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산유곡(深山幽谷), 계곡이 깊어 배 밑 바닥 같다고 하여 '배론'이라 불린다.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 2리, 백운산(해발 1,087미터)과 구학산(해발 985미터) 연봉 사이로 십여리를 들어간 곳에는 계곡만큼이나 깊은 신앙의 터가 펼쳐진다.
한국의 카타콤바라 할 만큼 풍성한 신앙의 유산을 지닌 배론은 우선 그 경관이 수려하다. 배론 입구에 위치한, 경치 좋기로 유명한 원주 - 제천 간의 탁사정(濯사亭)은 배론이 자랑하는 절경 가운데 하나이다.
하지만 수려한 자연도 배론이 안고 있는 신앙의 유산에 견준다면 그 빛을 잃는다. 배론의 옹기 토굴에서는 명주 자락에 1만 3천 3백 11자로 울분과 신심을 기록한 '황사영 백서'가 쓰여졌고, 바로 옆의 초가에서는 이 땅 최초의 서구식 대학인 신학당이 섰으며, 김대건 신부에 이어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 신부였던 최양업 신부가 이곳 배론에 묻혀 있는 것이다.
한 가지만으로도 가히 현양의 가치가 충분한 신앙 유산들이 몰려 있는 배론이야말로 최적의 순례지로 추천할 만하다. 더욱이 사통팔달(四通八達)로 편리한 교통과 피정센터를 비롯한 쾌적한 편의 시설들은 순례를 위해 '엄숙한 마음가짐' 외에는 다른 준비물이 필요 없을 정도이다.
그 옛날 교우들은 박해를 피해 산으로 계곡으로 깊이 숨어들어야 했다. 그들 중 일부가 모여들어 교우촌을 이룬 곳이 바로 배론이다. 졸지에 재산과 집을 잃고 가족과 생이별을 한 교우들이 깊은 산 속에서 가장 손쉽게 할 수 있는 것이 옹기 굽는 일이었다.
옹기구이는 생계를 유지하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감시의 눈을 피해 토굴 속에서 신앙을 지키는 데 안성맞춤이기도 했다. 또 구워 낸 옹기를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나서면 아무 집이나 허물없이 드나들 수 있어 잃은 가족을 수소문하거나 교회 소식을 전하는 데에도 편리했다.
사람의 눈을 피해 신앙을 지켜 가던 옹기 마을에 최초로 역사적 사건이 터진 것이 바로 황사영 백서 사건이다. 창원(昌原) 황씨 성을 가진 사영은 나이 16세에 장원급제, 정조가 친히 등용을 약조할 만큼 앞길이 창창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정약종으로부터 천주학을 전해 듣고는 알렉시오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벼슬길을 마다하고 고난의 길을 택한 그는 1801년 신유박해가 터짐과 동시에 서울을 빠져 나와 배론으로 숨어든다.
그 해 8월 주 신부의 처형 소식을 들은 그는 낙심과 의분으로 북경 구베아 주교에게 보내는 탄원서를 적는다. 하지만 백서를 품고 가던 황심이 붙잡히고 황사영도 대역무도 죄인으로 능지 처참의 극형에 처해진다. 이 때가 그의 나이 27세. 이 사건으로 그의 홀어머니는 거제도로, 부인은 제주도로, 외아들 경헌은 추자도로 각각 유배되고 십수 명이 공범으로 처단된다.
백서의 원본은 근 1백여 년 동안 의금부 창고 속에 숨겨져 있다가 1894년에야 비로소 빛을 본다. 뮈텔 주교는 1925년 한국 순교자 79위 시복식 때 이를 교황 비오 11세에게 봉정했고, 현재 백서는 바티칸 박물관 내 선교민속 박물관에 소장 · 전시되어 있다.
배론의 두 번째 신앙 유산은 1855년 설립된 최초의 신학교이다. 깊은 산골 장주기의 집에 세워진 신학당에는 학생 열 명에 두 신부가 있었다. 그로부터 11년 후 1866년 병인박해로 인해 배론에서도 집주인이었던 장주기와 두 선교사 신부가 잡혀가 형장의 이슬이 됐다. 그리고 목자 잃은 양 떼처럼 신학당 역시 폐쇄되고 만다. 신학당은 1978년 복원된 후 2001년 3월 2일 배론 성지 일대가 충청북도 기념물 제118호로 지정된 후 2003년 재복원되었다.
배론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귀중한 유산은 최양업 신부의 묘소이다. 한국 최초의 방인 신부인 김대건 신부보다 4년 늦게 사제품을 받고 12년간 조국에서 사목 활동을 하던 최 신부는 피로와 무리한 활동에 지쳐 쓰러져 이곳 배론의 신학당 뒷산에 묻힌 것이다. 혹자는 김대건 신부를 '피의 순교자'라 부르고 최양업 신부를 '땀의 순교자'라고 일컬을 만큼 최 신부의 업적에 대한 높은 평가가 새롭게 이루어지고 있다.
배론 성지는 1999년 최양업 신부 서품 150주년을 기념하고 시복 시성을 기원하기 위해 '최양업 신부 기념성당'을 건립하였는데, 그 모양이 마치 노아의 방주를 연상케 한다. 또한 대성당과 소성당 두 동으로 건립된 기념성당은 성지 주변 골짜기가 배 밑바닥처럼 생겼다 하여 '배론'이라 불려온 지명과 어울리도록 배 모양으로 만들어졌다.
2002년 10월에는 성지 초입에 순례자들의 집을 봉헌하여 성지를 찾는 신자들의 식당과 교육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2004년 11월에는 대성당 뒤편에 땀의 순교자인 최양업 신부의 거룩한 삶의 여정을 한 눈에 보고 묵상함과 동시에 산 이와 죽은 이가 한 자리에서 만나 기도할 수 있는 '최양업 신부 조각공원'을 조성해 봉헌하였다. 조각공원 내에는 고 탁희성 화백의 작품을 오석에 새긴 30개의 조각 작품으로 최양업 신부의 일대기를 담고 있고, 그 내부는 납골 봉안소로 사용하고 있다.
2005년 7월 건축된 지 30여 년이 지난 순교자들의 집을 새단장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이곳에서는 최대 100명까지 단체로 피정을 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고 있다. 그 해 9월에는 황사영 순교 현양탑 앞에 황사영 알렉시오 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2010년 9월에는 신자들에게 문화와 영성을 교육하고 교구 교회사와 영성을 기록 · 보관 · 연구함으로써 교회와 지역사회 문화 발전에 기틀이 될 '문화영성연구소'를 설립하여 축복식을 가졌다.
수려한 자연, 풍부한 신앙 유산 그리고 편리한 교통과 시설로 배론은 최적의 성지 순례 여건을 갖추고 있어 한 번쯤 온 가족이 함께 찾아볼 만한 곳이다.
또 한 가지 기억할 만한 것으로, 원주에서 제천 쪽으로 가는 길에 있는 용소막 성당은 배론 순례길에 반드시 들러 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용소막 성당에는 성서학자인 고(故) 선종완 신부 기념 유물관이 있고 여기에는 선 신부의 유품뿐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성서와 자료들이 풍성해 한 번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유익할 것이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
배론과 황사영의 백서
충북 제천군 봉양면 구학리의 백운산(白雲山)과 구학산(九鶴山) 줄기에 둘러싸인 벽촌. 이제 신자들에게 익숙해진 '배론(舟論) 성지'가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배론이란 명칭은 이곳 골짜기의 형상이 배 바닥처럼 깊고 길게 뻗어 있다는 데서 붙여졌다.
