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예의 전당 제 1호 헌액자 황선홍 선수에 대한 기사가 '후추' 창간호에 실린 후, 참
으로 많은 독자들이 '후추'를 찾아주시고, 격려해주셨다. 각 PC통신 스포츠 게시판에
는, '황선홍 = 후추'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로 수많은 분들이 스포츠 웹진 '후추'를
추천해주셨다.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현상은, 종전까지 50 : 50 정도로 팽팽한 접전
(?)을 보이던 황선홍 찬반론이 (명예의 전당 파급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황선홍 죽여랏!" 소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명예의 전당을 통해서 '축
구선수 황선홍'이 아니라, '자유인 황선홍'으로서의 진면목이 조금이나마 공정하게
조명되었다면, 기사를 엮어 낸 우리 '후추' 필진은, 그 점 하나에 큰 힘을 얻게 된
다. 해트트릭을 기록해 가면서, 일본 열도에 연일 태극기를 꽂아 가고 있는 황선홍
선수의 활약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황선홍 스토리가 후추 필진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큰 이슈는, 제2호 헌액자 선정
이었고, 어떤 식으로 황선홍 스토리 보다도 더 감명 깊고, 진솔하고, 후련한 글을
전달해드리냐 하는 문제였다. 이미 내년 초까지,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예비 후
보자 명단은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지만, (선데이 서울식) 스포츠신문에 오랫동안 길
들여진 일부 팬들께서, 더 중량감 있는 것과 더 자극적인 것만을 고집하시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금새 풀렸다. 잘 나갈 때나, 죽을 쑬 때나,
후추의 신조만을 계속 지켜나간다면, 독자분들로부터 계속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하
다고 여겨진다.
후추 명예의 전당 후보들의 자격 요건(?)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진다. 첫째, 여론이
'매장' 시킨 스타들. 둘째, 단지 세월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잊혀지고 내팽개쳐진
당대 최고의 스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홀대당하는 월드스타
들... 그래서, 우리 후추는 후추 칼자루를, 아니 후추 뚜껑을 시원하게 뽑으면서, 70
년대 한국 복싱 황금기의 최고 테크니션’, 박찬희 선수를 영광스럽게, 그리고 자랑
스럽게 명예의 전당에 제2호로 헌당시킨다.
“엄마 어릴적에…”, 왜 박찬희인가?
필자가 국민학교 (현재 초등학교의 전신) 시절 알파벳도 다 배우기 전에 우리말 처럼
익숙하게 구사했던 영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Hello’,‘Thank you’ 같은 단순한
영어가 아니라, ‘One Two straight’ ‘Upper Cut’ ‘잽(필자도 영어로 모르겠음)’
'Hook’ ‘Counter Blow’ 등의 고급(?) 영어였다. 단어의 뜻도 모르면서 권투 중계
를 볼때나, 혹은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말리기에 앞서서 모두들
고급(?) 영어로 응원을 하곤 했다. 이렇게 권투는 7,80년대에 우리와 함께 숨쉬었던
'국민 스포츠’ 였다.
70년대..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그때, 어린 나에게 우리 나라에 대한 가슴 뿌듯한 자
부심을 주었던 것은, ‘국기에 대한 맹세’도 아니었고, 매주 월요일 지겹게 4절까지
부르는 ‘동해물과~’ 도 아니었고, 그 시대 교무실까지 사진이 떡하니 걸려져 있던
'박대통령 각하’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어린 내가 정말 눈에 이슬까지 맺혀 가면서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바라보며 ‘대한민
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했던 것은, ‘세계를 제패' 했던 흑백 텔레비젼의 스포츠 경
기였다. 그 중에서도 4년에 한번 열리던 올림픽 경기보다는, 1년에 한 두번 심심치
않게 열렸던 세계타이틀 복싱 경기야 말로 어린 나를 몹시도 흥분시켰고, 가난한 우
리나라가 선수가 ‘세계 챔피언’이라는 호칭을 받으며 커다란 밸트를 감아쥘때면…
'우리나라'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미국’, ‘멕시코’, ‘푸에트리코', ’베네주엘
라’등 미주권 나라들이 주름을 잡고 있었던‘사각의 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
던 당대의 우리나라 세계 챔피언들이야 말로, 그 당시 나에게‘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게 했던 나의 국민 영웅들이었던 것이다.이렇듯 우리에게 있어서는 스포츠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권투’가 단지 ‘무식’하고 ‘야만’적이라는… ‘더 야만’적
인 이유로 현재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의 방어전 조차 스포츠 뉴스의 단신으로 처
리되며 홀대 받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엄마 어릴 적에..'의 심정으로 생각한다. 그 시대 우리의 피를 끓게했던 우리들의
영웅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난에, 군바리들에게, 지쳐서 주눅 들었던 우리 삼
촌, 아부지, 형님들의 피를 잠시나마 끓게 했던 그 시대의 복싱 영웅들... 소매치기
출신의 김성준, 동양의 철권 유제두, 홍수환의 라이벌 염동균, 미남 복서 김태호, 동
급최강 인파이터 김태식, 원투 스트레이트의 김상현, 쇼맨쉽의 김사왕 등등...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잘난 미국에서는 '알리'가 아직도 올림
픽 성화 봉송 주자로 나오고, '포먼'을 다시 링에 복귀 시켰고, '레너드' '헌즈'가
아직도 토크쇼에 나와서 팬들과 만나는데, 우리의 영웅들은 미디어에서 사라진지 오래
고, 기껏해야 '홍수환'선수만이 오랜 방황끝에 '코믹' 해설자로 일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고? 우리에게는 그들 만한 세계적 복싱 선수가 없어서라고? 아니다. 있다. 우리
에게도 분명히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그들의 생사조차 확인
할 길이 없는 것은, '영웅 빨리 만들어, 그놈 뜨면 씹어버리기'의 특기를 가진 우리
스포츠 미디어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는 것 - 후추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후
추약속: 우리에게서 사라져간 난세의 영웅들을 찾아내서, 아직도 식지 않은 우리 팬
들의 따뜻한 박수를 그들에게 전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 후추는 잊혀진 우리 복싱 영웅 한사람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당하고자 한다.
그는 다름아닌, 한국 '최초'의 세계적 테크니션 '박 찬희'이다.
후추가 최초의 챔피언 김기수, 4전5기의 홍수환에 앞서 박찬희에게 제일 먼저 찾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앞선 이들이 우리 스포츠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기량면에서 '세계적 기량'을 보유했던 최초의 우리의 복서였기 때문이다.
'헝그리 정신' 만이 살아있던 '헝그리' 한국 복싱, 아니 '정신일도 하사불성'만을 외
쳤던 구세대 한국 스포츠가 '기량', '테크닉'을 외치게 된 전환점을 갖게 했던 선수
가 바로 '세계적 테크니션' 박찬희였다.
박찬희 전에도 김기수, 홍수환, 염동균, 유제두등 많은 훌륭한 복싱 선수들이 있었지
만, 그들이 동양을 벗어나 세계적 선수들과 경기를 할때면, 우리 팬들은 '젖먹던 힘
까지 내라' '안되면 대가리로 받아라'라는 식의 '한강의 기적'을 바라면서 경기 내내
쫄면서 오금을 피지 못했다. 그러다 가끔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빅 매
치' 있다고 집에 일찍 가서 두발 쫘악 펴고 맥주 한잔에 오징어 다리 씹으면서 보기
에는, 우리 선수들의 기량은 정신력에 비해 너무도 불안했다. 그래서 스포츠 경기를 '
기도하는 심정'으로 봤다.
박 대통령 컵이나 메르데카컵, 킹스컵등… 극동지역 국제 축구 대회에서 말레이시아
나 일본, 버마 같은 나라를 만나면 방방 뜨면서 온 국민을 즐겁게 해 주었던 우리 축
구도 가끔 유럽 프로축구팀을 불러서 친선 경기를 할라치면, 슬슬 즐기면서 하는 코
쟁이들 앞에서 '목숨'걸고 X 빠지게 뛰어다니던 우리 선수들이 왜 그렇게 안스럽던지,
경기를 보는 내내 우리 팬들의 마음은 '못먹어서 불쌍한' 우리 스포츠 현실을 씁쓸해
하면서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어쩌다 우리가 이기기라도 하면 뉴스다 신
문이다 '한국 축구 세계 강호 격파' 떠들면서 맨날 이렇게 헝그리 정신 군바리 축구
만 ‘하면 된다'로 최면을 걸기 일쑤였다.
그러한 '웃통까고 전쟁 하기'식의 '한국' 스포츠에서, 특히 복싱은 더더욱 '헝그리
정신'이 가장 강조된 종목이었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한판 목숨걸고 다부지게 붙는'
고추장 신화 스타일이었고, 안정되고 세계적인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는 너무
도 없었다. 우리의 터프가이, '세계적' 홍수환 선수도,'사모라'라는 더 세계적인 선
수앞에서 배짱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초라했고, 그 경기를 지켜 보는 팬들도 '정신력
의 기적'으로 만을 쫄면서 기도했다.
우리의 정신력, 우리의 ‘고추장 오기’도 '세계적 기량'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
다. 스포츠에서 정신력은 더 없이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기량'보다 앞 설수는 없기
에, 경기에서 '목숨'을 바쳤던 선수도 '경기에서의 승리'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한
우리 70년대 복싱계에서 박찬희 선수는 진정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최고 기량의 최초
의 한국 챔피언이었다.
박찬희 선수의 복싱은 '세계적'이었다. 박찬희의 권투는 달랐다.
‘링의 대학교수’라는 세계적인 복서, 멕시코의 영웅 미구엘 칸토를 정신력이 아닌
기량으로 깨끗하게 눌렀다. 그것도 두번이나! 대학교수를 잃은, 당황한 멕시코가 '에
스파다스'라는 그 시대 경량급 최고의 KO 복서를 한 체급 올려서 도전케 했는데, 전
문가들 조차 박찬희의 패배를 예상했었고, 여느때처럼 우리 팬들은 TV 앞에서 쫄면서
그 경기를 지켜봤는데 박찬희는 그 선수를 4번이나 다운시킨 끝에 기냥 2회 KO로 싱
겁게 끝냈다. 그의 경기에서 그가 내뻗었던 펀치는 의미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쉴
새없이 휘두르다가 어쩌다 걸린 것이 아니라, 정확이 의도한 펀치로만 경기를 끝냈고
그 당시에 그런 선수가 '우리 선수'였다는 것은, 그 시대 한국 복싱계에 하나의 ‘작
은 혁명’과도 같았다. 그 후로 그의 경기는 발뻗고 새우깡 먹으면서 봤었고, 한국
선수중 최초로 4차방어전을 돌파했다. (목숨걸고 세계 챔피언이 되어도, 안정된 기량
을 갖지 못하면 의무 방어전의 덫에 걸려서 그 당시에는 4차방어전을 넘어선 챔피언
이 없었다.)
체력이 문제였던 테크니션 박찬희는 전성기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젊은날의 방황'
과 '오오꾸마 쇼지'라는 천적에 걸려서 화려한 은퇴를 하지 못했지만, '엄마 어렸을
적에'의 우리 스포츠 팬들의 눈을 분명 한단계 높여주었던 선수였다. 그의 화려했던
테크닉은 후에 우리 복싱계가 마침내 장정구, 유명우라는 동급 세계 최고의 선수를
낳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99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 세기말.
