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맞은 후유증으로 정신분열 증세까지 나타나
증언자 : 이영대(남)
생년월일 : 1962. 12. 3(당시 나이 19세)
직 업 : 무직(현재 무직)
조사일시 : 1989. 1
참고사항 : 이영대 씨는 당시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다며 증언하기를 거부해, 동네 통장에게 구술한 내용과 법원에서 조사받을 때의 기록을 토대로 해서 정리한 것이다.
개 요
5월 20일 금남로 서석병원 앞에서 구타당한 후 상무대에 끌려갔다. 그곳에서 조사받던 중 전신구타로 실신, 광주 미군부대 공터에 버려졌다. 깨어나 집으로 돌아오다 용봉동 천일버스 종점 다리에서 또 체포되어 31사단 유격훈련장에서 조사를 받았다. 그 후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켜 병원에 입원 치료를 받았으나 현재까지 후유증으로 사회생활이 어렵다.
신문배달, 심부름
내가 4살 되던 해인 1965년도에 큰아버지의 권유로 청풍동에 있던 땅을 팔아 강원도로 이사를 했다. 그곳에서 일이 잘 안 풀려 다시 광주로 내려와 정착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머니가 생선장수, 날품팔이로 가정을 꾸려나가셨으나 뜻밖의 사건으로 인해 돌아가셨다. 그로 인해 나와 여동생들은 국민학교를 졸업하고부터는 스스로 학비를 벌기 위해 일을 했다.
중학교 2학년 때 중퇴하고 신문배달, 병원에서의 심부름, 이것저것 안 해본 것 없었다. 그러면서도 주산학원에서 4급 자격증을 얻기도 했으며 사고 전에는 성경엠마학교 과정을 수료했다.
대학생으로 오해받아
1980년 5월 20일 오후 2시경 시내서점에서 책을 구입하기 위해 오치동 집에서 나왔다. 삼복서점에서 성경책 1권을 산 후 금남로 서석병원 앞 길을 걸었다. 일반군인 4명과 얼룩덜룩한 옷을 입은 군인들이 나를 무조건 잡더니 족치듯이 물었다.
"대학생이지?"
그러면서 군화로 가슴과 정강이를 수없이 차고는 군트럭에 실었다. 나와 함께 탄 사람들은 7명이었다. 잠시 후 양동 쪽을 지나 군부대에 도착했다. 함께 잡혀 온 사람들과 철창으로 된 방으로 들어갔는데, 의자 같은 것은 없었고 문은 쇠로 되어 있었다. 방에는 일반군인과 공수대원으로 보이는 군인 7명 정도가 끌려들어 온 사람들에게 이름, 주소 등을 물었다.
"너, 대학생이지?"
"저는 대학생이 아닙니다."
하도 답답해서 나는 주소를 말하면서 확인해 보라고 했다. 10분쯤 지난 뒤 학생이 아니라고 한 사람만 붙잡고 다그쳤다.
"학생이지?"
"군인을 죽였지?"
"총은 어디다 감췄어?"
그들은 혁띠를 풀어 마구 구타했다. 심지어는 총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때려 실신하기도 했다. 조사 때 알지도 듣지도 못한 대학내 서클이 거론되기도 했다. 내가 실신한 후 누군가가 흔들어서 깨어보니 주위는 어두웠고 나는 미군부대 근처 공터에 누워 있었다. 현기증이 일어나고 머리는 빠개질 것 같았다. 온몸에 무수히 피멍이 들어 있었고 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얼굴의 상처는 폭도라는 증거
그 근처에 있는 어떤 아주머니 집에서 임시치료를 받았다. 그 아주머니가 빵, 우유까지 사줘서 먹고 하룻밤을 그 동네에서 묵었다.
다음 날 광주를 향해 걸어오다가 백운동 검문소에 이르렀을 때였다. 군인 10명이 검문을 하고 있었다.
"주민등록증이 왜 없느냐? 학생이지."
"아닙니다."
그들은 내 말을 듣고 무릎을 꿇고 앉게 했다.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면서 군화발로 정강이를 몇 차례 찼다. 그러더니 가라고 해서 공동묘지 쪽으로 해서 기다시피 금남로를 지나 집을 향해 가고 있었다. 용봉동 천일버스 종점 부근 다리에 이르자 31사단 군인 20여 명이 참호 속에 있었다. 그들은 내 얼굴에 상처가 있는 것을 보더니 폭도로 규정하고 무조건 지프차에 실었다. 군인 3명과 함께 31사단 유격 훈련장에 도착했다. 그곳에 정차하고 있는 군용 버스에 타라고 해서 들어가보니 7, 8명의 군인들이 또 같은 질문을 했다.
