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역학적 해석
寅에 역마에 인수와 일주가 장생을 놓아 전국으로 기차가 출발하고 도착하는 서울역전에 웅장한 대우빌딩을 신축하였다.
연주 丙火 인수 빌딩을 상징하는 火는 2와 7인데 丙火가 공망이 되어 火의 수 가운데 작은 2를 사용하여 20층이 되고 빌딩을 甲寅년에 착공하여 甲寅은 3으로 빌딩은 지상 23층 건물을 서울역전에 지었다.
대우빌딩은 높이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주변에 다른 고층 빌딩이 없어 '각하가 계신' 청와대가 내려다 보였기 때문이다. 결국 대우빌딩 최상층의 유리창은 모두 막혀야 했고, 옥상에는 민간인 출입이 제한되고 대공포가 설치되었으며 군인들이 배치됐다. 수도 서울 대공방위의 일익을 담당하는 건물이 된 것이다.
서울역에 내린 촌뜨기가 대우빌딩을 보고 감탄을 연발하며 쳐다보고 바라보고 올려다보고 우러러봤다.
서울깍쟁이가 다가와 말하기를 "2500원 내놔! 내가 저 빌딩지기인데 남들이 한 층 볼 때마다 100원씩 받게 돼있어." 시골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500원만 받아. 난 5층까지만 봤으니까." 시골 사람은 자기가 속은 줄 모르고 서울 놈 속여먹은 얘기를 고향 사람들에게 의기양양하게 들려주었다. 국문학자 김 열규씨가 들려주는 대우빌딩 유머다.
서울 역전의 대우빌딩 전경
丙午(42세~51세) 대운에 신흥 재벌
丙火 태양이 午火 제왕에 임하여 대운에서 높이 떠올라 천지 만물을 따뜻하게 온기를 불어 넣으니 겨울에 출생하여 덜덜 떨며 지내던 겨울이 지나고 여름이 찾아와 한곡회춘이 되어 사주가 조후가 조절되어 활기가 넘친다.
이 대운에 인수가 강하여, 모든 일이 가장 순조롭게 이루어지며 많은 사람들이 대우를 위하여 부러워하고 좋은 호감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다.
대우는 1970년대에 대우건설, 대우증권, 대우전자, 대우조선 등을 창설, 신흥 재벌이 되었다.
丁未(52세~61세) 대운에
丁火 정인이 투출하여 일지 午火와 午未 합火하여 조후를 조절하여 오행의 기가 유창하게 순환한다.
丁火 인수가 未 여기와 인수에 천을 귀인에 임하여 午未 합火하여 자신의 살아온 길을 자서전으로 출판하여도 길하다.
1989년 54세 己巳년에 자서전 출판
세지 巳에 상관, 식신 庚,辛 金이 장생을 놓고, 인수 丙,丁 火가 록왕을 놓고 세지 巳 에 천덕귀인이 임하여 그간 살아온 내용을 글로 써서 펴낸 자서전인 〈세계는 넓고 할 일은 많다〉는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90년 55세 庚午년에 장남 사망
庚金 식신이 甲庚 충하고 甲木 칠살 아들이 세지 午에 사궁이 임하여 午午 자형하여 자식의 생명이 백척간두에 달렸다.
김우중의 아들 선재씨는 MIT에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김 우중씨 부인이 미국에 온다고 하여 아들 형제가 부모 마중을 가기 위하여 공항에 가는 중에 동생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다가 교통사고가 발생하여 가드레일을 들이 받아 운전석에는 에어백이 있어서 운전 한 동생은 살고 조수석에는 에어백이 없어 현장에서 즉사 하였다.
김우중 회장의 ‘큰아들 사랑’은 대우인이라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지난 1991년 장남 선재씨가 교통사고로 사망한 뒤, 신년인사 자리에서 눈물을 흘린 일화는 아직까지도 대우인 들에게 회자되고 있다.
이후 김 회장은 큰아들인 선재씨가 생각날 때마다 적지 않게 눈시울을 붉혔다는 후문이다. 연설을 하다 말고 돌아서서 눈물을 흘리거나, 연설 도중 내려오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는 게 김 전 본부장의 설명이다.
