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스겔 41장 1-26절
찬송가 : 383장 ‘눈을 들어 산을 보니’
에스겔은 40장에서 환상 가운데, 여호와의 권능으로 이스라엘의 예루살렘에 이르렀습니다. ‘놋 같이 빛난 사람’의 인도를 따라 성전 바깥담부터 시작하여, 성전의 바깥뜰과 안뜰, 그리고 각 뜰로 드나드는 문과 부속 시설에 대해 살폈습니다. 이어서 오늘 본문 41장에는 에스겔이 성전 안뜰을 지나 성전 본체로 들어가게 됩니다.
(1) 그가 나를 데리고 성전에 이르러 그 문 벽을 측량하니 이쪽 두께도 여섯 척이요 저쪽 두께도 여섯 척이라 두께가 그와 같으며
성소에 이르러(1-4절)
에스겔은 제사장 출신이라 성소까지 들어 올 수 있습니다. 한걸음씩 조심스럽게 성전에 들어온 에스겔은 성전의 두 기둥을 바라봅니다. 이 기둥을 본 에스겔은 과거 솔로몬 성전의 두 기둥 ‘야긴’과 ‘보아스’를 떠올렸을 것입니다. 열왕기상 7장에 기록된 두 기둥의 의미는 각각 ‘그가 세우신다’, ‘그에게 능력이 있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야긴’은 성전과 함께 하나님께서 다윗 왕조를 세우신다는 의미를 상징하며, ‘보아스’는 성전과 다윗 왕조의 견고함과 안정성을 상징하고, 다윗 왕조에 힘과 능력을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이란 진리를 나타냅니다.
여기서 우리가 봐야 할 진리는 무엇입니까? 과거 다윗 왕조는 바벨론에게 멸망하였고, 심지어 성전도 허무하게 무너졌습니다. 그 성전의 기둥인 ‘야긴과 보아스’는 전리품으로 바벨론으로 옮겨지고 말았습니다. 이것을 볼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능력에 대해 의심하게 됩니다. 과연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시고 견고하게 세우시는 분인가? 그러나 이 의심은 하나님께서 진정 세우고 견고하게 붙드시는 나라에 대한 그릇된 이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통치하시는 진정한 나라는, 혈통적인 다윗의 나라가 아닌, 하나님의 언약 위에 세워진 다윗의 후손으로 오시는 예수님의 나라 인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다윗 왕조의 붕괴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에서 보존하게 하셨고, 결국 다시 돌아오게 하사,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살도록, 결국은 회복시키실 것이라는 약속을 해주시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삶에도 많은 우여곡절이 있습니다. 기쁠때도 있지만, 힘들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세우시는 가정, 하나님 붙드시는 가정은 세상의 풍파에도 절대 흔들리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권능과 통치 안에 거하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권능을 의지하면 우리는 흔들리지 않고, 무너지지 않으며, 영원히 세워지고 견고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마16:18에도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또 내가 네게 이르노니 너는 베드로라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하나님이 이전에 이스라엘을 심판하셨던 이유는 그들의 요란한 ‘열심’ 때문이었습니다.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려는 열심이 아닌, 하나님을 망각하고, 내가 모든 삶을 통제하려는 교만하고 요란한 ‘열심’ 때문입니다. 우리는 인간적인 그 열심을 버리고, 하나님의 통치를 사모하며, 그 말씀으로 하나님의 백성다워지는 ‘열심’을 갖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3-4) 그가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는 두 척이요 문 통로가 여섯 척이요 문 통로의 벽의 너비는 각기 일곱 척이며 그가 내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스무 척이요 너비는 스무 척이라 그가 내게 이르되 이는 지성소니라 하고
성전을 측량하는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이, 안으로 들어가서 ‘내전 문 통로의 벽’을 측량했다고 합니다. 즉 ‘그가 내전 안으로 들어갔다’는 것인데, 여기서 내전은 지성소를 의미합니다. 원래 40장에서부터 그 천사가 계속 에스겔을 데리고 다니면서, 성전 외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측량했습니다. 그러나 3절부터는 에스겔을 성소에 머물게 하고, 천사 혼자서 측량하며 그 내용을 에스겔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변경됩니다. 왜냐하면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출입할 수 있었고, 대제사장일지라도 레위기 1:1-17에 기록된 대로 대속죄일만 출입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에스겔은 제사장 신분이지만 지성소에 출입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성소는 성전에서 가장 거룩하며, 하나님의 영광이 직접 머물러 있는 곳입니다. 구약의 사람들은 아무리 희생 제사를 드려도 주님이 임재하시는 지성소에는 절대 가지 못합니다. 