"대학생이지?"
"총을 어디에 두었느냐?"
"군인들을 죽였지?"
하면서 주먹으로 가슴, 얼굴 등을 무수히 때렸다. 다시 실신한 나를 군인 3명이 질질 끌고 그곳 사령관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비몽사몽간에 대령 계급을 단 군인이 책상에 앉아 주소가 어디냐고 물어 오치동이라고 말하였다. 오치동에 전화를 걸어 예비군 중대장과 통화하는데 그 내용은 잘 모르겠으나 오치동 예비군 중대장과 통화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통화가 끝나자 나를 옆방으로 끌고 갔다.
"총 어디에 숨겼느냐?"
"폭도지? 군인들도 죽였지?"
똑같은 말을 물으며 혁띠를 풀어 3, 4분 동안 마구 때렸다. 맞다보니 실신하였는데, 오치동 중대장이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나를 뒤에다 태우고 집에 데리고 갔다.
정신분열 증세
집에 귀가한 후에는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치료도 받지 못하고 힘에 겨운 나날을 보냈다. 결국에는 정신착란증을 일으켜 가출하게 되었다. 2년 동안 거지생활을 하였다. 나는 실지 기억은 없지만 조금 회복이 되었을 때 귀가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정신착란 증세가 더욱 심해져서 집을 망치로 두드리고 방장도 뜯으려고 했다고 한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경찰서에 신고해서 나주 국립정신병원에 입원시켰다.
1983년 8월 20일 방위병으로 군에 입대했으나 가정의 여러 문제로 탈영을 시도했다. 그러나 잡혀서 수도군단 영창에서 3개월 살다가 기소유예로 나와 상무대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다시 탈영을 시도해 상무대 영창에서 2개월 반을 살았다.
내 생각에는 집안 형편상 분명 '가사제대'라고 생각되어 울면서 군사재판장에서 나는 '가사제대'라고 외쳤다. 사단장 최종확정 8개월을 받고 광주교도소 국보법 수용 특사에서 소지와 수발을 하다 복역 6개월 만에 모범수로 가석방되었다.
그 후 다시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켜 나주 정신질환요양복지원에서 1985-1986년에 걸쳐 5개월 동안 요양했다. 면회온 통장과 아버지에게 철조망에 매달려 집에 데려가달라고 애원하며 울부짖었다. 그곳에서 더 치료가 되지 않아 통장과 여동생의 도움으로 서울 퇴계로 소재 서울신경정신과 변용욱 박사의 치료를 받았다.
그곳에서 69일 동안 치료를 받다가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다시 돌아와 생활하고 있다. 그러나 정신적인 고통으로 인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데다가 신경통, 신장염, 기억장애 등의 증세가 합병증으로 나타나 괴로워하고 있다.
역사를 원망하고 사회현실을 원망해 보지만
민정당의 노태우 대통령 앞으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편지를 여러 통 냈으나 모두 형식적인 인쇄물의 답장뿐이었다.
현재 생활은 아버지가 공터에 농사를 짓고 내가 이런저런 장사를 하지만 약값이 많이 든다. 또 정신분열 증상을 일으켰을 때 돌을 집어먹어 최근에는 맹장수술까지 받았다. 역사를 원망해 보고 사회현실을 원망해 보지만 돌아오는 메아리는 속절없을 뿐이다. 요즘에도 계속 불면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불의에 항거하여 역사의 맥을 장식한 5월 광주의 한과, 무자비한 탄압을 한 계엄군에 의해 자행된 나와 같은 선량하고 무고한 사람들의 아픔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특히 평생을 많은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아야 하는 걸 생각해 볼 때 원통하고 분한 생각이 치밀어오르는게 결코 못된 나의 소견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현재 박옥재 씨 부상자회에 가입되어 있고 생활안정 자금 3백만 원을 받았다. 앞으로 배상문제가 있는데 지금까지 치료를 위해 집도 재산도 날려버리고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지도 의문이다.
(조사정리 주경화)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