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의 언어와 무의미의 언어
-김춘수의 언어의식의 변화과정을 중심으로-
심은섭
1. 존재의 탐구와 언어
대여大餘 김춘수가 추구하고자 했던 존재의 방식이나 그의 시의식에 대한 고찰이 지난 과거의 작품을 통해서만 알 수 있다는 것이 슬픈 장벽으로 남는다. 과거로 돌아간 그가 더 이상의 부활의 가능성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시인이 평범하다는 것은 신에게도 인간에게도 용납되지 않는다”는 호라티우스의 격언은 김춘수의 시의식을 대변하는 말이라고 해도 결코 과장된 수사는 아닐 것이다. 이런 명제로 김춘수의 시의식의 변화를 살펴보고자 할 때 그의 시세계를 크게 다섯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1946년 「애가」로 문단에 데뷔한 이후 「꽃」, 「꽃을 위한 서시」, 「나목과 시」와 같은 초기 시들의 작품을 발표할 무렵을 제1기로 본다면, 1957년경으로 서술적 이미지의 시세계로서 무의미 시를 제2기라고 일컫는다. 이때는 관념을 배제하고 이미지를 즉물적으로 사용한다. 「처용단장 제1부」시편에서 나타나 듯이 이 시기의 작품들은 무의미가 주조를 이룬다. 소위 제3기는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나타난 탈이미지의 세계를 추구하던 시기이다. 특히「처용단장 제2부」에서 이미지 파괴와 실존성이 구체적 리듬감으로 표출되는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실존의 극복과 성찰의 특성을 드러내던 1970년대에서 1980년대까지의 시기를 제4기라고 칭한다면 1991년「처용단장」(미학사) 발간 이후 다시 돌아온 관념시. 현실시를 제5기라고 구분 지을 수 있다. 이렇게 본 고는 역사적인 관점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그의 시세계를 언어의식을 중심으로 논의하고자 한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꽃」일부
「꽃」이라는 관념시에서 그가 추구하는 존재는 무의미’로 흘러가는 강 위에 ‘꽃’을 띄워 사물의 본질을 새롭게 이미지화하는데 있다. 그에게 꽃은 언어다. 때묻고 빛이 바랜 언어로는 존재의 성안에 들어갈 수 없고 때묻은 의식의 언어로서는 존재하는 사물을 포착할 수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김춘수의 존재방식은 흘러가며 진행하는 실존의 존재이고 시적 대상을 고정 시키지 않는 허무의 존재다. 따라서 그는 존재의 의미에 천착하여 치열한 탐색의 태도로 일관하며,‘꽃’이라는 언어로 이데아라는 본질의 세계에 도달하려고 했다.‘나’는‘꽃’이라는 대상을 인식함으로써 의미를 추구하는‘자아’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본질과 非본질, 인격과 비인격의 관계로 나타난다. 곧 시인은 꽃의 본질을 벗기고 비본질적인 자아로서의 시인과의 대화를 원했다.
나는 시방 危險한 짐승이다. /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未知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눈시울에 젖어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탑을 흔들다가/돌에까지 스미면/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新婦여,//
-「꽃을 위한 序詩」 전문
인용된 위 시에서 나타나는 언어들은 모두 표현의 질서를 가지고 있다. '짐승'과 '나', '가지 끝'과 '피었다지는', '어둠'과 '불', '울음'과‘금’은 언어와 언어의 이항대립 관계를 가진다. 또한 이 시는 추상과 구상, 지성과 감성, 암시와 드러내기의 대립과 지양이 빚어내는 정서, 이미지, 의미의 텐션tension을 주고 있다.
‘나’의 대한 인식은 쇠약했지만 기존의 의식으로 치열하게 고뇌하던 김춘수는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나’의 부단한 노력으로도 존재의 본질적 의미를 파악할 수 없다는 자각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본질의 실체는 끝내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나 김춘수는 언어를 가지고 사물을 부재로부터 이끌어낸다. 이것은 시적 언어만이 할 수 있는 작업이다.
ⓐ詩를 孕胎한 言語는/피었다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처럼/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
-「나목과 시 1」일부
엷은 햇살의/외로운 가지 끝에/ⓒ언어言語는 제만 혼자 남았다.
