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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슈카르지아 Baščaršija
바슈카르지아(로마자: Baščaršija/키릴문자:Башчаршија)는 사라예보의 구시가지에 자
리잡고 있는 ‘중앙시장’이라는 뜻의 바자르(bazaar)를 말하는 터키어이다. 이 바슈카르지
아(Baščaršija)가 있는 곳은 사라예보의 역사와 문화적 중심지로, 오스만제국(漢: 奥斯曼
帝國/ 英 : Osman Türk Empire or Ottoman Empire)시대인 15세기에 이사 베 이사코비
치(Isa-Beg Isaković)가 설립하였다.
▲ 사라예보의 세빌리 샘 앞 광장에 모여든 비둘기떼들 - 일명 "비둘기광장"
▲ 바슈카르지아 골목은 물건을 사는 사람과 관광객으로 항상 붐빈다.
▲ 사라예보 바슈카르지아의 음식점 거리 - 이 시간에는 손님이 크게 붐비지 않는다.
▲ 카슈카르지아의 전통적인 금속공예 장인들이 만든 수공예품 판매상
▲ 카슈카르지아의 전통적인 금속공예 장인들이 만든 수공예품 판매골목
사라예보는 1018~1462년간은 동로마제국(Eastern Roman Empire/ 일반적으로는 “비
잔틴제국”이라 부름 : Byzantine Empire)의 지배를 받다가, 1463~1878년간은 오스만
제국 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의 지배를 받았기에 이슬람풍의
구거리와 모스크, 정교회성당, 가톨릭성당이 한곳에 조화롭게 모여 있는 모습을 볼 수가
있다.
▲ 바슈카르지아 골목에도 오후에는 비교적 한가하여 여행객의 발걸음도 느슨하다
▲ 바슈카르지아의 오후는 상가에서 주인과 관광객이 서로 한담하며 지낸다
▲ 바슈카르지아의 한 켠에서 레이스를 떠서 판매하는 할머니의 여유롭고 인자한 모습
▲ 카잔질록 골목의 상점에서 구리공예품을 만들고 있는 장인
▲ 카잔질록 골목에 전시되어 있는 구리공예품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주변에는 네오 르네상스 양식의 오스트리아-헝가리식 집들과
터키식 거리가 있어 유럽문화와 이슬람 문화가 오묘하게 공존하는 사라예보의 매력적인
관광지다. 이곳 시장에는 약 500개가 넘는 상점들이 밀집해 있는데 관광객뿐 아니라 이
곳의 현지 시민들이 애용하는 시장이다. 작은 골목에 들어앉은 낮은 터키식 집들에서는
카펫과 수공예품 등을 팔고 있으며, 한편 동양적인 정취가 풍기는 세빌리 분수광장 주변
에는 가죽제품과 도자기 금 은 세공품 직물 등을 직접 만드는 터키의 장인거리가 있다.
오스만제국시절부터 이곳에는 많은 터키인들이 모여 살았으며, 19세기까지는 지금의 2배
정도 더 큰 규모였지만 화재로 대부분 건물이 타버렸다고 한다.
▲ 바슈카르지아의 이 골목은 완전히 머플러와 카펫을 내다 걸어두었다.
▲ 바슈카르지아 골목 바닥은 모두 돌을 깔아 두어 미끄럽고 넘어질 위험이 있다.
▲ 의복을 파는 골목에는 무슬림 여성용 이외도 패션용 용품도 팔고 있다.
▲ 여성용품 골목이 끝나는 지역에는 주로 여성 무슬림들이 몰려있는 음식점이 많다.
● 세빌리 샘 (Sebilj Brunnen/ Sebilj Water-fountain)
바슈카르지아 광장의 한복판에 오두막 모양의 샘이 버티고 서 있는데, 이 샘이 바로 세빌
리샘이다. 이 세빌리샘은 1753년 처음 만들어졌으며, 1852년 한 차례 화재로 인해 전소
되었다가 다시 1891년에 현재의 모습으로 건축되었다. 이 샘의 물은 깨끗하여 지금도 식
수로 사용되고 있는데, 이곳의 물을 마시면 그 어디를 가더라도 다시 안전하게 사라예보
로 돌아올 수 있다는 전설이 내려와 이곳 세빌리샘은 사라예보 시민들의 사랑을 받는 상
징물이다. 이 세빌리샘은 여행자들이 서로 만남의 광장으로 많이 이용하고 있다.
