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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대통령은 누가 죽였을까?(序)
지금부터 31년전인 1979년 10월 26일 우리는 세계사의 한 획을 그은 위대한 인물을 잃었다.
동족상잔 전쟁의 폐허를 딛고 세계 최악의 빈곤국으로 희망을 잃고 살아가던 아시아의 작은나라 대한민국을 세계경제를 이끌어가는 선진국의 하나로 우뚝 서게한 박정희 대통령이 김재규의 흉탄에 숨져간 날이다.
그분은 한 나라를 번영으로 이끈 위대한 지도자였을 뿐만 아니라 수많은 저개발국, 혹은 개발도상국들에게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희망의 빛을 던져준 위대한 인물이었다.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수상, 싱가폴의 이광요수상, 중국의 등소평, 대만의 이등휘 총통등 많은 인물들이 박정희의 개발방식을 이어받아 경제부흥을 이루었으며 지금도 경제개발을 꿈꾸는 수많은 나라들이 모델로 삼고자 하는 인물이다.
10.26이 과연 한 시대를 이끌던 위대한 인물이 사망한 과거의 사건일 뿐일까?
박정희 대통령이 궁정동 안가에서 만찬도중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하지만 그분의 죽음이 아무런 의혹없이 밝혀진 것일까?
시해의 전 과정, 그리고 원인등 모든 것이 당시 보안사령관겸, 중앙정보부장서리인 합동수사본부장 전두환에 의해 명백히 밝혀졌고, 시해에 작접 가담했던 사람들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리고 당시 가장 가까이 있던 [그때 그사람들]은 오랫동안 침묵하고 있다.
박대통령 시해의 흑막에 의혹을 가지게 된 것은 최근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는 5.18의 진실규명에 대해 전두환을 비롯한 5공세력들이 전혀 달갑지 않게 생각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부터였다.
뿐만 아니라 5공의 핵심이었던 장세동이 지만원 박사를 만나 "쓸데없는짓 하지마라"하며 오히려 진실규명을 막으려 했다는 글을 읽은후 이들의 행동에 깊은 의혹을 느끼게 되었다.
왜 그들은 5.18 진실규명을 막으려 하는 것일까?
누구보다도 5.18의 진실규명에 앞장서야 할 그들이 왜 침묵하고 5.18 진실규명을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것일까?
사실 5.18의 가장 큰 피해자는 전두환 전 대통령과 5공정권 실세들이라 할 수 있다.
5.18을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나 아니면 5.18의 진실을 어느정도 깊이 알고있는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국민들이 5.18의 원흉을 전두환이라고 오해하고 있다.
강제진압을 주도한 인물로 전두환을 꼽고 있으며 심지어 살인마로 낙인찍혀 있다.
하지만 5.18당시 전두환은 합동수사본부장으로 직접적인 지휘선상에 있지도 않았고 당시 광주사람들은 전두환의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들도 얼마 없을 정도로 전혀 관련이 없는 인물이 바로 전두환이다.
5.18 진압은 최규하 대통령의 재가에 의해 계엄사령관 이희성과 정상적인 지휘계통 명령에 의해 진행되었다.
전두환은 단지 정보책임자로써 진압부대와 대통령에게 전반적인 상황보고만 했을 뿐이다.
실제 진압책임은 당시 31사단장이었던 정웅소장이었으며 전두환은 물론 정호용 특전사령관도 휘하의 공수여단을 31사단에 지원하여 실제로 공수부대가 어떻게 운용되는지도 몰랐고 통제도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누구보다도 그가, 또 그들이 5.18의 진실규명을 통해 억울한 누명을 벗는데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다.
그런데 무엇이 그들을 침묵하도록 만들었을까?
한가지에 의문이 들기 시작하자 5.18을 전후한 정치현실과 그들의 이해할 수 없던 행동들에 의혹이 꼬리를 물고 떠오른다.
왜 최규하 대통령은 박대통령의 남은 임기도 마치지 않고 손쉽게 전두환에게 대통령 자리를 물려 주었을까?
정치에 미련이 없었다면 왜 최규하 대통령의 부인 홍기여사는 전두환의 취임식장에서 악수를 청하는 후임대통령 부인 이순자 여사의 손을 뿌리치며 원망스런 눈초리로 노려보았을까?
만약 일부에서 주장하는대로 전두환의 협박에 의해 강제로 물러났다면 최규하를 꼼짝 못하고 물러나게 한 이유는 도대체 뭘까?
일부에서 ‘전두환이 권총을 들이대며 협박했다.’는 낭설도 있지만 민주국가에서 대통령에게 권총 들이대고 강제로 대통령 자리 빼앗는게 가능할까?
왜 당시 정치권은 전두환의 개헌과 체육관선거를 별다른 저항없이 받아들였을까?
왜 전두환은 1987년 6월 28일 24:00에 계획되어 있던 반정부세력 일제검거 작전을 갑자기 취소하고 노태우로 하여금 6.29선언을 하도록 했을까?
수도방위사령부의 주도하에 비상계엄의 모든 작전준비를 마친 상태에서 작전개시 시간에 임박하여 전두환을 독대하고 나온 노태우에 의해 작전이 취소되고 6.29 선언이 있은 후 오늘의 대한민국의 비극이 시작되었다.
혹자는 노태우의 설득에 의해 전두환이 결심을 바꾸게 되었다고 하지만 [민주화세력]들과 한통속이었던 노태우를 심히 못마땅하게 생각하던 전두환이 과연 그 설득에 넘어가서 그동안의 야심찬 계획을 포기했을까?
6월29일 새벽에 전두환을 만난후 그날 아침 6.29 선언을 발표할 때는 사전에 발표문등 모든 준비를 했었다고 볼 수 있는데 과연 전두환은 이런 움직임을 사전에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까?
아니면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노태우의 협박을) 수용했던 것일까?
만약 노태우의 협박에 의해 어쩔 수 없이 6.29 선언을 수용했다면 전두환이 꼼짝 못하고 모든 것을 포기하도록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6.29선언 이후 전두환은 모든 실권을 포기하고 노태우를 앞장세운 민주화세력의 주도로 정국이 흘러갔는데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을까?
1987년 11월에 있던 헌법개정시에 지금의 헌법 내용이 건국과 박정희 정권을 부정하고 김구의 임시정부 법통을 이어받는 새로운 국가탄생을 의미하는 [민주화헌법]인데 왜 전두환과 노태우, 그리고 5.6공의 실세들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이를 수용했을까?
노태우와 김영삼, 김대중이 출마한 대통령선거에 동원된 막대한 선거자금의 출처는 어디일까?
당시 선거유세마다 수백대씩의 차량을 이용해 군중을 동원하고 동원된 각 개인에게 3만원씩 지급하고 점심까지 접대 하였다.
이 돈이 모두 합해 수천억원~수조원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는데 여당 후보였던 노태우야 전두환이 모아놓은 비자금을 이용했다고 가정해도 김영삼과 김대중이 동원한 돈에 대해서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불가능한 상상이지만 ‘정치자금은 한푼도 안받았다.’고 하던 김영삼의 말대로 부친인 김홍조씨가 멸치판 돈으로 막대한 금액의 선거자금을 대 주었을까?
김대중은 전라도 사람들이 기부한 푼돈만으로 이런 천문학적인 선거자금을 감당 했을까?
왜 노태우는 대통령 임기 내내 ‘물태우’란 별명처럼 옴짝 달싹 못하고 모든 통치를 [민주화세력]들이 원하는 대로 따랐을까?
왜 노태우는 자신의 발목까지 잡는 5공청문회와 5.18청문회를 열어 신군부 세력을 초토화시키는데도 침묵했을까?
왜 김영삼 집권후 있었던 5,6공 청산작업에 이들은 그토록 무기력하게 초토화 되었을까?
왜 5공세력들은 5.18진실규명에 침묵하며 오히려 이를 막으려 하는걸까?
왜?왜?왜?왜?왜?왜?........................
끝없이 반복되는 왜?라는 의혹에 어느 한가지라도 명쾌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이 불가사의한 퍼즐의 열쇠를 과연 어디서 찾아야할까?
우리는 혹시 18년간 절대권력을 구축하며 세계의 최빈국으로부터 경제선진국으로 이끌었던 작은 거인의 죽음을 너무나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까?
과거 어느때보다 강력한 정권을 유지하고, 중앙정보부, 보안사등 정보부서를 만들어 불온세력의 움직임에 촉각을 세우던 박대통령인데 시해의 동기와 과정이 너무나 허무할 정도로 단순한것은 아닐까?