-「나목과 시 3」일부
‘언어는 제만 혼자 남아’있다는 ⓒ의 사물은 소멸되고 언어는 고립된 상태라 할 수 있다. 그가 의지할 수 있는 것은‘꽃’이라고 언어로 부르는 순간 실재로서의 꽃은 사라지고‘시를 잉태한 언어’ⓐ뿐이었다. 이렇게 그의 존재 증명과 구원은 오직 언어로서 가능했다. 한 편으로는‘시를 잉태한 언어’ⓐ를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라는 ⓑ의 시적 언어에 대한 자기회의에 빠지기도 한다. 장폴 사르트르의 말처럼 ‘인지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수락하고 사랑 받기 위해서’ 김춘수는 언어를 사용했다. 그래서 그의 언어를 부정으로서의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인식의 시인인 김춘수에게는 모든 것이 인식의 대상으로서의 사물이고 언어는 인식을 위한 그의 도구였다. 그러므로 이미지는 언어의 본질로부터 부각 되는 것이다. 인식을 위한 도구로서 사물의 깊은 안쪽으로 들어가 본질을 파악하는 것은 언어의 몫이다. 그러나 본질의 의미는 의미 이전의 것으로 언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만으로는 본질을 파악할 수 없다. 언어는 결코 이미지 구성의 자료가 되지 못하므로 이미지가 언어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러한 의미를 바탕에 둔 김춘수의 시의식을 분석해 보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언어 자체가 가지는 의미에 집착하기 보다는 언어를 통해 빚어낸 이미지를 추구하는 것으로 이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사물의 존재를 밝히는 것은 언어에 의해서만 가능하고, 이 언어는 바로 명명행위의 수단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준 것처럼/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그의 꽃이 되고 싶다.//우리는 모두/무엇이 되고 싶다./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
-「꽃」전문
시적 화자가‘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라는 정체를 드러내며 혼돈과 부재의 상태인 존재의 은폐성으로부터‘나’에게로 다가 왔다고 말하듯이 김춘수에 있어서 언어에 의한 명명행위는 의미 없는 존재를 의미 있게 하는 일종의 인식을 뛰어넘은 주술적 의식儀式 행위이다. 모든 사물은 언어를 통하지 않고서는 어떠한 존재에도 이르지 못한다는 말로 이해할 수 있다. 누구든 그의
ⓐ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
는‘꽃’의 원시적인 실체로서 존재할 뿐 이미지로서 존재하지 않는다. 이름을 명명하는 수단은 언어이고 명명된 실체는 실존의 존재이다. 이름이 명명되었을 때 비로소 발신자와 수신자 간의 물리적 회로 또는 심리적 연결이 되는 접촉으로써 존재의 본질이 나타나게 된다. 혹자는‘몸짓’이 소통의 불능이고 분열이라고 하지만 필자는‘몸짓’과 ‘눈짓’은 모두 언어를 대신하는 소통의 감각기능으로써 통합의 변증법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동일선상의 같은 신분으로서 언어와 사물은 각각 인지적cognitive기능을 수행한다고 봐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 그의
ⓑ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익명성에 묻혀 있던 존재는 깨어난다. 탄생은 실체를 의미하지만 누군가에 의해 명명 되어지지 않을 때에는 존재의 가치를 가질 수가 없다.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비로소 본질의 현상과 존재의 가치를 동시에 향유할 수 있다.
ⓒ 이름을 불러다오
김춘수는 무명의 존재를 언어를 통하여 새로운 존재를 탄생시키는 시인이다. 따라서 우주의 만물은 본질에 따라 이름이 지어진다고 볼 때 김춘수의 사명은 존재의 가치가 드러나지 않은 그 무엇이든 성스러운 것에 대해 언어로 명명행위를 하는 것이다. 이처럼 언어가 사물의 존재와 존재 인식에 본질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이유는 언어가 혼돈된 세계를 질서화 하기 때문이다. 모든 사물은 언어가 없으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므로 김춘수의 「꽃」은 언어가 단순한 도구가 아닌 인식의 근본적인 조건이라고 할 수 있는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면서 무상을 실상으로 깨우치는 행위를 하고 있다. 로만 야콥슨은 「언어학과 시학」에서 “어떤 언어 공동체나 어떤 화자話者에건 언어는 하나의 통일체로 존재한다”고 했다. 그렇다면 명명행위가 이루어질 때 실체는 존재로서 동일성의 의미를 지닌다는 결론으로 귀결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언어의 기능성을 강조했다. 이렇듯 김춘수가 이 작품에서 노리는 것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하여 발신자와 수신자의 접촉으로 존재를 탐구하고 새롭게 조명하려는 주체와 객체가 상하주종 관계가 아닌 상호 우호적인 관계 형성을 원했다. 그는 또 「꽃」이라는 '이름을 부르는 행위'를 통해 비로소 인간이 사물을 인식할 수 있다는 경고와 인식 수단으로서 언어의 역할을 말하고 있다.