경기도 안산농장 이름을 ‘선재 농장’으로 지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김 전 본부장은 “통상적으로 출가를 하지 않은 자식이 죽으면 화장하는 게 관례다. 그러나 김 회장은 화장을 하지 않고 경기도 안산농장에 안치했다”면서 “농장 이름도 선재씨의 이름을 딴 ‘선재 농장’이라고 지었을 정도로 큰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다”고 귀띔했다.
김 회장의 부인 정희자씨는 한때 인기 연예인 L씨의 양자 입적을 심각하게 고민했다고 한다. L씨는 최근 배 용준 등과 함께 한류스타로 떠오르며 각광을 받고 있는 인물. 그러나 탤런트 이 모 씨가 죽은 선재씨와 외모가 비슷해 정희자씨가 유독 좋아했었다고 한다.
내 아들 선재야! 미안하구나!”
회사 망하고, 별장 날리고, 아들 묘 자리 까지 빼앗긴 김우중 전 회장…부모 없이 자식끼리 극비리에 유골 파헤쳐 화장해
“선재야. 미안해!….”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의 맏딸 김 선정씨(37)는 터져오는 울음을 감출 길이 없었다. 지난 2001년 11월27일 오전 11시경, 칼바람이 몰아치는 차가운 겨울 땅에서 김우중 전 회장의 장남 고 김선재씨의 시신은 파내어졌다. 꽁꽁 언 땅에서 가족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선재씨의 유골은 일꾼들의 손에 정성스레 수습되어 화장터로 옮겨졌다.
지난 90년 11월 미국 유학 중 스물셋의 나이로 요절한 선재씨. 그가 흙으로 돌아간 지 꼭 11년 만에 그는 가족들의 손에 의해 그렇게 잠시 햇볕을 받다가 다시 한줌의 재가 되었다.
“엄마도 아빠도 없이, 너를 이렇게 또 떠나보내다니….” 옆에 늘어선 선협·선용씨 등 형제들은 몸조차 가누기 힘들 만큼 슬픔이 북받쳐 올랐다. 이 날 개장(改葬)식에 참석한 사람은 선정·선협·선용씨 등 직계가족과 친인척, 그리고 대우 관계자 30여명. 아버지 김우중 전 회장도, 어머니 정희자씨도 그 자리엔 참석하지 못했다.
인근 화장터에서 화장된 그의 유골 중 절반은 강변에 뿌려졌다. 그리고 절반은 다시 원래의 묘에 가묘형태로 묻어뒀다. 언제 돌아올지 기약은 없지만, 다시 이곳을 찾을 어머니와 아버지가 나중에라도 아들의 체취를 조금이나마 느낄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선재씨가 그간 묻혀있던 곳은 경기도 안산시 수암동에 위치한 김 전 회장의 별장 앞뜰 양지바른 곳. 흔히 ‘수암 농장’이라 불리는 이곳은 김 전 회장이 주말이면 가족과 자주 들르던 곳이다.
1991년 56세 辛未년에
월지 부모궁 丑을 丑未 충하여 정인 丁火의 묘고 丑를 충하여 逢墓忌遙(봉묘기요)로 인하여 모친이 세상을 떠나셨다
충남 태안에 있는 전 대우그룹회장 김우중 모친 묘는 충남 內浦(내포)의 자미원국으로 천하명당으로 대제왕지지로 천장지비로 육관도사 손 석우가 소점 하였다고 한다.
김우중 모친 묘
그러나 이 묘를 감정한 풍수에 의하면 묘의 정 중앙부분에 3개의 수맥이 십자로 지나가고 있어서 도저히 묘를 쓸 수 없는 곳이라고 한다.
戊申(62세~71세) 대운에
62세~71세 대운으로 시주 운한 해당하여 癸亥 水가 록이 임하고 水가 장생이 되고 申子 삼합 水국으로 丙火 조후의 기를 반역하는 운으로 인수가 꺼져 사주가 춥고 인수의 기가 약화되어 후원자의 도움을 받지 못하여 당시 대통령인 김대중의 후원을 받지 못하여 대우 그룹이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97년 62세 丁丑년에 IMF 외환위기가 발생
시주 癸亥 운한으로 세운 천간의 癸水가 丁, 癸 충하고 지지가 亥子丑 방합 水국을 이루어 水극火하여 다시 추위와 어둠에 휩싸여 그간의 노력이 무로 돌아가는 시기로 하반기에 가까울수록 水기가 강하여 丁丑년 하반기에 우리나라에 IMF 외환위기가 발생하였다.