옛날 이 부근에는 아랫배론, 중땀배론, 윗배론, 점촌배론, 박달나무골, 미륵재 등 6개 동리가 자리잡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교우촌이 있던 곳은 바로 점촌배론이었다. 이 점촌배론의 본래 이름은 '팔송정의 도점촌(陶店村)'으로, 1791년 신해박해 이후 충청도 남부에서 피신해 온 신자들이 옹기점을 운영하여 생계를 유지하면서 부르게 된 이름이었다. 그후 박해가 끝나고 다시 이곳에 돌아온 신자들은 1890년대에 와서 '사학(邪學)쟁이들의 옹기점'이라는 기억 때문에 전교 활동에 지장을 받을까 염려하여 마을 이름을 바꾸어 주도록 관계 당국에 요청하였고, 이 요청이 받아들여져 '구학리 배론'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으로 가는 길은 두 갈래가 있다. 원주에서 가자면 동쪽으로 치악산 줄기의 끝자락에 연결되어 있는 가라피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 왼편에는 중앙선의 유명한 또아리굴이 있다. 또 남쪽으로 가자면 온갖 설화로 얽혀 있는 박달재를 넘어야 한다. 바로 이 두 고개처럼 배론 성지는 한국 천주교회사와 관련하여 길고 긴 고난의 여정을 넘나든 곳이었다.
배론 사적지가 갖고 있는 특징은, 첫째 그 복음사가 한국 천주교회와 함께 오랫동안 지속되어 오고 있는 점이고, 둘째 다른 사적지와는 달리 여러 사적과 복음사의 애환들을 함께 간직해 온 곳이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가장 일찍 교우촌이 형성된 곳이요, 유명한 황사영(알렉시오)의 "백서"(帛書)가 탄생한 곳이며, 한국 최초의 신학교인 '성 요셉 신학교'가 자리잡았던 곳이다. 또 최양업 신부의 시신이 안장되어 있는 곳이고, 1866년의 병인박해 때 여러 순교자들과 성인들의 순교사가 시작된 요람지이기도 하다.
배론 교우촌에 대한 기록은 1801년의 신유박해 때부터 나타난다. 이 박해로 많은 교우들이 체포되고 유일한 목자 주문모(야고보) 신부가 순교하는 것을 본 황사영은, 그 해 2월 말에 서울을 떠나 경상도와 강원도를 거쳐 이곳으로 숨어들게 되었다. 그때 이곳에서 옹기점을 운영하고 있던 교우 김귀동이 그를 받아들여 옹기점 뒤에 토굴을 파고 그의 은신처를 마련해 주었다. 현재 배론에 조성되어 있는 토굴은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최근에 다시 조성한 것이다.
황사영은 이후 토굴에 은거하여 자신이 겪은 사실들과 김한빈(베드로), 황심(토마스) 등이 알아 오는 박해 내용들을 세명주에 적어 나갔다. 이것이 '명주에 담은 신심', 곧 "백서"로, 122행, 13,384자에 달하는 장문의 서한 형태의 글이다. 그 내용은, 박해의 원인과 "백서"의 작성 이유를 기록한 첫 부분, 신유박해의 전말과 순교자들의 행적을 기록한 둘째 부분, 교회의 재건과 신앙의 자유를 얻기 위한 방법을 제시한 셋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황사영은 이 서한을 북경의 구베아(Gouvea, 湯士選) 주교에게 전달한 계획이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는 달리 결정되고 말았다. 북경 주교는 조선 교회의 소식을 듣기 위해 간절하게 밀사들을 기다렸지만 하루하루가 헛수고였다. "백서"를 북경 주교에게 전달할 책임을 맡은 밀사 옥천희(요한)과 황심이 9월에 체포되었고, 얼마 뒤에는 황사영도 배론에서 체포되고 만 것이다. 오히려 "백서"는 박해자들의 손으로 넘어갔고, 그렇게도 신앙의 자유를 고대하던 황사영은 1801년 11월 5일(음력) 서소문 밖에서 능지처참 형을 받고 순교자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만일 할 수만 있다면, 병선 수백 척에 정병(精兵) 5-6만, 대포 등 날카롭고 강한 병기를 많이 싣고, 겸하여 글을 잘하고 사리에 밝은 중국 선비 3-4명을 데리고 오십시오. 그리고 이 나라의 해안에 정박하여 국왕에게 글을 보내 선교를 용인하고 우호 조약을 체결하도록 요구하십시오. 그리고 국왕에게 '한 사람의 선교사를 받아들여 온 나라가 화를 입지 않도록 하라.'고 요청하십시오(황사영의 "백서", 110-111행 중에서).
이처럼 황사영은 무력을 통한 선교의 자유를 갈망하면서도 우호 조약 체결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신앙이냐? 모반이나?'의 갈림길에서 방황해야만 했던 조선의 신앙인이요 지식인으로서의 고뇌였다. 그러나 이러한 고뇌도 민족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결코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으며, 비록 전근대적인 민족의식에서 본다고 할지라도 결코 수긍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훗날 다블뤼(Daveluy, 安敦伊) 주교가 '하느님의 종'을 선택하면서 황사영을 제외시킨 것도 이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그의 신심과 순교 자체까지 부정할 수는 없을 것이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7월호]
배론 신학교와 순교의 요람지
백서 사건이 있은 후에도 배론 교우촌은 신분을 속이면서 신앙을 지킨 신자들 때문에 계속 유지되어 나갈 수 있었다. 그러다가 1855년 무렵부터 다시 기지개를 켜기 시작하였으니, 바로 그 해 이곳 교우촌에 '성 요셉 신학교'가 설립되었기 때문이다.
당신 조선교구의 장상 역할을 하고 있던 파리 외방 전교회의 매스트르(Maistre, 李) 신부는 신학교 설립을 결정한 뒤 배론의 회장인 장주기(요셉)가 제공한 세 칸짜리 초가집에 학생들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초라하기 이를 데 없었다. 처음의 학생수는 6명에 불과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으며, 방 하나를 교실 겸 숙소로, 다른 방 하나를 신부의 거처로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열악한 환경이었다.
감옥, 즉 신학교 역할을 하는 오두막집에 8년 간 갇혀 있었기 때문에 내 건강이 완전히 악화되었습니다. 그러나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학생들과 나는 방 두 개밖에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이 두 방이 형편없이 잘 닫히지 않는 칸막이로 나누어져 있어서 공기와 발산하는 냄새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조금도 어렵지 않게 침투합니다. 이번 겨울에 나는 발진티푸스에 걸렸었는데 학생들에게 옮겨 주어서 차례차례로 앓고 있습니다(푸르티에 신부의 1865년 11월 20일자 서한 중에서).
게다가 주변에는 언제나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므로 학교 옆으로 지나가는 외교인이 들을까봐 소리를 내서 글을 읽을 수조차 없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조선의 선교사들은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해 신학교를 존속시키고자 했으며, 1856년에 교장으로 임명된 푸르티에(Pourthie, 申) 신부와 교사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는 아주 열성적으로 신학생들을 가르쳤다.
배론 신학교는 이후 꾸준히 발전하였다. 신학생 중에서는 임 빈첸시오가 1864년에 소품을 받았고, 이 바울리노가 삭발례를 받았으니, 더 있었으면 이 땅에서 사제가 탄생하는 기쁨을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실을 얼을 수는 없었다. 1866년에 시작된 병인박해의 회오리가 이곳에도 몰아쳤기 때문이다. 이때 푸르티에 신부는 배론이 궁벽한 곳이었으므로 당장에 포졸들이 쳐들어오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게다가 그는 각혈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도피할 형편도 아니었다.
3월 2일, 포도청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푸르티에 교장 신부와 프티니콜라 신부를 체포하였다. 그러면서 신학교도 자연히 폐쇄되고 말았다. 다음날 아침, 포졸들은 체포한 이들을 앞세우고 서울로 떠났다. 보통 배론에서 서울까지는 3일이 걸리는데 극도로 쇠약해진 푸르티에 신부가 있었기 때문에 더 많은 날이 걸렸다. 두 신부는 서울에 온 지 하루 만에 군문효수형을 언도받고 3월 11일에는 새남터로 끌려 나가 순교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안타깝게도 훗날의 시복 과정에서 모두 제외되고 말았다. 끝가지 신앙을 증거한 사실이나 순교 의지를 표명한 점이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편 장주기 회장은 신부들이 체포되어 간 뒤 이웃 마을에서 체포되었고, 이내 서울로 압송되어 군문효수형을 선고받았다. 그런 다음 자신이 원하던 대로 다블뤼 주교 등과 함께 충청도 갈매못(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의 고마수영)으로 옮겨져 1866년 3월 30일에 순교하는 영광을 얻게 되었다. 이로써 배론은 또 다른 의의를 갖게 되었으니, 신학 교육의 요람지가 순교자들의 요람지로 변하게 된 것이다. 특히 장주기 회장이 훗날 성인품에 오름으로써 배론 순교사의 의미는 더욱 빛을 내게 되었다.
