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심역에서 만나 두어시간 달려온 내연산 입구
경북 포항시 북구 청하·송라·죽장면과 영덕군 남정면의 경계를 이루는 내연산(內延山·930m). 태백준령이 동해안을 타고 내려와 영일만에 이르러 똬리를 튼 모양의 명산이다. 북으로 문수봉(622m)·삼지봉(710m)·향로봉(930m)이 자리를 잡았고 남으로 우척봉(775m)·삿갓봉(716m), 매봉(816m)이 마주 보고 섰다. 그 사이로 깎아지르는 층암절벽의 틈바구니에 의연한 모습으로 고개를 내민 적송들이 인상적이다. 계곡 안으로 염주를 꿴 듯 끝없이 이어지는 12폭포의 향연은 마치 한폭의 동양화를 연상케 한다. 쌍생폭포~관음폭포~연산폭포~시명폭포 등 14㎞의 계곡을 따라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폭포들은 하류에서 중·상류에 이르기까지 전혀 다른 풍광을 보여준다. 곳곳에 풍류객이 기생과 함께 물속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오는 기화대, 신선이 노닐었다는 선일대, 신선이 내려오는 곳이라는 비하대, 신선이 타고 온 학이 깃들었다는 학소대 등이 절벽이나 폭포와 어우러진 모습이 일품이다.
그렇게들 삼삼오오 올라 간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웃음이 끊어지지 않는다.
일주문이 눈에 들어온다.
성과속의 경계이다. 속세에서 배운 모든 것은 버리고 빈마음으로 들어가야 한다.
내연산. 보경사의 역사와 전화.상흔을 품은 노거수
겸재 정선, 추사 김정희 어쩌면 숙종대왕까지 뵈었을 산증인이다.
이제
인격을 부여하고 우리가 보호하여 만대에 전하여야 한다.
보경사 천왕문
아마 현판이 문제가 있는 것 같다. 불이문이 뒤에 위치해야한다. 각설하고 보경사에 대한 글은 2008년 11월에 쓴 아래 나의 답사기로 대신한다.
어제 저녁도 제법 마셨지만 잠이 없는 탓에 일찍 기상하여 보경사를 가기 위해 샤워를 하고 나왔다. 유현이 주차장까지 배웅을 한다. 연안 김씨야 양반이지만 유현네 선조도 투탁, 환부역조, 행화첨간으로 양반 반열에 오른 것은 아닌 모양이다. 예의 범절을, 법도를 쪼매 아는 것을 보니...
보경사에 도착해서 버섯 칼국수로 시장기를 때웠다. 주인 아저씨가 공짜로 동동주 한 잔 따라 준다. 속이 확 풀린다. 식당 이름이 뭐였더라? 포항 문화유산 지킴이(?) 현장 교육 과정의 일환으로 보경사 답사가 있다는 보일러님의 소개로, 정확히는 사인비구의 동종을 볼려는 목적으로 동석했다.
지킴이 양성 과정 답사인 까닭에 무척 세밀하게 진행된다. 작은 비석,비문 하나 섣불리 건너 뛰지 않지만 불량 학생은 언저리만 멤돌았다. 일주문도 조성중이지만 불이문이 천왕문보다 먼저 보인다. 불이문이 뒤에 조성되었다고 보고 싶다.
창건설화와 연혁을 전통사찰정보에서 가져왔다. "보경사는 신라의 지명(智明) 법사가 602년(진평왕 25)에 창건하였다고 전한다. 지명 법사는 중국 진(陳)에 유학하였는데, 그 때 어느 도인에게 팔면보경(八面寶鏡)을 전수받으며 이 팔면보경을 동해안의 명산 명당에 묻으면 동해로 침입하는 왜구를 막고 이웃 나라의 침입을 받지 않으며 삼국을 통일하리라는 말을 들었다.
