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8대왕 현종과 사천 이야기

[현석]

사천시에는 고려 8대왕인 현종(왕순)과 그의 아버지 왕욱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사천시 사남면 우천리에 있는 이구산은 중국 노나라에서 따온 이름이다.

중국 산동성 곡부현 동남에 있는 산으로 성인공자가 탄생한 곳으로 이를 이산, 이구산이라 한다.

고려초 992년 태조 8째 아들 왕욱이 귀양와 묻힌 곳으로 유명하며

그 아들 순이 정동면 배방사에서 10년동안 기거했으며, 
순은 고려 8대 임금인 현종이 된다.

                 *****   왕자 욱의 유배    **** 

후삼국으로 분열된 우리나라를 다시 통합하여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은 여덟명의 왕자를 두었다.

장자 무가 혜종이요, 둘째 요가 3대 정종, 세째 소가 4대 광종, 광종의 장자 유가 5대 경종이다.

경종에게는 비가 둘 있어 제1비가 헌야왕후 황보씨이요, 제2비가 헌정왕후 황보씨이다.

두분의 왕비는 자매간으로 일곱째 왕자의 딸로서 경종과는 친사촌이 되는 사이다.

그러니까 고려 왕실에서는 신라시대 이래 내려온 혈족혼이 대대로 행하여져서 근친혼은 상례가 되었고,

이로 인해 좋지 못한 일들이 많았다.

두 왕비의 성을 황보씨라 한 것은 외조부의 성을 따랐기 때문인데 실지로는 왕씨임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려 왕조는 왕씨 이외의 성바지와는 혼인하지 않고 자기들 왕씨끼리만 통혼하여

왕씨들만의 영구집권을 꾀했던 까닭이라 할 수 있겠다.

5대왕 경종은 제1비 소생인 왕자 송을 두고 죽으니 두 자매 왕후는 청상의 몸이 된다.

왕자 송이 아직 어려서 왕위의 계승은 경종의 종제

즉, 두비의 친 오빠인 치로 하여금 대통을 잇게 하니, 이가 곧 6대 성종이다.

경종의 1비는 아들 송이라도 낳았지만 2비인 헌정왕후는 소생이 없었기 때문에

궁궐밖 사제로 나와 혼자서 살아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 젊고 아름다운 비는 비록 청상의 몸이지만 고독과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는

사제와 가까운 숙부 욱의 집에 자주 살 수 밖에 없었다.

한편 왕실의 종친이기도 한 욱은 왕비였던 조카딸이 짝 잃은 외기러기가 되어 찾아오니

가엾고 측은한 생각에 비를 감싸주는 것이었다.

욱은 태조의 막내 아들로 영명한 왕자였고, 재주가 비상하였는가 하면 매우 활달한 장부였다.

풀죽어 있는 비 조카딸을 욱은 명산 대천을 데리고 다니면서 사냥도 하고 때로는 글도 짓고

그림도 그리며 함께 놀아준다.

이리하여 젊은 청상의 비는 종실 욱의 곁을 떠나서는 하루도 살아갈 수 없는 평범한 여인이 되어갔다.

 지체로 보아서는 욱은 왕실의 종친이요, 비는 현왕 성종의 누이요, 전 경종비였으니 두분의

행동범절이 비상해야 하거늘 그녀에게는 모든 것이 무의미했고 욱과 더불어 있는 것만이 삶을 의미했다.

 그리던 어느날 밤 비는 꿈을 꾸었다.

 꽃샘바람이 세차게 불고 구름 한점 없는 맑은 하늘, 곡령에 올라가서 오줌을 누니 나라안에

넘쳐 흘러 모두 은빛 바다를 이루는 것이었다.

 너무도 이상하고 희한한 일이라 깨어 보니 꿈이었다.

 이상한 꿈도 꾸었다 싶어 점장이를 찾아 물었더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라를 차지할 것이라..." 해몽하므로

비는, "내가 이미 과부가 되었는데, 어찌 아들을 낳을 수 있으랴"라고 웃으면서 그 집을 나왔다.

 근친혼의 폐단이 이들 사이의 거리감을 좁혔을는지 모를 일이나 전 경종비라는 체통을 위해서도 수절해야 할 처지요,

욱은 종친으로서의 법도를 벗어날 수 없었겠지만 이미 이들에게는 한 남자요 요염한 한 여인이 있을 뿐이었다.