조인주라는 '세계 챔피언'이 괜히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이는 복싱의 암흑 시대에,
'엄마 어릴적에' 이 땅의 어린애들, 삼촌, 형님, 아버지의 피를 끓게 했던 우리의 복
싱 영웅들을 그리워하며…'박찬희' 그를 다시 링으로 불러본다
'전광석화'의 원조 박찬희
못다 핀 꽃 한송이
박찬희는 선린중학교 3학년 때 권투 글러브를 처음 끼게 된다. 무심코 원효로 길거리
를 지나던 중, 창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복싱 체육관의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갇
혀진 4각의 링 안에서 단지 두 주먹으로만의 싸움으로, 승자를 가려내는 '복싱'이라
는 스포츠에 완전히 매료되고 만다. 사실 박찬희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운동은 야
구였다. 전통의 야구 명문, 선린중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던 야구선수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주신 '기장'이 너무 짧은 덕분에, 금새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권투를 시작한지 1년만인, 한영 고등학교 1학년 당시, 박찬희는
처녀 출전했던, 서울시 신인대회에서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가끔씩, 소
위 성공한 운동 선수들의 인터뷰를 듣다 보면, 죽어라고 노력해서 만들어진, 피와 땀
의 댓가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박찬희를 비롯한 많은 스타들의 스토리를 접하면서 느
끼는 점은, 신이 내린 탁월한 운동 센스가 없었더라면, 세계 최고의 자리까지는 힘
들지 않았겠느냐 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선천적 기량 10%, 후천적 노력 90%'라는
말을 잘 쓰지만, 그 선천적 요소 10%의 차이가 바로, 챔피언과 그저 잘하는 선수의
차이를 구분짓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박찬희가 프로 데뷔전을 치를 당시, 복싱계 인사는 물론, 많은 복싱팬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랜 세월동안 다져온 복싱의 기본기와 탄탄한 테크닉
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던 화려한 아마복싱 경력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4년 4월, 박찬희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그리고, 그 해에 열린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 출전, 당당히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을 목에 건다. 76년 킹스컵 대회
에서는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과 대회 MVP를 동시에 거머쥐는 성과를 올리며 아마복
싱의 '짱'으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물이 오를 데로 오른 박찬희는, 아마복싱의 금자
탑인 올림픽에 모든 것을 걸고, 76년 몬트리올의 영광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75년 5월. 일간지 스포츠면에 작지 않은 기사 하나가 뜬다 - '국가대표 복싱팀 음주
폭행 사건!' 몬트리올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 중이
던 박찬희는, 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복싱과는 무관한 그의 사생활이
언론을 통해 만인에게 첫공개되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복싱 입문 후, 처음으로
태릉에서 퇴촌까지 당하는 중징계를 받게 된다. 당시 배경은 이렇다. 등장인물은 3명
이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찬희와 박인규는 절친한 동기생 사이였고, 박찬희와 같
은 급의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던 후배 선수 강기룡. 이렇게 3명이 태릉선수촌 앞에
있는 선술집에서 한잔을 꺾는 도중에 말싸움이 일어났고, 당시 지방에서 '한따까리'
한다고 하던 강기룡이 광분해서, 술병을 휘두르기 시작, 손으로 피하려고 하던 박인
규가 왼팔 손목을 크게 다쳐 입원하게 되었고, 박찬희는 사건 규명과정에서 괘씸죄를
적용 받아 퇴촌을 당해야만 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해석 버젼으로는, 신예 강기룡
의 주가가 무섭게 뛰어 오르면서 약간의 위기의식을 느껴오던 박찬희가, 그 동안 눈
엣가시처럼 느껴왔던 후배 강기룡을 못마땅하다고 느낀 나머지, 친구 박인규와 함께
휴가를 받고 미리 선수촌 밖으로 나가서 강기룡을 불러내 한번 ‘타이르려다’ 그 지
경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요 대목에서, 사건의 진상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조직'의 쓴맛을 한번 맛본 박찬희는, 머지 않아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게 되고, 이
듬해 9월, 대망의 올림픽 무대에 노크를 하게 된다. 초반 상대들을 TKO로 물리치며,
분위기를 한껏 탔던 박찬희가 8강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당시 아마복싱 최고의 '파워
하우스' 쿠바의 에르난데스. 박 터지는 접전을 벌인 이 경기는, 결국 2:3 이라는 판정
패로 끝나고 박찬희의 올림픽 메달 사냥은 8강 문턱에서 꼬리를 내리게 된다. 우리 한
국 복싱사에, 제일 뻔질나게 오르는 얘기가 바로 ‘편파판정’ 얘기다. 박찬희의 올림
픽 8강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혹자는 그 경기를 보고 '해외에서 코리아란 이름 석
자도 모르던 당시 상황에서, 2:3 판정까지 가게 한 것도 기적이다' 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쉬운 한판을 뒤로 하고 박찬희는 그의 화려한 '아마 글러브'를 벗
게 된다. 그의 통산 아마 성적, 127전 125승!
- 전광석화의 KO승
박찬희 보다 더 먼저 세계 타이틀을 대한민국에 선사한 챔피언도 있었고, 그보다 더
살벌한 펀치력을 앞세워 상대를 때려 눕였던 챔피언도 있었고, 그보다 더 독한 '깡다
구' 복싱을 구사하던 챔피언도 우리나라엔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숱한 챔피언들
이 국내 복싱 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었다. 하지만, 박찬희. '그 보다 더 빠른
복서는 그 이전엔 찾아 볼 수 없었다'는 말에 토를 달 위인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경량급의 '속사포' 개념을 확실히 가르쳐 준 장본인이 바로 박찬희였다. 현란한 푸
트 워크 (Foot Work)를 내세워 상대를 교란시키는 아웃복서는 아니었지만, 그가 한번
제대로 마음먹고 때려잡으려 했을 때, 그의 짧은 좌우 훅과, 이어지는 연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상대는 흔치 않았다. 그가 3차 방어전의 제물로 삼았던, 멕시코의 구티
에스파다스를 2회에 때려눕힌 다음날, 우리 국민들은 복싱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
를 목격하게 된다. '朴贊希, 電光石火의 KO승!!!'... 그 후로도 우리 스포츠 신문의
복싱 헤드라인에서 얼마나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단어였던가? 비교적 강하지 않다고
평가되던 그의 펀치력을, 박찬희는 스피드와 연타 테크닉으로 커버하였고, 앞으로 파
고드는 ‘인파이팅’으로 상대방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1980년 4월 벌어진 멕시코의 알베르토 모랄레스와의 한판 승부. 명실공히, 박찬희의
복싱 테크닉 '결정판'을 선사했다는 5차 방어전이었다. 70년대 '전설의 스포츠 캐스
터' 이철원 선생의 생생한 중계방송은, 박찬희의 복싱 스타일을 단편적으로 설명 해
준다. 당시 2라운드를 'Play-by-Play'한 것을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오른손 강타!!! 박찬희~, 왼손! 박찬희, 다시 좌우 스트레이트!, 복부!!!, 박찬희!..."
순식간에 몰아치는 펀치 5방... 이것이 바로 '박찬희 복싱'이었다. 남들보다 어깨춤
을 많이 추면서 유연한 더킹(Ducking) 모션을 취하고, 한발씩 쳐들어가는 박찬희의
불독(Bull Dog) 근성. 그리고, 남들보다 빠르기 때문에 피해 갈 수 있었던 상대의 펀
치들. 바로 박찬희의 스피드 복싱을 완성시켜준 요인들이다.
1977년 7월, 박찬희는 한 맺힌 몬트리올의 악몽을 떨쳐 버리기 위해, 프로 데뷔전을
치른다. 남들과 달리 데뷔전부터 그는, 일본의 무또 슈지를 상대로 국제전을 치르고,
곧이어 당시 동양챔프였던 정상일에게 판정승을 거두면서 WBC 플라이급 세계 랭킹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승승장구한 박찬희는 데뷔한 지 1년반 만에, 11전 전승(5KO)이
라는, 비교적 짧은 전적을 가지고 세계 챔피언의 벽을 두드리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
도, 11경기 만에 세계 챔피언전에 도전하는 국내 복서는 전무했다.
31살의 나이로, 14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멕시코의 '링의 대학교수', 백전노
장 미구엘 칸토와의 일전은, 우리 복싱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명승부로 꼽힌다. 15라
운드까지 뛰었던 당시 세계 챔피언전은 홀딩, 버팅, 클린칭 따위의 '꼼수'라고는 찾
아볼 수 없없던, 양 선수 모두 정말 ‘깨끗이 때리고 깨끗이 맞았던, 45분간의 난타
전’ 그 자체였다. 23살의 약관 박찬희는, 15라운드 시종일관 파이팅 넘치는 복싱으
로 심판, 팬들 모두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고, 대한민국 제7대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와 같은 감동적인 경기 후 인터뷰는 없었지만,
이때부터 ‘대학생 복서’ 박찬희에 대한 팬들의 애정과 기대는, 역대 어느 챔피언
의 그것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고 뜨겁게 커져간다.
박찬희의 챔피언 방어전 기록을 요점만 정리해본다.
⊙ 79년 5월 (서울) : 이가라시 스또무(일) 상대로 1차 방어. 전원일치 판정승.
워낙 지저분한 스타일 이었던, 이가라시의 버팅과 클린칭 작전에 휘 말려 실망스러운
한판으로 평가 됨. 서울징크스의 시초. ⊙ 79년 9월 (서울) : 칸토와 무승부로 2차
방어 성공!
5회에 다운을 빼았았지만, 후반 체력 분배 실패로 무승부. 이때부터 '펀치력 빈곤,
결정타 부재'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니기 시작.
⊙ 79년 12월 (부산) : 전 세계 챔프 구티 에스파다스(멕) 2회 KO승! 3차 방어!
박찬희의 개인적인 우상이자, 공포의 강펀치로 불리우던 에스파다스를 상대로, 1회
다운 한차례 먹고도, 2회 현란한 연타 공격으로 KO승!!! 펀치력 이야기 완전히 불식
시킴!
⊙ 80년 2월 (서울) : 아르넬 아로살(필) 상대로 15회 판정승. 4차 방어 성공.
김성준, 김태식 등 세계 챔피언들을 다운시킨 경험이 있는 강타자 아로살을 맞아,
2회 다운 한차례 빼았았지만 KO로 연결 못시킴. 당시 4차방어 성공은 우리나라 세계
타이틀 최장 방어 기록.
⊙ 80년 4월 (대구) : 모랄레스(멕) 상대로 15회 판정승. 5차 방어!
고향인 대구에서 첫 방어전. '다채로운 테크닉의 개가', '멕시코 킬러 박찬희'라는
별명도 얻게 됨.
⊙ 80년 5월 (서울) : '늙은 여우' 오오꾸마 쇼지(일)에게 9회 KO패! 6방 실패!
프로데뷔 후 첫 패배. 너무나 무기력한 경기로 온 국민들 충격.
⊙ 80년 10월, 그리고 81년 2월 일본에서 거행된 오오꾸마 쇼지와의 두차례 재대결에
서 초반 다운을 빼았았지만, 후반 체력 저하, 편파 판정 등의 이유로 챔피언 탈환 실
패.
박찬희의 WBC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도전, 방어 일지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몇 가지
주목할만한 부분들이 있다. 첫째, 그의 복싱 스타일을 일컬어 가장 흔히들 하는 말은,
'박찬희는, 강자에는 강하고, 약자에는 약하다'이다. 이런 평가는 박찬희 본인도 어
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라고 한다(인터뷰 참조). 좀 더 정확한 설명을 하자면, 박찬
희는 변칙 스타일의 복싱에 약하다고 한다. 애당초, 강펀치를 구사하는 ‘FM 스타일’
의 복서들을 상대할 때는, 본인도 모르게 신이 나서 '그래, 오늘 한번 박 터져 보자!'
하는 자세로 임하게 되고(칸토, 에스파다가스, 아로살,...등), 권투를 좀 지저분하게
하는 스타일의 상대(이가라시, 오오꾸마 등)를 대할 땐, 여느 복서와 같이 좀 의욕이
떨어진단다. 따라서,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하다'는 평가는, 다소 어패가 있다고
본다. 그보다는, ''뽀록꾸'에 약하고, FM에 강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박찬희의 복싱을 보면서, 또 한가지 자주 거론되는 얘기는, '체력안배 실패'라는 말
이다. 그가 챔피언 방어전을 치르면서, 초반부터 약세를 보인 경기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매번 그의 매치를 보기 위해, TV로 몰리는 팬들이 많
았는지도 모른다. 초반의 여세라면 금방이라도 상대를 KO시킬 것처럼 보이지만, 결
국 끝에 가서는 결정적인 한방이 아쉬웠던 경기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
만, 이 점만은 꼭 밝히고 싶다. 박찬희가 타이틀 방어를 하던 14개월 동안, 그는 정
확히 7차례 링에 올랐다. 더욱 골 때리는 일은, 마치 대본에 짜여진 듯한 것처럼, 그
는 항상 2개월에 한번씩 링에 올랐다. 에누리 없이 정확히 2개월에 한번씩 말이다.
체력안배? 어찌보면, 안배할 '기본 나가리' 힘이라도 축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소리다. 오히려, 초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항상 때려 눕히지 못했던 그의
펀치력에 물음표를 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체력안배 운운하
는 작자들에겐 후~왁 후추 한사발을 뿌리고 싶어진다.
SPECIAL BONUS : WBC 플라이급의 먹이사슬
박찬희를 취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입이 떡~ 벌어지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 후
추 독자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이렇게 쓴다. 70년대 중반부
터, WBC 플라이급 최강자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 3명 있었다. 다름 아닌, 멕시코의
미구엘 칸토, 한국의 박찬희, 그리고 일본의 오오꾸마 쇼지... 이렇게 3명이서 무려
7년간(75 ~ 81년까지), 21번의 타이틀 방어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더 기가 막힌 사
실은, 이 3명의 챔피언 사이에는, 아프리카 그 어느 정글 속을 뒤져봐도 이보다 더는
처절할 수 없는, 그런 ‘먹이사슬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74전 61승 9패 15KO의 통산 전적을 자랑하면서, WBC 플라이급을 75년부터 4년간 장기
집권하고, 경량급 선수로는 유일하게 WB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멕시코의 '링의 교
수' 미구엘 칸토(49년생)는, 14차 방어전까지 성공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일본의
오오꾸마 쇼지(51년생)와 2차례에 걸친, 타이틀 매치를 치르게 된다. 나이도 비슷한
연배이며, WBC 플라이급 랭킹 1,2위 자리를 놓고 항상 견제해 온, 이 두 마리의 ‘플
라이급의 공룡들'간 2차례 격돌은, 번번히 칸토의 승리로 이어진다. 통산 49전 38승
1무 10패(20KO)의 '빠방한' 전적을 가진 오오꾸마는, 평생 미구엘 칸토를 한번도 이
겨보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반면, 미구엘 칸토의 천적은, 역시 한국의 박찬희였다. 타이틀 방어전 횟수(14)가 박
찬희의 타이틀 도전 경기 이전의 매치 횟수(11)보다 더 많을 정도인, 징그러울 만큼의
링 경험을 쌓아 온 칸토가, 풋내기 박찬희를 꺾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들 역시,
두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결국 두 번 모두 박찬희의 승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오오꾸마 쇼지와 박찬희. 단순한 챔피언 대 도전자의 궤도를 뛰어 넘어, 이 두 명간
의 세 차례나 거듭되었던 격돌은, 한국 복싱과 일본 복싱의 혹독한 라이벌 의식을 불
붙혔던 도화선이었다. 같은 '눔'한테, 그것도 누구 말대로 '쪽바리'한테 3번을 연거
푸 지는 광경을 지켜 보면서, 당시 우리 팬들과 복싱 선후배들은 피가 역류하고, 복
수의 칼날을 세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76년 몬트리얼 올림픽 8강전에서 박찬희가
겪었던 편파판정은 '쨉'도 아닐 정도의, 정말 '빡통 오르는' 오오꾸마와의 재대결을,
적지 일본에서 2번씩이나 거듭했지만, 편파판정이라는 진짜 '고개 넘어가는' 이유로
번번히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오오꾸마가 꿈에서도 한번 이겨보지 못했을 미구엘 칸토
를 2번씩이나 때려잡은 박찬희가, 이번엔 다시 오오꾸마의 주먹에 영영 글러브를 놓
게된 셈이니, 이 3명의 치열한 직,간접 대결과 그들의 기구한 링의 운명 역시, 당시
복싱 황금기를 구축하는데는 크나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쓸쓸하고 허무한 복서의 길, 그 한복판의 박찬희
90년대 초반, 전 세계 헤비급 통합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이, 미스 아메리카 후보 한
명을 잘못 건드렸다가, 인생을 아주 '조질뻔한' 경우가 있었다. 몇 년 '들어가서' 살
고 나오더니, 이번엔 상대선수 귀를 물어뜯는 '흡혈귀'로 돌변해서, 복싱 매치에서
아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준 경우도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저 인간, 아주
갈 때까지 가는구먼"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한마디로 복서들 얼굴에 '똥칠'하는
격이며, 복서들 전부를 싸잡아 '또라이' 취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동들이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복서들, 특히 지난 날의 명성은 어느새 땡 쳐버린, 은퇴 복서들
의 링 밖에서의 '모험기'는 부지기수였다.