박해의 물결이 지나간 뒤에도 배론 교우촌은 꾸준히 그 복음의 터전을 유지하였다. 또 박해 때 피신했던 신자들이 다시 모여들면서 공소로 설정되었고, 1920년대에는 공소 강당이 건립되었다. 당시 이곳은 가구수는 65호, 총 신자수는 100여 명이었다. 그리고 이제, 배론 성지는 순례의 명소가 되어 우리 후손들에게 선조들의 신심과 성인의 가르침, 그 안에 담긴 애환들을 전해 주게 되었다. [출처 : 차기진, 사목, 1999년 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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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장주기(張周基) 요셉(1803-1866년)
성 장주기 요셉(Josephus)은 경기도 수원 땅의 어느 부유한 외교인 집안에 태어났다. 한문에 유식했던 그는 열심한 자기 형수로부터 천주교 도리를 배워 23세에 영세 입교하게 되었는데, 그때 온 가족이 모두 입교하였다. 그는 학식이 있고 슬기로웠으며 신심이 두터웠기 때문에, 모방(Manbant, 羅) 신부가 입국하자마자 그를 회장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20년 동안이나 회장의 임무를 성실히 수행하였다. 그는 거듭된 박해로 네 번씩이나 산속으로 피신해야 했으며, 살아남은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위로하고 격려해주며 신앙을 굳세게 지켜나갔다.
1845년경에 그는 친척들의 성화와 박해를 이기지 못해 제천 땅 배론 골짜기로 옮겨가 살았다.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그곳에 신학교를 세우게 되자 그는 자기 집을 신학교로 서슴지 않고 제공하였으며, 앞장서서 신학생들의 뒷바라지까지 하였고, 신학교 관리직까지 맡아보았다. 장 요셉과 부인은 합심하여 농사를 지어 신학교에 바쳤고, 자신들은 청빈과 봉사로써 11년간이나 신학교 실림을 잘 이끌어 갔다.
1866년 3월 1일 갑자기 포졸들이 배론 골짜기에 들이닥쳐 신부들과 함께 그 역시 체포되었으나, 장 회장의 공을 잘 알고 있는 푸르티에(Pourthie, 申妖案) 신부가 관헌하게 돈을 주며 그를 석방시켜 달라고 해서 하는 수 없이 그는 울면서 배론 신학교로 돌아왔다. 그 후 5일이 지나 식량을 장만하려고 노루골에 사는 한 신자 집에 갔다가 다시 포졸들이 그를 덮쳐서 제천 관장에게로 데려갔다. 제천 관장은 장 요셉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서울에 품신하였다. 서울에서는 “그 사람이 정말 서양인 신부들의 집주인이면 서울로 올려 보내고, 그렇지 않으면 배교하게 하여 집으로 돌려보내라”는 대답을 보냈다. 관장이 그에게 질문을 하자, 그는 자기 신앙을 고백하고 서양인 신부의 집주인은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자기라고 서슴없이 말하였다.
그는 결박을 당하지도 않은 채 짚으로 만든 가마를 타고 역적모의를 한 죄수에게 씌우는 홍포를 쓴 채 서울로 향하였는데 지나가는 길목마다 구경꾼들이 몰려들었다. 그러나 죽으러 가는 그의 얼굴에 사색이 감돌기는커녕 기쁨이 넘쳐흘러 보는 사람들은 알 수 없는 일이라 하며 수군거렸다고 한다. 그러다가 1866년 3월 24일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집행 날을 기다렸다. 그때 나라에서는 왕비가 해산할 달이었으므로 서울에서 죄인의 피를 뿌린다는 것은 불길하다 하여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보령 갈매못에서 처형하라는 분부가 내려졌다. 이에 그는 1866년 3월 30일에 보령 갈매못에서 참수되었다. 이때 그의 나이는 64세였다. 그는 1968년 10월 6일 교황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한국 천주교회 창설 200주년을 기해 방한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시성되었다. [출처 : 가톨릭 성인사전]
메스트르(Joseph Ambroise Maistre) 신부(1808-1857년)
한국성 이(李). 조선교구 선교사. 안느시(Annecy) 교구의 앙트르몽(Entremont)에서 태어나 1832년에 신부가 된 후 7년 동안 교구사제로서 활약하다가 1839년 이교인에게 복음을 전할 뜻을 품고 파리 외방전교회에 들어갔다.
1840년 1월 15일 프랑스를 떠나 우선 마카오로 향하였다. 마카오의 경리부장이 그의 임지를 결정하게 되어 있었다. 9월 21일 마카오에 도착한 그는 임지의 결정을 기다리면서 마침 그곳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있던 김대건과 최양업을 가르치는 한편 경리부 일을 도왔다. 1842년 2월 프랑스 군함 편으로 우리 신학생들의 귀국이 결정되자 메스트르 신부는 조선 교회 선교사로 임명되어 김대건과 함께 마카오를 떠났다. 이 때 그는 조선에 잠입하기 위해 육로로 또는 해로로 10년간의 모험을 감수해야만 하였다. 선교사의 입국이 불가능하게 보이자 그는 김대건만이라도 입국시키고자 김대건과 하직하였고, 1846년 초에는 최양업과 함께 동북 국경을 통해 입국을 시도했으나 만주 군인에게 잡히는 몸이 되었고, 간신히 풀려나 만주로 돌아왔다.
드디어 1852년, 1847년에 난파한 프랑스 군함들의 유물을 철거한다는 구실 아래 중국 배를 타고 조선 서해안 고군산도(古群山島)에 이르러 상륙하는 데 성공, 서울로 올라왔다. 그는 이미 중국에 있을 때 페레올(Ferreol, 高) 주교로부터 부주교로 임명되었고, 더구나 연장자였으므로 1853년 페레올 주교가 사망하자 1856년 새교구장이 입국하기까지 조선교구의 장상직을 맡아보았다.
그간 그는 성영회(聖孀會)의 사업을 도입하였고 또 신학교를 설립하였다. 고아나 기아를 거두어 키우는 성영회의 사업을 조선에서도 촉진시키고자 그는 성영회의 도움을 얻어 외교인들의 자녀들을 거두어 교우가정에서 양육하게 하였다. 비록 박해로 시설을 갖출 수는 없었을지라도 어쨌든 조촐하게나마 조선에서 처음으로 고아사업이 시작되었다.
또 그는 국내에서의 성직교육의 긴급성을 절감하고 1855년 제천(堤川) 배론에 성 요셉신학교를 개설하고 우선 그곳의 회장으로 하여금 신학생들에게 한문을 가르치고 신학교 살림을 돌보게 하였다. 새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입국하자 그는 충청도로 내려와 조그마한 교우촌을 맡아 오던 중 1857년 12월 20일 과로로 쓰러졌고 인근 덕산(德山) 황무실에 묻혔다. 그는 특히 그의 착하고 양순한 성격 때문에 최양업 신부와 조선 교우들의 각별한 존경과 사랑을 받았었다.