 이윽고 사랑하는 사이로 변해가는 비련의 실마리는 여기서 싹트기 시작했다.

두 사람의 상근은 가까이 하면 할 수록 연정의 불꽃이 타올라 비는 드디어 임신하는 몸이 되고 불붙은 사련은 이어져 갔다.

 어느 날이었다. 비는 종친 욱의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이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한 가인들이 집 뜰에 섶을 쌓고 불을 질렀다.

 그러자 때마침 세찬 바람이 불어 불길이 집채로 옮겨 붙으니, 많은 사람들이 달려와 이내 불길을 잡았다.

그렇지만 임금 성종이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달려와 "어찌된 일이냐..."하고 그 까닭을 알아 보았다.

 집안 사람들이 두분의 불륜한 관계를 모두 고하니, 임금 성종은 크게 노했다.

 이때 왕으로부터 질책을 받은 비는 깊이 뉘우치고 욱의 집을 급히 나와서 사제로 돌아가는데

가까스로 문앞에 이르자 산기가 일어 버드나무 가지를 휘어잡고 마침내 몸을 풀고 죽었다.

점장이의 말대로 사내 아이였고, 이 아이가 뒤에 대통을 이은 8대 현종 순이다.

 한편 성종 임금은 숙부 욱이 난륜의 죄를 범했다 하여 유배를 명하니, 이로써 비련의 종말을 너무나도 비참했다.

그러나 뒷날 한 사람의 어진 임금을 얻기 위해 하늘의 섭리는 이렇게 운명지어져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내시 고현의 뒤를 따라 귀양길에 오른 왕욱은,

발걸음을 남쪽으로 향해 천리길 사수땅에 당도하여 서낭당 남쪽 귀룡동(사남면 화전리, 우천리 추정)에서 귀양살이를 하게 된다.

내시 고현이 소임을 다하고 개경으로 돌아가려하자 죄인 욱은 비통한 마음을 풀 길이 없어 다음의 시 한수를 지어 그에게 보냈다.

가자네와 더불어 같은 날 황성을 나왔는데

자네는 가고 나는 못 가는구나

슬프다 수인의 몸 쇠사슬에 묶인 잔나비 신세

날으는 말처럼 돌아가는 자네가 부럽구나

지금 황성은 봄인데 외로운 혼은 꿈속에 방황하고

바다 풍경 바라보니 눈물이 옷깃을 적시네

임금의 한 말씀 고칠길 없으니/바닷에 나가 고기나 잡으며 늙으리라

<<고려사>>세가 제3 성종조를보면,

<임진 11년(992)가을 7월 초하루 임진일에 종실 욱을 사수현(경남 사천)에 귀양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강보에 싸여온 순

 임자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어머니 헌정왕후는 몸을 풀자마자 죽고,

아버지 욱은 멀리 사수현으로 유배되었으니 기구한 운명으로 태어난 순은 장차 어떻게 자랄 것인가?

 그러나 임금 성종은 보모를 가려서 아이를 양육케 하였다.

아이가 두살이 되었을 즈음 왕이 불러 보니 보모가 아이를 안고 들어왔다.

 아이가 임금을 우러러보고선 "아버지"하고 부르며 무릎위로 기어 올라

이번에는 옷깃을 움켜 잡고 또다시 "아버지!"하고 부르는 것이었다.

"오 그래" "아이가 아버지를 몹시도 그리워하는구나"

 성종은 불쌍히 여겨 아이를 부둥켜 안고 눈물을 흘렀다.

이에 보모를 딸려 사수현의 숙부 욱에게 돌려 주라고 명하니, 부자상봉의 길은 이로써 쉽게 이루어졌다.

 한편 유수의 몸으로 머나 먼 남쪽 나라에서 외롭게 귀양살이 하던 욱에게는

뜻밖에도 보모의 품에 안겨온 아들이 얼마나 고맙고 반가왔겠는가.

그렇지만 왕명으로 아이의 약육만은 배방절로 하여금 키우도록 조처하니, 죄인과의 상봉은 허용하되 동거는 불허한 셈이다.

 하지만 귀룡동 폄소(욱이 귀양살이 하는 거처)에서 장산리 대산동 배방사까지의 거리는

한 산마루를 타고 내리면 그리 먼 길은 아니었다.