우리나라 복싱계 전직 챔피언들 역시, 타이슨 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 내용이나 빈도
수에 있어서 절대 밀리지 않을, '홍콩 무협영화의 주인공'을 방불케 했다. 박찬희,
그 또한, 이런 올드(Old) 복싱 스타들의 길게 늘어 뜨려진 어두운 그림자 안에서 굳
게 갇혀 살아온, 말 그대로 '표본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1957년 3월 23일, 대구 삼덕동에서 인간 박찬희는 태어났다. 시커먼 돌덩이 두 개 밑
에, 누~런 용 한 마리가 누워 있더라는 어머님의 태몽을 봐서, 그 시커먼 돌덩이 두
개는 아마도 복싱 글러브를 의미 하는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6남매중 5째로 태어
난 '꼬맹이' 찬희는, 어려서부터 직선적이고 정의에 불타는 소년이었다. 이치에 어긋
나는 행동을 목격했을 땐, 상대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성격이었다. 일례로, 어린 찬희는, 남의 집 안방까지 신발을 신은 채로 쳐들어가서,
잘잘못을 가리고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좋게 보자면, 어릴 때부터 탁월한 ‘투지’
를 연마한 셈이고, 나쁘게 보자면, 철딱서니 없는 어린 개구쟁이 아이로도 볼 수 있다.
대구의 삼덕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 가족들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의 남정 초
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선린중, 한영고를 졸업할 당시, 박찬희는 이미 국가대표 선수
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실업팀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져 오게 된
다. 하지만, 당시 그가 원했던 복싱의 목표이자 인생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권투
하는 놈들은 다 바보 멍텅구리다'라는 말만 듣지 않는 것이었다. 30여년 전 돈으로,
한달 월급 70만원씩 줄테니 실업팀으로 오라는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돈을
사양하고 학비 면제 조건만을 제시했던 대학 캠퍼스를 찾았다. 복싱부가 '빠방했던'
부산 동아대학교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찬희의 ‘제2의 고향’이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곳이 바로 ‘부산’
이다. 학교를 부산으로 진학해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박찬희의 소위 ‘빅 카
드’ 경기는 주로 부산에서 열렸고, 그럴 때 마다 그는 부산의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
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박찬희의 경기 때 마다 빠짐없이 응원석 한 귀퉁이에서 열광
적으로 환호해대던, ‘동아대학교 학생응원단’ 역시 박찬희 이름 석자의 동의어가
되어버리곤 했다. 박찬희의 제2의 고향이 부산이란 말엔 하자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
의 ‘제1의 고향’이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이란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안다. 박
찬희는 ‘서울의 링’에서 시원스러운 타이틀 매치를 보여준 기억이 별로 없고,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 싶다.
‘대학생 복서’, ‘도전자 같은 챔피언’, ‘미남 복서’... 등등, 수많은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어 다녔지만, 많은 팬들은 '대학생 복서 박찬희'로 그를 기억하지
않나 싶다. 그 정도로 그 당시 복싱이나, 다른 스포츠 선수들의 '지적 수준'이 참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챔피언 벨트를 오오꾸마에게 내주고 난 뒤, 적지에서 가진 2번
의 재대결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81년 3월, ‘은퇴 선언’을 한다. 그리고 그가
곧바로 눈을 돌린 곳은, 경희대학교 체육학과 석사 코스. 비록 1년밖에 다니지 못하
고 그만둔 석사 과정이었지만, 박찬희의 남다른 ‘교육열’은 당시 그 어떤 운동선수
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후 박찬희는 은퇴 선언 1년 6개월여 만에, 컴백을 시도한다. 그의 매니저를 비롯
한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말이다. 별 볼일 없는 복서들을 상대로 한 두차례 컴백전을
치뤘지만, 무명 선수(윅텐검)에게 당한 어이없는 KO패와 부상으로 인해(턱뼈 골절),
박찬희는 영영 링으로 돌아오지 않게 된다. ‘밀림을 등진 표범’은 어디를 가도 편
치 않았다. 아무리 남달리 학업에 관심을 보였던 그였지만, 일반인처럼 무난한 사회
생활을 하기엔 걸림돌이 너무나 많았다.
‘이제부터 뭘 해먹고 살아가야 하나?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학교 다닐 때 공부라도
좀 더 해 놓을 걸...’ 후추가 단언하건데, 대한민국 운동선수 출신의 90%는, 은퇴
후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지금도 할 것이다.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의 기본 틀
이 잘못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추후, ‘특별 Edition’으로 후추가 제대
로 한번 까발려 볼 것이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박찬희 역시 은퇴를
결심한 후, 이곳~ 저곳~, 그리고 이일~ 저일~ 하면서 다니기 시작했다. ‘명성콘도’
과장자리에서부터 지금의 건설회사(기풍건설) 상임 상무 자리까지 말이다. 왜 하필이
면 죄다 건설회사냐고? 건설회사라면, 매번 무슨 공개입찰이다 뭐다 하면서, 좀 한다
하는 ‘어깨’들은 다 불러다 놓고, 속된 말로 ‘무늬’만 회사이지, 알맹이는 완전
히 '조폭' 분위기 연출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런 잘못된 선입견에는
‘모래시계’의 작가 송지나씨의 기여가 상당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박찬희
는, 주먹으로 '먹고 살기엔' 너무 '늙어' 버렸고, '하루 하루만을 열심히' 라는 교훈
을 멀리 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 당했다.
박찬희가 권투 글러브 벗고 사회에 진출할 때 수중에 있었던 돈이 약 1억원 정도 된
다고 한다. 지금 돈으론 10억은 족히 능가하는 액수다. ‘두뇌 이상’도 불사하고,
맞아가며, 코피 터져 가며 벌여 들였던 돈이 그 정도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돈의
바닥을 보기까지는 그리 긴 세월이 소요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지명도 있는 복서들
만큼 쉽게 돈 벌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이름값’으로 한번씩 링 위에 올라서,
‘몇 대 맞아주면’ 돈 몇 천씩 받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박
찬희는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가 2년 남짓 챔피언 생활을 하면서, 매일같이 뼈
져리게 느꼈던 부분은 바로, '너무 힘들다'였다. 한 경기를 준비하고 훈련하는데 소
비되는 엄청난 훈련량, 거기다가 피 말리는 체중 조절, 국민들의 기대에 대한 심적
중압감, 그리고 '눈탱이가 밤탱이 되듯' 맞고 나서 찾아오는 복서들의 회복기. 이런
저런 것들을 따지면, 두 달에 한번씩, 2년 가까이 링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은,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들도 사람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
겠냐 말이다. "X까!!! 돈이고 나발이고 나 이제 정말 못해!!!"하고 말이다. 박찬희
가 오오꾸마에게 2번 재도전하고 실패한 후, 서울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을 했다. 물
론 컨디션도 안좋았지만, 이 꼴 저 꼴 안보고 어디에 짱 박혀서 푹~~~ 쉬고 싶은 마
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챔피언의 길에 '학을 띠면서', 글러브를 놓은 박찬희 였기에, 영구 은퇴
후 재기전을 하면서 구차하게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챔피언 벨트 빼앗기
고, 권투 글러브 땅에 놓고 나니, 누구 한 사람 도와주는 사람도, 아는 척하는 사람
도, 인도 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권투하면서 주먹 좀 썼다는 얘기를 듣고 접근하는
사람들이라곤 결국, '주먹이 필요한 사람들'밖에 없는 것은 누구나 다 알만한 사실이
다. 그렇게 쉽게 벌 수 있었던 돈이, 당장 수중에 없어지고 나니, 돈 유혹엔 쉽게 뿌
리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 아닐까? 거기다가 대부분의 복서, 아니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너무나 순진하고 계산에 어둡기 마련이다. 어려서부터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사항, 작전사항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고, 스포츠란 분야의 특성상, 아무 생각없
이 밀어 붙이는 자세가 효과적인 경우도 많다.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
획하는 습관을 요구한 것부터가, 당장 단 것 먹고 싶은 어린애한테 돈은 주면서,
'아이스크림 사 먹지 말고, 저금해놓으라’ 라는 요구와도 같게 보인다.
그렇게 시키는 데로만 살아 온 '단순한 사고의 소유자들' 옆에서, 그들이 미래에 대
한 설계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코뼈 부려져 가며’ 벌어
놓은 재산을 야곰~ 야곰~ 갈취해가는 인간들이 더 많다는 얘기다. 소위 좀 배웠다는,
똑똑하다는 인간들이 사회경험 없는 운동 선수들 꼬드겨서, ‘같이 무슨 사업을 하
자, 큰 돈 벌게 해주겠다...’등등. 그러고 나서는, 하루 아침에 ‘쪽박’ 차게 만드
는 인간들이 사지에 득실거리고 있으니, ‘거지꼴’ 된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곤 결국 사기, 폭행, 도박...뭐 이런 일밖에 더 있냐는 얘기다. 즉, ‘악순환의 연
속’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요즘 무슨 뽀로꾸 파이낸스 회사 차려 놓고, 영화
인들, 운동선수들의 피 같은 돈들 먹고 줄행랑치는 '개쉐이들'... 전부 다 싸잡아 넣
어야 한다.
물론, 배운 게 없다고 나쁜 짓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세상엔
가진 것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심찮게 언론에
올라오는 복서들의 방황 소식을 듣고 '어유, 저 깡패쉐이들... 저것들은 도대체 언제
정신 차릴라나?' 이런 생각만 하며, 그것을 끝으로 그들에 대한 관심의 문을 닫아 버
리는 행동은, 점점 그들을 음지로 밀어 넣는 행동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 우리 어렸을 적엔 ‘대통령’ 같이 떠받들고, 우리 모두에게
‘오르가즘’이 뭔지, 상상이라도 하게 해주던 그런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이 신문지면상에 올라와도 "에이, 미친눔들..."하고 외면해버리는 게 우리 대한
민국 스포츠팬들의 ‘옛스타 모시기’이자, 옛과거에 대한 ‘예우’라는 소리이다.
어쩌다가 우리 나라 복싱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대부분의 복서들은 갈
때까지 가는지..., 왜 ‘나의 영웅, 나의 챔피언’ 박찬희가 지금 이 시간에도 덜컹
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지친 몸을 기댄 채 졸아야 하는 지..., 왜 '전 세계 챔피언 박
찬희'라고 당당하게 명함을 뿌리고 다닐 수 없는 지... 그것부터 알아본 후에, ‘죽
일 눔, 썩을 눔’ 타령을 하고 싶다.
복싱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시대의 흐름
은퇴한 복서들이나, 현직 복서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있다. 바로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 나라의 복싱 황금기였던 7-80년대에 글러브를 끼고 뛰었
던 1세대들이 운동을 하던 시절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 권투를 했다. 운동이
라도 하면 누가 먹을 것은 주니까 말이다. 과거 우리 나라 초대 세계 챔피언 김기수
(97년 작고)씨가 배 곯던 자식들을 앞에 앉혀 놓고, 눈물을 삼키며 밥을 먹었다는 얘
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내가 먹어야 너희들을 먹일 수 있다"라는 말과 함께 말
이다. 그만큼 우리 선배들에겐 배고픈 시절이 있었고, 배고픔을 잊기 위해 운동을 한
경우가 많았다. 대한민국 땅에 처음으로 프로 스포츠란 말을 도입시킨 프로복싱이.
결국은 다른 프로스포츠 덕분에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
을까?
요즘 우리 스포츠팬들은, 축구 한일전과 야구 한일전에 목숨을 걸고 응원을 한다.
나쁜 현상은 결코 아니다. 25년 전, 흑백 TV 한대도 귀해서 온 집안 식구들, 아니 온
동네 친지들까지 다 모여서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때... 인기 프로그램은
딱 2개밖에 없었다.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 그리고 ‘김일 아저씨의 박치기
쇼’. 프로레슬링이 '쑈(Show)' 라고 폭로된 후,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의 국민적
관심은 실로 독보적이었다. 그런 복싱에 대한 범국민적 열기와 얼마 전, 영화배우 송
강호씨가 부활시킨 '하면 된다 - 헝그리 정신'의 궁합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
문에 당시 복싱의 인기는 유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복싱의 위치는 어디 있는가? 얻어 터지는 것부터가 무지하게 힘든 일이
다. 더군다나, 죽어라고 얻어 터져 가며, 그리고 굶어가며 체중 조절하면서 링에 올
라가도, 봐 주고 박수쳐주는 사람들 이라곤 프로모터, 매니저, 그리고 ‘복싱 원로’
할부지들 몇 명뿐이다. 중계방송?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 조인주의 ‘빅 매치’ 마
저, 온 식구 다 모여서 바람 쐬러 가는 주말 대낮에라도 해줄까 말까 하는 판국이다.
