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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비 /종합안내판
부성사 富城祠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제199호 부성사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학자이며 문장가인 최치원(崔致遠)의 영정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외삼문, 내삼문, 동·서재, 사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원래는 최치원의 덕망을 추모하던 이 지역의 유학자들이 조선 선조 때 사당을 건립하고 도충사(道忠祠)라 이름 지었었다. 그러나 19세기 말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07년 경주최씨 문중에서 다시 지었고, 1913년 현재의 위치로 옮기면서 이름을 부성사라 하였다. ‘부성’은 서산의 옛 이름으로, 진성여왕 7년(893) 최치원이 부성군 태수로 임명되어 이곳에 온 것을 기념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이다. 최치원은 신라 경문왕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나, 18세에 당나라에서 치른 과거에서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이후 당나라에서 관직 생활을 하던 중, 헌강왕 5년(879) 황소(黃巢)가 민란을 민란을 일으켰을 때 ‘토황소 격문’을 지어 적장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등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헌강왕 11년(885) 신라로 돌아와 어지러운 정치를 바로잡고자 힘썼으나 실현되지 않았고, 한직으로 돌다가 진성여왕에게 시무십조(時務十條)를 바치고 6두품의 한계인 아찬까지 임명되는 등 신라 왕실의 신임을 받았다. 주옥 같은 문장을 많이 남겨 동방 문장의 창시자라 불렸으며, 후대에 유교의 성현들을 모신 문묘(文廟)에 배향되었다.
문화재 설명
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최치원은 경무왕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18세 때 급제하였으며 2년간 낙양을 유랑하며 시를 짓는데 몰두하였다. 중국에 머물면서 황소의 난 등을 직접 겪으며 귀국한 뒤 의욕을 가지고 이미 무너져가고 있던 신라 사회에 당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 중심의 귀족사회에서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신분체계의 한계를 느껴 외직을 지원하였다. 대산군(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지금의 경상북도 함양), 부성군(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를 지냈으며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전환기에 살았던 대표적 지식인이다.
조선선조 때 그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는 유림들이 ‘도충사’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 흥선대원군 때 훼손되었다가 순종 1년(1907)에 새단장 하였고, 1913년 당시 서산군수가 태수로 지냈던 곳의 명칭을 따라 ‘부성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외삼문, 내삼문, 동재, 서재 등의 부속 건물이 있고 그가 직접 쓴 ‘과선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문화재 설명
신라 후기 학자이자 문장가였던 최치원(857∼?)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사당이다.
최치원은 경무왕 8년(868) 12세의 어린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하고 18세 때 급제하였으며 2년간 낙양을 유랑하며 시를 짓는데 몰두하였다. 중국에 머물면서 황소의 난 등을 직접 겪으며 귀국한 뒤 의욕을 가지고 이미 무너져가고 있던 신라 사회에 당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하였다. 그러나 진골 중심의 귀족사회에서 6두품 출신이었던 최치원은 신분체계의 한계를 느껴 외직을 지원하였다. 대산군(지금의 전라북도 태인), 천령군(지금의 경상북도 함양), 부성군(지금의 충청남도 서산) 등지의 태수를 지냈으며 당시 사회의 모순을 해결하려 시무 10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리기도 했다. 신라 후기에서 고려 전기의 전환기에 살았던 대표적 지식인이다.
조선선조 때 그의 영정을 모시고 그를 추모하는 유림들이 ‘도충사’란 이름으로 사당을 세웠다. 흥선대원군 때 훼손되었다가 순종 1년(1907)에 새단장 하였고, 1913년 당시 서산군수가 태수로 지냈던 곳의 명칭을 따라 ‘부성사’라고 이름을 바꾸고 지금 있는 자리로 옮겼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으로 꾸몄다. 외삼문, 내삼문, 동재, 서재 등의 부속 건물이 있고 그가 직접 쓴 ‘과선각’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내레이션
첫댓글 김 고문님,
좋은 정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