그래서 순명의 욱은 하루라도 빠질세라 날이면 날마다 아들보러 다니는 것을 유일한 낙으로 삼았다.

 비록 죄인의 몸으로 귀양살이를 할 망정 욱은 장부답게

왕자의 처신을 지키면서 오로지 아들 순이 잘 자라는 것만을 보람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운명은 어쩔 수 없는 것, 아들의 나이 다섯살때 궁벽한 사수땅에서 한많은 일생을 마쳤다.

 그의 임종에 관한 보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시 후술하겠지만,

무엇보다 아들 보려고 그토록 오르내렸던 산마루의 이름을 지금은 고자봉,

그 산자락 골짜기를 고자실이라 부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즉 죄인 욱은 자신의 거처하는 폄소에서 배방절의 아들 보러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산마루를 오르내려야 했고,

폄소로 돌아갈 때도 역시 이 산마루에 이르면 멀리 배방사를 바라보았다는 슬픈 사연이 담겨 있는 봉우리이기 때문이다.

(지금의 능화마을 뒷산)

 아버지를 여의고 천애고아가 된 순은, 유언에 따라 비록 몇 안되는 조문객으로 초라하기는 했으나

주위 사람과 술사의 도움으로 장례를 치룰 수가 있었다.

또 어린나이에 자신의 출생을 어찌 다 알 수 있을까마는 아버지께서 생전에 들려주신 말대로라면

분명 자신은 태조할아버지의 손자로 태어나,

여느 아이들과는 지체가 다르다는 것만을 어슴푸레하게 알고 있었다.

그는 어질적부터 타고난 천성이 어질고 총명하여 남다른 데가 있었으며,

이름 높은 스님에게서 글을 배우니 벌써 아제시를 지을줄 알았다.

 어느 화창한 봄날, 그는 약초를 심어 가꾸는 절밑 다락밭에 노닐다가 작디작은 꽃뱀새끼를 보았다.

약포에 도사리고 앉은 작고작은 저 꽃뱀

온 몸에 붉은 무늬 찬란히 번쩍이네!

언제나 꽃밭에만 있다고 말하지 말라

하루 아침에 용되기란 어렵지 않으려니!

 참으로 왕손다운 기특함이 배어 있는 시라 할 것이다.

 장차 임자가 아니라 한 나라의 임금이 될 것을 내다보는 짤막한 내용이지만

그 의지와 기개는 벌써 어릴적부터 엿보게 하는 아제시이다.

이리하여 순은, 이 아름다운 산수속에서 왕손답게 호연지기를 기르면서 유유자적하며 때를 기다리는 소년 왕자로 성장해 나갔다.

뿐더러 절에서 가까운 어정산에 오르락거리며 먼 북쪽 하늘을 바라복 언젠가는 개경으로 돌아갈 야심만만한 꿈을 키워 나갔다.

 그런데 왕실에서는 임자를 대량원군으로 봉한다는 칙령이 내려왔다.

이 얼마나 바라던 일인가. 그러나 여러 차례 상경할 것을 종용 받았으나 듣지 않고 묵묵히 사천땅에서 왕도를 닦았다.

● 왕자 욱의 재궁과 개천

 고려사에 의하면, 현왕 선종의 숙부이자 왕실의 종친이던 왕욱이

머나면 사수현에 귀양와서 어린아들 순을 홀로 남기고 죽은 시기는

정확히 서기 992(선종11) 7월에 귀양와서 그로부터 4년 뒤인 996년(선종15) 7월에 죽으니, 햇수로는 5년동안 살다 간셈이다.

 그는 문장을 잘하고 풍수지리에도 밝았는데, 자신의 운명을 예견하고 고달픈 귀양살이의 와중에도

정차 묻힐 좋은 묏자리를 미리 봐 두었다는 것이다.

그곳은 와룡산의 줄기가 물결처럼 굽이치며 이어져나간 부드러운 산으로 둘러싸인

한 골짜기에 도드라져 나온 아담한 산등성이었다.

이 곳은 용이 학을 감싸주는 형곡으로서 천하의 명당자리라는 것을 안 그는

기회있을 때 마다 외로운 몸을 이곳에 와서 쉬며, 귀양살이의 불우한 한을 달래기도 하고 시름에 젖기도 했던 곳이었다.