그나마 몇 푼 받고 복싱한다고 하면, 잠깐 어리버리 하는 순간에, 어느새 개런티는
프로모터와 매니저 입안으로 꼴까닥~ 넘어가고 있다. 당신 같으면 복싱하겠냐고요?
복싱을 할 이유가 너무나도 궁색한 오늘날, 거기다가 요즘 젊은 친구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시점에서, ‘복싱타령’을 하는 것 자체가 '오바'일
수도 있다. 하지만, 후추가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복싱이라는 스포츠가 돈 없고 배고
픈 나라에서만 하는 ‘헝그리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이다. 멀리 볼 필요가 있을까?
예전엔 그나마 우리와 실력에서 삐까삐까 하던 일본을 보자. 얘네들은 아직도, 복싱
선수들에 대한 박수를 아끼지 않고 있다. 아니, 자국 선수들뿐만 아니라, 한국 복서
들도 일본에 가면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얘네들도 다
배 곯아서 복싱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텐데, 왜 우리만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홀대하는
것일까?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 제도적 교착상태
복싱이 ‘사양길’로 접어든 책임을 꼭 팬들에게만 돌릴려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도 한국 복싱의 집행부인, ‘한국 권투 위원회’가 아닐까
싶다. 기가 막힐 노릇은, 아직도 우리 권투 집행부의 주역들, 아니 주인들이 20년 전,
30년 전에 복싱판을 주름잡던 인물들 그대로라는 점이다. 70년대 한국 복싱의 간판,
양정규 전 한국 권투 위원회장, 이 분은 지금 여의도의 높은 분이 되어서 한나라당의
부총재도 하시는 분이 되었다. 이 양반, 선거유세 현장에서 ‘한국 복싱을 자기 두
주먹으로 키워 낸 사람’ 이라고 말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그의 복싱계 활동은 결국
‘정계 진출의 발판’ 정도로 밖에 해석하지 않는 것일까? 결국 복서들의 ‘금 벨트
(Belt)’ 팔아서, 국회의원 '금빳지'까지 거머쥔 사람이, 참담한 복싱의 현주소를 남
의 집 불 구경하듯, 방치해둔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지... 하긴 어찌보면,
양정규 회장이 복싱계를 떠나면서, 그 누구도 그의 바통을 이어 받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 권투 핵심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이디어 낼 사람이 없다'라는 말에 많은
복싱인들이 공감하고 있다. 내일 모레면, ‘뉴 밀레니엄’이라고 하는데, 우리 복싱
계의 아이디어 수준은 아직도 ‘보릿고개’라는 소리이다. '복싱원로'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도, '신세대 복싱' 같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부
분은, 국내에 몇 안되는 체육관이나 프로모터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밥그릇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나라의 복싱 환경이 이 정도로 열악하고 비관
적인 판국에, 누가 세계 챔피언 하나 키워 내는 것은 ‘국가적인 경사’가 아니라,
‘사촌이 땅을 사는 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간혹 누가 '복싱을 일으켜 보자'하
고 발 벗고 나서도, 중간 중간에 부딪치는 ‘파벌싸움’, ‘길들이기...’등의 배타
적 저항 세력들로 인해 번번히 도중하차하고 마는 것이다.
한국 권투 위원회의 완전한 물갈이, 그리고 신선한 아이디어와 장기적 비전을 바탕으
로 체계적인 ‘관중 끌어안기’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팬들이고, 복서들
이고 그 아무도 링을 찾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업들도 마찬가지이다. 복싱이 얼마나
기업 홍보하기에 좋은 ‘스포츠 마케팅의 불모지’인가? 야구나 축구에서 하는 자금
투자의 십분의 일만 하더라도 금방 눈에 튀는 마케팅이 될텐데 말이다.
아시아권에서 우리나라 만큼, 튼튼하고 뿌리 깊은 ‘복싱 유산’을 물려 받은 민족도
드물다. 후배들을 조련시킬 훌륭한 전 세계 챔피언 선배들, 놀고 있는 전 세계 챔피
언들 숫자가 역대 국무총리 숫자보다도 많다. 이대로 주저 앉아야만 하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퇴출 복서들의 참담한 생활을 목격해야지, 우리 복싱팬, 나아가서 스
포츠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을까? 정말로 답답해진다.
복싱 재건의 몸부림
‘복서 출신의 사회인을 우연히 만나면, 사람들은 꼭 그 사람의 주먹부터 쳐다보고
얘기를 시작한다.’ 부인할 수 없는 예리한 관찰력이다. 우리 모두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일반인들과 복서 출신을 갈라 놓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벽’이자, 우리들의
‘편견’이다. 박찬희를 취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좀 잘 '나가는' 복서 출신을 찾
으려고 엄청나게 뛰어 다녔다. 사견이지만, 은퇴한 챔피언 중에서 체육관을 차리거
나, '밥집' 정도가 아닌, 나름대로 윤택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이라곤 고 김기
수 선생과 현 MBC 권투 해설위원 변정일씨 밖에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함경북도 북
청에서 태어난 고 김기수씨는 남다른 생활력과 비교적 일찍 터득한 ‘생계 비전’으
로, 작고하시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양 CC의 아마츄어 골프 챔피언까지 할 정
도로,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 없는 말년을 보냈었다. 일찍부터 땅값 비싼 명동 자리에
찻집과 빌딩을 소유하는 덕분에, 외롭고 춥지 않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 전, SBS '임백천의 원더풀 투나잇'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본인이 운영하는 체육
관을 소개한 적이 있는 전 WBC 밴텀급 챔피언 변정일(32)씨는, 운동 선수 출신 치고
는 보기 드물게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깨끗한 매너의 소유자이다. 도대체 왜, 전직 챔
피언들이 사회에 나와서 성공할 수 없는 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물어 보고 싶었고,
그 역시 얼마나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기에, 언론에서 난리 호들갑을 떠는지 내 두 눈
으로 보고 싶기도 했고 직접 확인도 했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복싱인들이 느끼는 가장 큰 벽은, 바로 그들을 ‘사람’으
로 보지 않고, '주먹'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런 사회적 현상과 복서들에 대한 안좋은
인식을 조금씩이나마 바꿔 보기 위해서 변정일씨가 시도한 아이디어가 바로, ‘복싱
에어로빅’이다. 혹자가 들으면 "웃기고 있네. 자기 밥벌이 하려고 하는 일을 가지
고, 무슨 놈에 복서의 인식을 바꿔?"하고 비웃을 수도 있다. 아무려면 어떠냐. 설득
력이 없으면 어떠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
로 뛰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느끼는 부분은, 변정일씨의 시도는 분명 나쁘지 않은,
‘건강한 접근’이라는 결론이다. 요즘 신세대들에게, '복싱은 무서운 스포츠가 아니
다. 복싱은 가까이 있다. 복싱은 재미있다'라는 간접적 교육 방법만큼 효과적인 ‘복
싱 저변 확대’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변정일 본인인들, 이 짓 저 짓 다 안해봤을까?
아무리 해도 '기득권자들의 마인드'는 움직이질 않으니, 이런 맹랑하며(?) 신선한 발
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젊은 층을 타겟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4천5백만의 관심사, ‘다이어트’를 Selling
Point로 잡았다. 복싱이고, 에어로빅이고 일단 판이 벌어져야 복싱 저변 확대도 가능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체질적으로 편차가 있겠지만, 3개월동안 10-15kg는 '한큐'에
빠진단다. 변정일 복싱에어로빅 체육관 코치의 말인데, 훈련중인 회원들을 보고 있자
니, 그 말이 믿어진다. 저렇게 신나고, 재미있게 뛰고, 난리를 치는데도 안 빠지면,
그런 사람은 체육관이 아니라 병원부터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변정일씨에게서 좀 상
업적인 냄새가 나더라도, 필자는 박수를 쳐 줄 작정으로 찾아갔지만, 결코 그런 모습
은 볼 수 없었다. 그 역시 아직까지도, 돈 때문에 법정 싸움 중이다. 과거 그의 뒤를
봐 주던 화랑 프로모션측이 개런티를 갈취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는 사실 소송비용
이 더 드는 형편이지만, 절대로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복싱 선수들도
이제 눈 뜬 심봉사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후배 선수들에게 보
여 주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결과는 법정에서 판가름날 문제지만, 변씨의 이런
마음 자세 자체가 믿음직스러웠고, 차세대 복서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변정일씨는 복싱계의 문제점에 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이었다(인터뷰 참조). 변정일
하면 떠오르는 88 서울 올림픽 링 시위 사건 역시, '자기 자신은 일종의 희생양 이었
다'라는 그의 말만 들어도 어느 정도로 우리 복싱계가 썩어 빠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가 있다.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있었던
박찬희 선수와의 짧은 만남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변정일씨 같은 전 챔피언이 얼
마나 있을까?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고, 챔피언의 ‘곤조’
가 아닌, 챔피언의 ‘긍지’를 거울 삼아 끝없이 자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그런 모
습이 박찬희의 윗대 선배들에게도 찾아 볼 수 있었더라면 아까운 복서 여러 명은 충
분히 구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PROLOGUE
명예의 전당 제 1호 헌액자 황선홍 선수에 대한 기사가 '후추' 창간호에 실린 후, 참
으로 많은 독자들이 '후추'를 찾아주시고, 격려해주셨다. 각 PC통신 스포츠 게시판에
는, '황선홍 = 후추'라는 공식이 성립될 정도로 수많은 분들이 스포츠 웹진 '후추'를
추천해주셨다. 무엇보다도 고무적인 현상은, 종전까지 50 : 50 정도로 팽팽한 접전
(?)을 보이던 황선홍 찬반론이 (명예의 전당 파급효과 때문인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
"황선홍 죽여랏!" 소리는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는 점이다. 명예의 전당을 통해서 '축
구선수 황선홍'이 아니라, '자유인 황선홍'으로서의 진면목이 조금이나마 공정하게
조명되었다면, 기사를 엮어 낸 우리 '후추' 필진은, 그 점 하나에 큰 힘을 얻게 된
다. 해트트릭을 기록해 가면서, 일본 열도에 연일 태극기를 꽂아 가고 있는 황선홍
선수의 활약에 뜨거운 박수를 보낸다.
황선홍 스토리가 후추 필진에게 가져다 준 또 하나의 큰 이슈는, 제2호 헌액자 선정
이었고, 어떤 식으로 황선홍 스토리 보다도 더 감명 깊고, 진솔하고, 후련한 글을
전달해드리냐 하는 문제였다. 이미 내년 초까지,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정될 예비 후
보자 명단은 준비가 되어 있는 상태지만, (선데이 서울식) 스포츠신문에 오랫동안 길
들여진 일부 팬들께서, 더 중량감 있는 것과 더 자극적인 것만을 고집하시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고민은 금새 풀렸다. 잘 나갈 때나, 죽을 쑬 때나,
후추의 신조만을 계속 지켜나간다면, 독자분들로부터 계속 사랑을 받는 것은 당연하
다고 여겨진다.
후추 명예의 전당 후보들의 자격 요건(?)은 크게 3부류로 나뉘어진다. 첫째, 여론이
'매장' 시킨 스타들. 둘째, 단지 세월이 지났다는 이유만으로 잊혀지고 내팽개쳐진
당대 최고의 스타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유독 우리나라에서만 홀대당하는 월드스타
들... 그래서, 우리 후추는 후추 칼자루를, 아니 후추 뚜껑을 시원하게 뽑으면서, 70
년대 한국 복싱 황금기의 최고 테크니션’, 박찬희 선수를 영광스럽게, 그리고 자랑
스럽게 명예의 전당에 제2호로 헌당시킨다.
“엄마 어릴적에…”, 왜 박찬희인가?
필자가 국민학교 (현재 초등학교의 전신) 시절 알파벳도 다 배우기 전에 우리말 처럼
익숙하게 구사했던 영어가 있었는데, 그것은 ‘Hello’,‘Thank you’ 같은 단순한
영어가 아니라, ‘One Two straight’ ‘Upper Cut’ ‘잽(필자도 영어로 모르겠음)’
'Hook’ ‘Counter Blow’ 등의 고급(?) 영어였다. 단어의 뜻도 모르면서 권투 중계
를 볼때나, 혹은 교실이나 운동장에서 싸움이라도 벌어지면 말리기에 앞서서 모두들
고급(?) 영어로 응원을 하곤 했다. 이렇게 권투는 7,80년대에 우리와 함께 숨쉬었던
'국민 스포츠’ 였다.