구약에는 이렇게 하나님과 인간에 ‘사이’가 있었고, 하나님과 인간에 ‘거리’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인간의 오염됨으로 철저하게 구분되었습니다. 이를 구별해주는 것이 ‘성전의 휘장’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 예루살렘 성전 안에 있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둘로 찢어졌다고 합니다. 휘장은 두께가 얇은 천이 아닙니다. 예전에 성전 원형을 그대로 재현한 곳에서 이 휘장을 보았습니다. 만져보니 휘장은 두께가 약 20cm이었습니다. 어른 손바닥 너비 만큼의 두께가 찢어졌다는 것은,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이며 놀라운 사건이었습니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가로 막혀있던 그 두꺼운 휘장을 찢어주신 것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충격적이며 신비롭게 다가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휘장은 예수님의 몸이며, 그 몸의 찢어짐으로 인하여 우리가 성소와 지성소로 구분하지 않고,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새로운 생명의 길이 열렸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은혜고 이것이 감격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신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5-6) 성전의 벽을 측량하니 두께가 여섯 척이며 성전 삼면에 골방이 있는데 너비는 각기 네 척이며 골방은 삼 층인데 골방 위에 골방이 있어 모두 서른이라 그 삼면 골방이 성전 벽 밖으로 그 벽에 붙어 있는데 성전 벽 속을 뚫지는 아니하였으며
골방들의 연합됨(5-15절)
이어서 성전 벽 삼면의 골방들과 건물 후면의 독립 건물에 대한 측량을 보도합니다. 여기서 총 90개의 크기가 다른 골방들이 나옵니다. 이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교회를 이루는 성도들을 의미합니다. 골방의 크기가 달랐다는 것은 성도의 능력과 위치, 은사 등에 다름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골방들이 크기에 상관없이 모두 교회의 중심인 예수님을 상징하는 성전과 연합되어 있습니다. 또한 골방들은 성전뿐만 아니라 다른 골방들과도 상, 하, 좌, 우로 연결되어 결국 하나를 이루어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가정에서, 직장에서, 교회에서 연합되는 것, 하나가 되는 것이 참으로 힘듭니다. 어찌 보면 하나가 되는 것보다, 하나 됨을 지켜나가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하나 되는 비결은, 우리에게 화평이 있어야 한다고 성경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고후5:18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주셨다’고 합니다. 또한 롬14:19에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화평을 방해하는 것은 내 이기심과 욕심입니다. 이기심과 욕심이라는 것은, 결국 내 자아가 크고 내 중심적인 삶을 살고 있다는 것입니다. 민12:3에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다’고 하였습니다. 여기서 온유함이라는 히브리어 ‘아나브’는 ‘대답하다’는 뜻인데, 당시 고대 근동에서 대답하는 사람은 오직 종입니다. 주인만 질문할 수 있고, 대답은 종에게만 주어진 몫이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온유함'이란 하나님 앞에서 종으로서,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을 의미합니다. 이는 하나님뿐이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도 자신을 낮추는 겸허함의 습관을 가질 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나 됨을 깨는 자가 아니라, 하나 됨을 이루어 나가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13)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길이는 백 척이요 또 서쪽 뜰과 그 건물과 그 벽을 합하여 길이는 백 척이요
13-15절은 성전 본체와 뒤뜰에 있는 부속건물의 총 규모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13절에 그가 성전을 측량하니, 놋과 같이 빛난 사람은 성전의 모든 부분을 측량합니다. 측량하는 사람, 즉 천사를 대부분의 신학자는 하나님으로 간주합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전을 친히 측량하여 그 어떠한지를 에스겔에게 보이십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서아시아 일곱 교회를 측량하셔서 칭찬하시기도 하고, 때론 책망하시거나, 징벌하시는 것처럼, 오늘날 교회를 측량하며 그들의 어떠함을 보십니다. 측량의 목적은 교회가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지내고 있는지에 대한 여부입니다. 교회를 측량하신다는 것은 그 지체인 성도들의 삶도 측량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으로, 내 삶의 영적 상태를 진단하고 재건해야 합니다.