푸르티에(Jean Antoine Pourthie) 신부(1830-1866년)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명 신요안(申妖案). 1830년 12월 20일 프랑스 알비(Albi) 교구의 ‘발랑스 앙 알비즈와(Valence en Albigeois) 지방에서 출생. 1854년 6월 11일 알비 교구 소속으로 사제서품을 받고 즉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하여 1855년 중국 귀주(貴州) 지방의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포교지가 한국으로 변경되어 1856년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프티니콜라(Petitnicolas, 朴) 신부와 함께 상해(上海)를 거쳐 해로(海路)로 한국에 잠입, 충청도 배론[舟論]의 성 요셉신학교 교장으로 한국인 신학생 양성을 위해 일하다가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신학교 교수 프티니콜라 신부, 신학교 주임 장주기(張周基, 요셉)와 함께 체포되어 그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軍門梟首)로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산 예수성심 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 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순교자.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선교사. 한국성(韓國姓)은 박(朴). 1828년 8월 21일 프랑스 생 디에(Saint Die) 교구의 코앵시(Coinches)에서 출생. 샤텔 쉬르 모젤의 소신학교를 거쳐 생 디에 교구의 대신학교에서 수학하던 중, 1850년 1월 20일, 차부제(次副祭)로 파리 외방전교회에 입회했으나 그해 10월 병 때문에 외방전교회를 나와 1852년 생 디에 교구 소속으로 사제 서품을 받고 라블린 본당 보좌신부로 1년 동안 사목하였다. 그러나 1853년 6월 다시 외방전교회에 들어가 인도, 홍콩 등지에서 포교하다가 1856년 3월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 푸르티에(Pourtie, 申)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 충청도지방에서 사목하였고 1862년부터는 배론신학교의 교수로 재직하였다. 1866년 병인박해로 신학교 교장 푸르티에 신부와 함께 배론에서 체포되어 이 해 3월 11일 새남터에서 군문효수당하여 순교하였다. 유해는 순교 직후 교우들에 의해 왜고개에 안장되었다가 1899년 용한 예수성심신학교로 이장되었고 1900년 다시 명동대성당으로 옮겨졌다. [이상 한국가톨릭대사전]
황사영(黃嗣永) 알렉시오(1775-1801년)
황사영 백서 원본이 신유박해 순교 200 주년을 기념하여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었다. 그 동안 로마 교황청에 보관되어 있던 황사영 백서는 1801년 황사영이 신유박해의 참상을 기록하고 신교의 자유를 얻고 교회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개인적인 방안을 건의한 편지글로 한국교회사 연구의 소중한 자료이다. 조선 조정의 잔인한 박해로 겨우 움튼 한국교회가 참혹하게 찢겨져 가는 현실을 바라보며 토굴 속에 숨어서 피눈물로 써 내려간 편지글, 가로 62㎝ 세로 38㎝의 흰 명주 천에 붓으로 쓰여진 깨알 같이 작은 해서체의 먹글씨, 122줄 1만 3384자 앞에서 200년 세월을 넘어 전해지는 황사영의 신앙적 열정을 느끼며 전율했다. 세월의 흔적이 어린 비단 위에 조금씩 번지기도 한 작은 글자들은 이제 우리들을 감격의 눈물로 역사 속에 젖어들게 하고 있다.
황사영(黃嗣永, 1775~1801년)은 서울 아현동에서 태어났으며 남인 시파에 속하는 양반가문 출신이다. 정5품 정랑직을 역임했던 아버지 황석범이 일찍 돌아가시어 유복자로 태어난 그는 어머니 이소사의 보살핌 속에서 자랐다. 본관은 창원이요 자를 덕소(德紹)라 한 그는 명문가의 자손답게 영특하고 학문에 뛰어났다. 그의 11대 할아버지인 황침이 한성판윤을 지낸 이래 10대에 걸쳐 벼슬이 떨어진 적이 없는 명문가 출신인 그는 수염이 아름다운 귀공자로도 주변의 환심과 기대를 받고 있었다.
1790년(정조 14년) 황사영은 열여섯의 어린 나이로 진사시에 급제하여 세상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정조 임금은 특별히 그의 학문적 재능을 칭찬하며 격려하여 스무 살이 되면 탁용하겠다는 중용을 약속하여 그의 장래를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그가 더욱 학문에 전념하도록 급양비를 하사하였는데 이 때, 임금님이 그의 손을 잡아 주어 어무가 내린 영광을 입었다. 황사영은 이 영광을 표시하기 위하여 당시의 관례에 따라 비단으로 그 손을 감고 다녔다. 이로서 절대군주제도 아래 신분계급 사회였던 당시의 황사영은 세상의 모든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온전히 다 갖추었다.
황사영은 진사시에 급제했던 그 해에 혼인을 하여 정란주(보명은 명련)를 아내로 맞아 들였다. 이 결혼은 그의 인생에 있어 귀중한 전환점이 되게 하였다. 부인인 정란주는 진주목사로 선정을 베풀어 그 명성이 자자한 정재원의 네 아들 중 맏이인 정약현의 맏딸이었다. 정약현은 한국 초기교회의 뛰어난 지도자 정약종과 다산 정약용의 맏서형이 되니 황사영은 정약종과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된 것이다.
황사영은 이 무렵인 1791년 이승훈에게서 천주교 서적을 얻어 보았으며 정약종, 홍낙민과 함께 천주교 교리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하고, 특히 처숙인 정약종 형제들로부터 교리를 익히게 되어 알렉시오란 세례명으로 영세 입교하였다.
천주교 신자가 된 황사영은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교리연구에 몰두했다. 세상의 온갖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조건을 다 갖춘 그는 현세의 행복을 버리고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도 하지 않았다. 1795년에는 주문모 신부를 최인길의 집에서 만난 뒤 주신부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양반인 그는 평민신분의 양인들과 어울려 남송로, 최태산, 손인원, 조신행, 이재신 등 다섯 사람과 함께 명도회 단위 조직을 구성하여 이끌었다. 그리고 1796년에는 이승훈, 홍낙민, 유관검, 권일신, 최창현 등 당시 교회의 주요 인물들과 함께 서양선교사 파견 요청을 위한 일에 동참하였다. 그는 1798년부터 자신의 고향을 떠나 서울 애오개(아현동)와 북촌에 머물며 신자들의 자제들에게 글을 가르치고 천주교 서적을 필사하여 생계를 유지하며 교회의 중요한 지도자로 부상해 갔다.
마침내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황사영에 대한 체포령도 내려졌다. 그는 체포를 피해 신앙생활을 바로 할 곳을 찾아 방황하는 처지에 이르렀다. 금령이 강화되니 친척과 친구들 가운데 천주교를 버리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그는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해 본 결과 이것이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라고 판단하였기에 온갖 성의를 다하여 신봉하게 되었다"고 증언한 바와 같이 그의 신앙을 지켰다. 그는 신앙생활 그 하나를 바로 하기 위하여 스스로 이씨 성을 가진 상주로 변장하고, 김한민과 함께 서울을 벗어나 충청도 제천 땅 배론으로 숨어들어 김귀동의 집 옹기가마 토굴에 은신하였다.
일찍이 진사시에 급제하여 정조 임금으로부터 특별한 칭찬과 격려를 받았던 그는 이제 이름 석자도 밝히지 못한 채 토굴 속에 몸을 숨겼다. 진정 세상을 구하는 양약이 이것뿐이기에 그 구원을 위한 학문 밖에는 알려고도 하지 않았던 그의 학문과 신앙이 조선조정의 일방적인 박해로 모욕을 당하고, 신앙의 동지들은 형장의 죄수처럼 처형되고 있음을 보는 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 그는 눈물과 기도로 신앙 동지들의 장한 순교의 모습을 정리해 두었으리라. 마침내 주문모 신부마저 순교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 박해과정을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재건해야 할 사명을 통감했으리라! 그는 이 역사적 소명 앞에 무릎을 꿇고 그 유명한 백서를 쓰기 시작했을 것이다. [출처 : 김길수, 전 대구가톨릭대학 교수, 가톨릭신문, 2001년 12월 9일]
최양업(崔良業) 토마스 신부(1821-1861년) 약전
하느님의 섭리에 의해, 한국의 젊은 학자들이 자발적으로 천주교 신앙을 수용하여 천주교회를 창설한 것은 1784년 겨울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새로운 문화나 종교를 이단으로 여겨 오랫동안 배척해 오고 있었고, 따라서 천주교회의 창설은 곧 박해를 예견하는 것이었다.
