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동 점묘點描
이생진 시인
1. 월요일
월요일의 인사동은 한산하다. 주말 연휴의 북새통에 거리 전체가 녹아떨어진 것이다.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도 활기가 없다. 이런 시간에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시를 읽는다는 것은 무리다. 화랑들도 이 시각엔 문을 닫고 다음 전시 준비를 하기 일쑤다. 그러나 이런 시간이라도 시를 위해 이용해 보라고 장소를 내주는 이가 있다면 그건 정말 고마운 사람이다. 박희진 시인과 나는 이처럼 버려진 시간에 버려진 곳에서 시낭송을 시작했다. ‘열 명, 아니 다섯만 있어도 시를 읽겠다’는 각오로 시작했다. 늙은 시인의 최후의 발악(?)일 수도 있다. 우리는 시를 읽기 일주일 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엽서를 띄운다.
‘저희들은 매월 마지막 주 월요일에 인사동에서 시낭송회를 열고 있습니다. 시간이 되면 인사동 길을 걸으실 겸 저희들에게 들러 주세요. 이것으로 안부를 대신합니다.’
인사동에서 시를 읽기 시작한 지 7년, 40여 석의 카페(보리수)가 달마다 꽉 채워지니 신 기하다. 이제는 언제까지 할 거냐가 문제다. 하루는 이런 말을 했다. 둘 중에 누구든 80이 될 때까지만 하자고. 하지만 두 사람 다 80에 육박해 있다. 하나는 79, 하나는 77. 그럼 내년(2008년)까지만 하고 그만 두겠다는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면 인사동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 마음 섭섭해진다.
처음엔 다달이 보내는 엽서의 힘이거니 했는데 지금은 온라인 덕이 더 큰 것 같다. 그 보다 절대적인 인력(引力)은 역시 ‘재미’에 있다. 만나는 재미와 듣는 재미, 보는 재미와 무엇인가 가슴에 담아가는 재미. 7년이라는 세월에 서로 낯이 익어진 사람들의 만남, 아니 그보다 전혀 새로운 만남, 또 새로운 만남이 인사동 한복판에서 시라는 매개체로 이뤄진다는 것은 정말 아름다운 일이다.
청계천 물줄기를 따라 광화문 입구에서 시작해서 종로로 들어서자 방향을 바꿔 인사동으로 들어서는
물결과도 같다. 이것은 물결이 아니라 도심의 인파人波다. 더욱이 일요일 인파는 제방을 무너뜨리고 사람의 밀도가 조밀한 데로 파고드는 물결이다. 바다 물결만 보고 살아온 내가 이 인파를 보니 환장하겠다. 하지만 월요일은 다르다. 가뭄에 강바닥이 보이는 인상이다. 이렇게 갈라진 강바닥에 물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 시민의 갈증을 시로 적 실 수 있는가. 어림없는 소리다. 그러나 그런 시를 가지고! 열을 올리겠다는 것이 우리 두 늙은이의 이상이다. 헌데 7년 동안 그것이 가능했던 것은 무슨 힘일까. 열정도 열정이지만 끊임없는 시민, 시를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이다. 그리고 시와 더불어 평생을 살아온 우리들의 말년에 나머지 열정을 쏟을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거. 정말 행복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시 때문에 인사동을 기웃거리는 사람을 만나면 반갑다.
내가 섬에서 인사동으로 돌아온 것은 섬에서 시가 필요했듯이 도시 한복판에도 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시는 자연이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필요로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섬에 미치듯이 도시에서도 시에 미치는 일, 나는 인사동을 찾을 때마다 고흐의 열기 같은 것이 없나 하고 화랑을 누빈다. 내게 모자라는 것, 내가 갈구하는 것, 그것을 나는 섬과 인사동에서 찾느라 애를 쓴다. 도시가 가로막고 있는 시의 장벽을 허무는 것이 나의 소원이다.
2. 인사동 막걸리
막걸리를 마시러 간다. 인사동 학고재 골목, 안국동 로터리에서 인사동으로 들어가는 첫째 골목, ‘사천(泗川)’집을 지나 ‘귀천歸天’ 그리고 ‘인사동 사람들’을 지나 다음 집이 전통찻(막걸리)집 ‘흐린세상 건너기’다. 이곳 막걸리 맛이 괜찮다는 소문을 송상욱 시인에게서 들었다. 주방까지 합쳐 여덟 평 될까? 테이블 네 개, 정말 좁은 공간이다. 그러나 막걸리도 좋지만 어지러운 도심에 이런 오두막집이 있다는 거, 뭔가 인사동 시낭송과 통하는 데가 있어서 좋다.
