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 증발’을 슬퍼하는 이들을 향한 토닥이는 위로.
‘희망 실종’을 부추기는 문화를 거스른 유쾌한 희망 변론.
밀리언셀러 『무지개 원리』저자로 대중에게 친숙한 차동엽 신부가 ‘희망’ 한 다발 들고 돌아왔다. 강연가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는 대중의 ‘기쁨과 희망, 슬픔과 고뇌’를 자신의 주제로 여기며 울고 웃는다. 그의 희망 탐사는 집요하고, 끈질기고, 장쾌하다. 그리하여 이 책 『희망의 귀환』은 별별 절망의 명분을 훼파하고 있음은 물론, 동서의 빛나는 희망 예지를 망라하여 집적하고 있으며, 여태 아무도 밟지 않은 희망 지평을 새벽처럼 열고 있다.
저자는 말한다.
고백하거니와 이 글은 누군가 벼랑 끝에서 희망을 찾는 이를 위한 변호임과 동시에, 나 자신 희망이 절실해질 때를 위한 비상구로서도 의미를 지닌다.
나는 지상에서 가장 호소력 있는 희망 경구로 다음의 라틴어 격언을 즐겨 꼽는다.
“나도 희망한다, 너도 희망하라.”(스페로 스페라: Spero, spera)
얼핏 평범한 상투어인 듯하나, 이 말의 속뜻엔 거부할 수 없는 울림이 있다. 지금 누군가에게 희망을 권면하는 그 사람은 더 혹독한 시련 가운데 있다. 그는 겨우, 간신히, 억지로 희망을 부여잡고 버티는 중이다. 그리하여 그는 살아있음 자체가 주위 사람들에게 힘찬 희망의 응원이 된다. 그의 처절한 고백!
“나도 희망한다.”(Spero)
이는 이제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 된다.
“너도 희망하라!”(Spera)
이 바다 건너 지혜를, 지금 희망과 작별을 고하려 망설이는 모든 이에게 전하고자 이 글을 쓴다.---본문 중에서
“온 세상이 너의 희망 밭이며 들판이다!”
“역사 이래 꿈 시장에 불경기란 없었다!”
저 속수무책인 절망문화의 확산을 우리는 어째야 할까? 이 물음에 직면하여, 이 사회 지식층 일각에서 일고 있는 준열한 성찰에 귀를 기울여 본다. 일부 날카로운 비평가들은 이 절망문화의 주범이 바로 과장된 성취경쟁 때문이라고 가차 없는 비판을 가한다.
이들의 말에 백번 공감한다. 우리 사회문화는 지난날 오직 성공만을 향하여 질주할 것을 종용해 왔다. 이로 인해 행복, 기쁨, 사랑, 평화 등 우리네 삶의 본질적 목표가 경제 및 출세 논리에 압도되었다. 당연히 그 부작용은 피로, 과로, 좌절, 우울증 등이었던 것이고. 이런 ‘피로사회’ 증후군엔 치유가 시급한 것이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피로사회’에 방점을 찍고 있는 지식인들에게 되묻고 싶다.
“그러면, 절망이 답인...(하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