또한 이 곳에다 묘를 쓰면 그 감응의 효험이 그 자손으로 하여금 크게 영화를 누릴 길지 일뿐 아니라

국난을 당했을 때 나라의 운세를 건질 지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던 어느날 욱은 임종의 날이 다가오자 평소 비상금으로 간직하고 있던 한 주머니의 금을 아들 순에게 은밀히 주면서,

“내가 죽거든 이름 있는 지사를 찾아 지도를 받고 아무데 아무곳(평소 봐 주었던 묘자리)에 장사지내되,

반드시 나의 시신을 엎어서 묻어라”

유언하고 마침내 죽어갔다.

지사와 절간 몇 사람의 도움으로 아버지의 유언을 쫓아 그대로(엎어서) 매장하는데,

이때 지사가 말하기를 “어찌 그리 급하시냐...” 고 말했다.

그 말의 뜻인 즉 시신을 엎어서 묻으면 묘자리가 너무 좋아 얼마 안가서 곧 왕위에 오를 것이란 뜻이다.

일설에는 성종의 뒤를 이어 받은 현왕 목종(순과는 이종형제간이며 7대 임금)이 병약하여 10년이상 생존 가망이 없는데,

복시반복해야만 10년후 왕위에 오를 수 있고, 그렇지 않으면 20년우에라야 등극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리나이로 어찌 이와 같은 오묘한 이치를 다 깨치고 있었을까마는 야심만만한 순은 아버지의 유언따라

‘복시이장하여 직감 10년’하라 하니, 그대로 쫓아 장례는 행하여지니 그 조숙함과 영특함을 아룻 있다 하겠다.

 이로부터 불과 10년 뒤 반드시 예언대로하고는 말할 수 없으나 어린나이의 순은 목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게되니

앞서 말한대로 이분이 곧 8대 현종 순이다.

 왕위에 등극한 현종은 황고 욱을 추존하여 효목대왕이라 하고, 묘호를 안종이라 하였으며,

비 황보를 추존하여 효숙태후라 하였다.

그리고 욱 안종이 묻힌 장지를 훗날 능화봉(사남면 우전리 소재)이라 하고,

그 산자락 마을은 지금은 능화마을이지만 그 옛날에는 능화촌이라 일컬었다.

이는 안종 욱의 유택을 이곳에 정한 후 그의 아들 순이 왕위에 올라 영화를 누렸다는데서 붙여진 땅 이름이다.

 등극한 현종은 재위 8년9(1017) 4월, 문하편장사 최항과 중추붑사 윤징고를 사주(이미 천으로 승격하여 사천이라 함)에 보내어

황고 안종의 재궁을 모셔 옮기게 하고, 그는 법가를 갖추어 동쪽 교외에서 맞이하여 안릉이라 하였다가

뒤에 다시 좋은 묘자리를 골라 옮기면서 건릉이라 하였다.

 한편, 이처럼 안종의 재궁을 이 개장한데는 그럴만한 까닭이있었다고 전한다.

그것은 당시에 있어서는 묘지풍수의 소응이 사실이라 믿었기 때문에,

곧 왕실에서도 왕릉 개천을 풍수에 의존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묘지를 잘 쓰면 행운만이 아니고, 잘못쓰면 재화의 영향도 크다고 믿은것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바가 없다.

그러기 대문에 흉악한 땅에 조상의 묘를 쓰면 재화가 반드시 따른다고 말하고 있다.

마치 길지에서 발복이 있는 것처럼 흉지에서는 발화가 있어서 오히려 길지에서의 발복보다도 더 확실한 것으로 믿어졌다.

 때문에 흉묘지에서 미쳐 올 재화를 행복으로 바꾸려는 방법이 강구되는 것은 풍수에 의존하는 수 밖에 없었다.

이런 관점에서 고려 왕릉의 개천은 왕실의 행복추구 뿐만 아니라 나아가서는 국가의 명운마저 걸려 있다고 본 것이다.

 고려 초엽에서 중렵에는 글안의 침략을 자주 받았는데, 7대 목종 때는 글안의 연호를 쓰게

되었고, 8대 현종 초에는 국도 개성이 글안에 함락되어 왕은 먼 나주까지 몽진하는 수모를 겪기도 하였다.