70년대.. 초등학생 시절이었던 그때, 어린 나에게 우리 나라에 대한 가슴 뿌듯한 자
부심을 주었던 것은, ‘국기에 대한 맹세’도 아니었고, 매주 월요일 지겹게 4절까지
부르는 ‘동해물과~’ 도 아니었고, 그 시대 교무실까지 사진이 떡하니 걸려져 있던
'박대통령 각하’는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어린 내가 정말 눈에 이슬까지 맺혀 가면서 자랑스럽게 태극기를 바라보며 ‘대한민
국 국민임을 자랑스럽게 했던 것은, ‘세계를 제패' 했던 흑백 텔레비젼의 스포츠 경
기였다. 그 중에서도 4년에 한번 열리던 올림픽 경기보다는, 1년에 한 두번 심심치
않게 열렸던 세계타이틀 복싱 경기야 말로 어린 나를 몹시도 흥분시켰고, 가난한 우
리나라가 선수가 ‘세계 챔피언’이라는 호칭을 받으며 커다란 밸트를 감아쥘때면…
'우리나라'가 정말 자랑스러웠다. ‘미국’, ‘멕시코’, ‘푸에트리코', ’베네주엘
라’등 미주권 나라들이 주름을 잡고 있었던‘사각의 링’에서 태극기를 휘날리게 하
던 당대의 우리나라 세계 챔피언들이야 말로, 그 당시 나에게‘국기에 대한 맹세’를
하게 했던 나의 국민 영웅들이었던 것이다.이렇듯 우리에게 있어서는 스포츠 이상의
‘그 무엇’이었던 ‘권투’가 단지 ‘무식’하고 ‘야만’적이라는… ‘더 야만’적
인 이유로 현재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의 방어전 조차 스포츠 뉴스의 단신으로 처
리되며 홀대 받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다.
'엄마 어릴 적에..'의 심정으로 생각한다. 그 시대 우리의 피를 끓게했던 우리들의
영웅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가난에, 군바리들에게, 지쳐서 주눅 들었던 우리 삼
촌, 아부지, 형님들의 피를 잠시나마 끓게 했던 그 시대의 복싱 영웅들... 소매치기
출신의 김성준, 동양의 철권 유제두, 홍수환의 라이벌 염동균, 미남 복서 김태호, 동
급최강 인파이터 김태식, 원투 스트레이트의 김상현, 쇼맨쉽의 김사왕 등등... 모두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다. 잘난 미국에서는 '알리'가 아직도 올림
픽 성화 봉송 주자로 나오고, '포먼'을 다시 링에 복귀 시켰고, '레너드' '헌즈'가
아직도 토크쇼에 나와서 팬들과 만나는데, 우리의 영웅들은 미디어에서 사라진지 오래
고, 기껏해야 '홍수환'선수만이 오랜 방황끝에 '코믹' 해설자로 일하고 있을 뿐이다.
왜냐고? 우리에게는 그들 만한 세계적 복싱 선수가 없어서라고? 아니다. 있다. 우리
에게도 분명히 세계적인 선수가 있었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가 그들의 생사조차 확인
할 길이 없는 것은, '영웅 빨리 만들어, 그놈 뜨면 씹어버리기'의 특기를 가진 우리
스포츠 미디어의 지대한 공헌이 있었다는 것 - 후추의 흔들리지 않는 믿음이다. (후
추약속: 우리에게서 사라져간 난세의 영웅들을 찾아내서, 아직도 식지 않은 우리 팬
들의 따뜻한 박수를 그들에게 전할 것을 약속합니다.)
이제 후추는 잊혀진 우리 복싱 영웅 한사람을 후추 명예의 전당에 헌당하고자 한다.
그는 다름아닌, 한국 '최초'의 세계적 테크니션 '박 찬희'이다.
후추가 최초의 챔피언 김기수, 4전5기의 홍수환에 앞서 박찬희에게 제일 먼저 찾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앞선 이들이 우리 스포츠 미디어에 많이 노출되었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기량면에서 '세계적 기량'을 보유했던 최초의 우리의 복서였기 때문이다.
'헝그리 정신' 만이 살아있던 '헝그리' 한국 복싱, 아니 '정신일도 하사불성'만을 외
쳤던 구세대 한국 스포츠가 '기량', '테크닉'을 외치게 된 전환점을 갖게 했던 선수
가 바로 '세계적 테크니션' 박찬희였다.
박찬희 전에도 김기수, 홍수환, 염동균, 유제두등 많은 훌륭한 복싱 선수들이 있었지
만, 그들이 동양을 벗어나 세계적 선수들과 경기를 할때면, 우리 팬들은 '젖먹던 힘
까지 내라' '안되면 대가리로 받아라'라는 식의 '한강의 기적'을 바라면서 경기 내내
쫄면서 오금을 피지 못했다. 그러다 가끔 기적 같은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빅 매
치' 있다고 집에 일찍 가서 두발 쫘악 펴고 맥주 한잔에 오징어 다리 씹으면서 보기
에는, 우리 선수들의 기량은 정신력에 비해 너무도 불안했다. 그래서 스포츠 경기를 '
기도하는 심정'으로 봤다.
박 대통령 컵이나 메르데카컵, 킹스컵등… 극동지역 국제 축구 대회에서 말레이시아
나 일본, 버마 같은 나라를 만나면 방방 뜨면서 온 국민을 즐겁게 해 주었던 우리 축
구도 가끔 유럽 프로축구팀을 불러서 친선 경기를 할라치면, 슬슬 즐기면서 하는 코
쟁이들 앞에서 '목숨'걸고 X 빠지게 뛰어다니던 우리 선수들이 왜 그렇게 안스럽던지,
경기를 보는 내내 우리 팬들의 마음은 '못먹어서 불쌍한' 우리 스포츠 현실을 씁쓸해
하면서 안타까워 했다. 그러나, 그러다가 어쩌다 우리가 이기기라도 하면 뉴스다 신
문이다 '한국 축구 세계 강호 격파' 떠들면서 맨날 이렇게 헝그리 정신 군바리 축구
만 ‘하면 된다'로 최면을 걸기 일쑤였다.
그러한 '웃통까고 전쟁 하기'식의 '한국' 스포츠에서, 특히 복싱은 더더욱 '헝그리
정신'이 가장 강조된 종목이었고, 대부분의 선수들이 '한판 목숨걸고 다부지게 붙는'
고추장 신화 스타일이었고, 안정되고 세계적인 최고의 기량을 보여주는 선수는 너무
도 없었다. 우리의 터프가이, '세계적' 홍수환 선수도,'사모라'라는 더 세계적인 선
수앞에서 배짱으로 버티기에는 너무 초라했고, 그 경기를 지켜 보는 팬들도 '정신력
의 기적'으로 만을 쫄면서 기도했다.
우리의 정신력, 우리의 ‘고추장 오기’도 '세계적 기량'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
다. 스포츠에서 정신력은 더 없이도 중요한 요소이지만 '기량'보다 앞 설수는 없기
에, 경기에서 '목숨'을 바쳤던 선수도 '경기에서의 승리'를 이루지는 못했다. 그러한
우리 70년대 복싱계에서 박찬희 선수는 진정으로 세계를 제패했던 최고 기량의 최초
의 한국 챔피언이었다.
박찬희 선수의 복싱은 '세계적'이었다. 박찬희의 권투는 달랐다.
‘링의 대학교수’라는 세계적인 복서, 멕시코의 영웅 미구엘 칸토를 정신력이 아닌
기량으로 깨끗하게 눌렀다. 그것도 두번이나! 대학교수를 잃은, 당황한 멕시코가 '에
스파다스'라는 그 시대 경량급 최고의 KO 복서를 한 체급 올려서 도전케 했는데, 전
문가들 조차 박찬희의 패배를 예상했었고, 여느때처럼 우리 팬들은 TV 앞에서 쫄면서
그 경기를 지켜봤는데 박찬희는 그 선수를 4번이나 다운시킨 끝에 기냥 2회 KO로 싱
겁게 끝냈다. 그의 경기에서 그가 내뻗었던 펀치는 의미없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쉴
새없이 휘두르다가 어쩌다 걸린 것이 아니라, 정확이 의도한 펀치로만 경기를 끝냈고
그 당시에 그런 선수가 '우리 선수'였다는 것은, 그 시대 한국 복싱계에 하나의 ‘작
은 혁명’과도 같았다. 그 후로 그의 경기는 발뻗고 새우깡 먹으면서 봤었고, 한국
선수중 최초로 4차방어전을 돌파했다. (목숨걸고 세계 챔피언이 되어도, 안정된 기량
을 갖지 못하면 의무 방어전의 덫에 걸려서 그 당시에는 4차방어전을 넘어선 챔피언
이 없었다.)
체력이 문제였던 테크니션 박찬희는 전성기를 오래 지속하지 못하고, '젊은날의 방황'
과 '오오꾸마 쇼지'라는 천적에 걸려서 화려한 은퇴를 하지 못했지만, '엄마 어렸을
적에'의 우리 스포츠 팬들의 눈을 분명 한단계 높여주었던 선수였다. 그의 화려했던
테크닉은 후에 우리 복싱계가 마침내 장정구, 유명우라는 동급 세계 최고의 선수를
낳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1999년 밀레니엄 시대를 맞는 세기말.
조인주라는 '세계 챔피언'이 괜히 '미운 오리 새끼'처럼 보이는 복싱의 암흑 시대에,
'엄마 어릴적에' 이 땅의 어린애들, 삼촌, 형님, 아버지의 피를 끓게 했던 우리의 복
싱 영웅들을 그리워하며…'박찬희' 그를 다시 링으로 불러본다
'전광석화'의 원조 박찬희
못다 핀 꽃 한송이
박찬희는 선린중학교 3학년 때 권투 글러브를 처음 끼게 된다. 무심코 원효로 길거리
를 지나던 중, 창 사이로 들여다 보이는 복싱 체육관의 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고, 갇
혀진 4각의 링 안에서 단지 두 주먹으로만의 싸움으로, 승자를 가려내는 '복싱'이라
는 스포츠에 완전히 매료되고 만다. 사실 박찬희가 제일 먼저 하고 싶었던 운동은 야
구였다. 전통의 야구 명문, 선린중학교 운동장에서 훈련을 하던 야구선수들이 그렇게
부러워 보일 수 없었다. 하지만, 하늘이 주신 '기장'이 너무 짧은 덕분에, 금새 포기
할 수밖에 없었다. 권투를 시작한지 1년만인, 한영 고등학교 1학년 당시, 박찬희는
처녀 출전했던, 서울시 신인대회에서 우승이라는 놀라운 성적을 거둔다. 가끔씩, 소
위 성공한 운동 선수들의 인터뷰를 듣다 보면, 죽어라고 노력해서 만들어진, 피와 땀
의 댓가같이 보이기도 하지만, 박찬희를 비롯한 많은 스타들의 스토리를 접하면서 느
끼는 점은, 신이 내린 탁월한 운동 센스가 없었더라면, 세계 최고의 자리까지는 힘
들지 않았겠느냐 라는 생각이 든다. 흔히들 '선천적 기량 10%, 후천적 노력 90%'라는
말을 잘 쓰지만, 그 선천적 요소 10%의 차이가 바로, 챔피언과 그저 잘하는 선수의
차이를 구분짓는 요소가 아닌가 싶다.
박찬희가 프로 데뷔전을 치를 당시, 복싱계 인사는 물론, 많은 복싱팬들의 관심을
모을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오랜 세월동안 다져온 복싱의 기본기와 탄탄한 테크닉
을 바탕으로 승승장구했던 화려한 아마복싱 경력 때문이었다. 고등학교 2학년 때인
1974년 4월, 박찬희는 처음으로 태극마크를 달게 된다. 그리고, 그 해에 열린 테헤란
아시안 게임에 출전, 당당히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을 목에 건다. 76년 킹스컵 대회
에서는 라이트 플라이급 금메달과 대회 MVP를 동시에 거머쥐는 성과를 올리며 아마복
싱의 '짱'으로 군림하기 시작한다. 물이 오를 데로 오른 박찬희는, 아마복싱의 금자
탑인 올림픽에 모든 것을 걸고, 76년 몬트리올의 영광을 향해, 한 걸음씩 다가간다.
75년 5월. 일간지 스포츠면에 작지 않은 기사 하나가 뜬다 - '국가대표 복싱팀 음주
폭행 사건!' 몬트리올 올림픽 대표팀 선발전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합숙훈련 중이
던 박찬희는, 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휘말리게 되고, 복싱과는 무관한 그의 사생활이
언론을 통해 만인에게 첫공개되는 계기가 될 뿐만 아니라, 복싱 입문 후, 처음으로
태릉에서 퇴촌까지 당하는 중징계를 받게 된다. 당시 배경은 이렇다. 등장인물은 3명
이다. 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찬희와 박인규는 절친한 동기생 사이였고, 박찬희와 같
은 급의 유망주로 떠오르고 있던 후배 선수 강기룡. 이렇게 3명이 태릉선수촌 앞에
있는 선술집에서 한잔을 꺾는 도중에 말싸움이 일어났고, 당시 지방에서 '한따까리'
한다고 하던 강기룡이 광분해서, 술병을 휘두르기 시작, 손으로 피하려고 하던 박인
규가 왼팔 손목을 크게 다쳐 입원하게 되었고, 박찬희는 사건 규명과정에서 괘씸죄를
적용 받아 퇴촌을 당해야만 했다. 이 사건의 또 다른 해석 버젼으로는, 신예 강기룡
의 주가가 무섭게 뛰어 오르면서 약간의 위기의식을 느껴오던 박찬희가, 그 동안 눈
엣가시처럼 느껴왔던 후배 강기룡을 못마땅하다고 느낀 나머지, 친구 박인규와 함께
휴가를 받고 미리 선수촌 밖으로 나가서 강기룡을 불러내 한번 ‘타이르려다’ 그 지
경까지 발전하게 된 것이라는 설도 있다. 요 대목에서, 사건의 진상은 독자의 상상에
맡기고.
