엑소더스
리들리 스콧의 [엑소더스]가 그 정체를 드러냈다. 아마도 영화를 보면서 다양한 반응들이 있으리라 예상된다. 우선, 언제나 그렇지만 신실한 그리스도인들에게 이 영화는 상당히 불편할 것이다. 리들리 스콧이 묘사한 모세가 그들이 성경에서 상상한 모세와 상당히 다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모세의 나이가 성경과는 다르다. 40세 전후에 쫓겨난 후 미디안에서 가정을 이루고 겨우 9년이 지난 후 이집트로 복귀한다. 기껏 그의 나이 50이다. 성경은 모세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80세가 되어 소명을 받기에 관객은 적잖이 당황할 것이다. 그리고 모세는 아론이 아닌 눈에 의해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 이집트 복귀 후에도 눈과 그의 아들 여호수아와 함께 대업을 이루어간다. 이는 성경과 상당히 다르다.
이집트에 내리는 열 가지 재앙을 지켜보면서 아마도 이런 생각이 들 것이다. 이는 여호와 하나님이 내린 재앙이라기보다는 이상기후에 의한 자연 재앙에 가까운 것으로 보여진다. 나일강이 피로 변하는 것은 악어떼의 출몰 때문이다. 이후 개구리들과 파리떼, 등이 등장하는 것도 실제 자연재해의 일종으로 충분히 볼 수 있는 개연성이 높다. 그러니 사실상 전능하신 여호와의 재앙보다는 합리적인 자연현상으로 상당히 묘사한 듯 하다.
홍해 앞에서의 묘사도 그러하지 않은가? 바다가 갈라진 것이 아니라 바다물이 조류의 차에 의해 자연스레 물러간 듯 하다. 물이 빠졌다가 다시 덮친다. 바다 가운데로 난 길로 걸어갔다는 성경의 묘사와 달리 영화 속 이스라엘 사람들은 얕은 바다로 건넌다.
무엇보다 성경적 기독교인이 당황한 지점은 모세가 떨기나무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대면하는 장면일테다. 어린아이의 모습이라니. 그것도 애굽의 신들에게 빼앗긴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듯한 질투심과 무자비함으로 묘사되니 어찌 당황하지 않을 수 있는가? 마지막 재앙을 내릴 때 장면들은 의도적으로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신으로 묘사한다. 그러니 은혜 받으러? 갔다가 실망하고 나올 것이 명약관화다.
노아라는 영화 때도 이야기 했지만, 사실 영화관에는 은혜 받으러 가는 게 아니다. 그것 자체가 언어모순이란 말이다. 헐리우드는 기독교 복음을 전파하러 영화를 제작하지 않는다. 멜 깁슨이라는 독특한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은 극히 예외다. 그리고 60년대 [십계] 나 [왕 중 왕]을 만들던 시대를 예상해선 안 된다. 헐리우드의 목적은 철저히 상업성이다. 그러니 영화는 영화로 즐길 뿐이다.
그렇다면 리들리 스콧이 이 영화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전에도 말했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면 도움이 되겠다. 리들리 스콧이 만든 대표적 영화가 무엇인가? 그의 이름이 우리에게 확실하게 각인된 것은 바로 럿셀 크로우 주연의 [글래디에이터]다. 로마의 유력한 장군이었으나 정적 코모두스에 의해 추방되고 시련을 겪는 인물이다. 그러나 그는 우여곡절 끝에 결국 로마로 입성하여 영웅으로 자리매김한다.
또 하나의 영화 반지의 제왕에서 레골라스로 유명한 올란드 블룸이 주연한 [킹덤 오브 헤븐]이다. 십자군 전쟁 당시 대장장이로 살아가는 주인공 발리안, 그러나 그에게 찾아온 십자군 기사 고프리에 의해 그는 기사로 거듭나고 거대한 전쟁을 이끌며 영웅으로 자리를 잡는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들을 살펴보면 그가 클리포드 기어츠가 설명한 신화적 방식을 따르는 것을 볼 수 있다. 기어츠의 설명에 의하면, 고대의 영웅들, 신화적 영웅들은 어떤 특정한 방식을 따른다. 우선 그들은 태생적 특징이 있다. 정상적으로 태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들의 운명에 대한 신탁을 받는다. 이 신탁은 그의 경쟁자의 심정을 자극하고 영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추방을 당하여 온갖 시련을 겪는다. 추방과 시련의 기간을 통해 내면이 강화되고 진정한 영웅으로 자리매김한다. 그 유명한 일리아드나 오딧세이도 이런 방식을 따른다.