동서양을 막론하고 수없이 이뤄졌던 국왕이나 권력자의 살해 배경에는 권력을 탈취하려는 거대한 세력들의 치밀한 음모가 있었는데 단 하나 예외로 박대통령의 시해는 김재규의 단독범행이었다과 한다. 과연 가능한 일이었을까?
이런 모든 의혹을 풀 수 있는 실마리가, 그리고 오늘의 불행을 잉태한 씨앗이 대통령의 죽음으로부터 연유한 것은 아닐까?
박정희 대통령은 누가 살해했나?(1)
<<누구나 상식적으로 알고있는 사실에 대해 한번쯤 부정적인 시각으로 돌아보지는 않았나요? 일반의 상식과 반대되는 사고를 하는 사람이 한사람쯤 있는것도 바람직한 일이 아닐까요?>>
참으로 황당한 제목인가요?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의 총탄에 의해 사망했다는 사실은 초등학생들도 알고 있는 역사적 사실인데 지금에 와서 이런 엉뚱한 질문을 하는 것이 정신 나간 일로 생각되는가요?
하지만 우리의 일상사나 역사에서 우연히 일어나는 일은 절대로 있을 수 없다고 생각 합니다.
어떤 결과에는 반드시 그에 해당하는 절대로 부정할 수 없는 원인이 있지요.
그리고 우리가 절대적인 진리로 알고 있는 역사에도 얼마나 많은 오류가 있는지는 어느 누구도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현대사의 큰 흐름을 완전히 뒤바꾼 10.26에 대해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진것이 있는가요?
1979년 10월 26일 저녁, 당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을 살해했다는 사실 이외에 명확하게 밝혀진 것이 있나요?
1) 김재규가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동기가 무엇인가?
2) 김재규의 단독범행인가? 아니면 배후가 있을까? 배후가 있다면 누구일까?
① 수사결과 밝혀진대로 부마사태에 대해 박대통령에게 꾸중을 듣고 경호실장이 비난을 하자 순간적으로 참지못하고 분노해서 살해했다?
② 박대통령의 독재정권을 종식시키기 위한 민주화 의거였다?
③ 박대통령을 살해하고 대통령이 되기위한 김재규의 단독행위였다?
④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방지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였고 김재규는 CIA의 하수인 이었다?
18년간 절대권력을 유지하던 권력자의 죽음에 대한 동기로는 너무나 빈약한 이유가 아닌가요?
그런데도 이런 말도 안되는 통념이 아직까지 진실인양 인구(人口)에 회자되고 있는 실정을 보며 혹시 단 한명조차 믿지 않을지도 모르는 본인의 생각을 밝히려 합니다.
● 납득이 불가능한 박대통령 시해동기
1)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삽교천 제방공사 준공식에 다녀온 후 김재규의 초청으로 중앙정보부에서 운용하던 궁정동의 안가에서 회식도중 시해를 당했다.
한마디로 홍문의 연이었던 것이다.
당시 만찬장에는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 비서실장 김계원과 김재규, 그리고 흥을 돋구기 위해 불러온 가수 심수봉과 여대생이었던 신재순등 6명이 있었으며 부근에는 김재규의 지시로 미리 와서 대기하고 있던 육군참모총장 정승화가 있었다.
그리고 안가에는 김재규가 미리 준비해둔 중앙정보부장 수행비서관 박흥주와 박선호 그리고 심복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대기하고 있었으며 몇 명의 대통령 경호원이 있었다.
시해과정은 회식도중 부마사태를 제대로 진압하지 못하는 중앙정보부장을 대통령과 경호실장이 꾸짖자 분을 못이기고 “버러지 같은놈.”이라며 먼저 경호실장을 쏘고 대통령을 쏘았다고 알려져 있다.
과연 분에 못이겨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을까? 아니면 합수부의 발표대로 김재규가 대통령이 되기위해 혼자서 저지른 단독범행 이었을까? 아무런 동조자도 없이 자기혼자서 민주화를 위한 의거였을까?
김재규는 상당히 냉정하고 침착한 사람이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절대로 이런 이유만으로 대통령을 시해할 수는 없다고 봐야한다.
더구나 당뇨로 술을 전혀 못마시는 김재규는 시해당시 맨정신 상태였다고 한다.
대통령의 가장 가까운 측근인 핵심중의 핵심적인 직책에 있는 사람이 욕을 먹었다고 이런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가?
사건당일 박대통령은 삽교천 제방공사의 성공적인 완공으로 상당히 기분좋은 상태로 김재규가 분에 못이겨 총을 쏠 정도로 꾸짓게 만들 상황도 아니었고 평소의 박대통령 성격으로 봐도 부하가 분에 못이겨 총질을 할 정도로 인격적인 모독을 주었다는 것도 전혀 납득이 안가는 말이다.
더구나 김재규가 10대, 20대 반항아도 아니고 60대 노인이 욕을 먹었다고 대통령에게 총을 쏜다는 것은 더더구나 납득할 수 없다.
뿐만 아니라 순간적으로 분노해서 저지른 일이라면 사전에 부하들에게 준비를 시켜놓고 회식 도중에 밖으로 나와 준비사항을 확인후 자신이 경호실장과 대통령 살해와 동시에 경호원들을 살해하도록 지시했을까?
어느 면으로 보나 분명 사전에 치밀하게 계획된 범죄로 볼 수밖에 없다.
하지만 과연 정권의 2인자라 할 수 있는 중앙정보부장이 대통령을 시해한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그리고 공범이나 배후는 전혀 없는 단독범행 이었을까?
통념적으로 알고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분석하고 반박해 보기로 하자.
2) 시해동기 논란하나 : 부마사태에 대한 사항
당시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의 의원직 박탈에 항의하여 부산.마산 지역 대학생이 일으킨 반정부 시위가 부마사태였다.
하지만 부마사태가 국정운영에 치명적일 정도로 위급한 사태는 아니었다.
부산지역은 과거 수많은 전국적인 학생데모에도 불구하고 데모의 무풍지대였다.
심지어는 데모에 참여하지 않는다고 이화여대에서 부산대 학생회장에게 치마저고리를 보낼 정도로 소극적이었다.
데모가 일어나자 부산지역의 기성세대들은 “기특하게 부산지역 학생들이 데모도 할 줄 안다.”고 말할 정도로 전혀 걱정도 하지 않았고 경찰에서도 적극적인 진압을 하지도 않았었다.
다만 파출소 하나가 불에 탔는데 이것도 학생들의 소행인지, 데모대에 끼어있던 불순분자의 소행인지도 명확치 않다.
당시 상황은 본인이 그때 부산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정확히 알고있는 사항이다.
그런데도 회식석상에서 경호실장이 몇백명을 사살하더라도 진압하라고 했다?
그리고 박대통령이 경호실장의 말에 호응을 했었다구?
참으로 말이 되지 않는 소리다.
사실 박대통령은 속이 무척 여린 사람이었다.
어린 직공들을 위해 야간학교도 세우고 강습소도 만들어주고 방한복도 만들어 주기도 했다.
반정부 데모를 한 학생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가혹한 처벌을 하지 않았다.
이명박과 이재오등 6.3세대에 대한 처벌을 봐도 그렇게 가혹한 처사는 아니었다.
국가를 전복시키기 위한 간첩사건으로 다수의 사람들이 사형을 당하기도 했으나 이 사람들은 당연히 죽어야 될 사람들이었다.
그런데도 몇백명을 죽이더라도 진압하란 말에 박대통령이 동조했다?
가뭄이 들자 갈라진 논바닥에 주저앉아 농민들 걱정하며 펑펑 울던 대통령이?
머나먼 타국땅인 서독에서 광부들과 간호원들과 부둥켜 안고 울음바다로 만들던 그분이?
홍수가 나자 자신의 안전도 도외시 한 채 작은 보트에 몸을 싣고 구호물자를 나르던 자상한 아내를 잃고 눈물로 밤을 새우면서도 마지막 생을 조국의 안보를 위해 하루하루 피말리는 나날을 보냈던 사람이 권력에 미련이 있어 무고한 국민을 몇백명을 죽이더라도 자신의 장기집권 야욕을 위해 데모진압 하란 말에 동조했다고?
말이 되는 소리좀 해라.
특전사 대위출신인 차지철이 그런 소릴 했다고 해도 대통령은 절대로 진심으로 받아들였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설혹 이런 소리를 들었다고 해도 이런 이유로 일국의 정보를 한손에 쥐고 있는 2인자 중앙정보부장이 ‘울컥’하여 총을 쐈다?
지나가던 개가 다 웃을 일이다.