'조직'의 쓴맛을 한번 맛본 박찬희는, 머지 않아 다시 대표팀에 복귀하게 되고, 이
듬해 9월, 대망의 올림픽 무대에 노크를 하게 된다. 초반 상대들을 TKO로 물리치며,
분위기를 한껏 탔던 박찬희가 8강전에서 맞붙은 상대는, 당시 아마복싱 최고의 '파워
하우스' 쿠바의 에르난데스. 박 터지는 접전을 벌인 이 경기는, 결국 2:3 이라는 판정
패로 끝나고 박찬희의 올림픽 메달 사냥은 8강 문턱에서 꼬리를 내리게 된다. 우리 한
국 복싱사에, 제일 뻔질나게 오르는 얘기가 바로 ‘편파판정’ 얘기다. 박찬희의 올림
픽 8강전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혹자는 그 경기를 보고 '해외에서 코리아란 이름 석
자도 모르던 당시 상황에서, 2:3 판정까지 가게 한 것도 기적이다' 라고 얘기하기도
하지만, 이렇게 아쉬운 한판을 뒤로 하고 박찬희는 그의 화려한 '아마 글러브'를 벗
게 된다. 그의 통산 아마 성적, 127전 125승!
- 전광석화의 KO승
박찬희 보다 더 먼저 세계 타이틀을 대한민국에 선사한 챔피언도 있었고, 그보다 더
살벌한 펀치력을 앞세워 상대를 때려 눕였던 챔피언도 있었고, 그보다 더 독한 '깡다
구' 복싱을 구사하던 챔피언도 우리나라엔 있었다. 그리고, 그 후로도 숱한 챔피언들
이 국내 복싱 팬들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었다. 하지만, 박찬희. '그 보다 더 빠른
복서는 그 이전엔 찾아 볼 수 없었다'는 말에 토를 달 위인은 몇 되지 않을 것이다.
경량급의 '속사포' 개념을 확실히 가르쳐 준 장본인이 바로 박찬희였다. 현란한 푸
트 워크 (Foot Work)를 내세워 상대를 교란시키는 아웃복서는 아니었지만, 그가 한번
제대로 마음먹고 때려잡으려 했을 때, 그의 짧은 좌우 훅과, 이어지는 연타 공격을
피할 수 있는 상대는 흔치 않았다. 그가 3차 방어전의 제물로 삼았던, 멕시코의 구티
에스파다스를 2회에 때려눕힌 다음날, 우리 국민들은 복싱 역사의 새로운 한 페이지
를 목격하게 된다. '朴贊希, 電光石火의 KO승!!!'... 그 후로도 우리 스포츠 신문의
복싱 헤드라인에서 얼마나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단어였던가? 비교적 강하지 않다고
평가되던 그의 펀치력을, 박찬희는 스피드와 연타 테크닉으로 커버하였고, 앞으로 파
고드는 ‘인파이팅’으로 상대방에게 숨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1980년 4월 벌어진 멕시코의 알베르토 모랄레스와의 한판 승부. 명실공히, 박찬희의
복싱 테크닉 '결정판'을 선사했다는 5차 방어전이었다. 70년대 '전설의 스포츠 캐스
터' 이철원 선생의 생생한 중계방송은, 박찬희의 복싱 스타일을 단편적으로 설명 해
준다. 당시 2라운드를 'Play-by-Play'한 것을 그대로 옮겨 적어본다.
"오른손 강타!!! 박찬희~, 왼손! 박찬희, 다시 좌우 스트레이트!, 복부!!!, 박찬희!..."
순식간에 몰아치는 펀치 5방... 이것이 바로 '박찬희 복싱'이었다. 남들보다 어깨춤
을 많이 추면서 유연한 더킹(Ducking) 모션을 취하고, 한발씩 쳐들어가는 박찬희의
불독(Bull Dog) 근성. 그리고, 남들보다 빠르기 때문에 피해 갈 수 있었던 상대의 펀
치들. 바로 박찬희의 스피드 복싱을 완성시켜준 요인들이다.
1977년 7월, 박찬희는 한 맺힌 몬트리올의 악몽을 떨쳐 버리기 위해, 프로 데뷔전을
치른다. 남들과 달리 데뷔전부터 그는, 일본의 무또 슈지를 상대로 국제전을 치르고,
곧이어 당시 동양챔프였던 정상일에게 판정승을 거두면서 WBC 플라이급 세계 랭킹에
오르게 된다. 이렇게 승승장구한 박찬희는 데뷔한 지 1년반 만에, 11전 전승(5KO)이
라는, 비교적 짧은 전적을 가지고 세계 챔피언의 벽을 두드리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
도, 11경기 만에 세계 챔피언전에 도전하는 국내 복서는 전무했다.
31살의 나이로, 14차 방어전을 성공적으로 마친, 멕시코의 '링의 대학교수', 백전노
장 미구엘 칸토와의 일전은, 우리 복싱사에 오랫동안 기억될 명승부로 꼽힌다. 15라
운드까지 뛰었던 당시 세계 챔피언전은 홀딩, 버팅, 클린칭 따위의 '꼼수'라고는 찾
아볼 수 없없던, 양 선수 모두 정말 ‘깨끗이 때리고 깨끗이 맞았던, 45분간의 난타
전’ 그 자체였다. 23살의 약관 박찬희는, 15라운드 시종일관 파이팅 넘치는 복싱으
로 심판, 팬들 모두의 마음을 순식간에 사로잡고, 대한민국 제7대 세계 챔피언으로
등극한다.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와 같은 감동적인 경기 후 인터뷰는 없었지만,
이때부터 ‘대학생 복서’ 박찬희에 대한 팬들의 애정과 기대는, 역대 어느 챔피언
의 그것과도 견줄 수 없을 정도로 일방적이고 뜨겁게 커져간다.
박찬희의 챔피언 방어전 기록을 요점만 정리해본다.
⊙ 79년 5월 (서울) : 이가라시 스또무(일) 상대로 1차 방어. 전원일치 판정승.
워낙 지저분한 스타일 이었던, 이가라시의 버팅과 클린칭 작전에 휘 말려 실망스러운
한판으로 평가 됨. 서울징크스의 시초. ⊙ 79년 9월 (서울) : 칸토와 무승부로 2차
방어 성공!
5회에 다운을 빼았았지만, 후반 체력 분배 실패로 무승부. 이때부터 '펀치력 빈곤,
결정타 부재'라는 꼬리표가 따라 다니기 시작.
⊙ 79년 12월 (부산) : 전 세계 챔프 구티 에스파다스(멕) 2회 KO승! 3차 방어!
박찬희의 개인적인 우상이자, 공포의 강펀치로 불리우던 에스파다스를 상대로, 1회
다운 한차례 먹고도, 2회 현란한 연타 공격으로 KO승!!! 펀치력 이야기 완전히 불식
시킴!
⊙ 80년 2월 (서울) : 아르넬 아로살(필) 상대로 15회 판정승. 4차 방어 성공.
김성준, 김태식 등 세계 챔피언들을 다운시킨 경험이 있는 강타자 아로살을 맞아,
2회 다운 한차례 빼았았지만 KO로 연결 못시킴. 당시 4차방어 성공은 우리나라 세계
타이틀 최장 방어 기록.
⊙ 80년 4월 (대구) : 모랄레스(멕) 상대로 15회 판정승. 5차 방어!
고향인 대구에서 첫 방어전. '다채로운 테크닉의 개가', '멕시코 킬러 박찬희'라는
별명도 얻게 됨.
⊙ 80년 5월 (서울) : '늙은 여우' 오오꾸마 쇼지(일)에게 9회 KO패! 6방 실패!
프로데뷔 후 첫 패배. 너무나 무기력한 경기로 온 국민들 충격.
⊙ 80년 10월, 그리고 81년 2월 일본에서 거행된 오오꾸마 쇼지와의 두차례 재대결에
서 초반 다운을 빼았았지만, 후반 체력 저하, 편파 판정 등의 이유로 챔피언 탈환 실
패.
박찬희의 WBC 플라이급 세계 타이틀 도전, 방어 일지를 읽어 내려가다 보면, 몇 가지
주목할만한 부분들이 있다. 첫째, 그의 복싱 스타일을 일컬어 가장 흔히들 하는 말은,
'박찬희는, 강자에는 강하고, 약자에는 약하다'이다. 이런 평가는 박찬희 본인도 어
느 정도 인정하는 부분이라고 한다(인터뷰 참조). 좀 더 정확한 설명을 하자면, 박찬
희는 변칙 스타일의 복싱에 약하다고 한다. 애당초, 강펀치를 구사하는 ‘FM 스타일’
의 복서들을 상대할 때는, 본인도 모르게 신이 나서 '그래, 오늘 한번 박 터져 보자!'
하는 자세로 임하게 되고(칸토, 에스파다가스, 아로살,...등), 권투를 좀 지저분하게
하는 스타일의 상대(이가라시, 오오꾸마 등)를 대할 땐, 여느 복서와 같이 좀 의욕이
떨어진단다. 따라서, '강자에 강하고, 약자에 약하다'는 평가는, 다소 어패가 있다고
본다. 그보다는, ''뽀록꾸'에 약하고, FM에 강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하지 않을까?
박찬희의 복싱을 보면서, 또 한가지 자주 거론되는 얘기는, '체력안배 실패'라는 말
이다. 그가 챔피언 방어전을 치르면서, 초반부터 약세를 보인 경기는 단 한차례도
없었다. 아마도 그랬기 때문에 매번 그의 매치를 보기 위해, TV로 몰리는 팬들이 많
았는지도 모른다. 초반의 여세라면 금방이라도 상대를 KO시킬 것처럼 보이지만, 결
국 끝에 가서는 결정적인 한방이 아쉬웠던 경기들이 꽤 있었기 때문에 말이다. 하지
만, 이 점만은 꼭 밝히고 싶다. 박찬희가 타이틀 방어를 하던 14개월 동안, 그는 정
확히 7차례 링에 올랐다. 더욱 골 때리는 일은, 마치 대본에 짜여진 듯한 것처럼, 그
는 항상 2개월에 한번씩 링에 올랐다. 에누리 없이 정확히 2개월에 한번씩 말이다.
체력안배? 어찌보면, 안배할 '기본 나가리' 힘이라도 축적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는
소리다. 오히려, 초반 총공세에도 불구하고, 상대를 항상 때려 눕히지 못했던 그의
펀치력에 물음표를 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 있다 하더라도, 체력안배 운운하
는 작자들에겐 후~왁 후추 한사발을 뿌리고 싶어진다.
SPECIAL BONUS : WBC 플라이급의 먹이사슬
박찬희를 취재하고 조사하는 과정에서 입이 떡~ 벌어지는 사실을 하나 발견하고, 후
추 독자들과 공유하지 않으면 잠이 오지 않을 것 같아서 이렇게 쓴다. 70년대 중반부
터, WBC 플라이급 최강자의 계보를 잇는 선수들이 3명 있었다. 다름 아닌, 멕시코의
미구엘 칸토, 한국의 박찬희, 그리고 일본의 오오꾸마 쇼지... 이렇게 3명이서 무려
7년간(75 ~ 81년까지), 21번의 타이틀 방어를 독식하다시피 했다. 더 기가 막힌 사
실은, 이 3명의 챔피언 사이에는, 아프리카 그 어느 정글 속을 뒤져봐도 이보다 더는
처절할 수 없는, 그런 ‘먹이사슬 체제’가 형성되어 있었다.
74전 61승 9패 15KO의 통산 전적을 자랑하면서, WBC 플라이급을 75년부터 4년간 장기
집권하고, 경량급 선수로는 유일하게 WBC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멕시코의 '링의 교
수' 미구엘 칸토(49년생)는, 14차 방어전까지 성공해 나가는 과정에 있어서, 일본의
오오꾸마 쇼지(51년생)와 2차례에 걸친, 타이틀 매치를 치르게 된다. 나이도 비슷한
연배이며, WBC 플라이급 랭킹 1,2위 자리를 놓고 항상 견제해 온, 이 두 마리의 ‘플
라이급의 공룡들'간 2차례 격돌은, 번번히 칸토의 승리로 이어진다. 통산 49전 38승
1무 10패(20KO)의 '빠방한' 전적을 가진 오오꾸마는, 평생 미구엘 칸토를 한번도 이
겨보지 못하고 은퇴하게 된다.
반면, 미구엘 칸토의 천적은, 역시 한국의 박찬희였다. 타이틀 방어전 횟수(14)가 박
찬희의 타이틀 도전 경기 이전의 매치 횟수(11)보다 더 많을 정도인, 징그러울 만큼의
링 경험을 쌓아 온 칸토가, 풋내기 박찬희를 꺾은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이들 역시,
두 차례에 걸친 ‘혈전’ 끝에, 결국 두 번 모두 박찬희의 승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오오꾸마 쇼지와 박찬희. 단순한 챔피언 대 도전자의 궤도를 뛰어 넘어, 이 두 명간
의 세 차례나 거듭되었던 격돌은, 한국 복싱과 일본 복싱의 혹독한 라이벌 의식을 불
붙혔던 도화선이었다. 같은 '눔'한테, 그것도 누구 말대로 '쪽바리'한테 3번을 연거
푸 지는 광경을 지켜 보면서, 당시 우리 팬들과 복싱 선후배들은 피가 역류하고, 복
수의 칼날을 세우기에 충분하고도 남았다. 76년 몬트리얼 올림픽 8강전에서 박찬희가
겪었던 편파판정은 '쨉'도 아닐 정도의, 정말 '빡통 오르는' 오오꾸마와의 재대결을,
적지 일본에서 2번씩이나 거듭했지만, 편파판정이라는 진짜 '고개 넘어가는' 이유로
번번히 무릎을 꿇어야 했다. 오오꾸마가 꿈에서도 한번 이겨보지 못했을 미구엘 칸토
를 2번씩이나 때려잡은 박찬희가, 이번엔 다시 오오꾸마의 주먹에 영영 글러브를 놓
게된 셈이니, 이 3명의 치열한 직,간접 대결과 그들의 기구한 링의 운명 역시, 당시
복싱 황금기를 구축하는데는 크나 큰 기여를 했을 것이다.
