을 넘어 가야 하는데 허리 구부릴 기운도 없어 난감하다. 그냥 계단에 털썩 주저 앉아 숨을 돌린 뒤 주울 것인가 말 것인가 결정하여야 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뒤에 붙어 따라 오던 정인철씨가 얼른 난간을 넘어가 줏어 온다. 고맙구 죄송하다. 힘들기는 마찬가지 일텐데 배려를 해 주시니 황송한 마음이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앉은 김에 쉬어 가야 겠다. 배낭에서 쵸컬릿을 꺼내 일행에게 권한 뒤 하나를 먹었다. 물도 충분히 마시고 하여 기운을 차려 다시 걸었다.
수백 개의 계단을 걷기가 여간 고역스럽지 않다. 그렇게 수없이 많은 계단을 올라 선 곳, 그 곳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삼도봉()에 이르렀다. 9시 23분이다. 노고단이 5.5km 남은 거리다. 천왕봉이 여기서 딱 20km이다.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 이렇게 세개의 도가 만나는 지점이다. 청동으로 된 삼각봉에 각각 도명을 방향에 마추어 새겨 넣어져 있었다.
마당처럼 넓고 평평한 바위 위에서 삼도를 단번에 돌아 본다. 남동 쪽은 경상남도 하동이고 남서는 전라남도 구례, 북쪽은 전라북도 남원이다.
과일과 과자로 허기를 때우고 다시 몸을 추스렸다. 삼도봉에서 흙이 패여 너덜처럼 되버린 비탈길을 내려와 작은 둔덕을 올라 선 곳이 노루목이었다.
우측으로 지리산 제2봉인 반야봉(1715m)이 수려한 자태를 뽐내며 있었지만 비켜 갔다. 반야봉을 오를려면 두 시간 가까이 소비해야 하는데, 힘도 들고 오늘이 첯 구간 마지막 날이라 집으로 올라갈 일도 있고 해서다. 무엇보다 백두대간의 능선상에서 반야봉은 벗어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물론 보는 이에 따라서 의견을 달리 할 수도 있지만, 내가 보는 견지에서는 반야봉이 북쪽으로 뻗은 심마니 능선으로 흐른 산줄기이다
반야봉을 바른쪽에 두고 평탄한 옆구리 길을 걸어 갔다. 왼쪽에 피아골이 수목을 벗어 날 때마다 드러나곤 한다. 피아골의 유래는 옛날 이 곳에 직전(稷田-기장밭, 피밭)이라고 하는 피밭골이 있었는 데(지금도 직전이란 동네가 있다.), 피밭이 피아로 발음이 바뀐 것이다.
10시 18분, 임걸령 샘터다. 샘터는 목책(木柵)으로 잘 정비되어 있었다. 1432고지에서 임걸령에 이르는 길은 목책과 계단으로 정비되어, 중간에 전망대까지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를 내려오면 우측으로 뱀사골과 반야봉 방향으로 가는 목책이 있고, 곧바로 임걸령 샘터에 닿게 된다. 고갯마루 주변은 목책으로 싸여 있고, 전망대가 있다. 바로 가면 노고단 길이다.
수통에 물을 채울까 하다가 노고단이 삼사 킬로 밖에 남질 않았기에 그냥 지나 쳤다.(나중에 노고단에 도착하여 후회 했다. 필히 물을 채울 것-노고단엔 물이 없음)
10시 28분, 피아골 삼거리. 길은 완만하여 걷는데 전혀 무리가 없다. 점점 노고단이 가까이 눈에 잡힌다. 10시 39분 이정표가 있다. 노고단 2.1km. 돼지 평전이 드넓은 초원을 이루며 눈앞에 펼쳐 졌다. 계속 완만한 내리막 길이다. 10시 50분 돼지 평전이란 팻말이 붙은 능선 마루에 이르렀다.
멧돼지가 자주 출몰하는 곳이라 한다. 산구릉의 초원 지대이다. 시야가 트여 조망이 참 좋다. 가끔 씩 부는 산들바람이 가벼히 몸을 감쌌다. 느낌이 좋아 발걸음은 한결 가벼워 졌다.
노고단 돌탑이 정면으로 보였지만, 지금은 정상으로 바로 드는 길은 폐쇄되고, 우측으로 약 일킬로 지점에 노고단 통제소가 있는데 그리로 가야 한다. 노고단 가는 길은 우측으로 에둘러 숲길을 지나간다. 1km는 훨씬 넘을 듯한 숲길엔 각종 풀꽃들이 피어 있었다. 늦여름이라 빼어나게 이쁜 꽃은 드물지만, 향기는 넘친다. 특히 요즘에 피는 싸리꽃은 꽃술이 크고 꽃내음이 참 좋다.
11시 30분, 드디어 노고단에 도착하였다. 저 만치 바위 위에 장상덕 여사가 알아보고 손짓을 하였다. 일치감치 도착한 듯 편한 모습으로 산바람을 쐬고 있었다.
"고생하셨읍니다. 어서오세요!"
"아이구, 부지런히 걸었지만 따라잡질 못했읍니다."
"전 도착한지 20분 됐어요!"
8.
구간 산행의 끝자락
나머지 두 분도 곧 도착하였다.