실제로 한국 천주교회는 창설 초기부터 탄압을 받기 시작하였고, 첫 번째 박해(1791년)에서부터 네 번째 박해(1801년)에 이르는 동안 이미 많은 순교자들을 탄생시켰다. 그리고 이후에도 끊이지 않고 크고 작은 박해가 일어남으로써 순교의 행렬이 끊이지 않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하여 비밀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였고, 박해자의 눈을 피해 가면서 복음을 전파하였다. 또 한편으로는 밀사를 중국으로 파견하여 그곳 선교사들과 연락을 취했고, 성직자를 영입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였으며, 더 나아가 교황청에까지 서한을 보내 한국 천주교회의 어려운 사정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1831년 9월 9일에는 교황 그레고리오 16세(Gregorius XVI) 성하에 의해 마침내 ‘조선 대목구’가 설정되기에 이르렀다.
탄생과 성장
최양업 토마스 신부는 1821년 3월, 충청남도 청양의 다락골 인근에 있는 새터 교우촌에서 성 최경환 프란치스코와 순교자 이성례 마리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이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양업은 박해를 피해 이곳저곳을 옮겨 다니던 부친을 따라다니다가 경기도 부평을 거쳐 안양에 있는 수리산으로 이주하게 되었다. 이 수리산 마을은 그 후 신자들이 하나 둘 모여들면서 비밀 신앙 공동체로 변모하였다.
이에 앞서 조선 대목구의 전교를 위임받은 파리 외방전교회에서는 선교사들을 한국으로 파견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노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국경 감시가 심한데다가 박해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으므로 서양 선교사가 한국에 들어가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 난관을 극복하고 처음으로 한국에 입국한 선교사는 프랑스 출신의 성 모방 베드로 신부였다.
1835년 말, 한국 천주교회에서 파견한 밀사들의 안내로 입국한 모방 신부는 즉시 전국의 신앙 공동체들을 순회하기 시작하였고, 다음해 초에는 부평에 있는 최경환의 집을 방문하였다. 그리고 이곳에서 장래가 촉망되는 최양업 소년을 한국의 첫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니, 당시 그의 나이는 15살이었다.
신학생으로 선발된 최양업은 1836년 2월 6일 서울의 모방 신부 댁에 도착하여 라틴어 수업을 받기 시작하였다. 이어 모방 신부가 신학생으로 간택한 최방제 프란치스코가 3월 14일에, 김대건 안드레아가 7월 11일에 각각 도착하여 함께 생활하였다.
마카오 유학과 부제 서품
최양업은 1836년 12월 3일, 동료 신학생들과 함께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을 서약하고 마카오 유학길에 올랐다. 그리고 중국 대륙을 남하하여 다음해 6월 7일에는 마카오에 있던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 대표부에 도착하였으며, 이때부터 그곳에 임시로 설립된 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하였다.
마카오에서의 유학 생활은 1842년까지 계속되었는데, 1837년 11월에는 동료인 최방제가 열병으로 사망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고, 1839년에는 마카오의 소요로 인해 필리핀의 마닐라로 장소를 옮겨 수업을 받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말에는 마카오로 돌아오게 되었다.
최양업은 아직 공부가 끝나기도 전인 1842년 4월에 마카오를 떠나게 되었다. 한국과의 통상 조약을 원하는 프랑스 함대에서 통역자를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이때 극동 대표부의 장상인 리브와(Libois) 나폴레옹 신부는 박해로 끊어진 한국 천주교회와의 연락을 기대하고 최양업과 김대건을 각각 다른 프랑스 함대에 승선토록 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함대가 남경에 도착한 후 더 이상의 북진을 원하지 않게 되자 최양업과 김대건은 프랑스 함대에서 내려 요동으로 가게 되었다. 한국으로의 입국로 탐색을 위해서였다.
이후 최양업은 만주의 소팔가자로 거처를 옮겨 조선 대목구의 부주교인 페레올(Ferreol) 요한 주교로부터 계속 수업을 받았고, 1843년에는 리브와 신부를 통해 프랑스 파리의 무염성모성심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던 중 조국에서 일어난 박해와 순교자들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때 그는 프랑스로 귀국해 있던 스승 르그레즈와(Legregeois) 베드로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다음과 같이 자신의 심정을 이야기하였다.
저는 우리 부모들과 형제들을 따라갈 공을 세우지 못하였으니, 저의 신세가 참으로 딱합니다. 그리스도의 용사들의 그처럼 장열한 전쟁에 저는 참여하지 못하였으니 말입니다. 정말 저는 부끄럽습니다! 이렇듯이 훌륭한 내 동포들이며, 이렇듯이 용감한 내 겨레인데, 저는 아직도 너무나 연약하고 미숙함 속에 허덕이고 있습니다.
인자하신 하느님 아버지, 당신 종들의 피가 호소하는 소리를 들으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어 당신의 넘치는 자비와 당신 팔의 전능을 보이소서. 언제쯤이나 저도 신부님들의 그다지도 엄청난 노고와 저의 형제들의 고난에 참여하기에 합당한 자가 되어 그리스도의 수난에 부족한 것을 채워, 구원 사업을 완성할 수 있을까요?
신학 수업을 계속하던 최양업은 1844년 12월 10일경, 동료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부제품을 받게 되었다. 그리고 김대건 부제가 사제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 성 다블뤼(Daveluy) 안토니오 신부와 함께 한국에 입국한 뒤에도 소팔가자에 남아 있으면서 매스트르(Maistre) 요셉 신부와 함께 귀국로를 찾기 위해 노력하였다.
사제 서품과 귀국
귀국로를 탐색하는 동안 최양업 부제는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1846년의 박해와 동료 김대건 신부의 순교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서한을 보내 조국에서의 애통한 소식에 대해 알렸다.
마침내 지루했던 기나긴 포로 생활에서 해방되어 저의 동포들한테 영접을 받으리라 희망하면서 크게 기쁜 마음으로 용약하며 변문(한중 국경의 성문)까지 갔습니다. 그러나 변문에 도착하여 보니 이 희망이 산산이 무너졌습니다. 너무나 비참한 소식에 경악하였고, 저와 조국 전체의 가련한 처지가 위로받을 수 없을 만큼 애통하였습니다.……특히 저의 가장 친애하는 동료 안드레아 신부의 죽음은 신부님께서도 비통한 소식일 것입니다.
한국 천주교회 밀사들의 만류로 귀국을 포기한 최양업 부제는 극동 대표부가 이전해 있던 홍콩에 도착한 뒤 ‘한국 순교자들의 행적’을 라틴어로 번역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귀국로 탐색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1847년 8월에는 프랑스 군함을 타고 한국 해안에 도달하였지만 밀사들을 만나지 못하여 귀국에 실패하고 말았다.
다시 상해로 거처를 옮긴 최양업 부제는 1849년 4월 15일, 마침내 서가회 성당에서 사제로 서품되었다. 이때 그에게 사제품을 준 사람은 예수회원으로 강남 대목구장으로 있던 마레스카(Maresca) 주교였다.
사제품을 받은 최양업 신부는 그 해 5월에 상해를 출발하여 중국 요동 지방으로 가서 성 베르뇌(Berneux) 시메온 신부 아래서 사목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11월에는 매스트르 신부를 다시 만나 귀국을 시도한 끝에, 12월 3일 한국 천주교회의 밀사들을 만나 귀국하게 되었다. 이때 매스트르 신부는 발각될 위험이 있었으므로 한국에 입국하지 못하였다.
사목 활동과 선종
귀국 즉시 최양업 신부는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를 만난 뒤, 각처에 숨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 시작하였는데, 1850년 초부터 6개월 동안 5개 도, 5천 여 리를 걸어다니며 신자 3,815명을 방문하였다. 이후 진천 배티를 사목중심지로 삼게 되었다.
이러한 사목 활동은 이후 11년 6개월 여 동안 꾸준히 계속되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휴식기간을 이용하여 한문 교리서 및 기도서를 한글로 번역하였고, 선교사들의 한국 입국을 도왔으며, 신학생들을 말레이 반도에 있는 페낭(Penang) 신학교로 보냈고, 순교자들에 대한 기록을 수집하였다.