지명 법사는 귀국하여 이 사실을 진평왕에게 아뢰니 왕은 기뻐하며 지명 법사와 함께 좋은 자리를 찾고자 동해안 포항을 거쳐 북쪽 해안을 올라갔다. 해아현(海阿縣), 곧 지금의 자리에 이르니 멀리 서북쪽으로 오색구름이 덮여 있는 산이 있어 찾아가 보았더니 바로 내연산이었다. 그리고 산 아래 평탄한 곳에 큰 못이 있는데 지명 법사가 보니 바로 그 자리가 명당이었다. 그리하여 그 못을 메우고 팔면경을 묻어 금당을 세우며 절을 창건하였으며, 팔면보경을 묻은 곳이라 절 이름을 보경사라 하였다.
혹은 보경사의 금당탑기에 의하면 또다른 창건 연기설화가 전한다. 신라의 일조(日照) 스님이 중국 당(唐)에 유학 갔다가 귀국할 때였다. 그의 스승 마등(摩謄)과 축법란(竺法蘭) 두 스님이 팔면경(八面鏡)을 내어주며, 동해 끝 남산 밑에 있는 용담호(龍潭湖) 깊은 곳에 이 거울을 묻고 그곳에 사찰을 세우면 불법이 만대에 번성한다고 하자, 일조 스님이 귀국하여 세웠다고도 한다.
마등과 축법란은 본래 서역(西域)의 승려로서 중국으로 들어올 때 십이면원경(十二面圓鏡)과 팔면원경(八面圓鏡)을 가져왔다. 십이면원경은 낙양의 성곽 바깥에 묻어 절을 세우니, 중국에 올 때 백마에 경전과 보경을 싣고 왔다 하여 백마사(白馬寺)라 했으며, 팔면경은 일조 스님을 통해 우리나라에 들어 왔던 것이다.
이렇게 두 가지 창건 설화가 전하지만 어느 쪽이 사실인가는 지금 알 수 없다. 창건주와 창건시기가 다르고, 창건의 과정이 조금 틀리고 있다. 그러나 보경사가 보경이라는 청동 거울을 얻어 땅에 묻어 지은 사찰이라는 점, 그리고 이 보경은 곧 중국 또는 인도에서부터 전래한 보배라는 점은 일치하고 있다.
아마도 여기에서 말하는 보경이란 곧 불법(佛法)을 상징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러한 창건 설화는 1792년(정조 16) 동봉(東峰) 스님이 지은 「보경사사적」에 나온다.
고려시대에 와서는 원진국사(圓眞國師) 승형(承逈, 1171∼1221) 스님이 1214년(고종 1)에 보경사에 주지로 오면서 중창하였다. 이 때 승방 4동과 정문 1칸 등을 중건하고 범종·경(磬)·법고 등도 새로 구비하였다고 한다.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잇달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손꼽는 명찰이 되었다.
조선에서는 특히 1677년(숙종 3)에 3창을 시작하여 18년만인 1695년에 완공하였다. 이 때 대웅전과 적광전·영산전 등을 중건하여 삼존불상과 후불탱을 봉안하였고, 그 밖에 팔상전·명부전·응향전·향적전·국사전·열반당·종각을 비롯해서 국사전 정문, 사천왕상 및 식당 등의 건물을 중건하였고 팔상탱과 각 전각의 단청, 범종 등을 새로 조성하였다. 그리고 산내암자인 청련암과 서운암도 각각 중건되었으니 창건이래 최대 규모의 중건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1725년(영조 1)에는 명부전을 이전하여 단청하였으며 괘불을 조성하였다. 1900년(광무 4)에 산내암자인 내원암을 중수하였다.
근대에 와서는 1916년에서 1921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설산 장욱(雪山壯旭) 스님이 금당의 계단과 탑을 중수하였고, 홍수로 무너진 사찰 오른쪽 일대에 제방을 쌓아 보호하였다. 또한 물방아와 교량을 쌓고 논밭을 사찰에 시주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1922년에 석전 한영(石顚漢永) 스님이 지은 공덕비에 자세히 나와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사찰의 중수는 계속되었는데, 1917년 구태인(具泰仁) 스님이 명부전을 중수하고, 1935년 구태인·윤관하(尹寬河) 두 스님이 대웅전과 상지전(上持殿)을 중수하였다.
