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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테네: 무명용사의 비, 국립 고고학 박물관, 그리고 수니온 곶 (포세이돈 신전)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없다."
- 단재 신채호 (申采浩:1880~1936)
2015년 9월20일(일) 아침, 9시경 신타그마 광장에 있는 국회의사당 건물 정면의 무명용사의 비 앞에서 거행되는 근위병 교대식을 구경하러 갔다. 무명용사의 비는 1458년부터 시작된 오스만투르크(터키)의 지배에서 벗어나기 위해 1821년부터 9년간에 걸친 그리스 독립 전쟁 때 전사한 군인과 그 후의 여러 전쟁에서 사망한 무명용사를 위해 만들었다. 그리스 (아테네)는 기원전 335년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마케도니아에 점령 당한 이후, 기원전 168년에는 로마 제국에 점령되어 속지가 되었고, 이후 동로마 제국 시대를 거쳐 15세기부터 오스만 제국의 식민지배를 받았는데 이 기간을 전부 합하면 나라 잃은 기간이 무려 2,000년이 넘는다. 단재 선생님의 말씀대로 그리스인들은 그들 민족의 역사를 잊지 않았기에 나라를 되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중앙에는 전사해 누워 있는 병사의 모습과 양옆에는 역사가 투키디데스의 명언이 새겨져 있는데, 오른쪽엔 '영웅들에게는 세상 어디라도 그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 왼쪽엔 '누워 있는 용사를 위해 빈 침대가 오고 있다' 라고 씌여 있다.
짧은 퀼트와 신발 끝에 귀엽게 생긴 털공이 달린 그리스 전통의상인 에브조나스(Evzones) 차림의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는데 고참으로 보이는 정복 차림의 근위병이 중앙에 서서 경례를 하는 것으로 교대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이런 장면을 봤을 때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한편으로 부러운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우리나라도 일본 제국의 침략에 맞서 풍찬노숙하면서 가열차게 투쟁했던 임정 요인과 삼의사가 묻힌 용산구 효창공원을 국립묘지로 지정하고, 이곳에 독립군 전몰용사 기념탑을 세우고 이 앞에서 광복군 교대식을 볼 수 있는 날이 왔으면 좋겠다.
이날 근위병 교대식은 매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 두 명이 하는 교대식을 마치고 (다 끝난 줄 알고 자리를 떠서 국립정원을 20~30분 구경갔다 왔는데 2부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 사이 광관객이 인산인해를 이루어 뒤 켠에서는 제대로 볼 수가 없었다. ㅠㅠ ), 수십명의 근위병이 이 곳 광장에서 멋진 교대식을 진행하였고 교대식을 마친 근위병 대열은 4~5열 종대로 해서 긴 대형을 이루어 광장 앞 거리를 행진하여 국회의사당 건물 뒤편으로 사라졌다. 행진 사진을 몇 장 찍었는데... 뭐가 잘못됐는지 1장도 남아 있질 않다. ㅠ
국회의사당 건물에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국립 정원
(나무가 많이 우거졌지만 크게 볼 것은 없었다. 근위병 교대식 2부나 제대로 볼 것을.... ㅠㅠ)
국립 공원 끝자락에 있는 자피온 (Zappeion)으로 국제회의장과 전시장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을 구경하기 위해 국회의사당이 있는 신타그마 광장에서 2호선 지하철을 타고 두 정거장 거리의 오모니아 역에서 내렸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곰곰히 생각해 보니 국회의사당에서 박물관까지 걸어서 갔다. ㅠㅠ
오모니아 역에서 내리면 걸어서 15분 걸린다는데, 우리는 30분 이상 걸었던 것 같다. 국립고고학 박물관 보다 먼저 만나게 되는 아카데미 건물이 마치 박물관처럼 생겨서 건물 이름표를 확인하고 사진도 찍으면서 쉬엄쉬엄 걸어 갔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 가는 길
터키 이스탄불은 시끌버쩍하고 생동하는 젊은 분위기가 느껴졌는데, 이 곳 아테네는 차분하지만, 왠지 늙어가는 도시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건물 벽면의 낙서 (그래피티)에서 고단한 그리스가 느껴졌다.
오늘(9/20일: 일요일)은 그리스 총선거가 있는 날인데, 도시 전체가 선거가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차분하였다.
