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소녀를 가슴속 깊이 묻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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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병묵
선희의 소식이 궁금해서 황간에 사는 선희고모에게 안부를 물었습니다. 머뭇거리던 고모는 ‘선희가…’ 라며 말을 잇지 못하고 침묵이 흐르다가 ‘죽었어요’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나는 그만 정신을 잃고 우두커니 먼 산만 바라보았습니다.
지금으로부터 40여 년 전 황간 중학교에서 3학년 학년주임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 30대 후반인 나는 적극적으로 교육에 임했습니다. 3학년 400 여 명의 개인 신상문제를 모두 파악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그 해 2월에 우리 이웃에 사는 선희를 만났습니다. 교통사고로 가족을 모두 잃고 선희 자신과 남동생 단 둘이 세상에 남아 고모 댁에서 살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다른 고모 댁으로 가야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친척집을 전전하는 선희가 가여워 나는 “선희야! 내가 책임 질 테니 여기 황간 중학교에서 3학년 공부를 마치자”라고 제안 했더니 “고모님과 상의 해 볼게요”. 라는 것이었습니다.
어느 날 곰곰이 생각해보니 무엇을 어떻게 책임진다는 것인지 참으로 어이가 없었습니다. 선희와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백옥같이 흰 피부, 맑고 큰 두눈,순진하고 앙징맞은 새끼사슴 같은 선희였습니다. 수심에 가득한 핏기 없는 얼굴에서 어딘가 모르게 외롭고 쓸쓸해 보이며 자신감 없는 모습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습니다.
선희에게 현재 가장 필요한 게 무엇일까? 나의 중 3 때를 생각해 보기도 하고, 선희 친구들에게 선희에 관해 물어 보기도하였습니다. 그 당시 난 교육에 관한 철학도 신념도 부족했습니다, 그렇지만 선희를 잘 보살펴 주겠다는 생각은 절실했습니다. 그래서 용돈도 주고, 옷도 사주고, 책도 주면서 나름대로 선희 아버지가 되어 주려고 노력했습니다.
차츰 선희의 변하는 모습을 여기저기에서 종종 볼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퇴근하다가 보니 선희 혼자 철봉에 매달려 체력장 연습을 하는 것이 목격되었고 (남녀공학에서는 여자 혼자 체력장 연습을 하는 건 거의 볼 수 없는 일이며 남자 혼자 연습하는 것도 보지 못했습니다) 수심이 없어진 밝은 얼굴 모습도 보였습니다. 특히 성적도 많이 상승하여 수석권을 넘보게 되었습니다. 보잘 것 없는 나의 조그만 관심이 큰 변화를 불러 오는 것을 보며 속으로 무척 놀라곤 하였습니다. 사랑을 모르고 자라온 나로서는 삶의 의미를 찾게 된 선희를 보면서 참으로 보람을 느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내 평생에 처음으로 사랑의 의미를 찾은 첫 시작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하지도 못한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선희가 김천 성의여고를 수석으로 합격한 것입니다. 선희의 성적으로는 3∼5등은 몰라도 수석은 어려운 성적으로 생각되어 기적이라는 것입니다. 선희 성적보다 나은 학생도 본교에서 3명이 선희와 같은 학교에 입학시험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선희는 수석을 했고 내 평생에 처음 느끼는 희열이었습니다. 본교 역사에 처음으로 수석을 기록하는 영광이기도 하였습니다. 동네에서도 현수막이 붙었고, 마을 전체가 축제 분위기로 대단했습니다. 그동안 책임진다고 해놓고 무엇을 어떻게 책임질까 걱정했는데 이제는 수석합격이 모든 것을 해결해 줄 것이라는 희망이 나를 즐겁게 만들었습니다.
선희와 함께 성의여고 교장실을 노크했습니다. 교장선생님은 김 베다 수녀이면서 교장선생님으로 나보다 10 여 년 연상으로 보였습니다. 선희의 가정환경과 신상을 말씀드리고 장래를 부탁드렸더니 잠시 머뭇거리던 교장선생님은 “나는 선희를 맡아 줄 수 없습니다.” 라고 단호하게 거절하였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나는 무척 낙망하며 돌아왔습니다. 며칠 동안 고민을 거듭한 끝에 수녀교장선생님께 편지로 말씀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정성스럽고 진실되게 장문의 편지를 써서 교장선생님께 보냈습니다. 며칠 후 교장선생님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고 다시 교장실을 노크 하였습니다. 잠시 눈을 감으시고 계시던 김베다 교장선생님은 다정한 눈빛으로 나를 쳐다보면서 “조선생을 지난번 보내고 교장인 나는 무척 부끄러웠습니다. 보통 교사도 이렇게 제자를 위해 열심인데, 교장인 더구나 수녀인 내가 참으로 부끄러웠습니다. 선희를 수양딸로 삼아 독일 유학까지 시켜서 훌륭한 사람으로 만들겠습니다. 이제는 저한테 맡기시고 걱정하지 마세요.”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선희와 나는 교장선생님의 말씀에 벅찬 가슴을 안고 돌아왔습니다.
선희에 관한 모든 책임을 교장선생님께 넘기고 나니 말할 수 없이 기쁘고 홀가분한 심정이었습니다. 그리고는 책임을 다 했다는 한 가지 생각에 파묻혀 선희를 잊고 살아온 내 자신이 아쉽고 부끄러웠습니다. 집에 데려와 따뜻한 밥 한 끼도 못 나누고, 선물도 주지 못했고, 진로에 관한 얘기도 제대로 못했고, 예쁘고 사랑이 담긴 아버지의 마음으로 교복이라도 한 벌 해주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제와 보니 참으로 생각 없이 사는 부족한 사람이었습니다.
그 후 선희를 성의여고로 떠나보내고 많이 궁금했습니다. 선희와 난 편지 왕래나 전화를 주고 받았어야 했지만 한 번도 없었습니다. 선희는 평상시에 말이 적고 내성적이었습니다. 선희의 동정이 궁금해서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안부를 알아보곤 하였습니다. 교장선생님은 선희를 위하여 학교 정문 앞에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게 배려해 주었다는 소식도 들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는 연애에 빠져 수양어머니인 교장선생님의 눈 밖에 났으며 대구에 있는 사립 대를 졸업하고 늦게 결혼하여 아들 하나를 두었다는 소식을 주위사람들로부터 들을 수 있었습니다.
2010년에 고모로부터 선희의 소식을 듣고 정신 나간 사람처럼 저녁노을에 비친 선희를 그리워하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왜 선희를 찾아가 아버지가 되어 주지 못 했을까? 길을 잃고 헤매는 선희를 ‘잘 하겠지, 잘 하겠지’믿고 살아온 내가 한없이 원망스럽습니다.
‘차라리 처음부터 모르는 척 했다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갑니다.
‘사람은 만들어지는 것이다.’ 라는 신념을 저버린 실수야말로 씻기 어려운 회한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내 평생에 한 소녀를 가슴 속에 깊이 묻고 살면서 우연히 선희의 핏줄을 만나면 어떻게 컸는지… 보고 싶은 생각을 하며 살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