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좋지요......!"
2024년 7월 24일 오후 아픔과 슬픔 한 자락이 마음을 휘돌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었다. 하루 일정을 모두 마친 밤 시간 핸드폰을 보니, 조카들과 손 위 친 언니의 전화가 들어와 있었다. 수도에 방해된다고 왠만하면 거의 연락하지 않는 그들이기에, 직감으로 올케의 ‘부고’라는 예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마음이 착잡한 했던 그 날 오후 4시경 내 올케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홀로 "아멘! "하였던 것이다.
5일전인 7월 19일 금요일 올케를 방문했다. 7월 20일(토)이 그녀가 일흔 번째이며 아마도 마지막으로 맞는 생일이라 여겨 보고 싶고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병실에 들어가니 고요히 자고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뼈만 남은 얼굴을 매만지니 반짝 눈을 떴다. 만면과 눈가에 천진난만 반색을 머금고. 이 모습을 나는 오래도록 기억될 것 같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수녀 시누잖아요!” 얼굴부터 특히 얼굴 아래 전신은 만신창이가 되어 비참했지만 그나마 의식은 오락가락했다. 시트를 벗기고 자세히 봤다. 처참해서 형용할 수 없었다. "최주수가 누구에요?" "신랑! "보고 싶지 않아요?" "보고 싶어요!" 전에는 보고 싶지 않다고 했다. 오빠를 물으면 얼굴 빛이 단호해졌다. 갑자기 무책임하게 삼남매와 제 어머니마져 맡기고 떠나 고단한 삶의 무게를 혼자서 다 감당해야 했으니, 그리움보다 노여움과 원망이 컸을 것이다. "언니, 오빠 보고 싶으면 이제 가서 만나봐요. 그리고 혹시 하느님 찾아오시면 꼭 손잡으세요!" "그러면 좋지요..." 뜻밖이었다. 3년여 투병, 10개월여 와병, 내 올케는 삶과 자녀들에 대한 애착이 참으로 컸다. 왜 안 그럴까? 억울하기도 했을것이다. 그러니 신자고 수도자지만 나로선 차마 할 수 없는 말이었다.
내 올케 김정순 비아는 무남독녀로 초등학교도 시작 전에 양부모를 잃어 고아처럼 자랐다. 내 오빠와 결혼하여 마흔 다섯에 혼자되었다. 오빠는 추운 겨울 상갓집에 다녀오다 뇌출혈로 쓰러져 당일 급하게 하느님께 안겼다. 통장은 잔고하나 없이 깨끗하게 해놓고, 남겨준 것은 홀로 남은 시어머니와 어린 삼 남매의 양육과 생활고였다. 그녀는 억척스럽게 살았다. 그리고 삼 남매를 모두 출가시키고 주렁주렁 예쁘고 귀여운 손주 손녀를 일곱이나 두었다. ”갑부가 안 부럽다. 이제 다리 뻗고 마음 편히 살 만하다" 고백하더니. 병은 시간이 흐를수록 처참하게 고인을 망가뜨리면서 연옥에서 받을 단련을 서둘러 다 받나보다 생각했다. 그 와중에도 올케는 살고 싶어 했다. ‘형편이 되었더라면. 최고의 의료혜택과 간호를 배려해 줄 수 있으련만.’ 그렇게 하지 못한 점이 시댁의 일원으로 두고두고 미안할 것이다.
우리들의 하느님 사람의 자유의지를 존중해주시는 그분은 "그러면 좋지요!….”라고 응답하기까지, 끝까지 그녀의 자유 의지를 존중해주셨고 옆에서 지켜보면서 뼈저리게 실감했다. 한 가지 더 보태 그녀의 투병생활을 지켜보며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너야 한다면 콧줄 등 연명치료를 거부해야겠다는 결심도.
사람의 눈에도 주님 보시기에도 그녀는 얼마나 장한 아내이고 엄마인가? 그리고 어여쁘고 가여운 자녀인가?? 그래서 주님은 이제 이승에서 더 살고 싶어 했던 그녀를 고통과 슬픔 없는 영원한 삶의 자리로 옮겨주셨다.인간적인 눈으로 보면 참으로 가엾고 박복하다 생각되지만, 더하기 빼기 계산 잘해보면 실은 축복의 여정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와 어머니 오빠와 올케를 떠나 보내니 그 다음은 누구의 차례일까? 생각든다. ‘나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더 커켰다. 공평하신 하느님께서는 모든 인생에게 예외없이 병고와 쇠약 죽음의 축복을 허락하셨다. 사람은 모두 죽고 그 죽음은 참으로 가까이 있다. 화살인 듯 시위를 떠나면 다시는 돌아오지 못하는 한 번 뿐인 '지금 여기'의 인생과 신앙 여정, 그래서 남은 시간 하느님 사랑과 사람 사랑에 더욱 알뜰하게 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