아테네 국립 고고학 박물관
워낙 많은 전시물을 짧은 시간에 봤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그리스 문명의 역사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기에 찍어 놓은 사진만 보고는 어느 시대의 무슨 유물인지 알아내기가 어려웠다. 빈약한 여행 안내서를 참고해서 조심스럽게 사진 설명을 해 본다. ㅠ
처음 들른 전시관은 그리스 본토의 청동기 문명이라 일컬어지는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00-기원전 1100년) 전시관이었다. 고대 그리스 청동기 문명은 (1) 에게해의 점점히 흩어진 섬 (키클라데스 제도)에서 발생한 키클라데스 문명 (기원전 3300-기원전 2000년), (2)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 (기원전 3650-기원전 1170년), (3) 그리스 본토의 미케네 문명 (기원전 1600년-기원전1100년)의 3가지로 구분된다.
크레타 섬의 미노스 문명에서는 이집트 문명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지는 그런 유물들이 관찰되고 있고, 섬에서 발생한 청동기 문명이 본토의 청동기 문명보다 시기적으로 앞섰다. 인류 문명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처음 발생하여 지중해를 건너 크레타 섬과 키클라데스 제도를 거처 그리스 본토에 상륙하여 꽃을 활짝 피웠고, 오랫동안 그리스 변두리 도시였지만 혁신을 거듭했던 로마로 건너가 위대한 로마문명이 창조되었다. 다시 문명의 주도권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세 프랑스, 15-17세기 대항해 시대의 스페인을 거쳐 18세기 중반에 시작된 산업혁명의 발상지 영국으로 건너갔다. 20세기 초, 세계 제1, 2차 대전을 겪고 나서는 대서양 건너 미국으로 문명의 패권이 넘어가서 오늘에 이르게 된다. 서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던 인류 문명의 중심축은 과연 21세기에 이르러 태평양을 건너 중국으로 이동할 것인가? 21세기 문명의 패러다임은 어찌돼야 하는가? 지금까지 시대별로 등장했던 여러 문명처럼 자원수탈을 기반으로 한 패권주의 문명을 그대로 답습할 것인가? 바야흐로 우리 인류는 지구 문명의 지속 가능성이란 여지껏 경험해보지 못한 어려운 문제에 직면해 있다. 최근에 JTBC에서 일요일 저녁 8:30시에 방영하는 '차이나는 도올'이란 교양프로는 바로 이런 문제를 우리와 중국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자는 취지로 방영되고 있는 것으로 나는 이해한다.
(그리스 본토와 크레타 섬의) 미케네 문명의 발생지 - 출처: 위키 백과
미케네 문명의 유물
미케네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고대 성채로 코린토스에서 48 km 거리에 있는데, 이곳에서 발굴된 황금 마스크를 비롯한 많은 청동기 시대의 유물이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아가멤논의 황금 마스크
금박 형태의 황금마스크는 미케네의 통치자가 사망하게 되면 그 얼굴을 덮는 장례용으로 사용하던 것이다.
청동검
미케네의 들국화(?) 문양
아래 꽃처럼 생긴 것은 마치 연꽃처럼 보인다. ^^;; (석등의 아랫부분 (연화 하대석)을 장식한 복련처럼 보인다.)
미케네 문명의 대표적인 채색벽화.
여기에도 들국화 문양이 띠를 이루어 벽을 장식하고 있고, 여인이 몸을 기대고 있는 의자에도 들국화 문양이 있다.
미케네 유물에서 보이는 들국화 문양은 비단 그리스 뿐만 아니라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 (오늘날 이라크 지역) 및 페르시아 문명 (오늘날 이란 지역)에서도 왕실 건물을 장식하거나, 생활 용품, 의상의 장식으로 두루 사용되었던 문양이다.
아래는 기원전 7세기 신(新) 바빌론 제국의 중앙대로 (행진 거리)를 장식했던 사자가 돋을 새김된 벽면 타일인데 상단부와 하단부를 들국화 문양으로 장식한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EBS 위대한 바빌론 제1부 영상 화면 캡처) 바빌론 유적은 독일의 고고학자이자 건축가인 로베르트 콜데바이가 1899년부터 18년에 걸쳐 발굴하여 500 상자에 이르는 유물을 독일로 가져갔고, 현재 베르린의 페르가몬 박물관에 바빌론의 사자 상, 황소 상, 마르둑 상과 들국화 타일로 화려하게 장식한 행진거리와 이슈타르 문(門)이 원형에 가깝게 복원되어 전시되어 있다. 이 바빌론 행진 거리의 사자 상, 황소 상, 마르둑 상은 터키 이스탄불 국립 고고학 박물관에도 몇 점이 전시되어 있다.