▲ 세빌리샘은 바슈카르지아로 들어가거나 만남의 장소로 흔히 사용한다.
▲ 세빌리샘은 바슈카르지아로 들어가 시장거리를 거닐거나 쇼핑을 위한 기점으로 사용된다
▲ 세빌리샘 주위에는 항상 비둘기떼들이 이리 몰렸다 저리 몰렸다 한다.
♣ 세빌리 샘
- GPS좌표 : 43°51′35.77″N ~ 18°25′52.77″E
- 위 치 : 가지-후스레브 베이 모스크에서 도보 3분
▲ 세빌리샘 주위에 모이는 비둘기떼들과 아이들은 놀기를 좋아한다.
▲ 세빌리샘을 향하여 어린이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다.
세빌리 샘이 있는 중앙광장에서 안쪽으로 들어서면, 바닥에 돌이 깔려있는 작은 골목이
보이는데 이곳에는 터키의 장인들로부터 전통적인 금속 공예기법을 사사받은 사람들이
수공예품을 판매한다. 눈길을 사로잡는 화려한 무늬의 금속공예제품들과 함께 공예제품
을 만드는 모습도 볼 수 있다.
▲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수공예품 판매 골목 <가>
▲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수공예품 판매 골목 <나>
▲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수공예품 판매 골목 <다>
▲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수공예품 판매 골목 <라>
▲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수공예품 판매 골목 <마>
▲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수공예품 판매 골목 <바>
▲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수공예품 판매 골목 <사>
● 꺼지지 않는 불꽃
- (영어: Eternal Flame/보스니아어: Vječna vatra / 세르비아어: Вјечна ватра)
▲ <꺼지지 않는 불꽃>은 기념비 앞에 세워두었는데 특수연료를 사용한다.
<꺼지지 않는 불꽃(Eternal Flame)>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희생된 군인과 민간인들을
추모하기 위하여 세워진 조형 기념비이다. 이 기념비는 1946년 4월 6일에 헌정되었는데,
이 날은 나치독일과 파시스트 독립국가였던 크로아티아가 4년간의 점령기간에서 사라예
보가 해방된 지 1주년이 되는 기념일이었다. 그러나 제2차세계대전이 전쟁의 참혹함으로
는 마지막이길 바랐었지만, 사라예보는 보스니아내전으로 또다시 전쟁의 참혹함에 빠져
들고 말았다.
▲ <꺼지지 않는 불꽃>은 오늘도 타고 있지만, 영원한 평화는 우리 인류에게 없다.
이 기념비는 건축가인 「유라이 나이트하르트(Juraj Neidhardt –그가 크로아티아의 Zagreb
에서 태어나 크로아티아어로 이름을 지었으니, 크로아티아어로 [jûraj nǎjtxart]라고 발음한
다 : 1901~1979)」가 설계하였는데, 사라예보 중심부인 티토바 뮬라 무스타파 바셰스키예
(Mula Mustafa Bašeskije, Titova)와 페르하디야 거리(Ferhadija streets)의 합류지점에
자리 잡고 있다.
▲ 바슈카르지아 지역은 1층은 음식점 등 상점이고 2층 이상은 여관인 경우도 있다.
▲ 사라예보 구시가지를 가르는 유명한 "문화만남" 표시 거리.
● 사라예보 장미 Sarajevo Rose
▲ <사라예보 장미>가 콘크리트 바닥에 표시되어 있다.
보스니아내전에서 사라예보가 포위되었을 때에 콘크리트 위에 생긴 둥근 원형탄착점
이 독특한 단편화 패턴으로 만들어지게 되었는데, 이것은 거의가 꽃꽂이해 둔 꽃처럼
보여서 “장미”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사라예보 도시 전체에는 약 200개의 "장미"표시
가 있는데, 사라예보가 포위되어 있는 동안 적어도 3명이 살해된 곳에도 그런 위치표
시가 되어 있다. <사라예보 장미>는 현재 대부분 아스팔트로 메워져서 몇 개만 남아
있는데, 그 중 하나가 예수성심대성당 앞에서 볼 수 있다.