2. 서술적 이미지와 언어
김춘수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로써 소위 서술적 이미지descriptive image라고 말한바 있다. 서술적 이미지는 비유적 이미지와 대립하는 것으로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이다. “나는 서술적 이미지라는 용어보다 묘사적 이미지라고 부르는 게 좋다는 입장”이라고 이승훈은 (「현대시의 종말과 미학」, 집문당, 2007, p. 183.) 말한 바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어떤 관념을 전달하거나 이미지를 전달하기 위해 사용되는 비유적 이미지metaphorical image이다. 김춘수는 관념의 수단인 비유적 이미지가 아닌 시의 순수한 상태를 지향하는 이미지를 위한 이미지의 서술적 이미지를 추구했다. 이것은 새로운 관념이든 기존의 관념이든 그 어떤 것도 모두 배제한다. 서술적 이미지는 대상의 소멸과정이 아니라 대상의 재구성인 것이다. 그것은 대상을 전제로 시작詩作이 출발됨을 의미한다. 그러나 그는 대상을 재구성 하려다 마침내 무의식 세계를 만나고 이윽고 대상이 소멸되는 세계를 만난다. 이승훈의 ‘비대상’의 시가 무의식적 세계의 환상을 순간순간 떠오르는 언어로써 이미지의 고리를 만들어 형상화하고 있는데 반해 김춘수의 ‘무의미’의 시는 심상만을 제시하는 서술적 이미지에 초점을 둔다. 관념을 거세한 무의미시로 진입은 「인동잎」과「처용단장 1부」에서 그 양상이 나타나고 있다.
눈 속에서 초겨울의/열매가 익고 있다. /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꽁지가 하얀 작은 새가/그것을 쪼아 먹고 있다. /월동하는 인동잎의 빛깔이/이루지 못한 인간의 꿈보다도/더욱 슬프다./
-「인동잎」전문
이 시의 특질은 ‘인식의 시’다. 비유적 이미지를 철저히 배제한 풍경 묘사로만 일관하고 있다. ‘무엇’인가를 ‘말하려’ 하지 않는 대신, 시인의 가슴에 떠오른 어떤 관념을 압축된 풍경 묘사를 통해서‘보여 줄’ 뿐이다. 그 관념은 특별한 의미를 갖지 않은 무상無想의 관념을 지향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쓰인 언어는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차단해 버리고 언어 자체를 절대화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여기서 돋보이는 것은 ①~②행의 '눈雪'과 '붉은 열매'이다. 눈'의 흰빛 이미지와 '붉은 열매'의 붉은빛 이미지가 강렬한 색조의 대조를 이루면서 한 폭의 풍경화를 연상시킨다. ③행의‘서울 근교에서는 보지 못한’ 신기한 새이면서, 선명한 흰빛 이미지를 지니고 있는 이 새가 '붉은 열매'를 쪼아먹고 있다. '붉은 열매'는 흰빛과 대조를 이루는 붉은빛 이미지이며, '쪼아먹고 있다'는 촉각적 이미지이다. ⑥~⑧은 역경을 극복하고자 하는 인동잎의 의지가 인간의 의지보다 훨씬 강렬한 것임을 시각화했다. 그러나 서술적 이미지의 세계는 무의미시라고 볼 수 없다. 관념의 늪에서 벗어나기 위한 트레이닝이고 사색과 대상의 단계로 보기 때문이다.
바다가 왼 종일/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이따금/바람은 한려수도에서 불어오고/느릅나무 어린 잎들이/가늘게 몸을 흔들고 하였다.//날이 저물자/내 늑골과 늑골 사이/홈을 파고/거머리가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배꼬니아의/붉고 붉은 꽃잎이 지고 있었다.//…(중략)…/바다가 또 한 번 /새앙쥐 같은 눈을 뜨고 있었다./…(중략)…//가을이 가고 또 밤이 와서/잠자는 내 어깨 위/그해의 새 눈이 내리고 있었다./…(중략)…/
-「처용단장 1-1」일부
이 시「처용」에서 보여주는 것은 주술적인 언어이다. 주술적 언어는 시인이 받은 인상을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전하지는 않는다. 다만 우회와 변모를 거쳐 그 인상에 도달하면서 생성의 끝을 제거하고 본질로서 모든 것을 파악하려 한다. 특히 언어를 불러 들임으로써 새로운 생명체인 「처용」을 탄생 시키는 것이다.
이 시는 처용에 대한 역사적 사실 또는 전설의 내용을 시사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적 체험의 이미지화에 치중한 작품이다. 인용된 작품에서도 처용의 설화가 아니라 김춘수 자신의 유년시절 체험이 서정적인 풍경으로 표현 된다. 그러나 이것은 시적 화자로서 탄생과 죽음을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을 혼합시켜 언어로 나타내 보임으로써 자연의 대순환을 형상화하고 자연을 거대한 합일의 근원으로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김춘수 특유의 생성 이미지이다.
3월(三月)에도 눈이 오고 있었다/눈은/라일락의 새순을 적시고/피어나는 산다화를 적시고 있었다./미처 벗지 못한 겨울 털옷 속의/일찍 눈을 뜨는 남쪽 바다,/그날 밤 잠들기 전에/물개의 우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3월에 오는 눈은 송이가 크고/깊은 수렁에서처럼/피어나는 산다화(山茶花)의 /보얀 목덜미를 적시고 있었다. /
-「처용단장 1-2」전문
위 시에서도 현상학적 인식의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던 그는 관념에 대한 공포증과 언어와 세계에 대한 불신에서 종래에 흔히 사용하던 비유법인 은유를 버리고 환유적으로 대상을 바라보고 있다. 현대시는 음악성보다 회화성을 강조한다. 따라서 대부분의 현대 시인들은 청각적 이미지보다 시각적 이미지를 강조한다.