최근에는 1977년 벽암 동일(碧巖東日) 스님이 주지로 부임하였는데, 이듬해 적광전의 삼존불상을 개금하는 등 주석하는 동안 여러 차례 절의 중수를 이루었다."
천왕문 숙종조에 건립된 전각으로 팔작지붕이 이채롭다. 대부분 맞배 지붕 아닌가? 길눈이 선생님은 1821년 이종영의 "사천왕문기"에 천왕문 편액을 걸었다는 구절을 언급하셨다. 비파를 든 사천왕이 모셔지지 않은 사례도 처음(?)접하는 듯하다.
보경사 답사시 놓치지 않아야 하는 포인트가 천왕문과 적광전 신방목의 사자상이다. 신방목은 문짝을 고정하기 위해 문짝 양옆으로 세우는 문설주 앞뒤로 짧은 각목을 받치는 것을 말한다.
고건축의 요소인 신방목은 보경사의 사자. 동화사 금당암 극락전의 태극 문양으로 주로 표현되며 벽사와 길상의 상징이다. 세월이 흘러 사자 모습 보다는 집토끼 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친근하다. 절집 천왕문을 드나드는 사람이 악한 마음을 갖겠는가?
적광전 앞 석탑. 보경사 금탑기 명문에 1023년(고려 현종 14)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금당탑(金堂塔)’이라고도 부른다. 기단의 네 면과 각 층 탑신부의 양쪽 모서리에 우주를 조각하였고, 낙수면은 완만하며, 전각의 반전도 보인다.옥개 받침은 1.2층은 4개, 그 이상은 3개, 상륜에는 노반과 복발이 남아 있다.
초층 탑신 전.후면의 문비에 자물쇠와 문고리가 뚜렷하다. 그냥 스쳐 지나기만 했는데 교직에 계시는 분답게 어떻게 열고 거는가에 대해 설왕설래한다. 초교4학년 시험에도 기출제되었다고 한다.
김천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예천 한천사에서 출토된 실물이 전시되어 있으니 우리님들 훗날 유심히 관찰하길 바란다.
적광전. 보경사 금당탑비에 1677년에 금당과 법당을 중창하였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적광전은1677년에 지은 것임을 알 수 있다.(금당은 적광전, 법당은 대웅전으로 추측한다). 흔치 않은 외벌대 기단,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2칸, 겹처마, 다포계 공포, 연등천장이다.
방형 주초위에 두리기둥을 세워 천원지방의 상징성도 갖추었다. 적광전은, 창방과 평방, 다포계, 겹처마 등 팔작지붕의 특징이 보이듯이 초기에는 팔작지붕이었다고 한다. 박공판에 가리웠지만 도리가 9개가 노출되어 있는데도 안내문에는 5량가라고 설명해 놓았다. 9개면 9량가가 맞을텐데...
적광전. 비로자나불과 보현 문수보살, 후불탱, 그 밖에 조선 후기에 만든 원패 2점과 1981년에 조성한 신중탱이 있으며, 비로자나불좌상은 이 전각의 창건시 함께 조성한 듯하고, 후불탱은 1742년(영조 18)에 조성하였다고 한다.(스님의 기도에 방해가 되지 않기 위해 유심히 보지 못 했다)
신방목 사자상. 유심히 보면 방울을 달아 고양이처럼 보이기도 하여 애시당초 벽사와는 거리가 멀고, 스님의 하얀 고무신만큼 정겹기만 하다. 신발이 놓인 석조부재가 문얼굴 하인방을 지탱해주는 고맥이돌이다. 재질은 내연산에서 나는 옥석이라고 알려져 있다.
보살님. 용마루 청기와는 무엇이지요? 글쎄 의미를 모르겠습니다. 스님도 모르신다고 한다. 크게는 금당을 불탑으로 상징하여 상륜부처럼 조성(표충사에는 상징성과 피뢰침 용도이다)되거나 불사에 공이 큰 사람의 이름을 새긴 기와를 올리며, 벽사의 상징, 비보의 목적으로 장식한다.