그 뒤에도 거란은 오랫동안 고려의 외구였음은 역사가 말해 주고 있다.

 그런데 외적을 막고자 여러가지 주법을 행하였어도 그 효험이 조금도 없었으니 드디어 묘지풍수로 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현종 3년(1012) 5월에 동여진이 청하현·영일현·장기현 등지로 쳐들어 오고,

곧이어 8월에는 거란병이 다시 침입하여 북변 6주를 빼았음으로 조야가 야단이었다.

 그래서 왕릉과 결부지어 당시의 집권자 최항은 사주(사천) 고을 안종의 능과 후릉을 딴곳으로 개장하자고 주장하게 된 것이다.

개장의 이유는 이러했다.

즉 현종이 왕이 되기 전에 아버지 안종 욱을 유언대로 사수현에 장사지냈는데,

비록 대명지라 할지라도 그 때분터 거란의 내구가 잦았고, 심지어는 현종이 즉위 다음 해에 피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는 것이다.

또 후릉을 쓰자 역시 거란의 침입을 당했다.

어처럼 거란의 잦은 내구가 왕릉 즉, 안종의 재궁 및 후능과 관계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마침내 이들 능묘를 개천하게 된 것이라 전하고 있다.

현재 능화봉이라 이름만 전하는 안종의 능지에는 잡풀만 무성하게 자라고 언제부터인가 이름모를 묘가 들어서

보는 이로 하여금 쓸쓸함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고총과 관련하여 남재가 읊은 한 수의 시가 전하니 다음과 같다.

와룡산이 남쪽 궁벽한 곳에 있으니

왕자가 멀리서 와 이곳에 놀았더라

옛 무덤 허물어져 풀만이 무성하고

까마귀 슬피울어 석양의 수심을 보내네!

 시의 작자 귀정 남재 선생은 의령인으로 아우 은과 함께 이성계를 도와서 조선 개국에 공을 세운 분이다.

태조 즉위년(1392) 포상을 피하여 은거할때, 이곳 능지에 들어 지은 시귀로 알려져 있다.

또한 1986년 5월 사천문화원에서는 이 곳이 고려 현종의 아버지 안종의 고총임을 표하기 위해 와비를 세웠다.

● 대량군 순의 풍운

 어린 왕자 순이 사수 땅에서 아버지를 여의고 대량군(또는 대량원군)에 봉군되어

왕경 개성으로 간것은 그의 나이 12세 때였다.

두살때 내려왔으니 햇수를 따지면 꼬박 10년동안 잠저하다가 올라간셈이다.

 그런데 누구보다 먼저 그를 반갑게 맞아주어야 할 천추태후(현애왕후로 목종의 친어머니)의 마음은 이미 변해 있었다.

사사로이는 그에게 이모가 아니던가.

 《고려사 절요》에 의하면, 대량군 순은 천추태후의 시기와 미움을 받아

강제로 머리를 깍이우고 중이되어 개경 납무 숭교사에 들어가 몸을 의지할 수 밖에 없었다한다. 왜 그랬을까?

몰론 거기에는 뒤에 말하는 커다란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날 주지스님 꿈에 큰 별이 뜰에 떨어지더니 별은 갑자기 용으로 변하고, 용은 다시 사람으로 변하는데

그 사람이 곧 나랏님이 되었다고 한다.

이런 기이한 것으로 하여 사람들이 모두 그를 신기하게 여기였다.

 목종 9년(1006) 대량군의 나이 15세때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의 신혈사로 다시 옮겨가 살았다.

이즈음 천추태후는 수차 사람을 비밀리에 보내 그를 해치려고 하였다.

 이 때에 신혈사에는 이름 높은 노승이 있어 태후의 흉계를 간파하고 대량군을 위험에서 구하고자 한다.

방안에 땅굴을 만들어 그를 숨기고 그 위에 침상을 놓아 예측할 수 없는 모해에서 불의의 사변을 막았다.

이처럼 불우한 박해의 시절에도 대량군은 태연자약하면서 한편의 시를 지어 읊었다.

백운봉에서 흘러 내리는 한 줄기의 물

망경 창파 멀고 먼 바다로 향하누나!