▲ <사라예보 장미>가 길바닥에 표시되어 있다.
▲ 예수성심대성당 앞에 표시되어 있는 <사라예보 장미>
사라예보 구시가지를 한나절 동안 걸었더니 피곤하고 배도 고프다. 그리고 오늘 밤 잠
자리도 알아봐야 되겠다. 바슈카르지아의 먹자골목을 돌아보았다. 골목입구에 Ottoman
style of Food 라고 쓰여 있어 필자의 입맛에 맞는 “쌀밥을 곁들인 체바피(ćevapi)”를
먹으면 되겠다고 생각했다. 체바피는 오스만시대의 발칸반도에 기원을 둔 음식으로 꼬
치와 유사한 지역특산품이다. 체바피는 2가지 종류의 다진 고기구이, 껍질을 벗기는 소
시지 유형이다.
▲ 사라예보 구시가지를 한나절을 걸었더니 배가 고프다. 이 골목이 먹자골목이다.
▲ 바슈카르지아의 먹자골목 중 입구에 Ottoman style of Food 이라고 쓰여 있다.
▲ 발칸식 음식이라면 cevapi 가 필자에겐 아무래도 익숙하다.
사라예보의 바슈카르지아 주변에는 1층에는 음식점이나 다른 상점을 하면서 2층 이상
에서는 여관을 하는 집들이 많다. 간판은 호텔(hotel), 호스텔(hostel), 여관(inn) 등 여
러 이름으로 되어 있지만, 빈방이 몇 개 있다고 표시해 둔 곳도 있고(vacancy or vacant
room), 또는 도미토리(dormitory) 베드가 몇 개 비어 있다고 영어로 표시한 곳도 있다
(empty bed). 어쨌든 이런 숙박시설이 시내에 가까이 있으면서 비교적 가격이 싼 곳도
많다.
▲ 세계여행에서는 가장 무난한 호텔이 홀리데이 인(Holiday Inn)인데 사라예보에도 있다.
▲ 사라예보 구시가지 주택가에는 이런 조금 고풍스런 호텔도 자리잡고 있다.
▲ 사라예보 바슈카르지아의 음식점골목에 음식점 주위에도 이런 여관이 있다
▲ 사라예보의 예수성심대성당 주위에도 음식점과 여관간판이 보인다.
▲ 이런 집은 오스만제국 시절에 지은 집인데, 여관집이 되어 있다.
바슈카르지아 지역에 여관을 정하고, 관광안내소에 맡겨둔 큰 가방을 찾아와 여관에 갖다
두고는 도시 안에 있는 공원의 잔디밭으로 걸어보았다. 그러다 잔디밭에서 발견한 보스니
아의 유명한 문필가인 「메사 셀리모비치」와 「이보 안드리치」 2사람의 조각상을 발견하였
다. 이 두 사람은 모두 보스니아화폐지면의 도안에 쓰인 사람이고, 「이보 안드리치」 는 노
벨문학상 수상자로 그의 작품 《드리나강의 다리》는 필자도 읽어본 소설이다.
▲ 사라예보의 시가지 안에는 이런 잔디밭 공원이 길게 형성되어 걸어 보았다.
●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 :1892년10월10일 ~ 1975년3월13일)
▲ 이보 안드리치 - 노벨문학상수상자, 보스니아지폐 200마르카 도안에 쓰였다.