안동 봉정사 대웅전 용마루에는 엘리자베스 여왕 방문기념 사인이이 된 청기와가 있다.(태조 왕건과 공민왕도 들렸지만 역사로만 남아 있는데, 영국여왕의 수결 기와는 도대체 누구의 발상인지 모르지만 자랑스럽게 해설하는 해설사가 밉기만 하더라)
참 곱다. 공덕이 들더라도 복원하였으면 좋겠다. 팔각 간주석에 보살상이 새겨진 화사석과 옥개석을 갖춘 부석사 무량수전 앞 석등처럼...
대웅전. 역시 1677년 중창된 전각이다. 적광전과 달리 기단을 높게 조성하였다. 다포계 겹처마 팔작지붕, 앞면 3칸, 옆면 2칸의 규모로 창살은 빗살이며 활주를 받쳤다.
삼존불은 석가여래를 주불로 협시불은 과거불인 연등불과 미래불인 미륵불 이며, 후불탱은 석가모니를 주불로 동방약사여래와 서방 아미타 여래를 봉안 삼계불을 모셨다.
대웅전 구시
보경사 원진국사비. 자료는 전통사찰 정보에서 가져왔다.
원진국사비(圓眞國師碑)는 고려 중기에 보경사를 중창한 원진 국사(1171∼1221)의 생애와 행적을 기록하여 1224년(고종 11)에 세운 비로서 1963년 보물 제252호로 지정되었다. 비문의 글은 당시의 문신이었던 이공로가 지었고, 김효인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 의하면, 비가 완성된 것은 고종 11년(1224)으로 원진 국사가 입적한 지 3년 후의 일이다.
비석은 귀부(龜趺)에 비신을 세우고 이수(栗首)가 없는 간결한 모습을 하고 있다. 비신 윗부분의 양 끝을 접듯이 잘라 놓았는데, 규수형(圭首形)이라 부르는 이러한 모습은 당시에 유행하던 양식이다. 비신의 상단에는 ‘원진국사비명(圓眞國師碑銘)’을 전자체(篆字體)로 횡서(橫書)하였으며 비문(碑文)은 ‘고려국보경사주지대선사증시(高麗國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 원진국사비명병서(圓眞國師碑銘疊序)’로 시작되고 있다."
널찍한 바닥돌과 하나의 돌로 이루어진 귀부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 머리를 하고 있다. 등에는 육각형 무늬마다 ‘왕(王)’자를 질서정연하게 새겨놓았으며, 등 중앙에는 연꽃을 둘러 새긴 네모난 받침대를 조각하여 비신을 끼워두게 하였다. 비신의 둘레에는 덩굴 무늬가 장식되어 있는데 이 역시 고려 중기의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원진국사 부도. 사진과 자료는 문화재청에서 가져 왔다.
이 부도는 고려< 高麗 > 고종< 高宗 > 때 조성< 造成 >된 것으로 당시의 일반형 부도 형식과는 다른 형태를 지니고 있는 부도이다. 부도의 구조는 8각원당형< 八角圓堂型 >으로 장대석< 長臺石 >을 이용하여 방형< 方形 >의 탑구< 塔區 >를 마련하고 그 중앙에 지대석< 地臺石 >을 놓아 탑기< 塔基 >를 마련하였다. 하대석< 下臺石 >은 8각의 석재< 石材 >를 3단으로 쌓았는데, 밑의 2단은 표면에 조각장식< 彫刻裝飾 >이 없고 상단의 1석에만 복련석< 復蓮石 >으로 상면에 단판연화< 單瓣蓮華 > 32엽< 葉 >이 조각되어 있다.
중대석< 中臺石 > 또한 8각으로 각 모서리< 隅 >마다 기둥< 柱 >을 나타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상대석< 上臺石 > 역시 8각이며 중앙에 있는 1단의 받침을 중심으로 32엽의 단판연화를 돌려서 앙련< 仰蓮 >을 삼았는데 특이한 예이다. 상대석 위에는 높직한 괴임을 갖추고 8각의 탑신< 塔身 >을 받고 있는데 탑신은 매우 높아져서 8각형의 돌기둥과 같이 보인다. 탑신의 각 모서리에도 기둥을 조각하고 있으나, 1면에만 문짝형을 조각하여 나타냈다.