관념의 전달과 소통의 매개체로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하던 언어를 그는 배제하기 시작했다. 그의 시론에서도 일체의 언어 작용을 부정했다. 그것은 곧 언어의 소통 가능성에 대한 원천적 봉쇄와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을 부정 한다는 것으로 분석할 수 있다. 현재 일상의 상투적인 언어로는 대상의 본질이나 순수를 더 이상 이미지화할 수 없음을 인지한 그는 묘사주의라는 새로운 실험의 기교를 쏟아낸다
‘꽃’을 말할 때 아름다운 생물학적 식물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꽃’이라는 언어가 불러 일으키는 세계, 즉 하나의 이데아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언어는 명명행위의 도구일 뿐 존재의 주체는 아니다. 오히려 언어는 존재의 본질을 왜곡 시킬 수 있는 위험한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3. 탈이미지와 언어
김춘수는「처용단장 2부」에 와서 설명적 요소를 제거하고 탈이미지적인 작품으로 변모해 간다. 즉 이미지가 아닌 소리의 세계를 지향한다.
울고 간 새와/울지 않는 새가/만나고 있다./구름 위 어디선가 만나고 있다./기쁜 노래 부르던/눈물 한 방울,/모든 새의 혓바닥을 적시고 있다./
-「처용단장 2부 서시」전문
「처용단장 2부 서시」의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언어로 나타낼 수 있는 관념은 본질이 아니라 다만 관념일 뿐이라는 회의론이 그를 억압한다. 이것이 새로운 시세계의 변화를 불러일으키게 된 일대 방향전환을 시도한 이유이다. 이제 그는 대상을 적극 극대화하여 자아의 영역을 해체하고, 자아를 수동적 존재로 전락 시킨다. 이것은 바로 관념에 의한 자아를 버리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름 발바닥을 보여다오./풀바닥을 보여다오./그대가 바람이라면/보여다오./별 겨드랑이를 보여다오./별 겨드랑이의 하얀 눈을 보여다오./
-「처용단장 2-2」전문
「처용단장 2-2」에서 언어는 단지 이미지로만 남아있고 설명적 요소와 논리적 요소가 거세된 시적 상황의 새로운 시 의식을 발견하게 된다. 또한 언어는 인식의 도구가 아니고 의미 전달이라는 본래의 기능을 상실하고 이미지 환기 수단이 된다. 그렇다고 언어를 이미지의 도구로 전락 시킨 것은 아니다. 이미지와 이미지로 구성된 언어의 건축물이라는 시는 결국 허상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그는 서술적 이미지의 해체를 시도한다. 이것이 의미를 제거한 무의미로의 전환점이 되었다.
불러다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는 사바다, 멕시코는 어디 있는가, /사바다의 누이는 어디 있는가,/말더듬이 일자무식 사바다는 사바다,/멕시코는 어디에 있는가,/사바다의 누이는 어디에 있는가,/불러다오. /멕시코 옥수수는 어디에 있는가,
-「처용단장2-5」전문
이 시의 핵심은 의미가 사라진 언어가 환기하는 탈이미지를 중심으로 하는 무의미시를 지향 한다. 이 무의미시는 언어 기호를 구성하는 기의와 기표 중에서 기의를 지우는 작업이다. 이미지의 소멸-연결이 아닌 이미지와 이미지로써 하나의 이미지가 또 다른 이미지 하나를 지워버리는 해체와 상상적 변형이 일어나고 있다. 행마다 되풀이 되는 이미지의 서술로 그가 마지막으로 선택한 시작詩作의 본질인 리듬을 강조하는 시이다. 즉 의미를 상실한 소리이고 리듬의 반복이다. 또 이 시는 서술적 이미지를 극복하고 관념이 거세된 상태이다. 관념은 형상을 통해서만 나타낼 수 있다는 것과 말의 피안에 있다는 것을 새롭게 인식한다.
자아의 해체는 자기 동일적 자아의 경계를 회복하려는 의도인 것이다. 결국 무의미 시란 언어가 억압해 오던 의미를 배제한 이미지와 관념으로부터 도피이고 대상의 소멸을 통해 허무에 도달하는 「순수예술」의 세계이다. 대상이 있는 서술적 이미지의 경우, 관찰자(시적 자아)는 현상학적 판단중지에 기초하여 대상을 묘사하는데 그친다. 그러나 무의미시란 언어에서 의미를 제거하고 언어와 언어의 혼합, 또는 충돌에서 빚어지는 음색이나 의미를 암시하는 상태를 가리킨다. 이러한 절대적 허무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그에게“탈이미지”가 필요했던 것이다.