이보 안드리치(보스니아어:Ivo Andrić/세르비아키릴어: Иво Андрић/ 아명: Ivan Andrić)
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지배하던 시절인 1892년 보스니아의 작은 마을 트라브니
크(Travnik)에서 크로아티아인 아버지 안툰(Antun)과 어머니 카타리나(Katarina) 사이
에 태어났다. 2살이 되기 전 아버지가 돌아가셔 고모에게 맡겨져 보스니아 최고의 명문인
사라예보 벨리카 김나지야에 진학하였다. 소년시절을 오스트리아제국의 보스니아에서 보
낸 안드리치는 자그레브(Zagreb)와 빈(Wien)에서 철학을 공부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학업을 중단했다. 이 무렵 안드리치는 진보적 민족 단체 ‘청년 보스니아’에 가담
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으나 1914년 많은 단원들이 체포되고 안드리치도 3년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이때 옥중에서 읽은 도스토예프스키, 키에르케고르는 훗날 그의 창작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 이보 안드리치 - 위키백과사진
1911년에 시를 발표하며 창작 활동을 시작한 그는 1920년 첫 단편집 『알리야 제르젤
레즈의 여행』을 비롯하여 보스니아의 여러 민족들의 다양한 문화와 역사를 소재로 사
후까지 100여 편이 넘는 단편과 중·장편소설을 발표함으로써 구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서 가장 많은 독자를 가진 작가가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집필하여 전쟁이 끝난
1945년에 동시에 발표한《드리나강의 다리(The Bridge on the Drina)》《트라브니
크의 연대기》《아가씨》는 500여 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보스니아에 살아온 다양한
민족공동체의 공통된 역사와 운명을 조명하여 이들의 갈등과 견제 속에 형성된 발칸
특유의 문화를 서사적으로 그려낸 걸작들이다.
▲ 세르비아의 비오그라드에 있는 이보 안드리치 조각상
♣ 안드리치는 보스니아에서 크로아티아인 부모에게서 태어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3나라가 모두 자기 나라 사람이라고 주장한다.
이런 작품들은 침체된 유고 문학계에 새로운 부흥을 가져오게 되며 특히《드리나강
의 다리》는 안드리치가 1961년 노벨상을 수상하게 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드리나강의 다리》는 우리나라에서도 번역출판본이 나와 있다. 2005년 「문학과
지성사」에서 외대교수 김지향씨가 번역하였다. ‘발칸의 호메로스’로까지 불리우며
보스니아의 얼굴을 가장 잘 드러낸 작가로 꼽히는 안드리치는 1975년 심장 발작으로
영면하였다.
▲ 노벨상 수상자인 이보 안드리치(Ivo Andrić)의 작품명과 동일한 《드리나강의 다리》
- (보스니아어) Most Mehmed Paša Sokolović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 다리/
the eponymous bridge on the Drina
♣ 이 다리는 11개의 석공아치로 되어 있으며, 길이는 180m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비셰
그라드의 드리나강을 가로질러 놓여있다. 오스만제국의 기념비적 건축물로 독특함의 정점
을 보이고 있다. 1577년 메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치의 명령으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완성
● 메사 셀리모비치(Meša Selimović :1910~1982)
▲ 사라예보 중앙공원에 세워져 있는 메사 셀리모비치 조각상
메사 셀리모비치(영어: Meša Selimović/보스니아어: Mehmed "Meša"Selimović/세르
비아어: Мехмед "Меша" Селимовић)는 보스니아의 투즐라(Tuzla)에서 이슬람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30년 베오그라드(Beograd/Belgrade)에서 세르보크아트
어와 문학을 배웠다. 1936년 귀향하여 교사가 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처음
2년 동안은 고향에서 보냈으나, 파르티잔의 반파시스트운동에 참여한 혐의로 체포되었
다가 석방된 이후에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참여하였다. 전쟁 중 형제가 겪은 투옥과
처형 등 개인적 아픔이 제2차세계대전 이후 최고의 유고슬라비아문학작품 중 하나로 불
리는《죽음과 데르비시(Death and the Dervish)》의 배경이 되었으며, 종전 후에는 교
수와 영화 극작가로 활동하였으나 정치인 및 지식인들과의 충돌에 염증을 느껴 1971년
베오그라드로 이주하여 그곳에서 사망하였다. 1976년 세르비아과학예술원에 편지를 써
서 자신은 이슬람의 귀족가문이지만, 세르비아인이며 세르비아문학가임을 주장하였고,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과학원의 회원을 지냈다.
▲ 메사 셀리모비치 도안의 5마르카 지폐 도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