번성하게 만드는 장식(16-26절)
16절 21절까지는 성전의 내부 장식에 대한 설명입니다. 여기서 신기하게 볼 수 있는 것은 다윗 성전에는 없던, 종려나무가 새 성전에서는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16) 땅에서부터 문 통로 위에까지 그룹들과 종려나무들을 새겼으니 성전 벽이 다 그러하더라
먼저 본문에 나오는 새 성전이란 이 세상의 현실 속에서 지어질 것이 아니라, 앞으로 다가올 종말론적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상징적 계시입니다. 그리하여 새 성전에 그룹들 외에 ‘종려나무 한 그루’가 있다는 것은 승리를 상징합니다. 에스겔 7:6에서 “끝났도다! 이 땅 사방의 일이 끝났도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이 끝나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장차 최후 승리를 거두고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차 경험할 영원한 승리, 완전한 승리를 확신하며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23) 내전과 외전에 각기 문이 있는데
22-26절은 성전에 있는 두 개의 문, 내전문과 외전문에 관한 설명입니다. 내전문은 지성소문이며, 외전문은 성소문입니다. 이는 지성소에 들어가려면 성소문과 지성소문을 통과해야 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양들의 문이 되시는 예수님을 통하지 않고는, 그 누구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환상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허황되고 죄된 것을 보고 말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직 내 삶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여기서 우리가 살펴볼 것은 ‘종려나무’입니다. 18절부터 마지막 절에 이르기까지 성전벽과 성문에 유독 종려나무가 많이 새겨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반복되는 단어입니다. 지난 5월, 봉준호 감독이 영화 기생충으로 칸 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탔는데, 그 종려상이 바로 종려나무입니다. 종려나무는 ‘타마르’라고 하며, ‘꿀처럼 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시편119:103에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하나이다’라고 합니다. 말씀을 꿀보다 더 단 것이라고 여기며, 말씀의 달콤함을 얘기합니다. 성전의 곳곳에 종려나무를 새긴 것은, 불사조 피닉스라는 별칭을 가진 종려나무처럼 이스라엘 민족이 결국은 승리와 영광 가운데 거할 것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하나님의 말씀과 가까이 함으로써, 인생에 넘치는 달콤한 은혜를 맛보는 삶을 살아가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혹여나 쓴 맛 혹은 매운 맛이 입안에 가득 찰 때, 이를 잠재우는 것은 그보다 더 강한 단 맛을 머금을 때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길에서 근심과 슬픔의 쓴맛과 매운맛을 덮는 것은 꿀보다 더 달콤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에 새겨주셨듯이, 우리의 심령 속에 새겨 놓으신 종려나무를 생각해봅시다. 그 종려나무 열매 보다 더 달콤한 말씀을 우리 마음에 주셨습니다. 그 말씀이 우리 마음에 뿌리를 내려야 합니다. 그리고 수많은 열매를 맺듯이 번성해야 합니다. 그 열매가 말씀의 열매며, 바른길로 인도하는 은혜의 열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언제나 말씀을 가까이 하고 그 말씀에 취한 인생을 살아갈 때,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으며, 바른길을 걸어가는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럴 때,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경작자, 평화의 연결고리로 쓰임 받는 귀한 오늘 하루의 삶이 되시길 기도합니다.
기 도
하나님. 에스겔에게 성전환상을 보이시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저희들에게 귀한 말씀의 의미들을 주시니 감사드립니다. 그 의미들을 저희가 하나씩 살펴보면서 그 안에 담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더욱 찾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으로 하여금 저희가 담대하게 하나님의 임재 안에 거하게 하시고, 또한 종려나무를 저희 마음 속에 심어주셔서, 꿀보다 더한 말씀이 저희 인생에 뿌리를 내리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저희 인생길이 번성하는 은혜를 누리게 하시고, 엮어진 골방들처럼 말씀 안에서 언제나 어디서든, 하나 됨을 위해 노력하고 쓰임 받게 하셔서, 저희가 서 있는 곳에서 평화의 경작자, 평화의 연결고리의 바른길을 걸어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