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말에 백죽당(栢竹堂) 선생이 의(義)를 실행하여 스스로를 편안히 여겼으니 그 분의 높은 풍격과 빼어난 절개는 역사책에 실려 있으며 지금까지도 앙모(仰慕)의 정성을 다해 그 분을 제사하고 있으니, 아! 위대하구나. 그 분의 후손들이 우리나라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어 이루 다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인데, 영주의 동막(東幕)에도 또한 그 분의 후예들이 살고 있다. 한말(韓末)의 첨추(僉樞)인 상길(相吉)이 이곳에 세거하였다. 그 분은 비록 세상에 알려진 바는 없지만 유학을 돈독히 공부하였고, 평소에 바른 인륜을 숭상하여 남이 알아주기를 구하지 아니하였고, 공리를 도모하지 않았으며 어버이를 섬기는 데는 효성을 다하였다. 하루는 반찬거리를 구하지 못하여 걱정을 하던 중 홀연히 꿩이 뜰 앞에 날다가 떨어지니, 이것은 천신(天神)이 감동하여 구하던 반찬거리를 얻게 하는 것이라 여겨 그것으로 봉양을 했다. 또 갑오년(甲午年)에는 도적의 무리들이 온 동네를 분탕질하였는데 형제가 늙은 부모를 업고 산골에 들어가 이불을 두르고 있었다. 도적들이 몰려와서 해치려 하자 공이 울면서 애걸하니, 도적들이 그 효성에 감동하여 다른 곳으로 피해갔다. 장공이 궁벽한 산골에서 평소에 거처하였는데, 고개 길을 넘어 하루도 빠짐없이 문안을 하였으니 그 타고난 우애가 놀라웠다. 참으로 한자(韓子)의 말과 같이 옛날의 동생(董生)인들 이보다 더 나았으랴? 살았던 곳 동호(東湖)는 천석(泉石)이 아름답고 모래가 맑고 물길이 길어 비단 잉어들이 헤엄치고, 교통이 편리하고 들에는 오곡이 무성하였다. 일찍이 여기에 정자를 짓고서 만년의 즐거움을 즐기려 하였는데 고을의 사우들이 시를 지어 책을 이루었다. 공이 세상을 하직한 후에 장남 현봉(顯奉)이 선친의 생각을 받들어 밭과 집을 사서 정자를 대신하였으나 중간에 비바람이 들어 치고 세월이 오래되어 훼손되어 무너졌다. 손자 맹주(孟周)와 일주(一周)가 선친의 뜻을 이어 받아 다시 지을 것을 잘 운영하여 옛 집을 헐고 새로이 말끔히 지었다. 가운데 칸은 마루이며, 양 옆은 방이다. 재(齋)에서 잠자기도 편하고 술회하기에도 적당하다. 공사가 끝날 무렵에 일주가 멀리 마산(馬山)으로 찾아와 기문을 청하였는데, 내 어찌 그 글을 감당하겠는가? 사양하여도 듣지 않기에 더 사양할 수 없었다. 이로 인하여 생각하니, 효도와 공경은 사람 되는 근본이니, 근본이 확실히 서면, 착실한 도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성인들이 경전에서 경계를 드리워서 세상 사람들에게 지키고 닦아야 함을 간절히 밝혀 나타내었다. 옛날의 선왕고가 이미 효우로서 한 가정을 이끌었고, 향리에 소문이 나서 계속하여 효자와 자손들이 선세의 덕을 닦아 더욱 가문을 빛내고, 옛 것을 새롭게 한다면 실로 복선유후(福善裕後)의 업이 이 밖에 또 있으리요? 정자를 새로 지어 보기가 좋은 것 보다 계승해 가는 그 뜻이 매우 가상하여 칭송한다. 장래의 촉망을 기대하는 바이다. 경신(庚申) 맹춘(孟春)에 영양(永陽) 이용구(李龍九)가 쓰다. - 이용구(李龍九), 『만성문집(晩惺文集)』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