도저히 이치에 맞지 않는 터무니없는 소리일 뿐이다.
3) 김재규 단독범행에 대한 의문점
김재규에 대한 재판결과 시해동기는 박대통령을 살해하고 대통령이 되기위해 김재규가 저지른 단독범행이라 밝혀졌다.
하지만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살해하고 정권을 잡으려 단독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면 그 사후조치가 너무나 어설프지 않은가?
만약 김재규의 단독범행 이었다면 범행시 예상되는 김재규의 조치사항은 어떤 순서로 이루어 졌을까?
① 박대통령 시해
② 박대통령 시신 및 현장인원 전원 중정 본부(남산)로 이동
③ 긴급사태를 알리고(계엄) 전 국무위원 및 각군총장등을 정보부로 호출
④ 청와대 경호실요원 긴급체포
⑤ 임시 국가지휘본부를 중앙정보부내에 설치하고 비상사태 선포, 계엄령 선포
⑥ 임시 국무회의 명의로 임시대통령 선출(최규하)
⑦ 정권 장악 및 박대통령 살해과정 조작 발표
⑧ 유신헌법에 의해 대통령 선출(김재규)
김재규 단독범행 이었다면 이렇게 진행되었어야 정상적인 절차 아닌가?
하지만 박대통령 시해부터 12.12까지 일어난 사태를 보면 자신은 틀림없이 안전을 보장받고 정권을 장악하게 될 것이라는 확신이 없이는 도저히 이루어질 수 없는 행동이었다.
당시 합수부의 수사내용 발표를 보면 대통령이 되고자한 김재규의 단독범행으로 나타나 있다.
하지만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던 박정희대통령을 시해하고 아무런 저항없이 스스로의 힘만으로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김재규가 생각 했을까?
만약 이렇게 생각 했다면 중앙정보부장으로서 전혀 자격이 없는 정신병자이다.
용인에 천재적인 박대통령이 이런 무능한 정신병자 김재규를 중앙정보부장이란 중책에 기용 했을까?
결론은 김재규가 자신은 절대적으로 안전하게 대통령이 될 것이라 확신하고 범행을 했다는 것이다.
거대한 규모의 공모자들이 없이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들 공모자들은 누구이며 10.26의 이면에는 어떤 음모가 도사리고 있었을까?
4)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음모라는데 대한 의문
미국의 31대 대통령이었던 케네디가 선거유세 기간중 달라스에서 오스왈드의 짓이라고 알려진 괴한의 총탄에 살해당했다. 그리고 오스왈드는 감옥에서 살해당하고.... 아직까지 범인이 누구란 것조차 명확히 밝혀지지 않은 영구미제 사건이다.
이정도는 되어야 세계 최고의 국가가 개입된 암살이라고 의심할 만 하지 않을까?
그런데 아무리 핵무기 개발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지만 우방국의 대통령을 살해해?
그것도 범인이 누구란 걸 뻔히 알리면서? 이런 뻔한 상황을 만들면서 까지 과연 미국이 그랬을까?
전세계의 비난과 외교문제까지 무릅쓰면서?
김재규가 CIA의 하수인이란 설도 있으나 이것도 전혀 설득력이 없다.
김재규는 김종필, 김형욱, 이후락에 이어 네 번째로 정보부장에 올랐으며 당시 상황은 카터 대통령의 철군에 맞서 자주국방을 강력하게 추진할 때였다.
재래식 무기뿐만 아니라 미사일과 핵무기를 개발하기 위해 해외 과학자를 불러들이고 있었으며 이 과정에서 중앙정보부장의 역할도 상당했을 것이다.
특히 김재규는 1977년 코리아게이트 사건시 미국 연방 하원의 프레이저 청문회에 나가 박정희의 유신 정권의 비밀스러운 사건들을 거침없이 폭로했던 김형욱을 살해한 의혹을 사고있던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미국 CIA의 하수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말이다.
특히 미국 CIA가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를 구해줄 수도 없고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수는 더더욱 없는 일이다.
수사과정에서 CIA가 우방국의 대통령을 살해했다고 밝혀질 경우 당하는 외교적 부담을 감안할 때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만약 미국이 개입이 되어 있다면 사전에 시해음모를 알고서도 그냥 묵인하는 정도라고 봐야 할 것이다.
5) 민주화를 위한 의거였다는데 대한 의문
2000년대 이후 김재규가 사형을 당하기 전에 옥중에서 박대통령의 유신정치를 비판하고 자신은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박대통령을 살해했다는 출처불명의 얘기가 흘러나오고 김재규를 [민주화열사]로 지정해야 한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나 참으로 한심하기 이를데 없는 생각이 아닐 수 없다.
[민주화]란 미명하에 반정부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색출하는 가장 중요한 위치에 있는 사람이 자신의 임무에 반하는 행동을 할리도 없고, 만약 김재규가 [민주화]를 위해 박대통령을 시해 했다면 혼자서 민주화를해?
[민주화]라는게 권력에 눈이멀은 사람들이 국민들을 호도하고 순진한 학생들 꼬드기기 위해 맑스주의와 김일성 주체사상을 도입한 것인데 중앙정보보장이 이런것도 모르고 있었다고?
[민주화]를 위해 그랬다면 [민주화운동]의 대부인 김영삼, 김대중이 김재규의 배후세력 이었나?
그렇다면 왜 합수부에서는 박대통령 시해의 배후세력으로 이들을 조사하지 않았을까?
참으로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지금까지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해동기가 참으로 터무니없는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박대통령의 시해동기는 정치적인 사항, 그중에서도 당시에 추진되던 정책과 연계하여 생각해 볼 수 밖에 없다.
6) 시해사건 당시에 추진되던 박정희 대통령의 정책
이상에 살펴본 바와 같이 지금까지 발표된 합조단의 시해사건 전반에 대한 발표내용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을 명쾌하게 밝혀주는데 살해동기와 배후, 혹은 관련자에 관한 사항등 너무나 미흡함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절대 권력자가 죽음을 당해야 했을까?
대통령의 시해 외에는 해결방법이 없는 절대절명의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왜 김재규는 대통령을 시해하고도 자신이 무사히 대통령 권좌를 차지할 것으로 믿고 시종일관 여유가 있었을까?
김재규의 수하들은 단순히 김재규의 개인적인 명령에 의해 대통령 시해에 가담 했을까?
어느 누구도 이런 의문점을 밝혀 줄 수 없는 지금,
이런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던 정책들을 세심히 살펴보고 이 정책들이 미칠 영향을 분석해 보는것이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1975년도부터 시해당시까지 박대통령이 추진하던 정책과 국내외의 주요 사건들이다.
① 1975년
인혁당 사건이 발생하고, 1975년 4월 30일 월맹군의 공격으로 사이공이 함락당하고 베트남이 멸망 하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미국은 닉슨독트린을 선언하고 주한미군을 철수하기 시작 하였으며 여기에 불안을 느낀 박대통령은 자주국방 강화를 선언하고 국산무기 개발에 심혈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② 1976년
7월2일 남베트남과 북베트남간의 적화통일이 되어 [베트남 사회주의공화국]이 성립되었으며,
8월 18일에는 판문점 도끼만행 사건이 발생하여 남북간에 긴장이 고조화 되었다.
③ 1977년
박정희 대통령은 북한의 위협과 수도권 인구밀집을 방지하고 국토의 균형발전을 위해 수도이전을 결단하고 2월 10일 “임시행정수도 이전계획”을 발표하였다.
그 외에 9월 6일에는 미국 법무부가 의회 로비 활동과 관련하여 박동선을 수뢰혐의로 기소하였으며 11월 11일에는 이리역 폭발사고가 일어났다.
④ 1978년
1970년 경부고속도로 개통이후 계속적으로 건설된 강남지역의 한강교량으로 강남개발이 본격화되었으며 군사적으로는 최초의 국산 장거리 미사일인 백곰(사거리 180km)이 개발되었다.
⑤ 1979년
신민당 총재였던 김영삼이 카터대통령 방문시 "한국에 압력을 넣고 원조를 중단하라."고 요청한 일 때문에 격분한 박대통령에 의해 의원직이 박탈되었고 이에 항의하기 위해 부마사태가 일어났다. 또한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파리에서 실종되었으며 박대통령이 시해되던 10월 26일에는 삽교천 제방공사가 준공 되었다.
삼교천 제방공사는 박대통령의 최후의 역작이었던 신행정수도 이전과 연계하여 인구800만의 자유무역지대와 20만톤 화물선 수십척이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는 가로림만 프로젝트의 핵심을 이루는 사업으로 자유무역지대와 배후공단에 용수를 공급하기 위한 2000년대 국토재배치계획의 핵심적인 공사였다.