바빌론 제국은 세계 최초의 성문헌법인 함무라비 법전으로 유명한 기원전 19세기 함무라비 대왕시대를 구(舊) 바빌론이라 하고 바벨탑과 공중정원, 유대인의 바빌론 유폐로 유명한 기원전 6-7세기 네부카드네자르 2세 (구약성경에는 '느부갓네살'로 불린다) 대왕시대를 신(新) 바빌론이라고 부른다. 고대 그리스인들이 세계7대 불가사의로 꼽았던 바빌론의 공중정원은 네부카드네자르 2세가 (오늘날 이란 출신) 왕비의 향수병을 달래주기 위해 건설하여 선물한 것이다. 구 바빌론과 신 바빌론 중간엔 구 바빌론을 멸망시킨 앗시리아 시대 (기원전 14세기 전후)가 있었다. 앗시리아는 다시 정복왕이자 위대한 건설왕인 네부카드네자르 2세의 신 바빌론에 의해 멸망하였는데, 함무라비 법전엔 그 유명한 '눈에는 눈' 으로 갚는다는 법조문이 있다. ㅠㅠ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수세기에 걸쳐 바빌론과 치열하게 싸웠던 앗시리아 왕국의 점토판에 새겨진 들국화 문양
아래는 페르시아 제국의 수도였던 페르세폴리스의 계단부 장식인데 여기서도 들국화 문양이 장식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진 출처: EBS 위대한 바빌론 화면 캡처)
이 꽃이 들국화인지 아닌지는 확실치는 않으나, 꽃의 형태 측면에서는 그리스 미케네, 바빌론, 앗시리아, 페르시아 문명에서 사용한 꽃 문양이 서로간에 매우 비슷하게 보인다. 아뭏든 이 들국화 문양은 왕가의 건물, 생활 용품, 의상을 장식하는데 흔히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이 들국화 문양이 기원후 12-13세기에 제작된 고려청자에도 등장한다는 것이다.
들국화 문양이 서로 매우 닮았다.
미케네의 귀부인이 청자 들국화 무늬 합을 들고 있는다 해도 하등 이상하게 보이지 않는다. ^^
나의 직관에 따르면, 고려 청자에서 보이는 들국화 문양도 고대 그리스나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사용된 들국화 문양이 어떤 경로를 통해서 우리나라 고려에까지 전달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
들국화 문양 뿐만 아니라 고대 그리스 문양인 꼬불이 문양 (meander pattern)이 고려청자에 등장한다는 것은 나의 [그리스 여행(1편)] 고려청자와 고대 그리스 유물에서 발견되는 기하학적 문양의 닮은 꼴 에서 언급한 바 있다. 잠깐 복습해 보자. ^^
(1) 고대 그리스 문양 (파도 문양)으로 띠를 두른 고려청자 합, 완, 자판 (타일)
(2) 고대 그리스 문양 (요철 문양)으로 띠를 두른 고려청자 베개
(3) 고대 그리스 문양 (파도 문양)으로 손잡이 부분을 장식하고 몸체엔 이중 나선 문양을 새긴 고려 도철무늬 향로
(4) 아래는 고대 그리스 문양은 아니고, 터키 카파도키아 으흘라라 계곡에 있는 기독교 석굴사원 천정의 문양 (꽃잎이 십자가 모양으로 배치된 사방연속 무늬)과 이와 비슷한 문양을 갖고 있는 고려 청자 향로, 베개
다시 전시물 소개로 들어가서..
유물을 일일이 소개하기엔 지루하니 이제 단체로 등장시켜 설명해 보기로 하자.