물론 전국에 산재해 있는 신자들을 순방하기란 쉽지 않았다. 도중에 최 신부는 서양인으로 오인을 받아 마을에서 쫓겨나기도 했고, 포졸들의 습격으로 죽을 위험에 처하기도 하였다. 특히 1859년에는 순방 도중에 발각되어 포졸과 외교인들로부터 흠씬 두들겨 맞고, 주막에서 쫓겨나 반쯤 나체가 된 몸으로 눈쌓인 밤을 헤맨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그의 신앙과 조국애, 신자들에 대한 애정을 빼앗을 수는 없었다.
1860년의 경신박해 때, 최양업 신부는 몇 명의 신자들과 함께 경상남도의 한 모퉁이에 갇혀서 대목구장 베르뇌 주교나 다른 선교사들과 연락이 끊어진 채 지내야만 하였다. 이때 그는 스승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다시 서한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설명하고, 다음과 같이 한국 천주교회를 부탁하였다.
우리를 환난에서 구하소서. 엄청난 환난이 우리에게 너무도 모질게 덮쳐 왔습니다. 원수들이 우리에게 달려들고 있습니다. 당신의 보배로운 피로 속량하신 당신의 유산을 파멸시키려 덤벼들고 있습니다. 당신께서 높으신 데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그들을 대항하여 설 수가 없습니다.
지극히 경애하올 신부님들께서 열절한 기도로 우리를 위하여 전능하신 하느님과 성모님께로부터 도움을 얻어 주시기를 청합니다.
이것이 저의 마지막 하직 인사가 될 듯합니다. 저는 어디를 가든지 계속 추적하는 포위망을 빠져 나갈 수 있는 희망이 없습니다. 이 불쌍하고 가련한 우리 포교지를 여러 신부님들의 끈질긴 염려와 지칠 줄 모르는 애덕에 거듭거듭 맡깁니다.
다행히 최양업 신부는 갇혀 있던 곳을 빠져나와 경상도 남부 지방의 사목 방문을 다 마친 후, 베르뇌 주교에게 성무 집행 결과를 보고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 그러나 과로에다 장티푸스까지 걸려 1861년 6월 15일에 문경읍 또는 진천 배티 교우촌에서 선종하고 말았으니, 이때 그의 나이 40세였다.
이 소식을 들은 베르뇌 주교는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 교장인 알브랑(Albrand) 신부에게 보낸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최양업 신부의 신심과 열심, 평소에 보여 준 사제로서의 분별력을 칭송하고, 동시에 그를 잃은 아쉬움을 표시하였다.
최 토마스 신부는 신심, 영혼의 구원을 위한 불과 같은 열심, 그리고 무한히 귀중한 일로는 훌륭한 분별력으로 우리에게 그렇게도 귀중한 존재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우리의 유일한 한국인 신부 최 토마스 신부가 구원의 열매를 풍성히 맺은 성사 집행 후에, 내게 자신의 업적을 보고하려고 서울에 오던 중, 지난 6월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 착한 신부가 처해 있는 위험에 대한 소식을 맨 처음 받은 푸르티에(Pourthie) 신부는 그에게 마지막 성사를 줄 수 있을 만큼 일찍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그 신부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죽어가는 그의 입술에서 아직 새어나오는 말이 단지 두 마디 있었으니, 그것은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이었습니다.……최 신부는 12년간 거룩한 사제의 모든 본분을 지극히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사람들을 감화시키고, 성공적으로 영혼 구원에 힘쓰기를 그치지 않았습니다.
그의 죽음은 저를 난처하게 합니다. 그가 성무를 집행하던 구역에는 커다란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는 서양 사람이 뚫고 들어가기 어려운 많은 마을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를 우리에게서 빼앗아 가신 주님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해 주실 것입니다.
최양업 신부가 배론 신학교에서 170-180리 지점에서 사경을 헤매고 있을 때, 그 당시 신학교에 있던 푸르티에 신부가 이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 그는 최 신부에게로 달려갔다. 그러나 그가 들을 수 있는 말은 아주 열성적으로 부르는 예수 마리아의 거룩한 이름뿐이었다. 최 신부의 선종 후 5개월이 지난 다음 베르뇌 주교의 주례로 성대하게 장례가 치루어졌고 그 시신은 배론 신학교 뒷산에 안장되었다.
Biographical Sketch of Father Thomas Choe Yang-eop
Birth and Upbringing
Father Thomas Choe Yang-eop was born on March, 1821, in the Catholic village of Saeteo, which was in the vicinity of Darakgol, Cheongyang, Chungcheong-do, as the eldest son of Saint Francis Choe Kyeong-hwan and Martyr Maria Yi Seong-rye. Thomas Choe, who spent his early childhood in this place, followed his father from place to place as he tried to avoid the persecution and, finally, moved to Surisan in Anyang, Kyeonggi-do. This village of Surisan was later transformed into a secret Faith community through the coming together of Catholics in ones and twos. Choe Sang-jong, <Personal History of Basil Choe U-jeong> (Transcript), 1939, Director, The Research Institute for Korean Church History.
At the time that the Surisan community was formed and growing,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which had been entrusted with the evangelization of the Joseon Vicarate Apostolic, was attempting to send missionaries to Korea. However, because border surveillance was strict and, in addition, there was danger of persecution, it was not easy for western missionaries to enter Korea. The very first missionary to overcome the obstacles and to enter Korea was a priest, Saint Peter Maubant, who had been born in France.
Towards the end of 1835, Father Maubant, who had been guided into the country by the secret envoys sent by the Korean Catholic Church, immediately began to travel around the Christian communities throughout the country. In the beginning of the following year, he visited the Bupyeong community and selected, as a seminarian, Thomas Choe who was a fifteen-year-old boy with bright prospects.
On February 6, 1836, the chosen seminarian, Thomas Choe, arrived at the house of Father Maubant in Seoul and began to receive Latin language lessons. Francis Xavier Choe Bang-je and Andrew Kim Dae-geon, also picked by Father Maubant as seminarians, arrived on March 14 and July 11, respectively, and they all lived together.
Studies in Macao and Order of Deacon
On December 3, 1836, Thomas Choe and his fellow seminarians placed their hands on the Bible, took an oath of Obedience and set off on the road to study in Macao. They travelled south through the mainland of China and reached the Far Eastern Headquarters of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 in Macao on June 7 of the following year. From then on, they studied at the temporary seminary there.
His studies were to continue until 1842 but, in November 1837, he was stricken by the death from fever of his companion, Francis Xavier Choe. Then, in 1839, due to disturbances in Macao, he moved to Manilla and continued his studies but returned to Macao at the end of the same year.
In April, 1842, even before he had finished his studies, Thomas Choe had to leave Macao because France, which wanted a trade agreement with Korea, needed an interpreter on board its fleet. Father Napoleon Libois, superior of the Far Eastern Headquarters at that time, who was waiting for new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because contact had been broken off due to a persecution, managed to get Thomas Choe and Andrew Kim on board two different French ships. However, the French fleet, after arriving at Nanjing, did not wish to proceed any further north, so Thomas Choe and Andrew Kim disembarked and went to Liaodong in order to find a route into Korea.
Thomas Choe then went to Sopalgaja in Manchuria and continued his studies under the tutorship of Bishop John Ferreol, the Coadjutor Bishop of the Joseon Vicariate Apostolic. In 1843, through Father Libois, he joined the Paris-based French Order of the Immaculate Heart of Mary (SS. Coeur de Marie). In the midst of all of this, he heard news of the persecution and martyrdom which had occurred in his homeland. At that time, he sent a letter to his former teacher, Father Legregeois, who had returned to France, and expressed the feelings in his heart as follows :
"Since I am not able to distinguish myself like my father and brothers, my situation is very miserable. I could not get involved like them in the glorious war as a soldier of Christ. I am truly ashamed. They were my worthy compatriots, my brave fellow countrymen! Yet, I am still left languishing with feelings of much weakness and immaturity.
Most gracious God, our Father! Please hear the cries uttered by the blood of your servants! Have mercy on us. Show us your overflowing compassion and the almighty power of your embrace! Will I, O God, someday, be worthy to participate in the great challenge of the priests and the suffering of my brothers, in order to make up for what is lacking in the Passion of Christ and so complete the work of Salvation ?"
