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령 나태주 스테디셀러 두 작가와 만난 가을
권 현 수 (시인)
서점에 들러 책향기를 맡으며 기대에 차서 새로 나온 책들을 훑어보곤 하던 때가 언제인지 모르겠다. 요즘은 인터넷으로 검색하고 주문하고 택배로 책을 받곤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달 전 동네 지하철 역 근방에 대형 서점 하나가 들어섰다. 반가운 마음에 오며가며 가끔 들러보고 베스트셀러나 신간서적들을 기웃거려보곤 한다. 시내의 대형서점에는 진열대가 있는 시집코너가 없어진지 오래인데 그대로 운영되고 있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최근에는 지난 2월 영면하신 이어령님의 서적들이 7권이나 에세이코너를 장식하고 있는데 나태주 시인의 새로 출간된 책들은 8,9권이나 변함없이 진열대를 차지하고 있다. 서점이 처음 문을 열었던 지난봄에는 시집코너에 진열된 12권의 책들 중 9권이 나시인의 책이었다. 시집, 시선집, 공동시집, 산문집, 동시집등이 여러 출판사의 다양한 편집형태로 선보이고 있었다. 최근 2,3년간 55권이나 되는 책을 새로 상재하였다니 당연하다 하겠으나 197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하여 시력 반세기를 헤아리는 동안 150여권의 책을 출간한 대시인이니 명실상부한 ‘국민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임이 분명하다.
지난 10월 1일 이어령님의 영인 문학관에서 “2022 작가와의 만남”의 일환으로 ‘청춘을 위로하는 희수의 시인 나태주시인’을 초청하면서 두 작가를 함께 만날 수 있는 특별한 기회가 주어졌다.
오랜 불황기를 겪고 있는 서점가를 독점하고 있는 두 작가를 잠깐 견주어 생각해 보면 크게 대비되는 면이 있다. 이어령님은 약관 20세에 대학생 신분으로 “우상의 파괴”를 주장하면서 1963년 “흙속에 저 바람 속에”를 상재하여 문단의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러면서 높은 지성과 날카로운 필력으로 90여권의 저술을 통하여 “깨어있는 영혼과 맑은 정신, 높은 문화의식으로 이 시대의 지성을 대표하는 선생”이라는 칭송을 듣는 반면에 나태주시인은 스스로 “70세가 넘어서야 그동안 쓴 시에 대한 대중들의 응답을 받은 것 같다”고 솔직하게 술회하고 있다. 특히 이념적 갈등이 극심하고 시적 담론이 들끓던 시절에는 나시인의 시에 “사회성이 없다” “시대정신이 부족하다”고 일부 평론가들의 비판이 있기도 하였다. 그런데 지금, 정신없이 변하는 시대의 큰 흐름을 타고 희수를 넘긴 나이 많은 시인으로서 20,30세대 젊은이들이 가장 많이 찾는 시인으로 등극하게 된 것이다. 쉽고 짧고 밝고 희망적이고 긍정적인 정통의 서정시를 통하여 “거대담론 상층담론이 아닌 생활담론 미의 담론으로 이념이나 유행이 아니고 취향으로 살아가는 젊은이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영인 문학관은 지난 2월 26일 영면하신 이어령님의 삶의 흔적이 부인인 강인숙교수의 정성어린 운영으로 생생하게 보존되어있는 잘 알려진 문학관이다. 두 부부가 1960
년대부터 수집하기 시작했다는 문인초상화, 문인서화, 육필원고, 편지, 삽화등 예술성 짙은 희귀한 자료들을 많이 소장하고 있다.
어렵게 참가 회원 자격을 얻어 우리 문학사의 전설적인 두 작가와 만날 수 있었던 가을날은 맑고 청명하여 날씨마저 나를 반겨주는 것 같았다. 문학관에서는 문인들 그리고 예술가들의 미공개 편지글 100편을 전시하는 기획전이 열리고 있었는데 여전히 밝고 세련된 분위기로 예약된 회원들을 맞이하고 있었다.
나시인은 눈에 익은 커다란 백팩을 메고 베레모를 쓴 소탈한 모습으로 천진한 미소와 함께 나타나셨다.
“시가 나를 살렸다. 오직 시에 대한 꿈 하나로 염소와 노을과 풀꽃을 읊으며 살아왔다”는 시인은 1년에 100~150회 정도의 초청강연을 소화해 내면서 말 잘하고 ‘산문 잘 쓰는 시인’으로서의 면모를 자랑하기도 한다. 지상파 TV에 출연해서는 BTS의 노랫말이 ‘사랑’을 노래하는 나와 똑 같다면서 제이홉에게 한번 만나자고 화면에다 대고 큰소리로 전화번호를 일러주기도 하고, 수십 년 살아온 시골집이 8천만 원짜리라고 거리낌 없이 밝히기도 하는 친근함이 그대로 드러나는 모습이었다.