옥개석< 屋蓋石 >도 8각인데 밑면에는 모서리를 향해 중심부에서 뻗은 융기선< 隆起線 >이 있을 뿐 다른 장식은 없다. 또한 상면의 경사는 완만하여 전각< 轉角 >에는 귀꽃을 장식하였으며, 추녀는 두터운 편으로 전각부에 이르러서는 현저한 반곡< 反曲 >을 보인다. 상륜부< 相輪部 >는 8엽연화< 八葉蓮華 >의 앙화< 仰花 > 위에 구형< 球形 >의 복발< 覆鉢 >이 놓이고, 다시 앙화형의 한돌을 놓은 다음 보주< 寶珠 >를 얹고 있는 완전한 형태를 갖추고 있다.
특히 이 부도는 탑신이 지나치게 길고 큰 탓으로 기본적인 고려부도 형태에서 벗어나 안정감이 결여되어 있으며, 간략하고 섬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같은 경내< 境內 >의 원진국사비가 고려 고종 11년(1224)에 건립되었다는 것을 보면, 부도 역시 이때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겠으나 양식과 형식 그리고 수법상으로 보아 좀 더 시대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한다.
보경사 영역을 크게 3구역으로 볼 때 가장 상단 영역의 전각 모습이다. 팔상전.산신각.원진각.영산전,방향을 틀어 명부전이 배치되어 있다.
원진각.조사전인 셈이다. 자료는 사찰정보에서 가져 왔다. 원진 국사의 상과 영정을 중심으로 고승 16명의 영정을 봉안한 전각으로, 맞배지붕에 앞면 3칸, 옆면 1칸의 규모를 하고 있는 조선시대 후기의 전물이다.
봉안된 영정은 전부 1980년과 1981년 사이에 조성하였는데 주인공은 원진국사를 비롯하여, 지명법사(智明法師, 6∼7세기)·청허선사(淸虛禪師, 1520∼1604)·송계선사(松溪禪師, 1630∼1694)·사명대사(四溟大師, 1544∼1610)·환허선사(喚虛禪師)·오암선사(鰲巖禪師, 1710∼1792)·마점조사(摩岾祖師)·연파선사(淵坡禪師)·신파선사(神坡禪師)·설산선사(雪山禪師)·영월선사(影月禪師)·은처선사(隱處禪師)·동봉화상(東峰和尙)·설월선사(雪月禪師)·영호선사(暎湖禪師) 등이다.
오늘 답사 주목적이든 서운암 동종은 끝내 친견치 못했다. 아직도 인연이 아닌 모양이다. 참고로 사인 비구가 조성한 동종은 서운암을 비롯 문경 김룡사.홍천 수타사.안성 청룡사.서울 화계사. 양산 통도사.의왕 청계사. 강화 동종이 있다.
옴 마니 반메홈(그대 가슴에 연꽃같은 진리의 보석이 피어 나기를...)
사진과 글은 문화재청에서 가져왔다. 포항 보경사 서운암 동종은 지금까지 알려진 사인비구(思印比丘)의 주성 종 가운데 조성년대(造成年代)가 가장 앞선 것으로, 비록 종의 규모는 작지만 사인비구의 초기 종 연구에 사료적 가치가 있다. 둥근 고리모양의 종뉴(鍾뉴)를 갖추었으며, 입상대(立上帶)에 이어 마련된 상대(上帶)를 비롯 네모꼴 유곽(乳廓)과 하대(下帶)가 잘 남아있다.
바람이 센가? 마음을 다스리지 못하는가? 차가운 겨울. 풍경이 요란스럽게 운다.
서운암 동종, 서운암 부도와 후불탱도 보고픈데 인연 지을 날은 언제인지...
보경사. 잊을 수 없지 왜? 이세상에서 가장 예쁜 우리 딸내미가 보경이거든...
참 잘난 중생이다!!!