이 정책들 중에 무엇이 박대통령의 죽음과 연관이 있었을까?
대통령이 죽음에 이를 정도로 이해관계가 있는 일이라면 핵무기 개발과 신행정수도 이전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박대통령의 사망 이후 30년이 지난해에 수도이전을 추진했던 또 한명의 전직 대통령이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그렇다면 수도이전을 추진했던 과거의 역사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서경천도를 추진했던 고려 인종시대와 화성으로 천도를 추진했던 조선의 정조시대를 살펴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보자.
● 고려의 서경천도계획과 묘청의 난
고려 인종때 사대사상과 부패로 정체된 체제를 개혁하고자 서경천도를 추진하던 묘청과 정지상, 백수한등의 서경천도는 기존의 개경세력의 극심한 저항에 부딛쳐 반란으로 비화 되었으며 이들은 기득권을 지키고자 하는 김부식등에 의해 모두 죽임을 당했다.
● 정조의 화성 천도계획
조선후기 개혁정치를 꿈꾸던 조선의 마지막 성군 정조는 기득권인 노론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개혁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아버지 사도세자 성묘를 핑계로 화성행궁을 짓고 비밀리에 천도를 추진했으나 49세라는 젊은 나이로 갑자기 사망하면서 무산이 되었다.
독살을 당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속속들이 밝혀지는 사료들에 의해 정순왕후를 정점으로 하는 기득권층인 노론세력들에 의해 독살되었다는 것이 거의 정설로 굳어지고 있다.
★800년전 수도이전을 추진했던 묘청과 그 일파의 죽음,
★200년전 개혁정치를 위해 수도이전을 추진했던 정조의 죽음,
★31년전 수도이전을 추진하다 부하의 손에 살해당한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그로부터 30년후 또다시 수도이전을 추진했던 어느 전직대통령의 의문의 죽음이 과연 아무런 연관이 없는 우연의 일치일까?
박대통령의 시해동기는 궁정동 술자리에서 찾을것이 아니라 과거의 역사에서 공통점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역사는 정의의 편이 아니라 승리자의 편이라는 사실을 알고 승리자들이 어떻게 역사를 자신에게 유리하도록 왜곡했는지 살펴 후세에 바른 역사를 물려주도록 해야 할 것이다.
7) 김재규의 박대통령 시해동기
더 이상 바랄것이 없는 제 2인자였던 김재규가 박대통령을 시해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다음과 같은 것들일 것이다.
① 시해후 절대적인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
② 현재의 직책보다 더욱 나은 위치를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③ 강한 시해 동기가 있어야 한다.
위의 동기중 ①과 ②의 조건에 해당하는 것은 바로 대통령 자리다. 자신의 안전이 틀림없이 보장되고 거기에 더하여 반드시 대통령이 된다는 확신이 없고서는 절대로 저지를 수 없는 일이다.
거기에 ③번, 즉 강한 시해 동기가 있어야 하다.
①②③번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조건은 과연 무었이었을까?
과연 자기 혼자서 일을 저지르고 대통령까지 될 수 있다고 자신했던 것일까?
만약 김재규가 CIA의 사주를 받아 시해한 것이라면 대통령 시해후 미국이 김재규를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수 있었을까?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단지 케네디를 죽인 오스왈드처럼 이용당하고 버려질 뿐이다.
이런 사실을 모르지 않을 김재규가 CIA의 사주를 받아 박대통령을 살해했다?
전혀 설득력이 없는 가정일 뿐이다.
그렇다면 이 나라에서 대통령을 살해한 김재규를 무사히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세력들은 누구일까?
과연 그들은 누구였을까?
어느 누가 과연 그런 힘이 있고 반드시 박대통령을 살해 해야만 하는 동기가 무엇이었을까?
● 시대적 배경
1) 5.16 군사혁명과 일심회(하나회) 구성
5.16 군사혁명이란 극단적인 방법으로 정권을 장악한 박정희 대통령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것을 매우 우려 했으며 항상 군부와 정치권의 동향에 신경을 쓰고 이를 방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자신의 혁명 동지들조차 완전히 신뢰하지 못하고 항상 경계해 왔으며 이를 위해 중앙정보부를 만들고 보안사를 만들어 정치인들을 감시하고 군부내의 동향을 감시해 왔다.
이런 와중에 1962년 대통령의 고향인 경상북도 출신인 손영길,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등을 중심으로 일심회라는 사조직이 생겼다.
이 사조직이 과연 박대통령의 묵인이나 허락없이 스스로의 친목을 위해 결성될 수 있었을까?
장교들이 다방에 가서 차한잔 마시는 것까지 보고될 정도로 철저한 감시가 이루어지던 시기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렇다면 결론은 단 하나, 일심회(하나회)는 박대통령의 필요에 의해 그의 의지가 반영되어 결성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즉, 박대통령은 자신의 친위조직으로 하나회를 결성하고 키워왔다고 볼 수 있다.
단적인 예로 하나회 장교들은 진급이나 인사에 절대적인 특혜를 받았고, 금전적으로도 상당한 지원을 받아 왔다.
심지어 하나회에 소속된 지휘관이 부대행사를 할 때는 지역내의 기관장들과 지역인사들까지 빠짐없이 참여하여 아낌없는 지원을 하였고 알수없는 소스로부터 금전적, 물질적인 지원도 많이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부대의 공금을 유용할 필요도 없었고 부하들에게도 아낌없이 베풀 수 있었다.
이렇게 하나회는 성장해 왔고 박대통령은 외아들까지 육사에 보내고 1년에 한번씩 졸업반생도들을 청와대나 경회루에 초청하여 회식을 베풀고 정부 내에도 정규 육사출신들을 들여놓아 개혁을 꾀하고자 소위 “유신사무관”이라는 제도까지 만들었다.
2) 구 군부의 고위층들은 군인이라기 보다는 준재벌(準財閥)이었다.
① 박정희 이전의 우리 경제는 군원경제
6.25가 끝나고 5.16 이후 상당기간까지 우리나라의 경제는 군원경제였다.
미국의 원조가 아니면 나라운영이 불가능 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는 거지국가, 바로 그것이 당시의 우리나라였다.
당시에 군생활을 한 사람들은 사병출신들까지 호시절(?) 얘기를 하곤 한다.
목재, 합판, 시멘트, 철근등 건축자재는 물론 식량, 유류, 각종 건설장비 및 차량에 이르기 까지 군원물자가 사회로 흘러들어 나라의 경제를 유지하던 시절이었다.
시멘트, 목재, 합판등의 건축자재가 차량째로 민간인들에게 넘겨졌고, 휘발유를 실은 화차가 통째로 넘겨지고, 심지어는 자재를 실은 화물차째 통째로 넘겨지기도 했다.
멀쩡한 건설장비에 시뻘건 페인트칠을 한 후 고철이라 위장되어 넘겨지기도 했다.
이렇게 하여 벌어들인 돈은 고스란히 고위층 군인들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 넘겨진 자동차가 얼마 전까지 GMC(일본발음 제무시)라는 이름으로 산판에서 벌목용으로 운용이 되었고 캐터필러의 불도저와 구레이다등 건설장비가 건설현장에서 운용이 되었다.
이렇게 군인들의 적극적인 애국(?)이 없었으면 대한민국 경제는 훨씬 비참한 처지였을 것이다.
아마도 미군들은 이런 사실을 알면서도 모르는척 묵인했을 것이다.
2차 세계대전을 통해 세계 유일의 경제대국으로 등장한 미국이 2차대전때 사용했던 장비와 넘쳐나는 물량을 은근슬쩍 처리하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② 당시 우리 군대는 영농군대
한편 나라예산이 부족해 군인들에게 부대 운용비는 물론 제대로 월급도 못주던 정부는 군인들 스스로 자력갱생 하라는 의미로 장교 하사관들은 부대에 나오는 쌀과 부식을 가져다 먹게 하고 부족한 사병급식을 위해 영농을 장려하였다.
그래서 부대 내에서 돼지를 키우고 밭을 만들어 채소를 키우도록 하였다.
그 당시 각급 부대에는 돼지키우고 채소키우는 영농병이란게 별도로 있었다.
이렇게 키운 돼지와 야채를 양심적인 지휘관은 부대원들에게 공급하기도 했겠지만 그런 사람들은 아예 진급 대상에서 제외되고 대부분의 지휘관들은 치부의 수단으로 삼았고 이렇게 벌어들인 돈은 뻔질나게 서울로 다니며 진급을 위한 로비자금으로 상납되기도 하였다.