벽에는 색 바랜 모딜리아니의 그림 ‘잔 에뷔테른(1919)’이 걸려 있다. 물론 복사판이지만, 모딜리아니가 죽기 1년 전에 그린 목이 긴 아내의 얼굴이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눈물이 난다. 모딜리아니가 객혈로 쓰러져 자선병원에서 떠난 이틀 후 이 미모의 여인, 잔 에뷔테른은 친정집 옥상에서 뛰어내려 모딜리안의 뒤를 이은 것이다. 임신 중의 자살은 이중의 아픔이 남는다. 이들의 서러운 이야기는 모딜리아니가 그린 얼굴만큼이나 많다. 나는 이 주점(찻집)에 들를 때마다 옆 사람에게 잔 에뷔테른의 아픔을 호소하듯 이야기하는 버릇이 생겼다. 모딜리아니도 위트릴로와 함께 몽마르트르의 골목, 좁은 주점에서 술을 마시고 밤늦도록 헤맸던 화가들이다. 그들이 마신 술은 ‘압생트*였지만 나는 지금 막걸리로 흐린 세상을 달래고 있다.
‘흐린세상 건너기’의 좁은 공간에는 피아노가 있고 벽에는 실레**가 그린 누두 비슷한 낙서 그림이 즐비하다.
이렇게 좁은 공간에 세탁기며 의자며 냉장고에 피아노까지 어떻게 들여왔는지 모르겠다. 그래도 술 맛은 일품이다. 막걸리 두 잔에 두부 한 점이면 족한데 그것만 청하기가 미안해 누군가 하고 함께 와야 했다. 인사동에 오면 막걸리 생각, 막걸리 생각을 하면 송상욱 시인인데 그는 나에게 이곳을 가리켜 줄 무렵 술을 끊었다고 했다. 그도 서러움이 많은 시인인데 기타 하나로 목구멍을 달랠 수 있을까? 그를 끌고 오기 위해서 나는 ‘인디아’집 3층으로 갔다. 그는 여전히 연탄재에 붉은 장미꽃 한 송이를 꽂아놓고 혼자 있다.
“아직 술을 안 하시나” 하고 물었더니, 히히 웃는다. “그 집 술 맛이 변했어, 사람이 변하면 만나기 싫듯이 가기 싫어 졌어” 한다. “아니 내가 보기엔 괜찮던데” 하고는, 그를 끌어내려 ‘흐린세상 건너기’로 와서 마주 앉아 첫 잔을 들었다. “어허, 술 맛이 돌아왔어” 하며 놀랜다. 반가웠다. 다시 우정의 물꼬가 트이는 것 같았다. 두 잔이면 족한 내가 넉 잔을 마시고 흐린 세상을 나왔다. 송시인은 ‘인디아’로 올라가고 나는 안국역 지하로 내려왔다.
* 압생트 : 고흐, 모딜리아니, 위트릴로 등이 즐겨 마셨던 68도짜리 양주.
** 실레 : 에곤 실레(1890-1918), 28세의 나이로 죽은 독일 표현주의 화가.
3. 이애주의 춤
인사동에 볼꺼리가 많은 날은 수요일이다. 화가나 조각가들에게 생기가 도는 날이다. 대개의 화랑은 새 작품을 내걸고 첫 손님을 맞느라 겸손해지는 날이다. 오늘(2007년 1월 7일)은 인사아트센터에서 ‘황해도 진오기굿’이 펼쳐지는 날이다. 오후 2시에서 4시까지, 사진가 김수남*의 일주기를 맞은 작품전과 그를 위해 굿판을 벌이겠다는데 이게 인사아트센터 지하와 지상 1,2층을 떠들썩하게 만든 것이다. 황해도 진오기굿. 주무는 김금화…….