리들리 스콧의 영웅들인 '막시무스' '발리안' 그리고 우리의 영웅 '모세'도 동일선상에 있다. 탄생의 비밀, 이어지는 신탁 , 경쟁자의 질투와 시기 그리고 추방, 그러나 외부세계에서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영웅이 되어 복귀한다. 경쟁자를 물리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다.
리들리 스콧은 성경을 영화의 소재로 삼았지만 철저히 신화적 해석을 한 것이다. 그래서 부제가 '신들과 왕들'이다. 이제 좀 감이 잡히는가? 그가 심취한 신화의 세계에선 악한 신과 선한 신, 그리고 그들의 대리자로서 인간 영웅의 대결이 펼쳐진다. 엑소더스의 히어로 모세가 맡은 역할 또한 그러하다.
더 나아가 신들을 빙자한, 아니 자신이 신이라고 주장하는 람세스는 자신의 야망과 탐욕을 채우기 위해 제국을 파멸로 몰아간다. 더 큰 신상, 더 큰 왕궁, 더 큰 무덤을 만들어 내기 위해 노동력을 착취한다. 그 희생의 대상이 이스라엘 민족이다. 이 탐욕의 화신에게 맞선 자가 리들리 스콧이 그린 모세상이다. 모세는 선한? 신의 대리자로서 탐욕의 신 람세스에게 맞서 착취와 억압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을 구한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비롯한 젊은이들을 훈련시키고 게릴라전을 펴서 왕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맞서 싸우는 장면들을 기억해 보라. 그러니 리들리 스콧에게서 은혜를 구하지말라. 그는 악한 신에게서 고통 받고 있는 인간들을 엑소더스하려 한 것일 뿐이다.
이 지점에서 도미니크 크로상 혹은 랍 벨이 필요하다. 그들이 묘사한 출애굽기는 제국의 탐욕으로부터 고통 당하는 인간을 자유롭게 하는 해방자로서의 하나님이기 때문이다. 가난하고 고통 받는 자들의 하나님, 억압 당하는 자의 하나님이다. 제국의 착취로부터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이다. 랍 벨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는 자유케 하시는 하나님으로 보았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다시 이집트의 탐욕에 빠져 오히려 스스로 제국화 되어 갔다고 본다. 그게 솔로몬 왕 때 일어났다. 솔로몬은 자신의 야망, 탐욕을 채우기 위해 백성들을 심한 노동으로 몰았고, 무엇보다 이집트의 신들을 도입했다. 그 후로 이스라엘은 이집트처럼 제국화 되어 갔다고 그는 주장한다.
자, 이제 정리를 해 보자. 엑소더스 - 신들과 왕들, 볼 것인가 말 것인가? 아니 어떻게 볼 것인가? 감이 좀 잡히는가? 선택은 당신의 몫이다. 나는 보라고 하고 싶다. 노아 때도 그랬지만 우리는 리들리 스콧에게 어떤 면에선 감사해야 한다. 그는 철저한 고증을 거쳐 고대 이집트를 스크린에 재현했다. 그런 묘사는 우리가 성경을 이해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준다. 다만 감독이 신화적 영웅으로서 모세를 그렸다는 점, 그리고 억압적 제국에서 자유를 추구하는 영웅으로 그렸다는 점을 주시하며 볼 것은 보고 비판할 것은 비판하면 되지 않을까? 기대할 필요도 , 실망할 필요도 없이 영화는 영화로 볼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
첫댓글 와우... 역시 최고의 평입니다. 보고 싶어지는 글입니다.
감사.. ^^ 근데 영화 본 사람들이 기대를 너무 해서 그런지 좀 지루하다 하더군요.. 전 뭐 잘 봤습니다.. ^^
음...이거 별로 안보고 싶었는데 글읽고 보고싶어지는데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