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자그마한 한옥 마을에서 열린 축제이다. 옛것에 대한 향수에 젖은 어른들에게, 전통문화의 아름다움을 모르며 자라는 아이들에게 참 좋은 기회를 제공할 것이란 기대감 속에 축제 전부터 잔뜩 기다렸다. 제기차기, 한과만들기, 두부만들기, 솥뚜껑에다 전 부쳐 먹기, 등등 체험행사가 풍부해서 아이들에게 교육적으로 아주 좋은 행사가 될 것 같았다.
현학이와 나는 토요일부터 행사를 즐겨 보았다. 둘이서 손을 잡고, 돌담길을 종종 걸음으로 걸어다니며 이런 저런 행사에 참여했다. 떡메 치기나 두부만들기 체험은 다른 곳에서 해 보던 것이다. 또 디딜방아나 맷돌 돌리기, 절구방아 등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실제 사람들이 살아가는 냄새가 나는 이곳에서의 체험은 더욱 실감나고 재미있다는 것이다.
늦가을 들녘의 고즈넉함이 느껴지고, 초가집 지붕의 이엉의 색이 회색빛으로 바래져 가고, 말라가는 호박 줄기 끝에 무겁게 매달린 호박의 누르딩딩한 모습이 체험장의 분위기를 더욱 실감나게 해 주는 것이었다.
염치 불구하고 이집저집 기웃거려 가며 문고리를 잡아 보았다. 반질반질한 문고리에 묻어 있는 삶의 연륜이 갑자기 신비한 전설을 풀어내고 있었다. 오랜 세월 동안 전통가옥의 구조 속에서 가꾸어져 오던 오래된 마을의 이야기가 솔솔 들려오는 것 같았다.
잠시 꿈을 꾸어 보았다. 아궁이에 불을 지피고, 커다란 가마솥에 콩깎지며 잘게 썰은 짚단, 죽재를 퍼놓고 물을 부어 끓인다. 마당가에 있던 소를 끌어다가 외양간에 넣고 뜨거운 소여물을 퍼다가 여물통에다 쏟아 붓는다. 김이 모락모락 올라가는 여물을 소는 잘도 먹는다.
여물을 퍼낸 가마솥을 씻어 부시고 깨끗한 물을 퍼다 붓는다. 아궁이의 온기로 물이 따뜻하게 데펴지면 온 가족이 돌아가며 세수를 한다. 어느새 가마솥 옆의 작은 솥에서 밥 짓는 냄새가 나고 제일 작은 국솥에서도 폭폭 김이 나기 시작한다. 안방에 두레반을 펴고 온 가족이 둘러 앉아서 저녁 식사를 한다. 김장 김치를 푹푹 찢어가며 반찬하고 푹 절인 도루메기 지짐이에 뜨거운 밥이 목으로 잘도 넘어간다. 게다가 시원한 된장 배추국 맛도 좋다. 여물통을 비우고 드러누운 소의 되새김질이 시작되고, 밥을 다 먹은 아이들은 아랫목을 차지하고 앉아 장난들을 하고, 30촉 백열등 아래 부엌의 희뿌연 연기가 화면을 흐리게 한다. 기억 저편이 흐려져 온다.
이제 사랑방 아궁이에 불을 지필 일이 남았다. 공부하는 큰애의 방에 불을 지핀다. 밤새 공부하느라 잠도 못 잘 큰애를 위해 장작을 잔뜩 집어넣는다. 벌건 숯의 일부는 화로에 담아다가 안방에 갖다 놓는다. 둥그런 요강단지까지 부셔다가 마루끝에 놓고 고구마 씻어 바가지에 들고 방으로 들어간다. 화로불에 몇 개 박아놓고 흑백 텔레비를 보다 보면 구수한 냄새 풍기며 잘 구워질 것이다.
문풍지 떠는 소리에 마른 나뭇가지 그림자가 창호지 문에 어린다. 넉넉하지는 않아도 포근한 접촉 속에 혼자 있는 느낌은 절대로 들지 않는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이 느껴지고, 부부의 정이 쌓여가고, 별들도 들판에 내려와 쉬었다 가는 따뜻한 겨울이 깊어간다.
왕곡마을 축제는 잊고 지내던 그 시절을 새록새록 떠오르게 한다. 언제까지나 그 마을 집집 굴뚝에서 끼니때마다 연기가 피어오르기를 바란다. 또한 돌담길마다 아이들이 뛰어놀기를 바란다. 뒷집 덩치 큰 녀석에게 맞아서 코피를 흘리며 징징 우는 녀석이 걸어갔으면 좋겠고, 숨바꼭질하는 아이들의 속살대는 웃음소리가 들렸으면 좋겠고, 아침이면 머리에 키를 쓰고 바가지를 든 녀석이 힘없이 걸어갔으면 좋겠고, 잡다한 소꿉장난 놀이를 하느라 바쁜 계집아이들이 종종 걸어갔으면 좋겠다.
왕곡마을은 부디 민속촌이나 안동 하회마을처럼 껍데기만 남은 전시공간이 아니라, 전통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사람들의 삶이 푹 절여 있는, 현대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터전으로 유지되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