Thomas Choe, who had continued his studies, received the Order of Deacon, along with his companion Andrew Kim, from Bishop Ferreol on about December 10, 1844. After Deacon Andrew Kim received ordination to the Prieshood and left with Bishop Ferreol and Father Anthony Daveluy for Korea, Thomas Choe, while staying behind at Sopalgaja with Father Joseph Maistre, strove to discover another route to his homeland.
Ordination to the Priesthood and Return Home
While he was searching for a way to return home, Deacon Thomas Choe met with secret envoy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and heard the news of the 1846 Persecution and the martyrdom of his companion, Father Andrew Kim. He wrote the following letter to his former teacher, Father Legregeois, and conveyed to him the heartbreaking news of his motherland :
"Finally, with the feeling of being released after a long captivity and with hope of getting a welcome from my companions, I went in an elated mood to Byeonmun (fortress gate on the Korea-China border). However, when I reached Byeonmun, my hopes were shattered to pieces. I was thrown into shock by the tragic news. I and my pitiful country felt such grief that nothing could provide consolation. The news of the death of Father Andrew, my dearest companion, will be a cause of deep sadness for you also, Father."
Deacon Thomas Choe, on being restrained by the secret envoy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abandoned his intention of going home and, on reaching the Far Eastern Headquarters which had been moved to Hong-kong, he translated into Latin “The Achievements of the Korean Martyrs.” At the same time, he kept seeking for a way to return to his homeland and, in August 1847, he boarded a French warship and, although he arrived at the shores of Korea, he could not meet up with the secret envoys and so failed in the attempt to reach home.
He then moved to Shanghai and was finally ordained to the Priesthood on April 15, 1849 at Seogahoe church. The ordaining prelate was Bishop Maresca, a member of the Society of Jesus and Ordinary of the Jiang-nan Vicariate Apostolic.
After ordination, Father Thomas Choe left Shanghai in May of that year and went to the area of Liaodong where he began pastoral ministry under the direction of Bishop Saint Simeon Berneux. In November, he once again met Father Maistre and, as a result of making an attempt to go home, he met up with the secret envoys of the Korean Catholic Church on December 3 and managed to return to his country. Because of the danger of detection, Father Maistre was unable to enter Korea.
Pastoral Ministry and Death
As soon as he arrived in his homeland, Father Thomas Choe, after meeting with Bishop Ferreol and Father Daveluy, began to visit the Catholics who were hiding in different locations. From the beginning of 1850, during a period of six months, he walked over 5,000 lys (about 2,235. 6 km) through five provinces and visited 3,815 Catholics. After that he settled at the Baithi Christian Village, Jincheon, the centre of his pastoral ministry.
He continued this type of apostolate for about 11 years and 6 months. Not only that, he availed of resting periods to translate the Chinese catechism and prayer book into the Korean language, assisted the entry into Korea of missionaries, sent seminarians to the seminary in Penang, Malaysia and collected data on the martyrs.
It was not easy, of course, to travel around the Catholics who were scattered throughout the whole country. He was sometimes mistaken for a foreigner and chased from the villages and constantly faced the danger of death in raids by the police. Once, during his journeys in 1859, he was detected and severely beaten by the police and non-believers, chased from an inn where he had been staying and, half-naked, he wandered through deep snow for the whole night. However, nothing could strip him of his Faith and his love for his country and the Catholics.
At the time of the Kyeongsin Persecution of 1860, Father Choe Thomas and several Catholics were confined to a corner of Kyeongsang-do and had to survive without contact with the Ordinary of the Vicariate Apostolic, Bishop Berneux, and other missionaries. He wrote again to his teacher, Father Legregeois, explaining his dire situation and requesting help for the Korean Church :
"Save us from distress! An awful misfortune has brutally descended upon us. The enemies are encroaching upon us. They are rushing to destroy the inheritance which has been redeemed by your Precious Blood. If you do not help us from on high, we cannot stand up to them.
Most reverend and loving Father (Legregeois), through your fervent prayers, I beg you to please obtain help for us from Almighty God and our Holy Mother.
This is, most likely, my farewell letter. No matter where I go, I have no hope of evading the encircling net which is pursuing me. I earnestly commend our poor and wretched mission field to the unceasing concern and inexhaustible love of many priests."
Fortunately, Father Thomas Choe was able to escape from the place in which he had been confined and he completed his pastoral visitation. After that, he set off to give a report on his apostolic work to Bishop Berneux. However, he contracted typhoid fever on top of exhaustion and died at Munkyeong-eup or the Baithi Christian Village, Jincheon on June 15, 1861. He was 40 years old.
On hearing the news, Bishop Berneux sent a letter to the Rector of the Paris Foreign Missions Society's seminary, Father Albrand, in which he eulogized Father Thomas Choe's Faith, zeal and the priestly discernment which he had shown at all times, and expressed his deep feelings of loss :
"Father Thomas Choe, because of his Faith, zeal for souls which burned like a fire and his admirable sense of discernment in his ceaseless and invaluable ministry, was a person who was very precious to us. After administering the Sacraments of the bountiful fruits of Salvation, our one and only Korean priest, Father Thomas Choe, departed this life last June on his way to Seoul to give a report to me on the progress of his work.
Father Pourthie, who first heard of the danger with which this kind priest was faced, arrived early enough to give him the Last Sacraments. However, Father Choe was unable to speak. The only two words which escaped from his dying lips were the Holy Names of Jesus and Mary. Father Choe, through very assiduously carrying out the duties of a holy priest for almost 12 years, converted many people and did not cease from striving successfully to save souls.
His death leaves me at a loss. It would be very difficult for western priests to enter, without the risk of great danger, the area, which covers many villages, where he carried out his apostolate. However, the Lord who took him from our midst will provide us with what we need."
When Father Thomas Choe was on the brink of death at a place 170-180 lys (76.01-80.48 kilometers) from Baeron, Father John Pourthie, who was at the seminary in Baeron, heard the news. He immediately rushed to Father Choe's side. However, the only words he could hear were the Holy Names of Jesus and Mary spoken with great fervour. Five months after the death of Father Choe, Bishop Berneux celebrated a solemn funeral ceremony and the remains of Father Choe were laid to rest in a hill behind the Baeron seminary. [출처 : 한국천주교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 홈페이지]
황사영 백서 : 200년 전 편지의 진실
백서(帛書)는 ‘비단에 쓴 글’이다. 한자문화권에서 고대사회로부터 쓰이던 보통명사였던 이 백서라는 단어 앞에 우리는 글쓴이 황사영의 이름을 붙여 특별히 다른 백서와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이 황사영 백서가 로마 교황청 고문서고를 떠나 서울의 절두산 순교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이 백서는 1801년 황사영(알렉시오, 1775-1801년)이 그 박해 과정을 기록하고 교회 재건책을 논한 초기교회사 연구의 주요 자료다. 종전에 우리는 이 자료의 사본만을 접할 수 있었지만, 이번에 원본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원본을 관찰함으로써 우리는 원본이 작성되던 200년 전 세상으로 들어갈 수 있다.
황사영은 누구인가
서울의 아현동에서 남인 시파에 속하던 양반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에게 1790년은 ‘운명의 해’였다. 16세에 진사시에 합격한 것이다. 당시의 국왕인 정조는 그를 특별히 불러 격려하면서 나이 20세가 되면 탁용해 주겠다고 말했다. 당시 정세에서 이는 그에게 출세와 부귀영화를 확실히 보증해 주는 일이었다.
또한 그는 이 해에 정명련과 결혼하여 정약용의 조카사위가 되었다. 결혼은 흔히 인생의 전환점이라 한다. 그는 결혼을 통해서 그 삶에서 진정한 전환을 겪게 되었다. 그의 처가 인척들을 통해서 천주교 신앙에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처가 식구들을 비롯해서 천주교와 관련된 여러 인척들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면 이승훈과는 사돈간이었고, 처삼촌인 정약종은 초창기의 교회를 이끌던 인물이었다.