③ 초급장교는 돈을 모아서는 안되는 분위기였다.
당시 군부대 PX는 부대장이 운영을 하였고 여기서 판매되는 중요한 품목중 하나가 막걸리였다.
PX 안에는 커다란 항아리를 묻어놓고 민간업자가 막걸리를 납품하면 물을 절반쯤 섞어 병사들에게 팔았다. 그리고 좀 더 많이 팔기 위해 갓 전입해온 장교들한테는 휴일날 당직을 맡기고(때로는 6개월정도 고정으로) 소대간에 운동시합을 시켜 사기진작이란 명목으로 회식을 시켜주도록 권장하였다.
물론 회식비용은 소대장등 초급장교들 주머니에서 나왔고...
공공연히 하는 말이 “초급장교들은 돈을 모으려 해서는 안된다. 병사들에게 쪼다소리 듣는다.”는 말이었다.
국민경제가 극히 빈약한 당시 상황으로는 병사들이 부모님께 용돈을 받기란 거의 불가능한 시기였고 이와같이 해서 PX가 벌어들인 돈은 부대운영비란 명목으로 모조리 지휘관들에게 들어간 것이다.
5.16이 일어나고서도 상당히 오랜기간동안 지속되다가 복지근무단이란게 생겨 PX가 그쪽으로 넘어갔으나 그후에도 상당히 많은 돈이 상급부대로, 정치권의 선배들에게 들어갔을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④ 군부개혁에 대한 저항의 상징 윤필용사건
박대통령은 군부를 개혁할 세력으로 정규육사 출신들, 그중에 핵심세력으로 하나회를 생각했던듯 하다.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진급시켜 군 요직에 배치하였고, 사기를 높여주고 그들의 의견을 상당히 존중하기도 했다.
구군부 출신들은 밑에서 빠르게 밀고 올라오는 정규육사출신 소장파 군인들의 기세에 상당한 위기를 느끼는 것이 당연했고, 이들을 견제 하고자 일으킨 사건의 하나가 당시 수도경비 사령관이었던 윤필용의 쿠테타 음모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 윤필용이 구속되고, 참모장 손영길을 비롯한 상당히 많은 육사출신들이 강제전역 당했으며 뒤늦게 모함이란걸 알았지만 박대통령으로서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이 키우던 새싹들을 잘라내는 뼈아픈 실책이었다.
박대통령 시해사건 이후에 일어난 12.12는 구군부의 정권장악 음모를 신군부가 저지한 사건이라 할 수 있다.
3) 한국 지하경제 재벌의 탄생
얼마전에 한국의 지하경제 자금이 전체 경제규모의 약 38% , 금액으로는 약 270조원 정도로 추산된다는 뉴스를 들었었다.
하지만 혹자는 한국경제의 50% 이상이 지하경제란 분석을 하기도 한다.
과연 이 자금의 주인은 누구이고 어떻게 한국의 지하경제가 형성 되었을까?
① 지하경제 형성의 출발점은 청계천개발
5.16 군사혁명이후 가장 먼저 착수한 사업중의 하나는 당시 서울시장이었던 김현옥에 의해 추진되었던 청계천 개발이었다. 6.25사변 이후 무허가 판자집 투성이였던 청계천을 헐어내고 상가를 만들었으며 부동산의 개발에 재미를 느낀 김현옥은 차후 강남지역 개발을 위한 자금의 형성을 위해 방대한 지역의 강남일대 부동산을 헐값에 매입하였다.
그 때까지만 하여도 땅은 오직 생산의 수단으로 알고 있었고 시골의 논과 밭의 가격이 서울의 주택가 땅값을 상회하는 실정이었다. 한강을 건널 다리도 거의 없었고 옛날부터 한양의 인분을 처리하고 야채를 심어 한양에 공급하던 말죽거리, 잠실등 강남 일대의 땅값은 더더욱 헐값이었다.
하지만 정치권의 핵심과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청계천과 서울시내 개발을 보고 싸구려 땅을 사들여 개발하면 황금으로 바뀐다는 사실을 알았고 정부에서 강남지역의 땅을 사들이는 것을 보고 다음엔 강남이란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이들은 강남 일대의 땅을 정신없이 사들였던 것이다.
과연 그들이 어떤 계층들이었을까?
오래 전부터 부유하게 살았던 부유층일 수도 있고, 전방에 근무하는 낭군님과 헤어져 서울의 집에 군용차량, 운전병, 당번병들을 두고 살면서 할 일이 없어 정치권에 줄을 대던 장군사모님족 일수도 있고, 정치권에 깊이 있던 사람들일 수도 있고, 이재에 밝은 사업가 일수도 있겠지만 직. 간접적으로 정부의 개발정책을 미리 알 수있는 사람들이었음에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들은 서로가 정보를 나누며 자신들끼리만 그룹을 지어 열심히 땅을 사 모았고 정부의 정책이 발표되기 한발 앞서 금싸라기가 될 땅을 미리 사재는 행위로 막대한 부를 형성하였으며 이들의 주무대는 한국경제의 노른자위를 형성할 강남일대였다.
그러면서 이들은 자신의 부와 신변을 지속해서 지켜줄 사람들을 키우기 시작 하였으며 평소에 직접 업무관계가 얽혀있지 않은 이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종교행사였다.
이들은 신(神)의 이름아래 세속의 이익을 위해 뭉쳤으며 가장 손쉽게 뭉칠 수 있었던 종교는 당연히 교세확장이 용이한 개신교가 중심이 되었다.
천주교만 해도 교황청과 교구청등의 통제를 받고 교구에서 생활비를 지급받는 신부들로서는 금전문제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꺼려질 수밖에 없고 교회 하나만 건립하려 해도 교구청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등 제한이 많았으며 불교 또한 승려가 머리깎고 도심 한복판에 마음대로 사찰을 짓기도 곤란한 등 제한이 많았음은 당연한 일이다.
이렇게 뭉친 이들은 하늘에 쌓을(?) 재산축적에 방해가 될 인물은 마귀의 누명을 쓰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처단하는데 양심의 거리낌마저 팽개칠 수 있었을 것이다.
※ 지하경제의 대부들이 키운 대리인들은 누구일까?
이렇게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재산과 신변을 지속해서 지켜줄 수단이 필요했을 것이다.
정부 내에도 이런 사람을 키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고 정권교체에 대비하여 야당에도 키울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이렇게 키운 사람들이 3김으로 일컬어지는 기성 정치인들과 그 후를 이어갈 이명박과 같은 사람들 이었음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흔히 하는 말로 큰손의 전화 한통화면 재벌 회장도 즉시 달려왔다는 소리가 있을 정도로 이들은 우리 경제의 보이지 않는 큰 손이었고 이들은 우리나라의 어둠 속에서 크나큰 영향력을 발휘하며 정책을 좌지우지하기도 하고, 서민경제를 죽였다 살렸다 하기도 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정주영씨가 자신의 가족들을 모아놓은 자리에서 이명박을 일컬어 “저놈은 종놈으로도 쓸 수없는 놈이다.”라고 했다는데 과연 그가 어떻게 현대건설의 사장까지 할 수 있었을까?
종으로도 쓸 수 없는 놈이 현대건설의 사장이 된 것도 이해할 수 없는데 현대건설을 거의 말아먹다시피 했는데 또 어떻게 무사할 수 있었을까?
또한 정주영씨가 대통령에 출마하자 무슨 이유로 지금까지 키워준 정주영씨를 배신하고 재빨리 김영삼의 밑으로 들어가 현대 패밀리의 표를 분열시키고 정주영씨의 발목을 잡는 역할을 했을까?
이런 무능한 이명박을 매스컴을 동원하여 기적을 이룬 사람으로 미화시키고 대통령까지 만든 세력들은 누구일까?
이 문제는 다음 기회에 더 언급하기로 하자.
②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강남개발
경부고속도로가 건설되고 한남대교(제3한강교)가 연결되면서 강남지역도 개발의 가능성이 열리게 된다. 청계천 개발이후 강남지역의 땅을 싹쓸이한 초기의 투기족들은 정부의 개발계획을 미리 빼내고, 개발계획 수립시 자신들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압력을 넣고 박대통령의 개혁정치에 사사건건 보이지 않는 저항을 하기도 하였다.
월남전 패망이후 위기감에 단행한 일련의 긴급조치로 인한 정치적 약점과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로 인해 미국과의 관계가 극도로 악화된 상태에서 학생층을 중심으로 [민주화운동]이란 이름으로 크고 작은 반정부 데모가 끊이지 않았다.