"어이구! 수고 많으셨읍니다."
"예! 모두 수고 하셨읍니다."
힘든 산행의 끝자락이 보여선지 모두들 희색이었다. 잠시 숨을 돌리고 밥을 먹기로 했다. 엊저녁에 미리 해 둔 식은밥을 물에 말아 먹었다. 아직 밑반찬도 남았고 고추도 있고 된장 고추장도 있어서 그런대로 먹을 만 하였다. 노고단 탐방을 인터넷으로 두 시에 예약을 하였기에 시간이 넉넉하다. 혹시나 1시 탐방이 가능한지 서여사님이 관리소에 알아보니 가능하단다. 밥을 먹고 맨바닥에 길게 누우니 금방 잠이 들었다. 한낮의 볕이 강했으나 산공기가 차서 괜찮았다.
맛있게 낮잠을 즐기는데 깨운다. 탐방 시간이란다. 예전에는 노고단 일대가 야영지라서 온통 성한 구석이 한 군데도 없었다. 그러던 것이 십여 년 전부터 야영을 금지 시키고, 노고단 마루 일대는 출입금지 구역을 만들어 복원 사업에 들어 갔다. 그러기를 십여 년, 지금은 복원이 많이 이루어져 몇 년전부터 제한적인 개방을 하고 있다. 하루에 몇 번 일정한 시간에만 탐방객을 모아 목책으로 된 길로만 다니며 안내자가 설명을 하고 있다.
국립공원 관리원인 젊은 안내자는 유머를 섞어가며 재미있게 설명을 하였다. 지리산의 전설같은 얘기며 노고단을 복원하게 된 사연, 이 일대의 근 현대사의 단편들, 수목과 풀꽃에 대한 설명 등을 이해가 잘 가도록 예를 들어가며 설명을 하였다.
노고단 마루에서 보는 섬진강 줄기의 굽이 도는 물길이 아름답다. 지리산 10경에 들만 하였다. 짙푸른 물이 구례읍을 휘돌아 감싸 안고 남해 바다로 달린다. 지리산의 수많은 전설과 얘기, 사연을 담고 역사를 만들며 흘러간다.
노고단(老姑壇1507m)은 지리산의 산신이신 마고할미(선도성모[仙桃聖母] 라고도 한다)를 제사 지내기 위한 제사터를 말한다. 노고단도 엄연한 봉우리이다. 그래서 그 이름이 길상봉(吉祥峰)이다. 과거 신라시대에는 화랑도의 수련장이었고, 일제시대에는 서양 선교사들의 여름휴양지로 각광을 받았던 곳이다. 지금도 그 흔적이 노고단 일대에 남아 있다.(과거엔 50여채가 있었다고 한다) 서양인들이 우리의 풍토에 적응이 안돼, 여름철이면 각종 유행병에 걸려 특히 어린아이의 사망율이 높았다 한다. 그래서 유행병이 심한 여름 한철을 가족과 함께 이곳 노고단에서 보냈다고 한다.
아고산대(亞高山帶)의 식물이 1000m 이상의 고지에 식생한다. 여름이면 원추리가 이 일대 평원에 만개해 장관을 이룬다.
한 시간 정도 탐방을 끝내고 2시에 노고단을 내려와 대피소에서 볼일을 해결하고 22부에 성삼재로 내려 갔다. 성삼재로 내려오는 길목에 수용인원 160명 규모의 노고단 산장이 있다.
2시 55분, 백두대간 첯 구간 종착지인 성삼재에 당도하였다.
첯 구간 총거리 36.5km, 21시간 20분(탐방 및 기타 시간 포함)의 첯 구간 장정을 끝낸다.
성삼재에서 택시를 타고(대절료 2만5천원) 구례 읍내 사우나로 향했다. 한적한 소읍이어서인지 탕안은 텅텅 비었다. 더우기 휴게실은 우리 일행 밖에 없었다. 올림픽 경기 핸드볼 결승전을 TV로 보았다. 연장전에서도 승부가 나질 않아 승부던지기에서 안타깝게 지고 말았다. 아쉬움이 남는 경기였다.
상행 열차가 밤 11시 20분에 있어 시간이 충분한 관계로 7시 쯤에 사우나를 나와 택시로 구례구역 근처 참게탕집으로 갔다.(요금5000원) 구례읍과 기차역이 있는 구례구역은 지역이 떨어져 있다.(택시로 20분 쯤-정확지 않음)
참게탕을 시켰다. 섬진강에서 잡히는 참게가 맛이 좋다는 것은 미식가라면 알 것이다. 4인이 소주를 곁드려 실컷 먹어도 5만원이면 족했다.
식사를 하고 어두워진 길을 따라 구례구역으로 걸어갔다. 섬진강 다리를 건너니 바로 역이었다. 밤길에 섬진강 다리에서 강을 굽어보는 경치도 괜찮다.
밤 11시20분 우등열차를 타고 수원역에 도착하니 다음날 새벽 3시였다. 경비가 남았다고 서여사께서 택시비까지 챙겨 주신다.
이번 산행에 동참해 주신 정인철씨 내외분과 서순덕 여사님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나무아미타불.
첫댓글 탄일 님 글잘읽어습니다 일찍 보지못해죄송합니다 111111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