쓸쓸하고 허무한 복서의 길, 그 한복판의 박찬희
90년대 초반, 전 세계 헤비급 통합 챔피언 마이크 타이슨이, 미스 아메리카 후보 한
명을 잘못 건드렸다가, 인생을 아주 '조질뻔한' 경우가 있었다. 몇 년 '들어가서' 살
고 나오더니, 이번엔 상대선수 귀를 물어뜯는 '흡혈귀'로 돌변해서, 복싱 매치에서
아주 다양한 볼거리를 제공해준 경우도 있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저 인간, 아주
갈 때까지 가는구먼"하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한마디로 복서들 얼굴에 '똥칠'하는
격이며, 복서들 전부를 싸잡아 '또라이' 취급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행동들이었다.
이 밖에도 수많은 복서들, 특히 지난 날의 명성은 어느새 땡 쳐버린, 은퇴 복서들
의 링 밖에서의 '모험기'는 부지기수였다.
우리나라 복싱계 전직 챔피언들 역시, 타이슨 보다 더하면 더했지, 그 내용이나 빈도
수에 있어서 절대 밀리지 않을, '홍콩 무협영화의 주인공'을 방불케 했다. 박찬희,
그 또한, 이런 올드(Old) 복싱 스타들의 길게 늘어 뜨려진 어두운 그림자 안에서 굳
게 갇혀 살아온, 말 그대로 '표본 사례'라고도 볼 수 있다.
1957년 3월 23일, 대구 삼덕동에서 인간 박찬희는 태어났다. 시커먼 돌덩이 두 개 밑
에, 누~런 용 한 마리가 누워 있더라는 어머님의 태몽을 봐서, 그 시커먼 돌덩이 두
개는 아마도 복싱 글러브를 의미 하는 게 아니었나 싶기도 하다. 6남매중 5째로 태어
난 '꼬맹이' 찬희는, 어려서부터 직선적이고 정의에 불타는 소년이었다. 이치에 어긋
나는 행동을 목격했을 땐, 상대가 누구든지 가리지 않고, 꼭 짚고(?) 넘어가야 하는
성격이었다. 일례로, 어린 찬희는, 남의 집 안방까지 신발을 신은 채로 쳐들어가서,
잘잘못을 가리고 나온 적도 있다고 한다. 좋게 보자면, 어릴 때부터 탁월한 ‘투지’
를 연마한 셈이고, 나쁘게 보자면, 철딱서니 없는 어린 개구쟁이 아이로도 볼 수 있다.
대구의 삼덕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2학년 때, 가족들과 함께 상경하여 서울의 남정 초
등학교로 전학을 간다. 선린중, 한영고를 졸업할 당시, 박찬희는 이미 국가대표 선수
로 이름을 날리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실업팀들의 스카우트 제의가 쏟아져 오게 된
다. 하지만, 당시 그가 원했던 복싱의 목표이자 인생의 목표는 단 한가지였다. '권투
하는 놈들은 다 바보 멍텅구리다'라는 말만 듣지 않는 것이었다. 30여년 전 돈으로,
한달 월급 70만원씩 줄테니 실업팀으로 오라는 스카우트 제의가 있었지만, 그는 돈을
사양하고 학비 면제 조건만을 제시했던 대학 캠퍼스를 찾았다. 복싱부가 '빠방했던'
부산 동아대학교로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박찬희의 ‘제2의 고향’이라고 서슴없이 부르는 곳이 바로 ‘부산’
이다. 학교를 부산으로 진학해서 그런 말이 나오기도 하지만, 박찬희의 소위 ‘빅 카
드’ 경기는 주로 부산에서 열렸고, 그럴 때 마다 그는 부산의 팬들을 실망시키지 않
았기 때문이다. 아울러, 박찬희의 경기 때 마다 빠짐없이 응원석 한 귀퉁이에서 열광
적으로 환호해대던, ‘동아대학교 학생응원단’ 역시 박찬희 이름 석자의 동의어가
되어버리곤 했다. 박찬희의 제2의 고향이 부산이란 말엔 하자가 없지만, 그렇다고 그
의 ‘제1의 고향’이 경상북도 대구시 삼덕동이란 사실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안다. 박
찬희는 ‘서울의 링’에서 시원스러운 타이틀 매치를 보여준 기억이 별로 없고, 예나
지금이나 서울을 그리 좋아하지 않는 듯 싶다.
‘대학생 복서’, ‘도전자 같은 챔피언’, ‘미남 복서’... 등등, 수많은 수식어가
그의 이름 앞에 붙어 다녔지만, 많은 팬들은 '대학생 복서 박찬희'로 그를 기억하지
않나 싶다. 그 정도로 그 당시 복싱이나, 다른 스포츠 선수들의 '지적 수준'이 참담
했기 때문일 것이다. 챔피언 벨트를 오오꾸마에게 내주고 난 뒤, 적지에서 가진 2번
의 재대결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는 81년 3월, ‘은퇴 선언’을 한다. 그리고 그가
곧바로 눈을 돌린 곳은, 경희대학교 체육학과 석사 코스. 비록 1년밖에 다니지 못하
고 그만둔 석사 과정이었지만, 박찬희의 남다른 ‘교육열’은 당시 그 어떤 운동선수
에게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 후 박찬희는 은퇴 선언 1년 6개월여 만에, 컴백을 시도한다. 그의 매니저를 비롯
한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말이다. 별 볼일 없는 복서들을 상대로 한 두차례 컴백전을
치뤘지만, 무명 선수(윅텐검)에게 당한 어이없는 KO패와 부상으로 인해(턱뼈 골절),
박찬희는 영영 링으로 돌아오지 않게 된다. ‘밀림을 등진 표범’은 어디를 가도 편
치 않았다. 아무리 남달리 학업에 관심을 보였던 그였지만, 일반인처럼 무난한 사회
생활을 하기엔 걸림돌이 너무나 많았다.
‘이제부터 뭘 해먹고 살아가야 하나? 이럴 줄 알았더라면, 학교 다닐 때 공부라도
좀 더 해 놓을 걸...’ 후추가 단언하건데, 대한민국 운동선수 출신의 90%는, 은퇴
후 이런 생각을 하게 될 것이고 지금도 할 것이다. 대한민국 학원 스포츠의 기본 틀
이 잘못 짜여져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추후, ‘특별 Edition’으로 후추가 제대
로 한번 까발려 볼 것이므로 더 이상의 언급은 피하고자 한다. 박찬희 역시 은퇴를
결심한 후, 이곳~ 저곳~, 그리고 이일~ 저일~ 하면서 다니기 시작했다. ‘명성콘도’
과장자리에서부터 지금의 건설회사(기풍건설) 상임 상무 자리까지 말이다. 왜 하필이
면 죄다 건설회사냐고? 건설회사라면, 매번 무슨 공개입찰이다 뭐다 하면서, 좀 한다
하는 ‘어깨’들은 다 불러다 놓고, 속된 말로 ‘무늬’만 회사이지, 알맹이는 완전
히 '조폭' 분위기 연출하는 그런 곳이 아니었던가? (물론 이런 잘못된 선입견에는
‘모래시계’의 작가 송지나씨의 기여가 상당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현재의 박찬희
는, 주먹으로 '먹고 살기엔' 너무 '늙어' 버렸고, '하루 하루만을 열심히' 라는 교훈
을 멀리 하기엔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 당했다.
박찬희가 권투 글러브 벗고 사회에 진출할 때 수중에 있었던 돈이 약 1억원 정도 된
다고 한다. 지금 돈으론 10억은 족히 능가하는 액수다. ‘두뇌 이상’도 불사하고,
맞아가며, 코피 터져 가며 벌여 들였던 돈이 그 정도였다는 말이다. 그러나, 그 돈의
바닥을 보기까지는 그리 긴 세월이 소요되지 않았다. 어찌 보면, 지명도 있는 복서들
만큼 쉽게 돈 벌 수 있는 사람도 드물다. ‘이름값’으로 한번씩 링 위에 올라서,
‘몇 대 맞아주면’ 돈 몇 천씩 받는 것은 일도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박
찬희는 그렇게 살고 싶진 않았다. 그가 2년 남짓 챔피언 생활을 하면서, 매일같이 뼈
져리게 느꼈던 부분은 바로, '너무 힘들다'였다. 한 경기를 준비하고 훈련하는데 소
비되는 엄청난 훈련량, 거기다가 피 말리는 체중 조절, 국민들의 기대에 대한 심적
중압감, 그리고 '눈탱이가 밤탱이 되듯' 맞고 나서 찾아오는 복서들의 회복기. 이런
저런 것들을 따지면, 두 달에 한번씩, 2년 가까이 링에 올라야 한다는 사실은, 힘들
수밖에 없는 상황일 것이라고 짐작해 본다. 그들도 사람인데 왜 그런 생각이 들지 않
겠냐 말이다. "X까!!! 돈이고 나발이고 나 이제 정말 못해!!!"하고 말이다. 박찬희
가 오오꾸마에게 2번 재도전하고 실패한 후, 서울에 있는 모 병원에 입원을 했다. 물
론 컨디션도 안좋았지만, 이 꼴 저 꼴 안보고 어디에 짱 박혀서 푹~~~ 쉬고 싶은 마
음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그 정도로 챔피언의 길에 '학을 띠면서', 글러브를 놓은 박찬희 였기에, 영구 은퇴
후 재기전을 하면서 구차하게 돈을 벌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챔피언 벨트 빼앗기
고, 권투 글러브 땅에 놓고 나니, 누구 한 사람 도와주는 사람도, 아는 척하는 사람
도, 인도 해 주는 사람도 없었다. 권투하면서 주먹 좀 썼다는 얘기를 듣고 접근하는
사람들이라곤 결국, '주먹이 필요한 사람들'밖에 없는 것은 누구나 다 알만한 사실이
다. 그렇게 쉽게 벌 수 있었던 돈이, 당장 수중에 없어지고 나니, 돈 유혹엔 쉽게 뿌
리칠 수 없는 것이 사람의 본능이 아닐까? 거기다가 대부분의 복서, 아니 대부분의
운동선수들은 너무나 순진하고 계산에 어둡기 마련이다. 어려서부터 위에서 내려오는
지시사항, 작전사항에 따르기만 하면 되었고, 스포츠란 분야의 특성상, 아무 생각없
이 밀어 붙이는 자세가 효과적인 경우도 많다. 혼자 힘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계
획하는 습관을 요구한 것부터가, 당장 단 것 먹고 싶은 어린애한테 돈은 주면서,
'아이스크림 사 먹지 말고, 저금해놓으라’ 라는 요구와도 같게 보인다.
그렇게 시키는 데로만 살아 온 '단순한 사고의 소유자들' 옆에서, 그들이 미래에 대
한 설계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코뼈 부려져 가며’ 벌어
놓은 재산을 야곰~ 야곰~ 갈취해가는 인간들이 더 많다는 얘기다. 소위 좀 배웠다는,
똑똑하다는 인간들이 사회경험 없는 운동 선수들 꼬드겨서, ‘같이 무슨 사업을 하
자, 큰 돈 벌게 해주겠다...’등등. 그러고 나서는, 하루 아침에 ‘쪽박’ 차게 만드
는 인간들이 사지에 득실거리고 있으니, ‘거지꼴’ 된 선수들이 할 수 있는 일이라
곤 결국 사기, 폭행, 도박...뭐 이런 일밖에 더 있냐는 얘기다. 즉, ‘악순환의 연
속’일 뿐이다. 그런 의미에서도, 요즘 무슨 뽀로꾸 파이낸스 회사 차려 놓고, 영화
인들, 운동선수들의 피 같은 돈들 먹고 줄행랑치는 '개쉐이들'... 전부 다 싸잡아 넣
어야 한다.
물론, 배운 게 없다고 나쁜 짓 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세상엔
가진 것 없이, 열심히 살아가는 사람이 더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심심찮게 언론에
올라오는 복서들의 방황 소식을 듣고 '어유, 저 깡패쉐이들... 저것들은 도대체 언제
정신 차릴라나?' 이런 생각만 하며, 그것을 끝으로 그들에 대한 관심의 문을 닫아 버
리는 행동은, 점점 그들을 음지로 밀어 넣는 행동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10년 전, 20년 전... 우리 어렸을 적엔 ‘대통령’ 같이 떠받들고, 우리 모두에게
‘오르가즘’이 뭔지, 상상이라도 하게 해주던 그런 스포츠 스타들에 대한 안 좋은
소식이 신문지면상에 올라와도 "에이, 미친눔들..."하고 외면해버리는 게 우리 대한
민국 스포츠팬들의 ‘옛스타 모시기’이자, 옛과거에 대한 ‘예우’라는 소리이다.
어쩌다가 우리 나라 복싱이 이 지경이 되었는지. 무엇 때문에, 대부분의 복서들은 갈
때까지 가는지..., 왜 ‘나의 영웅, 나의 챔피언’ 박찬희가 지금 이 시간에도 덜컹
거리는 지하철 안에서 지친 몸을 기댄 채 졸아야 하는 지..., 왜 '전 세계 챔피언 박
찬희'라고 당당하게 명함을 뿌리고 다닐 수 없는 지... 그것부터 알아본 후에, ‘죽
일 눔, 썩을 눔’ 타령을 하고 싶다.
복싱이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나?