4. 통사적 해체와 언어
1990년대를 전후하여 완성된 「처용단장 3」에서는 언어는 해체되고 의미는 단순한 소리로 분해된다. 그리고 그는 소쉬르의 언어관을 받아 들인다. 기호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양면성이 지시체를 배제하는 양가적 체계이다. 그러나 그는 이제 기호의 논리, 곧 문법을 해체한다.
뉘더라/한번 지워진 얼굴은 복원이/쉽지 않다./한번 지워진 얼굴은/ㅎㅏ ㄴㅂㅓㄴㅈㅣㅝㅈ ㅣㄴㅓㄹㄱㅜㄹㅡㄴ/,복상腹上의/무덤도 밀쳐낸다는데/글쎄,
-「처용단장 3-37」전문
이 시는 극단적인 통사 해체를 나타낸다. 소리와 의미내용 사이의 대응관계를 맺어주는 규칙의 체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 언어이다. 모든 의사소통이 반드시 뚜렷한 소리 또는 문자, 그리고 기호를 갖춘 언어체계를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몸짓이나 손짓과 같은 신호를 통하여 의사를 전달하기도 한다. 즉 음악도 미술도 의사 표현의 한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인용한 이 시에서 김춘수는 의사 전달의 도구인 기호체계를 통사해체라는 극단적인 모험으로 언어를 해체하고 있다.
나는 그만 봐버렸다.고,/그때 나는 이미 「」안에 들어가 버렸다.고,/나는 위선자, 겉 다르고/속 다르다.고, 네가 그날 밤/오지 않는 것이 천만 다행이었다.고,
-「처용단장 3-38」전문
위의 작품에서는 ‘「」’의 기호를 사용함으로써 언어를 제거하고 ‘버렸다.고,’라고 하는 표현방법을 사용하는 것은 문법체계를 해체한 이미지로부터 탈출을 시도하는 것이다.
ㅕ ㄱ ㅅ ㅏ ㄴ ㅡ ㄴ/ⓐ눈썹이없는아이가눈썹이없는아이를울린다./역사를/심판해야 한다 ㅣㄴㄱㅏㄴㅣ/심판해야 한다고 니콜라이 베르쟈에프는/ⓑ이데올로기의솜사탕이다/바보야/ⓒ하늘수박은올리브빛이다바보야//ⓓ , //역사는 바람이 자는가 자는가 하더니/눈이 내린다 바보야/우찌살꼬 ㅂㅏㅂㅗㅑ//ⓔ , /ⓕㅎㅏㄴㅡㄹㅅㅜㅂㅏㅡㄴ한여름이다ㅂㅏㅂㅗㅇㅑ//ⓖ , /올리브 열매는 내년 ㄱㅏㅡㄹㅣㄷㅏㅂㅏㅂㅗㅑ//ⓗ , /ⓘㅜㅉㅣㅅㅏㄹㄲㅗ ㅂㅏㅂㅗㅑ//ㅣ바보야/역사가ㅕㄱㅅㅏㄱㅏ하면서/ⓙㅣㅂㅏㅂㅗㅑ//어쩌나,/ⓚ후박나무잎하나다적시지못하는/사이를두고동안을두고/내리는/떠나가고난뒤에내리는/천둥과함께맑은날을우비처럼역사의만하晩夏의/늦게오는비//어쩌나,
-「처용단장 3-39」전문
이 시에서는 이미지의 시세계로부터 탈피하려고 생성된 언어와 문법체계를 부정한다. 특히 ⓐ와 ⓑ와 ⓒ, 그리고 ⓕ와 ⓚ는 띄어쓰시를 무시하고 있다. ⓓ의 ‘,’는 시의 구성으로 보아 하나의 연으로 구성되어 있다. ⓔ의 ‘,’는 맞춤법을 어긴 통사 해체다. 그리고 ⓖ와 ⓗ의 ‘,’는 쉼표가 아니라 시행의 시작을 암시하고 있다. 또 ⓘ의 ‘ㅜㅉㅣㅅㅏㄹㄲㅗ ㅂㅏㅂㅗㅑ’와 ⓙ의 ‘ㅣㅂㅏ ㅂㅗㅇㅑ’는 소리의 단위로 해체된 낱말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의미도 내포하지 못한다. 이 시에서 ⓐ에서 ⓚ까지 일련의 시행을 볼 때 서술어의 부재와 음절 단위의 소리, 그리고 쉼표 기능의 해체는 모두 통사 해체를 지향하고 있다. 그는 관념전달이나 소통을 전제로 하는 언어 즉, 대상을 표현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되는 언어를 「처용단장 3부」에서 배제하기 시작 한다. ‘ㅂㅏㅂㅗㅑ’처럼 언어를 사용해오던 김춘수의 시론에 나타난 관념의 부정은 언어의 의미 작용 일체를 부정한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언어 조직과 통사라는 형식, 그리고 질서의 개념을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시적 언술을 통해 시의식이 점증적으로 변화되어 간다. 그러나 김춘수는 일제 강점기의 억압과 6.25라는 이데올로기의 폭력에 대한 표현을 일상의 언어로는 형상화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또 다른 시세계을 추구한다. 그가 선택한 것은 「처용」과「예수」라는 신화를 통해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단절을 극복하고 인간내면세계를 구원한 것이다.