1997년 말에 우리나라에 IMF 외환위기로 발생한 경제위기를 맞이하여
경제적 위기가 발생한다.
1997년 말 외환위기로 발생한 경제위기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그간 30여 년간 고도성장 과정에서 배재된 구조적 문제를 제거하여야 한다는 인식 하에 금융부문, 기업부문, 공공부문, 노동부문 등에 대한 구조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오고 있다.
우리나라의 기업은 정부의 경쟁 제한적 내수시장 보호 정책 하에서 경제성장의 원동력이 되었다. 하지만 한국경제가 세계화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대기업들이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고 과도한 차입금 조달로 기업 규모를 늘리는 외형위주 경쟁을 추구하였고, 이에 따라 비효율적 자본 투자와 과도한 금융비용 부담으로 기업의 경쟁력은 떨어지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한국 경제는 기업 경영에 구조적인 문제점들을 안고 있으며 그간 한국 경제 성장에 크게 기여한 대기업 집단이 이제는 경제위기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되었다. 따라서 기업 경영에 수반되는 다양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하여 강력한 기업구조조정이 필요한 것이다. 과거의 압축 성장과정에서 누적된 경제의 구조적 취약성과 시장경제체제의 미 정착, 환경변화에 대처하기 위한 개혁정책의 실패 등으로 말미암아 발생한 것으로 진단하였다.
정부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상황에서 자력으로 방대한 기업을 구조조정이라는 칼날로 도려내야 하는 아픔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세계글로벌 경영기법을 펼치던 김우중은 외화 부족현상이 심각한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고 거대한 대우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1999년 64세 己卯년 10월에 해외도피
卯木 정관이 亥卯 삼합 木국으로 변하여 亥水 재가 나를 극하는 관으로 변하여 재가 관으로 변하여 은행부채가 木극土로 변하여 나의 목을 조여와 정부로부터 강한 압력이 들어와 그룹이 파산의 위기에 몰려 타개책이 없어지자 김우중은 홀연히 공공칠가방 하나만 가지고 단신으로 해외로 떠났다. 침몰하는 대우 호를 그대로 둔 채 그는 5년 7개월 동안 도피생활을 했다. 대우 경영진 중 상당수는 사법 처리됐고 같이 일했던 사람들조차 뿔뿔이 흩어졌다.
1998년의 IMF 구제금융사건으로 한국경제가 큰 타격을 받았고, 그로 인한 여파로 부채비율이 600%이상이었던 대우그룹은 1999년 8월 워크아웃을 신청하였다. 당시 부채는 500억 달러였다. 검찰청에서의 수사를 피하기 위해 출국한 후 도피생활을 하였으며, 타이나 독일 등에서 보았다고 하는 증언이나 소문도 많았다.
己酉(72세~81세) 대운에
己土 겁재가 대운지지 酉에 장생이 되고, 酉丑 삼합 金국으로 월지 부모궁과 합이 되어 申 대운에는 역마 운으로 해외로 떠돌았지만 酉운에 고향 어머니 품속과 같은 고국으로 돌아온다.
酉丑 삼합 金국으로 부모궁에 있는 천을귀인과 합하여 상관격을 이루어 천을귀인의 보살핌을 받아 고국으로 돌아와 사면을 받는다.
2005년 70세 乙酉년 6월 14일에 귀국
乙木 정관이 천간에 투출하여 지지 酉金 상관이 월지 丑과 酉丑 金국으로 상관이 국을 이루어 법의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월지 부모궁을 합하여 고국으로 돌아온다. 정부에서 돌아오면 죄를 사면하겠다는 언질을 받았다는 설도 있다.
대한민국에 입국하여 검찰의 조사를 받아 정식으로 기소되었다.
2006년 71세 丙戌년 11월 3일에 형이 확정
서울고등법원 항소심에서 분식회계 및 사기대출, 횡령 및 국외 재산도피 혐의로 징역 8년 6개월, 벌금 1 천만 원, 추징금 17조 9천 253억 원의 형을 구형받았고, 항소를 포기하여 형이 확정되었다.
2007년 72세 丁亥년에 특별사면
丁火 인수가 亥 중 甲木의 생을 받아 절처봉생이 되고, 丁火 인수가 亥와 酉에 천을귀인이 임하여 12월 31일 대통령특별사면으로 사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