새 부리 모양의 토기
유명한 점토 인물상
(왼쪽) 생각하는 사람 (신석기 후반기 작품-기원전 4500-3300년, Thessaly Karditsa 출토) (중간)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상 (신석기-기원전 6500-3300년, Sesklo 출토) (오른쪽) 머리에 장식을 한 여인상 (신석기 초기-기원전 6500-5800년)
청동 거울
드디어 고대 그리스 문명을 대표하는 등신대 인물상의 등장, 쿠로스 (Kouros)
(왼쪽, 중간) 최초의 남성 석상: 앞 모습과 뒷모습 (기원전 600년. 수니온에서 출토). 복근을 세밀하게 묘사하지 못하고 금을 쭉쭉 그어 표현했다 (王 자 표시로 복근을 묘사했다.). 어깨쭉지 근육과 등짝 근육 역시 금을 그어서 표현했다. (오른쪽) 이후에 등장한 쿠로스의 초콜렛 복근은 볼륨감있게 제대로 표현되었다. (기원전 580년 아니면 550년 작품)
(왼쪽)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신상. 그의 상징물인 뱀 한마리가 몸을 감고 타고 오르는 지팡이를 들고 있다. 여기서 뱀은 인간의 재생을 나타낸다. (중간)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치근덕거리는 팬 (샌들을 벗어 팬의 귀싸대기를 한대 친 듯하다.), 팬을 밀치는 아프로디테의 아들, 에로스. 정말 귀엽다. ㅎ (오른쪽) 달의 여신, 사냥의 여신이자 풍요의 여신, 아르테미스 신상 (터키 에페소스에서 출토)
(왼쪽) 저승의 신이자 풍요의 신인 하데스 (플루토스)가 풍요의 뿔을 들고 있다. 오른편엔 그의 아내인 봄의 신 페르세포네가 있고, 그 옆엔 페르세포네의 어머니이자 곡식의 신인 데메테르가 있다. 장모님을 모시고 부부가 사진을 찍은 듯하다. (오른쪽) 바다의 신, 포세이돈 신상. 이곳 아테네의 주신인 아테나와 큰아버지-조카 사이인데, 아름다운 여인 메두사는 포세이돈을 짝사랑했던 아테나 여신의 희생양이었다.
키벨레 여신.
그녀의 상징인 사자가 옆에 있다. 사자가 두 마리여야 하는데... 한마리 밖에 없네?
여걸 아탈란테와 남편 히포메네스는 사냥을 나갔다가 그만 서로에게 욕정을 느껴 키벨레 여신의 신전 (일설에는 제우스 신전)에서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만 키벨레 여신에게 들켜 노한 여신이 이 둘을 사자로 변신시켰다고 한다.
소년 상
왼쪽의 소년상은 ' 어린 난민 (Little refugee)' 이란 제목이 붙어 있었는데, 후두티를 머리에 뒤집어 쓴 채 두 손으로 강아지를 꼭 붙잡아 가슴에 안고 있는 소년의 모습인데, 오늘 날 내전 중인 시리아를 탈출한 어린 난민을 보는 듯하다. 이 작품은 기원전 1세기 작품으로 소아시아의 Nyssa의 Gerontikon에서 출토되었다는데 1922년 실제 그리스 난민이 아테네로 가져 온 것이라 한다. (터키와 그리스 간에 협정을 맺고 터키 지역의 그리스인을 전부 그리스로 추방한 적이 있었는데 아마 이때가 아닌가 싶다. 터키 관광지 페티예를 가면 이때 그리스인들이 버리고 가서 텅 비어버린 마을이 유령 마을로 불리며 관광지가 된 곳이 있다.) 반면 오른쪽 소년은 매우 여유만만하고 행복해 보인다. 오늘날 시리아 난민 소년과 부유한 유럽의 어린이를 보는 것만 같다.
청동상 (최초의 로마황제, 아우구스투스)
속은 텅 비어 있다. 이렇게 얇게 청동 주물을 뜰 수 있다니 놀랍기만 하다.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간판 스타. '제우스 청동상'
(왼쪽, 가운데) 흔히 '포세이돈 신상'으로 알려져 있으나, 안내문을 읽어보면 " '포세이돈 신상' 또는 '제우스 신상'으로 보이나, '제우스 신상'일 가능성이 더 높다. "라고 적혀 있었다. 기원전 460년경의 작품으로 아르테미시온 해협 근처의 깊은 바다 속에서 발견되었다. (오른쪽) 크기가 50-60 cm(?) 정도로 기억되는 또 하나의 자그마한 제우스 청동상. 오른손에 든 것은 그의 필살무기 벼락이다. 품새랑 헤어 스타일이 왼쪽 간판 스타랑 매우 비슷하다. ^^
또 하나의 국립 고고학 박물관의 간판 스타. '말타는 소년 (Jockey boy)'
제우스 신상과 마찬가지로 아르테미시온 해협에서 발견되었다. 힘차게 달리는 말의 힘줄과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말의 얼굴이 정밀하게 묘사되었고 이 위에 올라탄 소년의 말을 모는 모습이 매우 역동적으로 표현되었다.
