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나도 관정 대법사님 같이 되어 지이다
굉성(봉제, 군위 봉제선원)
1) 관정 대법사님과의 첫 만남, 부산 해인선원
내가 관정 대법사님을 처음 만난 것은 1997년 3월 2일 타송 스님이 대법사님을 초청해서 부산 해인사 포교원인 해인선원에서 법회를 가졌을 때였다. 법회에 대한 소식은 들었지만 그때 나는 교통사고로 아주 심하게 다쳐서 밖에 나갈 수 없었음은 물론 10m도 걷지 못할 정도였다. 압곡사에서 전갈을 받고 교통사고로 다친 곳보다 더 아픈 것이 바로 법회 참석이 불가능한 현실 문제였다. 그러나 출가하여 불법을 닦겠다는 사람으로 이런 대법사님을 만난다는 것은 일생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하는 기회인데 어떻게 아프다고 누워만 있겠는가?
‘내가 기어서라도 반드시 대법사님 법문에 참석하겠다.’
이렇게 마음을 먹고 간신히 걸어서 버스 정류장까지 갔는데 놀랍게도 걸을 수가 있었고 법회장소까지 1시간 반 동안 버스를 타고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참석하였는데 나는 맨 앞의 첫줄에 앉아서 법문을 들었다. 그런데 그렇게 아프던 몸이 다 나았는지 하나도 아프지 않고 머리에서 웅~웅~ 소리가 났다. 마치 발전기가 돌아가는 소리에 수 천 볼트 전기가 내 몸으로 전해지는 것 같았다.
‘아, 이 대법사님은 정말 엄청나게 큰 기를 발하고 있구나!’
이렇게 생각하며 대법사님의 극락 다녀오신 이야기를 듣고 정토선 염불을 어떻게 하는지에 대해서도 자세하게 알 수 있었다.
부산 법회를 마치고 스님이 영주 약수암으로 떠나실 때 나도 따라나섰다. 비록 출가했지만 큰 선지식을 만나지 못했던 터에 이번에는 어떻게든 관정 대법사님으로부터 무엇인가 얻어내야겠다는 결심이 섰기 때문이다. 일행은 차 2대를 나눠 타고 떠나게 되었다.
‘내가 저 대법사님 옆에 앉았으면 좋겠다.’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는데 전체 일정을 마련한 타공 스님이 말했다.
“스님은 여기 먼저 타십시오.”
바로 내 생각대로 관정 대법사님 곁이었다. 내가 앉고 대법사님 앉고 문앞에 통역이 앉았다. 안동 약수암까지 3시간 정도 달리는 동안 가끔 대법사님을 쳐다보기는 했지만 서로 말이 통하지 않으니 대화를 할 수 없다는 것이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는 대법사님의 강렬하면서도 푸근한 기운 속에서 그 기운을 음미하면서 행복한 3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물론 내 몸에서 아픈 곳은 모두 완전하게 나아버렸다.
2) 「연화대」와 「도솔천」
1997년 3월 4일, 타공 스님이 주지로 있던 영주 약수암에서 천도재가 열렸다. 관정 대법사님이 주재하시고 타공 스님, 자해 스님, 범서 스님, 광적 스님, 운곡 스님 그리고 필자가 대법사님을 도와 천도재를 진행하였다. 작은 법당 안에 얼마나 많은 신도들이 모여 들었는지 나와 광적 스님은 도중에 대중들이 대법사님 쪽으로 밀려들지 않도록 힘을 주어 막고 있어야 할 정도였다.
타공 스님이 목탁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관정 대법사님은 순서에 따라 여러 가지 다라니를 외시는데 그 가운데 능엄신주를 외는 것은 알 수가 있었다. 1시간 반쯤 걸리는 천도재를 마치자 큰 스님이 보살 2명에게 자신이 올린 노잣돈 봉투에 영가 이름을 써가지고 오라고 하셨다. 보살 2명이 이름을 써가지고 온 봉투를 받은 대법사님은 1시간 반 동안 탄 향의 재를 그 봉투 위에 뿌리고 손바닥으로 싹 비비고 나서 손을 오른쪽으로 살그머니 밀어내자 정말 신기하게도 거기에 우리말 글자가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연화대」
또 한 장도 똑 같은 방법으로 재를 뿌리고 손으로 비빈 뒤 밀어내자 이번에는 다른 글자가 나왔다.
