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쓰기가 쉽지 않군요.
행사 참여에 대한 개인적 느낌을 공개하는 것도 어색하고,
그렇다고 행사 진행을 중계하듯 기록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은 것 같아요.
그래서 절충하는 방향으로 가능한 절제된 표현으로 정리해볼까 합니다.
우선, 카페지기 gaiA님과의 만남도 이번 행사에서 의미가 있었지요.
묵묵하게 카페를 지키면서 시인이 강조하는 ‘공동체적 삶’을
실천적으로 지향하는 모습이 느껴져서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카페 글로만 보았는데…
강사에게 꽃다발을 전달하는 장면은
6회까지 진행된 이번 강연에서 시인이 처음이었어요.
gaiA님의 ‘존재’를 살짝 엿본 듯 했어요.^^
시인은 ‘공동체와 개인’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했지요.
지구라는 행성에 살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성찰이 강연 내내 계속됐고요.
시인으로서 삶에 대한 고뇌가 펜데믹과 함께 몸이 아팠다는 고백으로 연결되어
<내 따스한 유령들>에 실린 10편의 시를 직접 낭송할 때 감동으로 다가왔습니다.
‘마스크에 쓴 시 1’(60쪽)을 읽으며 ‘지구가 내어준 자리’를 생각합니다.
우리가 지구라는 ‘별’에 여러 생명체와 함께 살고 있다는 것을 잊지 않기를
시인은 강연 내내 강조했어요.
가이아(gaiA)의 뜻을 되새기며 카페지기의 닉네임이 호명(呼名)되는 것 같아 기뻤지요.^^
‘마스크에 쓴 시 2’(61~63쪽)는 깁니다. 지금처럼 살지 말아요.
‘멈춰야 한다, 더 늦기 전에!’ 그러면서 마지막에 묻습니다.
‘그럴 수 있을까? 인간이?, 그럴 수 있을까? 우리가?’
인간으로서 우리가 무얼 해야 하는가?
‘마스크에 쓴 시 10’(72쪽)이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답입니다.
“지구 거주민 인류가 다다른 최상급 진보:/무엇을 하지 않을 것인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시집 해설에 실린 글입니다.
“묘한 말 같지만 가장 적극적으로 시를 쓰는 일은
(무엇이 되기 위해) 무엇을 하지 않는 일과도 연동된다.
시인의 표현에 따르면 시는 ‘무엇이 되려는 꿈’을
흩어버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119쪽)
시인은 오래 전에 ‘피어라, 석유!’를 다시 소환하면서
거듭 ‘어머니, 지구의 처지’를 슬퍼했어요.
https://cafe.daum.net/sunwoopoem/FnhH/147
‘마스크에 쓴 시 12’(78~79쪽)에서
왜 우리가 무엇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를 시 말미에 단언합니다.
“다른 존재들을 멸종시키면서 스스로 멸종위기종이 되어가는 우리”
‘마스크에 쓴 시 13’(80~81쪽)에서
시인은 ‘부끄러움’에 대해 길게 얘기 했어요.
시집 곳곳에서 이 체제(system)에 대한 분노가 드러납니다.
그런데 시인은 무력감(無力感)부터 말했지요.
20대부터 폭력적인 권력과 이들의 필연적인 타락을 지켜보면서
우리에게 ‘부끄러움에 대한 감수성(感受性)’이
왜 필요한지를 절감(切感)했다고 합니다.
시인의 시는 이런 고통의 감수성의 발현(發現)이고,
이것이 바로 ‘문학이 주는 위로’라고 했어요.
시인의 강연제목이 ‘삶을 위로하는 문학의 힘’입니다.
시인은 스스로 지금까지 진보로 살아왔음을 잔잔하게 전하면서,
진보는 ‘고통에 대한 공명(共鳴)’에서 비롯됨을 힘주어 강조했지요.
시인은 늘 여럿이 함께 하는 연대(連帶)를 말하곤 합니다.
그리고 ‘말랑말랑한 힘’을 주장하지요.
시의 말미에 “부끄러움에 관해 생각하는 마음의 저녁,/거기부터일까요?”를 묻습니다.
시인의 물음에 ‘말랑말랑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에 대한 답이 있음을 눈치 채셨나요?
카페에서 이 힘을 공유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마스크에 쓴 시’ 연작 14편 중 5편을 읽으면서
‘부끄러움의 감수성’이 온 몸에 스며들었어요.
시인은 뒤에 읽은 5편의 시에서 또 다른 감수성을 속삭이듯 말해주었지요.
‘행복의 감수성!’