5. 神과 자연과 인간의 소통
따라서 필자는 김춘수의 무의미시(처용단장)를 이런 측면에서 새롭게 하고자 한다. 시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보편적인 정서를 활용함으로써 시공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강력한 호소력을 발휘한다. 이처럼 이미 전승되어 오는 설화만큼 보편적인 느낌을 담고 있는 것도 없다. 이렇게 보편적이고 친숙한 느낌의 설화를 시 속에 차용함으로써 시가 개성적인 경험을 초월하여 시간적 영원과 보편적 정서를 잘 드러낸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김춘수의 시와 「처용」이라는 설화는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을까? 그는「처용단장」이라는 연작시에서 「처용」이라는 설화적 인물과 처용설화를 줄곧 차용하고 있다. 왜 그토록 처용설화를 차용하였으며 처용설화를 통하여 무엇을 얻으려고 했을까. 또한 그의 시집 「南天」에는 <예수를 위한 여섯 편의 소묘>라는 부제로 실린 여섯 편의 시가 있다. 이와 같이 김춘수에게는 전통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나란히 병존하고 있다. 어찌 보면 예수는 김춘수에게 있어서 그의 시에 가장 중요한 화두였던 「처용」의 또 다른 변용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김춘수는 그의 시 「꽃」에서 ‘너’와 ‘나’는 ‘우리’라는 실체로 다시 태어나 단절된 관계회복을 이루려 했듯이 그는 신라시대의 신화적 인물을 현대화 한「처용」이라는 설화와 「예수」사상과 이념과 그리고 종교를 통하여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과의 단절된 관계 회복의 시의식을 넓히고자 했다. 신라시대의 신화적 인물을 현대시化 한 그의 시에서 무의미 시라는 관념은 신화-원형으로 귀화하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이 하나가 되는 소통의 삼위일체를 이루어 절대고독으로부터 벗어나려 했다. 그 대표적인 시가「처용단장」과 「예수를 위한 여섯 편의 소묘」의 작품이다. 현실과 인간내면의 잠재의식을 다양하고 총체적으로 파악하는 새로운 인식의 틀이 되고 있는 점에서 매우 의미 심장하다.
김춘수는 원죄에 빠진 인간을 십자가의 피 흘리는 죽음을 통하여 구원한다는 상식적인 예수고난의 모습을 시로 형상화 했다.
예수는 눈으로 조용히 물리쳤다. /ㅡ하나님 나의 하나님, /유월절 贖罪羊의 죽음을 나에게 주소서. /낙타 발에 밟힌/땅벌레의 죽음을 나에게 주소서/살을 찢고/뼈를 부수게 하소서./애꾸눈이와 절룸발이의 눈물을/눈과 코가 문드러진 여자의 눈물을/나에게 주소서. /하나님 나의 하나님, /네 피를 눈감기지 마시고, 잠재우지 마소서. /내 피를 그들 곁에 있게 하소서. /언제까지나 그렇게 하소서. /
-「痲藥」전문
신과 자연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어 있는 현실을 절대고독의 단계④라고 한다면 이를 벗어나려는 그의 시의식이 신화적 단계로까지 발전 시켜가는 첫 번째 이유일 것이다. 인간은 개체로 존재함으로써 고독을 피할 수 없다. 김춘수는 예수가 십자가의 끔찍한 고통을 감내하는 것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 극한의 고통이 세상 사람들을 구원할 수 있는 힘이라고 믿었다. 김춘수가 여기서 드러내 보이고자 하는 것은 스스로 속죄양이 되고자 하는 예수 정신이다. 신약성서에서의 예수의 죽음은 무상의 은총을 위해서는 그에 필적할 만한 자신의 고통이 지불되어야 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가장 정결한 양의 피로 상징되어 <속죄양의 죽음>을 원하는 것이라는 기독교의 해석을 김춘수는 그대로 따르고 있다.
