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말자
김문한
건축학을 가르치는 교수로서 큰 충격을 받은 것은 1971년 12월 25일 서울 대연각 호텔 화재로 인해 166명이 사망하고 68명이 부상한 사건이다.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이렇게 많은 희생자가 생겼는지 심히 마음이 아팠다.
이것은 대학 건축학과에서 건축화재에 관한 연구가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리하여 내가 지도하는 대학원생 중에서 건축화재전문가를 길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마침 연구실에 진입한 Y군이 이 분야의 공부를 하고 싶다고 하였으며, 가정 형평상 가까운 일본 동경대학에 장학생으로 유학가고 싶다고 하였다.
나는 1981년에 객원교수로 동경대학에서 ‘기시다니’교수와 같이 연구할 기회가 있었다. 알고 보니 ‘기시다니’교수는 시공재료뿐만 아니라 건축화재전문가로 일본에서도 저명한 분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수시로 ‘기시다니’교수에게 내가 가르치고 있는 제자 중 Y군이 건축화재에 대한 연구를 하고 싶다니 받아 주시기를 간청하였다. 그러나 ‘기시다니’교수는 묵묵부답이었다.
나는 이에 굴하지 않고 ‘기시다니’ 교수를 설득하려고 노력하였다. 어느 때는 내가 기거하는 숙소에 ‘기시다니’교수 내외분을 초청하여, 좋아하신다는 삼계탕을 같이 먹으며, 고려인삼에 대한 효능 이야기부터 시작해서 자연스럽게 Y군의 우수성을 말씀드렸다. 그러나 시원스런 대답 없이 유학 온다면 대학원생으로 받겠다고만 하였다.
어언 나도 1년간의 객원교수 생활이 끝나고 귀국하게 되었다. Y군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다. 그래도 ‘시기다니’교수는 공동연구를 하면서 나의 일을 많이 도와주신 분이다. 그리하여 귀국한 4월에 ‘기시다니’교수 내외분을 한국에 초청하였다. 내가 소속한 대학은 물론 전국 각 대학을 돌면서 강연을 해 주시었다. 새마을열차를 이용해서 이동할 때마다 산과 뜰에 어울려 피어있는 진달래 개나리꽃을 보고 한국도 아름다운나라라고 감탄하였다.
‘기시다니‘교수가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Y군은 시종 같이 행동하였다. 불국사에 갔을 때 ’기시다니‘교수는 갑자기 Y군에게 대학원 박사과정 입학원서를 제출하라고 하였다. 한국에 오셔서 마음을 바꾼 것이다. 후에 안 일인데 자기는 2년 후에 정년이 되기에 선뜻 대답을 할 수 없었고, 내가 부탁하는 것을 끝내 거절할 수 없어 후임교수와 상담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Y군은 일본 동경대학교로 유학가게 되었다. 그러나 그 당시 중국과의 국교가 이루어지면서 중국장학생을 많이 받으라는 정책적인 문제로 기대했던 문부성장학금은 수령하지 못했다. ‘기시다니’교수는 나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오노다 기술연구소’에 부탁하였으며, 내가 실험했던 부서에서 1년간의 장학금을 지급하여 Y군이 공부에 지장이 없도록 하였다.
이런 우여 곡절 끝에 마침내 Y군은 동경대학에서 공학박사 학위를 수여받았다. 이미 고인이 되셨지만 끝까지 후원하여주신 ‘기시다니’교수님이 너무나도 감사하다. 어느듯 나도 정년퇴임하였으며 석양의 물든 구름 속에 지나온 발자취가 아롱거린다. 그 발자취 속에 Y군의 모습이 까마득하게 보인다.
유학가기 전까지는, 공학박사 학위를 받기 전까지는 그렇게도 상냥하고 문의도 많았던 Y군이었는데, 지금은 전혀 소식이 없으니 말이다. 간접적으로나마 인천국제공항 건설시 화제에 관한 큰 프로젝트를 Y군이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말을 듣고 내가 Y군을 건축화재건문가가 되도록 지도한 것은 잘한 일이구나 하고 자화자찬하기도 했다. 지금은 C대학교 교수로 근무한다는 말을 들었다.
정성을 다해 지도했으면 그만이지, 건축계를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열심히 활동하고 있으면 그만이지, 교수로서 그것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겠나? 선을 행하고 낙심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던가? 어두워진 하늘에는 별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첫댓글 선생님의 사랑은 예수님을 닮은 사랑입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