학생운동의 배후세력으로 북한을 의심하기도 하지만 바로 이들 지하자금의 주인공들이 한짓이 아닌가 의심된다.
왜냐하면 이런 움직임에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며 당시 4대군사노선 완성에 여념이 없던 북한이 여기에 소요되는 충분한 자금까지 지원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그동안 키워온 세력들을 동원해 [민주화]란 구실로 학생들을 선동하고 자금을 지원하여 행동에 나서도록 부추겼을 것이다.
물론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움직였다고 볼 수도 있으나 학생들을 포섭하여 행동에 나서게 할 때까지는 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포섭 대상자를 술집(선술집이라도)으로 데리고 가서 술을 마시며 현실정치의 불만을 토로하고 [독재타도]를 위해 학생들이 나서야 한다고 선동하고 피라밋식으로 행동대원들을 포섭해 나가야 하니 상당한 자금이 소요될 것은 뻔한 일이다.
대남적화를 필생의 염원으로 생각하던 김일성에게도 이런 절호의 기회는 절대로 놓칠 수 없는 일이었으며 학생운동에 깊이 파고들게 되었다.
당시 박대통령은 상당한 고민과 번민에 쌓여 맨정신으로는 거의 자신을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 같다. 매일 인사불성이 될 정도로 술을 마시고 경호원들에게 업혀 들어올 정도였다는 당시 경호원들의 이야기도 있다.
이런 박대통령을 위로하고자 경호실장이었던 차지철은 지속적으로 술과 여자를 제공하였고 박대통령의 후계를 노리는 자들의 움직임도 더욱 노골화하고 은밀해 졌다.
③ 임시 행정수도 이전계획과 2000년대 국토 재배치계획
박대통령이 최후의 야심작으로 추진했던 계획이 바로 1977년 2월10일에 발표한 임시 행정수도 이전계획과 2000년대 국토 재배치계획이었다.
급격히 늘어나는 서울의 인구를 분산하고, 서울에 대한 북한의 직접적 위협을 피하고, 2000년대초반에 국민소득 3만불 이상의 선진복지국가를 만든다는 야심찬 계획이 바로 임시 행정수도 이전계획과 2000년대 국토 재배치계획이었고 임시수도의 경제기능을 지원할 방법이 바로 가로림만 프로젝트였다.
물론 그와같은 표면적인 이유 이외에 이미 감당할 수 없을 정도의 거대한 세력으로 자리잡은 개혁저항세력들을 일시에 무력화 시킬 이면적인 이유도 있었을 것이다.
1977년 2월10일 발표된 수도이전 계획은 이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날벼락 이었을 것이다.
강남의 거대한 토지를 깔고앉아 호시탐탐 개발의 기회만 노리고 있는 이들에게 수도를 이전하는 것은 하루아침에 자신들의 기득권을 모조리 잃게 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착실하게 진행되어 가장 주요한 기반사업인 삽교천 제방공사가 완료되었다.
삽교천 제방공사는 단순한 제방공사가 아니고 가로림 신항만을 중심으로한 인구 8백만의 공업자유화지역에 용수를 공급할 가장 중요한 기반시설이었다.
이제 국민들에게 이와같은 야심찬 계획을 발표하고 추진하기만 하면 되는 시점이었다.
박대통령으로서는 참으로 가슴벅찬 일이었고, 개혁저항세력인 지하재벌들에게는 더 이상 거사를 미룰 수 없는 시점이었다.
이런 거대한 사업을 멈추기 위해서는 박대통령의 하야나 죽음 이외에는 방법이 없었으며 스스로 하야할리가 없는 박대통령이고보면 이 세력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박대통령 시해 외에는 없었을 것이다.
박대통령은 누가 시해했나?(2)
● 박대통령 시해동기와 배후세력
1. 시해 동기
1) 지하경제 구성세력들의 위기감
OECD의 발표에 의하면 한국의 지하경제 규모가 GDP의 38-50% 정도 되는 것으로 추산하고 있으나 어느 누구도 정확한 규모는 알 수 없고 약 270조 정도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런 지하경제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개발정책과 함께 형성되었고 역대 대통령들의 강남지역 개발정책에 편승하여 눈덩이처럼 불어나게 되었다.
이들에게 박정희 대통령의 수도이전계획은 어떻게든 막아야할 치명적인 것이었다.
자손대대로 대한민국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기틀이 송두리째 망가지고 수도가 이전한 허허벌판에서 강남개발의 효과는 반감이 되지 않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박대통령의 남다른 추진력으로 하루하루 진행되어 가는 수도이전과 자유무역지대 형성을 보며 초조감에 못이긴 이들에게 박대통령을 살해하고자 하는 강력한 동기가 형성되었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통령을 시해할 주인공으로는 최측근에서 항상 무장을 할 수 있고 강력한 무력수단까지 가지고 있는 같은 동료 중앙정보부장 김재규가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시해의 댓가로 대통령의 자리를 제안 했을 것이고....
그들에겐 박대통령이 아니면 어느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이 없는 일이었고 지하경제를 형성하고 있던 세력의 하나로 추측되던 김재규가 된다면 더욱 좋은 일이었을 것이다.
2) 정승화를 비롯한 구 군부세력의 위기감
박대통령의 개혁정책으로 상당한 불안감과 불만을 가진 사람들 중에는 구 군부의 고위층들도 포함이 되어 있었다.
군 개혁으로 검은돈의 커넥션이 차단되었으며, 박대통령의 강력한 비호로 빠르게 치고 올라오는 하나회를 비롯한 정규육사출신 소장파 장교들의 득세는 이들에게 상당한 불안과 위기감을 주었다.
이들이 내심 불만을 가지고 있었을 것은 뻔한 일이고 직접 시해에 가담은 하지 않을지라도 묵인 및 동조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박대통령 시해후 궁정동 만찬장 가까이 있던 참모총장 정승화의 행동을 보면 최소한 김재규의 박대통령 시해를 묵인한 것이 확실시된다.
이들에게 박대통령 시해는 자신들의 권력을 좀 더 오랫동안 독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3) 박대통령의 핵무기 개발에 대한 미국의 불안감
월남 패망이후 미국은 패전의식에 젖어있었고 주한미군 철수를 단행 했으며 이에 위기감을 느낀 박대통령은 방위산업을 육성하기 시작하고 핵무기 개발까지도 고려하였으며 이를 주한미군을 철수하고자 하는 미국에 대한 위협수단으로 활용하기까지 하였다.
남한이 핵무기를 개발하면 일본, 대만, 북한까지 개발하게 되는, 미국으로서는 가장 바라지 않는 상황이 아닐 수 없다.
남한의 사정을 속속들이 알고있고 모든 정보에 깊이 개입하고 있던 미국이 한국내의 이런 움직임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은 내정간섭이란 이유로 모르는 척 했을 것이며 이들 세력들은 미국의 승인(?)이라는 강한 지지까지 받은 것으로 믿고 있었을 것이다.
미국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든....
2. 시해배후 및 주도세력
이상의 여러 가지 정황상 시해의 배후 및 주도세력들이 이들 외에는 생각할 수 없다.
이들은 박대통령의 개발정책에 깊이 개입하고 편승하여 거대한 지하경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이것을 계속 지켜 나가기 위해 박대통령 시해라는 최후의 수단을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시해 이후 강한 군사력의 동조를 얻기 위해 박대통령의 정규육사출신 편애에 불만을 느끼고 있던 구군부 고위층들을 비호세력으로 포섭했을 것이며 이것이 표면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12.12 사태라 할 수 있다.
● 박대통령 시해 및 숨겨진 의문점
1. 시해 과정
박대통령의 시해과정에 대해서는 너무나 명확히 밝혀져 있기 때문에 더 이상 언급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2. 시해 이후 배후세력은 왜 침묵했나?
박대통령 시해후 김재규가 취한 행동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우선 그의 태도가 너무나 당당하고 뻔뻔스러웠다는 점이다.
뉴스를 보는 국민들이 분노해서 펄펄 뛸 정도로 여유로웠으며 자신은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라 자신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무엇이 그를 이렇게 자신있게 만들었을까?
하지만 그의 그런 자신감은 너무나 허망하게 끝이나 버리고 시해에 대한 모든 책임을 지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 버렸다.
하지만 아직도 믿을 수 없는 것은 최후의 순간까지 너무나 여유롭게 보였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김재규는 끝까지 배후세력이 자신을 구해줄 것이라 믿고 있었던 것 같다.