<절대고독의 단계④>
인간 고립은 신과 자연과 소통이 단절된 절대고독으로부터 온다. 절대고독에 앞서 인간고립은 신과 자연이 분리되고,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고, 인간과 인간 마저 서로 반목과 대립하는 카오스chaos적인 현상 탈피를 위해 언어에 의한 소통을 원했다. 이것은 현 시대의 상황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고독의 단계④를 탄생 시키기 전 단계인 인간고립의 단계③으로 진입하려는 행위이다.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관계가 단절된 관계회복을 위해서 김춘수가 추구하는 것은 상호 단절된 소통으로 인하여 신과 자연과 인간이 서로 분리되고 반목과 대립의 각을 세우는 상호 고립으로부터 구원이었다. 이와 같이 김춘수에게는 ‘나(인간)+너(자연)+그(신)=우리(공동 운명체)’라는 주체간 단절된 소통을 회복하고자 했다.
<인간고립의 단계③>
김춘수가 노리는 또 하나의 시도는 신과 자연과 인간의 관계에서 언어를 통해 인간고립으로부터 탈출이었다. 특히 언어로 표현된 축문형식의 시를 통하여 관계복원을 꾀하려 했다.
돌려다오./불이 앗아간 것, 하늘이 앗아간 것, 개미와 말똥이 앗아간 것,/女子가 앗아가고 男子가 앗아간 것,/앗아간 것을 돌려다오./불을 돌려다오, 하늘을 돌려다오, 개미와 말똥을 돌려다오./女子를 돌려주고 男子를 돌려다오./쟁반 위에 돌려다오/돌려다오
-「처용단장 2-1」전문
위의 시는 인간고립에 대한 그의 구원이고 간청이다. 또한 원망의 형태이다. 불(火)이 가져다 준 재앙을, 하늘(神)이 데려간 인간의 목숨, 개미와 말똥을 찾는 단절이 앗아간 소통을 갈망하고 있다. 자연과 인간은 상호 소통하지만 신과 인간, 또는 신과 자연과의 관계가 단절된 상태에서는 결코 그는 구원을 얻을 수 가 없었다. 인간은 산을 허물고 농경지를 개간하고 댐을 쌓았다. 자연과 인간이 서로 불건전한 소통의 자연파괴의 단계②에서는 운명을 공유할 대상이 없음을 직시하던 김춘수는 역사와 폭력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증오했다. 그래서 그는 시에서 의미를 배제하려는 시작 의도와 태도를 지향하는 무의미시를 주창했다. 이러한 차원을 추구하는 김춘수의 시세계는 판단 중지의 사물시로부터 출발하여 고대 설화적 인물인 처용의 탐구로 전개되었다. 실존과 무의식적 유희를 교직 하면서 현실에 대한 회의와 존재론적 불안을 여실히 드러내었다. 이것은 언어를 배제한 내면 세계의 탐구였다.
살려다오. /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 /북을 살려다오/오늘 하루만이라도 살려다오. /눈이 멎을 때까지라도 살려다오/눈이 멎은 뒤에 죽여다오. /북 치는 어린 곰을 살려다오. /북을 살려다오.
-「처용단장2-3」전문
이 시는 인간의 거대한 폭력 앞에 애처롭게 쓰러지는 어리고 연약한 존재들의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을 잘 드러내고 있다. 문화는 자연을 변화 시키고 인간은 문화를 향유하기 위해 자연을 파괴 시킨다. 인간의 언어는 자연의 파괴를 막지 못한다고 판단한 김춘수는 고대설화라는 정신의 세계만이 자연파괴를 구원하리라 생각 했다. 자연을 파괴하여 문명의 이기를 얻으려고 신에게 떡과 술로 비는 것 마저 김춘수는 부정하려 했다. 그래서 그는 신과 자연, 그리고 인간의 경계가 허물어진 상태, 즉 삼위일체의 상호 교류가 가능하도록 할 수 있는 유일한 소통의 통로인 고대 신화의 단계① <처용>을 통하여 무생명fiction을 사실fact로 만들어 가는 신과 자연과 인간이 하나가 되는 신화를 원했다.
<자연파괴의 단계②>
김춘수의 시에 나타나는 시적 대상들은「꽃」, 「화가」,「처용」등과 같이‘꽃’이 아니면 인간임을 알 수 있다. 꽃의 추상적인 존재를 규명함으로써‘꽃’과‘인간’의 신분의 동일성을 완성하였고 박해 받던 유태인의 삶의 현장을 샤갈의 그림을 통해 자신이 체험했던 한국적 역사를 언어로 조명하려 했다. 그리고 인간의 절대고립을 처용이라는 신화를 통해 소통하고자 했다. 그는 식물을 인간으로 묘사하면서 그의 언어는 시의 간결성과 애매성. 신비성을 부산물로 얻고 있다. 김춘수는 똑 같은 대상을 놓고도 다른 시인과 색다른 언어로 표출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처용’의 언어가 김춘수의 주된 시적 오브제objet로 택해졌는가라는 문제보다는 ‘처용’의 이미지가 어떻게 김춘수의 언어 속에 나타나 있으며 어떻게 전개되어 가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신화의 단계①>
그는「처용」을 통해 신과 자연과 인간의 화해를 시도하고자 했다. 그가 시도하려 했던 화해의 방법은 「처용」이라는 설화적 이미지로 나타난다.