박물관 어느 전시실에는 열심히 데생을 하고 있는 한무리의 학생들이 있었다.
주마간산으로 국립고고학 박물관을 2-3시간 구경하고, 수니온 곳의 포세이돈 신전을 구경갔다.
여기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 갔는데, 공교롭게 4거리에 위치하고 있어서 어느 쪽 버스 정류장으로 가야할지 몰라서 한참을 헤매었다. 아래와 같이 생긴 버스 정류장 (상단에 '아티키'라고 적혀 있는데 정류장 이름은 아닌 것 같다.)에서 수니온 곶을 가는 버스가 출발하였는데, 점심을 빵이랑 쥬스로 때우고 이곳에서 무려 3시간 가까이 버스를 기다렸다. 버스를 마냥 기다리는 동안에도 이 버스 정류장이 맞나? 혹시 버스가 이미 출발한 건 아닌가?하며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ㅠ
수니온 곶에 가는 버스 정류장 풍경. 여기 사진에 나와 있는 버스는 수니온 행 버스가 아니었다.
수니온 행 버스 시간표.
내 기억으로는 오후 2:30시, 3:30시 차편은 없었고, 3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오후 4:30시 차를 타고 느즈막하게 수니온 곶으로 향하였다. 수니온으로 가는 길은 해안 길과 내륙 길, 두 종류가 있는데 오후 4:30시 차는 해안 길을 따라서 수니온으로 갔다. 아테네로 돌아올 때는 7시 차 아니면 8시 차를 타고 왔는데 내륙행 버스였다. 돌아올 때는 어둠이 짙게 깔려서 주변 풍경을 구경할 수 없었고 이곳 저곳을 들렀다 오는 바람에 밤 10시 가까이에 호텔로 돌아올 수 있었다.
버스 출발시간이 가까와서야 수니온 곶에 가는 다른 광관객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십여명이 탔던 것 같다.
수니온 곶 가는 길.
수니온 곶은 아테네 동쪽의 에게해에 접한 벼랑 지대이다. 내내 해안선을 끼고 버스는 달렸다.
중간 중간에 아름다운 해수욕장이 있었다.
드디어 수니온 곶에 도착했는데, 시간이 오후 6시경이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오늘 (9월20일)이 그리스 총 선거날이라 이곳 유적지 문닫는 시간이 오후 5시로 앞당겨져 있었다. 오후 6시가 넘은 시각에 이곳을 방문한 관광객은 15명 정도 되었는데 외국인 여성 관광객 두어명이 관리인을 불러서 왜 아무런 사전 공지없이 문을 일찍 닫느냐고 강하게 항의를 해봤지만 소용이 없었다. ㅠㅠ
맞은 편 언덕 위로 올라가 멀리서 포세이돈 신전을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수니온 곶은 바람이 세기로 유명하다는데 벼랑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계절탓인지 바람을 느낄 수가 없었다. 9월도 20일이 지났지만 여전히 이곳은 한 낮의 뜨거운 열기가 가라앉지 않고 있었다.
수니온 곶의 하늘을 붉그스레 물들이며 저 멀리 구름 뒤로 숨는 태양이 매우 아름다왔다.
그리스.로마 신화 이야기를 쓰신 고 이윤기 선생님은 이곳을 방문하고, 저 포세이돈 신전이 올려다 보이는 이 아래 어딘가 해변가에 있는 '아이게이온' 호텔의 식당에서 수블라키를 드셨다고 했다. 그리고 그 때가 꿈만 같다고 추억하셨다. 나도 그 아이게이온 호텔에 들러 수블라키를 먹고 싶었지만, 아테네로 돌아가는 저녁 버스를 놓칠 수가 없어서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였다. ㅠ
첫댓글 즐감^^
네,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