황사영은 결혼 직후인 1790년에 교리를 배워 영세 입교했다. 이후 그는 관직의 길을 포기하고 오직 교리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는 “구원의 학문이 아닌 다른 학문은 알려고 하지 않았다.” 이로써 그는 부귀영화의 길을 스스로 버렸고, 학동들을 모아 가르치며 몇 푼 안되던 학전(學錢)에 기대어 사는 가난에 찌들린 훈장의 길을 택했다.
왜 작성되었나
황 알렉시오로 다시 태어난 그는 천주교 신앙이 성리학과는 달리 조선을 구원해 줄 새로운 사상임을 확인했고, 이를 전파하려고 자신의 삶을 바쳤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교회의 지도적 인물로 성장해 갔다. 그러나 정조 임금이 궂기신 뒤 일어난 천주교 박해는 그를 가만히 놓아두지 않았다. 1801년에 박해가 일어났다.
이 박해 과정에서 그가 그처럼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신앙은 모독을 당했다. 자신의 동료들은 하나씩 잡혀서 감옥에서 매맞아 죽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갔다. 그가 존경하던 중국인 신부 주문모는 신자들에게 무고한 고통을 주지 않으려고 관청에 스스로 자수하여 죽음의 길을 택했다. 이렇게 조선교회를 이끌던 이들이 삽시간에 죽음을 당했다. 이 박해를 증언하고 조선교회를 지키고 재건해야 할 책임은 오로지 황사영에게 남겨졌다.
황사영은 신자들이 마을을 이루어 옹기를 구우며 살아가던 제천 땅 배론으로 망명을 단행했다. 그리고 토굴에 숨어서 박해에서 희생된 증거자들의 순교사실을 기록했다. 또한 그는 유일하게 살아남은 조선교회의 지도자로서 교회의 재건책을 구상했다.
그는 길이가 세 뼘, 폭이 두 뼘 정도 되는 비단폭을 구했다. 그리고 궁벽한 옹기점의 점인들에게서 구하기는 힘들었을 매우 가는 붓으로 먹을 찍어 깨알같은 글씨를 또박또박 써내려 갔다. 아마도 그가 이상인(李喪人)이라 자처하며 피신할 때에도, 당시 선비들이 가지고 다니던 휴대용 필통에 그 붓을 넣어 가지고 다녔던 듯하다. 황사영이 작성한 일종의 박해보고서요 청원서인 이 편지는 이렇게 작성되었다.
황 알렉시오는 이 편지를 조선교회를 책임지던 북경 주교에게 전달하고자 했다. 이 일을 중국교회에 밀사로 파견된 바 있던 황심에게 맡기고자, 그를 배론으로 오게 했다. 그러나 황심은 도중에 체포되었고, 그의 발설로 황사영의 피신처가 탄로났다. 의금부의 나장들은 득달같이 내달아 그를 체포했다. 그가 작성해 놓은 백서도 압수되었다.
어떻게 전해졌나
체포되고 백서 내용이 밝혀지자 조정이 경악했다. 백서에는 군함 수백 척과 정예군사 5-6만 명을 보내 조선에 무력으로 개교를 시도해 달라는 내용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백서에서 박해의 경과를 보고한 부분보다는 오직 이 부분만이 강조되어 회자되었다. 조정에서는 이를 ‘흉서’로 규정했다. 일반 관리나 지방의 선비들은 이 반역적 내용에 격분했고, 황사영은 대역죄인으로 죽음을 당했다.
백서 사건이 터진 뒤 의금부 관리들은 보고서를 올린 뒤 이를 문서궤에 넣어 보관하기에 앞서 한 부 베껴두어 세상에 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이 백서의 내용은 "벽위편"이나 "동린록"과 같은 척사관계 기록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 백서의 사본 가운데 하나는 프랑스 선교사들의 손에 들어와 1860년대 초 다블뤼가 조선천주교회사에 관한 비망기를 작성할 때에도 주요 자료로 활용되었다.
그런데 백서사건이 터진 직후부터 천주교 문제로 탄압받던 남인 시파 계열에서는 이 백서가 천주교 문제를 집요하게 제기하며 반대했던 홍낙안이 조작한 것이 아닌지 의심하기도 했다. 음모와 모략이 성행하던 당시의 분위기에서 나올 법한 의심이기는 했지만 이 백서는 분명 황사영이 작성했음이 밝혀졌다.
세월은 바뀌어 1894년이 되었다. 나라가 개항하고 갑오경장이 단행되었다. 조정에서는 묵은 문서들을 파기했다. 이 문서가 파기되기 직전에 개화관료이며 천주교 신자였던 이건영(요셉)이 이를 입수하여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에게 전해주었다. 조선교회의 책임자 뮈텔 주교는 이미 죽은 발신자로부터 94년 만에 한 통의 편지를 받아보게 되었다. 이리하여 황사영이 전달에 실패했던 이 백서는 그가 사랑하던 교회의 품으로 다시 돌아왔다.
1925년 조선 순교복자 79명에 대한 시복식이 로마에서 열렸다. 그들의 시복은 신앙의 궁극적 승리를 확인하는 행사였다. 이 행사에 참석했던 뮈텔 주교는 1801년의 순교자들에 관한 피와 땀의 기록인 이 백서를 로마 교황청에 전달했다. 이로써 그는 당시 시복되지 못했던 1801년의 순교자들에 대한 시복을 다짐하고자 했을지도 모르겠다. 그 뒤 이 백서의 존재는 잊혀져 갔다.
1970년대 중반에 안동교구장 두봉 주교는 이 백서가 인류복음화성의 문서고에 있음을 확인하고 한국교회에 알렸다. 그뒤 이 백서를 직접 보려는 노력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이제 그 백서는 고국을 떠난 지 76년 만에 다시 고국을 방문하여 그 피와 땀의 기록을 드러내주었다.
남은 말
백서는 분명 먹으로 작성되었다. 해서체의 글씨로 쓰인 이 원본을 주의 깊게 보면 물기 때문에 글씨가 조금씩 번진 곳을 확인하게 된다. 그 잔잔한 번짐은 백서의 보관과정에서 생긴 흔적일 수도 있다. 또한 백서를 작성하며 황사영의 땀방울과 눈물이 적셔져서 일어난 현상일 수도 있다. 오히려 그의 땀이며 눈물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 황사영은 간절한 눈물을 흘리며 백서를 작성했나 보다. 나는 물기에 얼룩진 그 백서의 진본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까지 전하고자 했던 그 진실은 오늘의 우리를 전율시킨다. [출처 : 조광 이냐시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교수, 경향잡지, 2001년 9월호]
찾아가는 길
<승용차> * 서울, 경기 방면 - 중앙 고속도로 이용시 : 경부 고속도로 -> 영동 고속도로(신갈 분기점) -> 중앙 고속도로(만종 분기점) -> 신림 IC로 나와서 좌회전 2번 후 원주 제천간 5번 국도 제천 방면으로 약 13km 정도 오시면 됩니다. - 중부내륙 고속도로 이용시 : 경부 고속도로 -> 영동 고속도로(신갈 분기점) -> 중부내륙 고속도로(여주 분기점) -> 감곡 IC로 나와서 좌회전 후 평택 제천간 38번 국도 제천 방면으로 진행. 봉양읍 장평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원주 제천간 5번 국도 원주 방향으로 약 6km 정도 오시면 됩니다. * 부산, 대구 방면 - 경부 고속도로 이용시 : 경부 고속도로 -> 중앙 고속도로(금호 분기점) -> 제천 IC로 나와서 봉양읍 장평 삼거리에서 우회전, 원주 제천간 5번 국도 이용 약 6km 정도 오시면 됩니다. - 부산 대구간 고속도로 이용시 : 부산 대구간 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금호 분기점) -> 제천 IC로 나와서 봉양읍 장평 삼거리에서 원주 제천간 5번 국도 이용, 약 6km 정도 오시면 됩니다. * 목포, 광주 방면 - 호남 고속도로 -> 경부 고속도로(회덕 분기점) -> 중부 고속도로(남이 분기점) -> 일죽 IC로 나와서 장호원 제천간 38번국도 이용, 봉양읍 장평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후 원주 제천간 5번 국도 이용하여 약 6km 정도 오시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