바위 밑을 스며흐르는 물 적다고 하지 말라

용궁에 도달할 날 그리 멀지 않으리

계수라는 위의 시도 배방절에서의 소사시와 비슷한 뜻을 담은 내용인데

더욱 가까운 시일안에 임자가 등극할 당면성을 내다 본 시임을 알 수 있다.

 대량군이 또 어느날 닭 우는 소리와 다듬이 소리가 들려 오는 꿈을 꾸고 노승에게 물었더니, 노승께서 방언으로서 해몽하기를,

“닭의 울음 소리는 고귀위요, 다듬이 소리는 어근당어근당하니 이 꿈은 왕위에 오를 징조입니다.”라고 풀이 하였다.

 꿈을 꾼지 얼마 안있어 마침내 봉영의 행차가 당도하여 모셔 가니 등극하여 용상에 앉았다.

이 때가 목종 12년(1009) 2월 기축일이었다.

 대량군 순이 15세 때 몸을 부지하고 기거한 삼각산의 신혈사는 왕세자의 역사를 담은 채 불교사에 뚜렸하며

왕자가 땅굴을 파고 숨어 살았다 해서 절이름도 신혈사다.

 그런데 천추태후는 무엇 때문에 왕세자 대량군을 핍박하고 심지어는 죽일려고까지 음모를 꾸몄던 것일까?

 6대 임금 성종이 후사도 없이 죽으니 7대 대통을 이을 분이 경종과 헌애왕후 사이에 낳은 송이다.

부왕 경종이 죽었을 때는 세자 송이 너무 연소하여 왕위를 계승치 못하고 치 성종이 6대 왕으로 즉위했었던 것이다.

이제 18세의 어린 새 임금 목종을 에워싸고 섭정자리에 앉게 된 생모 헌애왕후는

스스로를 천추태후라 칭하면서 절대 권력자로 군림한다.

이때부터 태후의 총신 김치양의 무리가 정권을 농락하여 고려 왕실의 위엄과 기강은 극도로 문란케 한데서 온갖 화근이 발생한다.

김치양은 본래 태후의 외척으로 거짓 승려 행세를 하고 태후에게 접근하여 남다른 추문까지 퍼뜨러서

일찍이 성종으로부터 처벌을 받고 먼 변방으로 유배되어 있었다.

성종이 죽고 목종이 즉위하게 되니 태후는 김치양을 귀양살이로부터 소환하여 궐내의 요직을 주고 총애하기를 극진히 하니,

드디어 그들 사이에서는 아들까지 낳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는 탄핵하고 제재할 사람도 없는지라

태후와 치양의 무리는 정권을 휘어잡고 뇌물의 과다로 백관의 임명을 좌지우지 하면서 부귀영화를 독차지 한다.

그러나 이들 앞에는 대량군이라는 꼭 한사람 시기와 경쟁의 대상이 있었다.

그것은 현왕 목종이 병약하여 그의 목숨이 보전도 기대하기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후사도 없었으니

대량군만 없으면 태후와 치양의 사이에 낳은 아들로 하여금 고려조의 대통을 계승케 하는 것은 용이한 일이라고 본 것이다.

따라서 원군 순의 존재는 그들의 눈에 가시가 되었고, 그를 위협하여 승려가 되게 한 까닭도 모두 여기에 있었다.

 사태가 이러하니 바야흐로 왕씨 고려의 운명은 풍전등화와 같았다.

이 때 병약한 임금 목종은 성품이 침착하고 굳세어 어려서부터 임금의 도량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즐기며 사냥을 좋아하고 친근한 폐신들을 신임한 탓에 정사에는 유의하지 않았다.

때문에 목종에 의한 새로운 정치는 기대할 수 없다고 본 중신과 백성들은 후계자를 물색하는데

오직 한사람 태조 왕건의 핏줄을 이어받은 대량군 순이 있을 뿐임을 알고

천하의 이목은 당연히 대량군의 건재에 집중되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니 태후와 치양의 무리는 무슨 수를 쓰더라도 대량군을 없애려 들었다.

태후는 그의 이모가 아니던가?

그러나 그녀는 이미 외척 치양과 사련에 빠져 종묘사직도 저버리고 오로지 추악한 여인으로 전락하여

대량군을 없애려고 혈안이 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현왕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게되니 이들 무리는 이 기회에 왕위에 폐위까지 단행하고자 중대한 음모를 꾸민다.