2008.11.23
다시 2010년 8월 28일로 되돌아 내연산을 올라보자.
삼법인을 상징하는 듯한 3그루 소나무.
범부가 어찌 깊은 의미를 잡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 제행무상(諸行無常)
인생사 무상하다는......
연산폭포 까지 왕복했다.
햇볕도 구름에게 자리를 내어준 길
스님들의 포행 마냥
물소리, 바람소리 벗하며 걷는다.
길 옆으로는 명경지수의 담(潭)과 소(沼)가 파노라마로 이어지고
우리네 민초들이 그냥 범할리가 있겠나요?
민간신앙
그래요 자연은 늘 경외의 대상이었다.
잠시 출입을 허락해주십시요.
이리하여
산과 사람은 둘이 아닌 하나가 되는 겁니다.
천리먼길 이곳 까지 행차하신 숙종 임금이 남겼다는 싯구절이다.
봄잠 날 새도록 모르는데
곳곳에 우짖는 새소리,
간밤에 비바람 소리 들리더니
꽃은 얼마나 저버렸는가
처음 길 손을 맞이 하는 상생폭포
산행은, 여행은 뚜벅이어야 한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은 그런 자유로움이 더욱 산행의 맛을 배가 시킨다.
보현 폭포
무풍폭포
관음폭포 앞 단애
관음폭포
단체사진과 연산폭포 사진은 편집하면서 영구 삭제하는 우를 범했다.
다시 갈 수도 엄꼬 ㅎㅎㅎ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친구들아!!
나 참 착하지???
겨우 한 장 건진 연산폭포
겸재 정선이 57세 때(1733년) 그린 내연산 용추
상. 우리 단체사진의 배경 연산폭포
중. 사다리, 구름 다리가 놓인 지점
하. 관음폭포
선비들이 쉬는 곳이 관음폭포 앞의 너럭바위
뭐꼬?
개밥의 도토리
폭탄???
산악인, 예술인, 도인
그의 이름은 도병기
유장호
친구야.
이뿐 네얼굴 담엔 잘 찍어줄게
참 좋지?
그쟈?
겸재 정선이 찬탄하며 붓으로 말한 그 봉우리들인가?
정상주.
너희들은 뭐니?
월남전 참전군인처럼 머리에 위장잎을 두르고 ㅎㅎ
막거리.쇠주.맥주
정겹지요?
이사진 보고 참여할 생각 안나면
에혀!!!
친구들아 함꾸네 모디서 댕겨보자!!
오늘도 인기절정. 임승환표 돼지껍데기 무침
서운암 부도전
조선후기 석종형 부도들이 줄지어 있다.
소박한 부도와 한적한 분위기가 오감을 휘젖는다.
지난 시절 이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도 생각나고......
休
간지럼 나무
보경사.고요(1) 정(靜)
보경사. 고요(2) 적( 寂)
보경사. 고요(3) 요(寥)
기다림
마중
요란스런 사하촌
절집을 찾는 객의 정신줄을 흔들어 놓더니만
이제는 별별 상혼이 판을 친다.
아이구 부러버라!!! ㅋㅋ
애마(1)
애마(2)
청하면 청진2리 바닷가
상위의 모든재료가 자연산이라고 주인장은 자랑이 한창이다.
맛집 기행도 놓칠 수 없는 즐거움
시간이 아쉬울 뿐
고장난 벽시계는 갈 줄 모르고 ㅎㅎ
1호차 승탑자는 의미를 알겠지?
창숙이가 가져온 초화주!!
중채야!! 빈병을 무얼 그리 유심히 보니?
지난밤에 효과 보았냐?
오늘도 어김없이 영화 촬영중인 친구가 있다. ㅎㅎ
산행의 끝은
한민족의 후예 답게 가무로 이어졌다.
공식적인 2차는 처음이었나?
앗~싸!!
살리고 살리고
좋고 좋고
돌리고 돌리고
그렇게 하루를 보냈습니다.
일망무제, 망망대해의 바다처럼 우리의 앞날도 늘 순탄하고, 건강한 나날이 되기를 빌어 봅니다.
2010.08.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