김금화는 현존하는 무당가운데 가장 공연성이 뛰어난 무인으로 1981년 채희아 내림굿 촬영을 계기로 긴 세월 인연과 신뢰를 쌓아왔다. 1985년 김금화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진오기굿을 했을 때 사진을 찍은 사람이 김수남이다. 동생처럼, 그리고 같은 굿판 식구처럼 김수남을 아꼈던 김금화는 해가 바뀌면 집에 술 담가 놓았으니 들나물에 밥이나 먹으러 오라고 청하곤 했다. 김수남은 김금화의 탁월한 기량과 큰무당의 면모를 한국의 굿 가운데 ‘황해도 내림굿’과 ‘왕해도 지노귀굿’ ‘옹진 배연신굿’ 등 세 권의 책에 남겨놓았다. 김금화는 김수남의 죽음을 누구보다 애! ! 통해하였고 꼭 그를 위해 진오기굿을 해주고 싶다는 마음을 전해와 이번 공연을 하게 된 것이다. (김수남을 위한 오구/사진 밖으로 나온 예인들)
나는 이 굿을 마룻바닥에 철썩 앉아 보는 동안 ‘저거다, 저거다’ 하고 속으로 외쳤다. 그것은 내가 하고 있는 ‘시낭송’도 일종의 굿이기 때문이었다. 이어진 진도 씻김굿(2월 10일), 제주도 시왕맞이(2월 11일)에서도, 이상순의 서울 진오기새남굿(2월19일)에서도 같은 것을 느꼈다. 특히 내가 낭송하는 ‘황진이’는 뮤지컬보다는 굿 형식이어야 하겠다는 것과 배우이기보다는 무녀라야 쓰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굿에 빠진 게 아니라 언제고 시에 빠져 있는 탓이다. 이 행사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이애주의 넋살풀이춤(2007년2월19일)이다. 그의 명성으로 봐서 두어 시간 전에는 가야 구경할 수 있는 자리를 얻을 거라는 생각에 일찍 집을 나왔다. 인사아트센타에 들어서자 벌써 사람들이 입구를 메우고 있었다.
이애주의 춤의 매력은 무대를 벗어나 사람들과 직접 부대끼는 데 있다. 더욱이 지금 사라져가는 굿판에 뛰어들어 몸으로 부딪친다는 거, 땅을 쳐 울리고 하늘에 손을 뻗어 가슴의 한을 풀어낸다는 거, 그것은 숨김없는 언어다. 그는 몸이 언어다. 아니나 다를까 그가 말한 그대로 ‘온몸의 뼈마디와 피가 섞여 춤이 된다’는 춤, 몸으로 쓰는 시를 아낌없이 보여줬다. 그는 오늘의 넋살풀이춤에서도 두 번씩이나 땅바닥에 몸 전체를 짓찧는 춤을 췄다. 온몸으로 부르짖는 절규였다. 몸으로 소리 내어 읽는 시낭송이었다. 그의 몸에서는 소리가 나지 않았지만 몸 전체가 울림이었다.
1987년 여름 이애주는 <바람맞이> 공연과 이한열의 추도식장에서의 <한풀이춤>으로 민주화와 인간화에 대한 의지를 보였던 그런 춤을 나는 가장 가까운 데서 그의 눈빛까지 놓치지 않고 볼수 있었다. 슬픈 듯 감은 눈에는 춤의 강물이 흐르는 듯했다.
‘오장의 소리를 내고 온몸으로 춤추며 몸과 마음이 하나 돼 무아의 경지에 이르는 영가무도(靈歌舞蹈) 참선법이’라고 하는 그의 춤은 말 그대로 ‘수처작주(雖處作主: 어디를 가나 내가 주인) 바로 그거였다.
현장에 가장 어울리는 춤, 모두를 그 얼에 빠져들게 하는 춤. 그는 다섯 살 때부터 춤을 좋아했다고 한다. 김보남 선생에게 춤의 기본을 익혔고 한영숙 선생을 사사하여 승무 후계자가 된 이애주, 그는 50년 동안 춤만 춰 온 바보라고 했다.
오늘 사진가 김수남 선생의 일주기를 맞아 이애주 교수는 그를 위해 넋살풀이를 췄다. 저승과 이승, 아니 사(死)와 생(生)을 오가는 통화(通話)였다.
이애주 교수는 춤을 다 춘 다음에도 굿(서울 진오기새남굿)판을 떠나지 않고 끝까지 그들과 함께 했다. 그런 점이 그를 더 그답게 했다.
* 2006년 2월, 태국의 한 작은 마을에서 신년 맞이 축제를 촬영하다 급서한 사진가 김수남을 추모하는 전시회가 1주기를 맞아 서울 인사아트센터에서(2007월2월7일~25일) 열렸다. 이 전시회는 한국의 대표적인 다큐멘터리 사진가 김수남의 일생을 조망하는 한편 그의 대표작을 한국과 아시아로 나누어 전시했다.