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동리 신재효 고택 고창읍성 바로 앞에 있다. 그 본 모습을 알 도리 없는 연기파 배우를 닮았다. 해남-강진, 안동-봉화, 함양-산청, 예산-내포, 영월-정선 등 각 지역마다 여행자가 좋아하는 곳 중의 하나이다. 대학시절 기차를 타고 처음 떠났던 여행이 변산반도 여행이었다. # 신재효 고택 마당에 핀 모과꽃 여행 초기에는 자유롭게 다니다 디카를 사고 난 후 여행의 패턴이 바뀌었다. 앵글에 담으려는 노력은 가상했으나, 점차 카메라에 매몰되는 여행에 실증을 느끼기도 하였다. 하여 그후 몇 년 동안 카메라를 버리고 다시 길 위로 나섰다. # 개암사 절마당 가는 길 " 시내 위에 정자 짓고/정자 곁에 포도시렁/포도 곁에 연못이어라......"고 풍류와 멋을 지닌 자신의 집을 동리는 이?게 묘사하였다. 신재효는 이 집을 1850년에 지어 판소리 여섯마당을 정리하고 수 많은 명창들을 길러 내었다. 지금은 사랑채만이 남아 있어 조금은 쓸쓸하나 멋이 있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다. # 개암사의 숲 길에는 냇돌이 박혀 있고 우람한 고목과 들꽃들이 길지도 않은 이 길을 황홀하게 만든다. 울금바위를 병풍 삼아 고즈넉히 앉아 있는 개암사, 변한의 왕궁터이면서 백제인들의 끈질긴 부흥운동이 전개되던 곳이었다. # 구암리 고인돌군 원래 민가 울타리 안에 12여 기가 있었다. 근래에 들어 정비를 하였다. 고인돌의 모습이 거북이 같아 마을 이름도 아예 '거북바위마을' 구암마을이다. 민가와 잘 어울려 죽음과 삶이 함께 하는 평온한 공간이다. "이화우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임
추풍 낙엽에 저도 날 생각는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도다" 아전의 서녀로 태어나 시와 글, 노래 거문고 솜씨가 뛰어났다. 얼 굴이 예쁘고 아름답지는 않았으나 성품이 그윽하고 교양미가 있었던 여인이었다. 허균과는 평생 지기로 알고 지냈으며,
그가 사랑했던 유일한 사람은 천민출신의 유희경이었다. # 구암리 고인돌에 핀 명자꽃 고려 때만 하여도 이곳의 숲이 좋아 궁궐과 배를 짓는 목재를 내가기도 하였다. 높지는 않아도 기암절벽과 깊은 계곡, 내소사, 월명암, 직소폭포의 선경들로 인해 어디에 내놓아도 손색없는 곳이 이곳 변산이다. # 실상사 직소폭포 가는 길 초입에 있다. 효령대군이 필생의 대업으로 이루었다는 법화경 이백 여 장과 더불어 국보급이 산재하였다고 하나 한국전쟁 때 사찰이 고스란히 소실되어 옛 자취를 찾을 길 없다. 근래 세운 전각들만 휑하니 서 있다. # 봉래구곡에서 봄맞이 하는 개구리들 연두빛의 잎들과 피어날 듯 지기 시작한 벚꽃, 갖은 야생화들, 진달래가 계곡에 피어 있는 샘나는 길이다. 옛 사람 누군가가 너럭바위에 새겨 놓은 '봉래구곡'의 글발이 선명하다. # 직소폭포 가는 길 # 산정호수 호수 옆 산길을 보라. # 분옥담 # 직소폭포
# 내소사의 봄
월명암 건너편 산자락에 앉은 내소사는 내변산의 관문이다. 내소사는 백제 무왕때 세워진 고찰. 원래 이름은 소래사라고 한다.
소정방이 이 절에 머물며 이름이 바뀌었다는 얘기도 내려오지만
미당 서정주가 쓴 내소(來蘇)란 이름에 얽힌 얘기가 더 그럴싸하다. 대웅전 단청작업을 할 때 일을 끝마치기 전에는 문을 열지 말라고 했으나
방정맞은 중이 창구멍으로 들여다보았다. 붓을 잡고 단청을 하던 새가 쓰러지며
단청작업은 내생(來生)이나 소생(蘇生)에 하라고 해서 내소란 이름이 나왔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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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김천령의 바람흔적 원문보기 글쓴이: 김천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