하지만 아무리 병약한 목종이라 할지라도 종묘사직의 위태함을 직감하고,

금사중 채충순, 충추원사 최항 등과 함께 왕의 후계자에 대한 일을 밀의하고

황보유의를 삼각산 신혈사에 보내어 대량군 순을 맞아 오게 하였다.

 한편, 도순검사로 서경인 평양에 주재하고 있는 강조에게 밀령을 내려 급히 입성하여 왕실을 지키라 한다.

이에 강조가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드디어 현왕 목종을 들어내고 새 임금을 세울 음모를 하였다.

이러한 소문이 새어나가 퍼지게 되자 개성의 인심은 자못 흉흉하였고

대량군 순이 바야흐로 번듯이 먹구름을 헤치고 태양처럼 나타나 등장하게 된다.

 강조는 목종에게 귀법사로 나갈 것을 강요하였다.

곧이어 다음 날 강조의 군사가 갑자기 궁문으로 뛰어 들어 오므로

왕이 결국 모면하지 못할줄 알고 태후와 함께 울면서 법왕사로 나갔다.

조금 있다가 유의 등이 원군 순을 모시고 와서 드디어 왕위에 오르게 하였다.

그리고 강조는 왕 목종을 폐위시켜 양국공으로 삼고 군사를 보내어 김치양의 부자와 유행간 등 7명을 죽였다.

왕은(王恩)은 샘물처럼

 기구한 운명의 대량군 순은 대망의 왕위에 나아가나

등극초부터 거란군의 침입으로 멀리 나주까지 몽진하는 수난을 겪었음은 앞글에서 적은 바와 같다.

나라가 위태로움에 당면하여 현종을 보필하고 나라를 구한 어진 신하들이 있었으니 은열공 강민첩과 하공신이 그 사람들이다.

 은열공은 진주태생으로 진주강씨 은열공파의 중시조다.

하공신은 구 진양군 대곡면 단목리 태생으로 유명한 <단목골> 진주하씨의 중시조로써 처음에는 문신으로 뒷날 무장이 되었다.

강장군은 구주대첩때 해동명장으로 이름 난 강감찬장군과 더불어 부원수가 되어 거란군을 대파한 명장이요,

하공신은 뛰어난 외교로 난국을 수습한 분이다.

이들 두분의 신하가 새 임금 현종에서 품은 동향의 정은 각별한 것이어서

죽음도 가볍게 보는 충성을 다해 나라를 구하고 현종을 보필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에 현종께서 등극하신 후 우리 고장에 베풀어 주신 왕은을 살펴보기로 한다.

 동향의 의로서 맺어진 진주출신의 양신 강민첩, 하공신의 보필로 시국은 안정을 얻게 되므로서

비로소 임금의 영화를 누리면서 군림하니,

찬란한 임금의 자리가 새삼 눈부셨다.

전쟁은 물러가고 백성과 신하는 영명한 임금을 맞이한 것을 기뻐하고 성덕을 우러러보게 되니

현종 임금의 바라던 바라 할 것이다.

 그러나 젊은 임금 현종은 너무나도 슬펐다.

여섯의 어린나이 때 죄인의 몸으로 죽어간 아버지 욱이 차라리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임자를 이 세상에 태어나도록하여 저지른 아버지의 죄는 현종에게는 어쩌면 너무나 은혜롭지마는,

다른 한편으로는 뼈를 깎는 아픔의 죄이기도 하였다.

때문에 아버지 욱을 생각하고 자신을 낳자마자 죽어간 어머니를 생각하면 한없이 연민의 정이 앞서는 것이다.

그래서 살아계실 때 효도는 못했으나 비록 죽은 후이지만 남보다 몇갑절 더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구름일듯 이는 것이다.

 급히 내관을 불러 교서를 내리니, 그것은 앞에서도 기술했듯이 아버지를 추서하여 효목대왕으로,

어머니를 효숙왕태후로 추존한 것이다. 그리고 비로소 원릉(경기도 개풍군 소재)을 배알(拜謁)하니,

그 곳은 어머니 왕태후의 능이었다. 또한 아버지의 재궁도 개경가까이 모셔오도록 하여 개천(改遷)하도록 하였으니

이는 지극한 효도의 발로였다.