시인은 영인문학관을 많이 의식한 듯, 이어령님과의 인연을 서두로 이웃집 할아버지같은 푸근한 어조의 능숙한 화술로 2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듣는 이들을 매료시켰다. 특히 이어령님의 10년 전에 세상을 떠난 이민아(1959~2012) 목사에 대한 애뜻한 따님 사랑을 회고하였는데 시인의 따님인 나민애교수를 함께 떠올리면서 딸을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깊은 가족애를 드러내 보였다. 나민애교수는 따님이라 자랑을 아끼셨지만 서울대학교 기초교양학부 글쓰기 강의 명교수로 소문이 났다고 한다. 그 아버지에 그 따님인 셈이다. 두 작가 모두 내 몸만큼 사랑했던 따님들을 두셨으니 따뜻한 가족의 뒷받침으로 그 많은 글을 쓰고 시를 쓰고 급변하는 한국사회의 탁류를 성공적으로 헤쳐 나올 수 있었다는 것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또한 시인은 관장으로 있는 공주의 풀꽃 문학관에 “이어령코너”를 다시 만들어 6-70권의 저서를 전시하기 시작하였으니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지구도 함께 흔들린다”는 1963년 출판된 이래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꾸준히 팔리고 있는 이어령님의 전설적인 밀리언셀러 “흙속에 저 바람 속에”를 인용하면서 “흙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비밀이 있고 우리의 마음이 있다”고 이작가와의 만남과 인연을 회고하고 추모하였다.
그리고 두 편의 추모시를 썼다면서 그 중에 한 편을 직접 낭독해 주셨는데 그 마음이 곧 내 마음인 것 같아 함께 숙연해 지기도 하였다.
아뢰는 글
나태주
선생님은 어떠한 인생이 아름다운 인생인가를 몸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은 문인의 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글로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은 인간의 영혼이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마음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선생님 비록 몸을 두고 인간의 본향인 하늘나라로 가시었지만 영원히 죽지 않는
목숨이 되었습니다.
인간은 육신으로서 사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으로도 살고 글로도 살고 끝내 영혼으로 더욱 살기 때문입니다.
우리 한국에 진정한 문호가 있다면 이어령 선생 그 이름입니다.
저는 선생님의 책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로 글을 좋아하기 시작한 사람입니다.
선생님 세상 뜨셨을 때 제가 얼마나 충격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예견된 일이긴 했습니다만 하늘의 별 하나가 산산이 부서졌구나,
그런 충격이었습니다.
몸으로 부서지고 마음으로 부서지고 영혼으로 부서지고 글로 더 많이 부서져
선생님은 더 많은 이어령이 되었습니다.
아, 나도 이제는 늙어가는 인간
저분처럼 살다 가리라
저 어른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째깍쨰깍 맑은 영혼을 깨워 글을 쓰다 가리라
선생님은 이 땅의 모든 글쓰는 이들의 본이 되셨습니다.
아닙니다. 글쓰는 모든 이들 마음의 하늘에 뜨는 별이 되시었습니다.
진정한 지지와 찬사는 멀리 있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
나아가 반대방향에서 길항으로 버팅기며 사는 사람으로부터 오는 것
적으로부터 받는 찬사와 경이와 굴복
선생님은 바로 그런 일들은 이루어 내셨습니다.
선생님으로부터 받은 애통과 존경과 특별한
인간 신뢰와 위안은
김수환 추기경 서거 이후로 두 번째인 것!
이러한 애통과 신뢰와 끝끝내 소망을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잠시는 못뵙겠지만 차후 다시 뵙는 날 더욱 자세히 아뢰겠나이다.
시인은 묘비명으로 “많이 보고 싶겠지만 조금만 참자”라고 정해 두었다지만 이선생님 만큼만 더 살고 “다시 뵙는 날 더욱 자세히 아뢰겠나이다”라고 하신다.
특강이 끝난 다음에는 기다리는 회원들에게 기꺼이 사인을 해 주는데 사인을 받는 책의 바탕색에 맞추어 검정색과 흰색의 붓펜을 번갈아 사용하며 정성을 다해 몇 줄의 인사말도 함께 써 주는 자상함을 잊지 않으셨다. 전원일기의 큰며느리로 유명한 고두심님도 화장기 없는 깨끗한 얼굴을 하고 줄을 서서 기다리며 “시인을 너무 좋아한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스테디셀러 두 작가, 천재님들.
문지생 시절, 이어령 교수님의 대중강연을 찾아다니며 열심히 들었고, 1980년대 대학원 학생일 때는 강인숙 교수님의 연구실에서 “문학의 시대는 갔다”라며 비판을 서슴치 않는 교수님의 명강의를 들었으며, 2003년 불교문예에서 늦깎이 시인으로 등단할 때는 바로 심사를 해주기도 한 은사이신 나태주 시인을 함께 만날 수 있었던 나의 가을 나들이는 그래서 더욱 큰 축복이 되었다. 코로나도 이제 꼬리를 감추기 시작하는 아름다운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