그의 너무나 여유로운 모습 때문에 혹자는 그가 독재를 청산하고 민주화를 일으키기 위해 살신성인의 정신으로 자신을 희생했다고 생각하기도 하고,
혹자는 미국이 개입했기 때문에 CIA가 구해줄 것이라 생각하고, 심지어는 사형을 당하지 않고 비밀리에 미국으로 건너가 성형수술후 아직도 살아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http://cafe.daum.net/revelation1/Hdhe/607)
왜 이들 배후세력은 아무런 행동도 하지않고 침묵했을까?
1) 신군부(전두환)의 재빠른 행동 때문에 기회가 없었다.
당시 전두환이 사령관으로 있던 보안사령부는 군부내의 모든 정보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심지어는 참모총장의 움직임까지 속속들이 파악하고 있어 사전에 정승화의 움직임을 짐작하고 행동을 하기 전에 재빨리 김재규를 체포한 것이다.
그래서 행동을 할 기회가 없었다고 볼 수 있다.
2) 우유부단했던 정승화의 성격
정승화는 성격이 우유부단하여 과감한 행동을 하지 못했다.
12.12사태 이후 사람들은 정승화의 우유부단을 가리켜 "죽쒀서 개줬다.“고 비웃을 정도였다.
하지만 정승화는 시해의 주도세력이 아니고 김재규등 주도세력을 위한 들러리 역할을 해야했던 처지에 있었고 구체적인 거사계획까지 전달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
당시 계엄사령관이었던 정승화는 자신이 박대통령 시해사건에 깊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엄사령관이라는 직책상 결과적으로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진행이 될 것이라 확신했을 것이다.
3) 목적을 이룬후의 토사구팽이었다.
배후세력들에게는 목적을 이룬 후 박대통령 이후 누가 대통령이 되든 상관이 없었을 것이다.
절차상으로 보면 당연히 국무총리였던 최규하가 이어받을 것이고 그 다음에는 그동안 자신들이 키워놓은 세력들(?)중의 한명이 선거를 통해 자연스럽게 대통령이 될 것이라 생각했을 것이다.
오히려 시해의 주범이고 공동세력인 김재규가 대통령이 된다면 자신들의 약점을 틀어쥔 김재규로 인해 상당한 불편을 느껴야 하기에 자신들은 위험을 감수하지 않고 침묵했던 것이 아닐까?
아마도 김재규는 사형이 집행되는 순간까지 자신의 배후세력들이 자신을 구해주고 대통령으로 만들어 줄 것이라고 굳게 믿었을 것이다.
오히려 배후를 밝힌다면 자신을 구해줄 세력이 없어질 것이란 생각 때문에 끝까지 침묵하며 목에 밧줄이 걸리는 순간까지 자신의 사형을 믿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시드니 셀던 원작의 [깊은밤 깊은곳에]란 영화의 비련의 여주인공처럼....
3. 배후세력과 5공세력과의 연관성
(1) 김재규의 사형집행과 민주주의 회복발언에 대한 평가.
박대통령을 시해한 김재규는 최종 사형선고가 내려진지 4일만인 1980년 5월 24일 사형을 당했다.
그날은 김대중이 배후조종한 5.18 광주폭동이 막바지에 접어든 날이었으며 이와는 상관없이 5공 주도세력들이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만들어 최규하 대통령의 최종결재를 기다릴 때였다.
국가원수를 시해한 사람에 대한 사형 치고는 너무나 성급한 사형이 아닌가?
통상 최소한 1년 이상이 걸려야 정상인데 한나라의 정보를 한손에 쥐고있던 중요인물, 김형욱 살해의 배후인물로 의심되고 대통령 시해범이라는 중범 치고는 섣부른 느낌이다.
무엇이 이렇게 때맞추어 서둘러서 그를 사형시키게 했을까?
2008년 1월 25일 뉴스에서 [김재규 옥중면담록 최초공개]란 제목으로 김재규의 옥중 면담록이 공개 되었다.
거기서 그는 한결같이 [자신은 자유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박대통령을 시해했다.]며 자신을 사형시키면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온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고 한다.
이 발언으로 과거사위에서 김재규를 [민주화인사]로 하자는 논의도 있었으나 참으로 터무니 없는 말이 아닐 수 없다.
호시탐탐하는 북한의 위협 속에서도 강력한 경제개발 정책으로 연 10%대의 경제성장을 이루던 당시 정권의 2인자가 국가의 상황도 모른채 종북세력들이 주장하는 민주화 운운 했다는 것도 말도 안되고, 김재규가 그런사람 이었다면 박대통령은 절대로 그에게 중앙정보부장의 중책을 맡기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람들의(대중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고 판단력이 미비한지 알려주는 증거일 뿐이다.
가능성이 있다면 박대통령의 수도이전을 반대하기 위해 [민주화]를 표방하는 자신의 동조자, 혹은 배후세력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라고 볼 수 있다.
아마도 김재규는 사형을 당하는 최후의 순간 까지도 자신의 사형 사실을 모르고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는 그렇게 토사구팽 신세가 되어 사라져 갔다.
그의 사형 이면에는 용도가 끝난 그를 부담스러워 하는 개혁 저항세력과, 너무나 거대한 세력에 대한 제거 보다는 그들의 약점을 잡아 정권을 획득하려는 5공세력들간에 결탁이 있었으리라 보는것이 타당할 것이다.
(2) 김재규의 배후세력과 5공과의 결탁
본인이 생각하는 것이 단지 꾸며진 소설같은 얘기 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도 세상 어딘가에선 소설같은 얘기가 끊임없이 반복되며 진행되고 있다.
바람에 스치는 풀잎 하나도, 우리가 하루하루 헤쳐가는 평범한 일상에도 언제나 인과율이 적용된다.
하물며 세계 최빈국을 불과 20년도 안되는 짧은 기간내에 세계를 이끌어가는 선진국의 대열에 진입시킨 거대한 인물의 죽음 뒤에 도사린 인과와 이해득실이 그렇게 간단한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5공 주체세력들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거대한 집단을 이루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들을 발본색원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보다는 그들과 타협하여 몇년간의 권력과 영화를 누리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1987년 6월 28일 늦은밤과 6월 29일 이른새벽 사이 청와대의 어느 방에서 일어난 정권을 두고 치열한 다툼을 하던 현직대통령과 대통령을 꿈꾸던 두 동기생간의 알 수 없는 은밀한 대화가 바로 그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때부터 약점이 잡힌 전임자는 남은 기간동안 옴짝달싹 못하고 침묵하다가 물러나고 어느 산속의 작은 암자로, 교도소로 밀려가고 끌려 다니면서도 온갖 누명을 다 뒤집어 쓰고도 말못하고, 심지어는 명예를 회복시켜 준다는 어느 우익세력의 한결같은 염원에도 침묵으로 일관하며 심지어 모든 과거를 묻어두기 위해 사실을 밝히는 것을 적극 반대하는 입장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전두환을 비롯한 5공 하나회 출신들에 대한 박대통령의 애정은 참으로 각별한 것이었다.
이런 애정을 기울인 박대통령의 시해 배후세력들과 결탁하여 대통령이 되었다는 사실은 이들에게 5.18 광주사태의 주범이란 누명보다, 살인마란 비난보다 더욱더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이 바로 5공세력들이 5.18의 진실을 밝히는데 나서지 못하고 오히려 묻어두려고 의도하는 원인이 아닐까?
그리고 대통령이라는 허황된 직책에 눈이 멀어 사악한 적과 손잡았던 후임자도 자신이 전임자와 함께 저지른 인과율에 약점을 잡혀 재임기간 내내 사악한 파트너들이 이끌어가는 대로 끌려다니며 그들의 요구대로 들어주고 돈이나 챙기다 영어의 몸이 된건 아닐까?
(3) 꿈에도 박대통령이 나타날까 두려운 5공이후의 세력들
우리나라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는 사실은 우리가 세계에 당당히 내세우며 자랑삼아야 할 가장 큰 자부심이다.
경제개발에 성공한 나라치고 박대통령의 경제개발을 모방하지 않은 나라가 없고 지금도 세계 각국에서 우리나라의 새마을운동을 배우기 위해 노력한다.
"새벽종이 울렸네.새아침이 밝았네. ...."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조금은 유치하기도 한 가사이고 곡이지만 새마을운동이야 말로 인류사에 길이 남을 자랑스런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새마을운동은 우리를 가난에서 구해낸 화두이고 인류를 가난에서 구할 수 있는 바이블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 흔한 기념관 하나 세우지 못하고 동상하나 제대로 없다.