시대의 흐름
은퇴한 복서들이나, 현직 복서들을 만나보면 하나같이 하는 소리가 있다. 바로 "예전
같지 않다"는 말이다. 우리 나라의 복싱 황금기였던 7-80년대에 글러브를 끼고 뛰었
던 1세대들이 운동을 하던 시절엔, 말 그대로 ‘살기 위해서’ 권투를 했다. 운동이
라도 하면 누가 먹을 것은 주니까 말이다. 과거 우리 나라 초대 세계 챔피언 김기수
(97년 작고)씨가 배 곯던 자식들을 앞에 앉혀 놓고, 눈물을 삼키며 밥을 먹었다는 얘
기는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내가 먹어야 너희들을 먹일 수 있다"라는 말과 함께 말
이다. 그만큼 우리 선배들에겐 배고픈 시절이 있었고, 배고픔을 잊기 위해 운동을 한
경우가 많았다. 대한민국 땅에 처음으로 프로 스포츠란 말을 도입시킨 프로복싱이.
결국은 다른 프로스포츠 덕분에 자리를 잃게 된 셈이다. 이런 아이러니가 또 어디 있
을까?
요즘 우리 스포츠팬들은, 축구 한일전과 야구 한일전에 목숨을 걸고 응원을 한다.
나쁜 현상은 결코 아니다. 25년 전, 흑백 TV 한대도 귀해서 온 집안 식구들, 아니 온
동네 친지들까지 다 모여서 브라운관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그 때... 인기 프로그램은
딱 2개밖에 없었다.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 그리고 ‘김일 아저씨의 박치기
쇼’. 프로레슬링이 '쑈(Show)' 라고 폭로된 후, 프로복싱 세계 타이틀전의 국민적
관심은 실로 독보적이었다. 그런 복싱에 대한 범국민적 열기와 얼마 전, 영화배우 송
강호씨가 부활시킨 '하면 된다 - 헝그리 정신'의 궁합이 예술의 경지에 이르렀기 때
문에 당시 복싱의 인기는 유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복싱의 위치는 어디 있는가? 얻어 터지는 것부터가 무지하게 힘든 일이
다. 더군다나, 죽어라고 얻어 터져 가며, 그리고 굶어가며 체중 조절하면서 링에 올
라가도, 봐 주고 박수쳐주는 사람들 이라곤 프로모터, 매니저, 그리고 ‘복싱 원로’
할부지들 몇 명뿐이다. 중계방송? 국내 유일의 세계 챔피언 조인주의 ‘빅 매치’ 마
저, 온 식구 다 모여서 바람 쐬러 가는 주말 대낮에라도 해줄까 말까 하는 판국이다.
그나마 몇 푼 받고 복싱한다고 하면, 잠깐 어리버리 하는 순간에, 어느새 개런티는
프로모터와 매니저 입안으로 꼴까닥~ 넘어가고 있다. 당신 같으면 복싱하겠냐고요?
복싱을 할 이유가 너무나도 궁색한 오늘날, 거기다가 요즘 젊은 친구들의 사고방식
자체가 예전과 판이하게 달라진 시점에서, ‘복싱타령’을 하는 것 자체가 '오바'일
수도 있다. 하지만, 후추가 가장 아쉬운 부분은, 복싱이라는 스포츠가 돈 없고 배고
픈 나라에서만 하는 ‘헝그리 스포츠’가 아니라는 점이다. 멀리 볼 필요가 있을까?
예전엔 그나마 우리와 실력에서 삐까삐까 하던 일본을 보자. 얘네들은 아직도, 복싱
선수들에 대한 박수를 아끼지 않고 있다. 아니, 자국 선수들뿐만 아니라, 한국 복서
들도 일본에 가면 제대로 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얘네들도 다
배 곯아서 복싱하는 것은 분명히 아닐 텐데, 왜 우리만 복싱이라는 스포츠를 홀대하는
것일까? 환장할 노릇이 아닐 수 없다.
- 제도적 교착상태
복싱이 ‘사양길’로 접어든 책임을 꼭 팬들에게만 돌릴려 하는 것은 아니다. 사실,
가장 근본적인 원인은 아마도 한국 복싱의 집행부인, ‘한국 권투 위원회’가 아닐까
싶다. 기가 막힐 노릇은, 아직도 우리 권투 집행부의 주역들, 아니 주인들이 20년 전,
30년 전에 복싱판을 주름잡던 인물들 그대로라는 점이다. 70년대 한국 복싱의 간판,
양정규 전 한국 권투 위원회장, 이 분은 지금 여의도의 높은 분이 되어서 한나라당의
부총재도 하시는 분이 되었다. 이 양반, 선거유세 현장에서 ‘한국 복싱을 자기 두
주먹으로 키워 낸 사람’ 이라고 말 한번도 하지 않았을까? 그의 복싱계 활동은 결국
‘정계 진출의 발판’ 정도로 밖에 해석하지 않는 것일까? 결국 복서들의 ‘금 벨트
(Belt)’ 팔아서, 국회의원 '금빳지'까지 거머쥔 사람이, 참담한 복싱의 현주소를 남
의 집 불 구경하듯, 방치해둔다는 것이 과연 있을 수 있는 일인지... 하긴 어찌보면,
양정규 회장이 복싱계를 떠나면서, 그 누구도 그의 바통을 이어 받지 않았다고도 볼
수 있다.
'우리 권투 핵심부’의 가장 큰 문제점은 아이디어 낼 사람이 없다'라는 말에 많은
복싱인들이 공감하고 있다. 내일 모레면, ‘뉴 밀레니엄’이라고 하는데, 우리 복싱
계의 아이디어 수준은 아직도 ‘보릿고개’라는 소리이다. '복싱원로'라는 말은 수도
없이 들어도, '신세대 복싱' 같은 말은 들어 본 적이 없다. 문제를 더 악화시키는 부
분은, 국내에 몇 안되는 체육관이나 프로모터들 사이에서도 엄청난 '밥그릇 싸움'이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지금 우리 나라의 복싱 환경이 이 정도로 열악하고 비관
적인 판국에, 누가 세계 챔피언 하나 키워 내는 것은 ‘국가적인 경사’가 아니라,
‘사촌이 땅을 사는 격’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간혹 누가 '복싱을 일으켜 보자'하
고 발 벗고 나서도, 중간 중간에 부딪치는 ‘파벌싸움’, ‘길들이기...’등의 배타
적 저항 세력들로 인해 번번히 도중하차하고 마는 것이다.
한국 권투 위원회의 완전한 물갈이, 그리고 신선한 아이디어와 장기적 비전을 바탕으
로 체계적인 ‘관중 끌어안기’에 좀 더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한, 팬들이고, 복서들
이고 그 아무도 링을 찾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업들도 마찬가지이다. 복싱이 얼마나
기업 홍보하기에 좋은 ‘스포츠 마케팅의 불모지’인가? 야구나 축구에서 하는 자금
투자의 십분의 일만 하더라도 금방 눈에 튀는 마케팅이 될텐데 말이다.
아시아권에서 우리나라 만큼, 튼튼하고 뿌리 깊은 ‘복싱 유산’을 물려 받은 민족도
드물다. 후배들을 조련시킬 훌륭한 전 세계 챔피언 선배들, 놀고 있는 전 세계 챔피
언들 숫자가 역대 국무총리 숫자보다도 많다. 이대로 주저 앉아야만 하는가?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퇴출 복서들의 참담한 생활을 목격해야지, 우리 복싱팬, 나아가서 스
포츠팬 모두에게 경종을 울릴 수 있을까? 정말로 답답해진다.
복싱 재건의 몸부림
‘복서 출신의 사회인을 우연히 만나면, 사람들은 꼭 그 사람의 주먹부터 쳐다보고
얘기를 시작한다.’ 부인할 수 없는 예리한 관찰력이다. 우리 모두 그렇다. 이것이
바로 일반인들과 복서 출신을 갈라 놓는 보이지 않는 ‘사회의 벽’이자, 우리들의
‘편견’이다. 박찬희를 취재하는 과정에 있어서도, 좀 잘 '나가는' 복서 출신을 찾
으려고 엄청나게 뛰어 다녔다. 사견이지만, 은퇴한 챔피언 중에서 체육관을 차리거
나, '밥집' 정도가 아닌, 나름대로 윤택한 생활을 꾸려가고 있는 사람이라곤 고 김기
수 선생과 현 MBC 권투 해설위원 변정일씨 밖에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함경북도 북
청에서 태어난 고 김기수씨는 남다른 생활력과 비교적 일찍 터득한 ‘생계 비전’으
로, 작고하시기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한양 CC의 아마츄어 골프 챔피언까지 할 정
도로, 경제적으로 아쉬울 것 없는 말년을 보냈었다. 일찍부터 땅값 비싼 명동 자리에
찻집과 빌딩을 소유하는 덕분에, 외롭고 춥지 않게 생을 마감할 수 있었다고 한다.
얼마 전, SBS '임백천의 원더풀 투나잇' 프로그램에 출연하여, 본인이 운영하는 체육
관을 소개한 적이 있는 전 WBC 밴텀급 챔피언 변정일(32)씨는, 운동 선수 출신 치고
는 보기 드물게 나긋나긋한 목소리와 깨끗한 매너의 소유자이다. 도대체 왜, 전직 챔
피언들이 사회에 나와서 성공할 수 없는 지에 대해서 집중적으로 물어 보고 싶었고,
그 역시 얼마나 대단한 성공을 이루었기에, 언론에서 난리 호들갑을 떠는지 내 두 눈
으로 보고 싶기도 했고 직접 확인도 했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복싱인들이 느끼는 가장 큰 벽은, 바로 그들을 ‘사람’으
로 보지 않고, '주먹'으로 본다는 점이다. 이런 사회적 현상과 복서들에 대한 안좋은
인식을 조금씩이나마 바꿔 보기 위해서 변정일씨가 시도한 아이디어가 바로, ‘복싱
에어로빅’이다. 혹자가 들으면 "웃기고 있네. 자기 밥벌이 하려고 하는 일을 가지
고, 무슨 놈에 복서의 인식을 바꿔?"하고 비웃을 수도 있다. 아무려면 어떠냐. 설득
력이 없으면 어떠냐는 말이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아이디어 실현을 위해서, 밤낮으
로 뛰고 있다. 그리고 필자가 느끼는 부분은, 변정일씨의 시도는 분명 나쁘지 않은,
‘건강한 접근’이라는 결론이다. 요즘 신세대들에게, '복싱은 무서운 스포츠가 아니
다. 복싱은 가까이 있다. 복싱은 재미있다'라는 간접적 교육 방법만큼 효과적인 ‘복
싱 저변 확대’가 어디 있느냐 말이다. 변정일 본인인들, 이 짓 저 짓 다 안해봤을까?
아무리 해도 '기득권자들의 마인드'는 움직이질 않으니, 이런 맹랑하며(?) 신선한 발
상까지 하게 된 것이다.
젊은 층을 타겟하기 위해서 그는 먼저, 4천5백만의 관심사, ‘다이어트’를 Selling
Point로 잡았다. 복싱이고, 에어로빅이고 일단 판이 벌어져야 복싱 저변 확대도 가능
할 것 같아서 말이다. 체질적으로 편차가 있겠지만, 3개월동안 10-15kg는 '한큐'에
빠진단다. 변정일 복싱에어로빅 체육관 코치의 말인데, 훈련중인 회원들을 보고 있자
니, 그 말이 믿어진다. 저렇게 신나고, 재미있게 뛰고, 난리를 치는데도 안 빠지면,
그런 사람은 체육관이 아니라 병원부터 가봐야 할 것 같았다. 변정일씨에게서 좀 상
업적인 냄새가 나더라도, 필자는 박수를 쳐 줄 작정으로 찾아갔지만, 결코 그런 모습
은 볼 수 없었다. 그 역시 아직까지도, 돈 때문에 법정 싸움 중이다. 과거 그의 뒤를
봐 주던 화랑 프로모션측이 개런티를 갈취했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는 사실 소송비용
이 더 드는 형편이지만, 절대로 투쟁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한다. 복싱 선수들도
이제 눈 뜬 심봉사처럼 당하고만 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후배 선수들에게 보
여 주기 위해서라고 그는 말한다. 결과는 법정에서 판가름날 문제지만, 변씨의 이런
마음 자세 자체가 믿음직스러웠고, 차세대 복서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길 수 있다는
점에서 바람직한 일이라고 보여진다.
변정일씨는 복싱계의 문제점에 대해서 할말이 많은 사람이었다(인터뷰 참조). 변정일
하면 떠오르는 88 서울 올림픽 링 시위 사건 역시, '자기 자신은 일종의 희생양 이었
다'라는 그의 말만 들어도 어느 정도로 우리 복싱계가 썩어 빠졌는지 대충 짐작할 수
가 있다. 나름대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얼마 전 있었던
박찬희 선수와의 짧은 만남이 다시 머리에 떠올랐다. 변정일씨 같은 전 챔피언이 얼
마나 있을까? 큰돈을 벌어서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목표로 삼고, 챔피언의 ‘곤조’
가 아닌, 챔피언의 ‘긍지’를 거울 삼아 끝없이 자기 개발을 추진하고 있는 그런 모
습이 박찬희의 윗대 선배들에게도 찾아 볼 수 있었더라면 아까운 복서 여러 명은 충
분히 구제(?)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EPILOGUE
박찬희를 좋아했던 팬들이여, 그에게 팬레터를 보내자. 그가 일개 후추 주방장을 만
나고서 그렇게 감격했는데… 스포츠 언론은 그를 잊었더라도, 팬들은 아직 그를 잊지
않았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E-MAIL을 보냅시다.
후추가 그에게 전할 것입니다.
여러분의 E-MAIL은 그에게 새로운 기쁨을 줄 것이며, 그 역시 여러분들을 만나고 싶
어 합니다. ’후추정신’이 넘치는 분. 지금 박찬희에게 E-MAIL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