「도솔천」
나는 이것을 보자마자 정말 감탄하고 감격하였다. 바로 영가가 태어난 곳의 이름이 한글로 쓰여 있고, 글 아래는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대법사님이 막강한 파워를 보내셔서 온몸에서 웅웅거리는 소리가 나면서 내 아픈 곳이 깨끗이 나아버린 것만 해도 감격스러운 일인데 천도를 한 영가가 가서 태어난 곳이 노잣돈 봉투에 적혀져 나타나는 이적을 보고는 더 할 말을 잃을 수밖에 없었다. 그 봉투들은 천도를 신청한 보살들이 가지고 와서 이름을 써낸 것이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관정 대법사님은 만져 보지도 못한 봉투이고, 더구나 한국에 처음 오신지 보름밖에 안 되었으니 그 안에 대법사님이 한글을 배웠을 수도 없다. 그리고 법당 안에는 여러 스님들을 비롯하여 수많은 불자들이 가득 차 모두 바라보고 있는 자리였기 때문에 이 장면은 믿을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감격한 타공 스님이 이 봉투를 들고 밖에서 참석한 신도들에게 알리려고 하자 관정 대법사님은 그렇게 하지 말라고 말리셨다. 그러나 타공 스님은 참지 못하고 밖에 가서 그 이적을 알렸다. 관정 대법사님은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조용히 앉아만 계셨다.
약수암에서 사흘 머무시는 동안 범서 스님과 나는 매일 대법사님 곁을 떠나지 않고 따라 다니며 대법사님의 기운과 함께하였다. 하루 이틀 전에 꼼짝을 못할 정도로 아팠던 나는 아픈 것은 까맣게 잊고 있었다. 법이란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
3) 압곡사에서 보여주신 관정 대법사님의 법력
약수암 천도재를 마치고 나서 대법사님은 군위 압곡사로 오셨다. 당시 나와 범서 스님은 압곡사 뒤에 있는 콘테이너 토굴에서 잠을 잤다. 그런데 한 밤중에 우룽~ 우룽~ 소리가 들렸다. 비가 오나 했더니 비가 오는 것도 아니었다. 이전에 없던 이런 기운을 범서 스님도 똑같이 받는다는 것을 보면 이것은 관정 대법사님의 파워라는 것을 직감할 수 있었다. 강한 힘이 파도가 밀려오듯이 다가왔다. 이때 압곡사에서도 3일 묵으셨다. 당시 토굴에서 친형인 범서스님과 내가 앉아 있었는데 관정 스님이 느닷없이 말씀하셨다.
“두 사람은 아라한 4과를 이룰 것입니다.”
지금까지도 나는 이 뜻을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좋은 예언을 해주신 것이라고 믿는다. 수행에 관해서는 형제간에도 이야기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범서 스님과도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다음해인 1998년 8월 압곡사 자해 스님이 아주 심하게 아팠다. 신도들이 좋은 보약을 지어다 주어 먹으면서 찬물을 많이 마셔서 배가 아프기 시작하였는데 견딜 수가 없을 정도로 고통이 심했다. 그래서 자해 스님이 중국에 전화를 해서 관정 대법사님에게 사정을 이야기 하고 한 번 와주시기를 간청하였다.
8월 15일 관정 대법사님은 한국 제자의 병을 낫게 해주기 위해 급히 김포공항으로 입국하여 바로 군위 압곡사로 왔다. 관정 대법사님께서 이렇게 직접 한국까지 오신 것을 보면 당시 자해 스님의 병이 단순한 뱃병이 아닌 것 같았다. 다음 날 압곡사 옆에 작은 비석이 하나 있는데 그 옆에 상을 차려놓고 몇 명이 참석하여 재를 지냈다. 관정 대법사님이 목탁을 치면서 능엄주를 염하기 시작하였는데 5분 정도 되니 갑자기 하늘에 구름이 덮이고 날씨가 흐려졌다. 보통 우리가 능엄주를 외면 1시간쯤 걸리는데 대법사님은 3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아주 빨리 외셨다. 그렇게 1시간쯤 의식을 하신 뒤 대중들에게 말씀하셨다.
“모두 하늘을 올려다보십시오.”
대법사님의 말씀대로 하늘을 올려다보는 순간 ‘꽈다당’하고 벽력같은 소리가 나더니 아름다운 무지개가 생겨 바로 우리가 재를 지냈던 상 위에 꽂혔다. 모두들 놀라서 말문을 열지 못 했다. 그 때 나는 관정 대법사님이 엄청난 도력과 신통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그 뒤 2~3일 지나자 그렇게 못 견디게 괴롭히던 자해 스님의 병이 씻은 듯이 나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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