나라를 말아먹은 대통령도 버젓이 살아서 부끄러운줄도 모르고 자신의 기념관도 부족해 동상을 금칠해(?) 세워놓고, 우리 민족의 머리위에 핵무기를 올려놓도록 북한을 지원한 사람도 여기저기 기념관에 별의별 시설 다해놓고 이 땅이 좁아라 동상투성이로 만들어 가는데 박대통령 기념관 하나 없다는 것은 국제적인 망신이 아닐 수 없다.
기념관은 고사하고 국민들이 행여나 박대통령의 진면목을 알까봐 전전긍긍하며 심지어 역사까지 모조리 왜곡해 자라나는 세대들에게 끊임없이 독재자란 잘못된 이미지를 심어주기에 여념이 없는 모습이다.
박정희 컴프렉스가 아니라 박정희 공포증이 아닐까?
이들은 왜 국민들이 이미 30여년 전에 세상을 떠난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진실을 알까봐 두려워 하고 경제개발보다는 독재를 강조하고 자신들의 민주화 성과만 강조하는 것일까?
[민주화]라는게 고작 세계에서 가장 비참하고 가난한 북한의 김일성주체사상을 도입한 부끄러운 것이란걸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인데....
10.26은 단순히 경제개발을 위해 헌신하고 서민의 삶을 걱정하던 걸출했던 지도자 한명이 비운에 사라져간 과거의 역사가 아니다.
우리가 10.26에 대해 깊이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10.26이 지금도 계속되는 역사라는 점이다.
김재규와 공모하여 박정희 대통령을 살해한 범죄자들이 그 이후 우리의 국정과 경제를 자신들의 의도대로 이끌어 왔고 지금도 그렇게 조정해 나가는 것이다.
이들은 민주화란 이름으로 국가를 농단하고 있으며 진정한 경제개발 보다는 부동산 투기로 거품을 만들어 대한민국의 부를 독식해 가고 있으며 심지어 적과 내통하는 짓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은 아닐까?
이들에게 북한의 붕괴가 가져올 경제시스템의 변화가 두려운 것이며 부동산 거품이 꺼지지 않도록 하고 북한이 무너지지 않도록 지탱하기 위해 대북지원의 대열에 앞장서는 것은 아닐까?
10.26의 재조명 없이는 진정한 민주주의도, 진정한 국가경제도 이룰 수 없다.
지금도 그들은 거대한 힘을 이용해 자신들의 범죄를 미화하며 박정희 대통령을 마치 끔찍한 살인마요 사상 유례없는 독재자인양 오도하고 있는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이 염원하던 21세기의 대한민국은 진정한 복지국가로 전 국민이 풍요롭게 살며 민족중흥과 인류공영을 선도하는 진정한 선진국 이었다.
100년전 이등박문을 저격하여 민족의 자긍심을 일깨워 주었던 안중근 의사의 쾌거도 중요하지만, 1961년 5월16일 3,600명의 젊은 군인들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와 18년간의 길지않은 기간에 5천년 역사동안 이루지 못한 거대한 역사를 이루고 31년전 자신이 거느리고 한강을 건너왔던 숫자와 똑같은 3,600명의 인원의 품에 안겨 전국민의 오열속에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한강대교를 건너 역사속으로 떠나간 분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된다.
지나친 결백이 혹시 독선이라 비난받을까봐 말없이 남편의 뒤에서 궂은일을 마다않으며 백목련처럼 살다가 적의 흉탄에 비바람에 스러지는 백목련처럼 떠나가신 그 분을, 머리가 하얗게 센 노인들조차 어린 그녀를 어머니라 부르며 오열하던 비운의 역사를 결코 잊어서는 안된다.
그로부터 수십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또다시 새봄이 오면 어김없이 이땅에는 하얀 백목련이 흐드러지게 피어나듯 대한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그분들의 모습은 겨레의 기억에 영원히 남아있을 것이다.
아무리 파렴치한 역도들이 그분의 업적을 깎아내리려 발버둥쳐도, 자신의 얼굴을 내세우기 위해 그분의 모습을 시궁창에 팽개치고 자신의 동상을 만들어 금칠을 해도 이미 그분의 업적은 세계사의 선두에 우뚝 서있어 더 이상 깎아내릴 수도, 더 이상 짖밟을 수도 없이 되어 버렸다.
그분은 국가의 안보를 위해서라면 자신의 생사조차 초개같이 여겼고,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공산주의식 경제계획 이론을 받아들이기도 서슴치 않았고, 심지어는 적에게 고개도 숙일줄 아는 분이었다.
등소평의 黑猫白猫론이 바로 박대통령의 경제발전 업적을 모방한 것이란걸 이들은 알까?
경제발전을 위해 그때까지 생각지도 못했던 박정희 대통령의 1,2,3,4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본받아 과감하게 자본주의 경제를 도입한 것이 바로 黑猫白猫다.
東北工程과 한글工程만이 두려운가?
이미 중국은 박정희工程까지 도입하여 우리가 버린 박정희를 가져갔다.
그 결과 불과 30년도 안된 사이에 세계경제를 주무르는 세계에서 두 번째의 경제강국을 이루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어떤가?
박대통령 사후 5공정권만이 박대통령의 전철을 일부 받아들였을뿐 그 이후의 정권들은 박대통령이 이루어놓은 경제적인 부를 몽땅 가로채기 위한 정책을 지속해 왔을 뿐이다.
실질적인 경제개발 보다는 인플레와 부동산 거품을 키워 박대통령시절 굳건하게 키워놓은 중산층을 초토화시켜 이들이 가진 부를 몽땅 가로채는 정책을 지속해 왔을 뿐이고, 우량자산의 절반을 외국의 투기자본에 팔아먹고서도 이것을 [외국인투자]라고 국민을 우롱하는 자들이다.
무너져 가는 진짜 살인마 김일성 일가가 통치하는 김가왕조 북한정권을 수십조원의 자금을 지원해 살려놓아 북한주민의 고통을 더욱 크게 해 놓고, 언제 우리의 머리위에 떨어져 민족이 공멸할지 모르는 핵무기를 "민족이 가져다주는 행복"이라 말하고 있는 자들이다.
친인척 명의로 4대강 강변에 엄청난 규모의 땅을 사 놓고 수십조원에 달하는 국민의 세금을 들여 유람선 뱃길을 만들어 놓고 환경평가도 제대로 하지도 않고 강바닥을 파헤쳐 강물을 오염시키며 모래를 팔아먹고, 곳곳에 댐을 만들어 깅변 곳곳에 호화주택 단지를 만들어 자신들의 땅값이 수백배, 수천배 오르도록 해 놓고 이것을 국민들에게 깨끗한 물을 공급하기 위한 역사적 사업이라고 하는 자들이다.
이렇게 파헤친 강변의 옥토로 인해 채소값이 폭등하고 배추한포기에 만원이 훨씬 넘는 물가고로 서민들의 생지옥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사상 유례없는 경제성장", "사상 가장 높은 GDP 달성" 이라고 우롱하는 자들이다.
2000년대 실질국민소득 3만불의 복지국가를 추구하던 박대통령의 꿈을 짖밟고 올라선 민주화세력과 그들의 배후세력들의 추악한 음모를 깨닫기 전에는 대부분의 국민들에게는 암담하고 비참한 미래가 있을 뿐이다.
우리가 버린 박정희를 국민의 힘으로 다시 찾아오지 않는 한 우리는 영원히 2류국가, 3류국가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첫댓글 대단한글입니다-설득력도있고-충분히사실적인내용입니다-글쓰신분은안목이뛰어나셔서심연을들여다볼수있는아주현명하신분같습니다-좋은글감사~
새로운 시각을 열어주는 대단한 글 감사 합니다 ^^
새벽달님의 글 너무나 놀랍고 합리적입니다. 선생님의 애국적인 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즐독했습니다 ..온정신을 집중해서 정독했답니다 ..
감사 드립니다
생각하지 못 했던 사고의 전환을 하게 되네요 좋은글 감사합니다
너무 놀라운 글입니다. 또한 간결하면서도 논리정연하고, 엄청난 설득력을 가진 글이요 내용입니다.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김재규 김대중 김일성 3명의 짓거리입니다. 어떻하면 중앙정보부장이나 이런 사람을 포섭해서 박대통령을 제거하려고 수단방법 가리지 않았던 악마 왜엔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우익은 절대로 그런 짓 못합니다.
늘 듯기만 하고 그럴거야라는 추측,,! 많이 배우고 갑니다,
머리가 멍합니다
너무나 설득력 있는 명석한 해석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