인간들 속에서/인간들에 밟히며/잠을 깬다. /숲 속에서 바다가 잠을 깨듯이/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가/서 있는 것을 본다. /남의 속도 모르는 새들이/금빛 깃을 치고 있다. /
-「처용」전문
‘젊고 튼튼한 상수리나무’는 김춘수가 바라는 온전한 존재로 구현된 모습이다. 신화적인 세계를 가질 때만이 인간의 절대고독은 사라지고, 신과 자연으로부터 또는 인간의 고립과 자연파괴적인 것으로부터의 자기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 김춘수는 고대 신화로부터 절대고독의 구원을 얻으려고 추구했고 언어의 일상적인 존재방식을 과감하게 초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 외부 세계의 그 무엇과는 철저히 단절과 일상적 맥락이 배제된 시 내부의 세계만으로 자족적 세계인 순수성으로의 귀화를 의미한다. 따라서 극복할 수 없는 절망에 대한 인간적 고뇌가 표출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자기극복의 초월성이라는 강렬한 시의식을 읽을 수 있다. 이와 같이 김춘수는 역사로부터의 상처를 고도의 언어유희와 추상을 통해 다스리고자 했다. 「처용단장 3-39」에서 보여 주듯이 언어의 통사적 질서를 깨고 음절을 강조하기도 한다. 언어를 버리지 않는 한 시적 억압으로부터 도피할 수 없다는 것을 누구보다 김춘수 자신이 의도적으로 의식하는 문제였다. 그의 시는 절대고립④에서 인간고립③에 도달하고 인간고립③에서 자연파괴의 단계②로 가고, 자연파괴의 단계②에서 신화의 단계①에 도달하고자 하는 긴 여정이었다. 이것은 일제 강점기의 체험과 6.25의 폭력적인 이데올로기부터 억압받아온 지난날에 대해 이해와 관용의 정신으로 삶을 살겠다는 태도의 소산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이 언어를 중심으로 한 김춘수의 시의식의 변화과정이다. 김춘수의 언어는 사물보다도 언어가 앞장 서 온다. 그래서 김춘수의 언어는 실패함으로써 존재한다. 그것은 실패 속에 새로운 형식을 얻고 도전의 양식을 발견하는 시도이기 때문이다. 존재의 탐구에서 의미를 부여하던 언어가 존재의 본질을 규명하지 못한다는 결론에 도달 하고 언어에 의존하지 않는 수단으로서 이미지를 서술적으로 쓰지만 이미지에서 관념의 그림자를 벗어버리기 위해 선택한 건 이미지로부터 탈출이었다. 소위 탈이미지로써 리듬으로 시를 짜는 것이다. 그러나 김춘수는 다시 「처용단장 제3부」에서 통사해체로 나간다. 그리고 박해 받던 유태인의 삶의 현장을 샤갈의 그림을 통해 자신이 체험한 한국적 역사를 언어로 조명하려 했다. 그리고 인간의 절대고립을 처용이라는 설화를 통해 소통하고자 했다. 역사와 폭력의 이데올로기의 억압을 증오하고 시에서 의미를 배제하려는 시작詩作 의도와 태도를 지향하는 무의미시를 주창하며 자아의 실체를 탐구하여 존재를 지키려 했다. 그는 결국 무의미시에 대한 회의와 시적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채 극단적으로 치닫던 전위적인 실험에 스스로 갇히기도 했다. 역사로부터 입은 상처를 고도의 언어유희와 추상을 통해 치유하려던 그의 시적 사유는 고정되어 있지는 않았다. 늘 자기성찰과 변화를 모색하는 시인 김춘수는 문학과 삶의 본질적 관계를 재조명하여 시의 존재 의의를 극대화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언어를 사용하는 것은 김춘수의 참된 숙명적인 시인의 조건이었다.
-The End-
첫댓글 와! 역시나 였습니다. 자랑스러운 교수님, 정말 축하 드립니다
출타했다가 이제왔어요. 감사합니다.
祝賀 드립니다.
잔치 한번 열어야지요?
멀리서 보내 주신 성원에 감사 드립니다.
교수님 바다건너에서 축하 드립니다.
축하 , 축하 합니다. 대단히 경사스러운 일입니다. 수강생 모두의 영광입니다.
감사 합니다. 7월 4일(수요일)에 뵙게요.
우리들의 쌤! 짱~ 입니다.
얼짱! 몸짱(?) 배짱! 성격좋고 인품뛰어나고 등등 ^.^
얼짱도 아니고, 몸짱은 더욱 아닙니다. 복부 비만이 심한다. 아무튼 감사드립니다.
여러분들의 성원과 채찍으로 이루어진 기쁨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