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1년 김 원장은 군복무를 마치고 고려대 혜화병원 인턴으로 복귀했고
1년 뒤 창의성을 발휘할 수 있는 성형외과 자리가 있다는 소리에 주저하지 않고 전공의에 지원했다.
이때부터 그의 삶은 급격히 바뀌었다.
전공의 1년차 때 손가락접합수술은 정형외과와 성형외과 중 먼저 환자를 응급 조치하는 쪽에서 담당했는데,
환자가 오면 응급실 지킴이였던 김 원장이 누구보다 먼저 달려갔다.
응급실에서는 손가락접합수술 환자의 응급조치가 필요하면 무조건 “김우경 선생”부터 불렀다.
갑자기 고려대 혜화병원 성형외과에는 손 외상 환자를 비롯해서 환자가 2, 3배 늘어났다.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여, 최고의 의사가 될 수 있었다

1983년 고려대 구로병원이 문을 열면서 전공의로서 파견을 갔다.
그곳에는 백세민, 김수신 등 쟁쟁한 대가가 있었지만 전공의는 혼자였다.
혼자서 두 명의 교수를 모시며 매일 수술방을 들락거렸다.
새벽까지 수술이 끝나도 곧장 환자 차트와 기록을 정리해서 회진 준비를 했기 때문에
밤을 홀라당 샌 날이 부지기수였으며 2~3시간 이상 잔 적이 없었다.
이처럼 몸을 바쳐 일했기 때문에 전문의 시험에 합격하자마자 곧바로 교수 발령을 받았다.
하지만 말이 교수였지 1년 동안은 전공의와 똑같이 백세민 교수의 수술 보조자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수술을 꾸준히 진행하며 밤을 꼬박 새우기 일쑤였다.
수하의 전공의들 중에 쓰러지지 않은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고, 24시간 수술방을 가동시켜 마취과 의사들이 지긋지긋해했다.
그러던 중 예기치 않은 상황이 발생했다.
1988년 스승 백세민 교수가 서울 백병원에 스카우트돼 갔고 이듬해에는 김수신 교수마저 따라 간 것.
의료계에서는 “고려대 구로병원 성형외과는 이제 끝났다”는 말이 공공연히 흘러나왔다.
그러나 김 원장은 혈혈단신으로 병원을 더 키웠다.
1990년 미국 하버드대 매사추세츠 종합병원으로 우리나라 성형외과 의사 중 처음 연수를 갔다.
그곳에서도 여유 있게 지낼 수도 있었지만 손수술의 대가였던 제임스 메이 교수와
뼈 재생 및 이식의 이론가였던 마이클 야렘처크 교수 밑에서 밤낮없이 연구에 몰두했다.
재미교포 의사들이 골프 클럽까지 사줬지만 집 앞 바로 3분 거리에 있는 골프장에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국제학술지 ‘악안면’ 지에 논문을 발표하고 귀국했다.
손접합 수술의 교과서를 새로 쓰게 한 주인공
 |
첫댓글 좋은 자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