그런데 부모님에 대한 효도도 효도이지만 무엇보다 잊을 수 없는 것은 어린시절 사수현에서 보낸 추억과 그리움이었다.

그 곳의 산수는 물론 아버지가 묻혔던 고장일 뿐 아니라 임자가 강보에 싸여 내려간 이래

10년동안 여러사람의 따뜻한 보살핌으로 어엿하게 오늘이 있게 한 은혜로운 땅이자

어머니의 품안처럼 정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등극초 거란군의 침입으로 미처 생각할 겨를이 없었지만

이제 어진 신하들의 보필로 초기난국을 극복하고 나라의 안정을 회복한 이 때에 와서 무엇을 망설이겠는가.

하루라도 빨리 보답하고 싶은 마음 간절하였다.

어느날 현종은 교(敎)하기를

“짐이 지난번 사수에 있을 때에 언효, 효질 두 사람이 옆에 시종하여 근로한 공이 있으니

좋은 전지를 내려 주어 그 노고를 포상하라”하였다.
 

 이 때가 왕 재위 3년(1012) 가을 7월이라 기록은 적고 있다.

그러니까 현종은 왕위에 오른후 3년만에

자신을 그토록 아끼고 길러준 언효, 효질 두사람에게 누구보다 먼저 베푸는 은전인 것이다.

현종은 이에 그치지 않고 다음에는 다시 교를 내려 이르기를, “사수현을 승격시켜 사주로 하라”하였다.

 이리하여 남쪽의 변방 유배지이자 일개 미미한 작은 고을이 파격적인 승격을 보게 된 것이다.

그 당시 전국에는 12개주가 있었을 뿐으로, 사수현은 지금의 진주에 딸린 속현이었다.

이같은 현상은 왕조에의 반부에 따라 임의적인 승강이 행해진데서, 지나친 처사임을 모르는 현종도 아니지만

그는 이렇게라도 하여 아버지의 유배지를 높여주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니 사주민은 큰 영광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사수현이 사주로 승격된 시기가 정확히 현종 재위 어느 해인가 하는 점인데,

대개의 지리지나 읍지 연혁조에는 현종 2년(1011) 신해라되어 있는 반면,

《고려사 절요》에는 현종 6년(1015) 윤 6월로 기록돼 있음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떻든간에 현종대에 주로 승격 되었다는 데 대해 큰 의의를 갖는 것이다.

현종은 두 사람에게 포상을 내리고 또 주를 높이고도 만족치 않았음인지

이번에는 또다시 고통받는 사주민에게 은총을 베푸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당시 사주 땅에 왕실에 소속된 전답이 많아 백성들로 하여금 세를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에 호부에서 아뢰기를, “사주는 풍패의 땅인데 전에 민전을 감하여 궁장에 소속시켰더니 백성들이 조세를 감내하지 못합니다.

사주 경내에서 공전을 그 수량으로 보상해 주시기를 바랍니다.”하니 임금은 그 말을 듣고 기꺼이 따랐다.

 이 때가 현종 재위 13년(1022)2월의 일이었다.

이같이 보상을 받게 된 사주 경내 백성들은 나랏님의 은전에 기뻤으며 또 고마워 했겠는가.

참으로 어진 임금의 진념(軫念;귀한 사람이 아랫사람의 형편을 헤아려 주는 일)이 아닐수 없었다.

 그런데 호부에서 아뢴 ‘시풍패지지(是豊沛之地)’의 풍패는 한 고조의 고향이다.

그래서 고조의 백성들에게 조세를 감면하여 혜택을 주었다는 것이다.

이 고사에서 연유한 사주는 현종의 아버지 안종이 사주로 귀양가 살다가 죽은 곳이므로 현종 뿐만 아니라

그 후왕들에게 풍패가 되는 것이다.

이상이 대충 엮어 본 고려 태조의 여덟째 왕자 욱과 그의 아들 순 현종에 관한 일화이다.

현종은 앞에서도 여러 차례 말했듯이 천성이 총명하고 어질었으며 일찍부터 학문에 통달하고

특히 문필을 잘했던 다정다감한 임금이기에 남다른 뜨거운 정과 왕은을 느끼며 이 고장 사람들은 살아왔고

또 이 역사를 기리며 자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