‘티끌이 티끌에게-작아지기로 작정한 인간을 위하여’(17쪽)에서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임을 일러줍니다.
카페에 함께 모인 우리가 바로 티끌이라는 생각에서 전문을 옮겨봅니다.
“내가 티끌 한점인 걸 알게 되면/유랑의 리듬이 생깁니다//
나 하나로 꽉 찼던 방에 은하기 흐르고/아주 많은 다른 것들이 보이게 되죠//
드넓은 우주에 한점 티끌인 당신과 내가/춤추며 떠들다 서로 알아챈 여기,/
이토록 근사한 사건을 축복합니다//
때로 우리라 불러도 좋은 티끌들이/서로를 발견하며 첫눈처럼 반짝일 때/
이번 생이라 불리는 정류장이 화사해집니다//
가끔씩 공중 파도를 일으키는 티끌의 스텝,/
찰나의 숨결을 불어넣은 다정한 접촉,//영원을 떠올려도 욕되지 않는 역사는/
티끌임을 아는 티끌들의 유랑뿐입니다”
덧붙일 말이 없어요^^
시 해설 ‘티끌: 내가 티끌 한점인 걸 알게 되면’(113~116쪽)에 훌륭하게 설명되어 있지요.
‘푸른발부비새, 푸른 발로 부비부비’(10~11쪽)는 아픈 시인을 위해
시인을 좋아하는 분이 보내준 푸른발부비새의 그림을 보고 쓴 시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부비새 사진을 일부러 배경으로 한 시를 읽어주었어요.
아! 개인적 느낌을 절제하려 해도 여기서는 참을 수 없군요.^^
마스크에 쓴 시의 우울함에서 벗어나기 위해 일부러 이미지를 삽입한 재치,
그리고 ‘바스락, 바스락, 으쌰으쌰, 으쌰으쌰’의 의성어를 표현하는 시인의 솜씨,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시인은 마지막에 당부를 합니다.
이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빛 드나드는 마음의 창문을 열어두는 연습’이다,
이를 ‘마음 연습’이라고 했어요.
‘혁명력의 시간, 로도스의 나날’(12~15쪽)은 혁명력과 로도스에 대한 주가 달려있지요.
시인이 왜 이 시를 쓰게 되었는지를 설명해줍니다.
“말로만 떠들지 말고 혁명을 실천해야 한다는 간곡한 당부다.”
지금도 유효한 일갈(一喝)입니다.
시인은 ‘자유로운 개인의 공동체’를 단호한 어조를 말했어요.
“노동이 나 자신을 기쁘게 하는 곳에,/
삶이 나를 춤추게 하는 곳에.”를 외치는 시를 보면서
시인의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가 생각났어요.
시인이 말한 ‘작은 티끌과 찰나 생(刹那 生)’과 함께,
박노해 시인의 시도 떠올랐고… 나이 탓인지 모르겠네요.^^
https://cafe.daum.net/sunwoopoem/EMMC/15
‘작은 신이 되는 날’(20쪽)은 제목이 나중에 만들어진 시랍니다.
시를 읽으며 ‘작은 신’의 의미를 티끌과 함께 되새겨보았지요.
그러면 ‘먼지 한 점인 나도 한 티끌을 향해 말할 수 없이 고마운 날’임에 기뻐하게 됩니다.
‘오늘은 없는 날’(32~33)은 ‘아무것도 안 하는 중이어서 행복해진다’는 역설입니다.
“지구와 함께 걸어요/지구의 입장에선 자갈돌 하나인 나/
우주의 입장에선 티끌 한점도 안 되는 나/
이토록 작은 존재에 허락된 하루를 오직 감사하면서”,
시인과 함께 조용히 ‘오늘은 없는 날’을 즐겼지요.
나에게 시인은 ‘자유로운 바람’이었습니다.^^(21.10.15)
첫댓글 행사의 강연내용과 감상을 아주 자세하게 쓰셨네요. ^^ 진보의 연대란 참 소중하지요. ^^ 기념사진 혹시 없을까요? 시인님과 느림님 가이아님 함께 한 사진 있으면 올려주시면 더 좋을 것 같네요. ^^
고맙습니다.^^ 난나님은 카페에 자주 오시더군요. '연대(같이한다는 것)'은 여기서부터 시작일텐데... 셋이 함께 한 사진이 없어 서운하군요. 미처 생각을 못했어요...
멋찐 후기 감사드립니다 느림님....
돌아갈 길이 멀어 막걸리 한잔 못해 아쉽네요 ㅎ
조만간에 또 뵈옵길~
늘 건강하시옵길 고맙습니다.
기회가 있겠지요.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